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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9일 19시 02분 등록
신화의 세계
조셉 캠벨/과학세대 옮김/ 까치 출판사


Ⅰ.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비교신화학자

생물학을 공부하다가 메디치가에 관한 책을 읽고 인문학에 흥미를 가지고 1922년 콜롬비아 대학에 편입하게 된다. 1922년. 그 해는 바로 T. S. 엘리엇이 장편시『황무지』를 발표한 해이며, 제임스 조이스가 소설『율리시즈 Ulyssess』를 발표한 해이다. 이 두사람의 문학작품은 캠벨의 저서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 Finnegans Wake』(1939)는 자주 등장한다.
이 책이 1982년에서 1984년의 강연을 녹화한 후에 출판사에서 엮어서 발표한 것으로 본다면 처음 접한 시기와 강연에서 인용한 시점까지 상당한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의 작품이 캠벨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셉 캠벨은 자신의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가서 본 버팔로 빌의 웨스트 와이드 쇼를 통해 인디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해온 것처럼 두 사람의 문학 작품의 주제나 소재가 아메리카 인디언 만큼이나 그의 연구와 관련이 있어보인다.

1개의 장을 할애 하고 있는 성배의 전설에 관한 것은 그의 학위 연구주제였다(학위 논문까지 조사하지는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음). 이 장은 성배의 전설은 ‘성배’의 상징과 의미와 성배를 찾아나서는 ‘영웅’의 행동들에 대한 의미들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캠벨은 1940년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 연구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와 알게 되었는데, 후에 침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침머 부인의 부탁으로 침머교수의 인도 문화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여 책을 발간하기도 한다. 캠벨은 침머의 소개로 융학파가 주관하는 종교, 신화, 정신분석학 논문집인 『볼링겐 시리즈』의 편집자로도 활동한다. 이번 책 『신화의 세계』에 인도철학, 종교에 대해서 상세한 기술은 그때의 연구결과로 여겨진다. 이 책에서는 인도의 신화, 철학, 문화에 대해서 5,6,7,8,9장에 걸쳐서 나온다.

Ⅱ. 가슴을 치고오는 글귀

1.서론:인간과 신화의 기원
[5] 신화는 우리의 삶, 우리의 육체 그리고 우리의 환경을 소재로 한다. 역동저이고 살아 있는 이 소재들을 각 시대의 지적 특성에 적합한 형태로 이룬다.

[5]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와 같은 정도로 자신과 우주의관계가 완전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우주 사이의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얻게 된다.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곳에 오래 머무는 것, 이것이 신화의 주요한 기능이다.

[6] 남자란 뭔가 진지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동물인 것이다.

[6] 인체의 모든 근육은 활동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으며, 움직이지 않는 근육은 충분한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9]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쏟아지고 갑자기 천둥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수컷들이 극도로 흥분하여 차례로 힘자랑을 하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었다. ....... 최초의 신성(神性) 관념은 천둥 소리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천둥 소리는 인간의 힘보다 더 큰 힘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이다.

[15] 동물은 다음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죽일 것, 내년이 또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어머니라는 원천으로 되돌려보내어 소생시키는 제의를 행할 것.

[16] 자신의 신비란 생명을 죽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다. 달리 살아갈 방법은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잡아먹음으로써 살아가는 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잡아먹는 쪽도, 잡아먹히는 쪽도 실은 하나의 생명이다. 따라서 어쩌면 자신의 살점을 뜯어먹은 동굴곰의 두개골에는 이미 생명의 본질에 대한 느낌이 나타나 있는지도 모른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이미지이다.
*p15 그림1-6

[21] 소년이 배워야 할 것은 용기였다. 그들은 죽음과 부활의 제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28] 이 두 상징이 상징하는 기본적인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뱀은 허물을 벗음으로써 마치 달이 그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뱀은 허물을 벗음으로써 재생한다. 따라서 뱀은 달과 마찬가지로 태음의식의 상징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과 의식, 생활 에너지와 의식은 시간적으로 유한한 몸 속으로 들어간다. 의식과 생명은 시간의 영역-탄생과 죽음의 영역-과 관계가 있다. 사자는 태양과 관련이 있다. 사자는 태양의 동물이다. 태양은 그 안에 그림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 태양은 언제나 시간과 탄생과 죽음과 무관하며, 따라서 완전한 생명이다. 한쪽은 타자와의 관련을 초월하고, 다른 한쪽은 타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두 종류의 에너지는 본디 동일한 에너지이다. 그리고 이 두 에너지를 모성적으로 의인화한 것이 여신이다.
* 그림1-15

2. 전설 속에서 사는 사람들 :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33] 개인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발견하게 되면, 이른바 원초적 가면의 억압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을 왼손의 길(left-hand path)이라고 부른다. 오른손의 길은 자신이 사는 마을의 울타리, 곧 이데올로기와 가면 체계-페르소나(persona:"인격“을 뜻하는 라틴어, 본래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연극배우가 쓰는 탈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융은 개인이 일상생활을 유지해나가는 데에 필요한 조건들이 순응하는 태도를 가르켜 페르소나라고 불렀다/역주) 체계-에 갇혀 살아가는 길이다. 왼손의 길은 개인적인 탐구의 길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이 개인이다.

