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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30일 11시 02분 등록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 오쇼 라즈니쉬/ 김현국 옮김/ 태일출판사


1. 저자에 대하여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오직 그대 존재의 침묵만을,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신성(神性)만을,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religiousness)의 시작이다.”[5]


그의 자서전을 다 읽고 이 글을 쓰면서도 그를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종교 지도자, 새로운 종교(성)의 창시자, 단순히 명상 운동가, 아니면 전 인류를 상대로 믿기 어려운 주장을 해대는 몽상가라 해야 할지...

“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바로 신성(神性)이다.”[315]

“나는 종교라는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종교의 모든 역사는 악취를 풍길 뿐이다. 그것은 추하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비인간성, 그리고 온갖 사악한 것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되풀이하고 있는 똑같은 짓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244]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있지도 않은 신을 내세워 인간을 속이고 착취하는 모든 종교를 부정한다. 그리고 인간은 명상을 통해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성(神性)을 찾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이 도달 한 것과 같은 행복, 지복, 무아경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종교와 철학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제창하는 명상(침묵)을 통해 신 인간 ‘조르바 붓다’로 거듭 태어나는 것만이 이 세상을 지복의 천국으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미국에 진출한 오쇼는 미국에서 탈륨이라는 독약에 중독되었다고 주장하고, 사망하기 얼마 전에는 붓다가 자신의 몸을 방문했으며 몇 일만에 떠났다고 주장하는 등 믿기 어려운 말들을 하기도 했다. 그는 “오쇼 코뮨 인터내셔널”이라는 명상센터를 설립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명상체험과 오쇼의 사상을 배우도록 하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 주요 사건들 >
1931년 인도 쿠츠와다에서 태어남.
7년간 외조부모와 함께 생활. 외조부모는 오쇼를 자유와 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양육한다.
유년 시절에는 선생님에게 도전하는 등 말썽을 부리며 자라는데, 논리적 타당성이 없는 문제는 끝내 짚고 넘어가고야 마는 끈질긴 성격을 보여줌.
1945년(14세) 죽음을 기다리는 7일간의 실험을 수행.
1953년(22세) 3월 21일 깨달음을 얻음.
1951 - 1956년 자이나 대학과 사가르 대학원에서 철학 공부. 토론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
1957 - 1970년 라이푸르의 산스크리트 대학, 자발푸르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중연설을 통해 일반 대중을 가르침.
1962 - 1974년 명상센터와 명상캠프를 열어 강의 실시.(수많은 명상 요법을 개발, 전파)
1974년 (43세) 『나의 길 : 흰 구름의 길』 책자를 발간하여 서양 구도자들을 매혹시킴.
1981년 (50세) 미국 오레곤주에 명상센터를 건립하여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 시작.
1985년 (54세) 이민법 위반 등 34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미국 출국에 동의하여 풀려남.
1985 - 1986년 그리스, 스위스, 스웨덴,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등을 돌아다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입국을 거부당함.
1988년 (57세) 고타마 붓다가 오쇼 안에 거처를 정했고 5일 후에 떠났다고 발표
1990년 (59세) 1월 사망



2. 내가 저자라면

오쇼는 매우 독특하고 개성적인 사람이다. 삶, 행복, 죽음 같은 철학적 질문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독특하고, 그 질문에 대한 해석도 보통 사람과는 많이 다르다. 그의 이런 기질은 타고난 면도 있겠지만, 외조부모와 함께 살았던 유년기 7년 동안 외할머니의 독특한 교육관에 따라 길러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그는 평범한 어린이들처럼 ‘이것을 해라, 이것은 하지 말라’는 일방적인 통제방식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외할머니로부터 보호 받았다. 그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혼자의 힘으로, 자기만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버릇을 들였고, 평생에 걸쳐 그것을 자기 삶의 방식으로 갖게 된다.

오쇼의 외할아버지는 그가 태어났을 때 유명한 점성술가를 찾아갔다. 점성술가는 오쇼가 7년 이상을 살기 힘들다고 예언하였고, 그 예언이 빗나가자 14살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21살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예언은 어린 나이 때부터 오쇼가 죽음을 자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고, 오쇼는 명상을 통해 죽음을 사색하게 된다.

14살에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7일간의 실험을 통해 죽음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맞을 수 있다는 각성을 얻게 된다.

또한 그는 어리석은 일이나 생각에 강요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결과가 어찌되던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싸우는 삶, 즉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유년기부터 하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물론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이 합리적이고 옳다고 생각하면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그는 똑똑하고, 논리적이며, 솔직하고, 매우 용기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목숨을 걸고 증명하고 이루어가려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아쉬운 점 한 가지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조화를 이루어 가는 능력이다.

그의 표현은 상당히 과격하다. 그는 세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성직자이고, 신은 성직자의 날조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세계의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 그리고 독실한 신도들을 모두 적으로 만드는 발언이다. 신은 수천 년을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다. 그가 하는 말은 수천 년 인간의 역사를 부정하는 말이다. 수천 년 역사 속의 인간들을 바보로 만드는 발언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오쇼는 그런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대단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그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받아들이려는 별다른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기독교가 탄생해서 공인 받기까지 300년이 걸렸는데, 지금 같이 통신이 발달하고 거리가 좁아진 세상이라면 10년이면 결판이 났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오쇼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한, 읽을거리의 대상은 될지언정 그의 말을 믿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려는 세력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몽상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었던가?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어릴 때부터 내가 독립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잘하고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81]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하곤 했다. “설사 제가 물어본다고 해도 저에게 아무 조언도 해주지 마세요. 단지 ‘너 자신의 길을 찾아라.’ 라고 말해주셔야 해요.” 왜냐하면 값싼 조언이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의 길을 찾으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116]

점성술가의 이 예언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일찍부터 내가 죽음을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명상할 수 있었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141]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 ‘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의 유일한 목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점점 더 깨어나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해서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195]

나는 나의 일생을 통해서, 만약 조금만 체면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주 쉽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는 그대와 게임을 해왔다. 사회는 그대의 마음 속 높은 자리에 체면을 놓고, 그 반대편에는 사회가 그대로 하여금 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것들을 놓았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그것들을 행하면 그대는 체면을 잃는다. 일단 그대가 “나는 체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때 사회는 그대의 의지에 반대되는 어떤 일도 그대에게 강요할 힘이 없다.[226]

나는 종교라는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종교의 모든 역사는 악취를 풍길 뿐이다. 그것은 추하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비인간성, 그리고 온갖 사악한 것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되풀이하고 있는 똑같은 짓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244]

나의 성공은 그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공은 그대에게 진정한 명상의 맛을 주는 것, 그래서 그대가 명상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무심의 상태가 단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치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278]

이것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세상의 모든 스승들은 이야기들을, 우화들을 들려주어 왔다. 왜인가? 그냥 간단히 진리를 말하면 된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밤은 길고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이야기들이 없다면 그대는 잠에 빠지게 된다.
아침이 오기까지는 그대의 관심을 끌어두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스승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려갈 수는 있다.[308]

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바로 신성(神性)이다.[315]

아차리야란 ‘스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실제로 그것은 오직 자신이 몸으로 체험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의 행동과 생각이 절대적인 조화 속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318]

심각함은 암(癌)이다. 이제는 의학자들조차도 웃음을 자연이 인간에게 준 가장 강력한 약의 하나라고 말한다. 만약 그대가 병이 들었을 때 웃을 수 있다면 그대는 더 빨리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만약 웃을 수 없다면 심지어 지금 건강하다 해도, 머지 않아 그대는 건강을 잃고 병이 들게 될 것이다....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문득 마음은 사라진다. 선(禪)의 모든 방법론은 어떻게 무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343]

스승들은 진리를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을 가르칠 방법이 없다. 그것은 경전을 넘어선, 말을 넘어선 전이(轉移)이다. 그것은 전이이다. 그것은 그대 안의 에너지를 자극하는 에너지이다. 그것은 일종의 동시성이다.[364]

진짜 문제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신은 성직자의 날조물이다. 성직자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가 신을 버린다 해도 성직자가 언제나 새로운 예식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낼 것이다.[396]

국가의 시대는 갔다. 분열의 시대가 갔다. 정치가들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인류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그 단계는 오직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하는 단계, 오지 하나의 인류만이 존재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그때 엄청난 에너지가 풀려나올 것이다.
동양은 보물들을, 종교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서양은 과학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 둘이 만날 수 있다면, 바로 이 세상이 천국이 될 수 있다. 이제 다른 세상을 바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기 이 지상에 천국을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세상을 창조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것이다.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
그것이 내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이곳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은 새로운 인류가 잉태되고 탄생할 수 있는 자궁이다.[474]

나는 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변형시키기를 바라고 그들을 통해 이 아름다운 행성에 진정한 문명과 인류애가 구현되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593]

나는 그대들 모두가 나와 같은 행복에, 나와 같은 지복에, 나와 같은 무아경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그 무아경은 이미 나의 심장박동이 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전 우주의 심장박동이기도 하다.[595]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오직 그대 존재의 침묵만을,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신성(神性)만을,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religiousness)의 시작이다.[5]

편집자 서문

그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신문기사 모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9]

