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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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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6일 09시 01분 등록
* 백범일지 - 김구, 도진순 주해, 돌베게

I. 저자에 대하여

자신의 과거를 잃은 한 사나이. 그는 자신의 직업, 나이, 고향, 심지어는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다. 기억을 찾아줄 유일한 단서인 하나의 가방 속에는 그가 누구인지 더 헷갈리게 만드는 몇 장의 신분증과 여권들. 그 사나이는 영화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터메이텀으로 이어지는 제이슨 본 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 본이다. 그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온 미국의 비밀요원이었다.

우리의 백범 김구 선생도 제이슨 본 못지않게 많은 이름을 갖고 살았다. 태어나면서는 창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 김창수가 되었으며, 원종이 되었고, 김두래가 되었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백범 김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의 변천 만큼이나, 그는 다양한 역할로 변신을 거듭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철혈남아

그가 즐겨 썼다는 휘호 '철혈남아(鐵血男兒)'.

그는 이봉창, 윤봉길과 같은 실천운동가를 가리켜 철혈남아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고 한다. 철혈(鐵血)은 쇠와 피라는 뜻으로 전쟁에서 쓰이는 무기와 흘리는 피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백범이 말한 철혈남아는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이나 이론이 아닌 몸을 던져 수행하는 실천적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김구 그 자신은 철혈남아였을까? 물론 자신은 그것을 부인할 것이다. 기나길 세월을 독립운동에 바쳤으나, 자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며 한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 조국의 독립이었으니, 결국 조국이 완전한 독립을 이루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평생을 바쳐, 말이 아닌 몸으로 부딪히며 실전에서 독립운동을 해 온 그 역시 철혈남아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증거는 '백범일지'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평생 독립운동가로 살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듯이 보였던 사건, 치하포 사건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가 치하포에서 왜인을 죽이는 장면은 그야말로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결심이 서면 망설임 없이 실천하는 사람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왜인을 죽이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기 전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문,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답, "그렇다."
문,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이 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교수형까지 언도받고, 고종의 판결보류로 미결 상태에 있던 김구는 자신이 죄값을 치르는 것은 결국 왜인만을 즐겁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탈옥을 결심한다. 그가 탈옥을 결심하고 실제 탈옥에 성공하는 과정 또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실천가인지를 증명한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범을 만든 사람들

백범 김구. 그가 이 시대까지 회고되는 인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뒤에서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뒷바라지 해 준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독립운동하는 자식을 둔 어머니답게 곳곳에서 강인하고 굳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어머니의 강인한 모습은 마치 또 다른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보는 듯했다.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네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라고 말할 만큼 아들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김구가 어린시절 상놈의 출신으로 양반이 되겠다는 아들을 위하여 스승을 모셔다가 공부할 환경을 꾸며주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는 또 어땠는가? 김구가 옥살이를 할 때는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아들이 한 일을 탓하기는 커녕,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다는 말을 건네는 어머니였다. 또한 자신의 생일에 음식을 준비하려는 아들과 동료들에게 차라리 돈으로 달라하여, 그 돈으로 왜인을 죽이라고 권총을 사다주는 어머니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돈 한 푼 쓰기를 아까워하며, 평생 자신의 손으로 모든 일을 해낸 분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이를 이해하고 이를 지지해주었던 어머니였다. 그런 그의 아들이 어찌 나라는 위하여 큰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김구 자신은 이러한 부모님에게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을 일생토록 한탄하였다.

연보

1893 ~ 동학 입교
1895 ~ 김의언 의병단 가입
1894 ~ 해주에서 동학혁명 지휘
1895 ~ 명성왕후 시해한 일본군 살해후 사형 선고
1910 ~ 신민회 참가
1911 ~ 105인 사건으로 체포 17년 형 선고
1914 ~ 농장 농감으로 농촌계몽 운동
1919 ~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1926 ~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 조직
1932 ~ 일본왕 사쿠라다몬 저격사건
1932 ~ 상하이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사건
1932 ~ 이봉창, 윤봉길등의 의거를 지휘
1933 ~ 난징에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
1935 ~ 한국 국민당 조직
1940 ~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설치
1944 ~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1945 ~ 대한민국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
1948 ~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8 ~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1948 ~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제창
1949. 06 ~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백범 출간사

13)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14)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알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15)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민족에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15)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15)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 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15)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상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7)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29)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34) 아버님이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다.

2. 시련의 사회 진출

39)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53) "이용선은 나의 지휘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다. 만일 이용선이 죽을죄가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죄이니 나를 총살하라"고 큰소리로 호령하였다.

58) 나의 관찰로도 그(안태훈 진사)는 퍽 소탈하여 무식한 아랫사람들에게도 교만한 및 하나 없이 친절하고 정중하여 위아래 모두 더불어 함께 하길 좋아하였다.

