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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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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0일 08시 24분 등록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구본형 지음/휴머니스트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수 많은 곳에서 작가 구본형을 다음과 같은 단어로 표현한다. ‘변화경영전문가’로. 43살에 ‘변화경영전문가’란 직종을 본인이 직접 만들고 널리 알려왔다. 그리고 벌써 1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이제 ‘변화경영전문가’란 단어는 그다지 낯설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 사회에 익숙한 직종이 되었다. 변화경영전문가하면 구본형이고, 구본형하면 변화경영전문가가 떠오를 정도가 되었으니까.

그는 10년마다 자서전을 쓸 것을 생각했고 2004년 바로 이 책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개정판 :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를 출간했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치 않은 자서전이란 부제를 붙인 이 책은 작가 스스로의 약속이자 행동이며 실천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마흔 살의 10년, 40대에 대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온 가슴을 울릴 정도의 힘으로 펼치고 있다. 변화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이야기는 변화를 갈망하는, 변화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삶은 변화 그 자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언젠가 그는 말했다. 이제 변화경영전문가를 넘어 ‘변화경영사상가’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종국에는 ‘변화경영시인’이 되고 싶다고. 그게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모습이라고.

나는 이미 그가 ‘변화경영사상가’의 영역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지식을 넓혀 가는 것이 전문가라 하고, 지식이 아닌 지혜와 삶의 차원 그리고 철학을 통한 방향잡기를 하는 사람을 사상가라 한다면 그는 변화에 대한 사상가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설사 지금 당장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는 크게 개여치 않을 것이다. 이미 그는 그 길위에 서 있으며 한발 한발 계속하여 자신의 비전을 향해, 꿈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조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이 즐기며 기쁜 마음으로 서서히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이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기질은 내향적이며, 직관적이고 감정적이며 또한 인식형이다(INFP). 내향적 기질은 그를 수동적 적극성을 띠도록 만들었고, 직관적이며 감정적인 모습은 숲을 보되, 각 개인의 마음을 두루두루 살피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지 사람들을 기피하거나 회피하진 않는다. 오히려 세밀하고 세심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짧고 굵게 말하거나 글로 대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과 글은 울림이 있고 가슴 떨림이 있다.

그가 만든 개인대학은 이미 4번째 학생들을 맞이 하였다. 3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올해는 작년과는 또 다른 커리큘럼과 진행방식으로, 개인대학에도 변화를 통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러한 실험은 그가 말한 10년 내내 진행될 것이다. 그리하여 완벽은 아니지만 스스로 완벽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될 때까지 계속하여 변화시키고 변모시키는 작업을 할 것이다.

그는 항상 말한다.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뒷물이 앞물을 뛰어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제자가 잘 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159-160P)’고. 그것은 그 스스로가 실천한 행동지침이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다시 그대로 실천해 주기를 바라는 진심이다. 또한 이탁오의 말처럼 친구와 스승간의 경계를 딱 부러지게 구분하지 않고 스승같은 친구, 친구 같은 스승을 원한다. 어쩌면 그의 머리 속에는 친구, 스승, 제자가 하나의 단어로 인식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는 열린 사람이고, 항상 열어두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창조적 부적응자’들이 자꾸 모여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현재 행복한 사람이지만, 내가 볼 때 그 행복을 쟁취한 사람이기도 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을 펴내며

평범한 사람들의 ‘밑으로부터의 이야기’, 이것이 위대한 인물과 힘있는 자들의 역사와 함께 또 다른 역사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6P)

역사는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으면 잊혀진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6P)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경영’은 바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신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6P)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자신의 세계도 없다. 기록의 형태는 일기여도 좋고, 메모여도 좋고, 홈페이지여도 좋고, 사진첩이어도 좋고, 이 책 같은 자서전이어도 좋다. 무엇이 되었든 개인의 역사는 스스로에 의해 편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중 속에서, 군중으로, 흔적 없이 매몰되는 자신을 잊지 않는 길이다.(7P)


프롤로그

문화는 처음 만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것이다.(10P)

이 책은 놀이며 유희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고 욕망에 대한 절제다. 못 가본 삶에 대한 질투다. 그동안 배운 학습의 노트며, 읽었던 책들의 주석이다. 자전적 소설이고, 소설적 자전이다. 지나간 삶에 대한 파괴고, 앞으로 살 삶에 대한 창조다. 나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보려는 실험이다.
과거는 늘 엄격하고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 감옥이기도 했다. 과거가 날 만들었으니, 과거를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또한 내 미래의 과제다.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였다. 살면서 나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12-13P)


1장 지난 10년

흰 구름 뜬 하늘 너머 바람에 섞인 가을은 탐스럽고 풍요롭다. 문득 산다는 것이 햇빛처럼 즐거워졌다. 나는 한 개의 빛의 입자처럼 춤을 추고 싶었다.(17P)

마흔 살은 오래 끓어 걸쭉해지기 시작한 매운탕이다. 바야흐로 인생의 뼛속 진국이 우러나오는 시기다. 마지막 젊음이 펄펄 끓어 오르고, 온갖 양념과 야채들의 진수가 고기 맛에 배고 어울리는 먹기 딱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절정을 살짝 지나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마흔은 한 웅큼 잡히는 옆구리 살에서 시작한다. 술 취한 다음날 아침이 괴로워지고 숙취가 길어지면 마흔도 익어간다.(17-18P)

육체는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힘줄처럼 질기다. 그러나 육체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안으로부터 비대해지고 느슨해진다. 모든 것의 궤멸은 늘 내부로부터 온다.(18P)

마흔은 가끔 불면증과의 동행과 동침을 의미했다. 또한 불면은 또 다른 고독을 즐기게 해 주는 방법이며,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기회이기도 하다.(20P)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20P)

지식은 지식에 적용됨으로써 증식된다.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체험한다.(22P)

자유는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확실한 것, 굳건히 서 있는 것들의 질서 안에서 자유는 끝나고 만다. 절실하게 바라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 한다. ‘이내 스스로를 함부로 던져 망가뜨리고’ 만다.(26P)

과거와의 연결, 심지어 미래와의 연결도 가끔 끊어버리고, 이 돌연한 시간적 격리, 건망증을 휴가로 즐길 수 없다면 바보다. 나와 나의 불일치, 시간적 흐름에 대한 일탈과 소거는 아주 유쾌한 지구 탈출 같은 것이다.(30P)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문제에 끌려다니는 것을 더욱 싫어한다. 나는 문제를 일상에 던져진 예기치 않은 모험과 도전으로 인식하곤 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면 새로운 단면과 만날 수 있다.(31P)

40대의 10년은 급격한 감가상각이 이루어지는 시기다.(32P)

나의 과거는 거대한 사회적 방망이에 의해 가슴을 강타당했다. 배반 같기도 하고 비애 같기도 하고 무력감 같기도 하고 허무 같기도 한 통증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뒷방 노인이 된 마흔이여.(33P)


2장 마흔 살


일 밖에 없는 일꾼은 성공한 실패자가 되고 부유한 노예가 되고 가족에게 미안한 가장이 되고 늘 바쁜 아이가 되어 무자비한 사다리의 꼭대기를 향해 질주한다.(38P)

‘굽이굽이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굽이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네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꽂힐 수 있느냐.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 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박남준,<나무, 폭포, 그리고 숲>중에서(40P)

마흔 살이 되면 인생의 마법을 떠나보낸다. 좀 더 순수하고 자유롭고 장난기 어렸던 젊은 시절을 떠나보내며, 사회적 관습이나 책임, 자의식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일 때문에 놀이를 포기하고, 책임 때문에 순수한 자유를 반환하게 되는 일상적 경험을 통해 마흔 살은 개인을 군중과 대중 속의 이름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넘어, 자유와 전통적 권위 사이의 힘 겨루기를 넘어, 진정한 사회화를 겪게 되면서 보수화된다.(42P)

젊은이들이 어느 날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되면서 자신의 가슴 속에 있던 ‘신적인 위대성의 흔적’을 지우고 당나귀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슬픔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지 않는다. 슬픔은 어느 날 비탄으로 바뀐다. “이제 마흔이 되었다. 그러나 해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에 내가 다녀간 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아, 나는 조만간 사라질 것이고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저물었다. 우리의 세대로 끝났다.”(44P)

마흔 살은 융통성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보는 긍정적 지혜가 위로가 되는 시절이다.(46P)

마흔의 나이에는 철학조차도 실용적인 것이 된다. 이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삶의 지혜다. 지혜란 ‘숭고하고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삶을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의미한다.(48P)

고귀하고 능숙하게 비껴가는 방법 가운데 최고의 것은 유머다. 유머는 일종의 여유와 휴식이다.(49P)

유머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환상적인 속임수다. 진실의 꾸며댐일 수도 있다. 불가피한 것에 대항하는 부드러운 대응이다. 유머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또한 유머는 중년의 고통을 치유해 주는 엔돌핀이다. 그것은 스트레스와 비극을 완화시켜준다.(50P)