이 책 속의 글들은 ‘오쇼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다. 대상이 대상인 만큼 그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 글들은 ‘시간’뿐만 아니라 ‘무한’의 관점에서, ‘행위’ 뿐만 아니라 ‘존재’의 관점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한다. 결국 오쇼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에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그 도전을 건네면서, 그는 우리가 그의 삶으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배우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지점까지만 그것이 의미 있음을 깨달으라고 한다.<사리토 캐롤 나이만> [13]

서문

그대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실(fact)과 진실(truth)의 차이이다. 보통의 역사학은 사실들에 대해, 물질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다룬다. 역사학은 진실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진실은 물질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 의식의 사건들을 다루기에 충분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14]

미래의 새로운 역사학은 고타마 붓다가 깨달았을 때 그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심을 둘 것이며, 깨달음 후 그가 42년 간 육체 안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관심을 둘 것이다. 그리고 그 42년 동안 일어나고 있었던 그 일은 단지 그의 육체가 죽었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육체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며 그것은 의식 속의 현상이었다. 그리고 의식은 계속되며 의식의 순례는 끝이 없다. 따라서 육체 안에 있었을 때 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그 일은 육체 밖에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내적인 사건들의 기록이다.[15]

1부 평범한 인간 : 전설 뒤에 숨은 역사

나에게 있어서의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진리는 오직 홀로있음 속에서만 발견되어 왔다.[19]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대를 위해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20]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문명화되어 있고 예의와 예절을 갖추고 있지만 그래서 얻은 게 뭐예요? 당신도 무척 문명화되어 있어요. 그래서 뭘 얻었죠?”....“당신은 알파벳을 알아요.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죠? 당신은 수학을 알아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예요? 단지 약간의 돈을 벌었죠. 그 아이도 약간의 돈을 벌고 꼭 당신처럼 살기를 바라세요?”[29, 30]

예의바른 사회에서는 아무도 진정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살에 대한 질문은 모든 질문들 중에서 가장 진정한 질문이다.[46]

내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내가 교육받지 않았고, 어떤 지식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은 그대를 매우 교활하게 만든다. 나는 교활하지 않았다. 나는 교육받지 않은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을 했을 뿐이다. 교육은 인간이 불쌍한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범죄이다. 아마도 이 세상의 가장 마지막 해방은 어린이의 해방이 될 것이다.[51]

나는 학교에 가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교는 최악의 장소였다. 결국 나는 억지로 학교에 가도록 강요당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저항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내가 관심 있는 것들에 관심 없는 아이들만 있었고, 그들이 모두 관심 있는 것들에 대해 나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67]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68]

어릴 때부터 내가 독립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잘하고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81]

아버지가 내게 준 유일한 교육은 강과의 교감이었다. 아버지 자신이 강과의 깊은 사랑 속에 있었다.
그대가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현대인은 아스팔트길, 시멘트와 콘크리트 건물들과 함께 산다. 이러한 것들은 명사들이다. 기억하라. 이러한 것들은 동사들이 아니다. 마천루는 성장하지 않는다. 도로는 밤이든 낮이든, 보름밤이든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든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명사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버렸다. 인간은 나무들의 세상을, 강들의 세상을, 산과 별의 세상을 잊었다. 나무와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직 동사만을 안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100]

비록 예수가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람은 빵 없이도 역시 살 수 없다. 사람은 빵을 필요로 한다.... 첫째는 빵이다. 사람은 틀림없이 빵만으로도 살 수 있다. 그다지 사람답게 산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예수도 빵 없이는 살 수 없다.[103]

그대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대 자신이 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방식은 매우 교묘하고 교활하다. 그들은 “너는 크리슈나처럼, 붓다처럼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붓다나 크리슈나를 아름답게 그려놓아 그대 안에 붓다나 예수, 크리슈나가 되고 싶은 커다란 열망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이 열망이 그대 고통의 근원이다.[105]

만약 그것이 그대 의지에 반한다면 비록 천국에 있다 해도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자연스러운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106]

나는 말했다. “그 편이 나아요. 넘어지게 놔두세요. 그런다고 죽지 않아요. 저는 어떻게 해야 넘어지지 않을지, 어떻게 깨어 있을지, 어떻게 돌들이 어디 있는지 기억할지를 배우게 될 거예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있으면.... 할아버지는 얼마나 오래 제 손을 잡고 있을 수 있어요? 얼마나 오래 저와 함께 계실 거예요? 할아버지가 언제나 저와 함께 있을 거라고 장담하실 수 있다면, 그렇다면 물론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요.”[114]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말하곤 했다. “설사 제가 물어본다고 해도 저에게 아무 조언도 해주지 마세요. 그것을 분명히 해두셔야 해요. 단지 ‘너 자신의 길을 찾아라.’ 라고 말해주셔야 해요. 저에게 조언을 해주지 마세요.” 왜냐하면 값싼 조언이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의 길을 찾으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116]

나는 나의 선생들에게 주장했다. “제발 선생님의 갈 길만 가주세요. 선생님의 과목이 아니면 어떠한 조언도 저에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야 저 자신의 방법으로 저의 삶을 탐험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저는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저는 기꺼이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그것만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119]

너는 대학에 가야 할 거다. 하지만 조심해라. 책들 속에서 길을 잃지 마라.[123]

“저는 결코 여러분들의 조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본 적이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있기는 했지만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저는 제 속에 하나의 결정을,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127]

“이 아이가 스물 한 살의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매 7년마다 이 아이는 죽음을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점성술가>[137]

7일 동안 나는 기다렸다. 그 7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경험이 되었다. 죽음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쪽에서는 모든 방법을 다해 죽기위해 노력했다. 이상하고 기이한 느낌들이 일어났다.... 죽는다고 느끼고 있으면 차분하고 고요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걱정들은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이다. 어쨌거나 그대는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이다. 왜 걱정을 하는가?[139]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이면 하나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삶은 모든 걱정과 초조함, 그 모든 것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간다.... 일단 그대가 완전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 그대는 죽음을 알게 된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점성술가의 이 예언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일찍부터 내가 죽음을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명상할 수 있었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141]

나는 이쪽에서 블랙홀인 것이 반대편에서는 화이트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증거는 물리학자들이 찾아야겠지만 말이다. 구멍은 한쪽만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터널이다.[151]

1953년 3월 21일이 되기 바로 7일 전, 나는 스스로에 대한 노력을 그만 두었다.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온다.... 그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 밖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완전한 무력감 속에서 그대는 모든 탐구를 버린다. 그리고 탐구하는 것을 멈춘 그날, 어떤 것을 찾는 것을 그만 둔 그날,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던 그날, 그것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났다. 그 어디도 아닌 곳으로부터..... 그 에너지는 어떤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곳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곳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그것은 나무 속에 있었고, 바위와 하늘과 태양과 공기 속에도 있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그토록 힘들게 찾고 있었고 그것이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옆에,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 구하고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항상 먼 곳을 향한 것이다. 구하는 것은 항상 거리가 있는 대상을 향한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에 있지 않았다. 나는 원시안이 되어버려 가까운 곳을 보는 것을 잊고 있었다. 두 눈을 멀리 수평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을 보는 능력을 잃고 말았다.[164, 165]

욕망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대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 욕망의 덧없음을 볼 수 있다. 직관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통찰이 필요하다.[167]

꿈속에서 꿈은 실재이다. 그대는 매일 밤 꿈을 꾼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대는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밤이 되어 그대가 꿈을 꿀 때, 그 꿈은 실재가 된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로 비 실재이므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아침에 그대가 눈을 뜰 때, 또 다른 실재가 거기 있다. 이제 그대는 그 꿈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실재와 비교되어서 꿈은 비실재가 된다.[175]

내가 세상은 실재라고 말할 때 그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 세상은 무한한 빛을 발한다. 그 세상은 빛이며 기쁨이다. 그것은 축제이다. 물론 나의 세상 말이다. 혹은 그대가 그대의 꿈을 버릴 때, 그것은 그대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날 밤 나는 텅 비었고 동시에 가득 찼다. 나는 비존재적이 되었고 동시에 존재적이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죽었고 동시에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그것은 죽은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별개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별개의 것이다. 죽은 자는 완전히 죽었다. 그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184]

깨달음의 길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새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다. 모든 새는 스스로 자기 발자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도자(leader)와 추종자(follower)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단지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예수, 모세, 마호메트, 크리슈나와 같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186]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 ‘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의 유일한 목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점점 더 깨어나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해서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195]

그리하여 나의 전 생애는 맨 처음부터 두 가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결과가 어찌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는 것, 이것이 그 한 가지 측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접촉하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이런 태도로 대했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213]

나는 나의 학창시절을 한없이 즐겼다. 사람들이 나에게 반대하든, 나를 지지하든, 무관심하든, 나를 사랑하든, 그 모든 경험들은 아름다웠다.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선생이 되었을 때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동시에 학생들의 관점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218]

그는 말했다. “날 가만 내버려두시오. 당신은 그저 뭘 하든 원하는 대로 하시오.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 왜냐하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건 그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무도 알 수 없소.[224]

