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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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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3일 11시 16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책 제목 :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저자 : 파블로 네루다 (1904 ~ 1973)
옮김 : 박병규
출판사 : 민음사

칠레의 시인이자, 외교관이자, 마르크스 주의자

칠레의 가난한 철도 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난 파블로 네루다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의 ‘소
명’을 받아 들인다. 그에게 온 일생일대의 소명은 바로 ‘시’였다. 그는 10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극심하게 반대를 하고 가난이 그를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쓴다.

아버지의 반대를 가명을 지음으로써, 가난은 동지를 삼음으로써 유유하게 따돌렸던 그는
20세가 되면서 벌써 2 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 된다. - <황혼의 노래 Crepusculario〉
(1923),〈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ón
deseperada〉(1924)

시인을 직업 삼아 시작에 몰두하던 그는 1927년 외교관으로 임명이 되고 랑군 영사를 시작
으로 화려하지만 외로운 외교관 생활에 입문한다. 그는 랑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자바,
싱가포르를 옮겨 다니며 동남아시아권의 문화를 흡수하고 자바에서는 하게나르라는 네덜란
드 출신의 여인과 첫 결혼을 한다. 이 무렵에 그는 〈대지에 살다 Residencia en la tierra〉
를 출간한다.

그 후 1934년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로 발령이 나면서 스페인과 인연을 맺는다. 이 시기에
그는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고, 델리아 델 카릴이라는 여인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가 스페인에서 활동을 하면서 그의 시는 칠레를 넘어서 유럽 문학계에도 많이 알려 지게 된다. 시인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이 시기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짐으로써 중단되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 동안 친구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과 미겔 에르난데스의 투옥 등의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고 정치적으로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된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일컬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다가 칠레 정부에 의해서 멕시코로 보내진다. 이 망명의 세월 동안 그는 완성한 창작기를 보낸다. 이 때 쓴 시의 대부분이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1943년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칠레로 돌아온 그는 1945년 상원의원으로 뽑혔고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열정을 바친다. 그러나 그의 정치 생명은 칠레에 우익정부가 끝나게 된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또 다시 다른 좌익 인사들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숨어 살던 이 시기에 그는 다시 작품을 쓰는데 몰입을 한다. 이 때 그의 유명한 서사시〈모든 이를 위한 노래 Canto general〉가 탄생을 한다.
그는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세 번째로 결혼한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네루다의 시는 인간이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끊임없는 변화를 대변한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서정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인 〈황혼의 노래〉와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를 썼으며 뒤이어 좀더 영적인 작품 〈조물주의 시도〉•〈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을 쓰게 되었다. 외부세계와 이러한 세계가 주는 창조적 자극에서 내적 자아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되면서 독보적이고 신비로운 작품 〈대지에 살다〉가 탄생되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시 형식에서 벗어나 '네루디스모'(nerudismo)라는 매우 개성적인 시적 기법을 창조해냈다. 그가 스페인 내전 기간에 쓴 시들은 더 사실성이 강하고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더 많이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내준다. 이러한 현실지향적이며 고발조의 시에 이어 장엄한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이 웅장한 문체는 곧 사라지고 좀더 단순한 주제를 다룬 사회비평시가 등장하게 된다.
그의 주제와 기교의 다양함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했다. 〈100편의 사랑 노래 Cien sonetos de amor〉에서는 사랑이, 〈Estravagario〉에서는 해학이 다시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이슬라 네그라의 회고록 Memorial de Isla Negra〉은 향수 어린 자서전이다. 네루다는 "나는 장대한 연작시를 계속해서 써나갈 계획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말로써만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 그 마지막 순간은 1973년 9월에 왔다.
참고문헌 : 네이버 지식인 백과사전
한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시인의 시에 대해서는 본인이 아는 바가 없어서 한국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에서 직접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4]우리는 듬성등성 꿈을 꾸기 때문에 힘든 삶을 견뎌 낸다. 그런데 기억해 내는 순간 희미해지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추억이 너무 많다. 마치 산산조각 나 버린 유리 같다.