중년의 과제는 각 개인의 내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치료이며, 재생을 위한 내적인 힘이다. 대체로 이러한 갱생의 힘은 절망과 고통 속에 감추어져 있다.(50P)

이상과 현실의 사이, 제3의 지점,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자리, 스스로를 놀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짐만 지고 가는 당나귀의 진실함이 어찌 사람들이 그리는 마흔의 삶이 될 수 있겠는가? 장난도 치고, 흐드러진 메밀밭을 달밤에 지나기도 하고, 물레방아간의 뒤로 숨기도 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제3의 지점이 마흔 살의 자리다. 개혁은 마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마흔 살의 문제는 결국 가슴과 영혼의 문제다.(51P)

마흔 살 이후의 인생을 경기의 후반전으로 표현하거나 연극의 2막으로 빗대기도 한다. 주인공들은 후반전을 위한 마지막 리허설을 준비하고, 준비한 모든 것을 무대 위에서 펼치기 위한 마지막 점검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맡겨진 배역이 없다.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더 이상 박수는 없다.(51P)

마흔 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의 지루한 2막이 아니다. 오히려 연극을 끝내고 진짜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파괴와 창조, 죽음과 재생이라는 이미지와 직결되며, 죽어야 살 수 있다.(52P)

삶을 연극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만약 삶이 연극이 되면, 삶의 개념이 삶을 지배하게 된다. 우리는 극장 밖으로 나와야 한다. 삶을 연극에 비유하는 것을 미워하는 이유는 삶을 극장 안으로 몰아 넣고 짜여진 연극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를 원한다.(53P)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나이

내게 마흔은 각성의 시기였다. 나는 40대의 10년 사이에 이루어지는 위대한 종결과, 똑같이 위대한 새로운 인생에 대해 말하고 싶다. 40대는 사회적 폐기물이 된 자신을 구해내어 빛나는 삶으로 창조하는 시간이다.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이 가능한 시기다. 어쩌면 반전만이 이 시기를 사는 교훈일지 모른다. 전환과 변곡, 이 두 단어야말로 40대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언어다.(53P)

마흔 살은 가진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내 지론이다. 다만 내가 거는 것은 돈이 아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나 자신을 건다. 나는 이 길을 택했다. 내가 도박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길 밖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흔이 익어가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계획했다. 나는 비장했다. 나의 40대는 죽음과 친근해진 10년이었다.(54P)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라는 점이었다. 한 세상이 어둠에 싸이게 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으로 빛난다.(56P)


3장 직장생활

조직에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 그들은 늘 학습한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와 경쟁한다. 전문성이 자격증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식은 변하고 경험은 늘 다르게 적용된다. 자신의 소질을 이해하고 잠재력을 계발한다. 이들은 대체로 겸손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애정 없이는 자신을 불태울 수 없다. 어떤 분야든 자신을 불사르지 않고서는 핵심에 다가갈 수 없다.(71P)

아이러니하게도 필요한 사람들은 떠남을 늘 준비하는 사람들이다.(71P)

니체는 가장 위험한 조직원은 ‘그의 이탈로 조직 자체가 파괴되는 조직원’이라 불렀다.(71P)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마흔 살이 넘으면 갑자기 경제적 가치가 급락하는 사회로 들어서게 되어 발걸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준비도 없이,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구렁텅이에 처박히곤 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가장 성숙한 40대 중반에, 아직 활력이 넘치는 중년에, 새로운 세계로 나와야 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도전이기도 했다.(72P)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적인 일이 아니다. 유전자는 바뀌지 않는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은 괴로운 과정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성과를 돌려줄 뿐이다.(75P)

마케팅은 유혹이다. 달콤해야 하고 향기로워야 하고 엄청난 새로움에 대한 약속을 흘려야 한다. 유혹은 올가미고 덫이다.(75P)

세일즈가 도망치는 고객에게 달려들어 창을 꽂는 것이라면, 마케팅은 짐승이 다니는 길에 온갖 화려한 미끼를 주렁주렁 단 덫과 올가미를 놓아 두는 것이다.(76P)

유혹은 설득 이전에 이미 설득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설득이란 언제나 스스로 이미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득의 제1의 법칙이다. 설득은 늘 미리 이루어진다. 미리 이루어진 설득, 무너진 자기방어를 유혹이라고 부른다.(76P)

모든 위대한 리더는 유혹에 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자신을 포장하든지, 크고 부드러운 젖가슴으로 지그시 눌러 이성을 설득시키든지, 위대한 사상을 통해 혼을 빼앗거나 달콤한 꿈 속으로 사람들을 몰고 간다. 매력이 없는 리더란 없다. 리더는 반드시 자신의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 유혹은 매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매력은 가장 자기다운 것에서 발산되는 페르몬이다.(76P)

전문가는 학위와 자격증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과거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학습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질 뿐이다.(79P)

경영 컨설팅 같은 지식산업은 사기와 진실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끝없이 학습하는 사람은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계속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들처럼 ‘달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나는 내가 ‘경계선을 걷는 사람(edge walker)’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79P)

죽지 않고 새로워지는 것은 없다.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81P)

나는 제2의 인생 속으로 들어갔다. 조직에게 양도했던 힘과 권리를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평범함과 군중의 품을 떠나면서 외로워졌다. 이제 스스로의 작은 나라를 세워야 했다. 내 안에서 ‘군주적 본능’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의 나라, 나의 세계, 나의 꽃을 피워야 했다. 그것은 겨울보다 더 추운 봄이었다. 그러나 꽃 터지는 봄은 왔다. 피워야 할 꽃, 만들어야 할 세계가 생긴 것이다.(82P)


4장 얼굴 - 페르소나

초상화의 생명은 정밀묘사보다 그 인물이 풍기는 분위기와 느낌을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초상화의 매력이다.(87P)

감정, 그것은 늘 쉴새없이 붓질을 하고 있다. 좌우 위아래로 움직이는데, 방향을 바꿀 때마다 붓의 앞뒷면이 바뀌게 된다. 앞쪽은 사랑이라는 염료가 묻어 있고 뒤쪽에는 증오라는 진흙이 묻어 있다. 혹은 부러움과 질투, 희망과 두려움, 무기력과 열정을 늘 칠하고 덧칠하고 반복된다.(88P)

눈은 엄밀히 말하면 두뇌가 밖으로 나온 기관이다. 그러니까 머릿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눈에 표현되게 된다. 눈이 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88P)

욕망이 자신을 충족해가는 것은 개인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욕망은 부숴뜨려 땅에 묻어야 하는 끔찍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힘과 에너지다.(100P)

평범한 사람들의 범상치 않은 이야기. 나는 이것을 인류의 미시적 역사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각자 그 안에 자신의 역사를 안고 산다. 부끄러움도 있고 후회도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도 있고 당당하고 장엄한 순간도 있게 마련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을 재료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102P)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102P)

생명은 내면에 있다. 우리의 내면은 늘 신과 만나는 장소다.(102P)

나는 나답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다운 것에 천착했고 매달렸다. 니체가 말한 ‘거리에 대한 파토스(pathos of distance)’를 추구했다. 이것은 차이에 대한 열정이었다. 차이는 다름이다. 그것은 다른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과 구별짓는 다름에 대한 열정이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은 어설픔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움과 긍정의 표상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더 다르게 만들려는 열정이다. 더 많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차이를 끊임없이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야 한다. 자기경영의 근간이 되는 것은 실천의 철학이다. 바로 자신의 과거와 경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104P)

내가 마흔이 되어 한 일은 그런 나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에 왔다.(104P)


5장 가족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도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이탁오(李卓吾)-(108P)


갈등은 마음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나침반이 북쪽을 찾고, 그곳을 가르키는 순간 부르르 떨리는 것, 이것을 나는 갈등이라 부른다. 갈등 없는 판단이란 반복하여 익숙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것에는 갈등이 따라다닌다.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의 기대와 자신의 기대 사이에서, 이익과 마땅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편함과 배려 사이에서 우리는 늘 잠시 망설이게 된다.(110P)

함께 먹는 다는 것은--아마 그래서 식구라는 단어가 생겼겠지만--감정을 공유하게 만든다. 쉽게 친해지기 위해서는 밥을 같이 먹는 것이 꽤 중요한 일이다. 먹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되고, 먹는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 이완을 위한 휴식이기 때문에 휴식 시간에 만난다는 홀가분함이 있다.(113P)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 산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늘 섞여 있었다. 작은 수고들은 이런 기쁨을 위해 동반되는 선물의 포장지거나 아름다운 포장 끈이나 리본 같은 것들이다.(114P)

