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거암
  • 조회 수 303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6월 23일 09시 24분 등록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1) 저자에 대하여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우리는 찬란한 도시로 입성할 것이다."
-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인용하며 말한 랭보의 시구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지난 1973년이었으므로 오래되었다면 약간 오래되었고, 최근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이 된다. 그러나 그의 시와 그의 생애를 알게 된다면 그가 영원한 청춘의 시인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의 본명은 리카르도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였다. 그의 아버지인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가 네루다의 시 창작을 좋아했다면 우리는 위의 기다란 그의 이름을 외워야 했을지도 모른다.(참고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자식의 이름에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쓴다. 그렇기 때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경우에도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가브리엘 마르께스로 표기하기 보다는 그냥 마르께스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파블로 네루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시를 쓰기 위해 아버지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한 이름을 찾다가 우연히 한 잡지에서 체코 이름을 발견했고, 그 이름의 주인공이 체코의 서민 시인 얀 네루다였다. 물론 그는 여러가지 필명을 사용했으나 최종적으로 네루다를 선택했던 것은 "그가 체코의 서민 시인이었기 때문에 계급적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中에서)이라고 말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생애

1904년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고 만다.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남미 시인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미스트랄 역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이름을 따 필명으로 삼았다.)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그의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네루다는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의 첫 시집은 <황혼의 일기Crepusculario>인데,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갈 수많은 시작(詩作)의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참여적 경향의 시, 사랑의 시, 자연을 노래한 시, 도시적 분위기의 시 등이 그것이다. 그는 두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발표하며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평생동안 그의 시와 삶을 관통하게 될 하나의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때로 도발적이었고, 관능적이었으며 고독과 죽음의 주제와 함께 쓸쓸한 애조를 띠고 있다. 네루다는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20세에 단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그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그는 이후에도 불타는 창작열을 멈추지 않았다.

파블로 네루다의 공직 생활

우리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이 말은 솟아오르는 불쾌한 기억들을 상당히 억누르며 하는 말이다.)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외국의 작가나 시인들이 공직에 나서는 경우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를 비롯해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게 공직 생활을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의 그런 소망을 들어주어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게 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녔다.

그가 아시아에서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외교관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본국 칠레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가난하고 힘든 것이었다.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의 아내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으며,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당시 이 곳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파블로 네루다. 투사가 되다.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페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또 다른 동료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내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1936년 내전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파블로 네루다로 하여금 그간의 나르시시즘적이고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이기적 시인의 탈을 벗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은 내전 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 뛰어든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그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이 곳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 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유년시절부터 자신을 계급적 존재로 인식했던 그인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치꾼의 욕망때문이거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추구 탓이었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력적인 이윤 추구와 초석, 동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가 내세운 공약을 믿었고, 그를 위해 선거운동에 열렬하게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비델라는 그를 지원해준 민중의 의지와는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했다. 미국의 의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Yo acuso)>를 발표한다. 칠레 정부는 공산당을 탄압했고, 당시 5만에 이르는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하고 지하로 잠입한다. 이 무렵 그는 아메리카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새로 각인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총가요집>을 발표한다.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 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참여적이고 민중지향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그가 발표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발표하는 시들은 하나하나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들이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 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 칠레 민중의 불꽃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선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곧 이를 철회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한다.(네루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후 칠레가 어떻게 변해갔을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칠레의 우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므로.)

이전까지 노선 대립과 이념 갈등으로 통합되지 않던 진보세력은 인민연합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나중에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극우반동세력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중 폭격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도면 안되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낙담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며칠 후 침대에 누운 채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구술하던 중 창너머로 무장한 군인들이 자신의 바닷가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이 가택을 수색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부인이 받아 적던 것을 급히 감추자마자 장교 하나가 침실로 들어와 집안 수색하겠다고 통고했다. 네루다는 불쑥 장교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 장교는 깜짝 놀라며 권총에 손을 댔다. "그게 뭡니까?" 네루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시(詩)라네."

