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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2일 23시 10분 등록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박병규 옮김, 민음사, 2008


● 저자에 대하여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파블로 네루다(1904~0973)는 스페인 내전이 자신의 시를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전 이후의 행로를 보면 삶 자체가 바뀐 듯 보인다.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네루다는 민중을 돌아보게 되었고, 정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공산주의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갔다. 1936년 터진 스페인 내전의 현장에서 네루다는 자신과 절친한 시인의 죽음을 보았고, 백만 명의 죽음을 보았고, 백만 명의 망명을 보았다. 20세기의 참혹한 비극으로 불리는 스페인 내전은 네루다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스페인 내전은 어떤 것이었을까.

1931년 스페인은 제2공화정을 수립한다. 공화정부는 토지, 교회, 군대의 개혁을 시도하지만 기득권 계층과 우익세력의 반발로 좌절된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점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런 와중에 모로코에 좌천되어 있던 프랑코 장군의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은 시작된다. 공화파 정부와 대립하던 대지주, 자본가, 교회, 군부가 호응하면서 내전은 확산되었다.
농민과 노동자가 중심이었던 민중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전 세계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다. 아라공, 말로, 헤밍웨이, 조지 오웰 등이 총을 들고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고 그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보수와 진보, 파시즘과 자유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적 대립이 스페인 내전에 응축되었다.
그러나 민중은 패했다. 3년을 끌어온 내전은 공화파의 패배로 끝났다. 파시스트들의 국제적 연대가 공화주의자들을 압도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에 화력을 지원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반란군은 1938년 1월 바르셀로나를 함락시켰고 1939년 3월에는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고 미국도 뒤를 따랐다. 내전 이후에 공화파에 대한 체포와 즉결처형이 줄을 이었다.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36년이라는 기간 동안 철권정치로 스페인을 통치했다.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노동자, 농민, 지식인)와 국가주의자(파시스트)간의 이념적 충돌이다. 내전은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공화파 지원,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세력의 국가주의자에 지원이 대립하면서 전 세계적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특징적인 것은 유럽각국의 문인들과 지성인,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스페인으로 달려가서 국제의용군에 입대한 것이다. 각국에서 온 이들은 언어는 다르지만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조국을 등지고 전쟁에 참여했다. 이런 사건은 과거에는 볼 수없었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훈련도 받지 않았고 무장과 보급도 열악했지만 기꺼이 총을 들었다.
스페인 내전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게르니카 폭격이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작은 도시인 게르니카는 나치 독일 공군기들에 의해 3시간동안 32t의 폭격을 받았다. 게르니카는 폐허로 변했고 독일 공군기들은 피신하는 주민들까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1500여명이 살해당한 대학살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와 충격을 안겨주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프랑코 장군에 대한 나치의 지원이었지만 히틀러의 전력 테스트라는 설이 유력하다. 게르니카는 군사 기지도 아니었고 중요한 전략 요충지도 아니었다. 그런 게르니카를 나치가 폭격한 것은,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히틀러가 비행기와 폭탄에 대한 테스트였다는 것이다.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또는 참전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희망’ 조지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클로드 시몽의 ‘농사시’ 카밀로 호세 셀라의 ‘파스쿠알두아르테 일가’ 등이 있다.


