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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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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7일 11시 43분 등록
<백범일지>, 김구, 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8


1. 저자 소개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해봅니다. 내 삶은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라 살아져서 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은 끝내 죽어져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내 소원은 한 가지 입니다. 그것은 대한의 독립입니다. 내 첫번째 소원도 독립이요, 두번째 소원도 독립입니다. 그 다음 소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소원은 이 것 하나 밖에는 없었습니다. 70평생을 이 소원 하나로 살아왔습니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평생을 설움과 부끄러움 속에 살아온 나에게 가장 큰 소원은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입니다. 나는 우리 나라가 독립만 된다면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습니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존경하지만 그들이 합해 세운 천당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면 그곳에 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병자년(1876년) 할머니 기일에 태어났습니다. 난산이었습니다. 일주일이나 계속된 극심한 산통에 어머니는 목숨이 위독해지셨습니다. 모든 의술 처방이 효험이 없자 아버지께서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 용마루에 올라가 소 울음소리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사히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적에 저는 매우 개구쟁이였습니다. 한 번은 엿이 하도 먹고 싶어부모님 몰래 성한 숟가락을 팔아먹기도 하고 아버지의 엽전을 훔쳐내 떡을 사먹으려다 들키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붉은 염색과 푸른 염색 물감을 통에서 꺼내어 샘에 풀어넣고 붉은 내와 푸른 내가 만나며 섞이는 장관을 구경하다 어머니께 몹시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크면서 저는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마주하며 상놈의 본색을 벗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라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시험장의 폐혜를 보고는 마음을 접었습니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관상 공부는 더 크게 나를 비관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아 흉한 곰보자국이 얼굴에 남아 있습니다. 두문불출 관상학 경전인 <마의상서>를 공부하고 내 관상을 보니 어느 한 군데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 몸이 가난하고 천하고 흉한 상만 있으니 세상에 살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상서의 귀절을 보고 상좋은 사람보다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바로 이 ‘마음 좋은 사람에 대한 탐구’가 내 평생의 화두였고, 그것이 깊어지고 깊어져 오늘날의 내가 되었습니다.

오응선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동학의 접주가 된 것을 시작으로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 그리고 그 누구보다 어린 나에게 영향을 준 스승 고능선 선생을 비롯, 수많은 애국자들에게서 배우고, 또한 함께 시대의 아픔을 나누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화두 덕분입니다.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오,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라고 나를 심히 사랑하여 가르치시던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이 제 일생의 올 곧은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용강군 안악에서 치하포로 배를 타고 건너던 중 제가 탄 배가 빙산에 포위되어 참사를 맞아야 될 위기에 처한 일이 있을 때, 겁에 떨지 않고 살 방도를 찾아 낸 것이나 치하포에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왜군 쓰치다 중위를 살해한 것은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은 가히 장부’라고 가르친 고능선 선생의 교훈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나을 게 없는 무지랭이 상놈이었던 저는 항상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에 되새기며 행동이 필요한 일 앞에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벼랑에 매달린 손을 놓을 수 있느냐’. 비로소 작정을 하고 그 질문에 답을 하는 순간, 가슴 속에 일렁이는 두려움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담대함이 밀물처럼 가슴 속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치하포 사건은 제 삶의 분수령이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면 안된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체험한 것입니다. 저는 그때 피신하지 않고 떳떳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정녕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영광이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육의 힘을 믿습니다. 제가 무지랭이를 면하고, 불타는 심정으로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책으로부터 부지런히 배웠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문화에 눈을 뜨게 되고, 배외 사상만을 가지고는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도 인천 감옥에서 사형을 앞에 두고도 처연히 여러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나처럼 몽매한 백성들을 깨우치는 길은 교육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저는 신교육을 장려하는데 그토록 평생 온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저는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다는 말을 기억합니다. 우리 민족은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보기를 사모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그런 나라를 만드는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내가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다면 어찌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므로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더욱 후진 교육에 힘써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영욕에 초연하여 그윽이 뜰 앞을 보니
꽃은 피었다 지고
가고 머무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가 바라보니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는구나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 쫒는다.
맑은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수리는 유난히 썩은 쥐만 즐긴다.
아, 세상에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가
그 얼마나 될 것인고!
(생을 마치게 된 1949년 백범이 즐겨 쓰던 시)


2.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14.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15.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22. 우리 조상은 지금까지 텃골 주위에서 살고 있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 등 토착양반들에게 천대와 압제를 대대로 받았다….이것은 혼인의 천대요…이것은 정치적 압제요…이것은 경제적 압박이다..또한 이것은 언어의 천대이다.

