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이은미
  • 조회 수 2640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8년 6월 16일 17시 13분 등록
1.저자소개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더 소리를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과거의 7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라고 말한 백범 김구선생은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가난한 농사꾼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비록 이름 석자밖에 쓸줄 몰랐으나 배움의 열성을 가지고 있던 아들을 위해 부백범의 집에다 서당 선생을 모시기도 하고, 부친의 병환으로 학자금이 부족할 때에는 이웃마을의 서당 훈장에게 간청. 무료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모친은 백범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백범이 옥에 갇혔을 때 옥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뿐아니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백범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仁)과 신(信)을 양육한 하였으며,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 지장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내며, 백범이 독립운동에 전념하도록 이끌었다,

백범은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 그는 한때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19세기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백범은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계의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명성황후가 '왜놈' 들에게 시해당한 데다가 단발령 시행으로 백성들의 분기가 탱천하여 이곳 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방랑길'에 오른 백범은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주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그가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三浦梧樓)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그 일본인은 '육군중위' 쓰치다(土田)였다.
이 일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백범은 재판을 받으면서 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여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재가로 사형집행은 면했다.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안 백범은 탈옥의 비상수단을 감 행하였다.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에 이르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탈옥에 따른 위험을 감추기 위해서는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은 평안도의 영천사 방주(房主)를 끝으로 일년여 동안의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환속, 귀가하였다.

그에게는 민족을 위한 새로운 구상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즉 그가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와 [세계지지 (世界地誌)] 등을 통해 깨달은 신지식에 의하면,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취했던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민지(民智)를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1902년 부친상을 당한 백범은 그 이듬해 해상(解喪)과 함께 예수교에 입교함과 동시에 구국교육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예수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에는 안창호·전덕기·이승훈 등과 함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한국강점을 서둘렀다. 한국인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의 의거가, 12월에는 이재명의 의거가 있었다. 백범은 안중근의 의거로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무혐의로 곧 출감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연말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징역을 언도받았고 수감 중에 터진 '105인사건' 에 걸려 또 2년을 추가받아 17년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1914년에는 17년전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항만 축조공사 등에 강제 노역당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 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는 뜻에서였다.


1945년에 대한민국은 광복하게 되었지만 그는 기쁘기만 할 수 없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서안 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자주독립의 의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는 UN의결의에 반대하였으며 통일전부의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38선을 넘어 정치회담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민족의 비극이며 비통한 일이 아닐수 없다.


2.미음을 무찔러 들어 온 글귀



애초에 이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사건 이후 중일 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이 남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13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14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책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 하는 것이니 자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15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된 사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러 지어낸 것은 전혀 없으니 믿어주기 바란다. 19

아버님이 사람을 잘 때리셨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을 피하였다.20

어느 날 내가 아침도 먹기 전에 그 선생님이 집에 와서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목놓아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하였다. 작별하고 나서도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31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나.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33

아버님이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免費學童)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 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34

새벽 굼뱅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58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잘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고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힌 헛된 일이었다. 61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이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실행·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 주셨다.63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일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63~64

“만고 천하에 흥해보지 못한 나라가 없고 망해보지 못한 나라가 없네. 종전에는 토지와 백성은 가만두고 군주 자리만 빼앗는 것으로 흥망을 논하였지. 그러나 지금의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강제로 집어삼키는 것이네. 우리나라도 필경 왜놈에게 망하게 되었니. 소위 조정대관들은 전부 외세에 영합하려는 사상만을 가지고 러시아를 친하여 자기 지위를 보전할까, 혹은 영국이니 미국을. 혹은 프랑스를, 혹은 일본을 친하여 자기 지위를 견고히 할까, 순전히 이런 생각들뿐이라네. 나라는 망하는 데, 국내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들도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구국의 경륜도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
내가 놀라 질문하지 선생은 대답하였다.
“일반 백성들이 의(義)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쳐 대궐 안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나라를 제2의 왜국(倭國)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만고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은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충성하는 일사보국(一死報國) 한 가지 일만 남아있네.”
선생은 슬픈 낯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도 울고 또 물었다. 65~66

조선의 四大物이라 함은 경주의 인경과 은진 미륵, 연산의 쇠솥, 함흥의 장승을 이르는 것이다. 71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은 것은 가히 장부로다.94

자문자답 속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속에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94