[35] 앞에서 말한 전구들 중의 하나가 불이 나갔을 때 교장이 와서 “저건, 이건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전구인데” 따위로 말하지는 않는다. 불이 나간 전구를 빼내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새 전구로 갈아끼우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빛을 나르는 수단이 아니라 빛이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곳에서 여러분의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자문해본다. 여러분의 머리가 나르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분의 머리는 의식을 나르는 수레이다. 여러분의 머리는 얼마나 많은 의식을 비추고 있으며, 그중 어느 것이 당신인가? 당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례인가, 그렇지 않으면 의식 자체인가?

[37] 대지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자식들 모두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대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며, 인간이 대지의 것임을. 우리가 핏줄을 얽혀 있듯이, 이 세상 만물은 그렇게 얽혀 있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피륙을 스스로 짜지 않습니다. 인간의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피륙에 대해서 무엇을 하건, 그것은 그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신은 또한 당신들의 신이기도 합니다. 대지는 신에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대지에 상처를 내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 1855년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38] 태고의 신화에서는 인간의 육체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특정한 땅의 풍경도 신성시했다. 여러분은 성지(聖地)를 찾아서 어느 먼 곳으로 갈 필요가 전혀 없다.

[40] 신양성서는 일요일(sunday)의 계약, 동쪽에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날의 계약이다. 하늘의 높은 곳, 한낮의 푸른 하늘은 중간 점, 인생의 서른다섯 살에 해당한다. 서쪽에서 태양은 지고, 북쪽에서 태양은 지하를 통과한다. 북쪽은 언제나 경외와 신비와 위험의 장소인데, 그 위험은 사회질서에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위험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 태양을 보게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만다라는 모두 동쪽이 열려 있다.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빛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45] “한 그림을 완성하는 것, 예컨대 이 모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그림을 완성해버리면 내일 아침에 맨해튼의 모든 여자들이 임신하게 된답니다.” 이 그림들이 힘을 옮기는 것이다.

[47] 그들의 어머니는 소년들에게 “애들아, 이 부근은 위험하니 동쪽과 서쪽과 남쪽으로 가는 것은 좋지만, 절대로 북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북쪽을 향한다. 북쪽은 인생의 새로운 소재를 얻는 유일한 방향이다. 사회의 관습과 명령에 따르지 말라. 그 방향에는 막다른 골목이나 분쟁이 기다리고 있다.

[51] 예술작품에서 자연의 변용은 자연현상의 초월성에 대해서 투명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8] 성지(聖地)는 어디에나 있다. 따라서 종교적인 예배를 위해서 자연의 풍경을 찾아갈 때는 여기가 중심이다. 여기가 북쪽이다. 여기가 남쪽이다라는 식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신비적인 존재에게 자신의 마음을 호소할 수 있다.

[59] 신화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실제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그 그림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59] 그는 신화란 우주와 그 각 부분들 그리고 국가와 그밖의 인간 집단과 관련을 맺는, 수용 가능한 이념의 체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화는 그런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신비적인 차원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화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신화는 또한 개인의 교육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개인을 이끌어가는 길을 제시한다.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신화도 그것을 제시한다. 신화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의 생활주기와 조화시키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화시키고, 이미 그 자체가 환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회와 조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3.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씼었다: 신석기 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75] 달이 그림자를 벗는 것과 마찬가지로 뱀은 허물을 벗는다. 독수리는 태양의 새이며 사자도 태양의 짐승이다.
* 그림3-11

[77] 인도에서는 신이 자진해서 춤을 추며 세계에 들어온다. 세계는 유희이며 놀이다. 그것이 이 신화들의 기본적인 분위기이다. 적어도 그것은 즐거운 것이며 유머러스한 것이다. 세계의 신화 가운데서 구약성서의 신화만큼 음울한 것은 없다.

4. 파라오의 지배 :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88] 그는 켈트 종교를 아폴론, 메르쿠리우스 같은 로마 신들의 이름을 사용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 때문에 카이사르가 진자로는 어느 신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통합주의이다. 그러나 셈족의 경우에는 “당신들이 에즈라고 부르는 신을 우리는 야훼라고 부른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여기에는 배타주의와 부족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태인들에게서 이어지고 있다.

[89] 캠벨 : “오늘 강연에서 이해되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부버 : “그게 어떤 단어입니까?”
캠벨 : “신입니다.”
부버 : “당신은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까?”
캠벨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신은 그 얼굴을 감추었기 때문에 오늘날 누구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인도에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는 누구나 늘 신의 얼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부버 : “지금 비교하시는 겁니까?”
사회자 : “아니오, 선생님. 갬벨씨는 단지 신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에서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할 뿐입니다.”
부버 : “아무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추방자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캠벨의 생각) 그러나 인도인들은 추방자 상태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은 그들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교종교학의 입장에서 종교들에 대해서 비교문화적으로 말할 때, 그런 차이점을 인식해둘 필요가 있다. 비교? 그렇다. 나는 비교를 한다. 그것이 나의 직업이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이념들이다.
* 부버와 캠벨의 대화
부버는 말하는 신은 구약성서에서의 신이다. 인간과 신이 서로 멀어진 상태의 신. 신은 절대자이고 심판자이다.