파블로 네루다 - 영원한 청춘의 시인

착위 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런 낙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 그러면서도 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은 칠흑같은 암흑의 세게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 아래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하나둘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었고,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머물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바닷가 집(네루다는 이 집에 자신과 절친했지만 먼저 떠난 시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에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뽈 엘뤼아르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을 맹세하곤 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타올랐고,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부 독재를 마감시킬 수 있었다. 피노체트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갔고 이 시간 현재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칠레가 시끄럽다. 그러나 그들 피노체트 일당에게 숨져간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는 지금까지 칠레 국민들을 포함해서 전세계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http://windshoes.new21.org/poem-neruda.htm 파블로 네루다의 생애 인용

* 저자에 대한 소개가 자신만의 곱씹은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는 데, 남의 글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도둑질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ㅜ.ㅜ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1 시골소년

유년기와 시

유년 시절 얘기를 하자면 잊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비다. 남반구에서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비가 쏟아진다. 마치 케이프 혼이라는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17p

비의 예술

울창한 산림과 끝없는 해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 영혼, 바꿔 말해서 내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벌써 아득한 옛날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시작된 교류, 그때 얻은 깨달음, 그때 땅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도 내 삶 속에 남아 있다. 33p

쳐녀작

그 순간 리본이 풀어지는 느낌, 검은색 팔이 내 얼굴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백조의 긴 목이 축 처진 것이다. 그때 백조는 죽을 때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34p

언제 처음으로 시를 썼는가? 난생처음 시심에 사로잡힌 때는 언제인가? 36p

아주 오래 전, 어릴 적 일이다. 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몇 자 적었다. 운율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상 언어와는 다른 것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깨끗한 종이에 정서할 때에도 설렘이라고 할까, 아무튼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깊은 불안, 일종의 고뇌와 슬픔에 사로잡혔다. 어머니에 바치는 시였다. 36p

미망인 셋이 사는 집

“우리가 메뉴를 보관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다시 우리 집에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똑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거예요.” 43p

밀짚 속에서 나눈 사랑

두려움은 점차 강렬한 쾌감으로 바뀌어갔다. 나는 땋은 머리와 매끈한 이마와 양귀비꽃처럼 부드러운 눈까풀을 쓰다듬었다. 이어 풍만하고 탄탄한 젖가슴, 둥근 엉덩이, 나를 휘감은 허벅지를 더듬어 보고, 산속 이끼처럼 촉촉한 사타구니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그 여자 입에서는 신음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46p

2 도시의 방랑자

자취집

수줍음

수줍음이란 마음의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의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56p

학생연맹

알베르토 로하스 히메네스

겨울의 기인들

큰 사업

초기 시집

첫 시집! “작가의 작업은, 적어도 시인의 작업은, 신비하거나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작업, 대중을 위한 작업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해 왔다. 시와 가장 유사한 것은 빵이요 질그룻이요 서투른 솜씨로나마 정성껏 깎은 목각품이다.” 77p

독자들의 애착은 시인을 특정 순간에서 못 빠져 나오게 만든다. 창작이란 부단한 연찬을 통해, 비록 참신성과 자발성은 떨어질지언정,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바퀴와 같은 것이다. 78p

<말>

말은 야만적인 정복자들의 장화 밑바닥에 박혀 있던 조약돌처럼 수염에서, 투구에서, 편자에서 떨어졌습니다. 지금 그 빛나는 말이 여기 남아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패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자였습니다. 저들은 황금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황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갔지만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우리들에게 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85p

3 세계의 길

발파라이소의 방랑자

이윽고 황량한 밤이 끝없이 펼쳐지고 빛줄기가 수없이 불어났다. 멀리서 알데바란이 고동치고, 카시오페이아가 옷을 벗어 하늘의 문에 걸쳐 놓았다. 남십자성이라는 조용한 전차는 은하수라는 밤하늘의 정액 위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96p

발파라이소는 진정한 항구가 되고, 육지에 좌초했으나 멀쩡한 모습의 선박이 되고, 바람에 깃발을 펄럭이는 배가 되었다. 이 깃발의 도시에 대양의 바람이 찾아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 상처 난 언덕에서, 이 향기로운 언덕에서 살았다. 트럼펫처럼 이리 휘고 저리 구부러진 길을 따라 아기자기한 삶이 고동치는 언덕이었다. 길에 나서면 주황색 회전목마, 계단을 내려가는 신부, 수박을 먹고 있는 맨발의 소녀, 떼로 몰려다니는 선원들과 여자들, 녹슨 양철 지붕의 간이 판매대, 조련사의 콧수염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미니 서커스 천막, 하늘 높이 치솟은 계단, 양파 바구니를 끌어올리는 도르래, 식수를 운반하는 당나귀 일곱 마리, 화재 현장에서 돌아오는 소방차, 독약과 양약이 나란히 놓여 있는 진열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99p

나는 다만 종소리와 굽이치는 기복과 이름을 따라갈 뿐이다. 특히 이름을 딸간다. 이름에는 큰 뿌리와 잔뿌리가 있고, 역사와 오페라가 있으며, 그 음절에는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100p

