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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9일 21시 24분 등록
오쇼라즈니쉬 자서전-김현국 옮김, 태일출판사, 2003

● 저자에 대하여- 오쇼

오쇼 라즈니쉬는 1931년 12월 11일 인도에서 직물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디아 쁘라데쉬(MadhyaPradesh)주의 쿠츠와다 태생인 오쇼의 집안은 자이나 교도였다. 아버지는 부유한 상공인이었고 집안은 대대로 상공업에 종사했다.
오쇼의 특징은 어린 시절부터 독립적인 성격을 지나치게 보였다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삶의 과정 속에서 주어지는 지식과 믿음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오쇼는 항상 거부감을 보였다. 일상적인 사회의 눈에는 반역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오쇼는 대신 자신이 스스로 진리를 체험하고자 노력하고 갈망했다. 열네 살 때 오쇼는 처음으로 사토리를 경험한다. 시간이 갈수록 명상 실험은 깊어져 갔고 영적 탐구의 강렬함은 몸을 해칠 정도였다.

1952년 3월 21일, 스물 한 살의 오쇼는 인간 의식의 최고 정점인 깨달음을 얻는다(그 깨달음이 무엇인지,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독자의 입장에서는 잘 모르겠다). 오쇼는 깨달음을 얻은 뒤 자신의 외적 전기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후 그의 삶의 내적 규율을 갖고 일체성이라는 무아의 경지에서 산다. 외면적으로는 사가르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학문을 계속하여 1956년 졸업할 때에는 철학 부문의 최고상을 받는다. 인도 토론대회의 우승자로 졸업반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한다.

스물여섯 살에 오쇼는 라푸시의 산스크리트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1년 후 그는 자발푸르 대학교의 철학 교수가 되어 9년 동안 교수로 일한다. 1966년 그는 현대인에게 명상기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린다. 오쇼는 이후 인도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고 자신의 신념을 역설하고 전통적인 종교의 가치에 의문부호를 던진다. 오쇼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성 종교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기존 종교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생명과 영성이 고갈된 전통적 신앙체계에 대한 것이었다. 오쇼가 수많은 사람을 만난 것은 그의 삶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심리와 신앙체계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오쇼는 자신의 깨달음이라는 바탕위에 광대한 분야의 독서를 접목시켜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탐색했다. 또한 동시에 현대인들의 신념체계와 철학적 사유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오쇼는 1960년대 후반에 현대인들의 정신적 건강과 진리에의 접근을 모색한 특유의 '다이나믹 명상법을 개발 보급한다. 오쇼는 현대인들이 자신을 옥죄는 전통과 현대적 생활의 온갖 욕망에 의해 짓눌려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현대인들이 정화과정을 통해 무념무심의 이완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다. 오쇼가 강론한 것은 노자, 장자, 열자, 탄트라, 우파니샤드, 요가, 예수, 헤라클리투스, 수피즘, 석가, 까비르, 신비주의 등 동서양의 철학과 신학을 망라한 다양한 내용들이다.
그의 방대한 가르침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현대인들을 위한 창조성의 원천으로서 그의 가르침은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오쇼는 이러한 내용의 강론을 바탕으로 600여권의 책을 남겼다. 오쇼는 철학도에서 철학교수로, 요가와 탄트리카로, 그리고 붓다의 침묵에 든 자로 가르침을 끝냈다.
오쇼는 1990년 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과 이론을 토대로 말한다면 자신의 몸을 떠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인도의 푸나에 있는 그의 대규모 공동체는 영적 성장을 위한 메카가 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명상, 치료, 창조적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기 위해 해마다 전세계에서 수천 명이 방문하고 있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나에게 있어서 영성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19]

학교도 찻길도 기찻길도 우체국도 없었다.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 작은 마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다. 그 마을에서 벗어나 있던 시기에도 나는 교육되지 않은 채 그 세계에 남아 있었다. [22]

