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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6일 10시 3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백범 김구

백범의 가계는 안동 김씨로서 신라 경순왕과 고려 김방경 의 후예이며, 파(派)의 시조 익원공 김사형의 21세손에 해당된다. 그의 전대는 조선조에도 계속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방조(傍祖) 김자점의 역모 사건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자 그의 선조가 경기도 고양을 거쳐 해주 서쪽 80리 지점의 백운방이란 곳에 자리잡았다. 백범의 선조들은 낙향 후에 양반의 문화생활은 멀리하고 짐짓 상놈의 행세를 하려고 역둔토와 군역전까지 경작하였다. 이같은 형편에서 이웃 마을의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로부터 멸시를 받아도 제대로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초기 백범의 사상 가운데에 양반에 대한 분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집념이 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문의 형편이 이랬던 만큼 선대에는 불평객이 많았다. 백범의 아버지 순영(淳永)은 4형제중 둘째로 의협심과 정의감이 넘치고 양반에 대한 저항심이 강한 분이었다. 그는 약한 자를 돕고 자주 대변하였으나 그런 일로 양반들의 미움을 샀다. 그가 도존위(면에서 세금을 거두는 자리)의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양반들에게는 가혹하게 공전(公錢)을 거두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자기가 대신 물어낼지언정 더 거두지는 않았다. 그 결과 3년이 못되어 공금에 축을 내고 사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풍 곽씨(이름, 낙원)로 l4의 나이에 열살 위인 신랑을 맞아. 17세 때 난산 끝에 백범을 낳았다. 부모는 백범의 교육을 위해 자기 집에다 서당 선생을 모시기도 하고, 부친의 병환으로 학자금이 부족할 때에는 이웃마을의 서당 훈장에게 간청. 무료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모친은 백범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백범이 옥에 갇혔을 때 옥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뿐아니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백범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仁)과 신(信)을 양육한 자정이며,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 지장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내며, 왜경을 따돌려버린 여성답지 않은 특유의 대담성과 지모(智謀)며, 백범이 일지(逸志)를 쓸 때 그 자세한 연월과 일시를 일일이 자문할 정도로 만년에까지 간직한 총기 등은 임정 주석 백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백범은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 그는 한때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19세기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백범은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계의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백범은 청계동을 찾아온 김형진을 만나 의기투합, 조국 순례에 나선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돌아서 간도땅에 이르러 국경지역 주변에 거주하는 동족들의 어려움을 목도한다. 강계 부근에서는 김이언 부대를 따라 '국모' 의 원수를 갚는 의병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백범은 그가 없는 동안에 고능선의 요청으로 그의 손녀와 약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기뻐하였으나 김치경의 방해로 성혼되지 못했다. 백범은 다시 '방랑의 길'에 올랐다.

이때 국내에서는 명성황후가 '왜놈' 들에게 시해당한 데다가 단발령 시행으로 백성들의 분기가 탱천하여 이곳 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방랑길'에 오른 백범은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주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그가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三浦梧樓)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그 일본인은 '육군중위' 쓰치다(土田)였다.
이 일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백범은 재판을 받으면서 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여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재가로 사형집행은 면했다.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안 백범은 탈옥의 비상수단을 감 행하였다.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에 이르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탈옥에 따른 위험을 감추기 위해서는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은 평안도의 영천사 방주(房主)를 끝으로 일년여 동안의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환속, 귀가하였다.

