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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30일 11시 47분 등록

오쇼라즈니쉬 자서전 (길은 내안에 있다) 태일 출판사. 2003년

1. 책 소개 : 저자라는 말은 옳지 않다. 그는 한 번도 그의 책을 집필한 적이 없다. 그의 강연을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정리해서 책을 냈을 뿐이고, 이 책도 마찬가지 형식이다.

♣ 오쇼 라즈니쉬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는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쿠츠와다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그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이었고 말썽쟁이였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밑에서 자유롭게 자란 오쇼는 어릴 적 자이나 수행자에게 거침없는 질문공세로 꽁무니 빼게 하고 부당한 학교 선생님을 학교에서 몰아내 버리기도 했다.
21세에 깨달음을 얻은 오쇼는 비의의 심리학적 접근으로 인간 의식의 발전 단계를 설파하고, 현대인의 영혼에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어린 시절 그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남들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이나 신념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진리를 체험하고자 했다. 21세에 깨달음을 얻은 오쇼는 사가르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자발푸르 대학에서 9년간 철학교수로 지낸다. 인도 전역에서 기성 종교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강연을 했으며, 전통적인 신념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한 그 강연의 파장은 컸다. 그의 강연이 광범위한 독서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차츰 그를 추앙하는 무리들이 공동체를 만들기까지 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오쇼는 독창적인<다이나믹 명상법>을 개발하여 명상의 새 장을 열었다. 그는 현대인들은 과거의 낡은 전통과 현대 생활의 온갖 욕망에 짓눌려 있기 때문에 깊은 정화 과정을 통해 무념의 이완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는 인간의식의 발전 단계를 규명하고, 현대인의 영혼에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설파했다.
오쇼는 미국에서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그의 깨달음을 나누고자 했으나 사회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 등으로 계속 여러 나라에서 추방당하고, 비자발급을 못 받고, 억류당하거나 하다가 결국 다시 인도 뿌네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육체를 떠날 때 까지 자유롭게 살았으나 그의 죽음을 두고 또한 많은 이야기가 떠돈다. 이 책에서는 미국 감옥에서 독극물에 중독되어 결국 서서히 죽음에 까지 이른, 이른바 독살로 그의 죽음을 본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가 성병에 걸려 죽었다는 등의 풍문이 있다.
여기 소개된 책 외에도 많은 책들이 출간되었다.
2005 뱀에게 신발 신기기
2005 신심명
2005 노래하고 춤추는 신 크리슈나
2005 찾아라 내 안의 또 다른 나 : 창조
2005 삶의 길 흰구름의 길
2004 아이를 더 크게 사랑하는 법
2004 신비가 너에게 말 걸어 오리라
2004 오렌지북
2004 틈
2003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2003 과녁
2003 명상의 길

저자 및 역자 소개
역자 : 김현국
한국외대 인도어과를 졸업하고 1993년 이후 여러 차례 인도 오쇼 코뮨을 방문하여 명상과 요법 등에 참여했다. 오쇼의 제자로 신야신 이름은 스와미 아난드 아르하트이며, 오쇼 쿠쉬딜 명상센터, 황금꽃 출판사, 오쇼 니케타나 명상 센터에서 일한 바 있고 현재는 정신세계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역서로는 ,<거위는 밖에 있다><누구도 죽지 않는다>가 있다.

2. 마음에 남는 글귀

p.51. 지식은 그대를 매우 교활하게 만든다. 나는 교활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교육받지 않은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을 했을 뿐이었다. 교육은 인간이 불쌍한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범죄이다.
p.100. 인간은 명사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 버렸다.
그대가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죽는다고 느끼고 누워 있어 보아라. 차분하고 고요해 질 것이다.그때는 아무 것도 걱정거리가 되지 못한다. 왜냐면 모든 걱정은 삶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이다. 그대가 죽음을 받아드렸다면 두려움은 없다.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 모든 두려움이 거기에 있다.
p.101. 나는 어떤 교회의 소유도 아니고 어떤 사원의 소유도 아니지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원이나 교회는 나의 소유이다.

p.139~140. 일단 그대가 완전하게 죽음을 받아 드리면 그대는 죽음을 알게 된다.