나는 나의 일생을 통해서, 만약 조금만 체면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주 쉽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는 그대와 게임을 해왔다. 사회는 그대의 마음 속 높은 자리에 체면을 놓고, 그 반대편에는 사회가 그대로 하여금 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것들을 놓았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그것들을 행하면 그대는 체면을 잃는다. 일단 그대가 “나는 체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때 사회는 그대의 의지에 반대되는 어떤 일도 그대에게 강요할 힘이 없다.[226]

“저는 뭔가 근본이 빠져 있다고 봅니다. 선생은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생은 존경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선생이 존경을 요구한다면 그 선생은 단순히 자신이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를 존경해야 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존경이겠습니까? 한번 보십시오. ‘존경해야 한다.’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존경은 이미 살아 있지 않습니다. 만약 존경이 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때 존경은 거기 없습니다. 존경이 거기에 있을 때는 아무도 존경에 대해 자각하지 못합니다. 존경심은 단순히 생겨납니다. 진짜 선생이 거기 있다면, 존경심은 언제나 생겨납니다.”[233]

고타마 붓다, 중국의 노자,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그들은 모두 동시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전혀 알지 못했다.
통신과 운송의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여러 개의 세상이 있었고 그것은 각각 하나의 세상이었다. 그들은 결코 다른 세상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사람들이 점점 더 서로 가까워짐에 따라 세상은 작아졌다. 이제 붓다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도, 모세도, 공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모두가 매우 지역적인 마음을, 지역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236]

깨어난 사람은 인간을 너무나 깊이 이해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는 모든 인간의 불행한 상태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가엽게 여긴다. 그는 연민이 많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애초에 화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그대를 가엽게 여긴다. 그는 그대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지 않는다.[241]

나는 종교라는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종교의 모든 역사는 악취를 풍길 뿐이다. 그것은 추하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비인간성, 그리고 온갖 사악한 것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되풀이하고 있는 똑같은 짓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244]

나는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매우 간단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단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경전을 사용하자. 다른 사람의 총을 사용한다고 해서 자신의 총알을 넣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총이야 누구의 총이든 상관없다. 총알은 나의 것이다.[253]

그는 말했다. “감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빌어온 지식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해방감을 주었소. 그래서 나는 다시 젊어졌소.” 그는 일흔 살이었다. 그는 말했다. “이제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소. 나는 모든 것을 무릅썼소. 나는 부자였소. 나는 자이나 승려가 되기 위해 그것을 포기했고 이제 나는 자이나교를 포기했고 승려직을 포기했소.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서 완전한 자유를 실험하기 위해서 말이요.”[266]

나의 강의는 정말로 명상을 위해 내가 고안한 장치의 하나이다. 말하기가 이런 식으로 이용된 적은 예전엔 결코 없었다. 나는 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마음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이야기한다.[274]

나의 목적은 참으로 독특하다. 나는 단지 침묵의 간격들을 창조하기 위해 말을 이용하고 있다.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나는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고 관계 없는 어떤 말도 할 수 있다. 나의 목적은 단지 간격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들은 부차적이다. 그 말들 사이에 침묵들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대에게 명상의 일별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그 일별이 그대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대는 이미 그대 자신의 존재를 향해 많이 온 것이다.[276]

나의 성공은 그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공은 그대에게 진정한 명상의 맛을 주는 것, 그래서 그대가 명상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무심의 상태가 단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치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278]

나의 말은 연설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그대에게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에게 무엇이 침묵인가에 대한 하나의 맛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이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임의로 만든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어떤 조건도 없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깨달아야 할 뿐이다.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이야기를 하는 목적의 전부이다.[282]

명상은 빛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려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명상의 세계에서 그대는 어떤 잘못된 일도 할 수 없다.... 종교는 행동을 강조해왔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意識)이다. 그리고 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나의 강의, 나의 말은 다른 어떤 연설의 범주에도 포함될 수 없다. 그것은 명상을 위한 장치이다. 종교가 앗아간 그대 내면의 확신을 다시 가져오기 위한 장치이다. 확신 대신에 그들은 그대에게 죄의식을 주었다. 그 죄의식은 그대를 끌어내리고 그대를 슬픔 속에 있게 한다. 일단 그대에게 위대한 일들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그대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축복을 느낄 것이다. 존재가 그대를 위해 의식의 봉우리들 중의 하나를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그대는 느낄 것이다.
확신을 얻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286]

2부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나는 결코 ‘프리섹스’를 가르치지 않았다. 내가 가르쳐온 것은 섹스의 신성함이다. 나는 섹스가 사랑의 영역에서 법의 영역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단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법적인 매춘이다. 나는 매춘을 반대해왔다. 그것이 법적인 것이든 불법적인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랑을 믿는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들을 서로 사랑하는 한 함께 살 수 있다.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감사하며 헤어져야 한다.[300]

나의 일은 종교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 종교성을 창조하기 위한 운동이다.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바라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303]

나는 세뇌가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나려 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뇌를 씻어 내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와야 한다. 힌두교인들, 이슬람교인들, 기독교인들..... 그들은 모두 나에게 반대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바퀴벌레들을 집어넣고 있고 나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바로 최신식 종교 세탁소이다.[305]

영적인 독립은 독립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독립이다. 모든 다른 독립들.... 정치적, 경제적 독립들은 그저 그런 것들이다. 피상적인 것들이다. 진정한 독립은 그대가 그대의 내적인 성장을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온 사람들은 점점 더 독립적이 되고 점점 더 그들 자신이 되어간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나는 그들을 군중으로 만들고 있지 않다. 나는 그들을 절대적인 개인들로 만들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실천해야 할 이념이나 규율조차 주고 있지 않다. 나는 단순히 경험을 나누고 있다. 그 경험으로부터 그들은 그들 자신의 규율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이것은 스승과 잠재적인 스승들의 모임이다.[306]

이것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세상의 모든 스승들은 이야기들을, 우화들을 들려주어 왔다. 왜인가? 그냥 간단히 진리를 말하면 된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밤은 길고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이야기들이 없다면 그대는 잠에 빠지게 된다.
아침이 오기까지는 그대의 관심을 끌어두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스승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려갈 수는 있다.[308]

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바로 신성(神性)이다.[315]

아차리야란 ‘스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실제로 그것은 오직 자신이 몸으로 체험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의 행동과 생각이 절대적인 조화 속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318]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삶을 향한 나의 접근은 시적인 접근이고 연애소설과 같은 접근이다. 그것은 로맨스이고 상상이 가득한 세계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가 신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가 그대의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기를 바란다. 나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자극이다. 그것은 미묘한 자극이다.... 언젠가 그대도 신이 될 것이다. 나를 신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은 깊은 곳에서 그대 또한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324]

종교는 최후의 사치품이다. 이 사치품에 이르려면 그대는 매우 부자가 되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지성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지 그대는 부유하다. 돈에서 부유하든지 아니면 지성에서 부유하다. 나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 지성이 가난하고 돈이 가난한 사람이 종교적이 되는 것을 결코 한 번도 본적이 없다.[333]

명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놓치고 있다. 명상은 매우 심각해 보이고, 침울해 보이고, 교회와 같은 특성을 담고 있으며, 죽은 사람들이나 혹은 거의 죽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있어 사람은 재미이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삶을 엄청나게 즐긴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그는 이완되어 있다.[337]

심각함은 암(癌)이다. 이제는 의학자들조차도 웃음을 자연이 인간에게 준 가장 강력한 약의 하나라고 말한다. 만약 그대가 병이 들었을 때 웃을 수 있다면 그대는 더 빨리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만약 웃을 수 없다면 심지어 지금 건강하다 해도, 머지 않아 그대는 건강을 잃고 병이 들게 될 것이다....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문득 마음은 사라진다. 선(禪)의 모든 방법론은 어떻게 무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343]

내가 그대에게 말해야 할 진리가 심오하면 심오할수록 나는 더 심한 농담을 고른다. 내가 가장 높은 진리를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면, 나는 가장 저질의 농담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더러운 농담조차도 가리지 않는 이유이다.[345]

붓다는 죽기 전에 그가 25세기 후에 다시 올 것이며 그 이름은 마이트레야(Maitreya)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트레야란 친구라는 의미이다.... 그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돌아옴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는 돌아올 수 없다. 그가 의미했던 것은 25세기 후에는 전통적인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 따위는 시대에 뒤진 것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때 깨달은 스승은 단지 친구가 될 것이다.[357]

진리는 주어질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은 불러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일깨워질 수 있다. 그대 안에서 그것이 일어나는, 더 이상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게 되는 그러한 상황, 그러한 공간이 창조될 수 있다.[359]

나자로가 정말로 죽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것을 역사적인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 이상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리이다. 이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 이상의 그 무엇이다. 영원 속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모두 죽어 있다. 그대들은 모두 나자로와 같은 상황 속에 있다. 그대들은 모두 그대들의 어두운 동굴 속에 살고 있다. 그대들은 모두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다.... 그대는 매일 죽어가고 있다. 그것을 마치는 데는 70년, 80년, 90년이 걸린다. 매순간, 그대 안의 무언가가 죽는다. 그러나 그대는 그 모든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스승의 역할은 그대를 부르는 것이다. “나자로야, 동굴에서 나오너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에서 나오너라!”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는 그대 안의 무언가를 휘저을 수 있다. 그는 불꽃에 불을 붙이는 그대 안의 어떤 과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 그대가 진리이다. 단지 너무나 많은 먼지가 그대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361]