누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은 용서 받을수 없는 일이다. 어린이들은 무엇이든 믿으려 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착취당해왔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아주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은 그대의 말을 믿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아버지나 어머니라면 그 아이들은 그대를 정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어린이들에게 행한 거짓말의 깊고 더러운 진흙탕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주 단순한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면, 즉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의 무지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종교적이 될 것이고 아이들을 올바른 종교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다. [43]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기를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만약 최대한도마저 넘어갈 수 있다면 더 환상적이다. 가라. 기다리지 마라.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54]

언제나 자신에게 진실한 나니는 말했다. “바꾸기에 너무 늦는 법은 없어요. 당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꾸세요. 사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더 빨리 바꿔야 해요. 늙었으니까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은 바꾸지 않을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충분히 늙었어요.” [56]

비록 예수가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람은 빵없이도 역시 살 수 없다. 사람은 빵을 필요로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여러 가지는 나중 문제일 뿐이다. 첫 번째는 빵이다. 사람은 틀림없이 빵만으로도 살 수 있다. 그다지 살마답게 산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예수도 빵 없이는 살 수 없다. [103]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전 존재계가 지복에 차 있는 것은 바위가 바위이고, 나무가 나무이고, 강이 강이고, 대양이 대양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돌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다. [104]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115]

“왜 내가 두려워해야 하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즐겁게 나의 삶을 살았어. 만약 어떤 신이 있어서 언제가 내가 그를 만나다면 그는 나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오히려 내가 그에게 화를 낼 것이야. ‘왜 당신은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소?’라고, 나는 두렵지 않다” [123]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외부에 그 대상이 있었고 이제는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자세, 접근태도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대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는 똑같은 사람이다. [159]

수많은 생을 거치며 나는 노력해왔다. 나 자신을 시험하고 몸부림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지 이해한다. 바로 그 노력이 가로마고 있었다. 바로 그 얻으려는 노력이 장애물이었다. 구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구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함을 놓아 버려야하는 때가 온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가 필요하다. 그러나 배에서 나와 배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배를 남겨두고 떠나야하는 순간이 온다. 노력은 필요하다. 노력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만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64]

노력이 멈춘 그날, 나 또한 멈췄다. 노력 없이는 그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애씀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에고나 자아라는 현상은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는 물질이 아니다. 그대는 매순간 그것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것과 같다. 페달을 밟으면 자전거는 계속 달리지만 페달을 밟지 않으면 멈춘다. 달리던 관성으로 조금 더 달릴수도 있지만 페달 밟기가 멈추는 순간, 사실 자전거는 멈추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에너지가 없다. 더 이상 달리수 있는 힘이 없다. 자전거는 넘어져버릴 것이다. [165]

깨달음의 길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새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다. 모든 새는 스스로 자기 발자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계속 날아감에 따라 그 발자국들은 즉시 사라진다. 상황은 이와 비슷하다. 그것이 바로 선도자와 추종자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다. [186]

종교는 행동을 강조해왔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다. 그리고 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침묵은 의식을 위한 올바른 토양이다. 그대의 머리가 소란스러울 때 그대는 그다지 깨어 있거나 의식적이 될 수 없다. 그대가 의식적이고 깨어 있을때 그대는 소란스러울 수 없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 [285]

나는 거의 모든 종류, 모든 범주의 선생들을 만나봤지만 전 세계 종교의 소위 스승, 선생이라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중독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제자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의 권력놀음이다. [288]

그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독립은 독립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독립이다. 모든 다른 독립들…… 정치적, 경제적 독립들은 그저 그런 것들이다. 피상적인 것들이다. 진정한 독립은 그대가 그대의 내적인 성장을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306]

“이제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나는 벌거벗고 나무 밑에 있을수도 있고 황제처럼 궁전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보물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나무가 있든 궁정이 있든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312]