구멍에 파견된 칠레 영사

몽파르나스

동양여행

<알바로>

4 빛나는 고독

밀림의 이미지

옛일을 되살리는 작업은 마치 내 귀에 들리는 저 파도 소리가 쉬지 않고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와 때로는 자장가처럼 나를 재우기도 하고 때로는 난데없는 칼날을 들이대는 것과 같다. 이제 그러한 이미지들을 연대순에 개의치 않고 밀려오고 밀려가는 저 파도처럼 되짚어 보려고 한다. 121p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127p

인도 국민회의

<와불>

불행한 인간 가족

실제 동양에 가보면 흔히 말하는 동양의 신비주의란 서구인이 직면한 불안, 노이로제, 혼란, 기회주의의 부산물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것이다. 131p

얼마 후 파워스는 사랑에 빠졌다. 첫 번째 여자는 파워스의 이론과 턱시도에 반한 혼혈아로, 빈혈 증세가 있어 그녀의 눈만 봐도 아픈 사람 같았다. 이 아가씨는 파워스를 신, 즉 생불이라고 믿엇다. 종교는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132p

홀아비의 탱고

<아편>

아편은 뜬소문처럼 이국 취향에 함몰된 사람들이 향유하는 천국이 아니었다. 착취 당하는 사람들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아편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137p

실론

며칠 전 누이가 공책 한 권을 갖다 주었다. 이 공책에는 오래 전에,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쓴 시가 적혀 있었다. 그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청소년기의 우울을 보고, 다시 말해서 내 젊은 시절의 모든 작품 들에서 발산하는 문학적 고독을 보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 같은 것이다. 142p

콜롬보 생활

문체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대기가 스며들지 않은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 149p

싱가포르

바타비아

5 가슴속의 스페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미겔 에르난데스

잡지 <초록말>

그라나다의 범죄

그런데 로르카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로르카는 또 다른 교살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86p

시란 정태적인 물건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시를 창작한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시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로 형성됩니다. 188p

스페인을 다룬 책

전쟁과 파리

낸시 큐나드

지성사에서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사건도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의 시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 195p

낸시 큐나드. 임종시 그녀의 몸무게는 35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았다. 해골이나 다름 없었다. 자기 몸을 갉아먹으며 이 세계의 불의와 오랜 투쟁을 벌여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갈수록 깊어지는 외로움과 돌봐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죽음 뿐이었다. 197p

반파시즘 작가대회

<가면과 전쟁>

6 쓰러진 사람들을 찾아서

한 길을 선택했다.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09p

라파엘 알베르티

시는 죽지 않았다. 시는 동요에 등장하는 고양이처럼 목숨이 일곱 개나 되는 불사신이다. 시를 괴롭히고 길거리로 끌고 다니고 침을 뱉고 조롱거리로 만들고 목 졸라 죽이려 들고 추방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총알을 난사해도 여전히 살아 남아서 갓 씻은 해맑은 얼굴을 보이고 갓 찧은 쌀알 같은 웃음을 짓는다. 210p

칠레의 나치

이슬라네그라

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14p

역사적 사건, 지리적 환경, 우리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모두 아우르는 총괄적인 시를 반드시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215p

스페인 사람들을 데려오시오

사악한 인물

위니펙 호

마침내 우리는 위니펙 호에 승선했다. 선착장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들이 해후하였다.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지냈거나 유럽과 아프리카로 뿔뿔이 헤어졌던 사람들이었다.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려갔다. 울고 불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차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찾아낸다. 모두 배에 승선했다. 그들은 어부, 농부, 노동자, 지식인들로서 힘과 영웅심과 노동의 표본이었다. 나의 시는 투쟁을 통해 그들에게 조국을 찾아 주는데 성공했다. 한없는 자부심을 느꼈다. 226p

<긴여행>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 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자 세상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영원해졌다. 이제 우리는 대지 위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한정 소유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신비도 찾지 않는다. 우리들이 바로 신비이기 때문이다. 내 시는 끝없이 광활한 세상의 일부가 되고, 바다 속과 지하 세계의 일부가 되고, 놀라운 식물 세계로 들어가고, 대낮에도 유령과 대화를 나누고,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광물을 탐색하고, 가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어 주고 있다. 대기가 어두워진다. 가끔씩 인광과 공포로 충전된 번갯불이 환하게 빛난다. 명확한 언어, 진부한 언어와 전혀 무관한 새로운 구조물이 공중에 모습을 드러낸다. 내 시에서 가장 신비한 재료로 만든 새로운 대륙이 솟아나고 있다. 나는 이 대륙에 정착하고, 이 대륙에 이름을 붙이고, 신비한 해안선을 만져 보고, 파도를 잠재우고, 동물들이 사는 땅을 둘러보고, 지형을 측량하는 데 어둡고 고독하고 아득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229p

