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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0일 15시 28분 등록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구본형 지음, 휴머니스트, 2008


● 저자에 대하여

그는 스스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가 평범한 사람인 것은 그가 다른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처럼 어린시절 가난하게 살았고, 남들처럼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남들처럼 취직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삶의 궤적에서 특별히 벗어난 것이 없다. 회사를 다니지 않는 지금도 남들과 그리 다른 것이 없다. 회사를 다니지는 않지만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고, 책을 즐겨 읽고, 맛난 것을 좋아하고, 힘들면 집에서 뒹굴뒹굴 쉰다. 평범한 일상이다.
그가 자유로운 사람인 것은 시간을 자신의 마음대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간도, 공부하는 시간도, 가족과의 시간도 그의 맘대로 배분이 가능하다. 남이 만들어준 또는 조직이 만들어준 시간의 배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시간을 배분한다. 시간의 주인이고 시간의 마술사이다.
그가 성공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일단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시간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삶을 여유 있는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지녔다. 이것만으로도 성공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성공이라는 단어가 부담스럽다면 부러운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가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직장인 이었다가 자신의 삶을 자기의 힘으로 다시 지어 올린 사람이기에 더 그렇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자유와 성공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 혁명과 죽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혁명은 자신의 삶을 뒤집어엎는 것이었고, 죽음은 어느 시점 이전의 삶을 완전히 죽이고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혁명과 죽음은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시작됐다. 마흔이 되던 어느 날. 그는 ‘남들처럼’이라는 삶의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단어를 떼어낸다.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을 갈구했고, 그것을 찾았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발을 내딛었다. 여기서 그는 처음 ‘남들처럼’이라는 단어를 내친다.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는 하지만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예비했던 시간이 지나고 직장이라는 공간을 그는 떠났다. 그 길을 가기 위해 직장을 나와 혼자서 짐을 꾸렸을 때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의 표현처럼 ‘자유는 불안이고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자유로움을 택한 대가였다.

두렵기도 했지만 자유로움은 달콤했다. 마음껏 책을 볼 수 있었고, 마음껏 글을 쓸 수 있었고 강연도 다녔다. 달콤함은 상상이상으로 짜릿했다. 그 달콤함을 마음껏 맛본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닌다. ‘변화하라. 너의 꿈을 찾아라. 내면에 숨어 있는 너의 영웅을 꺼내라.’하고 속삭이면서.
그가 그 길을 스스로 걸었기에,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살았기에, 그의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혁명을 일으키고 이전의 삶에 죽음을 선물하라는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길을 지펴 올린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쏘시개 불꽃’이며 ‘꽃씨’라고 부른다. 목마름으로 새로운 삶을 찾는 사람들 불을 켤 수 있게 잠시 빌려주는 쏘시개 불꽃,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꽃씨를 피워내게 하는 속삭임이 그가 하고 싶은 일이다.

그가 꼭 지켜야 하는 약속처럼 실천하는 슬로건은 ‘우리는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이다. 그것은 모토이자 비전이다. 함께 걷고 함께 뛰며 한발이라도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어깨를 부추겨주는 것이다.
그 비전을 위해 그는 이제 ‘불쏘시개’와 ‘꽃씨’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민들레 대궁’이 되고자 할지도 모른다. 대궁은 한껏 피워 올린 민들레 홀씨들을 세상으로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을 타고 세상으로 퍼져나간 홀씨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또 다른 혁명과 죽음을 퍼뜨리며 춤추고 노래할 것이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나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한 기록이다. 즉 내 인생의 다음 장면을 그려보기 위한 시도이다. 자신에 대하 쓰다 보면, 해보지 못해 안타까운 일들이 밝혀지고 절실해진다. 이때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은 그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로 전환된다.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 경영’은 바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신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첫 번째 실험보고서이다.