[16] 저 멀리 나무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비밀을 품은 밀림의 양탄자 위로 우뚝우뚝 치솟는 나무는 저마다 모양을 내고 있다. 길쭉한 것, 곤두선 것, 잔가지가 많은 것, 뾰족한 것 등등. 마치 부지런한 이발사가 쉬지 않고 다듬어 놓은 듯 하다.

[18]다시 말해서 우리 동포인 원주민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려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한 것이다. 그동안 원주민을 무찌르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아낌없이 동원했다. 기관총을 난사하고 마을을 불 지르고 나중에는 조금 온건한 방법을 사용하여 법률과 술을 동원했다. 변호사는 원주민의 땅을 사취하고 판사는 항의하는 원주민을 감방으로 보내고 신부는 지옥 불에 떨어질 거라고 위협했다.

[20]나는 보로아의 자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새, 풍뎅이, 메추리 알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그런 깊은 골짜기에서 엽총 총신처럼 까맣고 반들거리는 곤충을 발견하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곤충의 완벽한 모습 앞에서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뱀 어미’라고 부르는 딱정벌레였다. ‘뱀 어미’란 칠레에서 가장 큰 곤충으로 껍질이 딱딱하고 검은 색 윤기가 흐르는 대형 딱정벌레인데 너무 터무니 없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마키 나무나 야생 사과나무나 코피우에 나무에 붙어 있는 이 곤충과 마주치면 단단하기 때문에 발로 밟아도 끄떡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훌륭한 방패를 지닌 ‘뱀 어미’에게 독은 필요한 무기다.

[20]한 번은 눈부신 딱정벌레를 가져왔다. 독자들 가운데 이 딱정벌레를 본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때 딱 한 번 보았다. 찬란한 무지갯빛 옷을 입고 있었다. 등껍질이 붉은색, 보라색, 초록색, 노란색으로 반짝거렸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손을 벗어나 밀림으로 날아가 버렸다. 몽해 아저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날아간 딱정벌레를 다시 잡아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눈부신 딱정벌레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몽헤 아저씨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아저씨가 죽었다고 했다. 기차에서 떨어져 낭떠러지 아래로 굴렀는데, 급히 기차를 세웠으나 남은 것은 뼈밖에 없었단다.

[21]우리 집은 임시 숙소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탐험 회사 같기도 했다. 집 안에 들어서면 술통, 연장, 마구 등 잡다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항상 공사 중인 방도 있었고 공사를 반쯤 하다 중단한 계단도 있었다. 이러다간 한평생 공사만 하다가 말겠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의 대학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2]아버지는 재혼하셨다. 신부 이름은 트리니다드 칸디아 마르베르데. 내 계모이다. 유년기 내 수호천사였는데 이제 와서 마뜩찮다. 아무튼 새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온화한 분이었다. 시골 사람 특유의 유머 감각도 있었고 또 언제 봐도 상냥했다. 아버지가 귀가하면 당시 그 지역 여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조용한 그림자로 변했다.

[25]이런 기억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여러 가지 일이 뒤섞여 혼동을 일으킨다. 내 첫 연애 사건도 이상하게 자연과 뒤섞여 있다.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27]가난한 집 식구들이 한 달 동안 휴가를 떠나려니 살림살이를 전부 챙겨 가야 했다. 심지어 습한 기후 탓에 잘 마르지 않는 빨래를 화로 위에 널어놓는 버드나무 건조대까지도 딱지를 붙이고 화물칸에 쑤셔 넣었다.

[29]우리가 묵을 집에서, 아니 그 전부터, 그러니까 낡은 부두에 정박한 작은 증기선에서 내렸을 때부터 묵직한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바다였다. 파도가 몸 안으로 밀려왔다.