[100] 사람이 죽게 되면 모두 오시리스와 동일시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사자는 오시리스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오시리스 존스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사자는 오시리스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저승까지 여행한다. 오시리스가 오시리스에게 가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한몸이라는 모티프이다. 가는 도중에 사지인 오시리스는 모든 신들을 먹고 자신으로 돌아간다. 여기에는 신들이 우리 인간 에너지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나타나 있다. 우리가 신들을 먹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실제로 식인풍습으로 나타난다. 아니면 단지 “내 머리는 아누비스의 머리요, 내 어께는 세트의 어깨이니라”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내 몸의 모든 기관은 신들의 기관이며, 누구도 저승에서 내 심장을 빼앗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103] 첫 번째 칼집은 나마나야코사(Anamayskosha), 곧 양식이다. 우리의 몸은 그것으로 만들어진다. 몸은 양식으로 만들어지며, 사람이 죽으면 그 몸은 구더기, 땅 속의 벌레, 독수리, 자칼, 불의 먹이가 된다. 두 번째 칼집은 프라나마야코사(Pranamayakosha), 곧 호흡이다. 호흡의 칼집이 양식을 점화시키고 산화와 연소를 일으켜서 열과 체온과 생명을 준다. 세 번째 칼집은 마나마야코사(Manamayakosha), 곧 정신이다. 정신의 활동은 양식과 칼집과 관련이 있다. 정신의 활동은 양식의 칼집과 관련이 있다. .... 정신의 칼집은 야식과 호흡의 칼집을 향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세 개의 직사각형 상자가 상징하는 것이다. (중략) 나는 나무로 된 장식관이 다음의 칼집을 상징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104] 우리 몸은 먹은 밥을 소화시킨다. 아침밥의 소화과정을 정신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몸은 아침밥을 소화시킨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당신의 지혜의 몸이다.

[104]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나큰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비참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만일 환희의 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이 현실이야말로 인생의 환희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

[105] “이 친구가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구려. 이 친구는 브리타니아인이라오. 그러니 자기 종족의 법률이 전세계의 법률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5. 성스러운 원천 :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113] 세계의 신화와 종교체계를 조사한 바스티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이미지와 같은 주제가 되풀이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원소적 관념(Elementargedanken, Elementary Ideas)”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또 그것들은 발생할 때마다 환경에의 적응이나 해석에 차이가 있으며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런 지역적인 차이를 “민속적 관념(Volkgendanken, Folk Ideas)” 또는 “민족적 관념”이라고 불렀다.

[114] 신화는 꿈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 나더러 말하라면 그 영역을 지혜의 몸이라고 부르겠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몸이 말하기 시작한다. 몸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에 의해서 움직인다. 에너지가 지혜의 몸을 지배한다. 에너지는 거대한 생물학적 바탕에서 나온다. 그곳에 있는 에너지는 에너지임과 동시에, 의식의 양태이다. 그러나 몸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 뿌리를 두고 의식의 모든 양태가 생기는 데 지혜는 몸의 지식과 다르다.

[115] 상징의 주요 문제는 사람들이 상징에 빠져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 신화에서 중요한 것,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에 포함되어 있는 속뜻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속뜻은 언제나 정신적이다.

[116] “시를 쓰는 것은 말 뒤에 숨어있는 원초적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 독일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 괴테

[118] 진정한 순례는 글자 그대로의 순례, 물리적인 행동으로서의 순례를 당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중심을 찾아가는 순례로 바꾸는 것이다. 순례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순례하는 동안 계속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명상하고, 참된 여행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임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120] 그것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란트남”이라고 부르는 것, 곧 어떤 풍경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땅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누나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성지로 여긴다.

[120] 성지를 떠나 있다고 해서 흩어진 유태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한 유태계 젊은이가 이의를 제기한 편지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의 조국, 나의 국토는 이곳 미국이다 나는 이곳에서 살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이 나라를 나의 성지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자발적인 의사일 뿐더러, 나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자신의 “전통적인 유산”으로부터 벗어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훌륭한 답이다. 그 “전통적 유산”은 자칫 그 자체의 상징체계를 구체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켰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성지에 대한 모든 관념을 발견했다.

[126] “희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 우리는 희생을 통해서 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희생은 신들보다 강하다. 그렇지만 그 희생을 주재하는 것은 누구인가? 브라만이다. 따라서 브라만은 신들보다 강하다. 따라서 신의 계시를 받은 인간은 어떤 신보다도 강하다. 이것이 우주의 위대한 점이며, 브라만은 그런 위대한 존재이다.

[127] 사람들은 상냥하게 그 염소를 돌봐주고 머리에 작은 꽃을 꽂아주는 등 염소가 행복해하도록 노력했지만, 그 머리는 잘려나갈 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사의한 힘에 사로잡혀 세계의 누구나 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 힘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 규칙은 존재한다. 어차피 떨어질 바에는 아예 뛰어들라. 꼭 해야 할 일이라면 해버려라. 이렇게 해서 희생에 대한 열의가 생기는 것이다.