그에게는 민족을 위한 새로운 구상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즉 그가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와 [세계지지 (世界地誌)] 등을 통해 깨달은 신지식에 의하면,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취했던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민지(民智)를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1902년 부친상을 당한 백범은 그 이듬해 해상(解喪)과 함께 예수교에 입교함과 동시에 구국교육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예수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와 잡학(雜學)에서 시작, 동학•유학•불교를 거쳐 예수교에 정착하는 사상적인 방랑을 경험하였다. 백범은 장연의 광진학교와 봉양학교. 문화의 서명의숙, 안악의 양산학교와 안신학교, 재령의 보강학교 등에서 가르치는 한편 사범 강습회를 열어 교사를 양성, 훈련하였고 '해서교육총회' 를 조직, 학무총감으로 활동하였으며, 환등기를 가지고 황해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왜놈' 원수들을 갚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잠시 진남포 감리교회의 의법 청년회 총무의 일을 맡아 서울에 올라와 상동교회파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을사조약반대 상소운동에 앞장섰고 1907년에는 안창호•전덕기•이승훈 등과 함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백범은 고능선의 손녀와 혼약이 깨어진 후에 결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부친의 거상 중에 여옥을 만나 해상 후에 결혼하기로 했으나 여옥의 죽음으로 불가하였고, 평양 사범강습 중(1904)에 최광옥의 소개로 안창호의 동생 신호를 만나 약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신호 측의 사정으로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해 말에 최준례를 만나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혼하고 최준례를 서울의 정신학교에 유학시킨 후 곧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한국강점을 서둘렀다. 한국인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의 의거가, 12월에는 이재명의 의거가 있었다. 백범은 안중근의 의거로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무혐의로 곧 출감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연말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징역을 언도받았고 수감 중에 터진 '105인사건' 에 걸려 또 2년을 추가받아 17년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1914년에는 17년전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항만 축조공사 등에 강제 노역당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 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는 뜻에서였다.

1914년 인천감옥에서 가석방된 백범은 안악으로 돌아왔다. 출옥은 하였지만 아직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부인이 교원으로 있던 안신학교의 일을 돕다가 신천 동산평의 농감이 되어 농장 내의 소작인들에게 근검절약, 상부상조의 질서를 가르치는 한편, 학교를 세워 자녀교육에 힘쓰도록 하였다. 술과 노름으로 일삼던 그 농장은 백범의 노력으로 희망의 새 동산으로 변화되어 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범은 자유롭게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의 가석방 신세를 생각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망명이었다. 3월 3일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백범은, 1945년 11월 23일 그의 나이 70세에 환국하기까지, 27년간 근대사에서 가장 긴 시간을 버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붙들게 되었다.

<백범 김구 기념 사업회 http://www.kimkoo.or.kr> 의 인용, 발췌하였습니다.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백범 출간사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13p

나는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출판할 것은 꿈도 꾸지 아니하였다. 나는 우리의 완전한 독립국가가 선 뒤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춰지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놓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13p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주셔서, 저마다의 민족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14p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ㅇ르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서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5p

백범일지 – 상권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된 사실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러 지어낸 것은 전혀 없으니 믿어주기 바란다. 20p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앞으로 내 일생이 기구할 조짐이었으니 나의 탄생은 유례없는 난산이었다. 24p

상황이 자못 황급해지자 집안 어른들은 아버님께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 용마루로 올라가 소 울음소리를 내리고 했지만, 아버님은 선뜻 따르지 않았다.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다시 호통을 쳐서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난 후에야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24p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 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30p

어느날 내가 아침도 먹기 전에 그 선생님이 집에 와서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목놓아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작별하고 나서도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 31p

고향에 돌아와 보니 의식주 무엇 하나 의지할 데가 없었다. 친척들이 조금씩 추렴하여 겨우 살 곳을 마련하고 나도 곧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책은 빌려서 읽었으나 먹과 붓이 나올 곳이 없었다. 어머님이 품팔아 김매고 길쌈하여 먹과 붓을 사 주시면 얼마나 감사한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32p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상용문서에나 주력하여라.” 33p

2. 시련의 사회 진출

[상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ㅇ르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39p

설명을 듣고 나는 매우 마음이 흡족하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 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나는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42p