58)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61)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름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63)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께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63)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3. 질풍노도의 청년기

96)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97) 곁에서 보는 사람 생각으로는 몇 번만 더 뜨면 그 밥을 다 먹겠구나 하도록 보기 좋게 한 두어 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먹고 싶던 원수를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100)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100)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파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100)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103) 나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내 옆에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가 없었다. 이창매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 나와 나를 보고, 너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책망하는 듯싶었다.

106)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107)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가 다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는 데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했던 것은, 내무부에 가서 대관들을 보고 내 뜻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분명히 말하고 죽으리라.

108)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 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109) "전에는 내가 아무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나에 대한 대우를 강도로 하나 무엇으로 하나 잠잠히 입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정당하게 내 뜻을 발표하였음에도 아직도 나를 이다지 홀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놓고 그것을 감옥이라 하여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 도망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였던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하고, 또 내 집에 와서 석 달여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의 무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느냐?"

114) "나는 벼슬을 못하는 상놈이기 때문에 작은 놈밖에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을 것이다."

115)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118)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

12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4. 방랑과 모색

137) 2, 3년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감옥세계에서만 생활하다가 넓은 세상에 나와서 가고 싶은 곳을 활개치며 나노라니 심신이 상쾌하였다.

171)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니 유완무란 사람이 참으로 나를 위하여 그처럼 성의를 썼다면 만나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나를 찾기 위해 정탐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묘한 계책이랄 수 있었다.

171)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치 알고도 끝까지 피하거나 종적을 감춘다면 그 역시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72) "나는 유완무요, 오시느라 무척 고생하셨소. '남아가 어디든 있든지 만날 수 없으랴'는 말이 오늘 창수 형에게 비유한 말인가 보오."

173) 오늘 비로소 뵙게 되었으나, 세상에는 아주 조그마한 일도 크게 부풀려 전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소문과 실물이 용두사미인 때가 많고, 저 역시 소문과 달리 졸렬하기 짝이 없으니 매우 낙심될 것입니다.

178)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의 경국대강을 보고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옳을 것입니다. ...(중략)...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하략)"

179)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180)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181)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를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를 다리 살을 배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182) 조객 오는 것조차 괴로워, 허벅지살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했다.

5. 식민의 시련

203) 만일 양반이 살아나 국가가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 더 받더라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어났다.

203) 내 집안이 상놈 중의 상놈이지만 그대는 양반 중의 상놈이니, 상놈이기는 마찬가지라 생각되었다.

204) 구식 양반은 군주 일개인에 대한 충성으로도 자사손손이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225)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

228)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229) 나는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로 방안에 들어와서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치 어미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246)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

247) 나는 실로 말 한마디를 못하였다. 그러다 면회구가 닫히고, 어머님께서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

248) "당신, 일본 법전을 보지 못했소? 천황이나 황후가 죽으면 대사면이 내려 각 죄인을 방송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우리 수인들은 머리를 숙이고 하느님께 '메이지란 놈을 즉사시켜 줍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252) 옥중의 고통은 여람,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여름철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증기가 피어올라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되면 방안으로 무소대를 들이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자도 여러 번 보았다. 수인들이 가장 많이 죽기는 여름철이다. 겨울철에는 감방에 20명이 있다면 솜이불 네 장을 들여주는데, 턱 밑에서 겨울 무릎 아래만 가려지므로 버선 없는 발과 무릎은 태반 동상이 나고, 귀와 코는 얼어서 극히 참혹한데, 발가락 손가락이 물러 터져 불구가 된 수인도 여럿 보았다.

254) 그리하여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264)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265) "일본법에도 신앙 자유가 있고, 감옥 법에도 수인들이 불교만 신앙하라는 조문이 없는데, 어디 근거하여 이같이 무리한가? 일본의 눈에는 도인권이가 죄인이라 하나, 신의 눈에는 일본인이 죄인 될지도 알 수 없다."

265) "수인의 상표는 개전하는 상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인데, 나는 당초에 죄가 없었고, 수인이 된 것은 일본 세력이 나보다 우세한 것뿐이거늘, 상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265) "홀로 우뚝 솟아 넓은 도량을 펼치고, 천하를 걸어감에 누가 나를 따르랴"

267)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6. 망명의 길

273)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 미만의 어린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 하더라."

286) 해주 검사국과 경성총감부에서 각 지방 보고를 수집하여, '김구'라는 책에 나의 일언일동을 상세히 기재하였을 것이지만, 어떤 정탐이라도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보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나의 몸이 본국을 떠나 상해에 도착한 줄 알고 나서, 비로소 그 사실이 왜에게 알려졌다 한다. 나는 이것 한 가지 일을 보아도 우리 민족의 애국 정성이 족히 장래에 독립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예견한다.