마흔이 넘으면서부터 가끔 불면에 시달려야 했다. 이유는 분명치 않다. 분명치 않은 모호함이 나를 불쾌하게 했다. 나는 별 스트레스 없이 무난한 마흔 살을 맞았다. 그러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불안 같은 것이 내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불면이 찾아오면 신경이 가닥가닥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목에서부터 어깨로 굵고 검은 근육들이 뻣뻣하게 굳는 듯하다. 그리고 심장은 가냘픈 흐느낌처럼 나약해진다. 머리가 아프고 무거워지며 둔해진다. 잠들려는 집착이 더 잘 수 없게 만들었다. [23]

나는 오히려 불면을 즐겼다. 불면 역시 주어진 것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찾아오면 싸우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예를 들어 번잡함이 주위에서 서성거리면 나는 조용히 혼자 있는 방법을 취한다. 방송이 나를 괴롭히면 출연에 응하지 않는다. 모임이 나를 괴롭히면 나가지 않는다. 원고를 써야 하는 강박감을 느낄때는 언제고 거절한다. 어쨌거나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 [24]

40대가 천천히 지나가면 청춘도 지나간다. 서서히 육체의 쇠락이 팽팽한 낚싯줄처럼 감지되고, 은은한 불안이 검은 동굴처럼 다가오면, 여자와 불처럼 사랑을 하고 싶어진다. 인생을 드라마처럼 전환시키고 싶어하고, 마음을 누르는 이 초라한 공허속에 긴장과 갈등, 그리고 비극적 사랑을 담고 싶어한다. [27]

자유는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확실한 것, 굳건히 서 있는 것들의 질서 안에서 자유는 끝나고 만다. 절실하게 바라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한다. [30]

현실은 늘 죽음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오직 삶만이 현실의 위력에 눌려 죽어지낸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현실적으로밖에 살지 못했던 그 초라한 현실을 후회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왜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모든 시간을 그 욕망에 다 쓰고 말았을까? 모호하고 불확실함 속에서 그것만은 가능한 성취로 보였기 때문일까? 아, 왜 그를 추월해 승진하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졌을까? 그를 동정하면서 비웃었던 우월감이 얼마나 부질없는 비천함이었던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자제와 절제를 현명함을 불렀던 그 어리석음은 또 어떻게 하랴. [31]

늙은 독수리처럼 대머리가 되고 털이 숭숭 빠진 거대한 탐욕의 새처럼 마흔 살은 죽음의 냄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언젠가 어디선가 느닷없이 죽음은 검은 외투에 검은 모자를 쓰고 모퉁이 앞에서 흘끗 나타난다. 저게 뭔가 보려는 순간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검은색 긴 외투 자락과 암흑 속에서 섬광처럼 쏘아붙인 그 섬뜩한 눈초리의 잔영을 지우지 못한다. [32]

40대는 이제 특별한 사회적 상징을 담은 단어가 되었다. 그것은 가장 정력적인 나이에 버려진 나이다. 40대의 10년 가운데 어딘가에서 버려진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너무 쉽게 버려졌고, 성장의 문턱에서 거부되었으며, 왕성한 상태에서 퇴출되었다. 남아 있어도 그들은 이미 사라지는 사람들이 되었다. 마흔은 앞으로 길게 남은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20대 또는 30대에 준비한 인생으로는 마흔 너머의 인생을 꾸려갈 수 없게 되었다. 마흔은 이미 서산에 지는 해가 되었다. 마흔은 사회적으로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던지지 못하는 황혼의 여생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미 마흔을 넘어서고 있었고, 직장 속에서 나는 이미 지나간 세대에 편입되었다. 아무도 내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나의 과거는 거대한 사회적 방망이에 의해 가슴을 강타당했다. 배반 같기도 하고, 비애 같기도 하며, 무력감 같기도 하고, 허무 같기도 한 통증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뒷방 노인이 된 마흔이여. [37]

마흔 살은 늙지도 젊지도 않다. 대부분 결혼을 했으며 살기 위해 일한다. 마흔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지치게 된다. 일상의 걱정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가장 필요한 내적 성찰이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개인적 시도와 실패, 직장에서의 갈등, 결혼생활의 무관심, 아이들과의 씨름이 이때 가장 잘 드러나는 문제이다. 아마 조금 더 젊었더라면 전직을 하거나 이혼을 하거나 다른 모색을 했을지 모르지만 마흔 살이 되면 문제를 끼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러니까 빼도 박도 못하는 시기다. [47]

