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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30일 09시 5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오쇼 라즈니쉬

그와 첫 상견례를 한 곳은 허름한 헌책방에서였다. 그 당시 나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필(?)이 심하게 꼽혀 있는 상황이었다. 종교학, 죽음학, 티베트 사자의 서, 전생여행과 같은 책들 속에서 미로 찾기를 하듯 헤매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관심들은 뉴에이지(?)라고 불리웠던 오쇼 라즈니쉬와 같은 인도 명상가들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오쇼의 이름으로 출판된 탄트라 강의와 같은 책을 집어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적인 언어와 흰구름 같은 문구들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오쇼의 탄트라와 불교 강의에 대한 책들을 넘어서기에 내 인내심은 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책들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쓰는 신세가 되어 내 책장 한 귀퉁이에 쳐박히고 말았다.

그리고 수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를 만났다.
이전의 책과는 다르게 <자서전>은 무척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다.
오쇼는 인류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모든 종교적 사상들을 통합하고자 했던 것 같다. 모든 종교들을 관통하는 자신만의 종교와 사상의 질서를 만드는 것 말이다.

예를들어 그의 명상법은 구제프의 테크닉과 선(禪), 수피 무용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모두 포함하며, 동시에 그들 방법을 뛰어넘고 있다. 그의 명상방법은 억압의 방법이 아닌 열림의 방법이며, 어떤 교의나 의식은 없다. 그는 삶에 대한 기쁨에 찬 수용과 삶에 대한 전적인 참여를 이야기한다. 그는 명상을 통하여 사람들의 삶 속에 침묵을, 살아 꿈틀대는 침묵을 가져오는 것을 지표로 한다. 그렇게 해서 진실한 자기 자신의 존재와 만날 수 있다. 또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나의 메시지는 교의가 아니며, 철학도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일종의 연금술이며 변환의 과학이다. 따라서 나의 메시지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자들, 용기 있는 자들만이 들을 수 있다. 만약 시가 그대를 명상으로 이끌 수 없다면,그것은 이미 시가 아니다. 그것은 솜씨있는 낱말로 구성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는 어떤 시상도 들어 있지 않다. 그대는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한 모든 법칙을 알고 있는 훌륭한 언어학자, 작가, 문법 학자가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시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심의 가장 깊은 핵심은 명상이기 때문이다.

추가해서 저자에 대한 소개를 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이 책 전체가 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서전>의 네 번째 파트에서는 연대기별로 그의 생애를 정리하고 있다.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글귀를 대신하고자 한다.



2.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글귀

편집자 서문 - 사리토 캐롤 나이만

오쇼가 강의 중에 ‘명상’이라는 단어를 2만 5천번 사용하고 있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4만 2천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11p

오쇼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에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그 도전을 건네면서, 그는 우리가 그의 삶으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배우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지점까지만 그것이 의미있음을 깨달으라고 한다. 13p

서문

그대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실(fact)과 진실(truth)의 차이이다. 14p

PART ONE –
평범한 인간 : 전설 뒤의 숨은 역사

황금빛 어린 시절의 일별들

1931~1939: 인도, 마드야 프라데시주, 쿠츠와다

그 어린 시절 동안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천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드러났다. 나는 그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자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의지해 있지 않았다. 26p

침묵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전염성이 있다. 27p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라도 믿는다면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종교는 그대 명상의 하나의 방해물이다. 명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국도, 지옥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유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 36p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의 무지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종교적이 될 것이고 아이들을 올바른 종교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순진무구할 뿐이다. 그 아이들에게 그대의 이른바 지식을 물려주지 말라. 그대 자신이 먼저 순진무구해져야 하고, 거짓없이 진실해져야 한다. 43p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기를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만약 최대한도마저 넘어갈 수 있다면 환상적이다. 가라! 기다리지 말라!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54p

반역적이지 않은 사람은 종교적일 수 없다. 반역은 종교의 근본 그 자체이다. 57p

헤어짐은 그 나름의 시(詩)를 지니고 있다. 사람은 단지 그 헤어짐의 언어를 배워야 할 뿐이다. 그리고 한껏 그 깊이를 체험해야 한다. 그때 슬픔 그 자체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기쁨이 나온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난다. 나는 나나의 죽음으로 인해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헤어짐이었다.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59p