288) 대개 사람이 귀(貴)하면 궁(窮)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289)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옛날에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다지만 나는 '우궁문'을 짓고 싶으나 문장이 아니므로 그것도 할 수 없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90)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님에게 너무도 죄송하여, 내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295) '백범일지' 상권은 53세 때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 시간을 들여서 기술한 것이다. 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상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 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296)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8) 어떤 사람이 나이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납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사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로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23)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5)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352) 문영이란 조상은 면화 씨를, 문로란 조상은 물레를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하나, 그 나머지는 말마다 오랑캐라 지칭하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명대 시절 우리나라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 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352)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353)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67)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367)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한수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셔 그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371)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는 것보다 못하네."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378)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379)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6. 해방 전후의 대륙

397) 군대식사 한 가지만 왜병과 비교해 보더라도 왜적이 질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 하겠다.

406) 우리가 6~7년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나의 소원

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라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424) 우리나라가 독립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5)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로 한 수풀을 이루고 살고 있다.

425)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중략)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426)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427)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과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는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430)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431)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아.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431)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을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호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마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III. 내가 저자라면

유서

'백범일지'는 자서전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자신이 쓴 일기였으며,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일기를 기반으로 김훈이 쓴 소설이었다. '백범일지', 순수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는 목적을 갖고, 김구 자신이 쓴 자서전이다. 그렇다면 김구는 왜 자서전을 썼을까? 그 이유를 책의 첫머리, '백범 출간사'에서 밝히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13p)

*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6p)

상권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지난날을 알리기 위함이며, 하권은 타국에 있는 동포들에게 민족운동에 대한 자신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대상은 달랐으나, 상권, 하권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유서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 자서전이라 불리는 '백범일지' 이 책은, 한 독립운동가의 아주 긴 유서였던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남은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마지막 유언이기에 그 내용은 더욱 진실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조국의 독립을 잊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과 소감을 후세에 남겨 독립운동에 활용할 것을 걱정했던 그의 모습 속에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실감할 수 있다.

소설같은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이 자서전이라는 것을 깜빡할 때가 있었다. 철저히 김구 자신이 자신의 기억에 의지해 쓴 글이니 그 정확성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는 그 상세한 사실적, 감정적 묘사만으로도 그것이 실화임을 잊게 만들었다. 어찌 그 많은 일상들을 그리 상세히 기억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찌 또 그렇게 재미나게 풀어썼는지 놀라웠다.
그의 일생이 그리 평탄하지 않으니, 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실화라기보다는 때때로 소설 속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또한 윤봉길, 이봉창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현실감 있게 접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나의 이러한 느낌을 배가시켰다. 자서전임에도 소설 못지 않은 재미를 안겨주는 책이었다.

범인의 자서전

백범은 책 속에서 누누이 자신이 남들과 다르지 않은 범인(凡人)임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했던 일은 이 나라 민족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기에 자신이 자서전을 남기는 이유도 무엇인가 남보다 잘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자신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한다. 자신의 호를 백정(白丁) 범부(凡夫)라는 뜻을 가진 백범으로 고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책을 읽는 내내,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한 영웅의 이야기였다. 그가 겪은 사건들을 그가 말하는 것처럼 범인이 겪을만한 것들이 아닌 것 같았다. 시대적 배경과 상황이 그러했던 탓도 있겠지만 결코 평범한 삶은 아니었다.

이토록 태생은 평범했으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김구 또한 그의 어린 시절은 상놈의 신분으로 평범하다 못해 남들만도 못한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어린 시절의 그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의 삶은 소설 속의 허구인지 실재인지 헷갈릴 만큼이나 다채롭고, 위험하고, 험난하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다.

이처럼 사람마다 삶의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 그 누구의 태어남이 특별하지 않겠냐마는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모두 그렇지 않은 듯하다. 누구는 김구와 같이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삶을 살아가고, 누구는 그저 평생을 평범하게 살다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가진 철학? 신념? 왜 그 시대에 김구는 자신이 평범한 범인이라고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살았던 범인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일까?

그에게 조국이란 무엇일까?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겐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가장 소중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건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신념, 가치, 철학 등으로 불리는 무형의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가장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몸과 목숨일 수도 있다
.
백범 김구 뿐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조국의 독립이었다. 도대체 조국의 독립이 무엇이기에 그들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그것이 더 가치 있었던 것일까?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혹은 지금 이 시대에도 다양한 형태로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휘둘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며 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매운다.

김구는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신다면,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을 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소원도 우리나라의 독립이라고 할 것이라 했으며, 그 다음 소원도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할 것이라 했다. 김구의 소원은 오직 하나 우리나라의 독립이었다.

지금 우리들에게 나라와 조국은 무엇일까?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이 시대에 이 나라에서 나와 우리는 우리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백범 김구 선생은 나에게 대답하기 힘든, 많은 질문을 안겨주었다.

감동적인 구절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를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를 다리 살을 배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181p)
- 아주 거친 효의 표현. 다음 페이지에는 "조객 오는 것조차 괴로워, 허벅지살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했다.". 이런 구절이 있었다.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 미만의 어린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 하더라." (273p)
- 독립운동가는 자식 또한 남다르게 낳는 것인지, 어린아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한수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셔 그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367p)
- 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이런 어머니가 또 어디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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