p.146~147.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침묵을 사랑했다. 가능할 때면 언제나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곤 했다. 자연히 나의 가족들은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옳았다. 틀림없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마침내는 내가 앉아 있으면 어머니가 내게 와서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 집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구나. 시장에 가서 야채를 좀 사올 사람이 필요한데. 나는 어머니 바로 앞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혹시 누군가를 보게 되면 이야기 할게요. 나의 존재 따윈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거기 있든 없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한두 번쯤 그들은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이애는 그냥 놔두고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그들은 야채를 사오라고 나를 내보낸다. 그리고 저녁때는 나는 돌아와서 말한다.
뭣 때문에 저를 내보냈었는지 잊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젠 시장이 문을 닫았어요. 나의 어머니는 말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애초에 너에게 시키지 말았어야 옳았다. 대체 어디 있었니? 나는 말했다. 집을 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 보리수가 있었어요. 고타마 붓다가 그 밑에서 깨달은 그 나무 말이다. 그 나무는 고타마 붓다 때문에 보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고타마 붓다 전에 뭐라고 불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뭔가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 이후에는 그 나무는 붓다의 이름과 관련지어 졌다.

p.158. 그대는 하나의 현존으로 주시자로 단지 거기에 있을 뿐이다.
p.163~ 164. 수 많은 생을 거치며, 나는 노력해왔다. 나 자신을 시험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이해한다. 바로 그 노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구하지 않고 도달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구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함을 놓아버려야 할 때가 온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가 필요하다. 그러나 배에서 나와 배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배를 남겨 두고 떠나야하는 순간이 온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던 그 모든 어리석음을 보고 웃었다. 왜냐하면 이미 깨달음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이다. 구하고 있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항상 먼 곳을 향하는 것이다.
p. 166. 노력이 멈춘 그날. 나 또한 멈추었다. 노력 없이는 그대가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고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 욕망의 페달을 밟기 때문이다. 에고는 현재에 있지 않고, 미래에 존재한다. 현재에 그대가 존재 할 때, 에고는 신기루 이다. 에고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p. 168. 희망은 지평선 이다. 절대로 그대와 희망 사이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지평선 사이에, 희망 사이에, 투영된 욕망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한다. 욕망은 꿈의 다리이다. 왜냐하면 지평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는 욕망을 향해 다리를 놓을 수 없다. 단지 다리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을 뿐이다.
p. 178. 강과 함께 흘러라. 나는 내맡김 속에 있었다. 나는 거기 없었다.
p. 186. 깨달음의 길을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새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다. 모든 새는 스스로 자기 발자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계속 날아감에 따라 그 발자국들은 즉시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선도자(leader)와 추종자(follower)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단지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예수, 모세, 마호메트, 크리슈나와 같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알았더라면 이런 발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깨닫게 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뒤에 어떤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에게 “이리와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p. "나의 메시지는 교의가 아니며, 철학도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일종의 연금술이며 변환의 과학이다. 따라서 나의 메시지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자들, 용기 있는 자들만이 들을 수 있다."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그것은 진정한 신의 왕국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땅으로 통하는 뿌리를 주며 자유는 그대에게 날개를 준다.
내가 관찰한 첫 번째 사실은,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조차도 말이다. 화장용 장작더미가 누군가의 아버지를, 누군가의 형제를, 누군가의 삼촌을, 누군가의 친구를, 누군가의 적을 불태우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죽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사소한 일에 정신이 팔려있다. 그들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경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만 제외하고, 그들은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화장용 장작더미 주위에 둘러앉는다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 에게 다가가 봤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뭔가에 정신을 팔기 위해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렇게 해서 불타고 있는 몸을 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들여다봐도 그들은 그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이다. 내일은 이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 장작더미 위에 있게 될 것이다. 모레는 다른 누군가가 거기 있게 될 것이다. 매일 사람들은 장작더미로 운반 되어 온다. 언젠가 나도 그 장작더미로 운반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나에 대한 이 사람들의 마지막 대접은 이런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인 것이다. 그들은 물가가 오르고 루피화(rupee)가 평가절하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죽음 앞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장작더미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그들은 와야 했기 때문에 왔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 단지 사회적인 관습을 충족시키기 위해, 단지 그들이 왔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오는 것조차도, 그들의 죽었을 때 청소차가 그들을 실어가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전송을 하러 와야 할 의무가 생긴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거기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장작더미 위에 있을 때 사람들이 거기 있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한번은 나의 선생님 한분이 거기 있었다. 그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누가 어떤 사람의 아내와 놀아나고 있다는 따위의 이야기였다. 나는 말했다."지금이 누구의 아내 이야기나 그 여자가 뭘 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때인가요? 이 죽은 사람의 아내를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요. 선생님이 죽을 때 선생님의 아내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세요. 그녀가 누구와 놀아날까요? 무얼 할까요? 그것에 대해 무엇이든 준비해둔 게 있으세요? 그리고 그 어리석음을 보지 못하세요?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 선생님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것을 회피하려 하고 있어요."그러나 모든 종교들이 그렇게 해왔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단지 특정 종교들의 특정한 전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뿐이었다.