이창매는 본시 연안의 통인으로 그 부친 장례 후에 사시장철 비바람을 맞으면서 지성으로 산소를 모셨다고 한다. 얼마나 극진하게 묘를 묘셨던지, 묘앞의 신 벗은 자리에서부터 절하는 자리까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갔던 자국들과 두 무릎을 꿇었던 자국, 그리고 향로와 향합을 놓았던 자리에 영영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103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5

감옥 담을 넘을 줄사다리를 매어 놓고 나니 문득 딴 생각이 들었다. ‘조덕근 등을 데려가려다가 무슨 일이 날지 모르니 이 길로 곧 가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자들은 결코 나의 동지가 아니다. 기필코 건져내서 무엇 하리’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마침내 두 번째 생각이 이기고 말았다.131

볏짚을 안아다가 방앗간에 펴고 하룻밤을 보낼 훌륭한 방을 준비하였다. 볏짚을 깔고 볏짚을 덮고 볏짚을 베고 누우니, ‘인천감옥 특별방서 2년 동안 지내던 연극의 1막이 내리고 지금은 방앗간 잠으로 제2막이 열리는구나.139

삼남 양반의 위엄이나 속박이 심하기는 하지만 그런 중에도 약간의 미풍 양속이 없지는 않다. 모내기철에 김제(金堤) 만경(萬頃)을 지나며 보니 농사꾼들이 아침에 일을 시작할 때에 사명기(司命旗)를 들고 장고를 울리며 들에 나가 농기(農旗)를 세운다. 모를 심을 때에 선소리꾼이 북을 치고 농가(農歌)를 인도하면 남녀 농군들은 손발을 흔들고 춤을 추며 일을 한다. 논 주인은 탁주를 논두렁 여기저기에 동이째 놓아두고 마음대로 먹게 하고 행인이 지나면 다투어 권한다. 농군이 음식을 먹을 때는 현직 감사나 수령이라도 말에서 내려 인사한다. 149

저녁 안개가 산 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 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煩惱)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 하였다. 151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154

“견월망지(見月忘指)의 오묘한 이치를 말하고 칼날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참을 인”(忍)자의 해석을 하여주었다. 156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을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165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은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179

아. 슬프도다. 이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 하시던 훈육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 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180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고명한 의사를 부른다거나 기사회생의 명약을 드시게 하기에는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른것도 이런 절박한 지졍에서 하신 일인데 내가 또 단지한다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터이다.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틈을 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을 한 점 떼어내어 고기는 불에 구워 약이라고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181

“자네의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첫째는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183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196

나는 종산에서 첫아기로 딸을 낳았다. 태어난지 며칠만에 모녀를 가마에 태워 와서 찬 기운을 쐰 탓인지, 딸 아이는 안악에 도착한 후 바로 죽고 말았다. 198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앙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215

국내 국외를 통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니, 곧 신민회였다.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귀국하여 평양에 대성학교를 병설하여 청년을 교육하는 것을 표면의 사업으로 내세우면서…이면에는 400여명의 정수분자로 조직된 단체, 신민회를 훈련, 지도하였다. 215

황해도를 중심으로 안명근을 잡아들이고는 계속하여 전 도내의 지도계급 부호를 일일이 압송하였다. 경성에 이미 배치한 감옥, 구치소, 각 경찰서 구류소에는 미처 수용할 수 없으므로 집물창고와 사무실까지 구금소로 사용하면서 임시로 창고 안에 벌집과 같은 감방을 만들었다. 나도 그곳에 옮겨 수감되었는데, 한 방에 두면 이상은 가두어 두기가 불가능했다. 219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물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 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꺽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였다. 220

처음에 생명부터 신문을 시작하던 놈이 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는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할 때에 자괴심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 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듯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하여 부끄러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1

나는 결심에 결심을 더하여 나의 혀끝에 사람의 생사가 달렸다는 것을 각오하였다. 222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그 양심에 애국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아인가…거북이는 진흙 속에 빠지리니 기러기는 해외로 날으라는 구를 혼자 읊었다. …나의 생명은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225

“나의 육체를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나의 정신은 뺏을 수 없다”고 같이 수감된 동지들에게 주창하던 기개와 절개를 생각하면서 이러다가 인간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지고 짐승의 본능만 남는 것이 아닐까 자책하던 때 아카시의 방에서 극진한 우대를 하면서 신문한 것이었다. 228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때도 학생들이 나를 숭배함 보다는 내가 학생들에게 천배 만배의 숭배와 희망을 두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망국민이 되었으나 학생들은 후일 건국영웅이 될 것을 바라덤 마음도 헛된것으로 돌아갔다. 236

