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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9일 11시 30분 등록
난중일기_9

이순신 / 노승석 옮김




1. 작가에 대하여

작년에 거제도를 다녀왔다. 몇 가지 털어버릴 일들을 가지고 남해를 한 바퀴 돌았다. 모두 놓고 오진 못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떠날 때보다 훨씬 홀가분했다. 부산을 시점으로 전남 보성까지 들어갔다 왔는데, 역시 통영과 거제를 빼놓을 수 없었다. 통영과 거제에서 하루를 소요(逍遙: 이리저리 자유롭게 거니는 일)했다.

이제와 돌아보니 내가 다녀왔던 곳이 충무공의 전장 곳곳이었다. <난중일기>를 읽으며 그때 보았던 남해의 전경이 떠올려졌다.

#1
거제도에는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을 기념해서 ‘옥포대첩 기념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옥포대첩 기념공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높은 언덕을 하나 지나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거제의 동쪽 전경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나는 그 언덕의 꼭대기에서 잠시 멈춰 섰다. 오른편으로는 멀리 조선소에서 출항 준비를 하고 있는 배들이 보이고, 왼편으로는 작은 바위섬들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가지런히 모여있는 사철나무들이며, 동백꽃, 개나리, 벗꽃, 목련 따위가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파도와 절벽의 부서지는 소리, 이따금 메아리 치는 갈매기 울음소리, 혹은 이름 모를 새소리와 풀 피리소리에 정신이 다 혼미해진다. 5분 정도의 차이로 해돋이의 장관은 놓쳤지만, 해가 서서히 하늘로 솟아오르면서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는 것이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던 적(赤) 빛 풍광에 취해 10분여를 그냥 서 있었다. 많은 잡념들이 싸웠다. 망념(妄念) 된 쓰레기더미를 걷으며 녹슨 일상은 다시 환하게 반짝였다.

무의식적으로 아까의 빨간 태양을 바라봤다. 순간 손을 올려 시선을 가리고 말았다. 태양은 이미 번쩍이는 광채를 뿜으며 힘껏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더 지나자, 더욱 밝아진 태양 빛은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처음으로 이 구절을 깊이 새겨보았다.

의인의 길이란,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의인의 길이란……

#2
‘옥포대첩 기념공원’에 들어서는 길은 온통 사철나무들로 가득했다. 푸르름의 입김은 시종 상쾌한 향기를 뿜어댔고, 그 무성함과 우거짐은 도로를 완전히 가리운 채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매표소를 통과하자, 넓다 란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광장의 끝에는 파란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광장으로 들어서자 중앙 위편으로 거대한 기념비가 솟아 있었다. 30m 가량 되는 높이에 얇은 이등변삼각형 두 개를 겹쳐놓은 모형이었다. 그 오른편에는 사당처럼 생긴 구조물이 하나 있었고, 왼편에는 겹겹의 대문을 통과해 제의를 드릴 수 있도록 한 별채가 놓여 있었다.

제일 먼저 사당처럼 생긴 구조물로 향했다. 거기서 좀더 오른편으로 가면 절벽이다. 절벽 막바지에는 바리케이트를 쳐 놓고 그늘 의자를 두었는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이, 그야말로 옛 선비들의 풍유라도 된 듯 했다. 나는 그곳에 앉아 30분 가량 끄적였다.

다시 사당으로 돌아왔다가, 기념비로 향했다. 기념비에는 많은 글들이 쓰여 있었고, 나는 보물을 건진 양으로 열심히 옮겨 적었다. 허나 그 기록들이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곳에 몇 구절 옮길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그러나 그때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중에, <칼의 노래>에서 다시금 본 구절이 있다. 저자 김훈이 옮겨 둔 것이다. 다음 구절이다.

“너희는 경거망동하지 마라. 너희는 태산과 같이 진중하라.” – 충무공 이순신

해전 경험이 없는 부하들에게 충무공이 이른 말이다. 충무공에게도 첫 해전이었다. 다름아닌 옥포해전이다. 분명한 것은, 이 구절이 그곳에 쓰여 있던 것과는 꼭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의미는 같으나, 내 기억으로는 좀더 힘찬 표현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기념비 뒤로도 몇 개의 비석이 더 있었고, 한자어로 많이 쓰여 있었다. 나는 오래 머무르며 열심히 따져보고 옮겨 적고 하였는데, 지금은 떠오르는 것이 거의 없다. 아…… 기억 망상증 환자여.