[129]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 차례차례로, 그것은 이 법에 따르는 사람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이다. 신들의 근원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발자취를 더듬어 중심으로 가서, 신들을 낳는 근원은 당신 자신임을 알라.” - 「찬도기아 우파니샤드」

[129] 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이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 내부의 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구별 작업이다. 그것은 실재의 육체적이고 가변적인 면과 영속적인 불꽃을 구별하는 작업이다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은 그 불꽃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133] 죽어야 할 것은 심리적 차원의 온갖 욕망과 불안이다. 그때 비로소,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생명은 긍정적인 것이 된다.

6. 정각에 이르는 길 : 불교

[138] 아이는 일곱 걸음을 뗀 뒤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에도 하늘 아래에도 나와 같은 자는 하나도 없다(天上天下唯我獨尊)”고 선언한다.
부처는 그것을 깨닫기 위해 수행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 이 말이 다시 들린다. 예전에 알았던 것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깨달음에 관한 것인 줄은 이제야 알았다.

[138-139].“참 이상하지요, 갓 태어난 아이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실제로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행한 끝에 보리수 아래서 깨우침을 얻어 정신적 탄생을 이루로 나서야 겨우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동양에서는 만사가 뒤죽박죽이지요. 우리는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큰 구별을 두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준비해간 강의 노트를 몽땅 잃어버린 체하면서 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본과 중국의 그림에는 많은 여백이 있는데, 그 여백에는 어떤 것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는 노트를 잃어버린 체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여백을 보여주었던 것이고, 우리는 그와 함께 그 여백을 찾아냄으로써 강연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한 법이다.
스즈키는 마침내 이야기의 요점에 도달했다. “아기는 태어날 때 반드시 웁니다. 뭐라고 하면서 울까요? 아기는 ‘하늘 위에도 하늘 아래에도 나와 같은 자는 하나도 없다!’하고 선언하는 겁니다. 모든 아기는 아기 부처니까요.”

[142] 부동지를 발견하게 되면, 움직이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142] 이윽고 그는 다른 나무 아래에 앉았는데, 그때 떠오른 첫 생각은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에 관한 첫 번째 사실이다.

[143] 불교는 부처의 정각에로 당신을 데려가는 “탈 것”, 특히 나룻배이다. 불교는 우리를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나룻배이다. 피안이란 괴로움과 즐거움, 얻음과 잃음, 불안과 공포, 너와 나를 초월한 장소이다. 그것은 우주적인 일원성 또는 우주만물의 불변성을 자각함으로써 이원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143-144] 사공: “가든 스테이트의 저지로 가실 분 없나요?”
당신 : “제발 저지로 데려다 주세요.”
사공 : “잘 들어보세요.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당신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답니다. 이 배는 편도만 운항합니다. 당신의 가족, 당신의 이상, 당신의 돈, 당신의 미래, 이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나요?”
당신 : “이곳 생활에는 이미 넌더리가 난 상태입니다.”
사공 : “그럼 타세요.”
이것이 작은 나룻배인데,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고 실제로 기꺼이 버리는 사람만이 탈 수 있다.
(중략)
배는 마침내 저지에 도착한다. 아! 참으로 흥분되는 순간이다. 겨우 도달했다. 이것이 환희라는 것이다. 당신은 상륙한다. 그곳은 별세계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생각한다. 이곳에서 보는 맨해튼은 어떨까?
* 소승불교에 대한 설명, 비유

[145] 우리는 그곳에 있다. 아직도 나룻배에 타고 있다. 나룻배는 그곳에 있다. 그럼 나룻배는 누가 타고 있는가? 나룻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이것이 불교의 훌륭한 역설이다. 핵심이 되는 말은 “무아(無我)”이다. 삼라만상에는 자아(自我)가 없다. 우리 모두를 그런 초우러성의 표현이다. 우리를 타인과 구별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관념이다. 그것을 없애라. 두려워하지 말고 상대에게 양보하라. 타자의 먹이가 되라. 그럴 때 당신은 완성자가 된다. 그때의 경지를 극락(極樂, mahssukha)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이 최선의 교훈, 최고의 규칙일까? 최고의 규칙은 벗들과 즐겁게 지내고, 즐겁게 식사하는 것이다. 당신의 놀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라. 그 놀이, 인생의 놀이에 참여하라. 이것이 바로 극락, 곧 마하수카이다.

