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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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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7일 07시 23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백범 김구.

본관 | 안동
호 | 백범
본명 | 창수
별칭 | 아명 창암, 법명 원종, 초호 연하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황해도 해주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주요저서 | 백범일지

내가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동그란 얼굴에 어울리는 독특한 동그란 안경, 두루마기, 독립운동가, 백범일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김구 선생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 정도로 나에게 그는 친숙하지만 정확하게는 잘 모르는 멀고먼 유명인일 뿐이었다.
백범 일지를 진지하게 읽을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며 즐거운 읽기를 마친 후의 김구 선생은 어렴풋한 이미지가 아니라 어느 정도 가까이에서 두고 본 사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제 김구선생을 떠올리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순수함 및 뚝심, 무지스러울 정도의 애국심 및 교육열, 불효자 아닌 불효자, 철혈 남아, 훌륭한 지지자였던 그의 부모님, 맞이하고 싶지 않은 남편,.

백범 일지에서 들여다본 그의 어린 시절은 보통의 그 시대 사람들처럼 평범하나, 점차 자기 자신만의 철학과 목표를 가진 사람으로 변신하게 된다. 목숨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으며 애국심에 대한 진심성과 목표 의식에 있어서는 놀랄 만큼 뚜렷한 그는 분명 비범인이었다.
사실 책을 읽던 초반에, 그는 단순하지만 용감한 사람으로만 느껴졌다. 단지 그는 공부에 대한 열의가 있었고, 마침 그의 주변에는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멘토들이 많았다. 그는 그 주변의 멘토들에게서 많은 사상과 가치관, 철학들을 교육받았고, 그들이 충고하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인 피살을 계기로 진정한 김구로 다시 태어나는 듯 하다. 그는 한 일본인을 살해한 ‘안악 사건’으로 옥중에 갖히며 많은 책들로 자신만의 사상과 가치관을 더욱 견고히 해나갔고 결국 74세 암살되기 전까지 그는 김구만이 가진 특성을 가진 독특한 비범인의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냈다.
더불어 그가 진정한 그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모님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 그가 일본인을 살해한 뒤부터 연이어 겪게 된 옥중 생활에 대해 그의 부모님은 고향 살림을 정리하고 옥 주변에서 머물며 옥바라지를 해낼 정도로 자식에 대한 정성과 믿음을 보여주셨다.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안악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떄도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이고 생신 선물로 드린 돈을 가지고는 도리어 좀 더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을 정도로 아들 못지 않은 배포를 가진 여장부였다.

2005년 국회의원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여야 구분할 것 없이 국회의원 대부분이 김구선생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이 대한민국의 근간을 만들기도 했고, 또 애국의 사상에 대해서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1949년 6월 26일 암살자 안두희에 의해 피살된 김구 선생님.
그는 단순한 영특함보다는 뚝심과 철학을 온전히 가진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위대한결과물을 보여준 것 삶의 모델 같다고 느껴진다.


연보
1949. 06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
1948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제창
1948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1948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5 대한민국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
1944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1940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설치
1935 한국 국민당 조직
1933 난징에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
1932 이봉창, 윤봉길등의 의거를 지휘
1932 상하이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사건
1932 일본왕 사쿠라다몬 저격사건
1926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 조직
1919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1914 농장 농감으로 농촌계몽 운동
1911 105인 사건으로 체포 17년 형 선고
1910 신민회 참가
1895 명성왕후 시해한 일본군 살해후 사형 선고
1895 김의언 의병단 가입
1894 해주에서 동학혁명 지휘
1893 동학 입교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백범 출간사
14p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15p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민족에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상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2p 그는 소위 말하는 ‘종의 종’이었다. 이정길처럼 우리 운명보다도 더 흉악한 운명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27p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 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28p 아버님은 양반들에게 잘 해주던 다른 존위들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가혹하게 공전을 거두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부담하실지언정 가혹하게 하지 않으셨다.

29p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34p 나는 어찌하든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 아버님이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다.