7 멕시코, 꽃과 가시의 땅

멕시코, 백년초와 뱀의 땅. 꽃과 가시의 땅이자 가뭄과 폭풍우의 땅이며, 강렬한 그림과 색채의 땅이자 격렬한 분출과 창조의 땅인 멕시코는 마술적인 분위기와 눈부신 햇살로 나를 감싸 안았다. 231p

그로부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이곳에서 발굴한 극소수의 장신구는 멕시코와 미국의 박물관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고독 속에 들어갈 때 황금이 아니라 수장된 처녀들의 비명을 찾았다. 새들의 기괴한 울음소리는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는 처녀들의 비명 같았다. 음침한 태고의 물웅덩이 위로 날렵하게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에서 죽은 처녀들의 노란 손을 보았다. 234p

멕시코 화가들

과테말라의 나폴레옹, 우비코

권총선집

왜 네루다인가

진주만 공격의 전야

연체 동물학자

잡지 <아라우카니아>

마술과 신비

멕시코는 지금도 내 몸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마치 길 잃은 작은 독수리처럼 핏줄을 타고 온몸을 순환한다. 이 독수리는 내가 죽은 다음에야 심장 위에서 날개를 접을 것이다. 254p

8 암담한 조국

마추픽추

뿌리 뽑힌 사람이 맛보는 좌절감은 어떤 형태로든 영혼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향 땅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발을 딛고, 내 땅을 만지고, 내 땅의 소리를 듣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의 물소리와 그림자를 느끼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양분을 흡수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255p

초석산지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償)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내 글이나 시집도 아니고, 시어를 해석하거나 해부한 비평서도 아니다.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로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 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서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263p

곤살레스 비델라

우리 혼혈 아메리카에서는 당선만 되면 이상하게 변하는 대통령이 한둘이 아니다. 곤살레스 비델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264p

우리 손으로 선출한 대통령이 미국의 비호를 받는 흡혈귀 새끼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곤살레스 비델라는 대통령 궁 근처에 호화로운 안가를 마련하고 향락을 즐겼으나 밤에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265p

[찢겨진 육신]

도망 다니며 숨어 지내던 바로 그 해, 가장 중요한 내 시집 [모두의 노래]를 탈고했다. 매일같이 집을 옮겨 다녔다. 어디를 가나 대문을 열고 나를 숨겨 주었다.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는데도 며칠이고 자기 집에 머물기를 바랐다. 몇 시간이든 몇 주든 상관없이 숨겨 주겠다고 했다. 아메리카 대륙 여러 나라에서 부르는 민요가 있다. [찢겨진 육신]이라는 노래인데, 이 노래를 들어 보면 발은 여기 있고 신장은 저기 있다는 식으로 농촌과 도시 곳곳에 흩어진 신체를 묘사한다. 그 시절 내 심정이 그랬다. 267p

원시림의 길

안데스 산맥

산 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

파리 여행과 인권

뿌리

9 망명의 시작과 끝

소련방문

생명은 계율보다 강인하다. 혁명은 생명이나, 계율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이다. 296p

작가의 작업도 저 얼음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싯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300p

다시 찾은 인도

첫 중국방문

[대장의 노래]

망명의 끝

어설픈 해양학

10 여행과 귀환

우리 집 양

1952년 8월부터 1957년 4월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투옥되다.

시와 경찰

나는 파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 역시 그 누구도 파문시키지 않을 것이다. (중략) 사람은 사람일 뿐, 그 외의 어떤 규칙이나 호칭이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누구나 성당에 들어갈 수 있고, 인쇄소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체포하거나 추방하려고 시장을 면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누구나 웃는 얼굴로 시청을 드나들 수 있기를 바란다. 곤돌라를 타고 도망가는 사람도, 오토바이를 타고 뒤쫓는 사람도 없기를 바란다. 또 대다수 사람들이, 아니 모두가 말하고 읽고 듣고 번영하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투쟁이란 모든 투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일 뿐이며, 강력한 대응이란 모든 강력한 대응을 끝내기 위한 강력한 대응이다. 나는 지금까지 오로지 한 길을 추구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길이 우리 모두를 영원한 사랑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략)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이 도사리고 있다. 이 폭탄이 터지면 지구상에는 남아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내 희망을 꺾지는 못한다. 이 위기의 순간에도, 이 전멸의 위협 속에서도 사태를 직시하면 서광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다. 그 어떤 시련도 이런 희망을 꺾을 수 없다. 342p

다시 찾은 실론

두 번째 중국방문

스탈린의 경우, 나도 개인 숭배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은 우리에게 히틀러 군대를 물리친 승리자, 인류의 구원자로 보였다. 이러한 스탈린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 미스터리이며, 우리들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땅도 하늘도 광대한 이 혁명 중국에서, 그것도 대낮에, 한 인간을 신화로 만드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게 만드는 신화, 즉,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한 사람의 손아귀에 맡겨 버리는 신화였다. 나는 이처럼 쓰디쓴 약을 두 번씩이나 삼킬 수는 없었다. 354p

수후미의 원숭이

아르메니아

포도주와 전쟁

민중이 되찾은 궁전들

우주비행사들의 시대

11 시는 직업이다.

