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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6일 17시 05분 등록

백범일지-김구 지음, 김학민 이병갑 주해, 학민사, 1997

● 저자에 대하여

‘나는 대한나라 자주독립의 날을 기다려서 다시 이 글을 계속하기로 하고 아직은 붓을 놓는다’
백범이 백범일지의 말미에 적어 놓은 이 글은 가장 가슴에 맺힌다. 자주독립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백범의 생각대로라면 ‘이 글’은 계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한나라는 백범이 그렇게 원했던 자주독립, 자주통일을 하지 못했다. 그가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았더라도 대한나라의 자주통일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목숨을 건 임시정부 시절을 보내고 조국에 돌아온 백범. 완전한 자주독립의 희망에 부풀었던 백범앞에 나타난 현실은 2차대전 연합국인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 분리통치였다. 3․8선으로 갈라진 남북의 현실 앞에서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948년 4월19일. 백범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개최될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경교장을 출발했다. 출발부터 어려웠다.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한다는 우익청년과 학생들의 저지를 피해 뒷담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백범은 같은 해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란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서 그는 “…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백범은 김규식과 함께 2월 26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 정치 지도자들 간의 정치협상을 열고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 방안을 논의하자”는 남북정치회담을 제의했다.
우여곡절 끝에 회담은 성사됐지만 성과는 없었다. 백범이 평양까지 갔지만 결국 그 해 8월15일에는 남한이, 9월9일에는 북한이 단독정부를 세웠다.
백범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놓고 당시의 평가는 엇갈렸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백범이 평양까지 간 이유는 그가 평소에 온몸으로 외치던 우리민족끼리의 자주적인 남북통일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대한나라는 완전한 자주독립, 자주적 남북통일 아닌 남북분단의 형태로 분단 60년 맞았다.

조국 독립에 온몸을 바친 백범의 평생을 관통하는 것은 독립에의 염원과 나라사랑, 겨레사랑이다. 백범이 19세에 동학접주가 되어 일제에 대항하던 시간부터 시작된 나라사랑은 평생 이어진 백범의 소명 이었다. 21세때 안악 치하포에서의 일본인 살해사건은 몸으로 행한 나라사랑 의식의 표출이었다. 국모가 살해된 것에 대한 울분이 행동으로 이어졌다.
신민회 사건으로 옥중에 갇힌 백범의 자책은 거인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옥에 갇힌 백범에게 쏟아진 것은 무수한 매질과 혼절이 이어지는 잔혹한 고문이었다. 그러한 고문을 받던 중 백범은 자신을 신문하던 일인(日人)이 밤을 꼬박 새워 일하는 것을 보고 자신을 자책한다. 백범일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놈들이 힘과 정성을 다하여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평일에 무슨 사무든지 성심껏 보거나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를 구호코자, 즉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또 씹어대는 저 왜구처럼 밤새워 일해본 적이 몇 번이나 있는가 자문하매, 전신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중에도 ‘네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니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찬다. ‘
자신의 앞에 있는 그 일인(日人)의 고문과 매질에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백범은 자신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과연 얼마나 애를 썼는지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새삼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백범의 독립운동을 평생 이끌었고, 중국에서 이어진 임시정부 시절을 거치며 그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우뚝 솟아나게 만들었다. 백범은 그렇게 원하던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보지 못하고 암살자의 총탄에 우리들 곁을 떠났다. 백범은 그렇게 떠났지만 분단된 조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백범을 가슴속에 담아 놓았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 백범일지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이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이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에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이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 때에는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회를 고하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3]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의 서울로 하자는 자오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4]

최광옥, 안창호, 양기탁, 현익철, 이동녕, 차이석, 이들도 이제는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어니와, 개인이 나고 죽은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말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혀야 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간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5]

“김창숙 한 길 이상 공중에서 보행하는 것을 보았다.” 라고 한 것이다 점점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황해도 일대는 물론이고 평안남북도에까지 나를 따르는 연비가 수천에 달하였다. [36]