마흔 살은 당나귀의 삶이다. 젊은이들의 자유를 포기한 채 두 어깨에 가득 짐을 지고 홀로 사는 짐승이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행을 거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위대한 화가나 음악가가 되고 싶어하기도 하고, 백만장자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아니면 아직 해보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해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일 뿐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흔 살이 되면 사람들은 밀려드는 피로감 때문에, 자신에 대한 다소의 실망감 때문에, 또는 그동안의 실패의 전력때문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저만치 물러않는다. 노력이란 얼마나 지루한 가시밭길인가! [50

마흔이 되면 한계에 대한 자각이 젊은 시절의 끝없는 희망을 대신한다. 운명이 희망과 기대를 가리게 한다. 쉽게 절망하고 냉소적이 되기도 한다. 젊었을 때 사람들이 너무 희망적이었다면, 마흔 살이 되어서는 모든 믿음을 쉽게 버리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저 두개의 시선, 자신을 바깥에서 보는 시선과 안에서 보는 시선을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쓰임을 받으면 애써 일하고, 버림을 받으면 스스로 즐기면 된다. 부름을 받으면 신명을 다하는 것이고, 그들이 잊으면 일상을 즐기며 스스로 벌어 궁색하지 않게 먹고살면 되는 것이다. [58]

40대는 사회적 폐기물이 된 자신을 구해내어 빛나는 삶으로 창조하는 시간이다.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이 가능한 시기다. 어쩌면 반전만이 이 시기를 사는 교훈일지 모른다. 전환과 변곡, 이 두 단어야말로 40대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언어이다. [61]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라는 점이었다. 한 세상이 어둠에 싸이게 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으로 빛난다. [63]

야망이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앞 다투어 선택한 그 일을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돈과 승진을 찾아 떠나는 그 골드러시의 물결을 타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없는 나를 싫어하기도 했다. [70]

지금의 하기 싫은 일을 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일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직장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80퍼센트는 되어 보였다. [77]

나 역시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굉장한 여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긴 여행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양식을 챙겨 떠난다 하더라도 곧 바닥이 날 것이었다. 결국 나는 여행을 하며 양식을 조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불안은 오히려 나를 흥분시켰다. 이 여행이 나만의 여행이 아니라 가족 모두를 데리고 떠나는 가족여행이라는 것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래서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 그들 역시 이 여행을 통해 해로운 세계를 구경하게 될 것이므로. [83]

나는 세일즈 대신 나를 마케팅할 방법을 모색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찾아내는 방법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를 과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설득했다.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화시키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적인 일이 아니다. 유전자는 바뀌지 않는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은 괴로운 과정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성과를 돌려줄 뿐이다. [84]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8년 4월 어느 날 오후에 야구를 보러 갔다. 외야 쪽 스탠드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타자가 첫 볼을 2루타로 쳐냈다. 그때 문득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갑작스런 계시같은 것이었다. 이유도 설명할 방법도 없다.” [91]

욕망이 자신을 충족해가는 것은 개인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욕망은 부숴뜨려 땅에 묻어야 하는 끔찍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힘과 에너지다. [113]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야 한다. 자기경영의 근간이 되는 것은 실천의 철학이다. 바로 자신이 과거와 경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117]

우리는 수없이 많은 남의 얼굴을 그리워하다 여기에 이르렀다. 학교에 가고 규범을 배우고 문화 속에 던져지면서 의도적 왜곡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되어갔다. 내가 마흔이 되어 한 일은 그런 나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에 왔다. [117]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 산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늘 섞여 있었다. 작은 수고들은 이런 기쁨을 위해 동반되는 선물의 포장지거나 아름다운 포장 끈이거나 리본 같은 것들이다. [130]

삶의 어둠을 견디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고통 역시 개인의 몫이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있고 나눌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혼자 그 긴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짐을 각자 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 있으면 훨씬 낫다. [147]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순순한 아이의 생각이 야망으로 가득한 젊은이의 생각이 되고, 이내 세상의 한계에 지쳐버린 장년이 되고, 노회한 노인이 되고, 이윽고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생명이 주어진 순간 삶은 시작되고, 삶이 주어진 순간 죽음의 시계도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160]

로댕의 말을 잊지 말라. ‘사랑하고 감동하고 전율하면’ 그 삶은 매혹적인 것이다.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변화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174]

