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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6일 11시 29분 등록

백범일지 白凡日誌

김구 지음/김혜니 편저/타임기획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백범 김구(1876∼1949)

책을 통해 백범 김구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기에 더욱 궁금했고 알고 싶기도 한 인물이어서 책을 읽는 동안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 상의 위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먼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증조할아버지 대 정도의 가까운 시간을 살던 분이라 그 역사적 배경이 되는 시간들이 그리 낯설 지는 않았다. 또한 격동기의 시간이라 할 만큼 갖가지 큼지막한 사건들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 변화의 물결이 백범의 생애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물론 왜놈에 의한 억압의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에 쓴 시간이 대부분이였지만.

백범 김구선생님의 행적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 일대기였다. 어렸을 때 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임시정부의 주석 위치에 오를 때까지 그가 걸어간 길은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가시밭길이었고 그의 목숨까지 바칠 정도의 강렬한 의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수십번도 더 중도에 그 길을 벗어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그만의 길을 걷기 위해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의 업적과 행적을 살펴 보았을 때 그를 영웅이라 표현하는데 있어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그 시대 진정한 영웅이었고,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의 뛰어남은 그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할 때 많은 부분이 부모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가 뛰어난 만큼 그의 부모님 또한 김구선생님을 그만한 위치에 오를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써포트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그가 만들어 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김구선생님이 유교를 비롯, 동학과 불교, 기독교까지 두루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경계를 벗어나 오로지 믿고 지켜준 그의 부모님들은 열린 마음으로 그를 안았음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음 이 대목을 보자.

'아버지께 오씨에게서 들은 말을 소상히 보고하고 동학에 입도할 의사를 밝혔더니 곧 허락하시고 입도식에 쓸 예물을 준비하여 주셨다.'(40P)

분명 아버지는 구시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던 동학에, 자신의 아들이 입도하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곧 허락한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일까. 아들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걸 맡긴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즉 김구의 부모는 열린 마음으로 아들을 대하였고 결국 이러한 마음이 영웅 김구를 만든 큰 원동력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어떠한가.

아들이 인천 감옥으로 끌려 가는데 쫓아가면서 필히 감옥에 가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배 위에서 같이 빠져 죽자고 한다. 그러나 김구는 결코 죽지않고 꼭 살아올 것이라 하고 어머니와의 죽음을 만류한다. 그리고 평생 어머니는 아들 보살피기에 온 마음과 몸을 바친다. 특히 다음 대목은 어머니가 김구를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왔는지 알게됨과 동시에 어머니의 대범함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 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는 책하더라도 회초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 주자는 것일세.”(266P)

이러한 열린 부모님 외에도 그가 그 자리에 오를 때까지 조력자로써의 역할을 담당하여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것을 보면 그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가진 인물이며 그것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고 사람을 대할 때 낮출 줄 알고 천민이든 상놈이든 가리지 않고 인격체로써 대하며 의리를 우선하여 결코 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을 본다면 그러한 흡인력은 그 스스로가 만들어낸 큰 힘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특히 이봉창의 말을 보면 그 흡인력은 더욱 뚜렷해진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말입니다. 내가 이 돈을 떼어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평생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과연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236P)

이 당시 김구는 이미 주석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었다. 얼마든지 밑에 사람을 시켜 일을 처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이 처리했다. 특히 사람의 일이 그러했다. 이봉창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사람을 신임하였다. 이러한 무차별성이 그를 민족의 지도자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것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만남. 그것이 진정 김구가 추구한 인간존중이었다.


[백범연보]

1876 (1)
(양 8.29; 음 7.11) 안동 김씨 金自點의 傍系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金淳永과 어머니 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남. 兒名은 昌巖.

1878∼79 (3∼4)
천연두를 앓음.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스리듯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벼슬자국이 생김.

1880∼82 (5∼7)
5세 때 강령 三街里로 이사. 아버지 숟가락 부러뜨려 엿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음. 7세 때 해주 텃골 본향으로 다시 돌아옴.

1883∼86 (8∼11)
아버지는 尊位에서 都尊位에 천거되었다가 3년이 못되어 면직. 아버지는 불평이 많아 가끔 양반 구타

1887 (12)
집안 어른으로부터 갓을 쓰지 못하게 된 사연을 듣고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 아버지가 청수리 이 생원을 선생으로 모셔다 글방을 차려줘 공부 시작.

1888∼89 (13∼14)
(4월) 할아버지 金萬默 별세. 아버지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전신불수, 호전되어 반신불수. 부모님은 무전여행으로 문전걸식하면서 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아다님. 백범은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다.

1890∼91 (15∼16)
(1890.4) 할아버지 대상. 그 직후 부모님과 더불어 다 시 고향으로 돌아가 서당에 다님. 서당 선생의 수준에 회의. 아버지, [토지문권] 등 실용문서를 배울 것을 권함. 이와 아울러 {通鑑}, {史略} 등을 읽음. 鄭文哉에게 면비학생으로 {大學}과 漢 唐詩와 科文 등을 배움.

