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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3일 21시 19분 등록


소유의 종말 - 제러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2008, 민음사


● 저자에 대하여

한 신문에 실린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인터뷰를 보자. ‘엔트로피’를 비롯해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 ‘수소혁명’ 등의 책을 낸 저자는 위기의 미래를 경고하는 경제학자 또는 미래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인터뷰에서 자신을 사회운동가로 불러달라고 말한다. 경제학자와 사회운동가는 차원이 많이 다른 명칭이다. 굳이 그가 사회운동가로 불러달라는 건 무슨 까닭일까.
일단 인터뷰 내용을 보자. ‘유럽은 삶의 질을 추구했고 미국은 개인의 경제적 발전만을 좇았다. 그 결과 미국은 실패했다. 미국이 부흥한 국가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사회공동체에 대한 고민 없이 개인주의적 발전만을 지향해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드는 실패한 사회가 됐다. 한국은 이런 모델을 따르면 안 된다.’ ‘미래에 닥칠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동의 급속한 해체이다. 이제는 세계화나 경쟁력 강화가 아니라 노동의 나눔이 필요하다.’
그의 말은 경제와 관련되어 있지만 삶의 모든 부분을 포괄한다. 단순히 경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와 개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내용뿐만이 아니다. 그의 유명한 저작들 속에서 그가 세상에 소리 높여 외친 내용들 또한 그렇다. 그의 주장들은 남들이 말하는 경제학자이며 미래학자라는 그의 명칭과 잘 어울린다.
사회운동가는? 여기에 사회운동가라는, 그가 불러달라는 명칭을 대입시키면 부조화가 생길까? 의외로 사회운동가의 명칭도 그의 말과 전혀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린다. 그의 말처럼 그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것이다. 참 묘한 현상이다. 학자와 운동가라는 병치될 것 같지 않은 명칭이 한자리에 설 수 있다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리프킨은 왜 경제학자와 미래학자라는 그럴 듯한 명칭을 물리치고 굳이 사회운동가로 불러 달라는 것일까. 그것을 알려면 그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을 찾아봐야 한다. 사회운동가라는 명칭을 염두에 두고 그의 자취를 되짚어보자.

1945년 미국에서 태어난 리프킨은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 스쿨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터프트 대학에서는 국제관계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창시절에는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인권과 환경 등에 관심을 갖는다.
리프킨은 17권의 사회비평서를 출간했는데 이 중 많은 저서가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1995년 출간한 ‘노동의 종말’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큰 파장을 불러왔다. 책을 내는 데까지 철저한 자료 조사가 특징이다. 사회를 앞서가는 참신한 아이디어는 항상 그의 저작들에 대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의 교수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설립한 경제동향재단(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s)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경제동향재단(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s)은 리프킨이 설립한 단체로 자신이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미국 및 국제적 공공정책 수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리프킨의 저작들은 다양하고 포괄적인 분야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현대 문명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엔트로피’는 기계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에너지의 낭비가 가져오는 재앙을 경고한 것이다. ‘노동의 종말’에서는 정보화 사회라는 문명의 발달이 수많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뿐이 아니다. ‘육식의 종말’은 현대 인간의 식생활을 파헤쳐 육식으로 파생된 문제를 문명적인 측면에서 고찰하며 인류가 육식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책에서 펼쳐내는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폭넓은 외연에 감탄이 앞선다.