스승들은 진리를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을 가르칠 방법이 없다. 그것은 경전을 넘어선, 말을 넘어선 전이(轉移)이다. 그것은 전이이다. 그것은 그대 안의 에너지를 자극하는 에너지이다. 그것은 일종의 동시성이다.[364]

나비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나비들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는 것을 보며, 그들의 아름다움, 그들의 색깔을 보며 “나도 저들과 같아질 수 있을까?” 하는 깊은 갈망이, 열망이 배추벌레 안에서 일어난다. 바로 그 순간, 배추벌레는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다.[365]

그는 철학으로부터, 종교로부터, 신학으로부터 그대를 해방시킨다. 그는 한마디로, 말(語)의 세계로부터 그대를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말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랑’이라는 말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어서 사랑이 말이 아닌 경험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그대는 ‘신’이라는 말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어서 신이 말이 아닌 경험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신’이라는 말은 신이 아니다. 그리고 ‘불’이라는 말은 불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도 역시 사랑이 아니다.
스승은 그대를 말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는 온갖 상상의 철학들로부터 그대를 해방시킨다. 그는 말없는 침묵의 상태로 그대를 인도한다.
종교와 철학이 실패한 점은 그것이 모두가 진정한 경험에 대한 대용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계하라![366]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순간 탄생한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탄생한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368]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해 그대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준다.[371]

내가 꼭두각시 부리는 사람이 없다고, 신이 없다고, 성자가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이 모두 쓰레기라고 말할 때, 나는 그대에게 전적인 자유를 주려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그대가 절대적으로 책임을 지게 하려하고 있다. 이 자유를 즐겨라. 그대가 그대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이 위대한 자각을 즐겨라. 그때 그대는 내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되는 것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경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이 되는 것은 해방되는 것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372]

세상을 포기하고 은둔할 필요는 없다. 오직 겁쟁이들만이 세상을 포기한다. 세상 속에 살라. 세상을 경험하라. 세상은 하나의 학교이다. 그대는 히말라야 속에서 성장할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세상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374]

나는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부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 이 손가락은 사라질 것이다. 달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탐구는 계속될 것이다.[376]

PART THREE 유산

예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며,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결코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종교적이었다. 그들은 독단적이지 않았다. 세상에는 300개의 종교가 있다. 이것은 정말로 어이없는 일이다. 만약 진리가 하나라면 어떻게 300개의 종교가 있을 수 있는가? 과학은 하나뿐인데 종교는 300개?[384]

나는 단지 그대에게 말한다. “이것이 그 창문이다. 이것을 열어라. 그러면 그대는 별이 가득한 밤을 볼 것이다.”
그러나 그 별이 가득한 밤은 형용할 수가 없다. 일단 열린 창문을 통해 그것을 보고 나면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보는 것(seeing)이 아는 것(knowing)이다. 그리고 보는 것은 또한 되는 것(being)이 되어야 한다. 그 밖에 다른 믿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385]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지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 나 자신의 제안을 말하자면 ‘과학’이라는 말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름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앎’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질의 차원 안에서의 앎을 그대는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의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意識)의 차원 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과학만으로 완벽하다. 그것은 똑같은 탐구이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외부 과학과 내부 과학의 통합이며 동시성을 이룰 하나의 최상의 과학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처럼 많은 종교들은 필요치 않아질 것이고...
어떤 것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것이 과학의 근본이다. 그것이 진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다.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이것이 앎이다. 그리고 이 앎이 인간을 붓다로, 깨달은 자로 변형시킨다. 이것이 모든 인간 성장의 목표이다.[386, 387]

종교에 하나의 양자도약(量子跳躍)을 가져온 공로는 고타마 붓다로부터 25세기 전의 아디나타(Adinatha)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처음으로 신(神)이 없는 종교를 역설했다. 그것은 엄청난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신이 없이 종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387, 388]

기독교에 따르면 신은 겨우 예수가 탄생하기 4004년 전에 인간을 창조했다. 그러니 영원 동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따라서 유일하게 남는 것은 그가 변덕스럽다는, 괴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인도 필요 없고 욕망도 필요 없다. 단지 하나의 변덕일 뿐이다.[389]

아디나타는 자이나교의 24대 조사(祖師) 중 첫 번째 인물이다.[390]

아디나타는 신을 제거했지만 공백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붓다는 그 공백을 명상으로 채웠다. 아디나타는 신이 없는 종교를 만들었다. 붓다는 명상적인 종교를 만들었다.
명상은 붓다의 기여이다. 중요한 것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더 고요해지고, 더 이완되며, 더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한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자기 자기의 의식의 중심은 전 존재의 중심이다.[391]

시작은 좋았다. 붓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아실현에 도달한, 깨달음에 도달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붓다가 죽고 제자들도 죽고 나자, 사람들이 명상을 하도록 도와야 할 바로 그 조직 스스로가 성직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리고 명상을 하도록 돕는 대신에 불상(佛像)과 종교적 의식들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붓다는 또다른 신이 되었다. 아디나타는 신을 제거했고 붓다 역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성직자들은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창조자로서의 신은 없을지 몰라도 붓다가 신격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붓다를 예배하고, 붓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붓다의 계율을 따르며, 그의 교리에 따라 삶을 사는 것 뿐이다. 조직 속에서, 모조품 속에서 붓다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근본적인 것을 잊어버렸다. 그것은 명상이었다.
나의 모든 노력은 종교 아닌 종교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신을 중심에 가지고 있는 종교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았다. 우리는 신 없는 종교라는 아디나타의 혁명적인 발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았다. 우리는 붓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았다. 그것은 신 없는 조직화된 종교였다.
이제 나의 노력은 그들이 신을 해체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해체하는 것이다.[393]

나의 노력은 성직이라는 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성직은 신과 함께 남아 있었고 신이 없는 종교에도 남아 있었다. 이제 유일한 실은 우리가 신과 종교 모두를 제거하여 어떤 성직의 기능성도 없게 하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의 성장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는다.[394]

신이 사라졌고 이제 그 빈자리가 채워져야 함을 본 것은 붓다의 통찰력이다. 그대로라면 그 빈자리는 인간을 파괴할 것이다. 그는 명상을 가져왔다.....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조직이 없어야 한다는 것, 성직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 신이 사라진 것처럼 종교 또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짜 문제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신은 성직자의 날조물이다. 성직자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가 신을 버린다 해도 성직자가 언제나 새로운 예식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낼 것이다.[396]

그대가 여기 있고 모든 개인이 여기 있다. 전 존재가 그대의 것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단지 침묵하고 존재의 소리를 듣는 것뿐이다. 어떤 종교도 필요치 않다. 어떤 신도 필요치 않다. 어떤 성직자도 필요치 않다. 어떤 조직도 필요치 않다.
나는 절대적으로 개인을 신뢰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이런 식으로 개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것이 제거될 수 있다. 이제 그대에게 남은 것은 명상의 상태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전적인 침묵의 상태를 의미 할 뿐이다. 명상이라는 말을 무거워 보인다. 단지 단순한, 순수한 침묵이라고 부르는 편이 났다. 그러면 존재는 그 모든 아름다움을 그대에게 열어줄 것이다.
그것이 성장해감에 따라 그대도 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가 그대의 가능성의 정상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대는 그것을 불성(佛性), 깨달음, 바그와타, 즉 신선(神性), 그 밖에 무엇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이름이 없다. 따라서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다.[399]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단지 명상 속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에다[407]

명상의 112가지 방편들이 있다.(탄트라 비전) 그 방편들은 만 년 전에 발견되었다.[411]

(명상을 할 때) 10분 동안은 강렬한 호흡이다....두번째 단계는 내면에 깨끗함이 자리 잡도록 모든 것을 밖으로 내던지는 카타르시스의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후’하는 소리를 내는 단계이다.... 네 번째 단계에서 그대는 시체처럼 눕는다. 마치 그대가 거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절데적으로 고요하게..... 그대는 그대의 몸이 완전히 이완되도록, 마치 죽은 것처럼 내버려둔다.[420]

붓다의 시대에는 그처럼 동적인 방편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단순했고 더 진실했다. 그들은 더 진짜 삶을 살았다. 지금 사람들은 매우 억압된 삶, 매우 가짜의 삶을 산다. 웃고 싶지 않을 때 그들은 웃는다. 화내고 싶을 때 그들은 동정하는 체 한다. 사람들은 거짓스럽다. 삶의 모든 양식 자체가 거짓스럽다. 모든 문화가 거대한 거짓덩어리와 같다. 사람들은 삶을 살지 않는다. 단지 연기를 한다. 그들의 마음속에 많은 것이 미진하게 남는다. 많은 불완전한 경험들이 계속 모이고 쌓여간다.[424]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점을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을 사라졌다. 오지 그대만이 있다. 다 s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에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순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425]

문제는 히틀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무리 속에, 군중 속에 있을 때 어떤 느낌을 받느냐의 문제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짐에서 벗어나는 경험이었고, 때문에 이 사람은 따를 가치가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옳든 그르든, 논리적이든 비논리적이든 바보 같든.... 그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 너무나 지루해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흡수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서양에서 파시즘, 나치즘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집단 광기들이 가능했던 이유이다.
동양에서는 오직 일본만이 뒤를 따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은 동양의 독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서양적인 나라이다.[440]