인류 역사상 자기 존재의 중심에 도달한 사람이 실망하거나, 무의미함과 비참함을 느끼거나, 자살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명상을 과학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과학은 그런 것이다. 어떤 예외도 없이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은 법칙이 된다. 명상은 과학적 방법이다. 왜냐하면 명상이 그대를 궁극의 지복으로 이끌어가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전 역사를 통틀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347]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이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352]

진리는 주어질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그대안에 있다. 그것은 불러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일깨워질 수 있다. 그대 안에서 그것이 일어나는, 더 이상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있게 되는 그러한 상황, 그러한 공간이 창조될 수 있다. [358]

스승의 역할은 그대를 부르는 것이다. “나자로야, 동굴에서 나오너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에서 나오너라.”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는 그대 안의 무언가를 휘저을 수 있다. 그는 불꽃에 불을 붙이느 그대 안의 어떤 과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 그대가 진리이다. 단지 너무나 많은 먼지가 그대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스승의 역할은 소극적인 것이다. 스승은 그대에게 목욕을, 샤워를 시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먼지가 사라지게 해야 한다. [361]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다. [365]

현자는 그대가 통찰력을 가짐으로써 그대 자신의 등불을 가지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그대는 통찰력을 원치 않는다. 그대는 명확한 지침을 원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보기를 원치 않는다. 그대는 인도받기를 원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대는 스승의 어깨위에, 현자의 어깨 위에 그 모든 책임감을 던져버리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서 그대는 편안해한다. 이제 그에게 책임이 있다. 만약 뭔가가 잘못된다면 그의 책임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잘못된다. 왜냐하면 그대가 책임을 맡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제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대를 올바르게 인도할 사람이 없다. [368]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해 그대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준다. [371]

기독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이런 것들은 단지 이데올로기이며 교의이다. 그것은 단지 예식이다.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붓다는 그것을 살았다. 예수는 그것을 살았다. 그러나 기억하라. 예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며,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결코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종교적이었다. 그들은 독단적이지 않았다. 세상에는 300개의 종교가 있다. 이것은 정말로 어이없는 일이다. 만약 진리가 하나라면 어떻게 300개의 종교가 있을 수 있는가. 과학은 하나뿐인데 종교는 300개? [383]

마음은 단지 하나의 기계장치일 뿐이다. 말을 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유일한 문제는 마음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하인으로서 마음은 훌륭하다. 주인으로서 마음은 위험하다. 그대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407]

우리가 명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 말은 그대가 무언가에 대해서 명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대는 명상할 어던 대상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이다. 동양에는 드야나라는 다른 단어가 있다. 드야나란 무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집중을 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오히려 그것은 마음의 모든 내용물을 버리고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드야나가 의미하는 명상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도 없고 만족도 없는 의식의 상태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버린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대는 계속해서 좋건 나쁘건 모든 생각들을 거부한다.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그대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이다. [408]

매일 하루 60분만 세상에 대해 잊어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그대도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라. 방향을 180도 돌려 단지 안을 보아라. 처음에는 구름들만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그 구름들은 그대의 억압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대는 분노와 미움, 탐욕, 온갖 종류의 블랙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억압했다. 때문에 그것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소의 종교들은 그런 것들을 억압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것들은 상처처럼 거기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숨겨왔다. [412]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425]

“저는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났었습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화가 났었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간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로 오늘 아침에 제게 필요했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작은 강둑에 앉아서 저는 마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가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면 더 많은 소음이 일어나고 더 많은 무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물가에 앉아 있는 동안 저는 그 기술을 배웠습니다. 이제 저는 시냇가에 앉아 있듯이 저의 마음 옆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앉아서 그 모든 더러움과 골칫덩이, 오래된 나뭇잎들, 상처와 고통, 기억, 욕망들을 함께 볼 것입니다. 무심하게 강둑에 앉아 있는 동안 저는 그 기술을 배웠습니다.” [432]