1892 (17)
壬辰年 慶科에 응시하여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 폐지.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麻衣相書}로 관상 공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그외 {地家書}·{孫武子}·{吳起子}·{六韜}·{三略} 등을 탐독.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

1893 (18)
(정초) 포동 吳膺善을 찾아가 동학 입도, 金昌洙로 개명. 동학 입도 몇 달 후 連臂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음.

1894 (19)
(가을) 해월 최시형에게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음.
(9월) 황해도 15명의 접주가 회의하여 거사 결정, 백범은 '팔봉 접주'로 선봉에 서다.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구월산 패엽사로 후퇴, 군대 훈련. 안태훈, 백범측에 밀사를 보내 상부상조하기로 밀약.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같은 동학군 李東燁의 공격으로 대패. 몽금포로 피신. 3개월간 잠적.

1895 (20)
(2월)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 유학자 高能善을 만나 衛正斥邪論 전수받음.
(5월) 김형진을 만나 백두산 월편 기행, 만주까지 감.
(11월) 돌아오는 길에 김이언 의병의 고산리전투에 참가하나 패함. 귀향 후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하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

1896 (21)
(2월) 다시 중국으로 떠났으나, 안주에서 단발령의 정지와 삼남 의병 소식을 듣고 돌아오기로 결심. (3.9) 치하포에서 일본인 육군중위 쓰시다(土田讓亮)를 國母報讐로 살해 응징.
(5월) 해주옥에 투옥. (7월) 인천감옥으로 이송. 옥중에서 장티푸스에 걸림. 자살을 기도하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살아남.
(8∼9월) 세 차례 심문 받음.
(10월) 인천감리서에서 사형 선고 받음.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 고종은 판결 보류. 미결수로 감옥 생활을 시작. 감옥에서 {大學}·{世界歷史}·{世界地誌}·{泰西新史} 등으로 서양 근대문물을 접함.

1897 (22)
강화인 金周卿이 백범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가산만 탕진하고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

1898 (23)
(3월) 탈옥. 대신 부모가 투옥. 백범은 삼남으로 도피. (늦가을) 麻谷寺에서 중이 됨, 법명은 圓宗.

1899 (24)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마곡사를 떠남.
(4월) 부모 만남.
(5월) 평양 대보산 靈泉庵 방장으로 장발의 乞詩僧 생활.
(9∼10월경) 還俗하여 해주 본향으로 돌아옴. 작은아버지가 농사일 권유.

1900 (25)
(2월) 金斗來로 변명하고 강화 김주경을 찾아감. 김주경을 만나지 못하고 동생 진경의 집에서 3개월 훈장. 김주경의 친구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을 만남. 유완무의 권유로 이름을 龜로 고치고, 字는 蓮上, 號는 蓮下로 함. (11월) 부모를 연산으로 모시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감. 도중 고능선 선생 찾아뵙고 논쟁, 세대가 다른 것을 느낌. (음 12.9; 양 1901.1.28) 아버지가 돌아가심.

1902 (27)
(1월) 如玉과 맞선 보고 약혼. 우종서의 권유로 탈상 후 기독교 믿기로 결심.

1903 (28)
(1월) 약혼녀 여옥 병사.
(2월)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 장련읍 사직동으로 이사. 吳寅炯의 사랑에 학교 설립. 장련공립보통학교 교원이 됨. (여름)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崔光玉을 만남. 그의 권유로 安信浩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 장련군 種桑委員으로 임명됨.

1904 (29)
(12월) 崔遵禮와 결혼. 최준례, 경성 敬信女學校에 입학. 장련 사직동에서 근 2년 살고, 장련 읍내로 이사.

1905 (30)
(11월) 진남포 에버트청년회 총무 자격으로 경성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 참가. 전덕기·이준·이동녕·최재학 등과 함께 을사5조약 파기 청원 상소를 올리고 공개연설 등 구국운동.
(12월)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사업에 매진.

1906 (31)
장련에 光進학교 세움. 장련에서 신천군 문화로 이사. 鍾山의 西明義塾 교사. 일본군의 종산마을 약탈 저지. 첫딸 낳음.

1907 (32)
(1월) 金庸濟 등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 楊山학교 교사. 첫딸 사망 (여름) 면학회와 양산학교의 '하기 사범강습회' 주최하여 교사 양성에 매진. 최광옥·이광수 등이 강사로 참여.

1908 (33)
(여름) 제 2 차 하기 사범강습회 성황리에 개최.
(9월) 양산학교 중학부 개설, 중학부는 이인배·김홍량이 담당, 백범은 소학부 담당. (가을) 황해도 교육자들과 해서교육총회를 조직. 學務總監 피선.