서양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싫증이 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다리를 원한다. 사회와 교통할 수 있는, 타인들과 교통할 수 있는 법을 원한다. 다리를 창조하는 법을, 타인에게로 움직이는 법을 원한다. 그래서 그대 자신을 잊을 수 있게 말이다. 동양의 사람들은 사회에 싫증이 나 있다. 그들은 너무 오래 사회와 함께 살았고 사회는 너무나 도처에 있다. 때문에 그들은 자유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자유로워지고 싶거나 침묵하고 싶을 때면 그들은 언제나 히말라야로 달아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의 방편은 하나의 종합체이다. 다이나믹 명상의 첫 단계에서 그대는 무리의 일부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룹이 사라진다. 그대는 혼자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양은 서양을 향해 돌아서고 있고 서양은 동양을 향해 돌아서고 있다. 머지 않아 동양도 서양도 없어질 것이다. 하나의 세계만이 있을 것이다.[443]

비그얀 브하이라브 탄트라(Vigyan Bhairva Tantra)가 쓰여졌던, 그 112가지 기법이 완성된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이었다.[449]

다이나믹 명상과 쿤달리니 명상, 그리고 그 밖에 다른 명상법들은 모두가 정화적인 방편들이다. 그 기본은 정화이다.[449]

처음으로 금욕이 영적인 현상이 된 것은 붓다와 마하비라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붓다와 마하비라 이전에 우파니샤드와 베다의 모든 선지자들은 결혼한 사람들이었다.[456]

이 지구는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459]

< 조르바 붓다 : 완전한 인가 >
인도인들은 생각한다. ‘서양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저 불안과 고뇌, 긴장을 보라. 우리는 비록 가난하지만 내적인 만족감이 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만족해 있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그들은 불만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만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부유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부유함 없이는 아무도 자신의 내적인 불만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증거는 충분하다.[465]

서양은 명상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피할 방법이 없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서양인들의 마음에 대한 장악력을 잃어가는 이유이다.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도 명상의 과학을 발전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극히 평범한 종교로 남았다. 유대교도 마찬가지이다.[469]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인도의 종교가 아닌 이 세 종교는 모두 가안 속에서 탄생했다. 그 종교들은 명상 기법들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종교들은 가난한 자들의 종교로 남았다.
이제 서양은 부유해졌고 불균형이 생겼다. 서양의 종교들은 가난 속에 탄생했다. 그 종교들은 부유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 종교들은 유치해 보인다. 그것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동양의 종교들은 부유함 속에서 탄생했다. 그것이 바로 서양인들의 마음이 점점 더 동양의 종교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이다. 그렇다. 붓다의 종교는 엄청난 충격을 지니고 있다. 선(禪)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왜인가? 선은 부로부터 탄생했기 때문이다.[469]

인도는 가난한 나라이다. 사실 가난한 인도인들은 기독교로 개종되고 있다. 부유한 미국인들은 불교로, 힌두교로, 베단타로 개종되고 있고 인도에서도 제일 가난한 불가촉천민들은 기독교인이 되고 있다. 요점을 알겠는가? 이 종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종교들에는 미래가 없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전 세계는 부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470]

국가의 시대는 갔다. 분열의 시대가 갔다. 정치가들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인류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그 단계는 오직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하는 단계, 오지 하나의 인류만이 존재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그때 엄청난 에너지가 풀려나올 것이다.
동양은 보물들을, 종교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서양은 과학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 둘이 만날 수 있다면, 바로 이 세상이 천국이 될 수 있다. 이제 다른 세상을 바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기 이 지상에 천국을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세상을 창조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것이다.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
그것이 내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이곳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은 새로운 인류가 잉태되고 탄생할 수 있는 자궁이다.[474]

붓다는 반쪽이다.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붓다는 명상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다면 서로간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정말 만난다면 통역을 위해 나와 같은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사이에 의사소통이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두 사람 모두에 대해서 진실하지 못한 방식으로 통역을 해야만 할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왕국’을 이야기 할 것이고 나는 그것을 니르바나로 바꿔줄 것이다. 그러면 붓다는 이해할 것이다. 붓다는 ‘니르바나’를 이야기 할 것이고 나는 예수에게 ‘하느님의 왕국’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이해할 것이다.
이제 인류는 전체적인 시야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절반의 시야만으로 살아왔다. 과거에는 그것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성년에 이르렀다. 나의 산야신들은 그들이 명상과 기도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상과 사랑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한껏 침묵하면서도 한껏 춤추고 축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들의 침묵은 또한 그들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축제는 또한 그들의 침묵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제껏 어떤 제자들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가장 힘든 임무를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 극단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만남 속에서 모든 양극들은 용해되고 하나가 될 것이다. 동양과 서양, 남자와 여자, 물질과 의식, 이 세상과 저 세상, 삶과 죽음, 이 하나의 만남을 통해서 모든 양극들이 만나고 용해될 것이다..... 이 만남은 새로운 인간, 조르바 붓다(Zorba the Buddha)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이 신 인간을 부르는 나의 이름이다. 그리고 각각의 나의 산야신들은 양극을 함께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유동성을, 그러한 유연함을 갖추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때 그대는 전체성의 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체성을 아는 것은 신성한 것을 아는 유일한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478, 479]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의 메시지는 신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이다.[479]

신인간은 현실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초세속적일 것이다. 신인간은 자신의 전체성을 받아들일 것이며 어떤 내적인 분열도 없이 온몸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의 도덕성은 부도덕성과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립을 모를 것이다. 그는 이중성을 초월할 것이다. 그는 분열적이지 않을 것이다.[481]

나의 신인간의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고타마 붓다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인간은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는 감각적이면서 영적일 것이다. 육체적이면서, 전적으로 육체적이면서, 육체 속에서, 감각 속에서, 육체와 육체가 가능케 하는 모든 것들을 즐기면서, 동시에 엄청난 의식(意識)이, 엄청난 주시(注視)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이며 동시에 에피쿠로스일 것이다.[483]

나의 작업은 신인간이 탄생할 수 있는 하나의 붓다장 에너지장을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신인간을 받아들이지 않을 세상 속으로 신인간이 탄생하도록 돕는 산파일 뿐이다. 신인간은 이해를 지닌 사람들의, 어떤 혁명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때는 무르익었다. 이처럼 무르익었던 때는 이제껏 없었다.... 이제 신인간은 스스로의 탄생을 선언할 수 있다. 이제 그 극적인 돌파가 가능해졌다.[484]

나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가능하면 불가능할수록 그것은 더 해 볼만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때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실패했고 과학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때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동양이 실패했고 서양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뭔가 더 높은 통합체가 필요하다. 동양과 서양이 만날 수 있고, 종교와 과학이 만날 수 있는 통합체가 필요하다.[486]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시, 음악, 조각.... 일단 우리가 이 신인간을 세상에 내놓고 나면 지구는 처음으로 마땅히 되었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487]

PART FOUR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이제 나는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작업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준비시켜 밖으로 내보낼 것이다. 나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여러 장소들로의 이동을, 나는 만 명의 사람들을 내보냄으로써 가능케 할 것이다.[498]

나에게 있어 산야스란 ‘나는 나에게 주어져온 모든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완전히 씻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의지해서, 새롭고, 젊고,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채로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 라고 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야스는 다름 아닌 그대의 순수함으로의 입문이다.[501]

나는 내가 전국을 여행하는 것을 중단하기 전까지는 절대 그것을 선언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살해당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 있지 않았을 것이다.... 거의 20년 동안 나는 나의 깨달음에 대해 절대적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나는, 이제 나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사람들을 모았다고 판단될 때에 그것을 선언했다. 이제 나만의 작은 세상을 창조할 수 있고 더 이상 군중과 대중과 어리석은 폭도들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에야 그것을 선언했다.[510]

록, 재즈, 그 밖에 혼돈스런 음악들은 그대 안의 무언가가 밖으로 나오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바로 억압된 성욕이다. 나는 그대의 모든 억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음악은 그대의 억압된 성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유사점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대의 억압된 성에만 관심이 있지 않다. 나는 성적인 것이든 성적인 것이 아니든, 그대의 모든 억압에 관심이 있다.
마음의 상태는 신경증적이다. 전 사회가 병들어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처럼 혼돈명상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대 자신을 풀어 놓아라.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 상황이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라. 그것들을 끄집어내라 그대 자신을 그러한 것들로부터 풀어놓아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라. 그 과정에서 음악은 도움이 될 것이다.[511]

만약 내가 그대에게 한 시간을 준다면 그대는 쓰레기 같은 소리를 지껄인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일 분을 준다면 그대는 정확히 필요한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512]