중앙 왼편에 있는 별채는 굉장한 경사를 이루는 언덕 꼭대기에 놓여 있었다. 밑에서부터 대문을 통과해 차근히 오르면 큰 문제가 없으나, 나는 기념비 쪽에서 가로질러 가려다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주저 앉았다. 바쁘게 둘러보려다 괜한 이유로 여유가 생겼다. 공원 주변을 더 꼼꼼히 살펴봤다. 바다가 참 좋았다.

#3
아쉽게도, 충무공과 관련한 내 기억은 이게 전부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운 것과 위인전기를 읽은 것, 그리고 이따금 광화문 정면에 버티고 선 군부독재 시대의 상징 조형물을 보게 되는 것 따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자진해서 충무공을 새기려 한 기억이 내게는 전무하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해 놓은 것들을 보며 어지간히 반복해 볼 뿐이다.

충무공을 읽으며, 새삼 그의 (사람) 됨됨이에 더욱 고개가 숙여졌다.

#4
1545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아산 백암리 외가로 이사했고, 22살 때 본격적으로 무예를 시작했다. 23살이 되던 1567년, 아들 회를 낳았다. 이 해 6월 28일,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한다. 27살이 되던 해에 차남 열을 낳았다. 28살이 되던 1572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576년 32살이 되던 해에, 무과 병과에 합격한다.

이어 종 9품으로 함경도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1년 후인 1577년 3남 면을 낳았다. (면은 이후 왜란 중에 전사한다) 함경, 충청, 전라 등지를 오가며 두루 업을 세웠으나, 간신배들의 무고로 파직과 백의종군을 거듭하며 관직생활을 이어간다. 본래 승진가도를 달려야 했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여러 번 발령이 취하된다. 그러나 결국에는 47살이 되던 1591년, 독립적으로 전투를 지휘할 수 있었던 전라좌수사에 명해졌다. 급은 정3품이었다.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발령 받기 1년 전인 1590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1년, 도요토미는 명으로의 침공 계획을 세운다. 그는 조선에 다음과 같은 글월을 보내왔다.

“나는 싸우면 지는 일이 없고 치면 빼앗지 못하는 일이 없다. 나는 명나라로 쳐들어가서 명나라 4백여 주를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바꾸고, 억만 년쯤 일본 제국의 정치를 시행하려 한다. 먼 나라나 작은 섬이나, 뒤늦게 따라오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칼의 노래>, 충무공 연보에서 가져옴.

이른바 명으로의 침공 길을 열라는 것인데, 이것은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역시나, 익년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21만이 부산으로 침입해왔다. 조선은 빠르게 무너지더니, 5월 2일께, 서울이 함락되기에 이른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해갔다.

충무공은 5월 4일 첫 출전해, 5월 7일 옥포에서 크게 이겼다. 8일에는 적진포에서 적선 40여 척을 괴멸했다.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했으며, 6월 2일 당포해전, 5일 당항포해전, 7일 율포해전에서 차례로 승리했다. 사천해전에서는 적의 총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나 이후 회복되었다.

이듬해인 1593년 7월 15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기기까지, 견내량, 안골포, 부산포, 웅포에서 왜적을 끊임없이 무찔렀다. 그 해 2월에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겼다. 충무공이 수로 지원을 철저히 차단함에 따라, 8월에는 대대적인 (일본군)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1594년, 3월 당항포 해전을 시작으로, 장문포, 영등포, 제2차 장문포에서 잇달아 왜군을 무찌른다. 이어 1595년 7월, 거제도에 잔류하던 왜군이 완전히 철수한다.

소소한 탐색전이 이어지던, 1596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재침을 명한다. 이윽고 1597년 1월 14일, 20만 일본 대군이 다시 한번 대대적인 조선침공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때 통탄할 일이 있었으니, 원균 등의 모함을 받아 충무공이 죄인의 신분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간 것이다. (1597년 2월) 충무공은 사형을 언도 받고, 3월 4일부터 4월 1일까지 옥살이를 당한다. 송희립, 정경달 등이 충무공을 따라 상경해 밤새 옥문 앞에서 울부짖고 상소했다. (충무공은 한 달간의 옥살이 끝에, 무고함이 밝혀져 풀려난다)

권율 앞으로 백의종군하던 충무공에게 다시 한번 끔찍한 일이 찾아 든다. 다름이 아니라, 옥문을 나선지 10여일 후인 4월 13일, 모친상을 당한 것이다. 서둘러 장례를 수습하고 전장으로 향하는 충무공의 가슴은 찢어졌다. 이렇게 적었다.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 (…)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4월 13일, 19일.