네루다는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외교관이었으며 공산당원이고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으로 활약했고 대통령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네루다는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열네 살에는 잡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네루다라는 필명은 아버지의 눈을 피하려 1920년부터 쓰기 시작해 1946년에는 법적으로 아예 이름을 바꾸었다. 1923년에 첫 시집 ‘황혼의 노래’를 출간했다. 스무 살 때인 1924년에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 했는데 이 십은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 자리매김 했다.
1927년부터는 버마, 스리랑카(당시에는 실론), 자바, 싱가포르 등 아시아에서 5년여 동안 영사로 근무했다.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옮겨 일했는데, 마드리드 영사로 있을 때 스페인 내전을 겪는다. 스페인 시인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은 네루다의 시 성격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나는 마드리드에서 생애의 가장 중대한 시기를 보냈다. .. 인간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무시무시한 드라마였다. 이리하여 나의 낡은 생활은 마드리드에서 끝났다.”고 네루다는 말한다.
이후 네루다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지향적으로 바뀌었다. 광부와 노동자, 어부와 기관사 등 학대받은 사람들을 위한 시를 썼다.
1945년 북부 탄광지대에서 칠레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상원의원에 당선된 네루다는 공산당에 입당한다.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산당 등 좌파진영의 지지를 받던 가브리엘 곤잘레스 비델라의 선전 책임자로 일했다. 비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신을 지지한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공산당을 불법화 한다. 이에 네루다는 1948년 의회에서 비델라 대통령의 배신을 폭로하고, 그 대가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뒤 검거를 피해 망명생활을 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검거령 철회 뒤 칠레로 돌아온 네루다는 1969년 칠레공산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그러나 좌파진영이 인민연합을 구성해 대통령선거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하자 네루다는 후보를 사퇴하고 아옌데로 후보를 단일화 했다. 1970년 아옌데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이는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이다.
파리 대사로 임명된 네루다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건강문제로 귀국했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궁을 폭격한다. 네루다는 쿠데타가 일어난지 12일 만인 9월 23일 산티아고의 한 병원에서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이 책에 수록된 회고랄까 추억은 듬성듬성하다. 간혹 잊어버린 일도 있다. 바로 그런 게 인생이다. 우리는 듬성듬성 꿈을 꾸기 때문에 힘든 삶을 견뎌 낸다. 그런데 기억해 내는 순간 희미해지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추억이 너무 많다. 마치 산산조각 나 버린 유리 같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의 회상과 시인이 회상은 다르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은 치열한 삶보다는 생생한 삶을 그리려 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반면 시인은 자기 시대의 불꽃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환영들을 보여준다.
나는 어쩌면 내 자신이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이 지면에 남긴 내 글에서(가을철 수목이나 수확기의 포도처럼) 죽음을 맞는 노란 낙엽이 떨어질 것이고 신성한 포도주로 새 생명을 얻는 포도가 떨어질 것이다.
내 인생은 시인의 여러 경험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14]

칠레의 숲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삶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16]

울창한 산림과 끝없는 해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 영혼, 바꿔 말해서 내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벌써 아득한 옛날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시작된 교류, 그때 얻은 깨달음, 그때 땅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도 내 삶 속에 남아 있다. [33]

언제 처음으로 시를 썼는가? 난생처음 시심에 사로 잡힌 때는 언제인가? 지금까지 이런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아왔다. 기억을 한번 더듬어 보겠다. 아주 오래전, 어릴 적 일이다. 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몇 자 적었다. 운율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상 언어와는 다른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깨끗한 종이에 정서할 때에도 설렘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깊은 불안, 일종의 고뇌와 슬픔에 사로잡혔다. 어머니에게 바치는 시였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어머니, 어린 시절 항상 포근하게 나를 감싸 준 천사같은 새어머니에게 바치는 시였다. 첫 작품이 어떤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서 부모님들께 들고 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식당에 앉아서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아이들이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를 확연하게 갈라놓는 대화 내용이었다. 나는 시적 영감이 채 가시지 않아 조금 떨고 있었다. 부모님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건성으로 받아들고 대충 훑어 본 후에 되돌려 주면서 아무 생각없이 말했다. “어디서 베꼈니?”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중요한 문제를 논의했다. 내 기억으로 첫 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무책임한 비평의 쓴맛을 보았다. [36]

수줍음이란 마음이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이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56]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물론 이성이 우위를 점해야 함녀 정의의 근간인 이성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 [66]

첫 시집! “작가의 작업은, 적어도 시인의 작업은, 신비하거나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작업, 대중을 위한 작업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해왔다. 시와 가장 유사한 것은 빵이요 질그릇이요 서투른 솜씨로나마 정성껏 깎은 목각품이다.” 그러나 어떤 장인도 시인처럼 자신이 손으로 처음 창조한 대상에서 이러한 도취의 감정이나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환희를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은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판을 거듭할수록 더욱 완전하고 아름다운 책이 되고, 시인의 언어는 향기를 품고 노래하는 포도주처럼 다른 언어라는 술잔에 옮겨져 지구 곳곳을 누비겠지만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빳빳한 새 책이 모습을 드러낸 저 순간, 날개를 활짝 펼치고 훨훨 날아가는 듯한 저 황홀한 도취의 순간,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을때 첫눈에 들어오는 꽃봉오리를 응시하는 그런 환희의 순간은 시인의 일생에서도 단 한 번밖에 없다. [77]