* T.S. 엘리엇의 「칵테일 파티(The Cocktail Patty)」
대본작가 : 엘리엇
국적 : 영국
구성 : 3막
초연연월 : 1949년
초연장소 : 에딘버러 음악연극제

3막으로 된 풍자적인 희극. 1949년 에딘버러 음악연극제에서 초연되었다. 중년부부인 에드워드 체임벌린과 그의 부인 라비니아가 적막한 권태 속에 감정이 서로 틀어졌을 때 시리아라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이 베푼 칵테일파티에 초대된 손님들 중에 정체불명의 기묘한 신사가 한 사람 있는데, 그는 정신과 의사인 동시에 현대사회의 모순과 인간의 과오를 지적해 주는 이 극의 해설자였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현대에서의 부부의 처신과 사랑의 문제를 제기하고, 현대인의 고뇌와 종교적 구제를 추구하였다. 엘리엇은 시극에서의 대화는 시(詩)인 동시에, 일상 회화의 자연스러움을 지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이 작품에서 실천하였다.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이 작품은 1949년 말부터 1950년에 걸쳐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장기 공연되었으며, 뉴욕 극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두산백과사전, Encyber 의 설명)

[146] “우리는 그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큰 나룻배의 사람들이다. 한편, “우리는 수행에 힘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작은 나룻배의 사람들이다.
* ??? 나는 그곳에서 즐기고 있는 것인가? 여전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는 것인가?

[148] 당신이 간 천상계는 당신의 상태에 꼭 들어맞는 곳이다. 당신을 재판해서 천상계의 여기로 가라거나 지옥의 저기로 가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없다. 일종의 특수한 중력을 가지고 있는 당신 자신의 정신이 당신을 천상계의 가장 적당한 곳으로 옮겨준다. 로큰롤을 좋아하는 사람이 실내악 콘서트에 가게 되는 일은 없다. 당신이 즐길 천상계는 당신의 준비에 걸맞는 곳일 것이다.

[154] 그것은 유골을 담은 무덤이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를 상징하는 우주의 알이다. 탑에는 불교 이전의 신들이 부처를 경배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불교의 훌륭한 점이다. 불교는 어디로 가건 “너희의 신들을 제거하라”하고 말하지 않는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특징은 자신들이 진출한 곳의 신들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보다 온건한 불교의 특징은 먼저 살고 있던 신들 역시 그 땅의 생명력이며, 불성의 표현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신들은 자신들의 불성을 드러내는 데에 참여한다.

7. 이드에서 자아로 : 쿤달리니 요가(1)

[157] 아폴로 우주선이 달의 둘레를 돌다가 마침내 착륙하는 단계에서 휴스턴의 지상 통제본부가 물었다. “지금 조정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돌아온 답은 놀랍게도 “뉴턴”이었다. 일찍이 그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우주공간에 작용하는 법칙을 이미 완벽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달 주위를 돌고 있던 그 작은 우주선을 태평양에 떠 있는 작은 위성 회수 선박으로부터 1.5km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착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우주선이 아무리 멀리까지 가더라도 우리는 그 우주공간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내려섰을 때, 그의 발이 달의 먼지더미 속에 얼마나 깊이 빠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경험적인(posteriori) 지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경험이 나오는 지식의 기본틀을 이미 알고 있다.

[157]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사물? 아니, 사물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초월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칸트는 이것을 “초월적인 미학”(일반적으로는 “선험적 감성”으로 번역한다)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모든 것들을 본 뒤에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지만, 사고의 법칙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 예를 들자면, 논리법칙과 범주가 있다. 그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은 얽매여 있다. 이것이 바로 마야(maya:진정한 실재에 대립되는 허깨비)이다.

[158] (신의) 이미지를 구체화하거나 상징을 구체화하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종교 전체가 우상숭배 체계이다. 어쩌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우상숭배를 찾아내어 파괴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160] “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위험에 깊은 관심을 품으며 자기 몸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것일까?”

[162] 인간의 몸과 우주의 몸은 대등하기 때문에, 우리의 등골은 세계의 등골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의 중추, 중심점, 부동지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제 명상에 들어간다.

[167] 그것은 1달러짜리 지폐 뒷면에 나오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 그곳에서는 각 변들, 곧 대립물들이 만난다. 그곳에서 지혜의 눈이 열린다. 그러나 당신은 행위의 영역에서 변에 위치하고 있다. 당신은 이쪽 변에 있고, 상대는 저쪽 변에 있다. 서로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눈은 중립적인 눈, 테니스 시합 때의 심판의 눈이다. 어느 쪽이 승리하건 상관없다. 그런데 당신은 상대를 때려눕히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시합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폭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눈은 폭력의 뒤에 놓여 있는 평화를, 어린 양과 함께 잠자는 사자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사자가 어린 양을 잡아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자는 어린 양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사자가 어린양을 잡아 먹었다고 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시간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 행위의 뒤에 놓여 있는 평화를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8.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 쿤달리니 요가(2)

[184] 당신이 숨을 들이마실 때 함(Ham)이라는 소리가 들리고, 숨을 내쉴 때 사(sa)라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호흡 자체가 언제나 당신에게 당신이 함사임을 말해주고 있다. 만일 그 소리가 함-사가 아니라 사-함으로 들린다면, 그것은 “내가 그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호흡에 대한 명상이다.

[188-190] * 사랑의 다섯 가지 형태
1) 가장 낮은, 처음의 사랑 : 주인에 대한 노예의 사랑
2) 친구들간의 사랑
3)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4) 배우자끼리의 사랑
5) 사랑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단계

[195] 꿈과 신화는 같은 종류의 것이다. 둘 다 우의 단계, 곧 꿈꾸는 의식의 상태에 있다. 당신과 당신의 꿈이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과 당신의 신은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나에게 그것을 강요하려고 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존재와 의식을 가지고 있다.