[30]난생처음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바다는 커다란 일케 언덕과 마울레 언덕 사이에서 한참 격노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파도가 수미터 상공으로 치솟았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심장이 고동치고 우주가 박동하는 듯 울부짖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바닷가에 식탁을 차렸다. 입안에 모래가 씹혔으나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우리에게 수영을 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던 것이다.

[37]그 사람은 내 독서열에 깜짝 놀랐다.”그걸 벌서 다 읽었니?”하고 되물으며 바르가스 빌라 [콜럼비아의 베스트 셀러 작가]와 입센의 작품,그리고 로캉볼 연재 소설을 건네주었다. 나는 타조처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집어 삼켰다.

[44]가장 단순하지만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 있다. 죽음의 망각. 어쩌면 밀림이 세 자매의 생명과 그날 밤 나를 반겨 준 그 집을 삼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마치 꿈이라는 투명한 호수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듯 하다. 고독하고 거친 삶 속에서 아무런 실용적인 목적도 없이 옛날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던 우수에 찬 세 자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여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접근하기도 힘든 산중에서 조상이 일군 우아한 문화를 소중하게 지키고 있었다.

[46]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크고 거칠었지만 분명 여자의 손이었다. 그 여자는 내 이마와 눈과 얼굴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탐욕스런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여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나를 짓눌렀다.
두려움은 점차 강렬한 쾌감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땋은 머리와 매끈한 이마와 양귀비꽃처험 부드러운 눈까풀을 쓰다듬었다. 이어 풍만하고 탄탄한 젖가슴, 둥근 엉덩이, 나를 휘감은 허벅지를 더듬어 보고, 산속 이끼처럼 촉촉한 사타구니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그 여자 입에서는 신음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49]내가 ‘겉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머릿속이 온통 책과 꿈 그리고 벌 떼처럼 윙윙거리는 시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50]당시 자취생들은 태반이 굶었다. 나는 전보다 훨씬 많은 시를 썼지만 먹는 것은 전에 비해 형편없었다. 그 시정 사귄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은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길 못해 쓰러지고 말았다. 그 중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데 좀 촌스럽게 생긴 동갑내기 시인이다. 그의 섬세한 서정시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시 낭송회에 몰려든 청중의 가슴을 흠뻑 적셨다. 이 시임의 이름은 로메오 무르가이다.

[52]이번 모험에서는 지금보다 더한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취 집 주인 여자는 몇 다리를 건너면 고향과 연줄이 닿았기 때문에 동정심에서 가끔식 감자나 양파를 갖다 주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삶, 사랑, 명성, 자유가 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54]그 무렵 우연히 어떤 과부와 친하게 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여인은 얼마 전에 죽은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커다란 푸른 눈에 애잔한 이슬이 맺혔다. 남편은 젊은 소설가 였는데 체격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환상적인 부부였다. 여자는 밀밭 같은 금발머리, 흠잡을 데 없는 몸매, 짙푸른 눈동자를 자랑하는 미인이었고, 남자는 건장하고 키도 훤칠한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분마성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중에야 금발의 아내 또한 분마처럼 날뛰는 비너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니실린이 없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건장한 남편이 두어 달 만에 쓰러진 데는 몸이 뜨거운 부인도 일조를 했으리라고 짐작했다.

[64]몇 년 뒤 칠레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겨울, 로하스 히메네스는 죽었다. 평상시처럼 양복 상의는 산티아고 시내 어느 술집에 벗어 두고 그 추운 겨울에 셔츠 바람으로 킨타 노르말에 있는 여동생 로시타 집까지 걸어갔다. 이틀 뒤, 기관지 폐렴으로 그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만나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는데 종이학과 함께 비를 맞으며 하늘로 날아갔다.
[77]이 첫 시집이 바로 1923년에 출판된 ‘황혼일기’이다. 시집 발행 비용을 마련하느라 매일같이 단맛 쓴맛을 경험했다. 얼마 되지 않은 가구를 팔고 아버지가 엄숙한 표정으로 건네주신 시계, 손수 두 개의 작은 깃발을 엇갈리게 새겨 넣은 시계도 전당포에 맡겨야만 했다. 나중에는 검정색 시인 복장까지 전당포로 갔다. 인쇄소 사장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드디어 인쇄가 완료되고 표지 비용까지 지불했는데도 악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안 돼. 대금을 전부 결재하기 전에는 한 부도 가져갈 수 없어.” 결국 비평가 알로네가 보태 준 돈까지 집어삼킨 다음에야 나는 책을 짊어지고 인쇄소를 나올 수가 있었다.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뛸듯이 기뻤다.