충무공이 무고하게 옥에 갇힌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써 조선 수군의 8할을 지휘하던 원균은, 그 해(1597년) 7월, 일본군에게 대패하며, 그 자신도 전사한다. 7월 23일, 충무공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발령받는다. 이어 9월 16일, 충무공은 명량해전에서 다시금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명군은 직산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그는 부족한 숫자(전함 12척)로, 적선 130여 척을 맞이하여 흔들림 없이 싸웠다. 그는 이렇게 병사들을 독려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이어, 한 달여 후인 10월 14일. 충무공은 셋째 아들 면의 전사 부음을 듣는다. 충무공은 이렇게 울었다.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곁 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정유년(1597년) 10월 14일

그 해 가을부터 이듬해(1598년) 여름까지, 충무공은 고금도에 침입한 외적 16척을 괴멸하는 등 틈틈이 적을 물리쳤다. 7월 16일에는 명나라 수군장 진린 도독과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이미 조선 쪽으로 기울어가는 전세를 단단히 했다.

9월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철수하기에 이른다. 충무공은 철수하는 일본군 잔당을 토벌하며 나아가다가 그 해 11월 19일 새벽,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고 쓰러진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못하게 하고, 병사들로 하여금 끝까지 싸우게 했으며, 이에 조선은 노량에서도 크게 이겼다. 그의 나이 54세 되던 해였다.

노량해전을 기점으로 일본군은 완전히 철수했으며, 7년에 걸친 왜란은 종결됐다. 조선은 큰 별 하나를 잃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면서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 – 정약용, <경세유표>에서. [5]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나온다. – 무명씨 [5]

임진년(1592)
비가 크게 내려 윗사람 아랫사람 모두가 꽃 비에 흠뻑 젖었다. [22]
서풍이 차갑게 부니, 나그네의 심사가 화평하지 않았다. 이날 밤 꿈자리도 몹시 어지러웠다. [43]

계사년(1593)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 충무공 이순신 [116]
나라 일이 다급한 때 / 누가 곽리의 충성을 바치리오 /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 이루려함인데 / 회복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네. / 관산의 달 아래 통곡하고 /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 신하들이여! 오늘 이후에 / 그래도 다시 동과 서로 다투겠는가 – 선조, <누가 곽자의나 이광필처럼 되겠는가> [134]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자. / 피가 강산을 물들였네. /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 도다. – 충무공 이순신, <검명> [136]

갑오년(1594)
비바람 몰아치는 밤 /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 슬픈 마음은 쓸개가 찢긴 듯 / 쓰라린 가슴은 살을 에는 양 /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 눈물만 자꾸 줄줄 흐르네 / 쓰라린 가슴은 쓸개가 잘린 듯 / 슬픈 마음은 살을 에는 양 / 산하가 참혹한 빛을 띠고 /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232]

을미년(1595)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271]
희미한 달빛이 수루를 비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 [281]
북쪽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하더니 / 남쪽에 와서도 죽고 삶을 함께 했네 / 오늘 밤 달빛 아래 한잔 술 나누고 나면 /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지겠구려 [287]

병신년(1596)
이날 발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 빛은 비단결 같아서 자려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318]
스스로 예쁜 것만 믿다가 홍등가에 잘못 드니 천애의 땅에서 영락할 줄 어찌 알았으랴. 번화한 거리에서 한번 더럽혀지고 바닷가 꽃 속에서 부질 없이 풍월 읊네. 한 가득한 오주에서는 봄 풀이 푸르고 꿈 깨는 금고에서는 석양빛 짙네. 아름다운 얼굴 빌려오지 못하고 나이만 들었으니 붉은 촛불과 맑은 술잔 그대 어이하리오. – 이춘원, <구원집>. 한양 기생 내산월에게 준 시. [374]

정유년(1597)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 큰 칼 차고 깊은 시름할 때 /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 정유년 중추 이순신 읊다. [382]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402]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440]
대저 신하 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444]

속 정유년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460]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460]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461]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아들 면의 전사 부음을 듣고서) [470]
거처함에 장중하지 못하고, 임금을 섬김에 충성스럽지 못하고, 벼슬에 임하여 공경스럽지 못하고, 친구와 돈독하지 못하고, 전진에서 용맹스럽지 모하면 효도가 아니다. – 증자, <예기, 제의>편에서. [483]

무술년(1598)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 [503]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충무공의 죽음을 접하고 나서) [503]





3. 여신(타고 남은 불기운)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년(1592년) 초하루부터 정유년(1598년) 11월까지, 왜란을 겪는 와중에 틈틈이 기록한 진중일기이다. 왜란은 임진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을 침공함으로써 시작됐으며, 정유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11월에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함에 따라 종결됐다.