2. 시련의 사회 진출
37p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부를 지어 과문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39p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56p 안진사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종종 질의도 하고 담론도 하였지만, 당시 나는 유치한 수준의 행동이 많은 때였다.

58p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 안중근은 초패왕처럼 장부로써 살기로 결심하고 글 공부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그 후 아버지는 안중근에게 글공부를 재촉하지 않았다고 한다.

61p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름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63p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63p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등. /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65p 만고 천하에 흥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가 없네.

66p 만고 천하에 흥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가 없은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충성하는 일사보국 한 가지 일만 남아 있네.

3. 질풍노도의 청년기
96p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97p 곁에서 보는 사람 생각으로는 몇 번만 더 뜨면 그 밥을 다 먹겠구나 하도록 보기 좋게 한 두어 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먹고 싶던 원수를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100p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파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103p 나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내 옆에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가 없었다. 이창매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 나와 나를 보고, 너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책망하는 듯싶었다.

104p 너의 아버지와도 약속하였다.네가 죽는 날이면 우리 둘도 같이 죽자고.

106p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107p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가 다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는 데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했던 것은, 내무부에 가서 대관들을 보고 내 뜻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분명히 말하고 죽으리라.

108p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 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109p 나를 업고 가는 간수도 어머님을 향하여 말하여다. “ 당신, 안심하시오. 어쩌면 이렇게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죠? “ / "전에는 내가 아무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나에 대한 대우를 강도로 하나 무엇으로 하나 잠잠히 입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정당하게 내 뜻을 발표하였음에도 아직도 나를 이다지 홀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놓고 그것을 감옥이라 하여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 도망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였던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하고, 또 내 집에 와서 석 달여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의 무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느냐?"

114p "나는 벼슬을 못하는 상놈이기 때문에 작은 놈밖에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을 것이다."

115p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엇다.

118p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

126p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4. 방랑과 모색
156p ‘견월망지’의 오묘한 이치를 말하고, 칼날 같은 망므을 품으라는 ‘참을 인’자의 해석을 하여 주었다.

171p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니 유완무란 사람이 참으로 나를 위하여 그처럼 성의를 썼다면 만나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나를 찾기 위해 정탐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묘한 계책이랄 수 있었다./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치 알고도 끝까지 피하거나 종적을 감춘다면 그 역시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72p "나는 유완무요, 오시느라 무척 고생하셨소. '남아가 어디든 있든지 만날 수 없으랴'는 말이 오늘 창수 형에게 비유한 말인가 보오."

173p 오늘 비로소 뵙게 되었으나, 세상에는 아주 조그마한 일도 크게 부풀려 전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소문과 실물이 용두사미인 때가 많고, 저 역시 소문과 달리 졸렬하기 짝이 없으니 매우 낙심될 것입니다.

179p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181p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를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를 다리 살을 배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5. 식민의 시련
196p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빈약한 것이다.

201p 죽은 말뼈를 오백금으로 사는 것

203p 만일 양반이 살아나 국가가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 더 받더라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어났다. / 내 집안이 상놈 중의 상놈이지만 그대는 양반 중의 상놈이니, 상놈이기는 마찬가지라 생각되었다.

220p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

225p 그러고 보니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기 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

228p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 “나의 육체를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나의 정신은 뺏을 수 없다”고 같이 수감된 동지들에게 주창하던 기개와 절개를 생각하면서, 이러다가 인간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지고 짐승의 본능만 남는 것이 아닐까 자책하던 때, 아카시의 방에서 나를 극진히 우대를 하면서 신문한 것이었다.

229p 나는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로 방안에 들어와서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246p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

247p 나는 실로 말 한마디를 못하였다. 그러다 면회구가 닫히고, 어머님께서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

248p "당신, 일본 법전을 보지 못했소? 천황이나 황후가 죽으면 대사면이 내려 각 죄인을 방송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우리 수인들은 머리를 숙이고 하느님께 '메이지란 놈을 즉사시켜 줍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252p 옥중의 고통은 여람,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여름철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증기가 피어올라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되면 방안으로 무소대를 들이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자도 여러 번 보았다. 수인들이 가장 많이 죽기는 여름철이다. 겨울철에는 감방에 20명이 있다면 솜이불 네 장을 들여주는데, 턱 밑에서 겨울 무릎 아래만 가려지므로 버선 없는 발과 무릎은 태반 동상이 나고, 귀와 코는 얼어서 극히 참혹한데, 발가락 손가락이 물러 터져 불구가 된 수인도 여럿 보았다.