[79]나는 별을 보고 도취했다. 우주적, 천상적, 도취였다. 그 즉시 책상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 마치 누군가 불러 주는 말을 받아 적는 것 같았다.

[87]한참 앞뒤 없이 살던 그 시절, 우리는 항상 갑자기, 항상 새벽에, 항상 밤을 꼬박 새웠을 때, 항상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을 때, 삼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스무 살 남짓한 시인이자 화가인 우리들은 어떻게든 발산시키고 폭발시켜야 할 객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94]나는 발파라이소 괴짜들이 삶에서 힘겨운 항구 생활과 아울러 어떤 통일성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저 위 산동네에서는 빈곤이 만발했다. 역청도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덩달아 기쁨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동네였다. 해안을 뒤덮고 있는 기중기, 선창, 부두 노동은 덧없이 지나간 행복한 시절에 그려 놓은 마스카라 같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산동네오 올라오지도 않고 저 아래로 내려가 힘들 일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만의 무한한 세계, 자신만의 바다 한 조작을 상자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망각이 안개처럼 밀려오고 있는데도 자신들이 고유한 무기로 이 세계를 수호하고 있었다.

[111]열차는 마치 이국적인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처럼 농촌 아낙네와 선원 등 각양각생의 사람들을 싣고 달렸다.


[112]칠레라는 지구 변방 출신으로 돈은 없고 쓸데없는 호기심만 많은 삼등칸 여행객인 우리는 상하이의 밤거리로 빨려 들어갔다.

[118]어디를 가든 내 꿈은 식물처럼 사는 것이다. 한곳에 눌러 앉아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기에……

[123]인도 전역에서 만난 이 젊은 시인들의 근심 어린 눈동자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방금 감옥에서 나왔는데 어쩌면 다른 날 다시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엇다. 이유는 비참한 현실과 억압적인 신을 뒤엎으려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실상이다. 이 시대는 보편성을 지닌 시의 황금기다. 새로운 노래가 총부리에 쫓길 때, 봄베이 변두리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밤마다 도로 옆에서 잠을 잔다. 그렇게 자고 태어나고 죽는다.

[127]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129]이 피로 물든 땅에 누운 와불은 누구에게 저렇게 미소를 짓는 것일까?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은 도망치는 시골 여자들, 전호에 휩싸인 남자들, 복면을 두른 게릴라들, 가짜 승려들, 탐욕스러운 관광객들이었다. 지금도 거대한 불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밀림에 사는 검은 새의 울음소리와 붉은 새의 날갯짓 아래에서 물결치는 가사 주름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시선으로, 완전히 비인간적인 어떤 형태로든 인간적이고, 신이면서도 신이 아니고, 돌이면서 돌이 아닌 모순된 형상으로 그 자리에 남아있다.

[131]실제로 동양에 가 보면 흔히 말하는 동양의 신비주의한 서구인이 직면한 불안, 노이로제, 혼란, 기회주의의 부산물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것이다. 그 무렵 인도 사람들은 단전호흡이나 하며 명상에 잠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명상 센터는 미국인과 라틴 아메리카인을 포함하여 대부분 서구 출신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싸구려 형이상학으로 포장한 이국적이 부적과 주물을 도매금으로 팔아 넘김으로써 값싼 시장을 착취했다. 이런 사람들은 입만 열면 다르마와 요가를 들먹였으며,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종교 수련에 열을 올렸다.