창작이란 부단한 연찬을 통해, 비록 참신성과 자발성은 떨어질지언정,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바퀴와 같은 것이다. [77]

사바트 에르카스티의 편지를 받고 장시를 쓰겠다는 야망을 접었다. 내가 제대로 천착할 수 없는 웅대한 시완ㄴ 담을 쌓았다. 의도적으로 문제와 표현을 낮추었다. 한결 소박한 표현과 내 고유의 조화로운 세계를 추구하면서 연애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이다. [80]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83]

우리말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흉포한 정복자들에게 물려받은 이 언어가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정복자들은 세상에 다시없을 게걸스러운 식성으로 감자, 소시지, 콩, 담배, 금, 옥수수, 달걀 프라이를 찾아 험준한 산맥을, 거친 아메리카 대륙을 성큼성큼 돌아다녔습니다. 정복자들은 종교, 피라미드, 종족, 그리고 그들이 보따리에 담아 온 것과 다를 바 없는 우상을 모두 집어삼켰습니다. 가는 곳마다 땅을 갈아엎었습니다. 그러나 말은 이 야만적인 정복자들의 장화 밑바닥에 박혀있던 조약돌처럼 수염에서, 투구에서, 편지에서 떨어졌습니다. 지금 그 빛나는 말이 여기 남아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패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자였습니다. 저들은 황금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황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갔지만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우리들에게 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84]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127]

며칠 전 누이가 공책 한 권을 갖다 주었다. 이 공책에는 오래전에, 1918년과 1919년에 사이에 쓴 시가 적혀 있었다. 그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청소년기의 우울을 보고, 다시 말해서 내 젊은 시절의 모든 작품들에서 발산하는 문학적 고독을 보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의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141]

드디어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배 타는 데 까지만 바래다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배가 닻을 올리고, 나는 배에서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려가 승객들을 헤치고 뛰어나왔다. 슬픔과 사랑에 복받쳐 내 얼굴을 키스와 눈물로 뒤덮었다. 그리고 무슨 의식을 행하듯 내 팔과 옷에 키스를 하더니 갑자기 내 구두에 얼굴을 묻었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 얼굴은 백구두의 초크 가루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떠나지 말라는 얘기는 못 했다. 이제 떠나면 영원히 못 만날 테니 우리 함께 배에서 내리자는 말은 못 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은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가눌 길 없이 북받쳐 오르던 저 설움, 초크 가루로 뒤범벅된 얼굴 위로 흘러내리던 처절한 눈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48]

“에르난데스, 드디어 직업이 생겼어. 자작이 자네에게 한자리 주겠대. 이제 아주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거야. 원하는 자리가 뭔지 말해 봐. 그래야 임명을 하지.” 에르난데스는 생각에 잠겼다. 때 이른 주름살이 깊이 파인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몇 시간이 지난 오후에야 그는 대답을 주었다. 인생 문제의 해답을 찾은 사람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마드리드 근처에서 염소 데를 키울 수 있게 해줄 수는 없을까?” [179]

그런데 로르카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수가 없었다. 로르카는 또 다른 교살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86]

전선에 배치된 군인들이 조판일을 배웠다. 그런데 종이가 없었다. 낡은 풍차 방앗간에서 종이를 만들기로 했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 한가운데서 희한한 혼합물이 만들어졌다. 적군의 깃발에서부터 무어인 병사의 피 묻은 옷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방아에 집어넣은 것이다. 제지술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이상야릇한 재료로 만들었는데도 그지없이 아름다운 종이가 탄생했다. 이 시집이 아직도 몇 권 남아 있는데, 기묘하게 만든 종이와 인쇄술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수년 후 워싱턴 국회도서관에 갔더니 20세기 히귀본 진열장에 이 시집이 있었다. [191]

지성사에서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사건도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 [195]

나중에 칠레로 돌아와서 공식적으로 입당한 후에야 당원 증명서를 발급받았으나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207]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09]

그러나 시는 죽지 않았다. 시는 동요에 등장하는 고양이처럼 목숨이 일곱 개나 되는 불사신이다. 시를 괴롭히고 길거리로 끌고 다니고 침을 뱉고 조롱거리로 만들고 목 졸라 죽이려 들고 추방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총알을 난사해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갓 씻은 해맑은 얼굴을 보이고 갓찧은 쌀알 같은 웃음을 짓는다. [201]

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14]