나의 그 때 심리상태로 말하면, 제일 먼저 과장에서 비관을 품었다가 희망을 ‘상서’공부로 옮기었고, 자기 상격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비탄하다가 비탄하다가 호심인이 되리라는 결심을 하였고, 호심인이 되는 방법이 묘연하던 차에 동학의 수양을 받아 가지고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에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잡기이고, 이제 패군지장의 신세로 안진사으 후의를 입어서 생명만은 편안히 보존하지마는, 장래를 생각하면 어떤 곳에다가 발을 붙이고 진로를 취함이 가할까하는 데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던 즈음이라, 고선생이 저처럼 나를 사랑하는 빛이 보이지마는 참으로 내가 저러한 고명한 선생의 사랑을 바로 받을 만한 소질이 있는가? [51]

안진사의 인격이 어떠함을 떠나 자국내에 일어난 동학은 토벌하고 서양 오랑캐가 하는 서학(천주교)을 한다는 말이 심히 괴이하였다. 또 의리있는 인사라면 머리는 벨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는 의로운 주장을 펴는 이 때에 안진사가 단발할 의향까지 보임은 의롭지 못함이 아니가. 이런 생각을 하고 고선생과 상의하기를 속히 성혼이나 하고서 청계동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74]

그 왜놈은 별로 주의를 하는 빛이 없이 식사를 마치고 중문밖에 서서 문기둥을 의지하고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총각 아이의 음식값 지불하는 것을 살펴보고 있더라.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대호일성에 그 왜놈을 발길로 차서 거의 한 길이나 되는 계단 아래에 추락시키고 쫓아 내려며 왜놈의 목을 한번 밟았다. 세 칸 객방에 앞쪽 출입문이 모두 네 개라. 아랫방에 한 개, 가운데방에 쌍문 두 개, 윗방에 한 개인데 그 방문 네 개가 일시에 열리자 그 문에서 사람의 머리가 다투어 나온다. 나는 몰려나오는 군중을 향하여 간단한 한 마디로 선언하다. “누구든지 이 왜놈 위하여 내게 범하는 자는 모두 죽이리라.” 선언을 끝마치기 전에 발에 채이고 밟혔던 왜놈은 새벽 달빛에 검광을 번쩍이며 나에게 달려든다. 나는 면상에 내려지는 검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치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았다. 칼이 저절로 땅에 떨어진다. 그 왜검으로 왜놈을 머리부터 발까지 점점이 난도를 친다. 2월의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다. 피가 샘처럼 솟아 마당에 흐른다. 나는 손으로 왜혈을 움켜 마시고 왜혈로 얼굴을 처바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80]

지난달 청계동에서 단순히 고선생을 신인처럼 숭배할 때는 나도 척왜척양(斥倭斥洋)이 우리 사람의 당연한 천직이요, 이에 반대하면 비인(非人)이요, 즉 금수라고 생각하였다. 고선생 말씀에 우리 사람에게만 한가닥 밝은 맥이 잔존하였고, 세계 각국이 거개 야만의 풍속을 지닌 오랑캐라는 말만 믿었던, ‘태서신사’ 한 책만 보아도 그 눈이 깊고 코가 높아 원숭이와 다름없는 오랭캐들은 도리어 건국치민(建國治民)의 좋은 법규가 사람다운데, 사대부로써 선풍도골(仙風道骨)같은 우리나라 탐관오리는 오랑캐의 칭호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99]

어찌 되었던지 대군주(이태황李太皇)가 친히 전화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때 경성부 내는 이미 전화가설이 된지 오래였으나 경성 이외에는 장거리전화가 인천까지가 처음이요, 인천까지의 전화가설공사가 완공된 지 3일째 되는 날이라. 만일 전화 준공이 못 되었어도 사형집행이 되었겠다고 한다. [105]

옥담을 넘을 줄사다리를 매어놓고서 문득 딴 생각이 난다. “조덕근 등을 데려 내다가 무슨 변이 날지 모르니 이 길로 곧 가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그 자들이 결코 동지는 아니다 기필코 건져내면 무엇하리.” 또 한 생각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군자의 죄인이 되어도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수치스런 마음을 감당할 수 없으려니와 저와 같은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종신토록 치욕스러움을 어찌 견디랴.” 마침내 두 번째 생각이 이기게 되었다. [115]