7년 이상은 옥중귀신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육체로는 복역을 하나 정신적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는 죽는 날까지 낙천생활을 하기로 했다. 동지들도 대부분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므로 옥중에서 하는 일이 서로 모의하지 않고도 같은 때가 많았다. 오월동주(吳越同舟)란 옛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닌줄 깨달았다. 238

나의 심리상태가 체포된 이전과 이후가 큰 변동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인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238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244

김좌진은 침착하고 용감한 청년으로 국사를 위하여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는데, 친애의 정을 서로 표하였다. 점차로 옥중에도 생활의 취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245

어머니-“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번씩을 넣어주랴? 246

어머님이 나를 대하셔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다.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 드렸을 테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247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261

이름을 구(九)라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267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하여야 할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하고 돌려 보냈다. 283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貴)하면 궁(窮)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것이 될른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289

자식들에 대하여도 아비의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89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290

<백범일지>상권은 53세때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 시간을 들여서 기술한 것이다. 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에 글공부를 걷어 치우고 예순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채 나의 보잘 것 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년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295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때가 가까워 졌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 운동을 계획하던 때 백범일지 상권을 기술하였다. 296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고군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6

나 자심으로 말하면 날마다 늙어가고 병들어가니 상해시대를 ‘죽자꾸나’시대라 한다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 하겠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을 것이가?’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하면 쉬운 듯 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데서나 가능하다. …지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고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98

안창호 선생을 보고 정부의 문지기를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살이 할 때 후일 만일 독립정부가 조직되면 뜰을 쓸고 문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다. 302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07

과연 이씨는 의기남자로 살신성인할 큰 결심을 품고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씨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맞본 방랑생활을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323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네가 민단 사무실에 가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손으로 국수를 사다가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사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325

이에 윤군은 쾌히 응낙하며 말하기를 “저는 이제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 하고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331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336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힘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후에 또 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운동을 먼저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은가.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 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 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가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325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367

퇴원 후 즉시 걸어서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어머님께는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지내다가, 거의 퇴원할 무렵이 되어서야 신이가 사실을 알려드렸던 것이다. 내가 뵈올 때에도 어머님은 조금도 동요되는 법이 없이 “ 자네의 목숨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371



그들은 어머님을 잘 모시지 못하는 나의 형편을 알고, 자신들이 어머님 시중을 들겠으니 나는 마음놓고 독립사업에만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런 성심을 품고 남안에 도착하였을 때, 어머님은 이미 인제의원에서도 손을 놓고 퇴원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던 때였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377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셨다. 종전에 우리나라는 노복을 사용하였으나, 국가가 병탄된 뒤 경향에서 동포들의 양심 발동으로 “내가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어찌 차마 동포를 종으로 사용하랴” 하고 자연히 노복을 물리치고 고용제를 고용하였다.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평생 ‘고용’ 두 글자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 까지도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379

비통하고 슬프도다! 하느님이 진정 무심하신가. 어린 아들, 어린 딸도 왜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이래 왜구에게 일가족이 도륙됨이 무릇 몇 백 몇 천 집이랴만. 기미 3.1운동 이래 상해 운동가들이 당한 것에서는 이명옥군이 당한 비극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노니, 광복 완성 후 이명옥일 가를 위해 충렬문을 수아하고 고향에 세워서 영구히 기념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387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고 하였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어. 서안 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399

즉시 마로가 어머님 댁을 찾아가 보니 천만 다행으로 안전하셨다. 과히 놀라시지나 않으셨는지는 여쭈어 보았더니 “잠이 깊이 들었을 때 침상이 흔들렸는데, 그것이 폭탄 때문인가? 이같이 말씀하셨다. 403

고국을 떠난지 27년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두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이 그 하나이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후손들이 왜정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했던 바와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 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반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붙어 있다. 동포들의 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409

어머님이 중경에서 운명하실 때 “나의 원통한 생각을 어쩌면 좋으랴” 하시던 어머님의 최후의 말씀을 생각하니 그것이 이날 이자리에 모자가 같이 옛이야기를 하지 못할 줄 예측하시고 하신 말씀 같아 슬픈 마음을 진정키 어려웠다.421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더 소리를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과거의 7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한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3

피와 역사를 같이 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424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는 ㅇ리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425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한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125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장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우리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갖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426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야 한다.자유란…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자유와 자유가 아님을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데 달려 있다. 자유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유 없는 날아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나온다. 427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런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428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개인 생활이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428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떤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떤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의 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나는 어떤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사랑과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430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남의 침략에 가슴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은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431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431-432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는 자유이다. 공원의 꽃을 껏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432

나는 우리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433



3.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그가 서문에 언급한바대로 그의 유서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살뜰히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부모로서 자식을 건사하지 못한 아비로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이며 또 후손들에게 남기는 유서이다.
시대 자체가 개인의 삶은 존중되지 않았으며 궁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현실을 비판과 절망에 머무르지 않고 희망을 위해 자유를 위해 그리고 후손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삶을 배워 그의 유서를 받들어야 하겠다.