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는 지금, 그동안의 긴 여행이 헛고생이었을까? 나는 다시 한 번 새로 발견한 땅위에 홀로 남게 되었다. 탄생의 순간처럼, 초기 시의 원천이었던 형이상학적 공포에 경악했을 때처럼 내 작품에서 창조한 새로운 황혼을 맞이했을 때처럼 지금 나는 또다시 고뇌와 고독에 휩싸여 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돌아갈 것이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어디를 향해 침묵하며 또 어디를 향해 소리칠 것인가?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을 제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오직 내 손으로 공들여 만들어 놓은 공허뿐.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것,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강렬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이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을 뿐이다. 인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를 바라보았으니 텅 빈 도시만 눈에 들어왔다. 비참한 모습의 공장을 둘러보았으나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이다.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고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자 세상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영원해졌다. 이제 우리는 대지 위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한정 소유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신비도 찾지 않는다. 우리들이 바로 신비이기 때문이다. 내 시는 끝없이 광활한 세상의 일부가 되고, 바다 속과 지하 세계의 일부가 되고, 놀라운 식물 세계로 들어가고, 대낮에도 유령과 대화를 나누고,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광물을 탐색하고, 가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어주고 있다. 대기가 어두워진다. 가끔씩 인광과 공포로 충전된 번갯불이 환하게 빛난다. 명확한 언어, 진부한 언어와 전혀 무관한 새로운 구조물이 공중에 모습을 드러낸다. 내 시에서 가장 신비한 재료로 만든 새로운 대륙이 솟아나고 있다. 나는 이 대륙에 정착하고, 이 대륙에 이름을 붙이고, 신비한 해안선을 만져보고, 파도를 잠재우고, 동물들이 사는 땅을 둘러보고, 지형을 측량하는데 어둡고 고독하고 아득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228]

사람은 자기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뿌리 뽑힌 사람이 맛보는 좌절감은 어떤 형태로든 영혼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향 땅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발을 딛고, 내 땅을 만지고, 내 땅의 소리를 듣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의 물소리와 그림자를 느끼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양분을 흡수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255]

지금 이야기하려는 일이 있은 지 몇 년 뒤, 나와 인터뷰한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이탈리아 소설가)는 신문 기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칠레 시인이라면 파블로 네루다처럼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아니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257]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았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내 글이나 시집도 아니고, 시어를 해석하거나 해부한 비평서도 아니다.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로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주는 시인이 있어.”
1945년 7월 15일, 나는 칠레 공산당에 가입했다. [262]

문학의 궁극적 목적을 논의할 때 이런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학에서 새로운 형식, 즉 기존 형식의 혁신은 관습적인 틀을 넘어서거나 깨뜨려야 한다. 하지만 문학이 어떻게 철저하고 광범위한 혁명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이 경험한 승리, 갈등, 인간적인 문제, 풍요, 진보, 성장을 핵심적인 주제에서 제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잔인한 침략자들에게 짓밟히고 집요한 식민주의자들과 온갖 종류의 우민화를 자행하는 세력에게 포위된 저 소련의 민중들과 연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문학이나 예술이 이처럼 본질적인 사안을 외면하고 공허한 자율성만을 고집해도 된다는 말인가? [298]

작가의 작업도 저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싯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300]

나는 파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 역시 그 누구도 파문시키지 않을 것이다. 파스칼 같은 신부에게 “당신은 반공주의자이기 때문에 영세를 주어서는 안되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당신은 반공주의자이기 때문에 당신이 시, 당신의 창작물을 게재할 수 없소.”라는 따위의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일 뿐, 그 외의 어떤 규칙이나 호칭이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341]

그런데 땅도 하늘도 광대한 이 혁명 중국에서, 그것도 대낮에, 한 인간을 신화로 만드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게 만드는 신화, 즉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이 창조를 한 사람이 손아귀에 맡겨 버리는 신화였다. 나는 이처럼 쓰디 쓴 약을 두 번씩이나 삼킬 수는 없었다. [354]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7]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는 노력이 필요했다. [388]

따라서 명석한 저널리즘 비평가들이 내 재산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는 것도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물론 사생활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말이다.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하는데, 이것도 물론 이해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391]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2]