1909 (34)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황해도 각 군을 순회하며 환등회·강연회를 열어 계몽운동.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한 달여 만에 불기소 처분. (12월) 양산학교 소학부와 더불어 재령 保强學校 교장 겸임. 당시 羅錫疇, 李在明 등과 만남.

1910 (35)
둘째딸 化慶 태어남. (11월) 경성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 양기탁·이동녕·안태국·이승훈·주진수·김도희 등과 함께 서울의 都督府 설치, 만주 이민과 무관학교 창설 등을 결의.
(11.20) 안악으로 돌아옴.
(12월) 安明根, 양산학교로 백범을 찾아옴.

1911 (36)
(1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김홍량·도인권 등과 함께 경성으로 압송. 총감부 임시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함. 종로구치감으로 이감. 어머니가 옥바라지.
(7월) 경성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판결, 서대문감옥으로 이감(죄수번호 56호). 감옥에서 의병·신사 등을 만남. 특히 활빈당 간부 김진사에게서 비밀결사의 요령을 들음.

1912 (37)
(9월) 明治 日王이 죽어 15년형이 7년으로 감형. 다시 명치의 처가 죽어 5년으로 감형. 이름 龜를 九로, 호 蓮下를 白凡으로 고침.

1914 (39)
인천감옥 이감(죄수번호 55호). 17년 전의 감방 동료였던 文種七을 만남. 매일 쇠사슬에 묶인 채 인천항 축항공사에 강제노역. 투신 자살을 결심하나 곧 마음을 고쳐 열심히 일해 상까지 받음.

1915 (40)
둘째딸 화경 죽음. (8월) 가출옥.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安新學校로 감.

1916 (41)
문화 궁궁농장 看檢. 셋째딸 恩慶 태어남.

1917 (42)
(1월) 俊永 숙부 별세. (2월) 東山坪 농장의 농감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움. 셋째딸 恩慶 죽음.

1918 (43)
(11월) 아들 仁 출생.

1919 (44) (3월) 3·1 운동으로 안악에서도 만세운동. 어머니, 환갑잔치를 사양
(3.29) 안악에서 출발. 평양·신의주·안동을 거쳐 상해로 망명.
(9월) 상해 임시정부의 警務局長이 됨. 국무총리 이동휘의 공산주의운동 권유 물리침.

1920 (45).
(8월) 아내 최준례, 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옴.

1922 (47)
어머니도 상해로 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의원으로 선출됨.
(9월) 임시정부 內務總長이 됨. 차남 신(信) 출생.
(10월) 여운형·이유필 등과 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이 됨.

1923 (48)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 내림.
(12월) 상해교민단에서 義警隊 설치, 고문에 추대됨.

1924 (49)
(1월) 아내 최준례,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
(6월)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

1925 (50)
(8.29) 나석주 의사가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줘 가장 영광된 생일을 보내다.
(11월) 어머니 곽낙원, 차남 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감.

1926 (51)
(12월) 국무령에 선출됨.

1927 (52)
(3월) 임시정부, 3차개헌을 통해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 국무위원에 선출됨.
(8월) 임시정부 내무장이 됨. 한국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 집행위원이 됨.
(9월) 장남 인, 고국으로 보냄.

1928 (53)
(3월)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 임시정부의 활동 침체로 독립운동가들이 임정을 떠나자, 백범은 미주 교포들에게 편지 보내어 자금 지원을 요청.

1929 (54)
(5월) 1년 2개월 만에 얻백범일지얽 상권 탈고.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에 선출.

1930 (55)
(1월) 이동녕·안창호·조완구·조소앙·이시영·김두봉·안공근·박찬익·윤기섭·이유필·엄항섭·차이석·김붕준·송병조 등과 한국독립당 창당.
(11월) 임시정부 재무장이 됨.

1931 (56)
일본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韓人愛國團을 창단. 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의 교포에게 편지로 금전적 도움을 얻어 의열투쟁 계획.

1932 (57)
(1.8) 이봉창 의사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裕仁) 저격의거.
(4.29)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白川) 대장 등을 즉사시킴. 미국인 피치 씨 집에 피신.
(5월) 한인애국단원 이덕주·유진식, 조선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에 파견했으나 체포됨. 한인애국단원 유상근·최흥식 등, 관동군 사령관 本庄繁를 암살하기 위하여 만주로 파견했으나 대련에서 체포됨.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 상해에서 탈출. 임시정부, 상해에서 杭州로 옮김. 군무장이 됨.
(6월) 임시정부에서 사임.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長震球 또는 長震으로 행세함.

1933 (58)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 필담 결과 洛陽軍官學校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고,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감.

1934 (59)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 설치. (4월) 9년 만에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인·신 만남. (12월) 남경에서 중앙군관학교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韓國特務隊獨立軍 조직.

1935 (60)
(5월) 임정 해소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諸公 경고문」 발표. 조소앙 등 임정국무위원 5명 사직. (10월) 임정의정원 의원 16인, 가흥 南湖에서 船上 비상회의.묀이동녕·김구·조완구 등을 국무위원으로 보선. (11월) 이동녕·이시영·조완구·엄항섭·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한국국민당을 조직.