나는 어떤 것을 보고 과거의 이미지를 연상하거나 지나간 사건들을 떠올리고 그것이 내게 무엇이었나를 물어보고 즐기는 사람이다. 나는 의미를 찾는 사람이고 나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 조급한 세상에서 가장 먼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는 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멀리 보는 것을 좋아한다.(116P)

우린 세상을 바꾸려는 축이고, 아내와 큰 딸은 세상을 즐기고 거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다윈의 적자’들이고 나와 작은 딸은 ‘돌연한 변종’들이다.(117P)

나는 시간의 불모지를 내게 불하했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나만의 시간대로 만들었다. 마치 모두가 버린 시간의 밭을 일궈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찾아내지 못했다면 영원히 잠 속에 묻혀버릴 뻔한 보물 같은 땅이었다.(121P)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길이 있었다. 현실이란 그저 ‘지금의 상황에 대해 남들의 생각’, 즉 다른 사람들의 견해일 뿐이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에머슨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이 그 사람의 성격임을 종종 잊고 지내는 것’ 같다. 누구의 삶이든 그것은 늘 그 주인을 닮게 마련이다.(122P)

친구는 생활의 일탈을 서로 돕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것이다. 혼자 하지 못하는 것을 함께 하게 된다. 삶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친구들이다.(128P)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혼자 그 긴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짐을 각자 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 있으면 훨씬 낫다.(129P)

즐거움 역시 함께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즐거움은 그래야 커진다. 즐거움에는 무게가 없다. 그것은 깃털 같아서 하늘을 날 수 있다. 즐거움은 우리가 지고 가는 삶의 무게를 덜어준다.(129P)

평생 가고 싶으면 늘 반갑고 그리운 관계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129P)

따질 것도 없고 계산할 것도 없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함께 가는 것이 친구들이다. 친구란 함께 어울림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없이는 그 어울림이 빛날 수 없다.(130P)


6장 자연

봄은 햇빛과 바람이다. 그것처럼 언 땅을 녹이는데 효과적인 것은 없다. 땅은 빨래와 같다. 언 것을 해동하여 물이 질펀해지면 바람으로 날려버려야 한다. 그러면 따뜻하고 약간 촉촉하거나 고슬고슬한 봄 땅이 만들어진다. 걸으면 발바닥에 봄 땅의 부드러운 울렁거림이 느껴진다. 이내 물이 오르고 대지는 온 몸을 열어 속에 있는 것들이 나오게 해준다. 싹은 그때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135P)

홀로 산에 있으면 아름다움에 취하게 마련이다. 홀로 있음에 취하고, 바로 그 때문에 고독 너머에 있는 연결끈을 더듬더듬 찾아내게 된다. 언어의 표현방식을 넘어 교류되는 정신적인 교감은 자연이 우리의 마음을 여는 방식이다.(137-138P)

나는 신과 가까워진다. 나는 잠이 든다. 세상은 잠시 사라지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사라졌다가 이내 되돌아온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렇게 떠나기 전 입었던 옷을 입고 깨어나는 것이다. 언젠가 깨어날 수 없다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다.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들은 우리가 입었던 옷을 바꿔 입혀준다.(139P)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순수한 아이의 생각이 야망으로 가득한 젊은이의 생각이 되고 이내 세상의 한계에 지쳐버린 장년이 되고 노회한 노인이 되고 이윽고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생명이 주어진 순간 삶은 시작되고, 삶이 주어진 순간 죽음의 시계도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140P)

사랑은 가장 극적이고 가장 드라마틱하고 가장 빠져들기 쉽고 가장 상처받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게 사랑의 매력이다. 사랑의 개념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천변만화의 격정이다.(141P)

왜 변해야 하느냐고?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하늘의 구름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바다의 물결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142P)

곽박(郭璞)의 시에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냇물에는 멈춰선 물결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변화에 대한 묘사는 찾기 어렵다. “밖으로 자연의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체득해야 한다.(外師造花 中得心源)”는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둘 충고다.(143P)

때때로 나는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가 가장 마음이 편한 때다. 어떤 조화로움이 나를 밀고 여울처럼 가슴으로 퍼져오는데, 그때 평화를 느끼게 된다.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은 곧 나의 말이다.(144P)

G.K.체스터턴의 말대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감탄이다. 기쁨은 도처에 있고 ‘늘 활동중’이다.(144P)

빙켄의 성녀 힐데가르트가 “나는 스며든다. 초록빛 풀밭에, 꽃들에게, 그리고 살아 있는 물살에. 나는 깃든다, 죽지 않는 모든 것에. 나는 곧 생명이므로.”라고 말할 때, 그녀는 바로 나였다.(145P)

나는 나무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땅이지만 가야 할 곳은 하늘이다. 나는 땅에서 하늘로 간다. 몸이 땅에서 나와 영혼이 되어 하늘을 날아가듯, 땅을 움켜쥐고 온몸을 던져 하늘을 향해 자란다. 나의 모든 힘은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온다. 어두운 곳은 언제나 비옥한 토지였다.
나의 내면은 땅과 같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렵고 위대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가치가 뒤섞여 있고 뜨거운 용암으로 가득하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하고 무궁무진한 자산은 땅이다. 나는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나는 나를 이용하고 활용한다. 가장 먼저 나의 모든 가능성을 탐사하고 이용해야 한다. 내 내면을 뒤지고 곳곳에서 흐르는 에너지의 샘들에 깊고 굵고 튼튼한 뿌리를 견실하게 박아두어야 한다. 이 힘들만이 나를 키울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교훈이었다.(147P)

나무는 또한 해마다 새로운 자신을 분만시킨다. 수없이 자신을 탄생시킨다. 사는 법은 죽는 법에 있다. 자라는 방법은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탄생하는 과정이다. 죽지 못하면 다시 태어남도 없다. 죽음과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파괴와 생성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장이다. 이것이 나이테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늘 자신의 시체를 내다버릴 수 있어야 한다. 나무는 그 일을 아주 아름답게 해내고 있다.
낙엽은 나무의 지혜다.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한 창조적 해결책이 바로 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 나무의 멋이다. 가장 장엄한 문명의 단편이 장례이듯이 낙엽은 죽음조차 아름다운 삶의 과정으로 창조해낸다. 나무는 해마다 한 해의 삶을 기록한다. 한 겹의 나이만큼 줄기에 그 흔적을 남기고 두꺼워지고 키가 더 자라게 된다. 나무는 매년 죽는다. 이 상징적 의식이 나무가 자라는 방법이다.
나도 죽어야 한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나무가 죽을 때 나도 죽어야 한다. 나에게 낙엽은 내 책이다. 꽃과 나뭇잎, 그리고 열매는 나무의 1년의 삶이다. 내 책도 내 1년의 삶의 기록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내 1년도 떨어진다.. 그리고 열매를 남기듯 나도 내 책을 남긴다. 책 한 권이 쓰여지면 내 1년도 지난다. 나무가 다음해에도 똑같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이 혹독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을 거친 나무는 이미 전 해의 그 나무가 아니다. 나도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영원히 죽는 것이다. 살아 있으나 이미 죽어버린 정신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149P)

한때 감자나 벼, 밀, 보리 등은 들판에 자라던 잡초였다. 인간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 덕분에 이것들은 영토를 엄청나게 확장하게 되고 번영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들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이용하여 번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식물들이 펼치는 고도의 유혹--먹고 그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즐겁게 걸려든 것이다. 인간은 식물을 위해 봉사한다.(151P)

나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나는 날마다 내게 귀화한 생각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육에 담아 수천 개씩, 수만 개씩, 수백만 개씩 퍼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씨앗을 마음 속에서 키우면서 ‘자신의 생각으로 귀화한 생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도처에서 번영할 수 있는 전략이다.(152-153P)


“스스로 정정한 나무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쉬고 그 나무를 부러워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나무의 열매를 가져다 심고 싶어할 것이다. 스스로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좋은 씨앗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하루를 보내도록 해야 한다. 날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이 쓰일 곳을 마음대로 배분하고, 그 일의 가치가 빛나는 일을 하며, 스스로의 삶을 즐겨라. 삶 자체가 유혹이 되게 하라.
로댕의 말을 잊지 마라. ‘사랑하고 감동하고 전율하면’ 그 삶은 매혹적인 것이다.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변화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행해 아주 많은 씨앗을 날려야 한다. 어떤 것은 실종되고, 어떤 것은 시멘트 같은 마음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결국 누군가의 마음으로 들어갈 것이다. 자연은 아주 많은 낭비를 즐긴다. 이것이 자연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이유다. 따라서 적어도 1년에 한 권은 책을 써라. 이것이 열심히 일을 한 기준이다. 세상을 해야해 많은 시그널을 보내야 누군가 대답하게 된다.
씨앗이 적절한 곳에서 쉽게 발아할 수 있도록 늘 더 나은 방법을 연구하라.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싹이 나고 푸른 잎을 단 아름다운 줄기로 자라나도록 늘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라.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행동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실천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과 색깔과 맛을 담은 향기로운 과육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 자연의 맛은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가진 품종을 만들어 내라.“(153-154P)