시의 힘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며 내 목소리가 깊은 우물과 같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또 저 노동자들의 검은 눈동자와 눈썹이 점차 내 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제야 진정한 독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운율에 취하고 또 버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계속 시를 낭독했다. 377p

<시>

시는 이미 독자와 관계가 끊어졌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문득 찾아든 시는 우리 시인들이 그 동안 읽고 배우느라 투여한 갖은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386p

언어와 함께 살기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 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389p

비평가도 고통을 당해보라

우리 시인들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단, 우리가 민중과 강고한 유대를 맺고,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 투쟁한다는 단서가 붙을 때만. 391p

그 비평가에 따르면 내 시의 약점은 바로 행복감이었다. 그리고 대안으로 고통을 처방했다. 이런 논리라면, 맹장염을 앓아야만 탁월한 산문을 쓸 수 있고, 복막염을 앓아야만 숭고한 시를 창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2p

단시와 장시

행동하는 시인으로서 나는 자기도취와 싸웠다. 따라서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갈등은 나라는 존재 내부에서 해결되었다. 392p

한 가지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나 때문에 적어도 우리 조국에서는 시를 쓰는 일, 즉 시인이라는 직업을 얼마간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93p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비합리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데,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오로지 합리주의만을 추구하는 시인은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잇는데, 이 또한 한심한 일이다. 이런 방정식은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하느님이나 악마가 제시한 해법도 없다. 합리와 비합리라는 양극단은 시 내부에서 부단히 다투고 있으며 한번은 이쪽이 승리하고 다음 번에는 저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시 자체는 결코 패하는 법이 없다. 394p

시란 인간의 심오한 감성에서 우러나온다. 바로 이런 감성에서 예배와 찬송이 우러나왔고, 나아가서 종교가 탄생했다. 시인은 갖가지 자연 현상과 대담하게 맞섰고, 원시 시대에는 사제라는 이름으로 직책을 유지했다. 근대에 이르러는 자시의 시를 방어하기 위해 일반 대중이 부여한 자격을 등에 업었다. 오늘날 시민사회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고대의 사제 행세를 하고 있다. 옛날에는 어둠과 결탁했다면, 이제는 빛과 함께 해야 한다. 395p

독창성

탁월한 시인이 되려면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을 고수하고, 자연, 문화, 사회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95p

병 속의 범선과 선수상

책과 조개껍데기

깨진 유리창

사랑의 노래여! 산산조각 난 유리를 헤치고 일어나라. 노래할 시간이 왔도다.
사랑의 노래여! 균형 감각을 회복하고, 고통을 노래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다오.
진정 이 세계는 전쟁을 쓸어 낼 수 없고 피를 씻어 낼 수 없고 증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실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상의 거울에 폭력이 비치고 있으나 누가 봐도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다. 나는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 또한 사람들이 고통을 딛고 일어나, 피와 부서진 유리를 딛고 일어나 서로를 이해하리라고 확신한다. 406p

아내 마틸데 우루티아

삶과 땅이 우리를 만나게 했다. 407p

별을 발명하는 사람

거장 엘뤼아르

친구여, 프랑스의 드높은 탑이여! 자네 비록 눈을 감았으나 나는 자네가 지상에 뿌려 놓은 빛과 위대함, 순박함과 올곧음, 선과 소박함에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라네. 412p

피에르 르베르디

언젠가 그의 이름이 천사처럼 부활하여 망각이라는 부당한 문을 부셔 버릴 것이다. 413p

예지 보레츠사

솜이오 되르디

살바토레 콰지모도

나는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며 내 고향 아라우카니아의 나뭇잎으로 만든 향기로운 왕관을 드높이 쳐들어,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보낸다. 바람과 생명이 이 왕관을 살바도레 콰지모도의 이마 위에 내려놓기를 기원하면서, 그러나 이 왕관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초상화에서 흔히 보는 아폴로 신의 월계관이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칠레의 숲 속에서 아직은 이름이 없는 나뭇잎, 남극 오로라의 이슬을 머금은 나뭇잎으로 만든 왕관이다. 419p