난중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충무공의 사람 됨됨이는 크게 네 가지이다. 먼저 이것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 그는 효자였다. 그의 기록에는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이 표현되어 있다. 사람을 보내 끊임없이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으며, 어떤 날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본문에서 몇 구절 가져와 본다.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 계사년(1593년) 5월 4일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계사년(1593년) 6월 12일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을미년(1595년) 1월 1일

“탐후선이 오지 않아 어머니의 안부를 알 수 없었다.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난다.” 을미년(1595년) 6월 4일

충무공의 효성을 모두 옮기지 못한다. 그는 매 순간 어머니를 생각했으며, 그 간절함과 애절함이 그의 문장 곳곳에 드러났다. 위에 옮긴 것은 터럭만큼을 훔쳐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행간을 따라 거듭 드러나는 그의 효성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훗날, 충무공의 효성에 대해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

둘째, 그는 나라의 충신이었다. 일본군이 부산을 통해 들어와 보름 만에 (임진년 4월 14일 – 5월 2일) 서울을 함락함에 따라, 선조는 의주까지 피해가야만 했다. 선조는 4월 30일에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향했으며, 2개월 뒤인 6월 22일 의주에 도착한다. 이후 1년 3개월여에 이르는 피란 생활을 하게 되는데, 충무공은 틈틈이 장계(임금께 올리는 보고서)를 써 올리며 선조가 있는 북쪽을 향해 이렇게 탄식했다.

“한 해가 장차 바뀌려 하는데도 아직 적을 섬멸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 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임진년(1592년) 8월 28일 이후 적혀 있는 내용. (선조가 한참 함경도 일대를 전전하는 중)

“늦게 경상 수사가 왔고 선전관 성문개가 와서 만났다. 피란 중에 계신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로다.” 계사년(1593년) 5월 12일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는 중)

나라를 향한 그의 충심은 이 밖에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는 종종 홀로 앉아 나라를 생각하곤 했는데, 때마다 슬프고 간절한 마음에 눈물과 탄식으로 밤을 지새웠다. 충무공의 나라 사랑은, 그야말로 후학들이 길이 새겨 보존하고 바로 세울 만한 값진 것이라 하겠다. 그와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나라가 지켜졌다. 그 애절한 마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몇 구절 더 옮긴다.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만 몸소 시석(화살과 돌팔매)을 무릅쓰고 나아가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어서 몸을 바쳐 나라에 은혜를 갚으려는데, 지금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계사년(1593년) 9월 15일 이후 적힌 기록.

“혼자 다락에 기대어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을미년(1595년) 7월 1일

“대저 신하 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정유년(1597년) 10월 8일 이후에 적힌 내용.

셋째, 그는 용감무쌍한 군인이었다. 왜란 초기인 임진년 5월 29일 전라 좌수영이던 시기, 그는 사천싸움에서 지휘선을 전장 깊숙이 몰아 교전하다가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기도 했다. (이 부상으로 그는 수개월간 고생했지만, 이후 회복했다) 명량해전에 앞서,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그가 인용해 했던 말은 유명하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그는 이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전투가 시작되면 죽음을 무릎 쓰고 나아갔으며, 매 순간 선봉에 서서 본(보기)으로 지휘했다.

역시, 가장 극적인 전투이자 충무공의 용감무쌍함을 십분 엿볼 수 있는 명량해전을 소개한다. 정유년(1597년) 7월 16일, 조선은 칠천량에서 크게 패한다. (원균이 지휘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그 8할을 잃는다. 충무공은 다시 삼도수군의 통제권을 이어받아 처참히 무너진 조선수군을 수습했고, ‘12척 대 130척’이라는 불가능한 전투를 치르기에 이른다. 이것이 유명한 명량해전이다.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적선 130여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 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정유년(1597년) 9월 16일

터무니없는 수 적 열세 앞에, 누구도 조선수군이 승리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일본군은 물론이거니와 조선군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해보나 마나 한 싸움이라 생각했다. 안위를 비롯한 조선 수군장들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충무공은 달랐다. 그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아군 전함 12척의 선봉에 서서 강하게 저항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김응함!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충무공의 독려로, 부하들은 차츰 명량이 그들의 사지임을 깨닫는다. 싸우다 죽거나, 도망가다 죽거나 해야 할 것이다. 그곳에서 패한다면, 조선수군에게 후일의 도모는 없었다. 그들은 죽음을 등지고 그곳에서 모든 피를 쏟아야 했다.