1936 (61)
(8.27)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씀.

1937 (62)
(8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인애국단 및 미주 5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중일전쟁으로 호남성 長沙로 피난하기로 하고 대가족 백여 식구는 목선으로 남경을 떠남. 백범, 안공근을 상해에 파견하여 안중근 의사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함.

1938 (63)
(5월) 3당 합당 문제가 활발해져 楠木廳에서 회집. 백범, 이운환의 저격으로 중상, 한 달간 湘雅의원에 입원. 玄益哲은 절명.
(7월) 임시정부, 장사가 위험하여 廣州로 옮김.
(10월) 임시정부, 柳州로 옮김.

1939 (64)
(4월) 어머니 곽낙원(81세), 중경에서 咽喉炎으로 작고.
(5월) 임시정부, 유주에서 사천성  江으로 옮김. 김원봉과 공동명의로 [동지·동포 제군들에게 보내는 公開信]을 발표.
(8월) 기강에서 7당통일회의 개최.
(11월) 曺成煥을 단장으로 군사특파단을 구성하여 섬서성 서안으로 파견.

1940 (65)
(5월)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결성. 중앙집행위원장이 됨.
(9월) 임시정부, 기강에서 중경으로 옮김. 중경 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창설.
(10월) 임시정부, 헌법을 개정하고 주석이 됨.
(11월) 西安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간부 30여 명을 파견.

1941 (66)
(6월)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함을 보냄.
(10월) 임시정부 승인 문제로 중국 외교총장과 회담. {백범일지} 하권 집필을 시작.
(11월) 임시정부, [대한민국건국강령] 제정 발표. (12월)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1942 (67)
(3월) 임시정부, [3·1절 선언]을 발표하여 중·미·영·소에 대해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
(5월) 임시정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과 김원봉의 광복군 부사령관 임명.
(10월) 김원봉 등 좌파, 임시의정원에 참여.

1943 (68) (3월) 임시정부, 중경에서 3·1 운동 24주년 기념식 거행.
(7월) 장개석 총통과 회담. 전후 한국독립 지원 요청
(8월) 주석직 사임을 발표.
(9월) 주석에 복직.

1944 (69)
(4월) 임시정부, 제 5 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 주석으로 재선됨.
(9월) 장개석을 면담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

1945 (70)
(2월) 임시정부, 독일에 선전포고.
(3월) 장남 仁(28세), 부인 安美生과 딸 孝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남.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고, 중국전구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 br>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
(8.10) 섬서성 주석 祝紹周로부터 일본 항복 소식 들음. br> (8.18) 중경으로 귀환.
(9월)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을 통해 임시정부의 당면정책 14개항 발표.
(11월) 상해를 거쳐 제 1 진으로 환국.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

1946 (71)
(2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됨.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됨.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한독당으로 통합.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
(6월)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모심.
(8월) 연합국 원수 및 정당 대표에게 임시정부 수립의 지원을 요망하는 메시지 발표.
(10월) 좌우합작 7원칙 지지성명 발표.

1947 (72)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 2 차 반탁운동 전개.
(2월) 비상국민회의를 확대하여 국민의회 조직.
(3월) 인재 양성을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 개설. (5월) 한독당원들에게 제 2 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불참할 것을 성명.
(10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남북대표회의 의결.
(11월) 한독당, 정당협의회 참가 보류.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

1948 (73)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 의견서를 보냄.
(2월)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냄.
(3월) 김규식·김창숙·조소앙·조성환·조완구·홍명희와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 표명.
(4월) 남북연석회의 참여. [공동성명서] 발표.
(5월) 평양에서 서울로 귀환. (7월) 북한의 단정 수립에도 반대한다는 입장 밝힘. 통일독립촉진회 결성.
(8월) 어머니 곽낙원과 부인 최준례, 맏아들 인의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
(9월) 이동녕·차이석 선생 천장식,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모심.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 발표.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입국.

1949 (74)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움.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세움.
(6.26) 12시 36분,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
(7.5) 국민장 거행. 효창원에 안장.

1962 (서거 13주년)
(3.1)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重章에 추서. 1969 (서거 20주년)
(8.23) 남산에 동상을 세움.

1999 (서거 50주년)
(4.9) 어머니 郭樂園 여사와 장남 金仁,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 2 묘역으로 이장.
(4.12) 부인 崔遵禮 여사 효창원으로 합장.
(6.26) '서거 50주년'.

* 출처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상 권


이 책을 읽는 분들께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16P)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16P)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17P)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17P)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 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도 없는 것이다. …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다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17-18P)


머리말 인仁․신信 두 어린 아들에게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東西와 고금古今의 허다한 위인 중에서 가장 숭배할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19P)


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너의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네가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을 하여 네 꼴을 안 보겠다.”-백범의 어머니-(29P)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상호불여신호
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
身好不如心好 (37P)

“이왕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 실패나 곤란을 당했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 아닌가?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에만 힘쓰게.”-고능선 선생-(55-56P)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과 재질에 따라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곳은 채워 주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빠른 방법을 택하셨다. 선생은 나를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많이 알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나뭇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것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이 장부로다.