7장 건강

‘의학기술이란 자연이 질병을 치료해주는 동안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볼테르-(158P)

나이가 든다는 것은 늙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그 속에 붕괴된다는 모멸과 서서히 몰락한다는 수치심을 포함하고 있다.(160P)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뒷물이 앞물을 뛰어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제자가 잘 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159-160P)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언젠가 1세기의 역사학자 A. 팰그레이브라는 사람이 《상인과 수도사》라는 책에서 한 말이 인용된 것을 본 적이 있다. “섬유질이 형성되고 모든 기관에 생명이 부여되는 순간에 나타난 최초의 맥박 그 자체가 죽음의 근원이다. 신체조직들이 채 형성되기도 전에 이미 그 조직들이 들어가 묻힐 무덤이 마련되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된다. 또한 생명은 죽음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생명의 순환이다.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 마치 변하지 않는 것 없이는 변하는 것도 없고, 어두움 없이는 밝음도 없는 것과 같다. 어두움은 늘 생명이 자신을 준비하는 참으로 비옥한 토양이다.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니고 썩는 것들만이 자신을 땅에 버릴 수 있다. 땅에 버려져야 ‘무엇’이 될 수 있다.(161-162P)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무르익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야 할 바로 그때가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쓴 후에 남의 것을 탐할 수는 없겠지요.”(164P)

문명은 인류가 여성화되는 과정이었다. 문명의 역사 대부분의 주인공은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화려하고 빛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지면 윌 듀랜트의 지적대로 남성은 ‘자궁, 즉 인간이라는 종족의 주류인 여성에게 조공을 바치는 존재’였다. 여자들은 가축을 길들였고, 마지막으로 남자를 길들였다. 남자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이라는 사회적 특질을 배우고 익히도록 했다.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즉 아무 때나 짝짓기를 하고, 음식을 탐내고, 싸움질을 해서는 안 된다. 문명의 본질은 오랫동안 뿌리깊게 자리잡은 사냥꾼의 습성과 겨우 최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사회적 본능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165P)

역사가 인류의 시간적 기록이듯이 개인의 역사 역시 그 삶의 시간적 기록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개인적 역사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은 다양하지만 개인의 역사는 늘 자연과 문명의 갈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때때로 한쪽에 치우치고 때때로 반전하고 이윽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절한 융합과 균형을 잡아가기도 한다. 문명은 욕망이 과도한 탐욕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복제를 시도할 때 제동을 걸어준다. 부모의 이름으로, 학교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법과 여론의 이름으로 말이다.(166P)

하루살이들에게 우리는 신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먹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일지 모르지만, 인생 100년도 한숨과 같은 것이다.(168P)

우리는 결국 노령 때문에 죽는다. 우리의 몸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마모되고, 결국은 함몰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우리를 구성하는 세포가 마모되어 궤멸하든, 세포 속의 생체시계가 마지막 초점을 멈추기 때문이든, 결국 시작한 생명은 그 시작부터 끝을 포함하고 있다. 죽음은 모든 생명이 시작과 더불어 반드시 치러야 할 빚이다. 이것은 어떠한 예외도 없었다.
그러므로 여전히 욕심스러운 ‘나이 듦’은 과다한 욕망에 차 여전히 ‘두 개’가 되고 싶은 세포, 즉 암과 같다.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순간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168P)

마흔은 죽음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나이의 시작이다.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또 다른 방식의 이해력이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게 되는 시기라는 뜻이다.(176P)

'죽음이 명함을 남겨놓고‘ 간 다음 적절한 때,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에서, 참을 수 있을 만한 짧은 통증 속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것이 좋은 일이다. 삶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시계의 초침을 뒤로 돌리려는 부질없는 노력이 아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천천히 삶의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이다. 두루마리의 앞부분, 즉 젊은 시절의 그림이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싱싱하고 발랄하고 모범적인 것이라면, 나이가 들면서 짜놓은 인생의 직물은 은은하고 통찰력에 차 있고 완숙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의 부름에 따라 모두 놓아두고 낡은 껍데기만 남기고 떠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176-177P)

나이 먹음은 가을을 즐기는 것이다.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릴케처럼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신이여, 우리 각자에게 합당한 삶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 삶에 걸맞은 ‘합당한 죽음’을 주소서.”(177P)


8장 길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기에,
비 내리는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멸을 꿈꾸니,
이 오후 시간을 즐겨라.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는 시간이니,
하루의 질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예술.‘
-한 개의 시처럼 보이는 이 잠언들의 화자는 여러 명이다.
인용한 소절별로 패트릭 피어스(아일랜드의 작가), 수잔 어츠(미국의 소설가),
애니 딜라드(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미국의 말썽쟁이) (181P)

30년 혹은 40년을 더 산들 그때 돌아보면 역시 인생은 한 줌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때로는 즐거움으로, 때로는 막막한 슬픔으로 남았던 그 사건들이 다 지나가 흩어진 꽃잎 같은 꿈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직 살 시간이 남아 있을 때는 과거의 일들이 추억으로, 현실과 이어지는 원인으로 남아 있다고 인식하겠지만, 마지막 숨은 이런 모든 것들 역시 한순간에 일어난 찰나의 것들임을 증명해 줄 것이다. 원인도 결과도 없이, 느닷없는 장면들의 중첩으로 떠오를 것이다.(182-183P)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모든 일들 역시 과거만큼 분명한 꿈이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비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나는 꿈을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183P)

내 말은 미래의 꿈 그 자체가 믿음을 통해 추억만큼 분명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갇히는 것만큼 미래에 갇힌다. 추억으로서의 역사와 꿈이라는 소설은 둘 다 인생에 중요한 것이다.(183P)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과거시제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일을 과거시제로 쓰는 순간 내게 이미 일어난 일이 된다. 미래를 과거로 인식하는 것은 정신적 작업의 하나다. 나는 나를 ‘정신적 여행자’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은 날개 같은 것이다. 시간이라는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활공한다. 모든 것이 꿈으로 판명되는 마지막 날에 느끼는 그 아득한 자유를 지금부터 즐기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지금 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도 과거에 갇혀 있는 나를 미래의 빛을 따라 아름답고 화려하고 자유로운 이야기 속으로 데려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결말, 그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무엇이든 꿈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꿈꾸지 못한 것들만이 내 인생이 아니다. 꿈꾸지 못한 것 가운데 더 아름다운 인생이 있을까 봐 걱정이 된다.(184-185P)

추억과 꿈은 같은 것이다. 하나는 일어났다고 믿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꿈이다. 하나는 이미 깨어난 꿈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꿀 꿈이다. 둘 다 지금이라는 현실을 속박한다. 혹은 지금을 구원해준다. 때때로 그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186P)

꿈은 시간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다. 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을 버리는 것이 꿈이기도 하지만, ‘욕망을 버리는 것’ 역시 욕망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욕망의 특별한 모습이라 부를 수 있다.(186P)

욕망이 꿈을 만들고 꿈은 믿음에 의해 현실적 개념이 된다. 미래를 현실로 인식하는 능력은 정신적 여행자들이 가지는 힘이다. 그들은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상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산다. 그것이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187P)

글쓰기는 꿈을 현실로 데리고 오는 나의 방식이다. 나에게 책이란 꿈과 현실을 잇는 통로다.(187P)

꿈은 또한 목적지다. ‘지금’이란 늘 그곳에 가는 길 위의 어느 지점이다. 정신적 여행자에게 현재란 과거(추억)를 떠나 미래(꿈)로 가는 길 위의 어느 곳이다. 구도(救道)라는 말이 생각났다. 길을 찾는다는 말이다. 나 역시 길을 찾고 있다. 한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로 이어지는 길, 지금의 나에서 미래의 나로 가는 길, 추억에서 꿈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 그 길은 시간의 통로다.(188P)

‘내 속에 들어앉은 그들
그들 속에 섞인 나를 증오하다가 다시 그리워하며,
그러다가 아예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아마도 이곳이 내가 살고 싶은 땅일 것이다.‘
-신경림의 시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188P)

‘내 앞에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그 대신 내 뒤에서 수많은 길이 닫히는 것을 보았네. 이 역시 삶이 나를 미리 준비된 길로 인도하는 방법이라네.’
-파커 파머(Parker J. Pamer), <루스의 이야기>(189P)

길 위에서 죽은 여행자처럼 완벽한 여행자가 어디 있겠는가!(190P)

40대의 10년을 보내며 나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고 싶었다. 그 곡선의 변곡점 몇 개를 찾아내었으니 만족스럽다. 나는 갈수록 산다는 것이 꿈처럼 여겨진다. 꿈의 물결을 따라 넘실대며 흘러간다. 깨고 나면 아무런 기억도 없듯이, 지나간 세월은 시들어 사라진다. 간혹 무너진 건물의 특별한 부분이 잔해로 남아 쓸쓸함을 더하는 것처럼 앞뒤 연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영상들이 지나간 삶의 유물들이다. 나는 그것들을 본다. 과거 역시 그 잔해 속에서 새로 복원되어야 비로소 원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미래처럼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191P)

