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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6일 23시 43분 등록
책 : 백범일지
저자 : 백범 김구
주해 : 도진순
출판사 : 돌베개

Ⅰ. 저자에 대하여

저자 : 백범 김구 (1876 ~ 1849)

저자 백범 김구는 구한말의 조선 황해도 해주의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 본명은 창수였으나, 후에 본인 스스로 구(九)로 호는 백범으로 개명한다.

그는 항일 독립투사이자, 정치가이자 사상가였으며, 한평생을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와 그 조국의 백성들을 위해 살다 갔다. 그의 삶은 구한말과 일제 시대, 그리고 우리 나라의 근대화 시기를 거치는 시기의 파란만장한 한국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 파란만장한 조국의 역사 앞에서 그는 방관자로 살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조국의 정세와 격변이 세계사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스스로 정한 자신의 길 즉, 민족의 독립을 위한 길에 온몸을 내던진다.

저자의 생애

어릴 적에는 한학을 배웠고 청년기에는 동학에 가담을 하여서 접주(接主:교구 또는 포교소의 책임자. 포주 또는 장주라고도 함)로 활동을 하였으며, 동학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일본인 장교를 맨손으로 살해했다.

을미년에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난 후엔 왕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여 사형을 형량을 받고 복역을 하기도 한다. 복역 중 탈옥을 하여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가 다시 환속하고 1903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한다.

1909년부터는 안악의 양상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0년 신민화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복역 중에 감형을 받아 1914년 출옥을 하고 농촌 계몽 활동에 참가 한다.

3•1운동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경무국장•내무총장을 지냈고 1926년 6월 임시 정부의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백범은 임시정부를 항일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 근본적인 개편을 해나갔다.
1928년 이 시영, 이 동녕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여 결사단체인 "한국 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사쿠라다몽 일본 국왕 저 격 사건, 상해 홍구공원 일본 국왕생일 축하식장의 폭탄 투척 사건 등 이봉창, 윤봉길 등 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1년 일제가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세계 정세는 일변하게 되었다. 이에 임시 정부는 그 해 12월 9일 바로 일제가 전란을 일으킨 다음 날, 즉각적으로 대(對)일본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민국이란 국명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 군 산하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 작전을 실시하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았다. 백범은 이에 유격 전술을 하지 못하였던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러워 한다.

해방된 조국에 우리 민족으로 구성된 무장군대가 있었음에도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진주하였고 이것으로 인해 민족 분단이 고착화 되려고 했다. 이 때 백범은 단독정부 수립반대와 통일조국의 의지를 강력히 보여 주었다.

그가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38선을 넘어 정치회담을 벌였으나 그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46년 6월 26일 백범은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당한다.

‘백범일지’ 파란만장한 그의 삶과 역사의 기록

그의 이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의 저서 ‘백범일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백범일지는 저자가
1929년에서 1947년에 걸쳐 20년 동안, 그의 아들 인(仁)•신(信) 두 아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글이다. 상•하 두 편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상편은 저자의 항일 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고 하편은 해방 후 통일 국가를 위한 자신의 활동과 그 이념에 대해서 적어 두었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상권)
백범 출간사
[15]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인•신 두 아들에게
[19]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너희들이 장성하였으면 부자간에 서로 따뜻한 사랑의 대화로 족할 것이나,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 나이는 벌써 쉰셋이건만, 너희들은 겨우 열 살, 일곱 살의 어린 아이니, 너희들의 나이와 지식이 더할수록 나의 정신과 기력은 쇠퇴할 따름이다.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2]강∙이씨들은 대대로 방장을 하지만 우리 김가는 존위 외에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으니 이것은 취직의 정치적 압제이다. 강∙이씨들은 양반의 권세로 우리 집안의 토지를 강점하고 금전을 강탈한 후 농노로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경제적 압박이다.

[24]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이 태몽이라고 늘 말씀 하셨다.