254p 그리하여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264p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265p "수인의 상표는 개전하는 상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인데, 나는 당초에 죄가 없었고, 수인이 된 것은 일본 세력이 나보다 우세한 것뿐이거늘, 상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267p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p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p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p를 구(九p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p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p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p 범부(凡夫p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p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6. 망명의 길
273p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 미만의 어린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 하더라."

286p 해주 검사국과 경성총감부에서 각 지방 보고를 수집하여, '김구'라는 책에 나의 일언일동을 상세히 기재하였을 것이지만, 어떤 정탐이라도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보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나의 몸이 본국을 떠나 상해에 도착한 줄 알고 나서, 비로소 그 사실이 왜에게 알려졌다 한다. 나는 이것 한 가지 일을 보아도 우리 민족의 애국 정성이 족히 장래에 독립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예견한다.

288p 대개 사람이 귀(貴p하면 궁(窮p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289p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옛날에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다지만 나는 '우궁문'을 짓고 싶으나 문장이 아니므로 그것도 할 수 없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295p 몇몇 동지와 더불어 고성낙일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를,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때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 다고 생각하였다.

296p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8p 어떤 사람이 나이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납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사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로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23p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5p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335p 윤군의 기색을 살피니 태연자악한 모습이었다. 농부가 논밭일을 나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 자던 입에 일부러 밥 먹는 것을 보면 할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342p 비난의 이면에는 자기들과 같이 행동하고 일하자는 뜻이 있으니, 어찌 여러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352p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353p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67p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367p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한수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그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371p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는 것보다 못하네."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378p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379p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6. 해방 전후의 대륙
397p 군대식사 한 가지만 왜병과 비교해 보더라도 왜적이 질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 하겠다.

406p 우리가 6~7년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403p 중경에서 폭격을 당할 떄에 중국의 국민성이 위대한 것을 깨달았다. 높고 큰 건물이 삽시간에 재가 되는데도, 집주인들은 한편으로 가족 중 피살자를 매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존자들은 불 붙지 않은 나머지 기둥과 서까래를 모아 임시가옥을 건설하였다. 그 일을 하는 중에 웃는 얼굴로 비장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므로, 나는 그들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의 소원
423p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424p 우리나라가 독립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5p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중략p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426p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427p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과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는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431p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아.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을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호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마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432p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433p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 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III.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무엇보다 유명한 사람들이 흔히 대필 작가를 통해 적어내는 자서전과 달리 본인이 직접 본인의 인생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정리해 냈다는 것에서 일단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백범 그 스스로 담담히 적어 내려간 그의 인생을 읽다 보면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인생이 바로 드라마” 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본인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일생을 아들들에게만은 남기고 싶어하며 그의 나이 53세, 상해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에 걸쳐 상권을 집필하였고 뒤 이어 중경 1호 임시정부 시절인 67세(1942년) 에 하권을 마저 집필하였다.

무엇보다 그가 작성한 백범일지는 소설과 같은 긴박감과 재미를 끌어내고 있다.
사실적인 설명 및 묘사 위주의 글쓰기여서 전후,사실 관계가 무척 분명하다. (망각, 착각등으로 인한 오류는 제외하고) 사실의 서술만으로 그의 자서전은 한 편의 소설이다.

이 책에는 김구 자신의 사상이 드러난다.
기본적인 정치 사상을 제외하고, 일단 그는 풍류를 사랑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에 망명한 채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에 윤봉길 도시락 폭탄 사건의 주모자등으로 지목되며 다양한 도피 생활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음울하고 침울한, 폐쇄적인 도피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도피 생활을 하게 된 지역을 여행하며, 그 지방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실 이야기를 읽던 중에는 어디서 저런 배짱 내지 위험한 행동을 생각 이 할 수 있을까 라는 우려가 느껴졌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그에게는 목숨에 대한 미련 음, 풍류를 지향하고 다양한 호기심을 지닌 인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내 대장부이니만큼 도피 생활에도 자신을 굳이 숨기지 않고 그가 원하는 행동들을 해나가지 않았을까. 외부적으로는 그에게 심한 압박과 경계가 있었으나 그 스스로는 결코 그를 가둬두지 않았다.