고선생 曰,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2p

고선생 曰,
“만고 천하에 흥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고 망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네. 종전에는 토지와 백성은 가만두고 군주 자리만 보았는 것으로 흥망을 논하였지. 그러나 지금의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강제로 집어삼키는 것이네. 우리나라도 필경은 왜놈에게 망하게 되었네. 소위 조정대관들은 전부 외세에 영합하려는 사상만 가지고, 러시아를 친하여 자기 지위를 보전할까. 혹은 영국이나 미국을, 혹은 프랑스를, 혹은 일본을 친하여 자기 지위를 견고히 할까. 순전히 이런 생각들뿐이라네. 나라는 망하는데, 국내의 최고 학식으르 가졌다는 삼림학자들도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구국의 경륜도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65p

고선생 曰.
“일반 백성들이 의(義)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 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쳐 대궐 안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나라를 제2의 왜국(倭國)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만고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은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충성하는 일사보국(一死報國) 한 가지 일만 남아 있네.” 66p

3 질풍노도의 청년기

‘아비만큼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나 내가 노형보다 아드님에 대해 좀더 알는지 알겠소?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니다. 인중(人中)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가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하시더라. 86p

“제가 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본래 의도는 선생님의 손자사위나 됨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정녕코 선생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 교훈을 마음속에 아로새기고 죽을 때까지 그 거룩하신 가르침을 봉행하기로 마음에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니 혼인을 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혼사는 서로 단념하고 의리로만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89p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고.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100p

옛사람들은 말하기를 “슬프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느라 고생하시었더라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적에도 많은 고생을 하셨고, 또 나를 먹여 살리시기 위해 천중만금(千重萬金)의 고생을 겪으셨다. 불서(佛書)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106p

홀연히 정신이 회복되어 보니, 동료 죄수들이 고함을 치며 죽는다고 소동을 치고 있었다. 그 자들이 내가 죽을까 봐 놀라서 그리 한 것은 아니고, 내가 정신을 잃으면서 몹시 격렬하게 요동을 쳤기 때문에 일어난 소동이었다. 그 후로는 여러 사람의 주의로 자살할 기회가 없었다. 또 나 스스로도 그 뒤로는 병마로 죽든지 원수에게 죽든지 저절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자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열은 내렸으나, 보름 동안 음식은 입에 대어보지 못하였다. 106p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가 다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는 데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했던 것은, 내무부에 가서 대관들을 보고 내 뜻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분명히 말하고 죽으리라.’ 107p

“지금 소위 만국공법(萬國公法)이니, 국제공법(國際公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 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108p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자 신하된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브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109p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 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5p

4 방랑과 모색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世間)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出世間)의 길을 간다. 152p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155p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淸靜寂滅)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156p`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165p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은 교육하여 그들을 건젆나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180p

이야기하는 동안 자연히 신구(新舊)의 충돌이 생겼다. 그러나 고선생 가정에서 외국 물건이라고는 한 가치도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일견 고상하게도 하였다. 하룻밤을 같이 자고, 다음날 하직인사를 하고서 물러나왔다. 어찌 뜻하였으리요? 그때 올렸던 절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그 후에 전하여 들으니, 고선생은 제천 동문의 집에서 객사하였다 한다.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날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口傳心授)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180p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181p

“자네의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183p

5 식민의 시련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 양반들이여!
자기네가 충신 자손이니 공신 자손이니 하며, 평민을 소나 말처럼 여기고 노예시하던 기염은 오늘 어디에 있느냐!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 상놈들이여!
오백 년 기나긴 세월동안 양반 앞에서 담배 한 대, 큰기침 한 번 마음놓고 못하다가, 이제는 재래의 썩은 양반보다 신선한 신식 양반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구식 양반은 군주 일개인에 대한 충성으로도 자자손손이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라고 절규하였다. 204p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215p

나는 간곡히 만류하였다. 장래 대규모의 전쟁을 하려면 인재 양성이 없고는 성공을 기약할 수 없고, 일시적인 격발로는 5일은 커녕 3일도 기약하기 어려우니, 분기를 참고 다수 청년을 북쪽지대로 데려가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당장 급한 일이라고 했다. 매산 역시 뜻은 수긍하나, 자기가 요량하는 바와 다른 점을 발견하고는 좀 만족하지 못한 의사를 가지고 작별하였다. 217p