“우리 댁 선달님이 옥에서 나왔다고 인천집에서 기별은 있으나 이모댁에나 와서 계신지, 내가 오늘 가보고 내일 오심녀 말씀하겠습니다.” 혹시 그러려는가 여기고 돌아왔다가 다음날 또 갔다. 역시 모른다고 말을 하는 눈치가, 조덕근과 상의한즉 나는 자기보다 중죄인이니 이미 출옥한 바에 다시 보아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잡아떼는 수작이더라. 세상 내가 퍽도 어리석다. 파옥하고 내가 먼저 나와서 단신으로 쉽게 달아나려다가 그가 나에게 애걸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이중의 험한 곳에 다시 들어가서 그 자들을 위험지대는 다 면케 하여 준 것인데, 지금 내가 맨손으로 자기를 찾았을 줄 알고 나를 보면 금전의 해가 있을까 거절하누나. 그 사람에 그 행실인즉 심히 책망할 것 없다 하고 돌아와서는 다시 가지 않는다. [121]

삼남 양반의 이세와 속박이 심하고 또 심한 중에도 약간의 미속이 없지는 아니하다. 이앙 시기에 김제 만경을 지나며 본즉 농군이 아침에 일을 나갈 때에 사명기를 들고 쟁고를 울리며 야외에 나간다. 깃발을 헤우고 모를 심을 때는 선소리꾼이 고를 치고 농가를 인도하면 남녀 농군은 손발을 흔들며 춤을 추며 일을 한다. 주인은 탁주를 논두렁에 여기저기 동이로 놓아두고 마음껏 먹게 하고, 행인이 지나면 다투어 권한다. 농군이 음식을 먹을 때는 현직 감사나 수령이라도 말을 내려 예를 표한다. [131]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함께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법당에서는 종을 울리고, 주방에서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각 암자에서 가사를 입은 중들이 수백명이 모인다. 나에게도 검은 장삼과 붉은 가사를 입혀 대웅전으로 인도한다. 곁에서 덕삼이가 불전에 절하는 것을 가르치고, 은사 하은당이 나의 승명을 원종이라 명명하여 불전에 고한다. 수계사(受戒師)는 용담이란 점잖은 중으로 경문을 낭독하고 나에게 오계를 준다. [136]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 사람의 국가를 다스리는 큰 요체를 보아서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대우하고, 사람이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가하고, 우리나라 탐관오리가 사람의 면목을 가졌으나 금수의 행실이 많으니 그것이 참으로 오랑캐요,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 벼슬값을 매기고 관직을 팔아먹으니 곧 오랑캐 임금인즉,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저 대양을 건너사는 각 나라를 오랑캐 오랑캐 하고 배척만 한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들 나라는 공맹(孔孟)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지만 공맹의 법도 이상으로 국가제도와 문명이 발달되었습니다. 제 소견에는 오랭캐에게서 배울 것이 맣고 공맹에게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156]

산촌 빈한한 집에 고명한 의사를 모시거나 기사회생의 명약을 복용하기는 힘이 허락지 않는 바라. 우리 할머님 임종시에 아버님이 단지를 하심도 이런 절박한 지경에서 행한 일이니, 내가 단지를 할 것 같으면 어머님으 마음이 상하실 터이니 나는 할고(割股 허벅지 살을 베어냄)를 하리라 하고, 어머님이 안 계신 때를 타서 왼쪽 허벅지에서 살코기 한 점을 떼어서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삼아 잡수시게 하고, 흐른 피는 마시워 드린다. 분량이 적은 듯 하여 다시 칼을 대어 그보다 크게 살코기를 떼려고 할 때에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지만 살조각이 떨어지지를 않고 고통만 심한지라, 두 번째는 다리 살을 썰어 놓기만 하고 손톱만치도 떼어내지 못하였다. 스스로 탄식하였다. 단지나 할고는 진정한 효자가 하는 것이지 나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159]