[29]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추태는 상놈의 본색이요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고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30]”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침산 강씨의 선조는 우리만 못하나 현재 진사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으냐, 별담 이진사 집도 그렇다.”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며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31]일전에 매달 보는 시험을 앞두고 선생님은 나에게 은밀하게 “네가 늘 우등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못 외는 것처럼 모른다고 대답하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내가 선생님 부탁대로 하였더니, 그날은 신존위 아들이 일등했다고 닭 잡고 술상 차려 잘 먹었다. 그런데도 결국 그 선생을 해고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소위 ‘상놈의 짓’이다.
어느날 내가 아침도 먹기 전에 그 선생님이 집에 와서 작별을 고하였다. 나는 전신이 아득하여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목놓아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작별하고 나서도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

[32]나무하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그 동네 서당에서 밤낮 책 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얼마 후 부모님이 장연으로 오시자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공부하겠다고 졸랐다.

2. 시련의 사회 진출
[37]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부를 지어 과문 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38]”제가 어떻게든 공부로 입신양명하여 강가•이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즉,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또한 큰 선비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집안이 이같이 가난하니 앞으로도 서당 공부를 그만 두겠습니다.”

[39]’상서’중 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42]설명을 듣고 나는 매우 마음이 흡족하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구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 되었다.

[53]나는 이용선의 머리를 껴안고 통곡하다 저고리를 벗어 이용성의 머리를 감싸고 동네사람들을 지휘하여 정성껏 묻어주게 했다. 그 저고리는 어머님이 내가 동학 접주로 지도자 노릇 한다고 처음으로 지어 보내신 명주저고리였다.

[61]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고선생이 저처럼 나를 사랑하지만, 참으로 내게 저토록 고명한 선생의 사랑을 받을 만한 소질이 있는가? 내가 선생의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 해도 종전에 과거니 관상이니 동학이니 하던 것과 같이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한다면, 내 자신이 타락됨은 둘째요, 고선생과 같이 순결한 양반에게까지 누를 기치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61]”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3. 질풍노도의 청년기
[86]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94]심신이 자못 혼란한 상태에 빠져 고민하고 있는데, 홀연히 한 가닥 광성이 가슴 속에 비치는 듯하였다. 그것은 바로 후조 고능선 선생이 가르쳐 주신 교훈이었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94]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문,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답,”그렇다”
문, “네가 어릴 대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96]선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 내 발에 채이고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칼빛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 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97]밥 한그릇을 먹은 지 10분 정도밖에 안되었으나, 과격한 행동을 한 뒤라서 한 두 그릇쯤은 더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곱 그릇까지 먹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애당초 일곱 그릇을 더 요구한 것이 거짓말로 알려져서는 재미없는 일이라 큰 양푼 한 개를 청하여 밥과 반찬을 한 군데에다 붓고 숟가락을 한 개 더 청하였다. 숟가락 두 개를 포개 들고서 밥 한 덩이가 사발통 만큼씩 되게 밥을 떠먹였다. 곁에서 보는 사람 생각으로는 몇 번만 더 뜨면 그 밥을 다 먹겠구나 하도록 보기 좋게 한 두어 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먹고 싶던 원수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 않는다.”

[106]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을 지나도록 은헤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었다.
감옥 안이 극히 불결한데다가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이라. 나는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짧은 소견에 자살을 하려고 동료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 위에 손톱으로 ‘충’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드디어 숨이 끊어졌다. 숨이 끊어진 잠깐 동안, 나는 고향으로 가서 평소 친애하던 재종동생 창학이와 놀았다. 고시에 “고향이 눈앞에 늘 아른거리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혼이 먼저 가 있도다”라 하였는데, 실로 헛말이 아니었다.
홀연히 정신이 회복되어 보니, 동료 죄수들이 고함을 치며 죽는다고 소동을 치고 있었다. 그 자들이 내가 죽을까 봐 놀라서 그리 한 것은 아니고, 내가 정신을 읽으면서 몹시 격렬하게 요동을 쳤기 때문에 일어난 소동이었다. 그후로는 여러 사람의 주의로 자살할 기회가 없었다. 또 나 스스로도 그 뒤로는 병마로 죽든지 저절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자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열은 내렸으나, 보름 동안 음식은 입에 대어보지 못하였다.