[137]어떻게든 이 메스꺼움을 이겨 내야만 했다. 아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아편을 경험하고 그 맛을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수없이 아편을 피워 댔고, 마침내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아편은 몽환도 환영도 발작도 일으키지 않았다. 은근하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끝없이 부드러운 음이 허공에 지속되는 듯했다. 몸 속에 텅 비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137]아편은 뜬소문처럼 이국 취향에 함몰된 사람들이 향유하는 천국이 아니었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아편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138]그 이후 다시는 아편굴을 찾지 않았다. 이제 아편이 뭔지 알았으니까. 나는 연기 속에서 아른거리는 그 무엇을, 손에 쥘 수 없는 그 무엇을 만져 보았다.
[142]이런 고독은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고독이 아니라 감옥의 벽처럼 단단한 고독이었다. 아무리 벽에 머리를 박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아무리 울어도 달려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143]그 사람들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영국인 식민 지배자들과 방대한 아시아 세계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결코 예전의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분리는 비인간적인 고립을 의미하며 아시아인들의 삶과 가치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를 의미한다.

[152]콜롬보에서 보낸 쓸쓸한 생활은 힘겨웠을 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까지 혼미하게 만들었다. 내가 살던 거리에는 친구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다양한 피부색의 여자들이 내 야전 침대에 들렀으나 육체적 번갯불 이외는 아무런 사연도 남기지 않았다. 내 몸은 열대 해변에서 밤낮으로 타오르는 외로운 모닥불이었다. 친구 팻시가 여자들을 데리고 종종 찾아왔다. 보어인, 영국인, 드라지다 족의 거무튀티한 여자와 황금빛 여자들이었다.

[244]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못 하게 막았다. 당신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게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발표할 때 아버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필명을 사용했다. 어떤 잡지에서 네루다라는 체코인의 이름을 보고 필명으로 사용한 것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체코인에게 존경 받는 위대한 작가로서 아름다운 발라드와 로망스를 창작하였으며, 프라하의 말라스트라나에 기념 동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 뒤 체코 슬로바키아에 갔을 때, 구렛나룻을 기른 네루다 동상 앞에 꽃 한 송이를 바쳤다.

[262]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290]내 인생도 긴 순례였다. 항상 돌고 돌아 칠레 남부의 숲으로 무성한 밀림으로 되돌아왔다.

[296]주지하듯이, 생명은 계율보다 강인하다. 혁명은 생명이나, 계율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이다.

[349]지난 5년 동안 중국의 섬유 산업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여성들은 온갖 색상의 꽃무늬, 줄무늬, 물방울 무늬와 갖가기 비단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남자들도 다양한 색상이의 질 좋은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이제 길거리는 중국인의 세련된 취향 덕분에 화려한 무지개로 변했다. 원래 중국인은 무엇이나 아름답게 만든다. 단순한 짚신 하나만 보더라도 마치 짚으로 만든 꽃송이 같다.

[362]맥을 보았을 때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예레반 동물원을 포함하여 극소수의 동물원만이 맥을 사육하고 있었다. 맥은 몸집은 황소 같고 코는 길고 눈은 조그마한 아마존 원산의 기이한 동물로, 솔직하게 말해서 나와 무척이나 닮았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므로 숨길 이유도 없다.

[383] 그러고 나서 건달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훌쩍거렸다.
“저는 건달에 불과하지만 아까 나하고 싸운 사람을 코카인 밀수업자입니다. 우리들은 쓰레기만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내게도 순수한 면은 있습니다. 그건 내 애인, 애인에 대한 사람입니다. 자, 보세요. 애인 사진입니다. 당신이 이 사진을 만져 봤다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너무 좋아할 거예요.”
건달은 웃고 있는 여자 사진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나는 좋아하게 된 건 다 당신 때문입니다. 우리 당신 시를 함께 외웠거든요.”
그리고 곧바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처럼 생긴 슬픈 소년이 그대 안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를 바라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내 친구들이 단단히 무장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문 안을 들어오던 친구들은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천천히 방을 나왔다. 건달은 좀 전의 그 자세로 여전히 시를 외우고 있었다. “그 아이의 핏속에서 불타오를 생명으로 우리 삶을 묶어야만 할 것이다.” 건달은 시에 패배한 것이다.