믿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죽음이 축하 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녀는 처음 할아버지와 사랑에 빠졌을 때 불렀던 그 노래를 불렀다. 61p

“네 질문은 틀렸다. 사랑에 빠지는 데는 ‘왜’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고 내 안에서 신뢰가 일어났다. 그리고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62p

반역적인 영혼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나는 오직 한 가지 놀이만을 사랑했다. 그것은 논쟁이었다. 모든 것들에 대한 논쟁이었다. 67p

그래서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67p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67p

1931~1951: 인도, 마드야 프라데쉬, 가다와라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있어 죽음과의 첫 조우였다.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조우일뿐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단순한 조우가 아니었다. 그것이 단순한 조우에 불과했다면 나는 그 진정한 의미를 놓쳤을 것이다. 나는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죽지 않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그 원소들은 육체를 빠져나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그 만남은 나의 삶 전체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것은 나에게 전에는 알지 못하던 하나의 방향을, 아니 하나의 차원을 주었다. 68p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사랑과 죽음이 함께 그대를 감쌀 때 마치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변형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 69p

나는 이미 날고 있었다. 나에게 날개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날기 위해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하늘 전체가 나의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72p

참 이상하다. 인도에서는 감옥과 학교가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고 모두가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다. 그 건물이 감옥인지 학교인지를 구별하기는 어렵다. 86p

인간은 명사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버렸다. 인간은 나무들의 세상을, 강들의 세상을, 산과 별의 세상을 잊었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오직 동사만을 안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100p

사람은 틀림없이 빵만으로도 살 수 있다. 그다지 사람답게 산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예수도 빵 없이는 살 수 없다. 104p

요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만약 그것이 그대의 의지에 반한다면 비록 천국에 있다 해도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 106p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이다. 어째거나 그대는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이다. 왜 걱정을 하는가? 139p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140p

깨달음 : 과거와의 단절

붓다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이다. “스승을 발견한 사람은 운이 좋다.” 154p

스승은 문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말했다. “나는 문이요, 길이요, 진리이지 나를 따르라. 나를 통해 지나가라. 그대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하리라.” 155p

우리는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얻기 위해 그처럼 애를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대가 이미 그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그대가 지니고 있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이다. 159p

‘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60p

완전한 무력감 속에서 그대는 모든 탐구를 버린다. 그리고 탐구하는 것을 멈춘 그날, 어떤 것을 찾는 것을 그만 둔 그날,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던 그날, 그것을 일어나기 시작했다. 164p

욕망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대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 욕망의 덧없음을 볼 수 있다. 직관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167p

분명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죽음과 같은 어떤 것, 매우 강렬한 어떤 것, 죽음도 아니고 새로운 탄생도 아니며, 십자가의 못 박힘도 부활도 아닌, 하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어떤 것이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있기가 불가능했다. 나는 취해 있었다. 172p

붓다들의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전적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180p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과정이다. 그 개인성 때문에 깨달음은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먼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정해진 단계들이라는 것이 없다. 185p

깨달음의 길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새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다. 모든 새는 스스로 자기 발자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계속 날아감에 따라 그 발자국들은 즉시 사라진다. 186p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 ‘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의 유일한 목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점점 더 깨어나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해서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95p

칼날을 세우며

1953~1956 : 대학시절

나의 전 생에는 맨 처음부터 두 가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결과가 어찌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는 것, 이것이 그 한가지 측면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접촉하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이런 태도로 대했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 213p

1957~1966 : 대학교수 시절

길 위에서

나의 통찰 속에서 과학, 종교, 예술 그것은 하나의 삼각형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참으로 다른 차원들이다. 그것들은 다른 언어들을 쓴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적이다. 그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조화되지 못한다. 그것들이 모두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깊은 통찰을 그대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나의 노력은 거의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었다. 238p

“선생님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 저는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논쟁과 부정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인류의 지식과 인류의 지혜에 기여한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 핵심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는 것이에요.” 239p

나는 종교라는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종교의 모든 역사는 악취를 풍길 뿐이다. 그것은 추하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비인간성, 그리고 온갖 사악한 것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되풀이하고 있는 똑같은 짓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 244p

내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방법을 찾았다. “그들의 단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경전을 사용하자. 다른 사람의 총을 사용한다고 해서 자신의 총알을 넣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총이야 누구의 총이든 상관없다. 총알은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작용은 총이 아니라 총알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 253p