<흰 구름의 길>
흰 구름은 바람이 이끄는 대로 어디든 간다. 흰 구름은 저항하지 않는다. 싸우지 않는다. 흰구름은 정복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 위를 떠다닌다. 그대는 흰 구름을 정복할 수 없다. 그대는 흰 구름을 패배시킬 수 없다. 흰 구름은 정복할 마음이 없다. 그것이 바로 그대가 흰 구름을 패배시킬 수 없는 이유이다.
일단 그대가 목표에, 목적에, 운명에, 의미에 못 박히게 되면, 일단 그대가 어딘가에 도달하겠다는 그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때 문제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패배할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다. 그대의 패배는 존재 자체의 본성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다.
흰 구름은 갈 곳이 없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어디로든 움직인다. 모든 차원이 흰 구름에 속해 있고 모든 방향이 흰 구름에 속해 있다.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전적인 받아들임 속에 있다. 때문에 나는 나의 길을 ‘흰 구름의 길’이라고 부른다. 흰 구름의 길은 길 없는 길이다. 흰 구름은 움직인다. 그러나 고정된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흰 구름은 마음 없이 움직인다.
따라서 나는 흰 구름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들 또한 하늘을 떠다니는 흰 구름들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갈 곳도 없고,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단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머무는 것, 그것으로 완벽하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이념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의무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이것이 되라, 저것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의 모든 가름침은 단순히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무엇이든지, 그대의 상태 그대로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달성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흰 구름이 될 것이다.[513]

이것이 나의 약속이다. 나는 거기 그 빈 의자에 앉아 있을 것이다. 빈 의자는 실제로 비어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점잖게 행동하라! 의자는 비어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나의 비육체적인 존재와 접촉하는 법을 배우는 편이 낫다. 그것은 더 깊고 더 친밀한 접촉이며 연결이다.[517]

그대는 서서히 독자적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점점 더 그대 자신을 신뢰해야 한다. 나의 도움이 하나의 의존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대가 정말로 더 깨어 있고, 그대 자신의 삶과 그대 가슴의 소리를 더욱 신뢰하게 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520]

나에 대한 신뢰는 그대에게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대는 언제나 어떤 외부의 대리인에 의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 될 수 있고, 결국 그대가 혼자가 되거나 나에게서 멀리 떠났을 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될 것이다.[521]

따라서 서서히 그대는 그 다리를 볼 수가 있고, 계속해서 그대 자신으로부터 그대의 진정한 자아로 움직여갈 수 있다. 나에 대한 필요는 점점 더 줄어든다. 어느날 그대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이제 그대는 어른이 된 것이다. 그대는 성숙하고 원숙해진 것이다.[521]

내가 선교사가 되지 말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 그대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타인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그를 개종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것뿐이다. 그것은 옳지 않다. 결코 사람을 어떤 것에 대한 수단으로도 이용하지 말라. 왜냐하면 각각의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523]

모든 위험성들을 자각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선교사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단지 나누고 그것에 대해 잊어버려라. 씨를 뿌리고 계속 가라. 그 씨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뒤돌아보지 말라. 그들의 때가 오면, 봄이 오면, 그 때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524]

나는 도교의 비밀, 탄트라의 비밀, 요가의 비밀, 수피들의 비밀, 선가(禪家)의 사람들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세계의 거의 모든 전통들 속에서 살아 왔다. 나는 여러 생 동안 방랑자였다. 나는 여러 꽃들로부터 많은 꿀을 모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가 떠나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내가 모아온 모든 꿀을 나는 그대와 나누고 싶다. 그래서 그대도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고, 그것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은 매우 비밀스런 작업이 될 것이다.... 그 작업은 전적으로 헌신적인 사람들만을 위한 일이 될 것이다.... 진짜 일은 완전한 비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오직 나와 그대 사이의 일이 될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아름답고 위대한 일들은 언제나 내적인 탐험을 위해 에너지를 한데 모았던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나의 코뮨은 내적인 탐험을 위한 신비학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모험이며 가장 위대한 춤이다.[538, 539]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565]

나중에야 나는 나의 증상들을 검토하고 진단을 내려준 영국의 독약 전문가들을 통해 내가 탈륨(Thallium)이라는 특정 독약을 주입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피를 통해서도, 소변을 통해서도 검출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사라진다. 나는 그 독약의 증상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 독약이 사라질 때, 그것은 일정한 병을 육체에 남긴다. 이 독약은 정치범들에게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많은 양을 쓰게 되면 그 사람은 즉시 죽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12일을 원했던 이유이다. 내가 그들의 감옥 안에서 죽지 않도록 매번 적은 양을 주입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감옥에서 죽으면 그들은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570]

내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켜본 바로는.....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이다. 그들의 헌법은 단지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일 뿐이다. 그 나라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범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571]

왜냐하면 그 적들에게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단지 시대에 뒤진 낡고 부패한 생각들뿐이다. 약간만 밀어붙이면 그들은 붕괴할 것이다.
그들은 죽은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는 태어나지 않은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리고 존재의 결정은 언제나 생명을 향해 있다.[574]

나는 그대에게 단지 맛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그 맛을 알고 나면 그때 그대는 그것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때 그대를 막을 방법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을 보는 것이다.
그대는 말들을, 아름다운 말들을 들어왔다. 그러나 그 말들은 그대를 광적인 탐구로 인도하지 못했다. 나는 그대에게 단지 말뿐만이 아닌 하나의 만족을 주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그대에게 약간의 맛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586, 587]

말은 많이 주었다. 그것은 준비였다. 씨앗들은 많이 뿌렸다. 그리고 이제 봄이 매우 가까웠고 그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전체적이 되어야 한다. 강렬하게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나의 침묵 속에, 나의 기쁨 속에 함께 있어야 한다.[587]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발견하든, 그것은 그대의 현실이다. 그것은 정화될 수 있다. 그것은 사라질 수 있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뭔가를 행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589]

나는 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변형시키기를 바라고 그들을 통해 이 아름다운 행성에 진정한 문명과 인류애가 구현되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593]

나는 그대들 모두가 나와 같은 행복에, 나와 같은 지복에, 나와 같은 무아경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그 무아경은 이미 나의 심장박동이 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전 우주의 심장박동이기도 하다.[595]

나는 삶을 향한 목표에 모든 것을 바치는 ‘과학과 예술의 세계 아카데미’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 궁극적인 혁명은 하나의 세계정부이다.... 하나의 세계정부가 있게 되면 어떠한 육군도, 공군도, 해군도 필요하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삶에 헌신하기 위한, 전 인류에 헌신하기 위한 봉사단체로 변형될 수 있다.[598]

나는 치유될 수 없는 몽상가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나의 삶에서 꿈꾸었던 모든 것을 나는 해냈다.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존재계에 제안하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600]

나는 선(禪)을 가리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종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선은 종교가 아니라 단지 종교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창시자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가 없다. 사실 그것은 그대에게 가르칠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류의 전 역사 속에서 일어난 가장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어있음을 즐기며 무(無) 속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선은 앎이 아닌 무지 속에서 충족된다. 그것은 세속과 신성함을 구분하지 않는다. 선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604]

한 일본인 예언자가, 고타마 붓다가 오쇼를 수레로 사용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오쇼는 이것이 사실임을 밝히고 바그완이라는 이름을 버릴 것임을 발표한다.[607]

고마타 붓다는 어떤 후계자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와 같았다. “나의 조상(彫像)을 만들지 말라. 나의 말들을 모으지 말라. 나는 숭배되어야 하는 상징이 되고 싶지 않다. 나의 가장 깊은 열망은 그대들이 모방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불교도가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의 잠재력은 붓다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고타마 붓다가 25세기 전에 했던 예언을 상기시켜 주어야 하겠다. “내가 다시 오게 될 때, 나는 여자의 자궁을 통해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비슷한 의식(意識)과, 같은 높이와, 같은 열린 하늘을 지닌 사람 안에 거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나는 ‘친구’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609]

이 특별한 방문이 있은 지 5일째 되던 밤, 오쇼는 명상홀에 나와 새로운 발표를 한다. 고타마 붓다가 떠났으며 손님과 주인의 생활방식의 차이가 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610]

나는 말했다. “당신은 돌아올 것이라는 당신의 예언을 충족시켰소. 나흘이면 충분하오. 나는 당신에게 작별을 고하겠소. 그리고 이제 당신은 지구 주위를 방황할 필요가 없소. 단지 궁극의 푸른 하늘로 사라지시오.
나흘 동안 당신은 당신이 원했던 일들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보았소. 그리고 나는 시대와 필요에 맞게 그 일을 하고 있소. 나는 무엇을 지시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소. 나는 자유로운 개인이고. 나의 자유와 사랑으로써 나는 당신을 손님으로 받아들였소. 하지만 주인이 되려고는 하지 마시오.”[611]

1989년 4월 10일 저녁 : 오쇼는 그의 비서에게, 그가 강의를 끝내면서 그의 에너지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이 아홉 달을 자궁 속에서 보내면서 세상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과 똑같이, 죽기 아홉 달 전에 에너지가 다시 죽음을 준비하는 시기로 들어간다고 설명한다.[615]

1990년 1월 9일 : 오후 5시 오쇼는 육체를 떠난다.