그러나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 자연의 맛은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가진 품종을 만들어 내라. [175]

여든이 되어 물어보자. ‘삶이 나에게 요구한 것’, 즉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었을까? 망막에서 빛이 사라질때, 내 삶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넘어갈 때, 나는 그 속에서 사소한 일상을 보게 될 것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어떤 찰나의 눈빛, 그녀와 남긴 어떤 대화의 뉘앙스, 그리고 어떤 웃음, 그리고 또 어떤 분노, 아내의 손, 친구의 엉클어진 머리카락, 젊었을 때의 어떤 고뇌, 창문으로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 그 뒤의 하늘…… 바로 이런 것들이 내 삶이었다. [219]

어느 날 책을 읽다 여든다섯 살 된 병든 할머니가 쓴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많은 착오를 범하고 싶다. 지금 살았던 것보다 더 어리석게 행동하고 싶다. 사실 인생을 살며 심각한 일이 어디 그렇게 많겠는가? 그러니 더 미친 척 행동하고 싶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질 것이며, 더 많은 여행을 할 것이며, 더 많은 산을 오르고 더 많은 강을 건널 것이다. 또 아이스크림도 원 없이 먹을 것이다. 그 대신 콩은 조금 덜 먹을 것이다. 오! 나 자신만의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난 나에게 속한 더 많은 시간을 경험해보고 싶다. 내가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맨발로 다니고 싶다. 회전목마를 더 많이 타고, 더 많은 일출을 보고, 더 많은 아이들과 놀 것이다. 내가 다시 한번 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불행을 만들며 산다. 누가 불행을 원할까마는 결국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만든 것일 뿐이다.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한 헬렌 켈러가 “난 너무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이 멀쩡한 우리는 돈을 벌지 못해서 불행하고, 약간의 손해를 보아서 불행하고,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불행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서 불행하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참지 못하고, 그리하여 세상을 원망한다.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행복한 사람이 드문 것은 행복해지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맑은 날 들판을 산책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그 일의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거 속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늘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일과 채소, 그리고 여러 곡물이 섞인 밥을 먹고 하루에 30분씩 운동하고 한 시간씩 햇볕을 쪼일 수 있다면 행복하다. 무엇인가를 할 때 다른 것을 계획하지 않고, 어떤 것을 계획할 때 다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순간에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몰입된 순간 순간을 살 수 있으면 행복하다.
다른 사람에 비추어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행복하다. 다른 사람이란 결국 왜곡된 거울에 불과하다. 늘 자신에게 비추어 자신을 발견하려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일년에 한번쯤 흔들의자에 앉아 마치 다 산 것처럼 인생을 돌아보면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이루고 싶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이 질문의 답이 찾아지면 인생은 목표를 가지게 될 것이고, 결국 그 길을 갈 것이니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 [221]

길은 없다. 이것이 길이다. 하루가 길이다. 하루가 늘 새로운 여정이다.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 찾기 아니겠는가. [223]

나는 하루를 숨쉴 수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공간을 원해왔다. 나무가 있고 꽃이 있고 창문을 열면 신선하고 상쾌한 바람이 밀려드는 그런 공간을 원해왔다. 커다란 창이 있고 그 창 너머 하늘이 보이는 공간을 원해왔다. 그리고 마흔여덟에 북한산 아름다운 언덕 위에 내가 바라던 공간으로 이사 올 수 있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255]

자유는 또한 불안이고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할 일을 찾아야 하는 부담을 안겨주었다. 지역의료보험에 가입하면서 완전히 내 손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외로움과 불안과 대면해야 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유로움을 선택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았다. 내가 경제적 기반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았다. 내가 가진 모든 물질적인 것, 집, 가구, 돈, 그 밖의 모든 소유물을 상실하게 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까?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260]

두려움은 서서히 옥죄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또한 강렬한 힘으로 작동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열심히 일하도록 했다. 계속 책을 쓰도록 했고, 계속 읽게 했으며, 그저 빈둥거리며 사는 것을 불편하게 했다. [261]