세배를 한 후에 앉아서 담화를 하던 즈음에 장연 텃골 미혼처가에서 급보가 왔다. 낭자의 병세가 위중하니 김상주에게 통지하라는 기별이 왔다. 나는 깜짝 놀라 즉시로 처가에를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즉 낭자는 병세가 위중한 중에도 나를 심히 반가워한다. 병은 장감인데 의약을 쉽게 구하기 어려운 산중이라 2, 3일 후에 드디어 사망하는 지라. 내 손으로 친히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묘앞에서 영별하였다. [163]

과연 제2일에 급보가 왔다. 학교에 중대 사고가 있으니 교장이 출석하여 달라고. 즉시로 길을 떠나 학교에 도착한즉 숙직하던 직원이 방화범 1명을 포박하고 교내에는 죽이자 살리자 소동이 났다. 범인을 친히 심문한즉 그 동리에 거주하는 글방 훈장으로서, 내가 동리 안의 어른들을 청하여 신교육의 필요성을 설명함에 자기가 가르치던 아동들이 전부 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자기는 고역인 농사일밖에 생활방도가 없게 된 것이라. 이를 한하여 의롭지 못한 수단으로 학교사업을 방해코자 방화한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184]

이에 앞서 국내 국외를 통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니 즉 신민회라.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귀국하여 표면사업으로 평양에 대성학교를 병설하여 청년을 교육하고, 이면에서는 양기탁 안태국 이스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 외 몇 사람이 중심인물이 되고 4백여명 정예 인사로 조직된 단체 즉 신민회를 훈련 지도하다가 안창호는 용산헌병대에 체포 수감된 일도 있다. [188]

다시는 묻지도 않고 수족을 결박하여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 고통을 느꼈으나 마침내 적막한 설월야에 신문실 한귀퉁이에 가로 누었고, 안면과 전신에 냉수를 기얹은 느낌만을 알 뿐이고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더라.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왜구는 비로소 안명근과의 관계를 묻는다. “안명근은 친구 사이일 뿐이고 함께 일을 한 사실은 없소” 그 놈은 분기 대발하여 다시 천장에 매달고 세 놈이 둘러서서 태로 장으로 무수 난타한다.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세 놈이 마주 들어다가 유치장에 들여다 뉘일 때 동녘이 벌써 훤하였고, 내가 신문실에 끌려가던 때는 전날 해질 무렵이다. [194]

처음에 성명부터 신문을 시작하던 놈이 촛불을 켜놓고 밤을 꼬박 넘기는 것과, 그 놈들이 힘과 정성을 다하여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평일에 무슨 사무든지 성심껏 보거나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를 구호코자, 즉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또 씹어대는 저 왜구처럼 밤새워 일해본 적이 몇 번이나 있는가 자문하매, 전신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중에도 ‘네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니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찬다. [194]

나는 신체가 말이 아니다. 그놈이 달아매고 때릴 제 박태보가 보습 단근질을 당하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더 달구어 오너라.” 하고 했던 구(句)를 암송하면서, 동절이라 그리하는지 겉옷만 벗기고 서양직물로 만든 속옷은 입은 채로 때릴 때에 ‘속옷을 입어서 아프지 않으니 속옷을 다 벗고 맞겠다’하여 매번 알몸으로 매를 맞아서 살점이 떨어져 나갈 뿐 아니라 온전한 살가죽이 없다. 그런 때에 남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을 제 고깃국과 김치냄새가 코에 들어오면 마칠 듯이 먹고 싶다. 나도 남에게 해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먹을까. 또한 아내가 묘년이니 매신(賣身)을 하여서라도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매일 조석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더러운 생각이 난다. [200]

같은 방에 있는 이종록은 어린 청년이라 따라 온 친척이 없으므로 사식을 갖다 줄 사람이 없는데, 방 안에서 먹게 되면 나눠 먹겠으나 반드시 사식은 방 밖으로 따로이 먹게 하므로 종록이 먹고 싶어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음이라. 내가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고 방 안에 들어와서 입속에서 도로 꺼내어 마치 어미새가 새끼를 물어먹이듯 하였다. [202]