[386]시는 이미 독자와 간계가 끊어졌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 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문득 찾아든 시는 우리 시인들이 그동안 읽고 배우느라 투여한 갖은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임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387]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8]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 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도움을 준 시인이 바로 맨해튼에 살던 월트 휘트먼이었다.

[391]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392]나는 앞으로도 내 수준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3]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양식있는 사람은 후일 내 시에 공감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심성이 비뚤어진 사람은 점점 나를 두려워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시를 존중하게 되었다. 시뿐만 아니라 시인도 존경하게 되었다. 모든 시와 모든 시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395]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개성을 믿는다. 예술 창조에서 어떤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든, 또 예술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개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창성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관념은 근대의 발명품이자 속임수의 산물이다.

[406]나는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 또한 사람들이 고통을 딛고 일어나, 피와 부서진 유리를 딛고 일어나 서로를 이해하리라고 확신한다.

[410]그는 지혜가 거주할 자리와 함께 슬픔이 거주할 자리도 항시 마련해 두고 있었다.

[411]엘뤼아르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란 동방자가 필요해. 자질구레한 인생사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 말이야.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 숨통을 조르는 것 같아.”

[420]나는 겨드랑이 밑에 이론을 끼고 다니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머리 위에 쏟아 부어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이 월요일은 무엇이나 밝게 보이고, 화요일은 무엇이나 어둡게 보이는 사람이다. 올해는 명암이 엇갈리는 해다. 내년부터는 푸른색이 될 것이다.

[441]세월이 흘러간다. 사람은 소진되거나 꽃을 피우고, 고통을 당하거나 환호성을 올린다. 세월은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하고 새 생명을 보내 주기도 한다. 이병이 좀 더 잦아지고 친구들이 수감되었다가 출감하기도 하고 유럽을 다녀오기도 하며 그냥 죽기도 한다.

[458]날이 저물 때라 웅장한 황혼이 나를 반겼다. 끊임없이 부는 바람이 구름을 헤집어 놓고 있었고,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하늘이 대지와 하늘 사이에 걸린 커다란 구름 덩어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목초지는 거센 남극 바람과 맞서 싸우고 있었고, 저만큼 세로 카스티요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날카로운 봉우리는 고딕식 첨탑 같고, 자연이 만든 화강암 성가퀴 같았다. 아이센 지방이 산맥은 제멋대로였다. 공처럼 둥그스름하거나 탁자처럼 평평하게 솟구친 모습은 마치 눈으로 만든 삼각형과 사각형을 늘어놓는 듯했다.
하늘은 고운 비단과 금속을 석양을 만들고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노란색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순순한 공간에 떠 있는 거대한 새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해, 고래 입이 되었다가 사나운 표범이 되었다가 끝내는 추상화가 되었다.

[474]나는 우리 당, 칠레 공산당에서 소박한 사람들을 만났다. 개인적이 허영심이라든가 폭압적인 권력이라든가 물질적이 욕망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나는 이처럼 공공의 선, 즉, 정의를 위해 투장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어 행복했다.
우리 당과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다. 칠레 공산당은 빈약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칠레 민중을 위해 큰 승리를 일궈 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나도 동지들만큼 순박하고, 동지들만큼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기를 소원한다. 겸손에서 배울 점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회의주의에 안주하여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만심에서는 배운 게 아무 것도 없다.