[200] 우리의 최고의 신은 우리의 가장 큰 장애이다. 이것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사상과 감정의 완성을 상징한다. 당신은 그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된다.

[202] 전우주가 여신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지옥은 바로 아래에 있다. 천국은 바로 위에 있다. 지옥에는 어떻게 해서 떨어질까? 자신의 자아를 완고하게 닫아버리는 사람은 그것에 사로잡혀버린다. 지옥이란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천국에는 어떻게 해서 오를까? 마음을 열면 마침내 모든 것이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9. 천상계에서 하강: 「티베트의 사저의 서」

[206] “도대체 죽은 사람에게 영혼이 더듬어가는 여행을 가르쳐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1) 사람은 한순간에 완전히 죽는가? 신경이 죽어가는 시간이 있지 않은가? 분명히 육체는 한순간에 죽지 않는다.
2)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208] 내부에 죽음을 지니지 않은 생명은 결코 생명이 아니며,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이란 당신의 내적인 죽음의 과정, 연소의 과정이다.

[213] 당신의 악덕은 당신의 미덕이다. 이 샤크티의 특징은 끈기이다. 끈기의 부정적인 면은 완고함이다. 만일 당신의 미덕이 완고함이라면, 그것을 보존할 일이지 없애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자기의 성격을 개조하려고 할 때 생기는 문제이다.

[213] 희곡「에쿠우스(Equus)」에서 정신분석의가 깨달은 심리학적인 문제는 자신의 환자인 소년을 “치료하는” 동안에 소년에게서 그의 신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이다. 니체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악마를 추방할 때는 자기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추방하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배를 째고 내장과 뼈를 발라낸 생선처럼 된다. 그들의 특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213-214] 만일 당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면 그 비열함을 굳게 지키라. 다만 그 에너지, 곧 샤크티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완고함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방향전환시킬 수 없는 사람은 완고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옥이다. 지옥이란 자기의 개별적 존재, 개별적 존재가 자신에게 의미하는 것, 자기의 인격, 자기의 소망, 선악의 관념 따위에 관해서 완고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따라서 그것이 당신의 미덕이자 당신의 악덕이다.

[214] 그의 샤크티인 “부처의 눈”을 한 여자들에게 둘러 싸인 이 부처의 특성은 아름다움이다. 그럼 그의 악덕은 무엇인가? 오만이다. 당신의 오만함이 당신의 아름다움 속에 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한다. 다만 그 방향을 바꾸어 당신이 뿜내는 아름다움이 영적인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오만함을 길러야 한다. 당신의 악덕을 제거해서는 안된다. 만일 당신의 악덕이 오만함이라면, 그것이 당신을 타락이 아닌 광명으로 이끌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일 이 신격자의 모습 속에서 재생한다면, 당신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자, 지금까지 천상계, 지옥 그리고 인간계라는 세 개의 재생의 세계가 있었다. 남쪽의 신은 자비를 베푸는 관대한 분이다. 오만함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는 것이 관대함이다.

[223] 라사 주변에는 6,000~7,000명의 승려가 있는 사원들이 있었지만 모두 파괴되어버렸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창 이런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시간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부동지는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승려가 있다면, 그는 정각의 광명을 얻었을 것이라고.
* 참혹한 일이야.

[226] 판카크사라는 “이담(Idam)”이다. 그것은 “선택한 수호신”-당신 자신이 선택한 신-혹은 이스타데바타(istadeveta), 즉 “소원을 비는 신”을 뜻한다. 당신이 그것을 자신의 신으로 삼는 한, 그것은 생명을 가진다. 그때 그 신은 당신 인생의 길잡이가 된다.
나는 독서와 경전의 신인 판카크사라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것이 나의 이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잇는 모든 것을 독서에서 얻었다. 나는 불교도와 요가 수행자를 만날 때면 나의 독성 의해서 그들을 이해한다. 나는 부처 자신을 이해하려고 할 때도 부처보다도 이 이담을 앞세운다. 그것이 나를 떠받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신, 곧 이스타데바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신에게 충실하라. 그것이 당신의 길이다. 당신의 신이 어떤 신이건 간에 그 신을 통해서 부처의 전세계가 당신의 지식이 될 것이다.

10. 어둠에서 광명으로 :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

[235] “우리는 어떤 제의를 행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미 제의를 행하고 있다. 단지 그것에 대해서 명상하지 않을 뿐이다. 밥 먹는 일도 제의이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라. 벗들과 의논하는 일도 제의이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라. 벗들과 의논하는 일도 제의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238] 디오니소스 “두 개의 자궁에서 태어난 자” 곧 근원적인 여성적 생명과 물려받은 남성적 생명을 함께 갖춘 자이다.