바예호는 살아 있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나는 당신과 함께 진리와 본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진리와 본질은 우리들의 목소리와 우리들의 행동 덕분에 소중히 간직될 것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이 대양과 안데스 산맥 사이에 외롭게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조국에서 고이 잠들고 살고 싸우고 노래하고 창조하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고귀한 이마에 입맞춤하고, 당신의 원대한 시에 경의를 표합니다. 423p

비센테 우이도브로

문단의 적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문인들 사이의 갈등은 지구 어느 곳에서나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427p

비평과 자평

창조의 영역을 이처럼 반반으로 나누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심장은 반 토막 나 버려 더 이상 살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주의하라! 우리는 시인에게 빛과 어둠 속에 있으라고 요구할 뿐만 아니라 거리와 전투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요구한다. 어쩌면 시인은 유사 이래 항상 이런 의무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의 영예란 거리에 나가서 이런저런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사람들이 반역자라고 불러도 놀라지 않았다. 시는 반역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파괴 분자라고 불러도 화내지 않았다. 씨앗은 도처에서 싹을 띄우며, 모든 생각은 이국적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엄청난 변화를 기대하며, 인간 질서의 변혁을 열렬하게 고대한다. 봄은 반역이다. 436P

또 한 해가 시작된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내 책은 항상 똑 같은 것을 다룬다. 언제나 똑 같은 책을 쓴다. 친구들이여,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 이 순간, 새 날로 가득한 새해에 나는 그대들에게 시, 언제나 동일한 시밖에 줄 것이 없다. 441p

노벨문학상

봄은 노란색 물결로 시작된다. 작은 황금색 꽃들이 무수히 피어나 사방을 뒤덮는다. 작지만 강렬한 색깔을 지닌 이 꽃들은 언덕을 뒤덮고 바위를 에워싸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며, 마치 도전장이라도 던지듯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니는 길 한복판으로 뛰쳐나와 자기 존재를 알린다.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게 생명력을 유지하더니 황량한 땅에서 숨을 죽이고 있더니 이제는 땅이 부족해서 더 이상 노란 꽃을 피울 수 없다고 안달이었다. 444p

우리나라의 농부들과 어부들은 이미 오래 전에 작은 식물들의 이름을 잊어버려, 이제 작은 꽃들은 이름조차 없다. 이름이 잊혀 감에 따라 꽃도 자부심을 상실해 갔고, 이제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서로 뒤엉켜 피어난다. 마치 눈 덮인 안데스 산맥에서 강물에 휩쓸려 내려와 이름 모를 강변에 처박힌 돌멩이와 같다. 농부와 어부, 광부와 밀수꾼은 가혹한 삶에, 끊임없이 부과되는 의무와 반복되는 패배에 순응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 아직도 미지의 땅인 이곳에서 영웅이 되는 길은 어둠에 묻히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서, 이 땅이 부르는 노래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피와 이름 모를 꽃이다. 446p

칠레 치코

9월의 깃발

루이스 카를로스 프레스치스

비토리오 코도빌라

스탈린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 문제에 대한 적들의 주장이 여러 면에서 옳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참담한 심경이었다. 처음에는 갈피를 잡기 어려웠고 양심의 고통도 뒤따랐다. 일부는 환멸을 느낀 나머지 느닷없이 적들의 논리를 수용하여 전향하였고, 일부는 공산당이라 할지라도 세계에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스스로 책임을 인정할 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례로써 20차 전당 대회의 충격적인 폭로를 받아들였다. 그처럼 잔혹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실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472p

순박함의 교훈

나도 동지들만큼 순박하고, 동지들만큼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기를 소원한다. 겸손에서 배울 점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회의주의에 안주하여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만심에서는 배운 게 아무 것도 없다. 474p

피델 카스트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우리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희망의 대륙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뻐한다. 하원 선거나 상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도 자신이 ‘희망의 후보’라고 선전한다. 479p

쿠바인들의 편지

나는 혁명, 특히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간혹 오류와 불의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코 성문화되지 않은 인류의 법칙은 혁명가나 반동주의자 모두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친다. 아무도 실수를 피할 수 없다. 혁명 과정에서 드러난 맹점, 사소한 맹점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하찮은 일이다. 나는 지금도 쿠바 혁명과 쿠바 민중과, 고귀한 혁명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또 칭송한다. 485p