득수반지무족기
得樹攀枝無足奇

현애철수장부아
懸崖撤手丈夫兒

라는 구절을 힘있게 설명하셨다.(56P)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또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 아첨하고 제 동포와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네.”-고능선 선생-(57P)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네.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맡은 바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지. 어떤 사람은 정계政界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學界나 상계商界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네.“-고능선 선생-(58P)


2. 기구한 젊은 시절

“차라리 지하에 목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머리 깎은 사람은 아니 되리라.”는 글이 마치 격서 모양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하여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처럼 단발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가 다만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감훼상효지시야不敢毁傷孝之始也‘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요, 이것은 일본이 시키는 것이라는 반감에서 온 것이었다.(73P)

“얘야, 네가 이제 가면 왜놈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물에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가 같이 다니자.”
“제가 이번 가서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안 죽습니다. 제가 나라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87-88P)

“애애부모 생아구로 욕보기은 호천망극(哀哀父母 生我劬勞 欲報其恩 昊天罔極 :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고생이 커서, 그 은혜에 보답코자 하나 하늘처럼 높아 다할 길 없음이 슬프도다)”(89P)

"부모와 자식은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89P)

“소위 만국 공법萬國公法이니, 국제 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通商․화친의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면 몸으로, 그리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91-92P)

“나 김창수는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국모께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 왜구 한 놈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나라 사람이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蒙白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92P)

‘조덕근 등을 데려가다가 무슨 일이 날는지 모르니, 이 길로 나 혼자만 도망가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그자들은 좋은 사람도 아니니 기어코 건져 낸들 무엇하랴!’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 군자에게 죄를 지어도 부끄럽거늘, 하물며 저들과 같은 죄인에게 죄를 짓고서야 어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랴. 평생 수치가 될 것이다.(112P)


3. 방랑의 길


내게 그처럼 성의를 가진 사람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가 성의를 가장한 염탐꾼일지라도, ‘군자 가기이방君子可欺以方’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의리로 알고 속은 것이 내 허물은 아닐 것이다. 이렇듯 하는 데도 안 믿는다면 그것은 나의 불의라고 생각했다.(135P)

남아하처불상봉(男兒何處不相逢 : 남자는 어느 곳에서라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136P)

성태영과 유인무는 내가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불편하리라 생각하여 이름을 고쳐 지어 주었다. 이름은 거북 구龜를 써서 김구金龜라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蓮下라 고쳐 행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를 부를 때에는 연하라는 호를 썼다.(138P)

집이 원래 궁벽한 산촌인 데다가 가난한 우리 가세로는 명의나 영약을 쓸 처지도 못 되었다. 나는 예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가 손가락을 자르시던(단지斷指) 것을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하여 일각이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붙들어 보리라 하였다. 그러나 내가 단지를 하는 것을 보시면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실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의 살을 한 점 베어서, 피는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드리고 살은 불에 구워서 약이라고 하여 아버지께 잡수시게 하였다. 그래도 시원한 효험이 없었다. 이것은 피와 살의 분량이 적은 때문인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칼을 들어서 먼저 것보다 더 크게 살을 떼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어썩 뜨기는 떳으나 떼어 내자니 몹시 아파서 베어만 놓고 떼지는 못하였다. 단지나 할고割股는 효자나 할 일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 할 일이라고 자탄하였다. 혼자서 상주喪主로 조객을 대하자니 상청喪廳을 비울수는 없고, 허벅지는 아프고, 설한풍 雪寒風은 살을 에여, 나는 허벅지 살을 벤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142P)

나는 작은 아버지에게 돈을 쓰고 하는 결혼은 비록 정승의 딸이라도 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내 말을 들은 작은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시며 낫을 들고 달려드는 것을, 어머니께서 가로막아서 나를 피하게 하여 주셨다.(143P)


4. 민족에 내놓은 몸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구舊사상의 애국 운동이라고 한다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新사상의 애국 운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150P)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 각자 전국에 흩어져 교육 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한 국민들에게, 나라가 곧 자기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152P)

‘사마골 오백금(死馬骨 五百金 : 죽은 말뼈를 오백금으로 산다는 뜻으로,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귀하에 여긴다는 뜻이다)’ (154P)

상놈은 여전히 상놈이요, 양반은 새로운 상놈이 될 뿐, 한 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쳐 새로운 양반이 되리라는 기개를 찾아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었다.(154P)

처음에 내 성명을 묻던 왜놈이 밤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 놈들이 제 나라의 일에 매우 충성하는 것을 알았다. ‘저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되씹으려 밤을 새거늘, 나는 잃은 제 나라를 찾으려고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가?’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로 자처하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노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눈물이 넘쳤다.(166-167P)