[248] 우리가 자아와 공포와 욕망에 집착하는 한,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한, 우주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오늘의 진실한 경험을 직시하라. 과거의 경험으로 그것을 해석하지 않도록 하라.
선(禪)의 과제 중의 하나는 경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의 의미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인생에 의미는 없다. 꽃에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찾는 것은 경험을 찾는 것,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11. 길[道]은 없었다 :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261]“L'étole cherche la mer(운명의 별은 바다를 찾는다)” 이졸데는 “la mer(바다)”를 마치 “l'amour(사랑)”처럼 발음한다. 바다 탓일까? 뱃멀미 때문일까? 이것이 사랑이란 것일까?

[261] “트리스탄, 당신은 죽음을 삼키고 말았군요.”
“당신 말은 이해할 수 없군요.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이졸데를 사랑하는 나의 아픔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내 생명이라고 말하겠소.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세상에서 내리는 벌을 가리킨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지옥의 영원한 저주를 가리킨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

[262] 황무지는 진실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규범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의 세계이다.

12. 고상한 마음 : 트리스탄과 이졸대의 궁정 연애

[281]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다. 눈은 마음이 호감을 느끼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따라서 눈이 그런 이미지를 발견했을 때, 만일 그 마음이 상냥한 마음이라면 그때 사랑이 생긴다.”

[281] 무엇이 사랑을 위협하는가? 명예이다.

[288] “자신이 선택한 길을 여행하는 것은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실제로 그렇다; 그 길을 여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특히 자신만의 희열, 자신만의 열망을 추구하는 사람은 균형을 잃고 열망의 급류로 떨어져 떠내려가지 십상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교훈이다.

[293] 독약과 미약은 사랑의 고통, 즉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약이다.

13. 성배를 찾아서 : 파르치팔 전설

[302] 형이상학적인 신비는 모든 대립물을 초월한다. 선과 악의 대립 속에 있는 한 당신은 윤리의 영역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의 차이를 알았다는 이유로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자연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308] 노인은 파르치팔에게 딸을 주겠다고 말한다. 사실 그것은 옛날부터 이어져온 훌륭한 관습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진실하지 않게 살아가는, 자기의 삶이 아닌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황무지”의 문제를 안고 있다. 파르치팔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저 주어지는 여자와 결혼하지는 않겠다. 내 아내는 내 손으로 고르겠다.” 그것이 결혼과 사랑의 최초의 결합이다. 결혼과 사랑의 분열이라는 문제에 대한 최초의 답인 것이다.

[310] “허락해주신다면 사실을 말씀드리겠는데, 그들은 서로 팔과 다리가 뒤엉킨 채 ‘우리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거야’하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결혼은 완성되었다.”
- 볼프람

[311] 모자에 공작 깃털을 달고 있다. 그가 바로 성배왕이다.
* ???? 앞장에서 인도부분에서였던가.... 깃털, 우산으로 상징되는 존재는 자아를 파괴하는 존재였던 것 같은데....

[312]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마법에 걸린 사람은 그것을 푸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 풀 수는 없다는 점이다. 마법을 푸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마법을 풀 수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자발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마법을 푼다.

[319] 마지막으로 트리브리젠트-“나는 그 성으로 돌아갈 작정입니다.”라고 말하는 파르치팔에게 “그렇게 할 수 없소”하고 말했던 그 은자-가 파르치팔에게 이렇게 말한다. “파르치팔, 당신의 불굴의 의지가 하느님의 율법을 바꾸었소.” 이말은 허풍이다. 우리 안에 있는 신은 율법을 주지만 그것을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신은 어디까지나 우리 안에 있는 신이다.
* 바그너의 가극의 한장면

Ⅲ. 내가 저자라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을 읽은 후에 읽게 된 조셉 캠벨의 3번째 책이다. '신회의 힘'은 그의 연구의 통합편이라고 여겨지며, '천에 얼굴을 가진 영웅'은 연구의 한 분야의 집약서라고 여겨진다. 이번의 책도 각장을 분해해서 한권의 다른 책으로 나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루는 내용이 방대하다.

1) 구성에 대해서
이 책은 캠벨이 그의 전생애에 걸친 연구를 그의 인생의 후반기에 행해진 강연에서 다룬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내가 저자가 되어 본다는 것은 내가 수십년동안 연구를 해온 사람이라면, 그 방대한 연구 중에서 무엇을 주제로 다룰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같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간의 모임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닌, 이 분야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왜 신화인가?’라는 질문에 먼저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에 대한 답을 중심으로 강연을 짜야하지 않을까.

강연이 시리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동안 연구해온 것들을 모두를 다루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에 강연에서는 신화가 강연자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오늘날 갖는 의미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신의 이미를 짚어볼 것이다. 그 후에 여러 시간을 할애하여 신화가 과거와 현재에 세계의 곳곳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어떻게 전승되어지는지, 과거의 신화는 현대에서 어떤 형태로 바뀌어 나타나는지를 다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동양과 서양의 신화를 소개하고 비교하게 될 것이다.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다른점을 짚어볼 것이다. 공통적인 것과 차이점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의 의미를 찾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로써 신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신화는 인도 신화를 주로 다룰 것이고, 서양신화는 뿌리라고 여겨지는 그리스로마신화로부터 시작해서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아더왕과 성배전설 그리고 성서에 나오는 것들을 몇 개 강연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과거의 신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름으로는 현대의 창작 신화를 다룰 것이다. 현대의 창작신화를 다루면서 신화를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다룰 것이다. 현재의 창작신화를 다루면서 다시 신화와 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다. 이부분이 전체를 정리하는 강연이 될 것이다.