항해 자체가 인생이다. 그것이야 말로 비옥한 정신적 토양이다. 사는 동안 생명을 모두 소모하므로 죽음이 찾아왔을 때 완전히 비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나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아갈 수 없으리라.(192P)

지나간 것들 속에 내 인생이 담겨 있다. 나는 그 위대한 순간들의 주인이며, 또한 그 초라한 순간들의 책임자였다. 이것이 정말 하루하루의 진짜 인생이었다.(192P)

손님이 돌아간 만찬처럼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잔치를 준비하는 것은 늘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쁨은 그 잔치의 기름냄새와 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과 웃음과 섞인 식기 부딪치는 소음들 사이에 있었다.(193P)

깨달음의 내용은 없고 그저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정도가 50년을 산 나의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없으면 인생의 반전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194P)

우리는 불행을 만들며 산다. 누가 불행을 원할까마는 결국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만든 것일 뿐이다.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한 헬렌 켈러가 “난 너무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이 멀쩡한 우리는 돈을 벌지 못해 불행하고, 약간의 손해를 보아 불행하고,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행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 불행하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찾지 못하고, 그리하여 세상을 원망한다.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행복한 사람이 드문 것은 행복해지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95-196P)

1년에 한번쯤 흔들의자에 앉아 마치 다 산 것처럼 인생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이루고 싶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이 질문의 답이 찾아지면 인생은 목표를 가지게 될 것이고, 결국 그 길을 갈 것이니 행복해 질 수밖에 없다.(196-197P)

사소한 일이 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인생의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자신을 용서하고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증오로부터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많이 얻으면 그만큼 더 행복한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만큼 행복하다. 베풂은 씨앗 같은 것이라 주위에 뿌리면 수많은 결실과 함께 되돌아온다. 더 많은 씨앗을 얻게 된다.(197P)

아,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가는 것은 세월이 지나면 희미해질 내 삶의 발자국이고,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은 꿈과 추억이다.(197P)

길은 없다. 이것이 길이다. 하루가 길이다. 하루가 늘 새로운 여정이다.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 찾기 아니겠는가.(198P)


9장 집, 공간

내게 독서와 꿈과 쓰기는 책 속의 경험을 배워 원래 내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근본을 이해하는 학습이다.(205P)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사이비들의 특성은 위선을 가장한다는 것이다. 위선은 ‘악덕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숨기는 악덕’이다. 꽁꽁 숨길 수 있다면 유능한 것이다.(214P)

밭을 재배한다는 것은 자신이 심고 싶은 것을 심는 것이다. 심고 싶은 것, 즉 욕망을 따른다는 점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서 자라난 또 다른 욕망들을 뽑아낸다는 점에서 반자연적이다.(214P)

멀리 두고 그리는 마음은 그리움이고 가까이 두고 만질 수 있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워하고 또 볼 수 있으니 이처럼 다행일 수 없다.(217P)

명상은 나를 즐기는 것이다. 스트레스와 괴로움으로 가득 찬 현실에 갇힌 내가 아니라, 원래 있었던 아름다운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평화를 건져내는 것이다.(226P)


10장 학습

책을 읽다가 ‘두려움은 곧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랴.’라는 칼릴 지브란의 글을 발견했다. ‘시팔.’ 어쩌면 말을 이렇게 잘한단 말인가?(230P)

성공은 채찍이다. 쉬지 못하게 날카롭게 살을 파고들어 찢어놓는 주마가편의 바로 그 채찍이다. 채찍을 잊은 성공은 반복과 진부함 속에서 쇠퇴하게 된다.(232P)

학습은 성공을 오랫동안 빛나게 해준다.(233P)

의무란 재미없는 것이다. 의무감이란 일상화되는 것이고, 지겨운 것이고, 반복되는 것이고,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는 무덤이기 때문이다.(233P)

나는 한 가지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을 자제했다. 읽기 싫으면 읽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썼다. 매일 쓰는 것은 다행히 아주 즐거운 놀이였다. 나는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와 느낌과 생각을 내 일상 속에서 매일 조금씩 찾아내고 표현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늘 살아 있다는 느낌을 선사했다. 나는 놀이가 가진 위대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논다는 것은 순수하며 아무런 이해를 따지지 않는다. 경제적 계산을 넘어 빠져들게 한다.(234P)

싸움조차도 즐기려 하는 경우가 있다. 적과 논다는 것이 싸움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234P)

심심함이야말로 모든 창조적 발상의 원천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주었고, 달리 해석하게 해주었고, 속세에 물들지 않게 해주었고, 다시 속세를 그리워하게 해주었고, 사람을 찾아 나서게 해주기도 했고, 다시 나로 돌아오게 해주기도 했다. 심심하면 친구가 그립고, 그래서 그를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문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작품이다.(234P)

바쁘다는 것은 지우개와 같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 그리움을 지우고 의미를 지우고 생각을 지운다. 바쁘다는 것은 사람을 그저 움직이게 한다. 먹이를 나르는 개미처럼 한없이 움직이게 한다. 경제라는 본능에 따라 프로그램이 된 것처럼 낮도 밤도 없이 움직이기만 한다. 똑같이, 이 지겨운 반복적 소모를 ‘일한다’라고 부른다. 니체는 ‘노동은 최고의 경찰’이라고 말했다. 노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열망을 줄이고, 독립의 욕망을 피하는 현명한 자제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사회는 노동을 통해 안전해지곤 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다가 죽는다. 한 번도 살기 위해 일을 버린 적이 없다. 놀기 위해 산 적도 없다. 그래서 살기 위해 산 적이 없는 것이다.(235P)

미래는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세계다. 그저 내적으로 감응하는 나침반 하나 달랑 들고 떠난다. 이때는 내 발자국이 곧 지도다. 완성될 수 없는 지도, 때때로 잘못된 지도, 방황과 위험이 도처에 숨어 있는 지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내가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지적 탐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성의 뒤에 숨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나를 잡아끄는 다른 힘들을 느끼곤 한다. 간혹 어떤 직관이 나를 나아가게 하고, 어떤 감정이 나를 휩싸기도 한다. 그리고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해준다. 학습은 온몸으로 이루어진다. 온몸이 다 배움을 위한 촉수며 성감대다. 나는 천천히 배워갔다. 한 번에 조금밖에 배우지 못하는 더딘 깨달음이 이제 부끄럽지 않았다. 어쟀든 나도 조금씩 나아지지 않는가!(239P)

나는 내가 읽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의 지식은 나라는 특별한 여과기를 거쳐 새로운 표현법을 얻게 된다. 그대로 인용될 때도 있지만, 글의 흐름을 얻기 위해 따옴표로 들어올려지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그들이 표현하기 이전에 이미 나의 표현이기 때문에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들은 독립적 사유가 되어 내 책 속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239P)

독자는 작가와 같다. 그들 역시 책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책을 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과 사유의 한계 속에서만 저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권의 책이 읽힐 때마다 다시 한 권의 책이 독자에 의해 쓰여’진다. 책은 그 독자 수만큼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모든 독자는 자신이 읽은 책의 또 다른 저자이기도 하다.(239P)

나 역시 내가 읽은 책이고 그들이 생각한 생각이고 그들이 겪은 경험이다. 내 속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과 경험이 살아 숨쉬고 있다.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나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고 있다. 책과 학습은 우리를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로 만든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세상 속의 사람들과 만나게 하기도 한다. 학습을 통해 우리는 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돌연 자신이 속했던 사유의 세계를 떠나 전혀 이질적인 사유의 쾌감에 빠져들기도 한다.(239-240P)

교육이란 ‘어떻게 배우는지를 가르 치는 것’이라는 지적은 옳다.(240P)

학습의 핵심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답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내는 것이다.(240P)

나는 나의 눈으로 책을 본다. 이미 마흔이 넘은 사람이다. 이미 삶의 웬만한 구석들은 혀로 핥아본 사람이다.(241P)

나는 살고 싶다. 삶만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건강한 변모의 예술이다. 학습은 지식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획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늘 버리고 늘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배움이란, 이해와 인식으로부터 시작할지 모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42P)

학습은 어느 순간 이질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배움은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이든 음악이든 역사든 혹은 과학이든, 배움은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고 가스에 안는 것이다. 낯선 소리, 낯선 얼굴, 낯선 삶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학습의 즐거움이다.(243P)

누구의 이야기가 되었든, ‘우리가 결국 한 작품 속에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가능성’이라는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지적은 그래서 인상적이다.(243P)

깨달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야(aletheia)’의 어원은 ‘촛불을 끈다’라는 뜻이다.(244P)