12 희망과 고난의 조국

극단주의와 스파이

극단주의자보다 수천 배나 위험한 존재가 스파이다. 488p

<공산주의자들>

시와 정치

나는 군중에게 인생을 배웠다. 시인의 타고난 수줍음으로, 수줍은 사람의 두려움으로 군중에게 다가가지만, 그 품에 안기는 순간 나는 본질적인 다수의 한 부분으로, 거대한 인간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으로 변모한다.
고독과 군중은 이 시대 시인이 떠맡아야 하는 기본 의무이다. 고독 속에서 내 삶은 풍부해졌다. 칠레 해안에서 바위와 전투를 벌이는 파도,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바다, 완벽한 편대를 이룬 철새, 그리고 눈부시게 부서지는 포말에 사로잡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군중이라는 거대한 물결에서,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정한 눈길 속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모든 시인이 이런 경험을 할 수는 없으나, 한번 경험한 사람은 이를 가슴에 간직하고, 작품으로 풀어 놓을 것이다.
단 1분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다. 496p

대통령 후보

아옌데 선거 운동

파리주재 대사관

귀국

아옌데가 승리하자 지배계급은 길길이 날뛰었다. 자기네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정한 법률이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곧이어 주식, 보석, 현금, 금화를 싸 들고 아르헨티나, 스페인 그리고 멀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도망갔다. 민중이 두려운 나머지 북극이라 할지라도 한달음에 내달렸을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돌아왔다. 508p

에두아르도 프레이

라도미로 토미크

살바도르 아옌데

불멸의 국민적 가치를 지니는 아옌데 정부의 정책과 업적은 칠레 해방을 원치 않는 적들의 분노를 샀으며, 그 비극적인 상징이 바로 대통령 궁 폭격으로 나타났다. 나치는 무방비 상태의 스페인, 영국, 러시아 도시를 전격적으로 공습했는데, 이제 칠레에서도 그런 범죄 행위가 일어나고 말았다. 칠레의 공군 조종사들은 180년 동안 민선 정부의 보금자리였던 대통령 궁에 급강하 공격을 퍼부었다. 516p

공중 폭격 직후, 수많은 탱크들이 작전에 돌입했다. 단 한 사람, 칠레공화국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노린 대담한 작전이었다. 아옌데는 불꽃과 연기로 뒤덮인 집무실에서 혼자 당당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절대 사임하지 않을 것이기에 기관총을 난사해야 했다. 시신은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비밀리에 매장했다. 무덤까지 가는 길에 동행한 사람은 오직 한 여인, 전 세계인의 애도를 한 몸에 안은 여인이었다. 시신은 칠레 군인들이 난사한 기관총에 맞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저들은 또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517p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평온한 유년기로부터 시작해서, 보헤미안 생활을 하던 청년 시절과 동남아시아에서 보낸영사시절을 거쳐,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이념적 갈등, 칠레의 1970년대 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굽이쳐 가고 있다.” (옮긴이의 글 中에서)

그렇다. 이 책은 전 생애적인 파블로 네루다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회고록은 개인의 역사이면서도, 질풍노도와 같은 남미 아메리카의 격동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파블로 네루다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총칼이 번뜩이는 그 역사적 현장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희망과 절망의 교차하는 순간에 어떤 길이든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지식인의 고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09p

그는 작가(作家)가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하는 문학작품은 숨쉬지 않는 죽은 고기덩어리와 같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작가의 개성(個性)을 나타내는 문체(文體)는 인간과 관계된 제 관계 ; 밥, 자유, 해방, 희망과 도외시 될 수 없음을 말이다. 현실의 받아안을 수 없는 글은 이미 죽은 것이다.

“문체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대기가 스며들지 않은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 149p

그는 자신의 시(詩)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民衆)에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절망 속에 있는 민중에게 사상적 투쟁의 칼이 되기를 바랐으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한 장의 손수건이 되기를 희망했다. 민중들과 함께 빵을 나누고 싶었으며, 피눈물을 함께 흘렸다. 그에게 가장 영광스런 상(償)은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 그을린 노동자와 농민의 속삭임이었다.

“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 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229p

그런데 그의 문학적 세계에 심원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어릴 적부터 교감하였던 ‘자연’(自然) 그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산과 들, 바다와 강, 바람과 풍광. 이러한 일상들을 뛰어난 감수성으로 읽어내려가는 그는 자연과 영혼으로 교감하였다.