p. 277. 불쌍한 마음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p. 288.나는 거의 모든 종류, 모든 범주의 선생들을 만나봤지만, 전 세계 종교의 소위 스승, 선생이라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중독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의존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의 권력놀음이다. 나에게는 어떠한 권력놀음도 없다.

p. 315.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 속에, 모든 나무 속에, 모든 돌 속에 신성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 언어를 모른다. 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바로 신성(神聖)이다.

p. 352.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의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p.365.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잇다. 그것은 가능하다.


p. 368. 현자(賢者)는 그대가 통찰력을 가짐으로써 그대 자신의 등불을 가지기만을 바란다. p.368.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해 그대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준다.

p.384.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붓다는 그것을 살았다. 예수는 그것을 살았다. 그러나 기억하라. 예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며,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결코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단순이 종교적이었다. 그들은 독단적이지 않았다. 세상에는 300개의 종교가 있다. 이것은 정말로 어이없는 일이다. 만약 진리가 하나라면 어떻게 300개의 종교가 있을 수 있는가?

p. 397. 나와 존재 사이에 신도 없고, 종교도 없고 단지 명상만이 있을 뿐이다.
p. 398~399. 그대가 여기 있고 모든 개인이 여기 있다. 존재가 그대의 것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단지 침묵하고 존재의 소리를 듣는 것뿐이다. 어떤 종교도 필요치 않다. 어떤 신도 필요치 않다. 어떤 성직자도 필요치 않다. 어떤 조직도 필요치 않다.
나는 절대적으로 개인을 신뢰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이런 식으로 개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것이 제거될 수 있다. 이제 그대에게 남은 것은 명상의 상태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전적인 침묵의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명상이라는 말은 무거워 보인다. 단지 순수한 침묵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그러면 존재하는 그 모든 아름다움을 그대에게 열어줄 것이다.
그것이 성장해감에 따라 그대도 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가 그대의 가능성의 정상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 그 모든 아름다움을 그대에게 열어줄 것이다.
그것이 성장해감에 따라 그대도 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의 가능성의 정상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대는 그것을 불성, 깨달음, 바그와타, 즉 신성, 그 밖에 무엇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은 이름이 없다. 따라서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다.

p. 444. 사회에서 시작해서 그대 자신에 도달하라. 공동체로부터 달아나지 말라. 세상 속에서 살아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관계하라. 그러나 여전히 홀로 남아라. 사랑하고 명상하라. 명상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선택하지 말라. 사랑 더하기 명상,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

p. 490~ 491. 나는 태풍의 중심이다. 따라서 나의 주위에서 일어나든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혼란스런 소동일 수도 있고, 혹은 아름다운 시냇물소리 일 수 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양쪽 모두에 대한 주시자 일뿐이다. 외부 상황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어느날은 성공하고, 어느날은 실패한다. 어느날은 정상에 있고, 어느날은 밑바닥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대 안의 무엇인가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의 실체이다. 나는 나의 실체 안에 살뿐이다. 나는 실체를 둘러싼 모든 꿈과 악몽 속에 살지 않는다.