24. 나는 서너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님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같이 대나무 침으로 따고 고름을 파내어서 내 얼굴에 마마자국이 많다.

26. (엽전 스무냥을 훔쳐 떡 사먹으려다 들켜 아버지에게 매 맞는 것을 장련 할아버지가 말리고, 되려 아버지를 때렸을 때) 나는 장련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아버님이 매 맞는 것이 퍽 시원하고 고소하였다. 할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고 들로 가서 수박과 참외를 실컷 사먹이고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대가족 제도가 갖는 장점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부모에게 혼나면 그것을 다독이고 감쌀 다른 식구들이 존재했던 것이, 얼마나 우리들 정신적 상해의 완충 역할을 했는지, 생각하면 아쉬운 요즘이다)

28. (성격이 불같았던) 아버지도 어렸을 때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29. (어머니가 나에게) “우리 집에 허다한 풍파가 술로 해서 생기니 너 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은 안 보겠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깊이 생각하고 배우는 백범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말 술을 마시고 호기롭고 과격하게 문제를 일으키며 살 상(像)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쁜 것을 좋게 길들이면 좋은 쪽으로 그 만큼 영향력이 생기는 법이다. 그것이 교육이고, 그것을 아는 백범은 평생 교육에 그렇게 치중한 것이리라)

30.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이런 문제의식이 백범을 비범하게 만들었다.)

32.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에 도착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런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신분을 넘어보려는 기대에서 시작했다가, 결국 그를 대한 제일의 애국지사로 만들었다. )

39.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58. 안진사(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현)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다만 주량이 과하여 코끝이 빨간 것이 흠이었다.

60. 고선생(고능선)이 거처하는 사랑은 작은 방인데 방안 가득 서적들이 쌓였고, 사면 벽에는 이름난 옛 선비들이 남긴 좌우명들과 선생 자신이 마음 깊이 깨우쳐 얻은 글 등을 붙여 놓았다.
(-->그가 처음으로 방문한, 고능선 선생의 서재에서 그가 느낀 감회는 아마도 그의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평생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당시 그는 장래를 생각하며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비관스러운 때였는데 고능선 선생의 자애스런 가르침은 그의 평생의 지침이 된다. )

62. (고능선 선생이 이르시길)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3.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과단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고선생은 어린 백범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그의 저돌적인 행동력을 볼 때 어린 시절 그가 과단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만약 그런 그가 그렇게 다르게 변모했다면 스승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다. 물론 변화를 간절히 원한 어린 백범의 소망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72. 단천 마운령을 넘어 감산군에 이른 때에…이상했던 것은 그 지역 내의 관사를 제외한 집들이 지붕에 한결같이 푸른 풀이 무성한 것이었다…그것은 봇껍질이라 하는 것으로 지붕을 덮고 흙을 씌워놓아 풀씨가 날아와 무성케 해놓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를 여행하며 이런 집을 많이 보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흥미로와 자세히 들여다 보았는데 똑 같은 집이 우리 나라 이북지역에 있다는 것이 놀랍다. 서로 왕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의 습속이 비슷하다는 건 캠벨이 설명하는 신화의 원리와 같다고 하겠다. 여기서 ‘봇껍질’은 추운 지방에 잘 자라는 ‘자작나무의 껍질’을 의미한다)

100.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집안에서 유일하게 공부한 아들에 대한 존경과, 또 아들의 범상치 않음을 알라차린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신뢰가 듬뿍 묻어나는 말)

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 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2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148. "설사 한 집에 장정이 년놈 합하여 두 명이라 하면, 매일 한 사람씩이라도 양반집 일을 안 할 때가 없고, 일을 하는 날은 그 놈의 집 식구가 다 같이 와서 밥을 먹소. 그러니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 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
(-->좁은 나라에서도 지역 간의 차이가 이렇게 난다니!)