감옥은 물론 이민족의 겸제를 받는다는 감정이 충만한 곳이므로 왜놈들의 지량으로는 일호라도 감화를 줄 수 없으나, 내 민족끼리 감옥을 다스린다 하여도 이런 식으로 모방이나 하여서는 감옥 설치에 조금도 이익이 없겠다고 보아지더라. [226]

결심의 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 가지고 동지들에게 선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침은 왜민적에서 떨어져 나감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침은 감옥에서 다년간 연구한 바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자는 것이다. [239]

당일로 경성역에서 차를 타고 신막에서 일숙하고 익일에 사리원에서 하차햐여 선유진을 지나 여물평을 건너가면 살펴본 즉 전에 없던 신작로로 수십 명이 쏟아져 나오는 선두에는 어머님이 나의 걸을걸이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와서 붙들고, “너는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다던 화경이 네 딸은 3, 4삭 전에 죽었구나. 네게 알게 할 것 없다고 네 친구들이 권하기로 기별도 않았다. 그뿐 아니라 7세 미만의 어린 것이지만은 죽을 때에 부탁하기를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 하더라.” [244]

다음날 아침에 상해에 가족을 이끌고 먼저 와서 살던 김보연군이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숙식을 같이한다. 김군은 장연읍 김두원의 장자이고, 경신학교 출신으로 전에 내가 장연에서 학교사무를 총찰할 때부터 나에게 성심으로 애호하던 청년이니라. 동지들을 심방하여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 동지를 만나 악수하였다. 그 때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국사에 자세히 기록될 터이므로 생략하고, 나는 내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그 후에 안창호 동지는 미주로부터 건너와서 내무총장으로 취임하고, 제도는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257]

나는 안창호에게 정부 문지기를 청원하였다. 이유는 종전에 내지에 있을때 나의 자격을 시험키 위하여 연습삼아 혼자서 순사시험을 본 결과 합격하기 어려움을 알았던 경험과, 다른 높은 직책을 얻으면 허영을 탐하여 실무에 소홀할 우려가 있음이라. 안 내무총장은 쾌히 받아들였다. 다음날 도산은 나에게 홀연 경무국장 사령서를 교부하며 취임 시무하기를 힘써 권한다. [258]

민국 5년(1923)에 내무총장으로 시무하였다. 그간에 가처는 신(信)이를 해산한 후에 낙상으로 인하여 폐렴이 되어 몇 년을 고생하다가 상해 보륭의원에서 진찰을 받고 역시 서양인 시설의 격리 병원에 입원케 되매, 나와는 보륭의원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고 홍구폐의원에 입원하였다가 6년(1924) 1월 1일에 영원한 길을 떠났다. 프랑스 조계 숭산로 구치소 후면인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나의 본의는 우리가 독립운동의 기간에 혼장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모함을 불찬성하였으므로 가처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으나 여러 동지들이 가처가 이왕부터 나로 인하여 무쌍한 고생을 겪은 것이 즉 국사의 공헌이라하여 나의 주장을 불허하고 각기 돈을 내어서 장례도 성대하게 지내었고 묘비까지 세웠다. [260]

나의 60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리(常理)에 벗어지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窮)이 없겠고, 궁하면 귀가 없을 것이나 나는 귀역궁 궁역궁(귀한 몸이어도 궁하고 궁한 몸이어도 궁함)으로 일생을 지낸다. 국가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는 알지 못하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 표면에 한 뼘의 땅 반칸의 집도 소유가 없다. 그런고로 과거에는 부귀영화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여 보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허황된 계산도 많이 하여 보았다. 지금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옛날 한유는 숭궁문(곤궁을 벗어 던지는 글)을 지은 바 나는 우궁문(곤궁함을 천직으로 삼아 벗하는 글)을 짓고 싶으나 글을 잘 짓지 못하므로 그도 불능이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인 심성으로 사회를 아비로 삼아 효사하면 나의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61]

어떤 사람이 묻기를 ‘필경은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하면 나의 최대 욕망은 독립 성공 후에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음이나, 아주 작게도 미국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가 비행기 위에서 죽어지면 시체를 투하하여 산중에 떨어지면 금수의 뱃속에, 바다에 떨어지면 어류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269]

나의 70평생을 회고 하면 살려고 하여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69]