시인이 가슴에서 들끓는 분노나 애정을 노래하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그러나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시는 감정보다 한층 본질적인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통제된 자발성을 믿는다. 이를 위해 시인은, 이를테면 긴급 상황에 대비한 비상 용품처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품목은 단어, 음성, 비유에 대한 형식적, 실제적 정보이다. 이런 것들은 벌처럼 귓가를 휘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에 재빨리 낚아채서 주머니 속에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 나는 이런 면에서서는 아주 게으른 사람이나 좋은 충고인 것만은 틀림없다. 마야코프스키는 수럽을 들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감정이란 품목도 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한다는 말인가? 감정이 생길 때,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종이 앞에서 그 의식을 기억해 낼 수 있는데, 감정보다 훨씬 더 선명하다. [395]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399]

아내는 힘찬 목소리로 내 노래를 부른다. 내가 쓴 것. 내가 가진 것은 모두 아내에게 바친 것이다. 많지는 않으나 아내는 행복해한다. 지금 정원의 진흙 속에 푹 빠진 아내의 발과, 땅속 깊숙이 뻗은 뿌리까지 파고든 아내의 작은 손이 보인다. 아내는 발과 손과 눈과 목소리로 땅에서 수확한 온갖 뿌리와 꽃과 달콤한 열매를 내게 가져다주었다. [407]

“인생이란 동반자가 필요해. 자질구레한 인생사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 말이야.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 숨통을 조르는 것 같아.” [411]

지금 미스트랄을 악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가슴 깊이 사무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그토록 수려한 시를 쓴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애증의 갈등을 겪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422]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436]

농부와 어부, 광부와 밀수꾼은 가혹한 삶에, 끊임없이 부과되는 의무와 반복되는 패배에 순응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직도 미지의 땅인 이곳에서 영웅이 되는 길은 어둠에 묻히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서, 이 땅이 부르는 노래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피와 이름 모를 꽃이다. [446]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희망의 대륙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뻐한다. 하원 선거나 상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도 자신이 희망의 후보라고 선전한다. 이러한 희망은 실제로는 천국의 약속 같은 것이고, 항상 변제 날짜를 뒤로 미루는 차용증 같은 것이다. 다음 선거까지 미루고, 다음 해까지 미루고, 다음 세기까지 미룬다. [479]

나는 군중에게 인생을 배웠다. 시인의 타고난 수줍음으로, 수줍은 사람의 두려움으로 군중에게 다가가지만, 그 품에 안기는 순간 나는 본질적인 다수의 한 부분으로, 거대한 인간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으로 변모한다. 고독과 군중은 이 시대 시인이 떠맡아야 하는 기본 의무이다. 고독 속에서 내 삶은 풍부해졌다. 칠레 해안에서 바위와 전투를 벌이는 파도,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바다, 완벽한 편대를 이룬 철새, 그리고 눈부시게 부서지는 포말에 사로잡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군중이란 거대한 물결에서,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정한 눈길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모든 시인이 이런 경험을 할 수는 없으나, 한번 경험한 사람은 이를 가슴에 간직하고, 작품으로 풀어놓을 것이다. 단 1분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다. [496]

저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절대 사임하지 않을 것이기에 기관총을 난사해야 했다. 시신은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비밀리에 매장했다. 무덤까지 가는 길에 동행한 사람은 오직 한 여인, 전 세계인의 애도를 한 몸에 안은 여인이었다. 시신은 칠레 군인들이 난사한 기관총에 맞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저들은 또 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517]


● 책에 대하여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라는 책의 부제는 네루다의 삶을 하나의 문장으로 보여주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네루다는 조국과 삶을 사랑했고, 시를 노래했고, 이념을 위해 투쟁을 벌였다. 책은 자서전이라면 의례히 이러하리라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고리타분한 개인의 자랑이나 의미 없이 늘어놓은 신변사는 없다. 남미를 대표하는 시인답게 문장은 곳곳에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이야기는 차 한 잔을 놓고 마주앉아 건네는 친구의 말처럼 편안하다. 숲 속에서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눈을 떼기 어려운 사건들이 줄을 잇는다.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이야기책 같기도 하고, 생활의 우화를 담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정갈한 산문이나 짧은 소설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삶의 순간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시인의 말은 날카로운 시처럼 가슴을 에워온다. 시대와 역사와 사람을 이야기 해준다.
‘우리는 듬성듬성 꿈을 꾸기 때문에 힘든 삶을 이겨 낸다’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첫눈에 들어오는 꽃봉오리를 응시하는 그런 환희의 순간은 시인의 일생에서도 단 한 번밖에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한다’……
삶의 변곡점을 이루는 순간마다 마음을 드러내는 말들은 문학이 되고 삶이 되고 역사가 된다. 시인의 말을 따라 눈을 옮기다 보면 시인의 삶이 올올이 풀려나온다.