울창한 산림과 끝없는 해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 영혼, 바꿔 말해서 내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벌써 아득한 옛날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시작된 교류, 그때 얻은 깨달음, 그때 땅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도 내 삶 속에 남아 있다. 33p

이러한 그의 자연에 대한 깊은 감수성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초(民草)들의 삶과 유기적 연관성을 맺으며, 문학적으로 승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름 모를 들꽃과 같은 민중들의 삶을 한 편의 수채화와 같은 시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농부들과 어부들은 이미 오래 전에 작은 식물들의 이름을 잊어버려, 이제 작은 꽃들은 이름조차 없다. 이름이 잊혀 감에 따라 꽃도 자부심을 상실해 갔고, 이제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서로 뒤엉켜 피어난다. 마치 눈 덮인 안데스 산맥에서 강물에 휩쓸려 내려와 이름 모를 강변에 처박힌 돌멩이와 같다. 농부와 어부, 광부와 밀수꾼은 가혹한 삶에, 끊임없이 부과되는 의무와 반복되는 패배에 순응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 아직도 미지의 땅인 이곳에서 영웅이 되는 길은 어둠에 묻히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서, 이 땅이 부르는 노래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피와 이름 모를 꽃이다.” 446p

이 회고록을 통해 문득 격동의 80년대를 살아왔던 한국의 시인 한 명이 생각났다.
박노해 詩人. 세상과 함께, 민중과 함께 호흡하고자 했던 사람.
칠레에 파블로 네루다라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박노해라는 걸출한 시인이 있다. 파블로 네루다가 지식인 출신의 시인이라면, 박노해는 철저하게 현장 출신의 노동자시인이다. 그러나 파블로 네루다와 박노해 모두 먼지 쌓인 서재 속에서, 현실과 유리된 나약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질펀한 현실 속에서 햇볕에 그을린 소박한 민중들과 함께 했던 시인들이었다.

파블로 네루다와 박노해. 두 사람 모두 불꽃처럼 살다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장이 없는 언어를 쓰지 않았으며, 영혼이 없는 영감은 표현하지 않았다. 그들은 억압받는 민중(民衆)의 피눈물과 고단함을 함께 호흡하였다. 그들에게 투쟁은 투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이었을 뿐이었다. 민중의 영원한 사랑을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글로 자유롭고 싶은, 글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글로 자신을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 파블로 네루다와 박노해는 이야기한다. 이 시대를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는 작가(作家)들이 진정 사랑해야 할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 회고록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은 파블로 네루다의 사상적 궤적과 흐름을 거의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본격적인 현실참여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현실참여를 할 수 있었던 ‘사상적 무기’가 되었던 것이 실제 무엇이었는지 궁금증을 유발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공산당 당원이었다. 그가 정통 맑스-레닌주의자였는지, 네오(Neo) 맑스-레닌주의자였는지, 스탈린주의자였는지 사상적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구분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억압받는 칠레 민중의 현실을 가슴으로 받아안았던 사람에게 탁상공론과 같은 이론적 배경은 무의미할 테니까.

또한 옮긴이가 지적한 대로 파블로 네루다의 내면적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집필 되었다면 더욱 좋았으리라 생각된다. 전체적인 구성을 이끄는 것은 네루다 자신이었지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서술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IP *.244.220.25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92 카를 융-기억 꿈 사상 에움길~ 2014.09.29 3025
1491 [15] 열정과 결핍 [4] 홍승완 2005.10.23 3029
1490 [18] 에코스파즘-앨빈 토플러 2008.08.10 3029
1489 글쓰기 공작소-이만교 id: 깔리여신 2013.03.04 3029
1488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1] 에움길~ 2014.11.03 3029
1487 반 고흐, 영혼의 편지 // VINCENT VAN GOGH 지음, 신성림 옮김 [2] 다뎀뵤 2006.10.03 3035
1486 #21_난중일기 이순신 서연 2012.09.24 3035
1485 35.<행복한 논어읽기> 양병무 [3] 박미옥 2010.11.22 3036
1484 자기보살핌 - 앨리스D.도마 루미 2012.01.17 3036
1483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 스티븐 C.런딘 사이다줘 2005.10.13 3037
1482 #45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_정수일 정수일 2015.03.01 3037
1481 쉼표 북 하나 – 피로사회 file 재키 제동 2012.04.02 3038
1480 [번역008] 12장 내면의 신념에 따른 삶(Living with Inner Conviction) 香山 신종윤 2008.01.31 3039
» [12]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거암 2008.06.23 3039
1478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2] 김홍영 2009.06.16 3040
1477 [44] 내 인생의 글쓰기 2009.02.23 3042
1476 (켄 윌버) 무경계 - 나는 우주 속에 퍼진 무지개다 file [3] 보따리아 2017.12.04 3043
1475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 폴D.티저 / 바버라 배런-티저 공저 [4] 香仁 이은남 2007.07.16 3044
1474 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書元 2010.02.14 3044
1473 하얀 가면의 제국.. [2] 김미영 2005.07.14 3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