스승은 등불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불을 끄고 칠흙같은 암흑 속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되길 바란다. 제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별빛을 보게 하는 스승만이 위대한 스승이다. ‘스승을 욕보이는 제자는 바로 영원히 스승을 빛나게 하는 자’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허물을 벗을 줄 모르는 뱀은 죽어버린다. 생각을 바꿀 수 없도록 방해하는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정신들은 이미 정신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가장 자유로운 미친놈이었다. 스물네 살에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서른 살에 경력 쌓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자신과의 최초의 결별이었고, 자기 자신으로의 추락이었다. 그는 모든 가치를 열정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였다.
전기작가로 유명하 스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니체는 ‘불꽃처럼 게걸스럽게 스스로를 불사르고 스러지고’ 싶어했다. 불꽃이야말로 바로 그였다. 그의 본질은 넘실대는 불꽃같은 변화였다. 그에게 있어 완성에 이르는 길은 살인적인 자기파괴와 가지고 있던 믿음의 상실, 자기해체로부터 생겨났다. ‘자기처형’없이는 새로운 자기가 있을 수 없다. 단순한 자기변화로부터 스스로에게 반대하고 자신의 적이 되려는 데서 그의 기쁨이 생겨났다. [276]

삶을 살면서 삶 속에 녹아버렸으면…… 탐닉하고 오직 삶이 되어 삶 속에서 노닐 수 있었으면…… 조금씩 조금씩 빠져들어 마침내 삶이 되었으면. [281]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하루를 춤추듯 보낼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매일 그럴 수 있으면 자신이 행복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길 위에 있다. 한 곳에 짐을 풀고 편히 쉬더라도 그것은 길 위에서의 숙박이다.
‘새로운 장르의 일상적 삶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실천적 개혁이고 혁명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의미있는 신호를 보낼 수 있으려면, 내가 새로운 일상을 하나 만들어 냈다는 사실 때문이어야 한다. 그 새로운 일상이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대안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내 삶은 그들에게 의미있는 사례가 될 수 있다. [283]

인생을 파괴하지 않는 직업, 삶을 빛내는 직업만이 훌륭한 직업이다.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인가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눈부신 삶을 살게 하는 일, 그 일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있는 일, 그것이 위대한 직업이다. 시장에 나와 하루에 20줄의 양파를 파는 것, 이 초라하고 궁핍한 일은 돌연한 에피소드를 통해 통쾌한 반전을 만들어낸다. 초라한 미국인과 거대한 인디언 노인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철학의 힘이다. 나는 이 양파장수처럼 살고 싶다. [297]

죽어있는 정신을 깨우기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흥미가 살아나고 열정이 살아나며 삶이 살아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실험하게 된다. 실험이 곧 창의성이다. 글쓰기에서의 실험이나 사업에서의 새로운 시도와 모색은 다를 바가 없다. 글쓰기와 사업은 업종은 다르지만 같은 특성을 요구하는 행위라고 말해도 좋다. [300]

나의 전문 분야는 변화경영이다. 경영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변화라는 주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그리고 기업체에서 전문성을 쌓거나 경영 컨설턴트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 가운데 글로 자신을 표현할 만한 사람은 더욱 드물다.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변화경영이라는 전문 분야를 대중이 즐겨 읽고 실천할 수 있도록 된장 풀고 고추장 넣어 먹을 만하게 끓여준다는 생각은 시도할 만한 일이었다. 처음 해본다는 것은 기회를 선점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선점만큼 강력한 브랜드 전략은 없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라는 재능과 변화경영이라는 전문 경력을 결합시켜 이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만들었다. [303]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는 것은 세상과의 싸움을 의미했다. 생긴대로 사는 것은 처음에는 규제하고 강압하면 표준을 바라는 세상과의 싸움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원칙이 통용되는 자신의 세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 세계를 침범하려는 ‘일반의 세계, 군중의 세계’와의 오랜 싸움을 전제로 했다. 자신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멋진 싸움꾼은 아니다. 싸움꾼이기에는 상처를 쉽게 받는 선천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쉽게 물러서는 타입은 아니다. 나를 키워준 것은 오히려 약한 마음이 늘 얻어오는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얻은 치유력이었다. 갈등이 나를 키워주었다. 마음속의 싸움을 통해, 비록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내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싸움은 생각보다 나쁜 것이 아니었다. [307]