그는 또한 국가에 대한 사랑, 효성 못지 않게 부모님에 대한 효성에도 지극했다. 그가 목숨을 담보로 한 일들 자체가 어찌 보면 불효일지라도 그것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는 그만한 효자 또한 없지 않을까 싶다. 그의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그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 그것으로 아버님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효자며, 옥살이 하던 중에 옥을 옮기는 중에 만난 효자비를 보고 그는 어머니를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린다. 분명 국가에 대한 효도와 부모에 대한 효도 사이에서 느꼈을 그의 갈등이 보이기도 한다.

김구 선생의 생을 함께 읽어나가다 보면 마음 속에 가장 강하게 떠오르는 화두는 바로 ‘어떤 것이 그에게 죽음도 무섭지 않은 용기를 가져다 주었을까? ‘이다. 어떻게 신념이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목숨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백범 일지에서 종종 드러나는 그의 목숨에 대한 미련 없음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보통의 사상은 아니다.
단순하고 무지할 정도로 꾸준히 실행시킨 독립에의 의지, 교육에의 의지는 한 인간의 끈기와 한계도 보여준다.
도대체 그에게는 어디서 그러한 지속성과 열망이 생겨났던 것일까?
너무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본성이 너무 무지할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대단한 일들을 해낸 그이지만 그의 사상과 가치관은 단순하고 또 단순하다. 그에게는 오로지 그것 하나만이 보였고 밀고 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실천 자체가 최고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책을 읽던 중 왜인들에 대한 행패들도 종종 그려지곤 한다. 하지만 평소에 상상하던 만큼의 지독하고 죽일 놈의 일본인이 아닌 소심하기도 하고 인간적을 면모를 보이는 일본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묘사하는 일본인들은 때로 잔악하기도 하지만, 옥중 생활에 그려지는 수감인들의 요구에 대응하는 왜인 관리들의 모습을 보면 참 소심하기도 소심하다. 즉 어디서나 인간만큼 악해질 수 있는 것도 없고 인간만큼 서로 비슷하며 또 인간적인 존재도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후에 임시정부 시절 이후 세 개 정도의 분파로 갈리고 서로의 의견을 달리하며 나아가는 모습들에 있어서는 같은 한 국민으로서, 인간 자체로서의 특성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종종 우리 국민들의 냄비 같은 근성이나 행동들을 볼 때 느끼던 답답함을 약 70,80년 전의 조상들에게도 느꼈던 것이다. 물론 김구 선생도 오랜 중국 망명 생활 동안 한국민의 국민성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듯 하다. 중경에서 폭격 후의 중국인들의 수습 모습을 보며 “만일 우리 동포들이 저 지경을 당하였다면 어떠할까?’ 화가 나느니 성이 나느니, 홧김에 술을 마신다 성난 김에 싸움을 일으킨다 하여 소란만 일으키고 태만하지 않을까. ( 403p)”

만약 그가 다시 태어난다면 작금의 현실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하셨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쇠고기 파동, 한미 FTA, 교육정책들을 들으신다면 무어라 하실지 눈에 뻔한 듯 하여 일순간 통쾌해 지기도 한다. 현재 2008년의 대한 민국 사회는 백범 김구 선생이 힘썼기에 현재의 위치에 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백범 선생 같은 모범을 보이는 인물이 적기에 현재 정도의 모습 밖에 갖추지 못한 듯 한다. 빠르면 내년 정도 새 지폐 10만원 권에서 만나게 될 백범 김구 선생. 지폐 속에서나마 현대의 우리에게 주시는 지속적인 일갈과 가르침을 잊지 않고 각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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