▷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228P) = 뜨거운 가슴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고 내전의 경험으로 작품을 쓴 작가들 중에 파블로 네루다가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당대 세계의 유명한 문인들과 지성들이 대거 참여한 전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땅에서 스페인 민중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당시 마드리드 영사로 현장에 있었고, 직접 참여했던 스페인 내전은 네루다의 시를 바꾸어 놓았다. 그의 말처럼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길거리의 일’ 또한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열정적인 연애시와 초현실주의적 실험시로 이름을 날리던 네루다는 스페인 내전을 거치며 민중시를 쓰는 공산주의자로 커다란 변화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은 때로는 가시밭 같은 길이었지만 네루다는 평생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렵게 찾은 자신의 길에서 민중과 조국을 돌아보며 후회 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그는 민중시인이 자신이 받은 가장 큰 상이라고 말한다. 그가 열망한대로 그의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주었으며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었다.

▷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 이었다……(262P) = 네루다의 삶에서 정치와 투쟁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네루다는 역시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앞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는 천생 시인이기 때문이다. 10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네루다는 12세에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고전작가들에 눈을 뜨게 된다. 후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스트랄은 네루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학진학을 위해 산티아고로 간 네루다는 시 쓰기에 본격적으로 빠져든다. 1923년 첫 시집을 내고 이듬해 출간한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는 아직 까지도 그의 시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시집이 되었다.
칠레에서 네루다의 연애시 하나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네루다는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네루다의 시는 삶의 변화와 신산(辛酸)함을 마치 내 일처럼 그대로 그려낸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사랑받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서정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에 무게를 썼으며 뒤이어 영적인 작품에도 몰두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을 거치며 시는 현실지향적인 방향을 보였고 사회비평시로 옮겨간다.
네루다는 책에서 만년설이 뒤덮인 화산을 보며 자란 유년시절의 기억과 그 시절의 시부터 시작해 청년시절의 집필 과정, 스페인 내전 현장에서의 시와 사람, 공산당원으로의 이념과 시 그리고 민중의 삶을 노래한 시에 이르는 과정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 시인의 눈으로 되돌아 본 시작(詩作)의 역사는 숲 속을 흐르는 강물처럼 청량하다. 강물은 때로는 고요히 흐르고 때로는 요동치면서 시인의 삶처럼 흘러간다.

▷ 저들은 또 다시 칠레를 배신했다……(517P) = 20대의 젊은 시절 장난처럼 시작한 영사 생활은 네루다를 정치로 이끈 단초가 되었다. 외교관으로 각국을 돌아다니며 시를 쓰던 그는 스페인 내전을 겪으며 사상적 변화를 거치고 공산주의자로 탈바꿈한다. 그 이후 그의 삶은 투쟁의 삶이었다. 네루다는 우익정부가 들어서면 몸을 숨기고 살면서도 공산주의라는 노선을 버리지 않았다. 민중이 삶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세상을 향한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루다는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섰다. 모든 게 자신이 꿈꾼 혁명을 위한 걸음이었다.
좌파 정부의 집권을 위해 1973년 대통령 후보를 아옌데에게 양보하며 일궈낸 승리는 순간의 기쁨으로 끝났다. 남미 최초의 좌파정부였던 아옌데 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피노체트는 대통령궁을 폭격했고 아옌데는 그 곳에서 죽었다. 아옌데가 처참하게 사살된 지 12일후 산티아고 병원에서 네루다도 그 뒤를 따랐다. 정치가이며 투사로 키워왔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떠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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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3 10:28:06 *.36.210.11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7]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399]

올 한해 원도 한도 없이 푸지게 놀아보시게나.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울고 싶은 만큼 울고 사랑하고 싶은 만큼 부둥껴 안으며 마치 내일이 없는 시한부 인생처럼 이 글을 쓸 때의 마음을 오롯이 살려 마음껏 놀다가 흐드러지고 지쳐서 죽어보시게나. 무엇을 못하겠는가. 도대체 못할 일이 무언가. 창으로 꽂고 창으로 넘고 창으로 달리면 될 것을.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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