“네가 어찌하여 여기를 왔는지 알겠느냐?”
“잡아오니 끌려올 뿐 이유는 모른다.”
다시는 묻지도 않고 수족을 결박하여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는 고통을 느꼈으나, 마지막에는 눈 내리는 밤 달빛 적막한 신문실 한 모퉁이에 가로누워 있게 되었다. 얼굴과 전신에 냉수를 끼얹은 느낌만 날 뿐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220p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228p

“관리로서 법률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
하고 내가 반문했더니, 관리를 희롱한다고 미친개 모양으로 분기탱천해서 죽도록 매질하였다. 그러나 왜놈이 나를 뭉우리돌로 인정하는 것은 참 기쁘다.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는 생각을 가슴 깊이 새겼다. 나는 죽는날까지 왜마의 소위 법률이란 것을 한 푼이라도 파괴할 수만 있다면 계속 행하고, 왜마를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오락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 맛보기 어려운 별종생활의 진수를 맛보리라고 결심하였다. 239p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 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명색이야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에 순종하는 백성이 아니라고 인정하여, 종신이니 10년이니 감금하여 두는 것으로도 족히 의병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 남아는 의(의)로 죽을지언정 구구히 살지 않는다고 평일에 어린 학생을 가르치더니, 네가 금일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네가 개 같은 생활을 견뎌 지내고서 17년 후에 장차 공을 세워 죄를 갚을 자신이 있느냐?’ 244p

입당식에는 책임 유사가 정석에 앉고, 자격자를 앞에 굻어 앉히고 입을 벌리라 한 뒤, 칼을 빼 그 끝을 입 안에 넣고 자격자에게
‘위아래 이빨로 칼끝을 힘껏 물라.’
호령합니다. 그리고 칼을 잡았던 손을 놓고 나서 다시
‘네가 하늘을 쳐다보아라. 땅을 내려다보아라. 나를 보아라.’
호령한 뒤, 다시 칼을 입 안에서 빼 칼집에 넣고 자격자에게
‘너는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사람을 안즉 확실히 우리의 동지로 인정한다.’라고 선고합니다.
식을 마친 후에는 입당자까지 영솔하여 예정 방침에 의해 정식으로 강도질 한 차례를 하고, 빼앗을 장물을 신입당원까지 고르게 나누어 줍니다. 몇 차례만 동행하면 완전한 도적놈이 됩니다.” 262p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267p

6 망명의 길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 미만의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하더라.” 273p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貴)하면 궁(窮)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89p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290p

- 하권 –

하권을 쓰고 나서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8p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入城式)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집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298p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98p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07p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제`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310p

그러던 중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復國運動)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 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黨是)로 주창하였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자연 찬동하고 나서서 ‘유일독립당총성회’를 성립시켰다. 313p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이봉창 曰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황을 왜 못 죽입니까?” 323p
이봉창 曰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 생활에 비하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3p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가지고 갈 때 눈물이 니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 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로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325p

윤봉길 曰
“제가 채소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전쟁도 중국에서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께서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331p
윤봉길 曰
“저는 이제부터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 해 주십시요.” 332p
윤봉길 曰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336p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53p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김구 어머님 曰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367p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비통하고 슬프도다! 하느님이 진정 무심하신가. 어린 아들, 어린 딸도 왜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이래 왜구에게 일가족이 도륙됨이 무릇 몇백 몇천 집이랴만, 기미 3.1운동 이래 상해 운동가들이 당한 것에서는 이명옥 군이 당한 비극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노니, 광복 완성 후 이명옥일가를 위해 충렬문을 수안(遂安) 고향에 세워서 영구히 기념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 387p

6 해방 전후의 대륙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런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395p

7 조국에 돌아와서

고국을 떠난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였던 바와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반면 차장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낮게 붙어 있었다. 동포들의 생활 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409p