저는 종교의 이름으로 종교에 반대되는 모든 이야기를 했습니다. 261p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다. : 단어들 사이의 침묵들

처음부터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즐겼다. 이것은 나의 그림이었다. 이것은 나의 노래였다. 이것은 나의 시였다. 268p

나는 거의 모든 종류, 모든 범주의 선생들을 만나봤지만, 전 세계 종교의 소위 스승, 선생이라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중독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의존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의 권력놀음이다. 나에게는 어떠한 권력놀음도 없다. 나는 그대가 나와 함께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와 상관없이 그대를 사랑한다. 나는 그대가 독립적이 되기를, 그리고 그대 스스로도 이 고귀한 순간들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288p


PART TWO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Q : 당신은 누구입니까?
A : 당신이 생각하는 누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292p

섹스구루

성적인 오르가슴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대에게 명상의 첫 번째 일별을 준다. 왜냐하면 마음이 멈추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 동안은 시간도 없고 마음도 없다. 그대는 그저 전적인 침묵과 지복 속에 있을 뿐이다. 296p

사람이 생각을 넘어선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문, 어떤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적인 오르가슴이다. 비록 그것이 한 순간 동안만 지속되지만 그 순간은 영원이다. 모든 것이 멈춘다. 그대는 모든 걱정들, 모든 긴장들을 잊어버린다. 298p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법적인 매춘이다. 300p

컬트 교주

나의 일은 종교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 종교성을 창조하기 위한 운동이다.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바라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 303p

사기꾼

세상의 모든 스승들은 이야기들을, 우화들을 들려주어 왔다. 왜인가? 그냥 간단히 진리를 말하면 된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밤은 길고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이야기들이 없다면 그대는 잠에 빠지게 된다. 아침이 오기까지는 그대의 관심을 끌어두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스승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려 갈 수는 있다. 308p

‘자칭 바그완(Bhagwan)’

부자들의 스승

나는 부유한 자들의 스승이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그대의 돈 덕분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여기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돈에 좌절했기 때문에 여기 있다. 그대는 그대의 성공에 좌절했기 때문에 여기 있다. 그대는 그대의 삶에 좌절했기 때문에 여기 있다. 거지는 올 수 없다. 그는 아직 좌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30p

농담꾼

내가 아는 한, 춤과 웃음은 가장 자연스럽고 쉽게 무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이다. 만약 그대가 정말로 춤을 춘다면 멈춘다. 그대는 춤을 추고 또 춘다. 그대는 돌고 또 돈다. 그대는 소용돌이가 된다. 모든 경계가, 모든 구별이 사라진다. 그대는 심지어 어디서 그대의 몸이 끝나고 어디서 존재계가 시작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대가 존재 속으로 녹아 들고 존재가 그대 속으로 녹아 든다. 경계들이 겹쳐진다. 그리고 그대가 정말로 춤추고 있다면, 그대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춤이 그대를 추게 허락한다면, 춤이 그대를 가지도록 허락한다면, 만약 그대가 춤에 사로잡힌다면 그때 생각은 멈춘다. 똑 같은 일이 웃음에서도 일어난다. 그대가 웃음에 사로잡히면 생각은 멈춘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무심의 몇몇 순간들을 알게 된다면, 그 일별들은 그대에게 다가올 더 많은 보상들을 약속한다. 그대는 단지 더욱더 무심의 질을 키워가야 할 뿐이다. 더욱더 생각이 사라져야 한다. 웃음은 사념없는 상태로 가는 아름다움 전주곡이 될 수 있다. 344p

롤스로이스 구루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의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352p

스승

나는 언제나 누구의 스승도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승을 원하고 그들 스스로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역할을 했다. 358p

스승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비록 원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대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일깨울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자극할 수 있다. 그들은 그대를 흔들 수 있고 깨울 수 있다. 그들은 그대에게 신, 진리, 니르바나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대는 이미 그것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 자체이다. 358p

진리는 주어질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은 불러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일깨워질 수 있다. 그대 안에서 그것이 일어나는, 더 이상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있게 되는 그러한 상황, 그러한 공간이 창조될 수 있다. 359p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다. 365p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순간 탄생한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탄생한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368p

우리는 온갖 종류의 기적들을 만들어왔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바로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과 결국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373p