[108]”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을 하는 있는데, 춘추대의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배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109]”전에는 내가 아무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나에 대한 대우를 강도로 하나 잠잠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정당하게 내 뜻을 발표하였음에도 아직도 나를 이다지 홀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놓고 그것을 감옥이라 하여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 도망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였던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하고, 또 내 집에 와서 석 달여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의 무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느냐?”

[114]감리서 직원 중에서도 나와 이야기해 본 후 신서적들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문화•경제•도덕•교육•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그러니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구하여 장래 국가에 큰 일을 하여야 하오.”
이같이 말하며,’세계 역사•지지’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갖다주며 읽어보라 권하는 이도 있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감리서 직원들이 종종 와서 내가 신서적에 열심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는 빛을 보였다.

[115]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9]이윽고 교수대로 끌려나갈 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성현의 말씀에 마음을 가라앉혔다가 성현과 동행할 생각으로 ‘대학’만 읽고 앉아 있었다.

[120]”아이구, 이제 김창수는 살았소! 아이구, 우리 감리 영감과 감리서 전직원과 각 청사 직원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밥 한 술 먹지 못하고 창수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인단 말이냐 하고 서로 말없이 얼굴만 물끄러니 바라보며 한탄하였소. 그랬더니 지금 대군주(고종) 폐하께옵서 집무실에서 전화로 감리 영감을 불러 계시옵고, 감리 영감은 김창수의 사형을 정지하라는 친칙을 받잡고 밤중에라도 감옥에 내려가 창수에게 알려주라는 분부를 내리셨소. 오늘 하루 얼마나 상심하셨소?”

[121]동료 죄수들은 나를 보고 참말 이인이라며 경탄하였다. 사형을 당할 날인데도 평소와 똑같이 말하고 밥 먹고 행동하였으니, 이는 필시 선견지명이 있어 자기가 죽기 않을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고들 하였다. 관리들 중에서도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머님은 그날 밤에야 비로소 그 일을 알게 되셨는데, 감리가 대군주의 친전을 받고서 어머님께 알려드렸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어머님이 당신 아들을 이인이라 생각하게 되셨다. 배를 타고 강화 갑곶 (각구지목)을 지나오면서 강물에 같이 빠져 죽자고 하셨을 때 내가 결코 죽지 않을 거라 했던 일을 기억하시고, “내 아들은 미리 자기가 죽지 않을 줄을 알았다.”고 확신하셨던 모양이다. 어머님뿐 아니라 내외분이 다 그런 신념을 갖게 되셨다.

[126]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132]옥문 밖에서는 벌써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직 담 밑에 서 있었다. 내가 만일 감옥 방안에 있었다면 아무 관계가 없었겠지만, 이미 담 밑에서 나온 후였으므로 급히 탈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남을 넘겨주기는 쉬웠으나 혼자서 한 길 반이 넘는 담을 넘기란 극히 곤란한 일이었다. 시기가 급박하지 않으면 줄사다리로라도 넘어볼 터이나, 문 밖에서는 벌써 옥문 여는 소리가 나고 감방에 있던 죄수들도 떠들기 시작했으므로 그럴 겨를이 없었다. 옆에서 약 한 길쯤 되는 몽둥이를 가져와 몸을 솟구쳐 담 꼭대기를 손으로 잡고 내리 뛰었다. 그때는 최후 결심을 한 때였으므로 누구든지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을 내버릴 마음으로 쇠창을 손에 들고 정문인 삼문으로 바로 나갔다. 삼문을 지키던 파수 순검도 비상소집에 갔는지 인적이 없었다.