사람들은 절반의 가슴으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미온적인 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강렬하게 살지 않는다. 건강한 향기를 지니고 살지 않는다. 그들은 병든 마음을 가지고 산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다.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의욕은 전혀 없다. [457]

이것은 궁극의 양극성이다. 명상은 홀로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은 함께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양쪽 모두를 알며 가능한 한 쉽게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같다. 거기 어려움은 없다. 사실 그것은 반대이다. 그대가 숨을 들이쉴 때의 작용과 내쉴 때의 작용은 정반대이다. 그러나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하나의 완전한 호흡을 이룬다. [475]

모든 아이들은 처음에 전체적이고, 완전하고, 살아있고, 어떤 분열도 없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즉시 사회가 나선다.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무엇이 되지 말아야 할지를 알려주며, 그 아이를 억누르고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조각조각으로 자르기 시작한다. 아이의 전체성은 곧 사라진다. 아이는 전체로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된다. 아이는 여러 자연스러운 것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바로 그 부정속에 그는 창조성을 잃게 된다. 이제 아이는 단지 하나의 조각이 된다. 그리고 조각은 춤을 출 수 없다. 조각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 그리고 조각은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자멸적이다. [482]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이고 살아 있다. 그리고 만약 진리가 얼려져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현재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배우가 연극을 마친 뒤에 화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어 놓듯이 그대는 그대의 거짓 가면들을 한쪽에 벗어 두어야 한다. 그대 안의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나오게 하라. 그리고 그 안에 살아라.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내적으로 그대 안에 수많은 것들이 부산을 떨게 하지 말라.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이 캠프에 그대 혼자만 있는 것처럼 지내라. 그대는 다른 누구와도 관계할 필요가 없다. [495]


● 책에 대하여

당혹스럽다. 책의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자니 그동안 몸을 지배해 온 사회의 틀이 반기를 들고, 책의 내용을 외면하자니 정신세계를 갈파한 현인의 이론을 놓치는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게 이런 것 아닐까 싶다.
책을 펼치면 첫 페이지에서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저자를 만난다. ‘감히’ 그는 그렇게 말한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그러한 논조는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된다. 새로운 시작이라니? 자신으로부터 무언가가 새롭게 시작된다는 말 아닌가. 지금까지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아닌가. 맞다. 오쇼는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고, 그렇게 죽었다.
유년시절부터 오쇼의 생각은 남달랐다. 남달랐다는 표현은 사실 적절하지 않다. 남달랐다고 하기보다는 엉뚱하고 이상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제도권 교육을 정상적으로 받고, 사회에서 가르치는 역할론을 충실히 배우고, 거기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 온 사람이라면 오쇼는 참 불편한 존재다. 불편함을 넘어 불쾌할 수도 있다.
학교가 없었기에 교육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것은 큰 축복이었다는 것 정도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대하는 언사, 기존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규범을 무시하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책을 읽어가던 눈길이 멈칫 한다. 규범에 대하여 거부감 없이 스스로를 맞추고 따르면서 살아 온 사람이라면 대부분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들이다. 그것이 오쇼가 말하는 현대인을 얽매는 속박에 익숙해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은 부분들이다.
오쇼의 삶을 일관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들은 불편하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지나친 자아, 보편성의 무시, 거침없는 언행이 이어진다. 오쇼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이해하는 것은 고사하고 알지 못하고 맞닥뜨리면 반감이 먼저 일어날 만도 하다. 평범한 사람을 한참 뛰어넘는 의식의 추구가 아니라면 오쇼는 영락없이 사기꾼이나 사이비 교주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깨달음, 명상기법을 글로나마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마당에 그것이 어떠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가 개발한 명상 치료와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매년 수천 명이나 전세계에서 인도를 찾고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가 쓴 자서전 한권으로 그의 삶과 이론을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서 더 그럴 수도 있다. 길은 내 안에 있다는 지적은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부유해져야 내면의 가난함을 알게 되고 명상을 하게 되며 영적인 문제를 추구하게 된다는 등의 논리는 크게 동감이 가지 않는다. 심오한 영적 문제를 평생 추구한 오쇼를 자서전 한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불러일으키지만 그 이상은 없다.
책은 거기에서 그친다. 오쇼의 삶과 이론을 통괄적으로 보여주는 책은 오쇼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정신세계와 명상에 대하여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에서 그친다. 물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오쇼의 다른 책을 찾아들거나 인도에 있다는 그가 세운 공동체를 방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유발시킬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가 결정할 것이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발걸음이 나가지는 않는다는 게 책을 덮고 난 다음에 떠오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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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01 18:38:59 *.36.210.11
인용문 속 갖고 싶은 인용문 ^-^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19]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의 무지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종교적이 될 것이고 아이들을 올바른 종교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다. [43]