이윽고, 수군장들의 배는 충무공의 지휘선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과연 하늘이 도왔던 것일까? 명량의 좁은 수로(水路)에서 수 적 우위를 살리지 못한 일본군의 선두는 조선수군의 배수의 진 앞에 차례로 쓰러졌다. 그 후미는 힘없이 무너지는 자신들의 선봉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후퇴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쫓아 들어가 지자,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고, (…) 드디어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 달아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속 정유년 9월 16일

명량해전은 충무공의 용맹을 힘입어 일으킨 승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실로 강인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리더이자 지휘관이었다.

넷째, 그는 부하를 생각하고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는 어진 사람이었다.

충무공이 전투에 임하는 모습은 매우 진지하다. 부하들을 엄히 꾸짖었고, 달아나는 자는 이후에 잡아들여 문초하고 벌했다. 군량을 빼돌리거나 용역을 숨겨준 대가로 뇌물을 받은 현감들은 색출하여 군법에 따라 처형했다. 그는 그의 큰 칼처럼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던 것은 때가 악한지라 기강을 튼튼히 하기 위해 공의를 실천하려 했을 따름이지, 그 인간성의 본심은 아니었다. <난중일기> 곳곳에는 부하와 백성을 사랑하는 충무공의 애틋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몇 구절 옮겨본다.

“아침에 맑다가 저물녘에 비가 내렸다. 농사에 많이 흡족하겠다.” 계사년(1593년) 8월 7일

“아침에 흐렸다가 큰 비가 왔다. 농민의 소망을 흡족하게 채워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병신년(1596년) 5월 6일

“소비포 권관 이영남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 및 격군(병사들)이 거의 다 굶어 죽겠다는 말을 들었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갑오년(1594년) 1월 19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살을 에듯이 추웠다. 각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갑오년(1594년) 1월 20일

이 밖에도 충무공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몇 가지 있다. 간단히 정리해서 구분해본다.

슬픈 인생
충무공의 삶은 고단했다. 진중에 몸이 자주 쇠했으며, 이따금 코피를 쏟았고, 땀을 많이 흘리며 밤잠을 자주 설쳤다. 전쟁 초기인 임진년에는 총상으로 몇 달간 고생했으며, 결국 노량에서도 적의 총탄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 고단함은 정신적 비애와 아픔에 비할 바 아니다. 소란한 나라 걱정에 시름을 잊을 날이 없었고, 병중에 있는 어머니 생각에 하루라도 평안히 보내지 못했다. 애꿎은 옥살이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슬피 울었으며, 장례를 미처 수습하지도 못한 채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명량해전이 끝난 한 달 후에는, 셋째 아들 면의 전사 부음을 들었으며, 찢어지는 가슴을 추슬러 꾹꾹 누르고 다시금 전장으로 향했다. 그 인생은 퍽이나 슬펐다.

문학적 감수성
충무공은 진중에도 항시 일기를 썼다. 7년간의 왜란을 기록한 <난중일기>가 바로 그것이다. 임금에게 보내는 장계를 직접 작성하기도 했으며, 지인들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여러 편이 전해진다) 이 밖에도 시조와 한시 등 몇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훌륭한 문장을 한 편 옮긴다.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차고 깊은 시름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정유년 중추 이순신 읊다……>

원균과의 불화
충무공에도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그는 원균과 불화했다. <난중일기>에는 원균의 악함을 기롱(빗대어 놀림)하는 여러 기록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그렇듯 지속적으로 원균을 욕하며 적었던 것은, 분명 원균 그대로의 악함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반감은 그 자체로 해가 되기도 한다. 스스로의 가슴 속에 악을 키우는 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후 충무공이 원균의 모함으로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겠다.