'구몰니중홍비해외'(龜沒泥中鴻飛海外 : 거북이는 진흙 속에 빠지리니 기러기는 해외로 날라는 뜻) (171P)

나와 같은 방에 이종록이라 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를 따라온 친척이 없어 사식을 가져다 줄 이가 없었다. 내가 밥을 그와 한 방에서 먹으면 그에게 나눠 줄 수도 있겠지만, 사식은 딴 방으로 불러내 먹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밥과 반찬을 한 입 잔뜩 물고 방에 돌아와 마치 제비가 새끼 먹이듯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먹였다.(175P)

어머니께서 손수 지어 담으신 밥그릇을 열고 밥을 떠먹으며, 이 밥에 어머니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8년 전 해주에서의 옥바라지와 인천 옥바라지를 하실 때에는 내외분이 고생을 나누기라도 하셨건마는 이제는 어머니 혼자셨다. 어머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위로를 드릴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누군가.(178P)

'일본은 한국을 오랫동안 제 것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다.‘(179P)

그리하여 후일 우리가 독립한 후, 감옥의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고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을 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184P)

사흘을 굶으면 도적질할 마음이 난다고 하지만,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다. 거지도 용기와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좀도둑은 몰라도 수십 명, 수백 명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라면 거기는 조직도 있고 훈련도 있고 의리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지휘 명령을 보내는 기관과 주동 인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십 명, 수백 명 도적 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라면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 갈 만한 지혜와 용기와 위엄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187P)

인물을 고를 때에는 먼저 눈의 정기를 본다는 것이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동지의 처첩을 범하는 것과 장물을 감추는 것이요,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불행하게 관에 잡혀가더라도 동지를 불지 아니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그 가족이 편안히 살도록 하여 준다는 말도 들었다. 김 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우리 무리의 단결이 저러한 도적만도 못한 것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190P)

나는 왜놈이 지어준 ‘뭉우리돌’대로 살아가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그 결심의 표시로 내 이름 김구金龜를 고쳐 김구金九라 하고, 당호 연하蓮下를 버리고 백범白凡이라고 하여 옥중 동지들게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민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하소서’하고.(192P)

“너는 살아왔지만 너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화경이 네 딸은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게 말할 것 없다고 네 친구들이 그러기에 기별도 아니하였다. 그나 그뿐인가. 일곱 살밖에 안 된 그 어린 것이 죽을 때에 저 죽거든 아예 옥중에 계신 아버지한테 기별 말라고,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시겠느냐고 그랬단다.”(197-198P)

경무국에서 접수한 본국의 보도에 의하면, 나의 국모보수國母報酬 사건을 24년만에 비로소 알았다고 했다. 내가 본국을 떠난 뒤에야 형사들도 안심하고 김구가 김창수라는 것을 왜놈 경찰에 말한 것이었다. 아아, 눈물나는 민족 의식이여! 왜놈의 정탐 노릇은 하여도 속에는 애국심과 동포애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신이 족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독립 민족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아니 믿고 어이하랴.(205P)

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면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평생을 지냈다.(207P)

옛날 한유韓愈는 「송궁문送窮文」을 지었다지만, 나는 차라리 「우궁문友窮文」을 짓고 싶었다. 자식들에 대하여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했으므로,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 된 의무를 해주기를 원치 않았다. 자식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 먹고 입고 배우므로,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도하고 섬긴다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할 수 없었다.(208P)


하 권


머리말

내가 젊어서 붓대를 던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힘도 재주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패도 영욕도 돌아봄 없이 분투하기 30여년, 그리고 명의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지키기 10여 년에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이 내 나이는 60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침체된 국면을 타개하고 국민의 쓰러지려는 3·1 운동의 정신을 다시 떨치기 위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 운동의 위기를 말하여, 자금의 후원을 얻어 철혈 남자를 물색하여 암살과 파괴의 테러 운동을 계획하고자 한다. 동경 사건과 상해 사건 등이 다행히 성공되는 날이면 냄새 나는 내 가죽껍데기도 최후가 될 것이라 예견한다.(213P)

내가 지금 이것을 쓰는 목적은 해외에 있는 동지들이 내 50년 분투 사정을 보고 허다한 과오를 은감으로 삼아서 복철을 밟지 말기를 원하는 노파심에 있는 것이다.(214P)

상해 시대를 죽고자 하던 시대라 하면 중경 시대는 죽어 가는 시대라고 할 것이다.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야” 한다면, 나의 가장 큰 욕망은 독립된 날 본국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 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215P)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215P)

죽는 것도 자유가 있는 자라야 할 일이어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색을 회고하면 살려고 하여 산 것이 아니요,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215P)

1. 상해에서의 3·1 운동

나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을 신조로 하여 살아 왔다.(221P)