: 정말 내가 알아야 할 구절이다.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기를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만약 최대한도마저 넘어갈 수 있다면 더 환상적이다. 가라. 기다리지 마라.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54]

언제나 자신에게 진실한 나니는 말했다. “바꾸기에 너무 늦는 법은 없어요. 당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꾸세요. 사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더 빨리 바꿔야 해요. 늙었으니까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은 바꾸지 않을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충분히 늙었어요.” [56]

: 엄마야, 이렇게 무서운 말은 없다.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말보다 더 무섭다.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전 존재계가 지복에 차 있는 것은 바위가 바위이고, 나무가 나무이고, 강이 강이고, 대양이 대양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돌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다. [104]

“왜 내가 두려워해야 하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즐겁게 나의 삶을 살았어. 만약 어떤 신이 있어서 언제가 내가 그를 만난다면 그는 나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오히려 내가 그에게 화를 낼 것이야. ‘왜 당신은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소?’라고, 나는 두렵지 않다” [123]

: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두려움에 더하여 공포를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철학의 결핍, 무지의 소치, 그리고 나를 올가매는 아집과 허욕의 집착 때문이리라.

깨달음의 길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새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다. 모든 새는 스스로 자기 발자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계속 날아감에 따라 그 발자국들은 즉시 사라진다. 상황은 이와 비슷하다. 그것이 바로 선도자와 추종자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다. [186]

스승의 역할은 그대를 부르는 것이다. “나자로야, 동굴에서 나오너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에서 나오너라.”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는 그대 안의 무언가를 휘저을 수 있다. 그는 불꽃에 불을 붙이느 그대 안의 어떤 과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 그대가 진리이다. 단지 너무나 많은 먼지가 그대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스승의 역할은 소극적인 것이다. 스승은 그대에게 목욕을, 샤워를 시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먼지가 사라지게 해야 한다. [361]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다. [365]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그대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이다. [408]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425]

모든 아이들은 처음에 전체적이고, 완전하고, 살아있고, 어떤 분열도 없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즉시 사회가 나선다.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무엇이 되지 말아야 할지를 알려주며, 그 아이를 억누르고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조각조각으로 자르기 시작한다. 아이의 전체성은 곧 사라진다. 아이는 전체로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된다. 아이는 여러 자연스러운 것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바로 그 부정속에 그는 창조성을 잃게 된다. 이제 아이는 단지 하나의 조각이 된다. 그리고 조각은 춤을 출 수 없다. 조각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 그리고 조각은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자멸적이다. [482]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이고 살아 있다. 그리고 만약 진리가 얼려져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현재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배우가 연극을 마친 뒤에 화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어 놓듯이 그대는 그대의 거짓 가면들을 한쪽에 벗어 두어야 한다. 그대 안의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나오게 하라. 그리고 그 안에 살아라.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내적으로 그대 안에 수많은 것들이 부산을 떨게 하지 말라.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이 캠프에 그대 혼자만 있는 것처럼 지내라. 그대는 다른 누구와도 관계할 필요가 없다. [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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