4. 방랑과 모색
[154]전날밤 나를 찾아와 자기 상좌가 되어 달라고 할 때에는 지극히 공손하던 하은당부터 “예 원종아”를 기탄없이 부르고,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서 고명한 중은 되지 못하겠다. 얼굴이 어쩌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거라”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 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곧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 쳐내야 하는 것이었다.

[156]그러나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165]그러나 아버님은 내게 원대한 뜻이 있음을 짐작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창수가 장성하였으니 스스로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은아버지는 계속 부모님께 말씀하셨다.
“형님 내외분은 창수놈 글공부 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시오?”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174]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라 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184]할머니 말씀에 결혼 후 공부를 시키든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기지만 지금 세상에는 여자라도 무식해서는 사회에 용납될 수 없고, 여자 공부는 20세 이내가 적당한데 1년이라도 허송하는 것은 안된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 처녀의 말소리가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할머니와 그 모친은 처녀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84]나는 곧 ‘여자독본’ 과 같은 책자를 대강 만들고 지필묵까지 준비하여 미혼의 처를 가르쳤다. 당시 나는 가사도 돌보아야 했고, 아버님 탈상 후 신교육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문화의 우종서 목사, 송종호, 당시 ‘김선생’, 운율의 김태성, 장련의 장의택,오인현, 정창극 등과 신교육 실시를 협의하기 위해 여러 곳으로 돌아다녀야 했기 대문에, 처가에 오래 있으면서 가르칠 형편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틈만 있으면 처가에 가서 가르쳤다.

[185]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 지키던 자들이 예수교에 투신함으로써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 사정을 알게 되어 신문화 발전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다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종서는 그때 전도조사였다. 나와 여러 해 친교한 때문에 예수교 신봉을 힘껏 권하였다. 나도 탈상 후에는 예수도 믿고 신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192]준례는 당시 18세로,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결혼을 원하고 있었는데, 양성칙이 나에게 의향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당시에 조혼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를 절감하던 터여서 준례에게 지극한 동정심이 생겼다.
사평동에 가서 준례를 만나본 후 혼약이 성립되게 되자 강성모 측에서 선교사에게 고발했다. 교회에서 나에게 그만두도록 권고 하였고 친구 중에서 만류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 신창회는 은율읍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최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가 구데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에 유학 보냈다.
처음에는 교회의 금지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을 선언하였으나, 끝내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군예빈이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을 해체하였다.

5. 식민의 시련
[200]내가 뵈었을 때의 노선생은 비록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탈속하나, ㄱ 자 모양으로 허리가 굽어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뜰에 출입했다. 비록 구식 인물이지만 두뇌가 명석하여, 정세를 관찬하는 능력은 신진청년 중에서도 더불어 의논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220]다시는 묻지도 않고 수족을 결박하여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는 고통을 느꼈으나, 마지막에는 눈 내리는 밤 달빛 적막한 신문실 한 모퉁이에 가로 누워있게 되었다. 얼굴과 전신에 냉수를 끼얹은 느낌만 날 뿐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221]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3](하하하, 이 대목은 너무 웃김)(와타나베가)”내 가슴에는 X광선을 댁 있어서 너의 일생 행적과 비밀을 모두 알고 있으니, 터럭만큼이라도 숨기면 이 자리에서 때려죽일 터이다.”

[225]와타나베 놈이 썩 들어서면서 내 가슴에 X광선을 비췄으니 과거를 다 알고 있노라고 할 때. ‘인천 사건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놈의 X광선을 시험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와타나베 놈이 그 사실을 알면서 후일을 위해 일부러 남겨두고 다른 말만 묻는 것이 아니란 사실은, 그놈이 신문할 때 X광선 운운하며 나의 과거와 현재를 잘 아는 듯 표시를 내려고 애쓰는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었다.