이성의 작은 촛불을 끄지 않고는 대우주의 별빛을 볼 수 없다. 가까운 작은 산이 먼 큰 산을 가리고 있듯이 작은 지식은 늘 큰 지혜를 가리고 있다.(244P)

“어둠이 가장 짙을 때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玄之又去 衆妙之門)” -노자- (244P)

스승은 등불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불을 끄고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되길 바란다. 제자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별빛을 보게 하는 스승만이 위대한 스승이다. ‘스승을 욕보이는 제자는 바로 영원히 스승을 빛나게 하는 자’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허물을 벗을 줄 모르는 뱀은 죽어버린다. 생각을 바꿀 수 없도록 방해하는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정신들은 이미 정신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가장 자유로운 미친 놈이었다.(245P)

전기작가로 유명한 스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니체는 ‘불꽃처럼 게걸스럽게 스스로를 불사르고 스러지고’ 싶어했다. 불꽃이야말로 바로 그였다. 그의 본질은 넘실대는 불꽃 같은 변화였다. 그에게 있어 완성에 이르는 길은 살인적인 자기파괴와 가지고 있던 믿음의 상실, 자기해체로부터 생겨났다. ‘자기처형’ 없이는 새로운 자기가 있을 수 없다. 단순한 자기변화로부터 스스로에게 반대하고 자신의 적이 되려는 데서 그의 기쁨이 생겨났다.(246P)

들뢰즈가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니체라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니체의 뒤를 덮쳐 사생아를 만들어내려고 하니까, 어느새 니체가 자신을 덮치드라.’고 했다. 그는 철학이란 ‘개념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유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아마 새로운 ‘배치’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기 위한 모색과 실험이 될 것이다.(247P)

나는 그가 이질적인 것들, 다른 삶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뒤에서 덮친 모든 사람들의 삶을 자신 속에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사생아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들 속으로 확장해가고, 동시에 자신 속에 그들을 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속에 여러 명이 있는 것이고, 그들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삶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접속되고 연결되고 내재화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학습의 즐거움 아닐까?(247P)

그는 한 번도 니체로 남은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헤겔과 닮았다. 그러다가 ‘현존에 지독한 부정을 가했던’ 쇼펜하우어가 되었고, 바그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떠났다. 이윽고 자기의 개념을 창조해낸 바로 그 니체가 되었지만, 그는 다시 남들이 알고 있는 ‘니체 씨’를 떠나갔다.(247P)

그는 ‘다이너마이트’였으며, ‘광대’였으며, ‘모든 금지된 곳을 찾아나서는’ 유목민이었으며, 외부인이었고, 방랑자였다. 늘 ‘떠나는 사람이었으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을 잃어버리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 오는 것’이었다.(248P)

니체를 읽는 것은 그러므로 피 끓는 방랑의 유혹이지만, 그를 알기는 어렵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곳에 허물만 남기고 이미 빠져나가 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과거의 니체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니체라는 이름은 어떤 정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스스로를 불지르고 그 재 위에서 새로워지려고 한 사람이었다.
니체는 그러므로 ‘미래의 아들’이었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에 이어지는 다음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서 우리 곁에 있지만 감지되지 않거나 오해받고 있는 시간’이다. 즉 니체의 미래는 어느 시대이든 ‘적절한 때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는 늘 ‘너무 일찍 와서’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대의 아들’이 되지 못하고, 시대에 적응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 ‘광인’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248P)

배움은 결국 삶의 실천에 의해 가장 잘 얻어진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248P)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하루를 춤추듯 보낼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매일 그럴 수 있으면 자신의 행복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251P)

‘새로운 장르의 일상적 삶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실천적 개혁이고 혁명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의미 있는 신호를 보낼 수 있으려면, 내가 새로운 일상을 하나 만들어냈다는 사실 때문이어야 한다. 그 새로운 일상이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대안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내 삶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사례가 될 수 있다.(251P)

하루는 실험장이다. 실험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실험장. 실험이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린 실험…… 내겐 이것이 하루다.(253P)

학습은 뜨거운 무엇이고,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며, 인문학적인 감수성을 건드려야 하는 것이다. 목욕탕의 온탕이나 열탕과 같다.
나는 경영학과 인문학을 하나의 공간에 배치시킴으로써 훌륭한 휴식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목욕탕을 만들고 싶다. 냉정하고 가혹한 경영 속으로 뜨거운 김이 솟구치는 인문학적 유산을 배치시킴으로써 돈으로 피폐한 영혼과 벌거벗은 몸을 돌아볼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학문적 관심사다. 그것은 ‘현실세계 속으로 꿈을 침투’시키는 작업이었다.(253-254P)

‘선비처럼 섬세하고 무사처럼 선이 굵을 것.’(254P)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아경영 철학.’ 이것이 바로 내 학습의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한 줄기를 이룬다. 또 하나의 줄기는 ‘변화의 기술’이다. 나는 이 테마 속에 조직의 진단부터 조직의 변화 모델로 이어지는 기술을 담으려고 한다. 변화와 철학과 기술, 이 두 개의 축을 나에게 적용해 봄으로써 변화경영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보려 한다. 아마 내 50대는 변화경영의 예술가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 될 것 같다.(255-256P)

도전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실패를 딛고 나일 수밖에 없는 길로 운명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 도전은 실패를 이기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도전은 매일 실험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실패도 성공도 사라진다. 여행을 즐기는 자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에 탐닉한다. 그들은 춤추듯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256P)



11장 일

어느 날 악마가 속삭였다.
“네가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이 다시 한 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븜,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너의 생애의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크고 작은 일이 다시금 되풀이될 것이다. 모조리 그대로의 순서로 되돌아온다.
너는 다시 한 번, 수없이 계속 이 삶이 반복되기를 원하느냐?“
-니체, 《즐거운 지식》 (260P)

모든 일에는 고객이 있다. 이것이 경영의 관점이다. 누가 내 일의 첫 번째 고객인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의 첫 번째 고객은 나다. 내가 내 일의 가장 최우선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내 일은 반드시 나를 만족시켜야 한다.(260P)

하루가 내 연구의 기본단위다. 나는 날마다 무수한 반복보다 무수한 변화를 원한다. 그러므로 내 일은 반복을 거부하는 것이다. 수없는 반복을 통한 훈련이 아니라 수없는 변화를 통한 훈련이 내 방식이다. 나는 물결에게서 이 방식을 배웠다. 물결은 무수한 반복이 아니라 무수한 변화다.(260-261P)

멕시코시티의 큰 시장 그늘진 구석에 포타 라모라는 나이든 인디언이 앉아 있었다. 그는 그 앞에 20줄의 양파를 매달아놓았다. 시카고에서 온 어떤 미국인이 노인에게 와서 물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요?”
“10센트입니다.”
“두 줄은 얼마요?”
“20센트입니다.”
“세 줄은 얼마요?”
“30센트.”
“세 줄을 사도 깍아주지 않는군요. 세 줄을 25센트에 주실래요?”
“안 됩니다.”
“그럼 20줄 전부를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20줄 전부를 팔지 않을 것입니다.”
“안 판다니요? 당신은 양파를 팔기 위해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을 살려고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북적대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붉은 서라피 모포를 좋아합니다. 나는 햇빛을 사랑하고 바람에 흔들거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합니다. 난느 페드로와 루이스가 와서 ‘브에노스디아스’라고 인사하고, 담배를 태우며 아이들과 곡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여기서 친구들을 만나면 즐겁습니다. 이게 바로 내 삶입니다. 그 삶을 살기 위해서 여기 이렇게 하루 종일 앉아 양파를 파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이 양파를 몽땅 다 팔아버린다면 내 하루도 그걸로 끝나버리고 말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사랑하는 것들을 다 잃게 되지요. 그러니 그런 일은 안 할 것입니다.”
-시튼《포타 라모 이야기》 (261-262P)

일은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일이 품삯이어서도 안 되고, 삶의 다른 요소들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263P)

인생을 파괴하지 않는 직업, 삶을 빛내는 직업만이 훌륭한 직업이다.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인가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눈부신 삶을 살게 하는 일, 그 일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있는 일, 그것이 위대한 직업이다.(263P)

변화는 오직 스스로 시작할 때만 효과적이며 그때에만 비로소 행복한 전환이 이루어진다.(263P)

먼저 나에게 적용할 것. 반드시 성공할 것.
그 다음 상이한 조건에서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활용할 수 있는지 실험할 것.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나누어주려는 잘못을 범하지 말 것.(263-264P)

나를 변화시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내 하루가 바뀌었는지를 물으면 확실해진다. 오늘을 놓치면 삶을 놓치는 것이다. 하루를 즐길 수 있으면 훌륭한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의 물결로서,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가 나에게 바라는 목적이다.(264P)