오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 [620]

에필로그 : 1990 - 현재

존재에 대한 나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내가 하는 말에 어떤 진리라도 담겨 있다면 그것은 살아남을 것이다. 나의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단지 그 횃불을 들고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대부분의 나의 산야신들이 느끼게 될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사랑과 같은 특질, 그 주위에는 어떤 교회도 생겨날 수 없다. 깨어났음과 같은 특질, 그것은 그 누구의 독점물도 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축하, 기쁨, 그리고 신선하고 어린아이 같은 눈을 키워가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자신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

명상 리조트에 대해 : 오쇼 코뮨 인터내셔널

매년 거의 20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며, 그들 중 만 5천 명 이상이 워크숍이나 그룹 프로그램 등에 참여한다. 1990년에 이곳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총 33개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오쇼의 가르침과 명상의 영향을 반영하듯 100개 나라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그들 중 60퍼센트는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다.[623]

자세한 내용은 www.osho.com 에서 알아볼 수 있다.[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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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01 19:29:01 *.36.210.11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오직 그대 존재의 침묵만을,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신성(神性)만을,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religiousness)의 시작이다.[5]

: 진짜 멋지당.

아차리야란 ‘스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실제로 그것은 오직 자신이 몸으로 체험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의 행동과 생각이 절대적인 조화 속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318]

: 아차리야~ 이거 우리들의 구호로 하면 재밌겠당.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문득 마음은 사라진다. 선(禪)의 모든 방법론은 어떻게 무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343]

: 반가운 인사를 나무며 웃을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들의 인사를 보고 사부님의 입이 귀에 걸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웃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목격한 광경을 보고 절로 눈길을 따라가며 웃으시는 무뇌의 웃음. ^-^ 크그그극.

진짜 문제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신은 성직자의 날조물이다. 성직자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가 신을 버린다 해도 성직자가 언제나 새로운 예식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낼 것이다.[396]

: 어쩜... 동감.(오쇼는 나의 친구? ㅋ)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
그것이 내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이곳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은 새로운 인류가 잉태되고 탄생할 수 있는 자궁이다.[474]

: 25~6년 전 그를 알았더라면 나도 그를 찾아 가고 싶었겠는 걸.
걸스카우트 행사를 하며 지구촌이 다 함께 하나라는 의미로 '우리는 하나'라는 슬로건을 내걸 던 때가 언제였더라. 겨우 대학 1,2학년 쯤인 것 같은데...

나는 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변형시키기를 바라고 그들을 통해 이 아름다운 행성에 진정한 문명과 인류애가 구현되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593]

: <인간적인 길>을 쓴 자크아탈리도 오쇼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아마도... .

나는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매우 간단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단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경전을 사용하자. 다른 사람의 총을 사용한다고 해서 자신의 총알을 넣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총이야 누구의 총이든 상관없다. 총알은 나의 것이다.[253]

: Wow! 멋지다.

“감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빌어온 지식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해방감을 주었소. 그래서 나는 다시 젊어졌소.” 그는 일흔 살이었다.[266]

:영생의 불로초가 여기 있었네. 육신만 사라질 뿐 영혼은 영원히 머무는 젊음이라...

나의 강의는 정말로 명상을 위해 내가 고안한 장치의 하나이다. 말하기가 이런 식으로 이용된 적은 예전엔 결코 없었다. 나는 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마음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이야기한다.[274]

나는 결코 ‘프리섹스’를 가르치지 않았다. 내가 가르쳐온 것은 섹스의 신성함이다. 나는 섹스가 사랑의 영역에서 법의 영역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단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법적인 매춘이다. 나는 매춘을 반대해왔다. 그것이 법적인 것이든 불법적인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랑을 믿는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들을 서로 사랑하는 한 함께 살 수 있다.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감사하며 헤어져야 한다.[300]

: 그러려면 그에 수반된 갖가지 부조리와 이기심도 함께 태워버려져야 한다. 공평하지 않고는 사랑도 없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조잡한 성적 유희와 탐닉과 타락에 빠져들지 않을 자각부터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보상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 불이익을 당할 자가 다소나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내가 너무 경제관념에 자로 잡힌 것일까? 아니다. 빵 없이는 단 하루도 못 견디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문제는 갖고 싶은 것만을 탐욕스럽게 소유하려드는 막무가내식 집착과 욕심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가 대게는 없다는 것이다. 현실도 이렇게 매력적으로 깔끔하게 처리되어 질 수 있다면 그 많은 인간들이 여태 그냥 있었을까? 모든 소유와 집착을 떠나고 굶는 일과 불편이 없으며 임신과 양육에 대해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사랑을 위해 떠나자고 제의 하는 쪽이 남아있는 쪽에게 공정한 처사와 배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런가?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삼가하고 만다. 그러한 마음이나 상태를 즐기다 돌아올 뿐이다. 인간은 교활하리 만큼 영악스럽고 현명하다. 자기 외로울 짓과 위험부담을 껴안을 만큼 무모한 열정을 받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탐닉으로서 만족하려 든다. 그건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그래봐야 진공의 상태로 살자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인간들의 무리 속에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어울림과 상생이란 절제 없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배려와 측은지심 스스로가 자가당착적 모순이라고 말한 연민을 어찌할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으로 선택과 집중의 과학적이고 논리적 방법으로서 우선 순위를 매길 것인가? 사랑하지 않거나 못함이 아니라 더 많은 문제를 풀지 못한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오쇼의 제안은 방법이 될 수 있을 지 모르나 기존의 평화를 유지하는 정도의 모색이 되지는 못한다. 동물적이고 야누스적 야성의 인간을 식물로 살아가라 이르는 말과도 다르지 않게 생각된다. 균형이 없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 것인가? 무공해라면 혹시 가능할까? 아니 세상을 뭉개고 다시 태초의 아담과 이브적 일시적 유지는 그나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때에 우리는 꽃이나 나무가 되어 이전의 상태와 음미하며 비교하고 있을라나? 재밌겠당. ㅋㅋㅋ

그러나 사랑만을 위한 사랑 해볼 수 있다면 좋겠지? ㅎㅎㅎ

혹시 뱃속의 쌍둥이들은 자궁 속에서 잠시 이런 삶을 누려볼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순리대로 일어나고 오직 사랑만이 필요했으니까 말이지. 천사들아, 말 좀 해다오.

지구는 자궁이 되고 사회는 양수가 되고 개인에게는 영양분과 배설만이 필요하고 옷도 집도 더는 필요치 않고 외부적 침략만 없다면, 그리고 다만 크지 않고 쭈그린 자세가 아닌 좀 더 넉넉해진 풍만한 크기에서 수명만 연장되어 살아갈 수 있다면 깨끗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사랑만으로 사랑은 성장하거나 유지 되지 않는다. 내 경험은 그렇다. 오, 우주의 신비여!

단적인 예 하나, 공인중개사인 그녀는 항상 자신이 잘났다고 자랑한다. 모든 복을 다 갖추었노라 부러운 것이 없노라 누구에게도 절대 지지 않고 행복하다고 눈을 내리깔고는 배를 탕탕 튀기곤 한다. 그래서 그녀는 심심하다.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그녀는 모든 돈을 긁어모아 일확천금을 위해 주식에 투자한다. 요즘 같은 시황에 며칠 새 피골이 상접해 있다. 결혼생활을 잘하고 있노라 은근히 뽐을 내며 자신은 어미 속을 태우지 않는 자식이라고 큰 소릴 치며 말하는 그녀는 친정에 가서 신용으로 산 주식의 값을 부랴부랴 치르고는 생병을 앓고 있다.

세상이 보다 사랑으로 가득찰 수 있다면이야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좋겠지만 사랑의 감정이 회복된다고 해서 모든 것도 따라서 해결될 수 있는가? 오쇼 자신이 충분했더라면 명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세상의 변혁을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사라질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좀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나의 일은 종교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 종교성을 창조하기 위한 운동이다.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바라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303]

: 좋아 졸아. 이 표현 딱 좋아.

이곳은 바로 최신식 종교 세탁소이다.[305]

: 오쇼는 진공청소기로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무뇌로 만들어 무아를 만나게 한다?


진정한 독립은 그대가 그대의 내적인 성장을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절대적인 개인들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이것은 스승과 잠재적인 스승들의 모임이다.[306]

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바로 신성(神性)이다.[315]

: 나는 이 말 '신성'을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읽었는데 여기서 나온 것이로군.

아차리야란 ‘스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실제로 그것은 오직 자신이 몸으로 체험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의 행동과 생각이 절대적인 조화 속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318]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삶을 향한 나의 접근은 시적인 접근이고 연애소설과 같은 접근이다. 그것은 로맨스이고 상상이 가득한 세계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가 신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가 그대의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기를 바란다. 나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자극이다. 그것은 미묘한 자극이다.... 언젠가 그대도 신이 될 것이다. 나를 신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은 깊은 곳에서 그대 또한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324]

: 나도 내가 신이 되길 바란다. ㅋ

종교는 최후의 사치품이다. 이 사치품에 이르려면 그대는 매우 부자가 되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지성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지 그대는 부유하다. 돈에서 부유하든지 아니면 지성에서 부유하다. 나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 지성이 가난하고 돈이 가난한 사람이 종교적이 되는 것을 결코 한 번도 본적이 없다.[333]

: 이 구절에 이르니 니체가 떠오른다. 그를 읽으며 우리는 결핍이냐 과잉이냐를 생각했더랬다. 어느 것이 인간을 더 자극 혹은 의욕을 불러일으킬까? 다시 읽어봐야겠당. 막힌다... 우선은 오쇼의 주장에 동감한다. 왜냐하면 보편적 시각과 균형감에서 그렇다. 말하자면 억지로가 아닌 자연스러움의 유발을 생각해 볼 때.