이렇게 구성하면 재미있을까? 저자가 책에 넣은 소재들은 모두 흥미있는 것들이다. 기존에 들어보지 못한 소재이기 때문에 흥미를 끄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겪게되는 인생이라는 모험 가득한 여행의 축소판을 담은 신화를 설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캠벨의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1장 서론, ‘신화의 기원’에서 신화의 의미를 다루었고, 2장 ‘전설속에 사는 사람들’과, 3장 ‘신석기 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4장 ‘이집트, 출애굽, 오시리스 신화’에서 과거의 신화를 다루면서 그 안에 숨겨진 인간간의 생애를 다루었다. 3장은 탄생, 4장은 신과 죽음에 대해서 다루었다. 5장은 앞장과는 다른 별개의 장으로 동양철학의 시작 장이다. 내면의 탐구가 시작된다. 6장 ‘정각에 이르는 길’, 7장 ‘이드에서 자아로’, 8장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9장 ‘천상계에서 하강’은 모두 동양철학, 동양의 신화에 관련된 부분으로 개인의 깨달음의 길과 관련이 있다. 10장 이후는 서양신화들이다. 10장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는 서양신화의 과거 중에서 고대를, 11장 ‘아서왕과 전설과 서양의 길’은 서양신화의 중세부분을, 12장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 연애’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13장 ‘성배를 찾아서:파르치팔의 전설’은 영웅, 개인에 관한 것이다. 사회가 만든 규율에 갇히지 않은 현재를 즐길 수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파르치팔의 모험은 현대의 모험담과 기본틀이 같다. 캠벨이 책에서 다룬 것 중에 현대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이다. 14장을 추가하여 넣는다면 아주 현대적인 이야기, 창작신화를 하나의 장으로 다루었으면 한다.
현대적인 이야기로 잠깐씩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과 T. S. 엘리엇의 장편시『황무지』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으로 잠깐씩 이야기할 뿐이다.

2) 주요 소재
캠벨이 각장에 주요 테마로 다루는 것들은 1)아메리카 인디언 신화, 2)이집트의 죽음의 신 오시리스, 3)깨달음과 차크라 그리고 인도 신화와 서양신화의 1:1 비교, 4)신화의 한 측면으로서의 성서, 5)파르치팔과 성배 전설, 6)연애와 천국과 지옥의 의미 등이다. 이 소재들은 시대와 장소가 다르다. 이것들을 접할 때, 독자로서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배경지식이 부족하여 저자가 들려주는 것을 흘려버릴 염려가 있다. 독자는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그것을 센서로 사용하여 자극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법이다. 독자는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곳의 전통을 해석의 도구로 들이댄다. 이 도구는 유용하지 못하다. 문화만큼이나 국지적이다. 자신이 살아온 사회의 울타리라는 이 도구는 더 이상 쓸모 없음을 알았을 때, 독자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3) 화자의 어투
이 책은 강연의 내용을 그대로 전사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설화와 관련된 그림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책보다는 강연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앞에 대상을 두고 말하는 듯한 어투가 빈번이 나오는 장이 있는데, 개인의 깨달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이다. 상징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깨달음의 촉구는 ‘~하라’는 식으로 나온다.

4) 수많은 창작물, 사람들을 끌어오기.... 부족한 듯한 마무리
맨 마지막 문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몇 번을 읽었다. 왜 이러한 문장으로 마무리를 했을까? 대부분의 책들은 마지막 장에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요약해서 담는다. 이 문단이 그러하다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결국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수많은 이야기를 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트리브리젠트-“나는 그 성으로 돌아갈 작정입니다.”라고 말하는 파르치팔에게 “그렇게 할 수 없소”하고 말했던 그 은자-가 파르치팔에게 이렇게 말한다. “파르치팔, 당신의 불굴의 의지가 하느님의 율법을 바꾸었소.” 이말은 허풍이다. 우리 안에 있는 신은 율법을 주지만 그것을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신은 어디까지나 우리 안에 있는 신이다. (p.319)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위해서 자신 혼자만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캠벨은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세계의 수많은 신화와 현대의 시(황무지), 소설(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오페라(트리스탄과 이졸데), 고전 소설, 철학자들의 말을 끌어들인다. 그들의 말이 곧 캠벨의 말이다. 마지막 단락도 이런 방법으로 기술한 것 같다.

한폭의 그림 속에는 아무런 목적없이 대상이 배치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상징하기 위해 창작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치된다. 이 책도 이런 상징들을 따라가야 한다. 따라가기 버거울 때가 많다. 한번 흘끗보기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캠벨이 끌어들인 화자들의 말을 캠밸의 말로 다시 새겨 들어야 하는 과정에서 한번씩 더 생각해 본다.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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