<나의 소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倭王)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경제상•사회상으로 불평등•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알력•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一点一劃)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喧喧段段)하여 귀일(歸一)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國論),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 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투표•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賢人)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聖人)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大韓)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春風)이 태탕(鋏蕩)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各員)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어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샛문 밖에서
백범 출간사



(3) 내가 저자라면

踏 雪 野 中 去 不 須 胡 亂 行
답 설 야 중 거 불 수 호 란 행
(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때 헛튼 걸음 하지 마라 )

今 日 我 行 跡 遂 作 後 人 程
금 일 아 행 적 수 작 후 인 정
( 오늘 내가 발자국은 후인의 이정표가 되리라 )

작년 2007년 2월 영업조직을 처음 설립하였다. 그리고 어떤 지점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 그리고 고민하였다.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정신과 원칙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선택한 글이 백범김구 선생님의 좌우명이다. 이 글은 서산대사의 선시이기도 하다. 너무나 잘 알려진 글이라 부연설명은 하지 않겠다.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이 판치는 비즈니스 업계이기는 하지만, 정도(正道)의 길을 걸어가고 싶었다. 기업이미지를 위한 윤리영업이 아닌, 실질적이며 진실한 비즈니스 말이다. 성과와 실적을 변명삼아 수단을 합리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난 한번도 백범일지를 완독한 경험이 없었다. 변경연 수업을 통해 먼지에 쌓여있던 백범일지를 다시 펼치게 된 것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 또한 귀중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범 선생이 이 <백범일지>를 탈고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13p

이 책은 백범의 역사이면서, 질풍노도의 근대사이며, 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유서이다. 이 책을 통해서는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매 시기와 사건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필경 백범은 하루하루의 역사를 ‘일기’(日記)라는 형식을 통해서 기록해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기네가 충신 자손이니 공신 자손이니 하며, 평민을 소나 말처럼 여기고 노예시하던 기염은 오늘 어디에 있느냐!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 상놈들이여!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라고 절규하였다. 204p

그는 세상에 분노하였다. 양반에 분노하였으며, 상놈에 절규하였다. 기존의 기득권 세력에 대한 철저한 부정은 억압받고 있는 조국에 대한 한탄이었으리라. 그는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뇌를 감내했는지를 알 수 있다. 흡사 이순신이 절망적인 조국의 현실을 절망으로 극복해 나가려 했던 피끊는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98p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은 모든 영웅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날 때, 적절한 길안내를 담당했던 조력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백범의 경우도 많은 조력자들과 스승들이 있었지만, 어린 시절 그에게는 고선생이 있었다. 백범이 올곳은 신념과 확신 그리고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고선생’이라는 멘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훗날 고선생의 사상과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가장 큰 사상적 영향을 미친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고선생 曰,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게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2p

워낙 유명한 일화이기는 하지만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당당한 외침은 지금도 생생하다. 대학교 시절 아나키스트들의 정갈한 삶에 대해 동경을 품었던 기억이 있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초연할 수 있는 젊음을 접할 때마다, 머리 숙이게 된다. 특히 윤봉길이 마지막 떠나는 날, 백범에게 시계를 건너는 장면은 읽는 이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한다.

이봉창 曰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 생활에 비하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3p

윤봉길 曰
“저는 이제부터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 해 주십시요.” 332p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336p

무엇이 백범과 수많은 열사들을 장렬한 죽음 속으로 행진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신념과 확신 그리고 소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

작금(昨今)의 현실을 조국을 위해 먼저 길 떠난 이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파편화된 우리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혹시 사사로운 이익과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허우적 대는 개인들에게 냉엄한 꾸지람을 주시는 것은 아닐까?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가야 할지 고민덩어리 하나가 던져졌다. 한 번 사는 우리네 인생에서 나 자신을 진하게 불태울 수 있는 천복(天福)이 무엇인지 화두를 던지게 된다.

* 추신 : 리뷰를 올릴까 말까 하다가 올립니다. 참 고민스럽네요. 가슴이 아픕니다. 이렇게 허접한 리뷰를 올린다는 사실에…… 백범선생을 욕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올립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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