성공에는 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쪽지에 적힌 대로 끊임없이 익히는 것일 뿐이다. 손에 익고 머리와 가슴 사이에 어떤 괴리도 없이 자연스러운 강줄기가 흘러갈 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때 성공은 우리의 특징이 된다. [310]

유일함을 수련하는 방식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깊숙한 곳에서 잠에 취해 있는 자신을 깨워내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 아주 깊은 산중에서 잠에 빠져 있기 십상이다. 게으르고 잠을 즐기며 눈치를 보고 비겁하고 교활하지만, 아직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견하지도 못하고 발휘할 줄도 모르는 미숙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영웅이 스스로 일어나 초려에서 나오도록 설득해야 한다. [312]

누구든 자신이 세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인물을 얻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살려내지 않고는 내면에 숨어 있는 영웅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이다. [313]

삶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서 나는 내 삶 자체가 매혹적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나는 매혹적인 삶이라고 부른다. 나는 나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다. 끝없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즐거운 여행, 이것이 내가 그리는 삶이다. [318]

인기라는 것은 덧없는 것이며 언젠가 떠나는 것이다. 떠나는 것에 의지한 자는 불안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늘 변하고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기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인기를 추구하는 자는 인기를 잃음으로 결국 불행해지거나 스스로의 왜곡에 빠지기 쉽다. 지지자로 둘러싸인다는 것이 위험한 이유이다. 모든 화려한 자들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근신할 줄 알아야 한다. 인기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은 것이다. [325]

나는 먼저 그들이 그럭저럭 봉합시켜놓은 일상에 대한 만족을 헤집어 놓는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안한 불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펴 놓는다. 불길이 타오르면 그들의 욕망은 여기저기 묶여있는 봉합선을 뜯고 분출된다. 그들은 어 불행해지고 불편해진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내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시시한 삶, 평범한 일상에 대한 분노의 불길을 부추기고 타오르게 하는 묘한 입김으로 속삭이는 자여야 한다. [335]

막막할 때, 주저앉아 있을 때, 우연히, 자신의 안에서 스스로 불을 켤 수 있도록 잠시 불을 빌려주는 예기치 않은 쏘시개 불꽃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무수한 군중이 있지만, 내 말을 듣고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속에서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나는 그저 그 속에 불씨 하나를 던져 넣는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타오르는 것을 보며 즐긴다.
내가 하는 일은 또한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마음이 자신의 꽃씨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 미세하여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작고 연약하며 보잘 것 없는 것이 싹을 틔우면 이내 자라고 꽃을 피운다. 꽃은 유혹한다.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처럼 꽃은 여성의 은밀함이다. 환한 대낮에 자신의 성기를 온 세상에 활짝 펼쳐 보인다. 이 대담함이 식물의 생존과 번영의 비법이다.
자신의 꽃씨를 뿌리게 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나는 조용한 선동가이다. 모든 씨앗에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는 피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꽃이 다른 꽃들과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선동한다. 그리고 그 꽃을 피워내 이 세상에 그 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선동한다.
꽃씨와 불씨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비즈니스이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배운 방식이다. [342]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든든한 밥그릇 하나 챙겨두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그 쩨쩨함의 끝을 묻고 싶었다. 새로운 인생을 건설해야 하는 시점에서 여전히 망설이기만 하는 나에게 무엇을 더 기다리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360]

내게 마흔은 세상을 즐길 수 있게 해준 나이였다. 인생의 맛이 스며 일상의 뼛속까지 배어든 나이였다. 약간 뻔뻔해진 아줌마들처럼 인생에 대한 헛된 기대 대신, 직접 살아 본 경험의 혓바닥으로 날마다 인생의 삶 맛을 핥아볼 수 있는 나이였다.
언젠가 한번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스스로 설계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깨끗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햇빛 가득한 산을 넘고 들을 건너 아름다운 인생 하나를 건설해야 했다. 아름다운 그날 하루를 내 삶의 국경일로 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결국 자신의 주인을 닮게 되어 있다. [364]