PART THREE
유산

종교 아닌 종교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 사실 그것은 한 마리 새의 두 날개이며 하나의 질문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이다. 386p

유대교의 언어인 헤브루어에서는 인간을 아담(adam)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담은 진흙을 뜻한다. 아랍어에서는 인간을 아드미(admi)라고 부른다. 그것은 아담과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이며 그 뜻은 또다시 진흙이다. 거의 기독교의 언어라고 해도 좋을 영어의 휴먼(human)이라는 단어는 휴머스(humus)에서 온다. 그리고 휴머스는 진흙을 의미한다. 신이 창조자라면 당연히 무엇인가로부터 창조해야 한다. 조상을 만들 듯이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먼저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그 다음에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식이라면 인간은 모든 존엄성을 잃는다. 388p

붓다가 죽고 제자들도 죽고 나자, 사람들이 명상을 하도록 도와야 할 바로 그 조직 스스로가 성직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리고 명상을 하도록 돕는 대신에 불상과 종교적 의식들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392p

이제 나의 노력은 그들이 신을 해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해체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명상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도 없고 종교도 없다. 내가 종교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조직화된 교리, 교의, 제식, 성직자들이다. 393p

신이 있든 종교든, 모든 조직화된 종교들은 인류를 잘못 인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원인은 조직화였다. 393p

“만약 성직자가 없다면 그대는 그대가 어떤 상태이든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의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의 불행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느낌은 그대의 문을 열어준다. 이제 그대는 이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을 찾기 시작한다. 395p

21세기를 위한 명상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단지 명상 속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407p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425p

제 3의 심리학 : 붓다의 심리학

공동체로부터 달아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관계하라. 그러나 여전히 홀로 남아라. 사랑하고 명상하라. 명상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선택하지 말라. 사랑 더하기 명상,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 444p

조르다 붓다 : 완전한 인간

동양도 부유했을 때는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부에 반대하지 않으며 가난함에 어떤 영적인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나는 가난함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가난해 질 때면 언제나 그 나라는 모든 명상과의, 모든 영적인 노력과의 접촉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외적으로 가난해질 때마다 그 나라는 내적인 가난함을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464p

인도에서 가난은 숭배 받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끊임없이 가난을 비난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종류의 가난에도 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은 영성이 아니다. 가난은 영성이 사라지는 원인이다. 468p
나는 가난을 찬양하지 않는다. 나는 가난에 대한 어떤 존경심도 없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부유함이 모두 주어져야 한다. 왜 둘 다여서는 안 되는가? 과학은 그대를 외적으로 부유하게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종교는 그대를 내적으로 부유하게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요가, 탄트라, 도교, 수피즘, 하시디즘이다. 이런 것들이 내면의 기술들이다. 471p

동양은 아직 명상을 할 수 없다. 먼저 물질적으로 좀 더 나아지기 위해 과학기술을 필요로 한다. 서양이 종교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동양은 과학기술을 필요로 한다. 473p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 그것이 내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이곳은 동양과 서양의 만나는 곳이다. 이곳은 새로운 인류가 잉태되고 탄생할 수 있는 자궁이다. 474p

명상은 홀로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은 함께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양쪽 모두를 알면 가능한 한 쉽게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475p

명상 속에서 그대는 들이쉬고, 사랑 속에서 그대는 내쉰다. 그리고 사랑과 명상이 함께 있을 때, 그대의 호흡은 완전하고 온전하며 전체가 된다. 475p

그대는 단지 어떻게 혼자가 될 수 있을지, 어떻게 침묵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대 자신 안에서 전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해질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할 뿐이다. 다른 대상은 완전히 버려지고 잊혀져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들은 신 없는 종교들이다. 476p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의 메시지는 신인간, 호모노부스(homo novus)이다. 479p

신인간은 ‘양자택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양쪽 모두’일 것이다. 신인간은 현실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초세속적일 것이다. 신인간은 자신의 전체성을 받아들일 것이며 어떤 내적인 분열도 없이 온몸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는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은 악마와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도덕성은 부도덕성과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립을 모를 것이다. 그는 이중성을 초월할 것이다. 그는 분열적이지 않을 것이다. 신인간과 함께 하나의 신세계가 올 것이다. 그는 동시에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일 것이다. 그는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선택 없이 그 자신일 것이다. 481p