점괘나 꿈을 중요시 함
충무공은 전투에 앞서, 자주 점괘를 보았다. 글자를 짚어 쳐보는 괘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는 꿈에도 제법 비중을 두었다. 가령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머리를 풀고 곡을 했다. 이것은 매우 길한 조짐이라고 한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충무공처럼 강인한 자도, 인간적인 연약함과 운명이라는 불가항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점괘나 꿈 같은 전통적 제의에 의지했다. 인간다움(?)의 한계일까?

이렇게 <난중일기>에 드러난, 그의 됨됨이 4가지와 인간적 특색 4가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내가 정리할 내용은 끝났다. 아쉬운 부분이 분명 있다. 몇몇의 전투 장면을 <난중일기>의 시각에서 묘사, 정리해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시조나 한시, 혹은 편지와 일기에 드러난 수려한 문장 따위를 꼬집는 것도 괜찮았을 것이다. 가까운 부하들을 정리하고 그 관계의 어떠함을 개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서 맺으려 한다. 때론 걷기도 해야 하는 모양이다. 마라톤에 비유하곤 하잖은가?

대신 사견을 조금 보탠다. 모름지기 위인을 읽고 나면 반드시 반성이 있어야 하는 법.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1)충무공의 일상을 보았더니, 그야말로 무료하기 그지 없었다. 맑음과 흐림의 연속이었고, 그 하루하루는 별다른 특이점 없이 지나갔다. 내 것과 같았다. 그러나 시선을 멀리 두고, 임진왜란이라는 7년의 역사 잣대로 대어보니 그는 힘찬 거인이 되어 있다. 다르다. 그는 보잘것없는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간 것이다. 다름의 방법은 하나. 그 하루하루의 ‘힘참’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2)<난중일기>를 읽으며 가장 답답했던 점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주변인물들에 대한 정보였다. 빼곡히 정리된 주석을 읽는 것도 귀찮았고, (주변인물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아무개로 읽어 넘기기에는 내용 이해의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 든 생각이 이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기록했을까?” 답은 자명했다. 삶은 인간관계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야, 삶은 되어가는 것이다. 누구든 매일의 일상을 기록해보면, 사람과의 만남이 그 8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름아닌 인간관계가 아닐까? <난중일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살아간다는 것,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4. 내가 저자라면
나도
그의 문장은 강하다. 물론 뜻글자(한자)의 용맹함이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미사여구 없이 쓰는 그의 필치는 ‘뜻함’ 그 자체였다. 장군의 그것다워 좋았다.

그만큼 좋아 보였던 걸까? 나도 그런 문장을 연습해보기로 했다. 일기를 빼먹지 않고 쓰데, 그곳에 쓰는 글만큼은 최대한 달리게 하는 것이다. 그 마음가짐의 첫 줄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개인사를 기록하기로 했다. 난중일기를 읽고 있는데, 요상한 자극을 받았다. 그는 짧고 선명하게 기록할 줄 알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게 가장 큰 걱정이다. 한 번 잡으면 질질 끌면서 한참을 붙드는 습관인지라, 새로운 글쓰기의 작정이 두렵다.”

그 동안 쓴 것(벌써 7일을 썼다)을 둘러보니, <난중일기>에 관한 것도 있었다. 이렇게 적었다.

“난중일기를 끝냈다. 그런데 막상 리뷰를 쓰자 하니, 방향이 잘 안 잡힌다. 너무나 뻔한 인물이고, 몇 백 년 전 진중의 일기를 뭐 흠잡을 데가 있다고 이러쿵저러쿵 할 것인가? 그저 들이받는 수 밖에. 일단 들이받아 엉키고 설키다 보면, 길은 열리게 되어 있더라.”

일기를 쓴다. 장군의 그것처럼 크고 선명하게.

풍신수길과 가등청정
<난중일기>의 버전이 많길래, 사람들의 리뷰를 훑으며 책을 골랐다. 그때 이런 글귀를 보았다. “왜놈 이름은 그 나라 말로 표현해 주는 게 맞다. 요즘의 표기법은 현지 발음을 존중해 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가등청정이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로 표기해야 하고, 풍신수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표현해야 한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꼬집어 놓은 책을 선택했다. 책이 마음에 들었고, 또 이런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괄호 표시 ( ) 따위로 일본식 표기를 써 주었거나, 혹은 주석을 달아 명시해 두었겠지. 이를테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렇게 하거나, 혹은 ‘주석1) 가등청정의 일본식 표기는 가토 기요마사이다’ 이렇게 하는 식으로.”