이봉창의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이봉창

“제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어 가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봉창-(234-235P)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말입니다. 내가 이 돈을 떼어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평생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과연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236P)

기념 사진을 찍을 대 내 얼굴에 처연한 빛이 감도는 것을 이봉창이 보고,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
하고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237P)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자동차 요금 주고도 5,6원은 남아요.”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245P)

윤봉길 어록
“대부출가생불환(大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246P)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 선인들은 한·당·송·원·명·청 시대에 끊임없이 사절使節이 내왕했는데, 왜 중국의 좋은 것은 못 배워 오고 궂은 것만 들여왔는가 한탄하였다. 의관衣冠 문물文物 에 있어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좇아가는 것이 조선 오백 년의 당책이라 했지만, 망건과 갓 등 망하기 좋은 기구만 들여왔을 뿐이요,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민족의 머리에 틀어박힌 것은 사대사상事大思想뿐이 아니더냐. 주자학朱子學을 주자朱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서 민족의 원기를 소진하여 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싸움과 의뢰심뿐이었다.(254P)

주자朱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유腐儒들과 똑같이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그렇다고 반드시 주자朱子를 옳다고도 하지 않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잃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을 장한 체 말라는 것이다. 제 머리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255P)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 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는 책하더라도 회초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 주자는 것일세.”(266P)

어머니가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니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채시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그 비용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그것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그것을 독립 운동에 쓰라고 내어 놓으셨다.(266P)

한족의 눈에는 문화의 빛이 있는데 묘족의 눈에는 그것이 없었다.(270P)

“우리는 어려서부터 일본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언어도 능숙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 유학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국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 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 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총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시 정부를 찾아왔습니다.”(276P)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가 되고 말았다. 한번 실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다니, 진실로 지금까지의 정성이 아까웠고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의 발언권이 약하리라는 것이었다.(279P)

소식을 들은 마곡사 승려 대표사는 공주까지 마중을 나왔으며, 마곡사 동구에는 남녀 승려가 도열하여 지성으로 나를 환영하였다. 옛날에 이 절에 있던 일개 중이 일국의 주석이 되어서 온다고 감격한 덕분이었다. 48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었다. 산천도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에 걸린 주련도 옛날 그대로였다.(290P)

나는 개성,연안 등을 순회하는 길에 이 효자의 무덤을 찾았다. '고 효자 이창매지묘' 라고 씌어 있는 묘비 앞에서, 고 효자 이창매의 발자국을 따라 참배하였다. 나는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던 길에, 이 묘비 앞에서 쉬던 49년 전 옛날을 생각하였다. 그 날 어머니가 앉으셨던 자리를 눈어림으로 찾아서 그위에 앉았다. 그러나 나를 따라오시던 어머니에 얼굴은 뵈올길이 없어 눈앞이 캄캄하였다. 중경서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말씀으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시던 것을 추억하였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모자가 함께 고국에 돌아가 지난 일을 이야기하지 못하시는 것이 그 원통하심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저 멀고 먼 서쪽 화상산 한 모퉁이에 손자와 같이 누워 계신것을 생각하니, 슬픈마음 금할 수가 없었다.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내가 동포들에게 받는 환영을 보신다면 다소 어머니의 마음이 위안이나 되지 않을까.(294~295P)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299P)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칠십 평생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서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299P)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300P)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집에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300~301P)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는 민족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흥망성쇠의 공동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위에 사는 것이다.(301P)

세계 인류가 너나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 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고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301P)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302P)

2. 정치이념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한 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체 또는 독재라 하고 한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며 통칭 파쇼라고 한다.(304P)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307P)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길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307P)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 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 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로 보아도 그러하다.(308-309P)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와 같이 반만 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 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생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 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 나라의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309-310P)

3.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311P)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311P)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한 민족은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모두 성인을 만드는 데 있다.(312P)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꺽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말에 이른 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든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313P)



3. ‘내가 저자라면’

백범 김구선생님은 누가 뭐라해도 민족적 영웅이다. 그는 태어나 왜놈들의 손에 나라가 넘어가면서부터 평생 죽을 때까지 그 가슴에 오직 '독립'이라는 단어 하나로 점철된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는 어떠한 어려움, 괴로움, 고통에도 결코 꺽이지 않았고 그의 민족적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내었다. 그가 민족적 정신적 지주가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 몇가지를 살펴보자.

'백범이 동학에 입문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연비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40P)

→ 백범은 사람을 끄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나는 인간존중과 경청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상놈이든 천민이든 그는 인간으로 대하고 받아들인다. 당시 보이지 않는 계급적 구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본인에게는 결코 적용시키지 않는다. 그의 인간에 대한 존중정신은 추후 그가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도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된다.