글쓰기는 우선 모방이다. 많은 글을 읽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두루두루 알아보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사업가들은 그것을 정보를 얻는다고 표현하고 글쓰는 사람들은 그것을 책읽기라고 부를 뿐이다.(265P)

사업이든 글쓰기든 가슴이 설득당하지 않고는 자신의 철학이나 깨달음으로 전환하기 어렵다.(265P)

열정과 가슴의 힘 없이는 현장의 바람에 대응할 수 없다. 설득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설득은 감정의 폭우를 필요로 한다. 감정을 담지 못하면 설득에 성공하기 어렵다. 열정을 가진 사람처럼 믿어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266P)

모방의 또 하나의 요령은 ‘한 작품을 모방하면 표절이고, 여러 작품을 모방하면 연구다.’라는 노회한 충고를 기억하는 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감동하는 것은 사업이든 글쓰기든 훌륭한 성과를 내기 위한 근면한 배움의 요결이다.(266P)

글쓰기는 또한 혁명이다. 모방만 가지고는 좋은 글씨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연결해야 한다.(266P)

죽어 있는 정신을 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흥미가 살아나고 열정이 살아나고 삶이 살아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실험하게 된다. 실험이 곧 창의성이다. 글쓰기에서의 실험이나 사업에서의 새로운 시도와 모색은 다를 바가 없다.(266P)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변화경영이라는 전문분야를 대중이 즐겨 읽고 실천할 수 있도록 된장 풀고 고추장 넣어 먹을 만하게 끓여준다는 생각은 시도할 만한 일이었다. 처음 해본다는 것은 기회를 선점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선점만큼 강력한 브랜드 전략은 없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라는 재능과 변화경영이라는 전문경력을 결합시켜 이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만들었다.(269P)

강점은 꿈을 이루는 도구와 같은 것이다. 어떤 꿈이든 그것을 현실의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적절한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사나운 괴물을 퇴치해야 하는 영웅들이 신으로부터 빌린 날개 달린 신발이며, 뚫리지 않는 방패이며, 잘 드는 칼과 같은 것이다. 신화 속의 영웅들은 그것의 도움을 받아 결국 꿈을 이루고 죽은 후에 하늘의 별이 되어 빛나게 된다.(270P)

나는 개인에게 있어 ‘변화라는 것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본래의 자기란 무엇일까?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기질을 이해하고 그 강점을 계발하여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자기다움으로 돌아가는 좋은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271P)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는 것은 세상과의 싸움을 의미했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은 처음에는 규제하고 강압하고 표준을 바라는 세상과의 싸움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원칙이 통용되는 자신의 세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 세계를 침범하려는 ‘일반의 세계, 군중의 세계’와의 오랜 싸움을 전제로 했다. 자신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272P)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비결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 비밀은 니체가 ‘아곤(agon)적 행동’이라고 말한 경쟁의 행동에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선조들과 경쟁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경쟁한다. 그리스인들은 이 경쟁의 힘을 ‘덕(virtus)’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기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금지의 미덕’이 아니라 ‘남성다움’, 혹은 정력적 힘‘을 상징했다.(274P)

성공에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쪽지에 적힌 대로 끊임없이 익히는 것일 뿐이다. 손에 익고 머리와 가슴 사이에 어떤 괴리도 없이 자연스러운 강줄기가 흘러갈 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때 성공은 우리의 특징이 된다.(275P)

“유일한 사람이 되어라. 이것은 최고가 된다는 뜻이다. 유일한 자만이 최고로서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 최고가 된다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생을 모두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성공할 수 있다. 이것저것 다 잘하는 매력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성공은 늘 한 길로 간 사람들의 것이다. 적어도 나는 한 길을 가기에도 숨이 차다. 다른 것들을 넘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나는 그저 내 일만 해도 저녁에 이미 탈진한다.”(276P)

유일한 사람이 되는 길은 신의 쪽지, 즉 ‘자신에 대한 기록’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자신만이 유일함의 원천이다. 자신을 활용하지 않고는 유일함에 도달할 수 없다.
유일함을 수련하는 방식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깊숙한 곳에서 잠에 취해 있는 자신을 깨워내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 아주 깊은 산중에서 잠에 빠져 있기 십상이다. 게으르고 잠을 즐기고 눈치를 보고 비겁하고 교활하지만, 아직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견하지도 못하고 발휘할 줄도 모르는 미숙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영웅이 스스로 일어나 초려에서 나오도록 설득해야 한다.(277P)

누구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인물을 얻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살려내지 않고는 내면에 숨어 있는 영웅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이다.(278P)

나는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분노는 억제된 불길이다. 나는 때때로 침울해 보이거나 무거워 보였다. 분노를 적의 없는 상태로 감출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스스로에게 물기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제대로 타오를 수 없었다. 가득한 연기에 시달리다가 결국 불문을 열고 굴뚝을 달아 불길이 훨훨 타오르도록 했다. 이것이 나를 살려주었다.
그들의 방식이 아니라 나의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분노를 자극했다. 나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분노를 키웠다. 이것이 내가 내 속의 분노를 길들이는 방식이었다. 내 속의 욕망이라는 불길이 잘 타오르는 동안 나는 마음의 평화를 즐길 수 있다. 그 불길의 주위에 자리를 펴고 누워 타오름을 즐기는 것은 벽난로의 아득함이었다.(278-279P)

세일즈와는 달리 마케팅은 아주 적극적인 수동성이다.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도록 곳곳에 꽃을 피우고 향기와 매력을 뿌려두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은은함이며, 숨겨져 있음이며, 힌트며, 감각적 포착이며, 눈빛이다. 아주 작은 나라는 소우주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 쉬지 않고 시그널을 보냈다.(279P)

다른 사람의 영웅이 되기를 거부하는 영웅, 자기 자신의 영웅은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지키고 이끌어간다.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자신의 영웅, 이들이 바로 ‘유일한 자’들이다. 자신의 소우주를 가지고 있는 작은 왕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유일함을 통해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비범한 사람으로 자신을 안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치 않은 위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280-281P)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가슴이 뛰지 않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일이 사랑이 되지 않으면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다른 여자를 향해 달아나는 애인처럼 한대 사랑했던 그 일은 이제 벗어나고 싶은 지루함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늘 새롭게 사랑하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281P)

“내가 쓰는 글은 짧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감동이라는 껍질에 싸여 있는 씨앗이다. 그것은 적대감이라는 위액과 소화액에 녹아 없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발아할 수 있는 장소까지 이동해야 한다. 피와 영혼과 정신의 어느 부분을 건드려 그들 역시 알 수 없는 환상과 내면의 열정 속에 빠져들게 해야한다. 열정이란 심장과 감정과 창자로부터 생겨난다. 참다운 자신이 되는 자유는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켠 허파의 외침’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감동이며 환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서 위대한 힘을 감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속에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주는 터무니없는 위로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 대신 자신이 희망적 현실주의자로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는 가능한 꿈을 꾸어야 한다. 가능한 꿈을 꾸는 현실주의자, 나는 이것을 희망적 현실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꿈으로 가는 길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내 앞에 놓인 냉혹한 현실을 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글을 통해 사람들이 지루한 일상을 하염없이 반복하는 무료와 절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인생의 재료로 삼는 것을 도와야 한다. 자신을 반죽하고 주무르고 떼어내고 빚어낸 후 색칠하여 다시 세상에 내놓게 도와야 한다. 새로 만들어진 그들은 자신에 대한 존중감으로 가득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지만, 늘 스스로 새롭게 생성되는 사람들이다.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자신을 탄생시키지 못하는 불임을 극복하는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내 글은 강렬한 유혹이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삶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서 나는 내 삶 자체가 매혹적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나는 매혹적인 삶이라고 부른다. 나는 나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다. 끝없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즐거운 여행, 이것이 내가 그리는 삶이다.“(281-283P)

지식은 늘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되며 새로운 체계로 진화한다. 새로운 연합을 모색하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강연은 이런 지적 프로세스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늘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할 수 없다면 강연자는 스스로를 교살하는 셈이다. 자신의 목에 감긴 밧줄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당기는 행위가 바로 쏟아냄이 들어옴을 초과하는 지식 유출을 방관하는 행위다. 1년이 되지 못해 그의 지식은 낡은 것이 된다. 그리고 충전이 불가능한 배터리처럼 폐기된다. 일르 경계해야 한다.(284P)

강연은 하나의 지적 퍼포먼스다. 내가 먼저 그 내용에 만족해야 하고, 청중의 개인적 관심사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이 관심을 갖는 주제 속에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을 잘 포진시키는 것이 흡착력 있는 내용을 이루는 기본적 구성이다.(286P)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목표여서는 안 된다. 내 목표는 그 이상이다.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 그것은 반드시 청중 속의 누군가를 움직여 스스로 자신의 고뇌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 적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강연장을 떠나 그들이 일상 속에서 변화를 실천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하루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강연은 실패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좋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295P)