[228]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말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229]같은 방에 있는 이종록은 나이가 적은 청년이었다. 친척 가운데 따라온 사람이 없으므로 사식을 가져다 줄 사람도 없었다. 방안에서 먹으면 나누어 먹게 하겠으나, 사식은 반드시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서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침 어미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234]어머님이 손수 담은 밥그릇을 열고 밥을 먹으면서 생각하니, 어머님의 눈물이 밥에 점점이 섞이었을 것이다. 18년 전 해주 옥바라지로부터 인천의 옥바라지는 하실 때까지는 슬프고 황망한 중에도 내외분이 서로 위로하고 의논하시며 지냈으나, 지금은 과부의 몸으로 어느 누구 살뜰하게 위로하여 줄 사람도 없고, 약한 아내와 어린 아이가 어머님에게 무슨 위안을 할 능력이 있을까? 또한 아내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자기 모친이 얹혀 하는 처형 집에 갔다는 소식에는 무한의 느낌이 생긴다.

[237]우리는 며칠 후에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동지들 전부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곳에서 함께 복역하게 되니, 날마다 서로 얼굴 대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고, 간간이 말로도 사정을 알리며 지내는 까닭에 고생 가운데 낙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5년 이하는 세상에 나갈 소망이 있으나 7년 이상은 옥중귀신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육체로는 복역을 하나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낙천생활을 하기로 했다.

[246]어느날 간수가 와서 나를 면회소로 데려갔다. 누가 왔는가 하고 기다리노라니, 판자벽에서 딸깍 하고 주먹이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렸다. 그리로 내다보니 어머님이 서 계셨고, 곁에 왜놈 간수가 지키고 섰다.
근 일고여덟 달 만에 면회하는 어머님은 태연자약하신 안색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은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증하기 바란다. 만인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
오랜만에 모자 상봉하니 나는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저같이 씩씩한 기질을 가지신 어머님께서 개 같은 원수 왜놈에게 자식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 다른 동지들의 면회 정황을 들어보면, 부모 처자가 와서 서로 대면하면 울기만 하다가 간수의 제지로 말 한마디도 못하였다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 어머님은 참 놀랍다고 생각된다. 나는 17년 징역 선고를 받고 돌아와서 잠은 전과 같이 갔어도 밥은 한 끼를 먹지 못한 적이 있는데, 어머님은 어찌 저렇게 강인하신가 탄복하였다.
나는 실로 말 한마디를 못하였다. 그러다 면회구가 닫히고, 어머님께서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거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

[248]그런데 매번 ‘경례’라고 할 때에 들어보면 각 수인들이 입안엣소리로 무슨 말인지 중얼거리는 것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천황이 밥을 준대서 천황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것인가 했는데, 낯익은 수임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한가질 대답했다.
“당신, 일본 법전을 보지 못했소? 천황이나 황후가 죽으면 대사면이 내려 각 죄인을 방송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우리 수인들은 머리를 숙이고 하느님께 ‘메이지란 놈을 즉사시켜 줍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심히 기뻐하여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후부터는 나도 ‘노는 입에 염불’격으로 매번 식사 때에 ‘나에게 전능을 베풀어 동양의 대악괴인 왜황을 내 손에 죽게 합소서”하고 하느님게 기도하였다.

[267]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 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치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환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 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270]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갈 때,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쇠사슬을 마주 맨 자는 인천항에서 남의 구두 켤레나 담뱃갑을 도적한 죄로 두세 달 징역 사는 가벼운 수인이었다. 그 자까지 내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생각다 못해 노역에 잔꾀를 부리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하였다. 여러 달 후 소위 상표를 주었다. 도인권 같이 거절할 용기도 없고,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6. 망명의 길
[275]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것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아내의 말에 반대하면, 어머님이 만장의 기염을 호령하신다.
“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행은, 나는 고사하고 너의 친구들이 감동하였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이런 말씀을 하시기에 내외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늘 지기만 하였다. 어머님은 또 분부하셨다.

[288]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른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290]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분이다. 병원이란 곳에는 혹을 떼러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 온후 서반아 감기로 20일 동안 치료한 것 뿐이다.

[295]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 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10여 년 동안 임시 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어 고성낙일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를, 독립 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때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에 ‘백범일지’ 상권을 기술하였다.