165 "형님 내외분은 창수놈 글공부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시오?"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배움의 힘에 대해 스스로 자각하고 자부심을 갖는 백범, 교육은 그의 평생의 미션이 된다)

171.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 (원문 : "君子可欺以方":맹자에 나온다)

173.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니, 구하면 얻게 될 날이 있다고 내 전에 말하지 않던가?"
(-->끈기와 지속은 결과를 얻고자 하는 모든 이의 영원한 덕목이다-내 생각)

180. (고선생의 객사 소식을 듣고)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181.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이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효의 대목이다. 지금의 내 시각으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도저히 믿기가 어렵다. 사경을 헤매는 할머니에게 손가락을 베어 피를 넣어드린 아버지의 아들답다. 부전자전. )

183. "자네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결혼 대상에 대한 그의 혁신적인 생각이 돋보인다. 학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특히 당시 서로 얼굴을 상면하지 않는 관례를 깨는 것이 그러하다. 그의 상대로 준례는 적합한 여자였다. 그녀는 당시 18세로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결혼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 참고))

186.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 지키던 자들이 예수교에 투신함으로써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 사정을 알게 되어 신문화 발전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196.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본격적인 그의 교육 운동이 시작되었다)

198., 나는 종산에서 첫아기로 딸을 낳았다. 태어난 지 며칠 만에 모녀를 가마에 태워 와서 찬기운을 많이 쐰 탓인지, 딸아이는 안악에 도착한 후 바로 죽고 말았다.

204.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220.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225. 국가는 망해도 인민은 망하지 않는다.

226-227.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가지 수단이 있다. 1. 가혹한 고문, 2.굶기는 것, 3. 온화한(회유책) 수단이 그것이다.

228. 그럴 때(고문을 심하고 받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냄새가 코에 들어와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229. ..저녁부터 사식이 들어왔다..사식은 방 밖에서 밥을 따로 먹게 했다. 종록이 먹고 싶어하는 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방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치 어미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동병상련이라고, 자못 감동적이다.)

23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241. 감방에 들어가서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혹은 '강원도 의병의 참모장'이니 혹은 '경기도 의병의 중대장'이니 하여. 대부분 의병 두령이고 졸병이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순전한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군대의 규율이나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

244.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254.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을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매우 앞서가는 생각, 교육적인 견지에서 모든 걸 꿰뜷는 통찰, 멋지십니다. 백범 선생님!)

267. 그럭저럭 내가 서대문감옥에서 지낸 것이 3년 여이고, 남은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이때부터는 마음에 확실히 다시 세상에 나가 활동할 신념이 생겼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가서는 무슨 사업을 할까 주야로 생각하였다.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 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뭉우리돌' 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세상에 나가 타협하는 '몽우리돌'이 되지 않기 위해 감옥에서 나가기 이태 전부터 이름까지 바꿔가며 결의를 다지는 백범, 그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289. ”자식들에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주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 먹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를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는 백범, 그것이 백범일지를 쓰게 했다.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 자의 변명이라도 좋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버지의 어떠함은 알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296. 지금 내가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 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8.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 속에, 바다 한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 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307.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352.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 당, 송, 원, 명, 청, 각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었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리오…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67. (9년 만에 모자 상봉하여)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백범을 어머니 개인의 아들이 아니라 국가의 아들로 존귀히 여기는 그녀의 애국심 역시 보통이 아니다. 그 아들의 그 어머니이다.)

371.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 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395.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던,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402.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열정과 기질>에서 가드너가 주장하듯 대체로 창조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특히 원만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일을 성취하려는 경향이 있다. 간디가 가족들에게 무심했던 것처럼 백범 역시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 때문에 가족은 이중고를 짊어져야 했다.)

405. 내가 옛 서적을 익힐 때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구절을 문인의 글재주로만 생각하였다. 그랬는데 그날 교장구에 나가 광경을 살펴보니 들것으로 방공호에 산재한 시체를 수집하는데 어린 아이 시체는 들것 하나에 2, 3명씩, 어른은 1명씩 모아서 쌓으니, 과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문구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쓰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431.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의ㅂ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만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대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주체적으로 사물을 보는 그의 시각, 내가 늘 주시하며 배워야 할 것 중의 하나다)

427.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427.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432.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