당시 상해에 새로 도착한 인사들이 벌써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의 대표로 파송하였고, 김철을 본국내에 대표로 파견하여 활동하는데, 여러 청년들 중에는 정부조직이 대내외적인 운동추진에 절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각도에서 온 인사들이 각기 대표를 선출하여 임시 의정원을 조직하고 임시정부가 탄생되니, 즉 대한민구 임시정부라. [273]

심지어 정부 국무원에서도 대통령과 각부 총장이 혹은 민주주의 혹은 공산주의로 각기 자기가 옳다는 쪽을 따르니, 큰 줄기만 들어보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데모크라시를 주창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 불일치로 종종 쟁론이 생겨 국시가 서지 못하여 정부 내부에 기괴한 현상이 연이어 생겨난다. [281]

한형권이 상해 공산당도들에게 금력을 살포하여 소위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함에 한인 공산당이 3파로 분립하였으니, 상해에서 설립한 것은 상해파로 그 우두머리는 이동휘이며, 이르쿠츠크의 우두머리는 안병찬 여운형 등이고, 일본서 공부하던 유학파들로서 일본서 조직된 것은 ML파니 일인 후쿠모토 가즈오와 김준연 등을 우두머리로 했다. [283]

상해에서는 공산당 청년들이 국민대회를 실패한 후에도 통일의 미명으로 부단히 민족운동자들을 종용하였다. 공산당 청년들은 의연히 양파로 분립하여 동일한 목적, 동일한 명칭의 재중국청년동맹과 주중국 청년동맹이 각기 상해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여 처음 주장하던 독립운동을 공산운동화 하자고 절규하였다. [284]

임시정부가 처음 조직될 시는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인정, 추대를 하였으나 나중에는 점점 할가화하여 이 3부에서 군정 민정 까지도 합작을 하지 않는가 하면 영역을 다투어 피차 전쟁을 하기까지 하였다. 자신이 자신을 욕되게 만든후에 남이 자신을 욕함이 이를 가리키는 격언이로다. [287]

의정원에서 일대 문제가 되었다.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내게 와서 국무령으로 조각하라고 강권하거늘 나는 사양하였다. 의장은 다시 강권하기로 나는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고사하였다. 첫째 나는 해주 서촌 김존위의 아들로서 정부가 아무리 축소된 시가일지라 하여도 일국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된즉 불가하고, 둘째 인재가 없어 실페하였거늘 나는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터이니, 이상 두 가지 이유로 명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을 언명한즉 이씨 왈, “첫째는 이유될 것 없고, 둘째는 백범 곧 출산하면 지원자들이 있은즉 쾌히 응낙하여 의정원에 수속을 밟고 곧 조각하여 무정부상태를 면하게 하라” 한다. 권고에 응하여 국무령으로 취임 조각하니,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김규홍 등이었다. 조각의 곤란이 심한 것을 절감하여 국무령제를 위원제로 개정하여 의정원에서 통과되었으니, 국무회의 주석은 명목적으로는 있으나 개회시에 주석할 뿐으로 각 위원이 번갈아 맡을 따름이요 평등한 권리인 즉 이로부터 정부의 분규는 종식된다. [288]

그 길로 안공근 집에 가서 선서식을 행하고 이봉창군에게 폭탄 두 개를 주고 다시 3백원을 주며 “선생은 마지막 가시는 길이니 이 돈은 동경 가시기까지 다 쓰시고 동경 도착 즉시로 전보하시면 다시 송금하오리다.” 그리고 사진관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의 나의 얼굴에는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던지 이씨는 나를 권한다. “나는 영원한 쾌락을 느리고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양인이 희열한 안색을 띠고 사진을 찍으십시다.” 나 역시 미소를 띠고 사진을 찍었다. [297]

그러자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린다. 윤봉길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나를 주며 내 시계와 바꾸기를 원하면서 “저의 시계는 전날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의하여 6원을 주고 매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인즉 나에게는 1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한다. 나는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주었다. [304]