나의 기대는 틀렸다.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노승석님의 완역(?)본은 그런 배려를 하지 않았다. 나는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식 표기를 찾기 위해 포탈사이트의 검색엔진을 돌려야 했다.

을미년에서 재미있어지다
<난중일기>의 전모(?)를 몰랐던 나는, 을미년까지 그저 읽었다. 매우 지루했다. 이렇게 재미없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충무공 연혁과 임진왜란 전투상황의 기록을 찾아, 본문의 각 날짜 옆에 적어 넣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12일 (거북선 완성)
19일 (김해가 무너짐)
2일 (서울 함락)
4일 (여수에서 발진)
7일 (옥포해전)
13일 (평양 함락)
……

또한 각각의 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대 상황과 주변정세가 어떠하였는지 숙지했다. 명나라의 움직임과 일본 본토의 상황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그러자 신나는 일이 벌어졌다. <난중일기>가 흥미로운 소설처럼 읽혔다. 와우.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하다못해 “장계를 써 올렸다” 라고 하는 부분에서도, “그래 이때에는 이런 상황이었으니 이러이러한 내용을 써 보냈겠지?” 하며 읽게 되니, 문장 하나하나가 새록새록 읽힐 수 밖에.

그(번역자)가 이것을 해 주었다면 참 좋았을 듯싶다. 머리말이나 부록 따위를 두어, 왜란의 시대상과 주변정세, 충무공의 연혁 등을 도표로 정리해주는 것이다. 좀더 친절을 부탁하면, 내가 찾아 적었던 것처럼 각 날짜 옆에 주요한 상황을 표기해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더해졌더라면, 훨씬 읽힘성 있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역(譯)’이라는 것도 그것을 위해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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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9 13:18:06 *.36.210.11
<그(번역자)가 이것을 해 주었다면 참 좋았을 듯싶다. 머리말이나 부록 따위를 두어, 왜란의 시대상과 주변정세, 충무공의 연혁 등을 도표로 정리해주는 것이다. 좀더 친절을 부탁하면, 내가 찾아 적었던 것처럼 각 날짜 옆에 주요한 상황을 표기해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더해졌더라면, 훨씬 읽힘성 있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역(譯)’이라는 것도 그것을 위해 하는 것이니까.>

나는 읽으면서도 빠뜨렸던 부분인 데 잘 기억하고 메모해 두었네요. 그렇게 하면 마치 영화를 보듯 쉽게 이해가 되고 박진감 넘치는 자막을 읽듯 재미나겠네요.

* <1)충무공의 일상을 보았더니, 그야말로 무료하기 그지 없었다. 맑음과 흐림의 연속이었고, 그 하루하루는 별다른 특이점 없이 지나갔다. 내 것과 같았다. 그러나 시선을 멀리 두고, 임진왜란이라는 7년의 역사 잣대로 대어보니 그는 힘찬 거인이 되어 있다. 다르다. 그는 보잘것없는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간 것이다. 다름의 방법은 하나. 그 하루하루의 ‘힘참’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무료해 보이기도 하는 평범한 하루가 항상성을 유지하며 위대함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 <충무공처럼 강인한 자도, 인간적인 연약함과 운명이라는 불가항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점괘나 꿈 같은 전통적 제의에 의지했다. 인간다움(?)의 한계일까?>


* <2)<난중일기>를 읽으며 가장 답답했던 점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주변인물들에 대한 정보였다. 빼곡히 정리된 주석을 읽는 것도 귀찮았고, (주변인물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아무개로 읽어 넘기기에는 내용 이해의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 든 생각이 이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기록했을까?” 답은 자명했다. 삶은 인간관계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야, 삶은 되어가는 것이다. 누구든 매일의 일상을 기록해보면, 사람과의 만남이 그 8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점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기록들은 자신의 그때 그때와 상황에 대한 대처와 감정뿐만 아니라 이성적이고 객관적 태도를 갖게하는 원천이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도 됩니다. 꿈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해몽과 자기분석은 전장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판단을 해야 하는 두려움과 우유부단함을 떨치고 정확한 판단과 확신을 갖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갖어봅니다.

내가 읽을 때와는 달리 다른 사람의 리뷰를 읽으며 새롭게 부각되는 견해가 있군요. 그래서 리뷰가 중요하고 가능한한 피드백도 중요한가 봅니다.

여기, 시원한 아이스바 하나! 드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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