3. 내가 저자라면


간추린 그의 역사

신분의 갭을 넘어볼 요량으로 과거장에 갔으나 폐해가 심해 과거 보기를 포기한다. 골수에 사무친 상놈의 원한을 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신분철폐를 주장하는 동학에 발을 들여 놓는다. 대담한 인품으로 19살에 팔봉 접주가 된다. 그 인연으로 고능선이라는 스승을 만난다. 고능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백범이 되도록 도와준 가장 큰 스승이다. 스승의 권유로 청으로 가던 중 김이언이라는 사람이 청국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반항할 의병을 꾸민다는 말에 함께 참가하지만 여러 이유로 실패한다. 그리고, 안악으로 가던 중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왜군 중위를 살해한다. 그로 인해 인천 감옥에 갇히고, 동료들으 탈옥을 돕고 자신도 탈옥한다. 어렵게 생활을 연명하던 차 중이 된다. 절에서 나와 숨어다니던 중에 '유인무'라는 사람을 만나 '김구'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아버지를 여의고 당시 18살 이었던 준례와 혼인을 한다. 이 시기에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대한은 독립권을 잃고, 일본의 속국이 된다.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워보려고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한다. 활동을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많은 지사들이 잡힌다. 그도 잡혀 갖은 죄명으로 엄청난 고문을 받게 된다. 5년의 감옥살이 끝에 출옥한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각지로부터 모여 든 인사들과 임시의정원 조직을 만든다. 모인 사람들이 독립운동은 제쳐두고 사상 싸움만을 거듭할 때 그는 오로지 광복에만 정신을 쏟는다. 그는 이봉창 사건과 윤봉길 사건의 주모자가 된다. 정치적으로 분열된 당을 통합하고 임시정부의 힘을 더욱 키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그의 평생 소원이 이루어지는가 했지만 남과 북이 대립하는 바람에 그의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에 맞아 굴곡이 심했던 파란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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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의사나 윤봉길 의사나, 그들의 거사를 뒤에서 지도한 그에게나 죽음은 기꺼이 선택한 삶의 한 방편이다. 죽음을 삶으로 가져와 매일 매일 인식하며 산다는 것은 범인들에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봉창이 동경에서 일본 천황을 저격하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 윤봉길이 일본군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애국심 외에도 백범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훌륭한 스승들의 선례를 따라 자신 스스로 사표가 되었고 많은 애국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 책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에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주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 먹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89)

백범이 백범 일지를 쓰기 시작한 목적을 떠올려 본다. 그는 그 당시로서는 늦게 장가를 갔다. 아주 만혼이었다. 때문에 아이들도 늦게 낳았고, 그나마 연이은 옥중생활과 유랑 생활로 자식들과 마주앉아 살갑게 아버지의 정을 나눌 시간도 많지 않았다. 늘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남의 자식 가르치기에 몸을 바쳤지만 정작 자신의 자식들은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마음만큼 잘해주지 못한 애잔한 마음이 늘 가슴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글로 남겨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 전반(특히 후반)에 흐르는 백범의 정신은 아래 귀절에 잘 담겨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이 책은 두 아들을 넘어 대한민국 모든 이들에게, 특히 젊은 남녀들에게 전하는 그의 육성의 메시지다. 그는 ‘범인의 자서전’을 통해 이 나라를 제 목숨처럼 여기는 애국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가 호를 연하(蓮下)에서 백범(白凡)이라 고친 것도 자기와 같은 백정 범부들이 ‘독립은 내가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힘써 애국을 실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아름다운 나라, 문화의 힘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인류가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하고, 이후 공연 사업에 몸 담고 있으면서 나는 백범 선생의 이 말에 밑줄을 그어놓고 있었다. 그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없이 막연히 애국지사로서만 그를 생각하던(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아온) 내게 이번 책 읽기는 김구라는 인물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게 해주었다. 글 한 줄 멋있다고 가져다 쓸 일이 아닌 것이다. 그의 정신의 원류에 내 가슴을 대어볼 일이다.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전대통령이 잘 쓰던 말이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사르트르가 촉구하는 ‘행동하는 양심’에 크게 영향을 받아 자기 정치의 캐치 프레이즈로 삼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게는 백범이 ‘행동하는 양심’의 전범(典範)으로 다가왔다. 그가 행동에 돌입하는 것을 보면 실로 놀랍다. 죽음을 아예 염라대왕에게 담보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렇게 대담할 수 있을까 의아할 때가 많았다. 그에게는 판단과 행동 사이의 갭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생각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지식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것이 ‘심사숙고’라는 늪이다. 이 변수 저 변수 너무 재고 고려하다 보면 행동은 물건너가 있기 쉽다. 대체로 저돌적인 행동력을 보이는 사람은 머리에 식자가 많이 들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백범은 예외다. 그는 무시로 배우고, 무시로 생각을 숙성시킨다. 그러면서도 행동의 템포를 늦추는 적은 없다.

양심과 행동이라는 두 키워드로 사람을 나누자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양심이 있고 행동하는 사람(가장 이상적이다, 백범이 여기에 속한다), 2.양심은 있는데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회색분자 혹은 기회주의자가 되기 쉽다, 특히 역사의 과도기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다), 3.양심은 없지만 행동하는 사람(선무당 사람잡는다고, 무모한 행동가다. 때론 매우 위험하다), 양심도 없고 행동도 없는 사람(소인배, 그들은 존재 이유를 모르고 존재하는 자들이다). 4.성격 유형으로 보았을 때 백범은 배움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3번에 가까운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 슈바이처와 같이 행동하는 역사의 추앙을 받는 위인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백범처럼 행동하는 지성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현장에서 행동할 수 확고한 신념, 그것은 바로 ‘아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전기를 읽어보면 이들은 한결같이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심신을 단련하였다. 독서는 그들에게 가장 가깝고 손쉽게 세상을 배우는 방법이었다.