우리나라에서 한 당 송 원 명 청 각 시대에 사신이 왕래하였다 북방보다도 남방 명조시대에 우리의 선인들은 거의 다 눈 먼 사람만 사절로 다녔던 것인가. 필시 환상만 있고 국계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문익점이 면화씨를, 문노란 사람은 물레를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하나 그 외에는 언필칭 오랑캐라 지칭하면서도 명대에 의관문물을 중국의 의식을 좆는다 하여 실지에 아무 이익도 없고 불편 고통스럽기만 한, 예를 들면 망건이나 갓 등 망할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립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이 만들어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리 민복의 실생활은 도외시하고 주희 학설같은 것은 그대로보다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으로 주창함으로 사색당파가 생기어 수 백년 싸움질만 하는데 민족적 원기가 다 소모되고 남은 것이 없으니 발달된 것은 오직 의타심 뿐이라. 망하지 않고 배기리오. [317]

장개석의 의견을 말하기를 “특무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은가. 장래 독립하려면 무인을 양성하여야 하지 않은가?” 함에 나의 대답은 “고소원불감청이다. 장소와 재정의 문제라.” 하였다. 장소는 낙양분교로, 물력은 발전을 따라 공급한다는 약속하에 군관 1백명씩 1기에 양성하기로 하고 동삼성에 사람을 보내 이전 독립군인들을 소집할 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김창환 등 장교와 그 부하 수십명의 청년들과 관내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 있던 청년을 총소집하여 백명을 제1차로 입교하게 하고, 이범석은 교관 영관을 입교 시무케 하였다. [321]

남경서 모친 생신에 청년단과 우리 노 동지들이 돈을 걷어 헌수하려는 눈치를 챈 모친은 “그냥 돈으로 주면 내 구미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고 하시므로 그 돈을 드린즉 단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고 도리어 보태어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332]

나는 광복군 즉 한국 국군을 허락하여 베풀어주는 것이 3천만 한민족의 총동원적 요소임을 설명하여 장개석 장군에게 보내었더니 즉시로 김구의 광복군 계획을 찬성한다는 답장이 왔다. 임시정부에서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에 임명하고, 있는 역량을 다하여 중경 가릉빈관에서 중국인과 서양인 인사를 초청하여 우리 한인을 총동원하여 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30명의 간부를 선발하여 서안으로 보내어 몇 해 전에 서안에 먼저 파송하였던 조성환 일행을 합하여 조선광복군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343]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니 인원도 많치 못하여 몇 달 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3지대를 찾아 온 것을 지대장 김학규가 임시정부로 보낸 것이었다. 이 사실은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어 중한문화협회 식당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양 여러 나라의 기자들이며 대사관원들도 출석하여 우리 학병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발하였다. [357]

이것을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어 미국의 O.S.O.S를 주관하는 사전트 박사는 광복군 제2 지대장 이범석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쓰 중위는 제3 지대장 김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게 비밀 훈련을 하였다. [357]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뿐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모든 공이 애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359]

나는 대한나라 자주독립의 날을 기다려서 다시 이 글을 계속하기로 하고 아직은 붓을 놓는다. [368]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369]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 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370]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이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는 민족도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372]

나의 정치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을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대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규범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있는 나라나 자유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장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데 달렸다. 자유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눈 의사에서 오고 자유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중의 어떤 일 또는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온다. [372]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가지가 곧 민주주의다. [375]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 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377]