● 내가 저자라면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Me-story'다. 'Me-story'란 말 그대로 ‘나의 이야기’ 이다. 저자 자신의 이야기란 뜻이다. 내용도 그에 걸맞게 저자의 이야기로 꾸며진다. 어찌 보면 ‘자아경영 프로젝트’이면서 어찌 보면 ‘자서전’ 같기도 하다. 자서전 형식을 빌었으니 사실상 자서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자서전이라면 흔히 유명한 사람이거나, 무슨 대단한 업적을 남겼거나,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사람이 주로 쓴다.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고 자서전은 그런 것이려니 한다.
그런 정의로 본다면 이 책은 개념을 혼란스럽게 한다. 평범한 사람의 자서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주변의 이웃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았고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다. 지금이야 평범하다고 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중뿔나게 대단하지도 않다. 저자는 책을 쓰고 강연을 한다. 그런 저자는 상식적으로 떠올리는 사회적 명망과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쓰는 책마다 장안의 종이 값을 끌어올릴 만큼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당당하게 'Me-story'를 대중 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는 사실 독자들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하루하루 내 삶의 기록조차 버거운 세상살이에 ‘당신의 이야기’까지 들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 한번 들어 보마”하고 책을 잡아든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뜻밖에 ‘당신’이 아닌 ‘나’의 모습이다.
불면과 버려짐과 죽음과 흰머리와 잊어진 꿈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정감 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민의 토로는 누구에게나 다르지 않은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공감의 웃음이 슬쩍 삐져나오기도 하고 쓴웃음이 얼굴을 덮기도 한다. 때때로 눈자위를 살짝 젖게 하는듯한 느낌은 ‘당나귀의 삶’을 살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그 속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달콤 쌉싸래한 감상에 빠져드는 순간, 독자의 뺨에 느닷없이 거친 손바닥이 날아와 작렬한다. 저자가 뺨을 후려친 것이다. 독자가 스스로 때리지 못했던 자신의 뺨을 저자가 그야말로 호되게 후려친다. 그것은 여태까지 끌려 다니며 살아온 삶을 깨우쳐주는 죽비와도 같다.

저자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읽는 사람의 가슴을 헤집으며 한껏 불을 지펴 올린다. 그 불은 개인의 혁명에 관한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삶의 혁명은 나만의 역사, 하고 싶은 일, 내가 만들어가는 인생이다.
‘나만의 역사’는 지금 이전의 시간을 돌아보고 기록하며 앞을 짚어보는 것을 말한다. 나의 역사, 나의 문명을 되짚어보는 것은 과거를 썩혀 거름을 만들자는 의미다. 그 작업은 스스로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과거의 관성, 과거의 습관, 과거의 자취와 흔적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찾아낸 것들을 곱씹어 보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나 자신의 과거를 소화시키고 썩혀낸다. 그렇게 만든 거름을 뿌리고 그 위에 씨앗을 심는다. 나의 미래라는 씨앗을.
‘나의 정체’를 알아냈으면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저자는 독촉한다. 지금까지의 삶처럼 밀려가는 시간을 살지 말고, 시간을 끌어가는 삶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삶을 바꾸는 실천, 자신이 방식으로 살기위한 끊임없는 모색. 그 과정에서 이번에는 과거가 아닌 미래의 Me-story가 나온다.

그 시점에 필요한 것이 뜨겁게 솟아오르는 혁명의 불이다. 세계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혁명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렇기에 혁명은 항상 대중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요구하기도 한다. 개인의 혁명이라고 다르지 않다. 개인의 혁명에도 뜨거운 불이 필요하고 때로는 피가 요구되기도 한다. 혁명은 어렵다. 저자가 독자의 뺨을 작심하고 후려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저자는 시종일관 부드럽지만 강하고 뜨거운 목소리로 선동한다. ‘인생의 다음 장면을 당신이 써라.’ ‘당신이 원하는 그것을 찾아라.’ ‘삶을 바꾸는 변곡점을 만들어라.’ 그 선동에 넘어가느냐 아니냐는 개인의 몫이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다시 쓰느냐 마느냐의 결정도 역시 개인의 몫이다.
다 읽은 뒤 덮어놓아도 저자의 목소리는 책 밖으로 흘러나와 여전히 귓전을 맴돈다. 책을 읽은 당신은 이제 쉽지 않은 선택의 자리에 놓여있다. 독자에서 책의 주인공으로 바뀐 당신의 선택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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