인물로서의 백범선생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은 그의 애국심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청년으로 민족 의식이 정립된 이후 모든 것을 다 희생해 가면서 전 생애를 일제의 침략 하에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자했다..
백범의 나라 사랑과 겨레 사랑은 일제의 고문으로 의식이 거의 희미해진 죽음 한 걸음 앞에서도 강철같은 힘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일제에게 모두 17년형의 언도를 받을 무렵,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야밤에도 몇 차례 죽었다 깨어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철장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그는 쓰러져 육신이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왜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일지』
.
또한 백범의 성품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은 그의 '담대성'과 '용감성' 이다.
백범이 19세의 어린 나이로 동학의 팔봉 접주가 되고 선봉장이 된 일, 김이언 의병 부대에의 투신, 일본군 특무장교 쓰치다(土田)의 처단,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조직과 이봉창(李奉昌)의사,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의거, 어려운 조건에서의 광복군 창군 등은 그의 이러한 담대한 성품과 관련된 일들의 임무였다고 할 수 있다.인물로서의 백범의 큰 특징은 또한 '성실성' 과 '열성'이 매우 강한 것이었다.
백범은 어떤 일을 맡거나 하고자하면, 그것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매우 성실하게 열성껏 하는 품성을 갖고 있었다. .백범의 품성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실천'을 중시하고 좋아하였다. 백범이 동학, 유학, 불교, 기독교의 여러 가지 종교를 모두 섭렵했을 때에도, 그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주고 독립을 지원해주는 종교 내용의 '실제'를 취하였지만 그 종교의 이론에도 집착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백범은 종교적 배타성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사상과 이념의 특징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유추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첫째는 독립사상이다.
이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하여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 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윈이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라고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나의 소원」

둘째는 자유사상이다.
백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 나는 어떠한 의미든지 독재 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 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와,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 나라를 건설하자고." 「나의 소원」

셋째는문화국가사상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싸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나의 소원」

나라가 가난하고 약한 상태에서는 반드시 부강을 실현해야 하지만 그것은 최선진 부강국과 같은 수준에 도달하면 족하고, 그보다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아름다운 문화 국가를 건설해야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백범이 가리킨 문화는 남을 모방하는 문화가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창조적 문화였다. 백범은 우리 나라가 아름다운 높은 수준의 창조적 문화 국가가 되어 세계 평화가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 실현될 것을 소원한 것이었다.

백범은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백범은 처음부터 통일 조국을 건설하지 않고 38선의 남북에 각각 두개의 정부를 수립하면,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동족상잔의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를 매우 염려하였다.

백범은 이렇게 크고 큰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희생당하더라도 동포들의 비극을 사전에 막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유 민주의 통일 조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한국 민족의 영원한 큰 스승이었다.

김구선생님은 진정한 자유는 공원의 꽃을 껏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라 했다.
나는 글을 읽으며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국가인가? 라는 의구심을 갖는다.
우리에게는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철학이 존재하는가?
현재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는 소고기수입 사건과 더불어 우리는 여전히 정신적 문화적 철학적 하물며 먹거리까지 독립국가가 아닌 여전히 식민으로 살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김구선생님은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그의 삶의 철학이었으며 목표이었으며 그의 삶의 푯대와 같았던 싯구를 소개하며 이글을 마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IP *.161.251.192

프로필 이미지
은미
2008.06.16 17:34:39 *.161.251.192
솔직히 어느때보다 이번 과제에 정성을 담지 못했음을 밝힙니다.
사부님을 비롯 동료들께 죄송합니다.
백범김구선생님 사이트에서 많은 내용을 가지고 왔음을 고백합니다.
좀 더 붙들고 늘어지곳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저녁에 중요한 약속과 내일 아침 일찍부터 스케줄이 꽉 차있어 그냥 올립니다.

다음부터는 좀더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