인간은 나무이다. 종교는 오직 꽃들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꽃들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으로 남게 된다. 그 꽃들은 결코 실체화되지 못한다. 그 꽃들은 땅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체화되지 못했다. 그리고 과학은 오직 뿌리에만 마음을 쓰기 때문에 실패한다. 뿌리는 추하고 거기에 꽃은 피지 않는다.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 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시, 음악, 조각…… 일단 우리가 이 신인간을 세상에 내놓고 나면 지구는 처음으로 마땅히 되었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 487p

PART FOUR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1931년 12월 11일 : 출생

1932~1939 : 쿠츠와다

1938~1951 : 가다르와라

1953년 3월 21일 : 깨달음

1951~1956 : 대학생시절

1957~1970 : 교수, 대중연설가 시절

1962 : 첫 번째 명상센터들

1962~1974 : 명상캠프

1964년 6월 : 라나크푸르 명상캠프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이고 살아 있다. 그리고 만약 진리가 알려져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현재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배우가 연극을 마친 뒤에 화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어놓듯이 그대는 그대의 거짓 가면들을 한쪽에 벗어 두어야 한다. 그대 안의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나오게 하라. 그리고 그 안에 살아라.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내적으로 그대 안에 수많은 것들이 부산을 떨게 하지 말라.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이 캠프에 그대 혼자만 있는 것처럼 지내라. 그대는 다른 누구와도 관계를 할 필요가 없다. 495p

1966년 6월 : 죠띠 시카 잡지의 출간
1968년 : 성으로부터의 초의식으로(From Sex to Suerconsciousness)

1970~1974 : 봄베이

1970 : 다이나믹 명상의 소개

1970 : 산야스의 새로운 정의

예로부터 내려오는 산야스의 의미는 세상의 포기이다. 나는 그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산야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나는 거기에서 옛날의 의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또다른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이 그대에게 준 모든 조건화들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그대의 종교, 그대의 카스트, 그대의 브라만교, 그대의 자이나교, 그대의 기독교, 그대의 신, 그대의 성서. 나에게 있어 산야스란 ‘나는 나에게 주어져온 모든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완전히 씻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의지해서, 새롭고, 젊고,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채로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야스는 다름 아닌 그대의 순수함으로의 입문이다. 501p

이후, 1985년에 오쇼는 말한다.
그리고 1986년에 그는 다시 한번 산야스의 외적인 상징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내가 나의 사람들을 입문시키기 시작한 날, 나의 유일한 두려움은 ‘내가 언젠가는 나의 제자들을 친구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그 전날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수도 없이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그것을 해낼 수 있을까? 제자는 친구가 될 수 없지 않은가!’ 그날 밤 히말라야의 쿨루 마날리에서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비록 네가 매니지(manage)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 506p

우드랜드(The Wood Land)

1971 : 아차리야에서 바그완으로

1973~1975 : 동적인 명상들과 음악

마음의 상태는 신경증적이다. 전 사회가 병들어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처럼 혼돈명상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대 자신을 풀어 놓아라.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 상황이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라. 그것들을 끄집어내라. 그대 자신을 그러한 것들로부터 풀어놓아라. 카라르시스를 경험하라. 그 과정에서 음악은 도움이 될 것이다. 511p

1974~981 : ‘푸나’

흰구름의 길

흰 구름은 갈 곳이 없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어디로든 움직인다. 모든 차원이 흰 구름에 속해 있고 모든 방향이 흰 구름에 속해 있다.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전적인 받아들임 속에 있다. 때문에 나는 나의 길을 ‘흰 구름의 길’이라고 부른다. 흰 구름의 길은 길 없는 길이다. 흰 구름은 움직인다. 그러나 고정된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흰 구름은 마음 없이 움직인다. 따라서 나는 흰 구름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들 또한 하늘을 떠다니는 흰 구름들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갈 곳도 없고,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단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여기에 머무는 것, 그것으로 완벽하다. 514p

‘새로운 단계’

내가 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명상만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환희이다. 그것은 단지 첫 걸음이기만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지막 걸음이기도 하다. 518p


강의와 질의응답

그대는 그대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가 그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대 앞에 모든 길들을 펼쳐놓아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그것이 그대의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기다려온 때라는 것을, 이것이 그대의 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19p