나는 그들의 시시한 삶, 평범한 일상에 대한 분노의 불길을 부추기고 타오르게 하는 묘한 입김으로 속삭이는 자여야 한다.(299P)

변화는 달콤한 과정만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변화 속에는 늘 피의 냄새의 난다.(299P)

사랑이야말로 많은 흥분과 미움과 증오와 눈물로 짜여진 옷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변화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사랑이다. 치열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다.(300P)

그저 불꽃놀이처럼 들뜨게 하다가 되돌아와 풀이 죽어버리는 작은 위안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연’이 되지 못한다.(301P)

내 강연의 목적은 그들이 자기 자신이 되어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들이 되어 그들의 마음으로 그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속에서 그들만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이다.(302P)

어제의 진실은 오늘의 진실이 아니다. 늘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는 정신은 죽은 것이다.(303P)

"우연한 쏘시개 불꽃“
“an unexpected sparkle toward the destiny”

내가 하는 일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아직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때 잠시 ‘우연한 쏘시개 불꽃’이 되는 일이다.(304P)

자신의 꽃씨를 뿌리게 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나는 조용한 선동가다. 모든 씨앗들에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는 피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꽃이 다른 꽃들과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선동한다. 그리고 그 꽃을 피워내 이 세상에 그 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선동한다.
꽃씨와 불씨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비즈니스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배운 방식이다.(306P)


세 개의 에필로그

나는 새벽의 생각을 좋아한다. 새벽의 생각은 밤의 이상주의가 꿈으로 빚어낸 생각이고, 앞으로 다가올 낮 동안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다.(311P)

나는 ‘트리맨(treeman)’이다. 바람이 불면 ‘솨아’ 소리를 내며 온 잎들을 있는 대로 바람에 실어 날리는 나무다. 봄이 되면 꽃을 주렁주렁 피우는 나무다. 여름 소나기 끝에 햇빛이 다시 쨍해질 때 초록색 물방울을 달고 서 있는 싱싱한 이파리로 뒤덮인 나무다. 때가 되면 꽃보다 더 진한 단풍으로 깊어지는 나무다. 아, 그리고 그 나무, 겨울 그 강풍에 아무 소리 않고 죽은 듯 서 있는 나 나목. 그것이 바로 나다. 나는 온몸 안을 꽃으로 가득 채운 채 꽃터지는 봄날을 기다리고 있다.(313P)

나의 목적은 하루를 잘 사는 것이다. 하루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각성과 준비의 제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하루답게 사는 것이다. 어떤 하루도 목적--그런 것이 있다면--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하루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희생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루 자체를 빛냄으로써 인생 전체를 빛나게 하고 싶었다. 이것이 목적이다. 내겐 좋은 하루 그 자체가 목적이다.(322P)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가난하든 부자든 세상은 즐길 만한 곳이다. 내게 마흔은 세상을 즐길 수 있게 해준 나이였다. 인생의 맛이 스며 일상의 뼛속까지 배어든 나이였다. 약간 뻔뻔해진 아줌마들처럼 인생에 대한 헛된 기대 대신, 직접 살아본 경험의 혓바닥으로 날마다 인생의 삶 맛을 핥아볼 수 있는 나이였다.(324-325P)



3. ‘내가 저자라면’

가정을 한번 해보자. 배가 난파당해 무인도라도 찾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가진 짐을 모두 버리고 단 2권의 책만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자, 지금 배안에 사부님의 책이란 책은 모두 다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 단 2권만 선택할 수 있다. 나머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라도 버려야 한다. 당신은 선택은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

나는 첫 번째 책으로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고를 것이다. 이 책은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와 <코리아니티 경영>에 이어 3번째로 읽은 책이지만 뚜렷한 이유없이 그냥 마음이 가는 책이다. 뭐랄까. 자유롭지 못한 영혼이 자유를 갈망하는 가운데 그 목마름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 주는 책이라 하면 어느 정도 그 느낌이 전달될까? 뒤에 사부님의 첫 책인 <익숙한 것과의 결별>도 읽어 보았지만 그 느낌은 좀 덜 했다. 두 번째 책으로는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바로, 이 책을 고를 것이다. 사실 순위를 매기기는 어렵긴 하지만 그냥 느낌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순위는 무의미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 책은 마흔부터 마흔 아홉까지 40대 중년의 시기, 10년을 위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절묘한 시기인 작년, 마흔의 나이에 읽었다. 하나하나 나의 이야기였다. 가슴을 울리는 문구의 연속이었다. 가슴을 치지 않고 넘어가기 힘든 문단의 지뢰밭이었다. 한번 스쳐 읽고 지나가기에는 그 의미나 느낌, 감정의 떨림이 분명치 않아 두 번, 세 번 다시 훑고 지나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머리로 가슴으로 공명해야만 다음 장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눈이 아닌 가슴으로 읽은 책이 되었다.

이 책의 장점 몇가지는 꼭 언급해야만 하겠다.

먼저 이 책에서 사부님의 글은 깊이가 있고 울림이 있으며 단순히 끊어지지 않는 연결이 있다. 범상치 않는 단어는 또 다른 재해석된 단어와 만나 새로운 문장이루고, 이 문장은 독자에게 힘찬 생명의 날개짓을 선물한다. 이것이 사부님이 말하는 변화의 시작, 더 나아가 혁명의 시초가 된다. ‘변화하라, 그것이 삶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여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나중 인용문을 타이핑 해야 할 것을 생각해 밑줄을 될 수 있으면 조금만 치려고 노력해도 그 노력을 무위로 만들 정도로 너무나 좋은 문구들로 가득 차 있다. 온통 노란 색 밑줄의 물결이다. 밑줄없이 1장을 넘어간다면 그건 행운이라 치부해야할 정도로 드문 일이다. 쉼이 없다. 각성의 연속이다. 현실 속의 꿈 여행이다. 3기 연구원들의 말대로 사부님 혼자 멋있는 말이란 말은 다 골라 써 놓은 듯하다. 자서전과 자기계발서의 영역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영역 파괴서이자, 자기계발의 <문학서>라고 표현하고 싶다. 책 전체 가득 중년의 멋이 있으며, 깊고 길게 울림이 있는 책이다.

셋째, 책 중간중간에 쓰인 관점의 반전이 묘한 설득력을 지닌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한 권의 책이 읽힐 때마다 다시 한 권의 책이 독자에 의해 씌여’진다(239P)

책은 저자가 쓰는 것이고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 구분은 항상 명확하다. 하지만 사부님의 관점은 그 명확함마저 뒤집는다. 사물, 현상을 거꾸로 뒤집어 논리를 전개하는데 그 논리가 명쾌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것은 순간이 아닌 삶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하며 숙성시킨 힘이라 판단된다. 한마디로 내공, 포스가 장난이 아니란 말이다. 사부님은 마흔이란 나이를 진하디 진한 설렁탕 국물맛이라 말했지만 내가 볼 때 사부님이야말로 진하디 진한 설렁탕 진국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이 책의 구성이 참 맘에 들었다. 왜냐면 이 책은 너무나 자유로운 형식, 수필과 같은 자서전이자, 자기계발서였기 때문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작가의 입장에서도, 마음가는 데로 글 가는 데로 쓰여진 이 형식이 자유로움 가운데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인생 선배로서의 조심스런 충고처럼, 진솔한 조언처럼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로 나 또한 자서전을 쓴다면 이 책과 같은 자유로운 형식에 나만의 삶의 내용을 담은 자서전을 쓰게 될 것이다. 다만 40대에 국한하는 것이 아닌 지금까지의 삶 전체에 대해 쓸 것이며 조금 양은 많아질 것 같다. 많은 부담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수 많은 가슴을 치는 문구 가운데도 이 한가지는 결코 놓을 수 없는 문구가 있었다. 살면서 계속하여 가슴에 새기고 틈날 때마다 끄집어 내어 되새김질 하고 싶은 문구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140P)

나는 이 문장을 나의 말로 표현해 보았다. ‘중요한 건 삶을 뛰어 넘어 스스로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죽음의 순간을 얼마나 찬란하고 보람되며, 스스로의 소명대로 살았는가 반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그야말로 죽기 위해, 죽을 만큼,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을 만큼, 열정적으로 살아야만 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변화이다. 변화는 반복적 흐름 속에, 맥박 속에, 미세하게 바뀌어지는 흐름이다. 그 만큼 인지하고, 실천하려는 굳은 마음과 결심, 최선의 노력이 없다면 변화에 대한 의미조차 알기 어려울 것이다. 삶이 곧 변화이며, 변화속에 우리의 삶은 존재할 것이다.

앞으로 49세가 될 때까지, 9년간 이 책은 나의 좋은 동반자가 될 것이다. 가슴에 묻고 갈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책을 선물로 주신 사부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또한 이 책을 기반으로 하여 나는 나 자신의 새로운 삶, 마흔의 삶을 즐기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루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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