백범의 어린 시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공부를 사모했는지 알 수 있다. 처음으로 새 선생을 맞게 되던 날 그는 상놈이 공부하게 된 것이 너무 좋아 머리 빗고 새 옷을 입고 기쁘게 선생 마중을 나갔다. 조금 더 커서는 10리 먼 곳에 계신 스승에게 배우기 위해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달려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은 시간에 도착하곤 했다. 서당과 집을 오가며 끊임없이 배운 것을 외웠다.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옥에 있을 때에도 신서적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받아들였다. 이 때 그의 사상의 토대가 세워졌다. 스스로 배워서 깨우치는 즐거움을 아는 그는 교육의 힘을 누구보다 강하게 확신하였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고, 왜적의 눈을 피해 숨어 살 때에도 늘 교육에 힘을 쏟았다. 해방 이후에는 더욱 본격적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교육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 책이 조금 더 좋아지려면

<삼국유사>, <사기열전>, 그리고 <백범일지>, 우리가 읽기 쉽도록 변역하고 엮어주는 이의 부지런한 수고가 없다면 우리가 읽어볼 엄두도 못내 볼 책들이다. 그러니 책에서 얻는 감동이 클수록 수고한 손길에 더 깊이 감사를 돌리고 싶어진다. 이 책도 도진순씨의 주해가 있었기에 백범의 면면을 감동 가운데 만날 수 있다. 역자가 밝혔듯 원본이 기억에 의존해 기록된 책이라 시기가 모순되거나 인명, 지명에도 착오가 적지 않아 맞게 수정하고 각주에 내력을 설명하는 등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백범의 동선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도와 관련 사진, 자료 등이 보태져서 본문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경과를 책 중간에 곁들이고, 백범이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성명서나 발표문 등을 부록으로 싣고 설명을 추가한다면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삶이 한결 무거워졌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 쓰던 시는
서산대사의 선시 ‘답설야(踏雪野)’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맨 앞에 그의 필체로 된 이 시를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이 시의 주석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요, 지식인이었다. 그 안에 살아있는 사상은 한 치의 굽음도 없이 그대로 그의 행동이 되었다. 생각과 행동 사이에 조금도 흔들림이나 망설임이 없던 백범. 그의 행동을 이끄는 정신적인 두 축은 1.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초개와 같이 묵숨을 버리거나 버릴 준비가 되어있던 당대의 훌륭한 스승과 동료들의 기개를 끊임없이 배워서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고 2. 그런 자신의 행동이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뒷 날에 뉘 있어 스스로 나라를 사랑했다 이를 양이면
스스로의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이제 白凡 가신 이의 생애에다 물어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나 나라를 사랑했다 생각하지 말아라.”
- 1949. 7. 6 경향신문

박두진 시인이 백범의 영전에 바친 시 ‘오, 백범 선생’ 의 마지막 절이다. 이 시를 읽으며 부끄럽고 황망하여 가슴에 손을 얹을 뿐이다. 이 책을 읽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삶이 한결 무거워졌다.


이 글을 마치며

우리는 현재,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고 이민을 가고, 세계의 경제가 하나가 시장으로 통합되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 민족 간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민족주의란 개념은 그 어느 때보다 구태의연하고 낯설다. 이미 그것은 벗지 않으면 안 되는 낡은 옷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날 것 그대로의 김구의 글은 나를 자꾸 어떤 심연으로 끌어들인다. 불편하지만 끈끈한 어떤 것이 눈시울을 쿡쿡 적신다. 감동의 실체는 언제나 진정성이다. 그는 그의 신념대로 살았고, 그것은 지독한 인간애요,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조국 사랑이었다. 그에게 조국은 실체 없는 실체였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조국에 내가 지금 편안히 살고 있다. 역사에 뿌려진 선조들의 피는 내 안위의 바탕이다. 불편함은 거기에서 비롯된다는 걸 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 더 혼란스러워졌다. 고민 하나를 더해 준 그에게 불편한 감사로 이 글을 가름한다.

책 말미에 붙여둔 ‘나의 소원’은 앞으로도 가끔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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