[298]상해 불란서 조계지 보경리 4호의 2층에서 참담하고 고난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최대• 최후의 결심을 하고 본 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 비하면, 지금의 임시 정부는 약간의 진보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날마다 늙어가고 병드니, 상해 시대를 ‘죽자꾸나 시대’라 한다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 하겠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하고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도아보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이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298]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하권)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307]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17]다른 위원들은 거의 식구들과 함께 거처하였다. 그러나 나는 민국 6년 (1924)에 처를 잃었고, 7년에는 모친께서 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셨다. 그후 상해에서 나 혼자 인을 데리고 지냈는데, 모친의 명령에 의하며 인이마저 본국으로 보냈다. 그림자나 짝하며 홀로 외롭게 살면서, 잠은 정청에서 자고 밥은 직업 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 였다.

2.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26](이봉창)그리고 사진관에 가서 기념 사진을 찍을 때, 내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인,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이에 마 역시 억지로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333]동경 사건 이후 우리 동포들의 나에 대한 동정은 비할 데 없이 깊었다. 본국 풍속이면 내외할 처지이지만, 오랜 해외생활에 형제 • 친척과 같아서 남자들보다 부인들이 더욱 나를 애호하였다. 어느 집에 가든지.

3. 피신과 유랑의 나날들
[352]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회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가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인,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마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형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 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차릴 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4. 다시 민족운동 전선으로
[361](폭격 후 어머니의 답)
“놀라기는 무엇을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 하더군.그래, 사람이 많이 죽었나?”

[362]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부같이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

[365]어머님은 본래 다른 여성들이 미칠 수가 없을 만큼 용감하셔서 안악 경찰서에 출국원을 제출하였다. 이유는 나이 늙어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생전에 손자 둘을 제 아비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367]그후 남경으로 모셔다가 1년을 경과한 후 남경 함락이 가까워져 장사로 모시고 갔다.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하려는 눈치를 알아채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371](총을 맞은 후)퇴원 후 즉시 걸어서 어머님을 찾아 뵈었다. djjsla께서는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지내다가 거의 퇴원할 무렵이 되어서야 신이가 사실을 알려드렸던 것이다. 내가 뵈올 때에도 어머님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 말씀뿐이었다. 그리고는 당신이 손수 만드신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다.

5.중경 임시 정부와 광복군
6.해방 전후의 대륙
[402]다음 가족생활에 대한 관계를 말하자면,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 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딥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403](폭격이 있던 밤을 지나서 어머님)”잠이 깊이 들었을 때 침상이 흔들렸는데 그것이 폭탄때문인가?”

[406]중경의 기후는 9월 초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힘들며, 저기압의 분지라 지면에서 솟아나는 악취가 흩어지지 못해 고기는 극히 불결하며, 인가와 공장에서 분출되는 석탄연기로 인하여 눈을 뜨기조차 곤란하였다. 우리 동포 300~400명이 6~7년 거주하는 동안 순전히 폐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70~80명에 달하였다. 이는 중경에 거주하는 외국의 영사관이나 상업자들이 3년 이상을 견디기 못한다는 곳에서, 우리가 6~7년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나의 소원
[423]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이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426]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그러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Ⅲ.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김구가 자신의 두 아들과 후손들에게 자신의 행적을 남기기 위한 글이다. 원래 글을 쓴 목적이 독자를 의식하고 쓰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를 의식한 다른 일반적인 글들과는 북리뷰의 형식을 달리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요번 북리뷰에서는 ‘내가 저자라면’의 코너를 비평적인 입장이 아닌, 한 인간에 대
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 대해서 써 보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
백범의 비범한 면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읽어낸 인간 백범의 비범한 면들
은 독립 운동가 혹은 정치가로서의 그의 업적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평범한 것보다 못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 모든 환경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어려움들을 모두 넘어서 자신이 뜻
한 바를 이룬 한 사람으로서 백범이었다.