[478]체는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전쟁, 전쟁……우리는 항상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데, 전쟁을 한 번 치르고 나면 전쟁 없이는 못살아. 날마다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이지.”
혼잣말인데 나 들으라고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 말에 경악했다. 전쟁은 위협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날 헤어진 이후로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 뒤, 체는 볼리비아 산악 지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체를 생각한다. 영웅적인 전투를 벌이면서도 무기 곁에 시집 놓을 자리를 마련해 둔 명상의 사나이가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495]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던가 기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학 작품의 탄생 경위 파악이나 사후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월트 휘트먼은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부가적인 요소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으나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

[501]그 침실은 기사가 말과 함께 묵으면 안성맞춤이었다. 말이 여물을 먹고 지사가잠을 자고도 남을 만큼 공간이 넓었다. 천장은 매우 높았고, 은은하게 치장해 놓았다. 가구는 털이 보송보송한 천으로 덧씌워 놓아 엷은 낙엽 색깔을 띠고 있었으며, 촌스러운 술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부의 흔적과 타락의 흔적이 동시에 묻어나는 양식이었다. 양탄자는 60년 전에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화려한 색깔은 발길에 짓뭉개지고, 의례적이고 활기 없는 대화가 스며든 탓인지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506]조국 당에서 멀리 떨어져 살 때는 칠레의 겨울을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눈앞에 안 보이기 때문에 겨울철의 고단한 삶, 방치된 시골 마음, 맨발로 추위를 견디는 어린애들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초록색 시골 풍경, 노란색과 빨간색 꽃, 국가에 등장하는 푸른 하늘만 기억했다. 이번에는 먼 이국 땅에서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계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534]네루다에게 시는 삶의 전부였다.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노래했고, 암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시를 구술했다. 죽기 바로 전날 네루가를 찾아간 변호사 피게로아의 증언에 따르면, 네루나는 책 한 권 들 힘조차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비서 오메로 아르세가 병실 한 구석에서 정서해 준 초고의 교정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535]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네루다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536]그리고 엘뤼아르와 마찬가지로 네루다에게도 공산주의는 권력이 아니었다. “시와 삶을 통해 인간의 가치와 인본 주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537]그렇지만 우리가 회고록을 읽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공식적인 견해 보다는 저자의 숨결과 맥박이 스며든 견해를 알고 싶고, 또 그런 견해와 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온몸으로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려고 했던 한 인간의 진정성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통로이다.


Ⅲ. 내가 저자라면

삶을 경험하다.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 혹은 태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그의 삶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던 것은 삶이 장미빛 환상만이 아니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의 삶에도 여느 삶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괴로움과 외로움이 함께 했다. 그러나, 그는 여느 사람들이 삶을 살아내는 삶의 방식과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낸다. 그에게는 삶이 극복 해야 할 대상이나 의무가 아니었다. 그에게 삶은 경험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외로움을 그대로 끌어안는다. 고통을 고통 그대로, 괴로움을 괴로움 그대로, 외로움을 외로움 그대로 끌어 안는다. 때로는 그 안에서 실수를 혹은 실패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실수나 실패마저도 아낌없이 끌어 안는다. 그리하여 삶과 하나가 된다.

이 글을 쓰는 내 자신은 삶을 끌어안고 살지 못할 때가 많다. 온전히 그 자리에 그 고통과 괴로움, 외로움과 함께 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그래서, 삶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산 그가 부러웠다.

그처럼 삶을 ‘경험해야 할 그 무엇’으로 대한다면 삶에 후회나 미련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

사람을 판단하는데 매우 주관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많은 비판을 들어야 했던 완벽하지
못했던 네루다. 그러나 그의 일생 내내 그가 잃지 않았던 한 가지 삶의 방식은 사랑하고 또
사랑한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시를 사랑했고 또 사랑하여 죽을 때까지 그 사랑을 멈추
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민중을 사랑했고 또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또한 그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 자신의 모든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 이 책을 통해서 나는 그
에게서 한 가지 삶의 방식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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