나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 본질적인 종교를 선언한다. 그것은 이슬람에서는 수피즘으로 알려져 있고, 불교에서는 선(禪)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대교에서는 하시디즘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본질적인 핵심이다. 519p

다르샨

통찰의 나눔

내가 선교사가 되지 말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 그대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그를 개종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것뿐이다. 그대는 단지 타인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그를 개종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것뿐이다. 그것은 옳지 않다. 결코 사람을 어떤 것에 대한 수단으로도 이용하지 말라. 왜냐하면 각각의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523p

명상의 준비로서의 요법

엔카운터그룹과 프라이멀 요법

아슈람의 팽창

헤코지

나는 사회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이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전혀 여기 있을 수가 없다. 사회는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 지지할 수가 없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사회는 나의 일을 방해할 것이다. 이미 방해하고 있다. 535p

새로운 코뮨의 비전

침묵의 사트상과 붓다의 법구경에 대한 강의

암살기도

전 세계적인 팽창

세상 속에 있어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이 그대 속에 살도록 허락하지 말라. 그것이 나의 메시지이다. 543p

이것이 나의 산야신들의 길이 되어야 한다. 세상 속에 있어라. 세상 속에 살아라. 전체적으로 살아라. 야망 없이, 욕망 없이 살아라. 왜냐하면 모든 욕망은 그대를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모든 야망은 그대의 현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탐욕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소유욕은 그대를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544p

침묵

거대한 진흙투성이 목장 : 1981~1985

그러나 이른바 성자들은 모두가 자신의 과오 없음을 주장해왔다. 나는 내가 실수들을 저지른다는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다. 맞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사 자신이 실수를 저지른 것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숨겨야 합니다. 실수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수백 년 동안 해오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한마디로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속일 수 없다. 547p

라즈나쉬푸람 : 불법도시

교회와 국가

1984 : 파시즘의 쓴 맛

이상한 일이다. 만약 자유를 주면 사람들은 게을러진다. 그들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파시즘적인 명령이 떨어지면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잠재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창조하고, 단결하고, 강해진다. 독일은 5년 동안 계속 전쟁에서 이겼다. 그것은 독일 사람들이 올바른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가 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히틀러 한 사람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이전에는 누구도 주지 못했던 에고를 그들에게 주었다. 565p

이 한 가지를 기억하라.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 565p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나라가 강해지기를 바란다면 사방에 적을 만들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긴장을 푼다. 그들이 끊임없이 공포감에 사로잡혀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 566p

체포
내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켜본 바로는……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이다. 그들의 헌법은 단지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일 뿐이다. 그 나라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범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571p

1985~1986 : 세계여행

1987년 : ‘푸나 II’

나는 언제까지나 그대와 함께 있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존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존재는 단지 꼭 필요한 만큼만 허락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할 것이다. 588p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기억하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대 자신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그대는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88p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593p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며, 인간의 무지이다. 인간이 의식적이 되고, 각성하게 되고, 깨어 있게 되는 그날, 더 이상의 반복은 없게 될 것이다. 593p

궁극적인 혁명은 하나의 세계정부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하나의 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대는 전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모든 나라는 각자의 군대와 각자의 방어시설, 각자의 무기를 가져야 하며 누가 더 파괴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경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정부가 있게 되면 어떠한 육군도, 공군도, 해군도 필요하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삶에 헌신하기 위한, 전 인류에 헌신하기 위한 봉사단체로 변형될 수 있다. 598p

1989년 4월 10일의 저녁 명상 끝부분에 한 오쇼의 말이 공개적인 그의 마지막 말이 된다.
이 순간 그대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붓다인 그대 자신을 기억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영원성이며, 그것은 그대의 불멸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대는 별과, 나무와, 하늘과, 대양과 하나이다.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붓다의 마지막 말은 사마사티(sammaati)였다. 그대가 붓다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마사티.