명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놓치고 있다. 명상은 매우 심각해 보이고, 침울해 보이고, 교회와 같은 특성을 담고 있으며, 죽은 사람들이나 혹은 거의 죽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있어 사람은 재미이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삶을 엄청나게 즐긴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그는 이완되어 있다.[337]

: 싸부님 싸부님 우리들의 싸부님!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343]

: 동양의학에서 웃음은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 심장의 은연 중 수축과 이완 사이에 생명의 찰라적 氣가 통하는가? 입이 열리지만 기실은 마음을 여는 것인가? 그 순간 머리는 정지 되는가? '쿵'/수축 과 '덕'이완 사이의 찰라적 간극 동안에 우주의 빛이 쏟아져 들어가는가? 하여 웃음은 달보다는 태양을 닮았을까? ^-^ 이글이글~

그래서 스트레스 만땅인 셀러리 맨들이 멍청한 자세로 하루의 시름을 잊고 TV 오락프로 앞에 앉아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웃어 재끼는 것인가? 무심히 보고 있다가 저도모르게 순간 혹~하고 빨려들어가지 않는가 말이다.

마이트레야란 친구라는 의미이다....

: 여기 또 하나의 구호가 있네. 위하여! 대신 마이트레야~ 이렇게 외쳐대면 미쳤다고 할라나? 흥흥흥. [357]

스승의 역할은 그대를 부르는 것이다. “나자로야, 동굴에서 나오너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에서 나오너라!”

그대가 진리이다. [361]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다.[365]

종교와 철학이 실패한 점은 그것이 모두가 진정한 경험에 대한 대용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계하라![366]

: 상당히 의미 있다. 아, 시원해. 싸~하다.
나는 나의 자유와 경험으로 인해 보다 내 자신에 대해 강력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건 확고한(?/믿을 것과 믿지 못할 것에 대한 구분이라고 해도 좋겠다)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최소한 남부럽지 않은 태도가 되도록 하는 강력한 힘과 의지로 다가왔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순간 탄생한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탄생한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368]

:오쇼와 같은 나의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오래동안 종교인 친구로부터 지탄 받아왔다. 사탄이거나 가엾은 중생인 것이다. 감히 신 앞에/기실은 자신들의 생각 앞에 교만을 덕지덕지 부리는 망종으로. 푸~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해 그대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준다.[371]

:나는 경험을 거부하지 않을 피할 수 없다고만 느꼈었다. 그런데 그 고비를 얼마간 넘기고 난 후는 자유를 느낀다. 이것도 무엇/ 사랑 따위의 감정 등... 과 바꿀수 없는 소중한 느꺼움이고 한가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도피/(유혹) 와 게으름과 이기심과 관계에 대한 질서와 또 다른 형태의 아집을 쌓아가는 회피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숙고 중에 있다.

그대가 그대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이 위대한 자각을 즐겨라. 그때 그대는 내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되는 것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경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이 되는 것은 해방되는 것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372]

: 내 강점중의 하나인 책임감은 나의 신성에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우주와 신이 준 선물이로구나. 내가 실로 엄청난 재능을 부여받았구나. 후~

늘 이것 때문에 괴로웠고 또한 이것 때문에 내가 얻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그런데 그동안은 한국적인 풍습과 관계망 속에 더 가까이 구속되어 있었다. 개인은 여럿, 단체 혹은 가족의 일원일 뿐이라는 죄의식?(자유가 이탈을 꿈꾸는 것에 대한)마저도 깊숙이 박혀있었다.

보는 것(seeing)이 아는 것(knowing)이다. 그리고 보는 것은 또한 되는 것(being)이 되어야 한다. 그 밖에 다른 믿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385]

: 나는 이 구절을 믿고 여행을 떠나기(호기심에 대한 체험의 현장)로 작정한다. 눈요기라고 해도 상관없다. 여하튼 현재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물질의 차원 안에서의 앎을 그대는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의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意識)의 차원 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과학만으로 완벽하다. 그것은 똑같은 탐구이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외부 과학과 내부 과학의 통합이며 동시성을 이룰 하나의 최상의 과학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처럼 많은 종교들은 필요치 않아질 것이고...
어떤 것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것이 과학의 근본이다. 그것이 진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다.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이것이 앎이다. 그리고 이 앎이 인간을 붓다로, 깨달은 자로 변형시킨다. 이것이 모든 인간 성장의 목표이다.[386, 387]

: 이 양자적 결합의 하나로 나는 동양의학과 서양의학, 동양사상과 서양과학이 어룰려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킬 충분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부단한 노력의 융합과 합일 만이 인간을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보다 빠르게 완성을 추구하며 구원시킬 수 있다고 본다. 사실 그런 저런 노력에 의해 게놈 지도를 완성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 집단 이기주의 때문에 일반인들의 실생활에 더디게 진행되는 것이 한스럽고 답답하다. 이 계략 속에 유린 당하는 것은 물론 인간 자신들이다. 우리고 우리의 미래/ 후세를 좀 먹으며 우리는 더디데 성장한다. 그래, 오쇼의 말대로 사랑 없음이요 무자비한 직무태만과 정략적 가혹한 지연이라 할 수 있다. 아니 너무 오래 살게 하는 원인이기도 한 것이기도 하면서...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점을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을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425]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시, 음악, 조각.... 일단 우리가 이 신인간을 세상에 내놓고 나면 지구는 처음으로 마땅히 되었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487]

: 자크 아탈리는 자신이 주장하는 세로운 세상을 신유토피아라고 했었다.

나에게 있어 산야스란 ‘나는 나에게 주어져온 모든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완전히 씻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의지해서, 새롭고, 젊고,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채로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 라고 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야스는 다름 아닌 그대의 순수함으로의 입문이다.[501]

:산야스! 이것도 정말 좋다. 구호로나 까페이름 아니 책의 이름으로도.

만약 내가 그대에게 한 시간을 준다면 그대는 쓰레기 같은 소리를 지껄인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일 분을 준다면 그대는 정확히 필요한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512]

:그래서 이 부분에서 혼동 된다. 과잉인지 결핍인지 말이다. 어느 것이 인간의 내면을 잘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인가하고. 양자에 대한 경험이라면 좋겠군.
지금에서 내일로 결핍에서 과잉은 아니라도 한가함이나 여유로운 공급 쯤으로. 그렇다 사치나 허영이 아닌 유유자적 선비적 기풍을 누릴 수 있는, 품이나 폭이 반경.

그것은 바로, 그대가 무엇이든지, 그대의 상태 그대로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달성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흰 구름이 될 것이다.[513]

: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이란 개념도 함께 떠오른다.

모든 위험성들을 자각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선교사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단지 나누고 그것에 대해 잊어버려라. 씨를 뿌리고 계속 가라. 그 씨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뒤돌아보지 말라. 그들의 때가 오면, 봄이 오면, 그 때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524]

인류 역사에서 모든 아름답고 위대한 일들은 언제나 내적인 탐험을 위해 에너지를 한데 모았던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나의 코뮨은 내적인 탐험을 위한 신비학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모험이며 가장 위대한 춤이다.[539]

우리는 태어나지 않은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리고 존재의 결정은 언제나 생명을 향해 있다.[574]

: 이거 이거 완전히 죽이는 문장이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변형시키기를 바라고 그들을 통해 이 아름다운 행성에 진정한 문명과 인류애가 구현되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593]

나는 선(禪)을 가리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종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선은 종교가 아니라 단지 종교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창시자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가 없다. 사실 그것은 그대에게 가르칠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류의 전 역사 속에서 일어난 가장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어있음을 즐기며 무(無) 속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선은 앎이 아닌 무지 속에서 충족된다. 그것은 세속과 신성함을 구분하지 않는다. 선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604]

: 기독교의 무한정한 '회계' 라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우리나라 불교의 선종과 교종에 대해 보다 깊이 궁금하고 서선대사에 대한 조사도 아울러 해보고 싶다.

고마타 붓다는 어떤 후계자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와 같았다. “나의 조상(彫像)을 만들지 말라. 나의 말들을 모으지 말라. 나는 숭배되어야 하는 상징이 되고 싶지 않다. 나의 가장 깊은 열망은 그대들이 모방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불교도가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의 잠재력은 붓다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써니가 되는 것이다. 읽고 쓰면서 거듭난 써니 정선이가 되는 것이다. 으흐흑. 쑥스럽구만.^-^



인용문이 길어서 약간 힘들지만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인용문 읽는 재미도 쏠쏠하네요. 리뷰가 각광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겠는걸요. 자신의 견해가 많은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 주는 인용문 만의 의미도 각별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인용문을 너무 좋아하나? 히히히.

선정 도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책의 곳곳에 사부님이 들어가 앉아 계셔요. 얏! 혹은 메롱하며 요기도 나오고 저기도 나오시고 사부님은 원래 홍길동 가문과 관계가 깊었을까요? 정말 재밌죠? ㅋㅋㅋ 숨바꼭질하다 찾아내는 기분이에용. 왜 그리 반갑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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