● 내가 저자라면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우리나라의 독립 이라는 백범의 ‘나의 소원’은 언제 들어도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다. 백범일지의 어디를 펼친들 감동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을까마는, ‘나의 소원’에서는 그 감동의 깊이가 더 깊어진다. 백범이 그렇게 조국의 독립을 원했다는 것 말고도 백범일지의 끝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은 하나하나의 내용들이 눈이 확 뜨이게 한다.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공자 석가 예수가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니 우리민족을 끌고 그 나라로 가지 않겠다.’ 는 백범의 말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자존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 세계 인류가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참 좋은 일이요, 인류 최고의 희망이요 이상이다’라는 지적에서는 백범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느낄 수 있다. 당장 나라와 사회의 혼란이 극심했던 그 시기에 세계 인류에 관해 내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백범은 이미 그 지점까지 시야의 경계를 넓혀 놓고 있었다.
자신의 정치이념을 밝혀 놓은 글은 정치인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부분이다. 백범은 뚜렷한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고 추구해 온 지향점을 말해준다.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며, 왜 독재의 나라가 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소상히 밝혀놓은 것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민주주의의 국가의 절차와 방식을 밝힌 부분, 민주주의 나라는 이러이러하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글에서는 이론적 주장을 찾아보기 힘들다. 활자와 학문으로 이루어진 이론이 아닌 백범의 절실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글들은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깊은 울림을 갖고 있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백범은 뜻밖의 의견을 내놓는다. 백범은 자신이 원하는 나라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말한다. 백범이 그 말을 한 시대를 생각해보자. 그 시기는 세계대전이 끝난 시기이고 대한민국은 간신히 독립을 했지만 나라가 두 동강난 상태였다. 남북은 대치하고 있었고 사회는 좌우익이 뒤섞여 죽고 죽이는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먹고 사는 것은 어땠을까. 많은 국민들이 하루에 밥 세끼 먹기도 힘든 게 나라의 사정이었다. 나라나 국민이나 물리적 생존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 이상에 우선순위를 두기 어려웠다.
그러한 시기에 당연히 나올 말은 경제력과 군사력일 것이다. 우선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것이고, 당장 눈앞에 있는 북쪽의 위협을 억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은 그 시기에 부자나라나 힘센 나라가 아닌 ‘아름다운 나라’를 원했다. 남의 침략을 당해봤으니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경제력이 풍부하진 않지만 생활을 할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고 싶다고 한다. 덧붙여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인의, 자비, 사랑이라고 한다.
당시의 현실을 보아서는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국가의 장래를 길게 내다보았을 때는 뛰어난 혜안이다. 백범이 국가 경영에 대한 의식을 명확히 갖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다.

책의 앞에서 밝혔듯이 백범일지 상편은 백범이 어린 두 아들에게 자신이 지낸 일을 알리고자 쓰기 시작했다. 하편은 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알리려고 쓴 것이다. 백범은 상 하편 모두 유서 대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책은 김구라는 개인의 솔직한 심정을 가감없이 담고 있다. 남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행적과 감정을 거짓 없이 실은 것이다. 책을 펼치면 백범의 행적과 마음가짐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일인(日人)살해 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인천감옥에서의 탈옥 장면은 인간적 고뇌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같이 옥에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자니 자신도 발각될 것 같아 혼자 탈옥하려 하지만 결국 그들을 먼저 내보내고 자신이 마지막에 탈옥을 한다. 백범은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그들을 모른체 하려 했던 마음도 그대로 적고 있다. 독립운동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의 솔직함이 보인다.
신민회 사건으로 옥에 갇혀 고문을 받을 때는 그보다 더한 마음을 적고 있다. 고문을 당하면서 몸은 살점이 떨어져 나갔는데 남들이 사식을 먹을 때 풍기는 고깃국과 김치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그 냄새를 맡으며 백범은 남을 해하는 거짓말을 해서 밥을 받아먹을까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아내가 젊은 나이니 몸을 팔아서 라도 좋은 음식을 넣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자신의 말로도 더러운 생각이라고 한 것을 그대로 적었다. 임시정부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굳이 그런 이야기들을 남길 필요가 없었음에도 의도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다.
책을 읽다보면 구한말에서 광복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적 흐름이 한 눈에 보인다. 동학의 발현과 동학운동, 을사조약 체결, 신민회 사건, 3.1운동, 임시정부의 탄생, 이봉창 윤봉길 의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과정, 광복군 양성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책에서만 보아왔던 독립운동과 사건들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전개 되었는가가 생생하다.
마치 영화를 보다가 영화 속의 백범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김좌진 이동녕 등이 스크린 밖으로 나와 옆에 앉아있는 듯 하다. 옆에 앉은 그들은 영화를 같이 보며 장면마다 자세히 현장의 목소리로 설명을 해준다. 그들과 같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역사 속에서의 유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역사의 물줄기가 몸을 흠뻑 적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백범과 독립운동의 역사는 그 시대, 그들의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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