오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



3. 내가 저자라면


1) 궁극적 질문들

"그 어린 시절 동안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천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드러났다. 나는 그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자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의지해 있지 않았다." 26p

오쇼의 어린 시절은 외로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고립적 상황은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본원적 질문을 던졌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와 같은 질문 말이다. 고타마 붓다가 처음 바깥 세상을 접했을 때와 같은 충격적 변환의 과정을 오쇼도 겪은 것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독특한 경험은 그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드는 데,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 진리의 통합화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 그것이 내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이곳은 동양과 서양의 만나는 곳이다. 이곳은 새로운 인류가 잉태되고 탄생할 수 있는 자궁이다." 474p

오쇼는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원했다. 영혼이 없는 과학과 궁극적 종교와의 합일(合一)을 말이다. 또한 산재되어 있는 종교적 분파들을 하나의 진리체계로 통합홬(統合化)하려 하였다. 어찌보면 종교를 반대했던 사람이지만, 새로운 본질적인 종교를 선언하고자 했다. 이슬람의 수피즘, 불교의 선(禪), 유대교의 하시디즘과 같은 신비주의 철학과 종교들을 근간으로 하여 세상의 모두를 설명하려 하였다. 그러한 통합화의 시도로 ‘신인간’이라는 개념을 주장하였다.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 하였다. 양자택일의 문제 속에서 선택을 고민하지 않는 완전한 완전한 인간 말이다. 이러한 염원은 최종적으로 세계정부를 통한 전인류의 통합을 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한 유토피아의 이상으로 남겨졌지만.


3) 깨달음 = 몰입 ?

"사람이 생각을 넘어선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문, 어떤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적인 오르가슴이다. 비록 그것이 한 순간 동안만 지속되지만 그 순간은 영원이다. 모든 것이 멈춘다. 그대는 모든 걱정들, 모든 긴장들을 잊어버린다." 298p

섹스구루라고 까지 비야냥 받았던 오쇼는 ‘성적인 오르가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언급은 인간이 가장 몰입할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성적 관계의 순간이라는 생각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는 성적 체험의 시간 속에서 시간도 없고, 마음도 없고, 오직 ‘몰입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오쇼는 이슬람의 수피즘에서 거행되고 있는 ‘회전춤’에 대해서도 같은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다. 회전 춤을 추면서, 사람들은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가 된다.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 모든 구별이 사라진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알 수 없다. 내 존재가 춤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이다. 성적 관계와 같이 에고가 사라진 상태에서 몰아의 상황만을 경험할 뿐이다. 옛 깨달음을 얻은 선사들은 깨달은 이후 매일매일이 즐겁다 하였다. 그들은 지복(至福)의 상황을 일상의 상황에서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오쇼가 이야기하고 있는 ‘깨달음의 상태’가 ‘몰입의 상태’로 이해해도 될지는 과제로 남겨질 것 같다.


4) 스승과 제자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다.' 365p

오쇼는 스승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따르는 산야신의 요구 때문에 그 역할을 대신했다고 한다. 그는 스승은 직접적인 진리(眞理)를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당신 내면 속에 그 진리를 가지고 있기에, 본성 자체이기에 그것을 불러낼 수 있다고 한다. 그 지점에서 ‘스승의 역할’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는 스승과 제자가 아닌 ‘친구’가 되기를 원했다. 문득 변경연이 추구하는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관계’라는 명제가 떠오른다. 서로에게 스승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5) 자기답게 사는 것

"흰 구름은 갈 곳이 없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어디로든 움직인다. 모든 차원이 흰 구름에 속해 있고 모든 방향이 흰 구름에 속해 있다.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전적인 받아들임 속에 있다. 때문에 나는 나의 길을 ‘흰 구름의 길’이라고 부른다. 흰 구름의 길은 길 없는 길이다. 흰 구름은 움직인다. 그러나 고정된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흰 구름은 마음 없이 움직인다. 따라서 나는 흰 구름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들 또한 하늘을 떠다니는 흰 구름들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갈 곳도 없고,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단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여기에 머무는 것, 그것으로 완벽하다." 514p

600페이지가 넘는 자서전을 통해 오쇼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자신을 찾으라고. 자신의 길을 찾으라고. 그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자신의 길을 찾았을 때면, 즉시 내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신호라고 한다. 그것이 내 천복(天福)을 찾을 것이라 한다. 물론 오쇼는 단순히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찾기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길찾기를 넘어선 깨달음의 순간을 찾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을 흰구름에 비유했다. 문득 조셉 캠벨이 떠오른다.

“해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조셉 캠벨, <신화의 힘> 中에서

지금 이 순간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오쇼가 살고자 했던 흰구름의 삶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에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그는 오쇼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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