 그는 위기를 기회로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평범한 자신의 생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드는 사람들의 생애에 관심을 가져
왔다. 내가 눈여겨 본 면들은 모두 그들이 어떤 태도로 자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느냐
였는데. 그런 인물들의 공통점은 모두 위기를 기회로 이용할 줄 아는 면이 있었다. 백범 역
시 그런 인물 이었다.
백범의 이런 면은 사형의 형량을 받고도 책을 구해 읽기 시작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형수가 책을 보는 것은 어쩌면 쓸모 없는 일인 줄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닥친 위기의 상황을 잘 이용해서 오히려 책을 보는 기회로 활용을 했다. 또한 이러한 면은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한 이유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서두에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 독립운동이 약간 시들한 틈을 타서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위기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준비하는 성품을 지녔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는 유연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인간이 꾸준히 자신의 발전과 개발을 하려면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굳은
신념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세상의 것들을 유연성 있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면 그래서 그것
들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를 시킬 수 있어야만 좀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백범은 그런 유연성을 갖춘 이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지속이 되는 동안에 각지에서 들어온 다양한 사상들, 종교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서는
유학을 배웠고, 동학에, 기독교, 신사상까지 이 모두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느 한 가
지에 집착하여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가 얼마나 유연성이 있는 인물이었는지는 다음 인용문들에서 알 수 있다.

[114]감리서 직원 중에서도 나와 이야기해 본 후 신서적들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문화•경제•도덕•교육•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그러니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구하여 장래 국가에 큰 일을 하여야 하오.”
이같이 말하며,’세계 역사•지지’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갖다주며 읽어보라 권하는 이도 있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감리서 직원들이 종종 와서 내가 신서적에 열심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는 빛을 보였다.

[115]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 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5]우종서는 그때 전도조사였다. 나와 여러 해 친교한 때문에 예수교 신봉을 힘껏 권하였다. 나도 탈상 후에는 예수도 믿고 신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 그는 선진적인 사람이었다.
다양한 사상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는 선진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교육이 이 민족을 일으킬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고 후에 스스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게다가 그는 여자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처와 결혼을 하기 전에 교육을 시키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184]나는 곧 ‘여자독본’ 과 같은 책자를 대강 만들고 지필묵까지 준비하여 미혼의 처를 가르쳤다. 당시 나는 가사도 돌보아야 했고, 아버님 탈상 후 신교육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문화의 우종서 목사, 송종호, 당시 ‘김선생’, 운율의 김태성, 장련의 장의택, 오인현, 정창극 등과 신교육 실시를 협의하기 위해 여러 곳으로 돌아다녀야 했기 대문에, 처가에 오래 있으면서 가르칠 형편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틈만 있으면 처가에 가서 가르쳤다.

 그는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낙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백범은 앞일을 알 수 없는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낙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낙천적인 태도야말로 그가 긴 세월의 풍파를 이길 수 있게 해 주었던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상보다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이내 낙천적인 태도를 취하고 사형수로 복역을 하면서도 죽는 날까지 즐겁게 지내기를 결심하는 사람이었다.

[39]’상서’중 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237]우리는 며칠 후에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동지들 전부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곳에서 함께 복역하게 되니, 날마다 서로 얼굴 대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고, 간간이 말로도 사정을 알리며 지내는 까닭에 고생 가운데 낙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5년 이하는 세상에 나갈 소망이 있으나 7년 이상은 옥중귀신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육체로는 복역을 하나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낙천생활을 하기로 했다.

 그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다.
앞에서 여러 가지 백범의 장점들을 보았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 참 좋은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것들이 그가 평생을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바칠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기반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내가 가장 감명이 깊었던 것은 그가 우리처럼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들이었다. 그는 가끔은 더러운 생각도 하는 그리고 힘들 때는 죽음을 생각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의 이러한 인간적인 면들은 그가 감옥에서 맛난 음식을 먹고 싶어하며 하는 생각들과 주애보라는 여인에 대해 생각하는 글에서 찾을 수 있다.

[228]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말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362]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부같이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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