'조덕근 등을 데려가다가 무슨 일이 날는지 모르니, 이 길로 나 혼자만 도망가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그자들은 좋은 사람도 아니니 기어코 건져 낸들 무엇하랴!’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 군자에게 죄를 지어도 부끄럽거늘, 하물며 저들과 같은 죄인에게 죄를 짓고서야 어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랴. 평생 수치가 될 것이다.'(112P)

→ 그는 감옥에서 사형을 당할뻔 하였으나 운좋게 사면을 받아 죽음을 면하게 된다. 그러나 평생 감옥에서 머물러야 함을 깨닫고 탈출을 감행하게 되는데, 당시 혼자서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조덕근 등 몇 명과 힘을 합쳐 결국 탈출할 기회를 잡게 된다. 그리고 탈출전 순간에 혼자 탈출을 하려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그 생각을 뿌리치고 같이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위의 독백은 그의 잠시 흔들리는 마음과 그리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의리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의리는 그의 평생 친구였던 것이다.

또한 학습에 대한 열정은 그를 여러 사상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도록 만들었고 그 자신을 열린 마음을 가진 넓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만큼 학습에 대해 가졌던 갈망은 그를 더욱 더 큰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그가 이러한 목마름을 더욱 더 해결하고자 한 욕구는 어렸을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해 더욱 더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의 집안이 양반의 집안이 아닌(물론 몰락하기 전까지는 양반의 집안이었지만) 천민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공부에 대한 욕심은 그 한구석에 더욱 더 크게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런 욕구에 의해 그는 유교 뿐 아니라 양놈의 학문이라는 동학, 그리고 더 나아가 불교와 기독교까지 두루 섭렵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의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종교도 아니고 무려 4개의 종교를 두루 섭렵한다? 게다가 불교의 경우는 스님으로 입적까지 했다? 그것도 일반 스님이 아닌 주지 스님까지 경험했다? 거기에 더해 스님까지 했던 사람이 기독교에 입문하여 하느님을 섬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상적 충돌이 크게 일어났으리라 생각되는데 그의 이야기에는 종교에 입문하여 활동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만 있지 종교사상적 충돌, 어려움, 고뇌 등은 담겨져 있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어쩌면 그의 종교는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로 '민족의 독립'이 그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범은 '민족독립교'의 지주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자나깨나 그것만을 생각하였고 몸도 마음도 심지어는 영혼까지도 그것에 빠져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명예욕이나 권력욕을 배제한 채 진정한 나라의 독립(독립 후에는 민족 통일)을 위해 살다간 것이다.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2가지에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첫째는 일지 처음서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실명 부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나오고 죽어간다. 또한 연대순으로 기록된 수많은 사건의 나열들이 그의 기억만으로는 다시 이렇듯 정리하기는 어려웠으리란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항을 꼼꼼이 메모하고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이 백범일지를 쓰리란 생각도 하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물론 연도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경우에는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빌렸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긴 시간의 기록은 끊임없는 메모와 정리가 없으면 불가능했으리라. 다른 한가지는 그의 뛰어난 사교성이다. 어디를 가든 어떤 때든 간에 그는 홀몸으로 전국, 전 중국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사람을 찾는다. 어디든 사람이 있고 자신을 의탁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가 그 전에 그 사람에게 무언가의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디를 가든 환영받고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적 용어로 따지면 대단한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더욱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김구가 워낙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를 숨겨둔 것이 발각되면 숨겨둔 사람까지 위험해 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꺼이 맞아 들였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같은 민족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국인들까지 그를 감쌓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백범일지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웠던 장면들이 있다. 바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의 마지막 이별장면이다.

기념 사진을 찍을 대 내 얼굴에 처연한 빛이 감도는 것을 이봉창이 보고,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
하고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237P)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자동차 요금 주고도 5,6원은 남아요.”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245P)

그는 직접 폭탄을 들고 왜놈의 소굴로 뛰어들진 않았다. 그는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했고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이 독립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온 몸과 마음을 바쳤다. 하지만 그가 직접 폭탄을 들고 뛰어들진 않았어도 그의 영혼은 이봉창, 윤봉길 등 수많은 열사들과 같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살아 남아서 민족을 독립의 길로 이끌어야 할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알고 있었기에 그 역할을 목숨바쳐 담당했던 것이고....


백범일지를 다 읽고 난 후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과연 내가 저런 상황에 놓였다면 나 또한 목숨을 바칠 것인가? 내 삶의 모든 가치관을 놓고 보았을 때 나라의 독립을 위한 목숨 바침이 제1순위의 일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부모님, 자식들, 아내, 친구 그리고 소중한 그 무엇들까지도 다 버리고 나는 독립운동과 내 목숨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당시의 상황을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100% 이해하기 어려울뿐더러 우리 역사 위인들의 마음까지 헤아린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하지만... 그 일이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나 밖에 적임자가 없다면, 그리고 나의 가치관에, 나의 내면에 질문하였을 때 '그렇다'란 생각이 들 때 나는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과연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 기준은 무엇일까 다시한번 생각나게 하는 <백범일지>였다. 안타까운 죽음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 백범 김구선생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허접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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