p.495. 하나 더. 나는 존경하는 사람들의 책은 내용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많은 글을 그대로 옮겨서 나의 책 읽기를 읽는 분들에게 살아 있는 내용을 전하고 싶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3. 내가 저자라면
♣아쉬운 점. -그가 합리화 시킨 여러 주장들안에서 범인(凡人)이 보기에 문란하게 살아낸 생활, 롤스로이스 등으로 사치를 부린 점 등에는 어떤 명분으로도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다. 그는 위험한 인물로 불리울만큼 큰 설득력으로 명상과 자유로움과 자신 개별성의 힘을 주장했다.
그가 왜 그렇게 많은 지식인들을 열광 시킬 수 있었는지, 왜 그렇게 많은 부르조아들을 그의 명상에 참여 시켰는지를 더 잘 알게 된 책이었다.
그는 나와 존재 사이에 신도 없고, 종교도 없고 단지 명상만이 있을 뿐이다. 라며 선동하고 있다. 그때문에 그를 밖에서 보기에 그는 모든 깨달음과 평화를 경험한 자였다.

♣ 라나크푸르의 명상캠프에서 오쇼는 '현재에 살라', '자연스럽게 살라', '홀로 살라'는 금언을 끝없이 제시했다.

보통 영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지식, 철학, 과학등, 문명을 만들어온 지성적인 부분에 대해서 취약하기 쉬운데. 오쇼는 합리적, 논리적, 종교, 철학을 통합해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그의 깨달음의 핵심은 바로 '존재(存在:exgistence)'와 '지금 여기에(Exist right here, right now) '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라즈니쉬가 말하는 존재는 그가 명상(정확한 의미는 Meditation :수행)을 통해 깨달은 인간의 참 자아, 곧 신성(神性)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곧 석가모니의 불성(佛性), 공(空)을 말하는 것인데, 노자는 이러한 존재의 본성을 虛無로 말했다. 경계는 달라도 석가모니든 노자든 그 외의 어떤 성자든 깨치고자 했던 것은 인간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목적은 영원성을 향한 無목적의 목적으로 無爲의 爲라고 한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존재(存在:exgistence)'라는 말을 라즈니쉬에 이르러 철학적으로 통합시킨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또한 라즈니쉬는 동, 서양의 정신문화를 소통시키고, 명상(수행)의 대중화를 열었다. 100가지가 넘는 명상법을 만들어 내거나 재조합했으며 아쉬람을 만들어 명상할 수 있는 장소를 뿌네에 만들었다. 현대인의 복잡다단한 일상을 풀어 낼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을 위해 세계의 유명 뮤지션들의 음악을 명상과 결합했다.
그의 설득력있는 강연을 듣고 많은 이들이 명상에 참여 한 점이나 그가 그를 위해 기울인 노력등, 그런 점에서 라즈니쉬는 인류에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온전히 이입되지 못했다. 그가 살아간 방식에 동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리뷰를 쓰기 위해 그의 강연을 들어 봤다. 천천히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나도 당장 인도로 가고 싶어질 듯 카리스마가 엿보였다.
롤스로이스와 명품 소품을 걸치고 살면서, 죽음은 또 다른 세상의 또 하나의 ‘문’이라던 그는 지금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의 제자인 류시화가 그의 죽음을 접하고 번역한 책의 서문을 읽으며
이글을 마친다.


‘나의 젊은 시절을 지배했던 사람, 문학의 열정마저 덧없는 것으로 돌려버리고 봄날의 비바람에 지는 꽃잎 하나에도 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닫게 하여 거리로 뛰쳐나가게 만들던 그가 어느날 육체를 떠났다. 그와의 다르샨(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갖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의 눈빛이 아직도 내 눈 속에 살아 있는데, 그가 육체를 떠났다는 것이다. 육체는 정말 그렇게 덧없는 것인가.

솔직히 말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 그는 그만큼 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내 안에서 춤추면서 어리석은 나를, 동양식으로 말해, '꽃으로 내리치고'있다. 꽃으로 치는 것은 돌로 치는 것보다 훨씬 깊숙히 치는 것이다.
라즈니쉬는 죽기 얼마전에 이름을 '오쇼'로 바꾸었다. 그것은 그 속에 '대양(ocean)'의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대양(大洋)의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그의 이름이 어떠하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 스스로 대양을 향해 출발하는 일이다.

그가 육체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의 가르침의 정수가 담긴 「삶, 사랑, 웃음」을 번역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책이 처음으로 만나는 오쇼 라즈니쉬의 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책이 그가 읽게 될 오쇼 라즈니슈의 마지막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 류시화의 '삶,사랑,웃음'중 서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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