리프킨으로 하여금 사회운동가라는 길을 걷게 만든 것은 젊은 시절에 참여했던 베트남 전쟁이다. 리프킨 자신도 베트남 전쟁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지금처럼 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리프킨은 반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시위를 주동하기도 한 이때의 경험으로 리프킨은 경제학이라는 자신의 전공과는 별 관련이 없는 인권과 환경 등에 눈길을 돌린다. 인생관이 달라진 리프킨은 돈 버는 길을 버리고 워싱턴 DC에서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인다. 1971년 처음으로 만든 시민단체는 ‘새로운 아메리카 운동’(New American Movement)이었다. 이 조직을 바탕으로 리프킨은 다음 해에 ‘200주년 국민위원회’(People's Bicentennial Commission)를 출범시켰다. 리프킨은 건국 200주년 행사를 정부가 주도하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1975년에는 메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4만명의 시위대를 동원하기도 했지만 목표했던 대중혁명운동까지는 일으키지 못했다. 그 뒤에 리프킨은 ‘국민기업위원회’(People's Business Commission)를 만들어 대기업의 횡포에 저항했다. 기존 경제 시스템의 민주적 대안을 모색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 운동은 많은 성과를 거둬 ‘급진적 사상의 대중화에 가장 재능있는 인물 중 하나’라는 평가를 안겨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리프킨은 1977년 자신의 주요 활동단체인 경제동향재단(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s)을 만든다. 이 단체는 노동 문제를 주로 다루었지만 유전자 조작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쳤다.
리프킨의 활동에서 주목할 것은 그의 운동방법이다.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효과만 있다면 수단은 가리지 않았다. 적극적인 사회운동가로서 활동을 펼친 것이다. 법률소송, 불매운동, 게릴라식 시위 등이 그것이다. 그가 출간한 저서들 역시 사회운동의 방법 중 하나이다.
책쓰기라는 방법의 사회운동은 리프킨에게 있어 아주 효과적이다. 그는 뛰어난 저술가이고 뛰어난 학자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마음껏 외친다.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잡은 저서들은 그가 세계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생각을 전달해 준다.
세계 300여개 이상의 대학에서 벌인 강연을 하고, TV 출연도 꺼리지 않는다. 시위를 주동하는 것은 물론이다. 법률소송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사회운동의 방법이다. 뉴스가치가 높은 소송을 벌여 언론에 기사화 되게 만든다. 승소와 패소를 떠나서 언론에 기사화 된 내용들은 사회운동의 목적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그야말로 사회운동가로 불러 달라는 그의 말이 무색하지 않다.
리프킨의 활동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그가 많은 이야기들을 대중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경제와 환경 그리고 미래와 기술의 이야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는 게 일반적이다. 내용이 전문적이고 일반 사람들은 이해도 어렵고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테마를 대중화시켜 공공적 이슈로 만든 것은 리프킨의 가장 큰 치적이다. 리프킨의 저작들은 많은 사람들이 외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쉽게 이해시켜 똑바로 보게 만들었다. 그 결과 대중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과 밀접한 문제들에 대하여 공통적인 사회적 고민을 형성 시켰다.
리프킨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미래, 문명의 위기, 개인의 삶에 관한 쟁점들을 불러 일으켜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마당을 훌륭히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평생에 걸친 노력의 결과였다. 리프킨이 풀뿌리 시민운동을 시작해 세계인이 주목하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그것을 공론화 시킨 것은 사회운동가라는 명칭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과정에 너무나 깊이 얽혀 있어, 이제 우리는 인간사를 시장이 아닌 다른 틀로 이해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장은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으로 파고 들어오는 힘이다. 우리 모두는 시장의 분위기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시장이 잘 굴러가면 우리의 생활도 잘 굴러가는 것 같다. 시장이 건강하면 우리 마음도 밝아진다. 시장이 맥을 못 추면 우리는 상심한다. 시장은 우리 삶의 안내자이며 상담자이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9]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 싸게 사들이고 비싸게 팔아치우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끊임없이 담금질한다. 재산을 모으는 것은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커가면서 배운다. 이 세상은 상품을 교환하고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재산을 누려보겠다는 원초적 충동에 의해서 굴러간다.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진 생각이다. [9]

반면 지적 자본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선망의 대상이다. 새로운 경제에서는 물건이 아니라, 개념, 아이디어, 이미지가 실리를 가져온다. 부는 이제 물적 자본에서 나오지 않는다. 부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에서 나온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적 자본은 여간 해서는 교환되지 않는다. 공급자는 지적 자본을 단단히 거머쥔 채 제한적으로 임대하거나 사용권을 빌려준다. [10]

산업 생산에서 문화 생산으로 탈바꿈하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노동 의식이 유희 의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노동을 상품화하는 것이 산업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접속의 시대에는 놀이의 상품화가 그 특징이다. 제의, 예술, 축제, 사회운동, 영성 수련과 공동체 활동, 시민적 참여를 개인적 오락으로 유료화 하는 것이다. 놀이의 내용과 접속권을 놓고 문화 영역과 상업 영역은 앞으로 치열한 대결을 벌일 것이다. [15]

문화생산은 더 많은 인간의 활동을 상업 부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핵심적 사명으로 삼아 온 자본주의 생활 방식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 제품 생산에서 기본 서비스의 제공으로, 다시 인간관계의 상품화로, 마지막으로 문화적 체험에 대한 접속권의 판매로 경제적 우선 순위가 달라져 온 것에서 우리는 모든 관계를 경제적 관계로 만들려는 상업 영역의 집요한 의지를 목격한다. [16]

다가올 시대의 가장 큰 화두는 <정부와 문화 영역이 크게 축소되고 상업 영역만이 인간 생활의 으뜸가는 매개 고리로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과연 문명이 살아남겠느냐> 하는 것이다. [19]

인류는 디지털이라는 경계선을 중심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 이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단절이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더 이상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소통할 수 없게 된다. 접속의 문제는 심각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는 사람들과 이 새롭고 강력한 존재의 영역에 결코 접속하지 못할 사람들 사이에 거대한 골이 파일 것이다. 우리가 경험할 정치적 분재의 상당수는 바로 이런 골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25]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와 하이디 토플러에 따르면 상상을 초월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새로운 시장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속도의 경제로 바뀌고 있다. 시장에 먼저 제품을 내놓은 기업만이 가격을 높게 책정하여 이익을 챙길 수 있다. 경쟁자들보다 몇 달을 앞서느냐 뒤지느냐에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시장에 발리 나오는 제품의 수명은 그만큼 길어진다. [37]

기업인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사고 방식은 <의심스러우면 밖으로 돌리라>는 것이다. 기업의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산이나 업무가 아니라면 외부 하청업자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새롭게 부상하는 네트워크 경제에서 아웃소싱은 거의 종교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 [69]

새로운 상행위의 저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나이키이다. 나이키는 내용으로 봉도 그렇고 추구하는 바도 그렇고 이제는 가상 회사가 되어 버렸다. 일반인들은 나이키를 운동화제조업체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나이키는 정교한 마케팅원리와 유통망을 갖춘 연구 디자인실이라고 보아야 옳다. [73]

이런 아웃소싱 계약은 그러나 불순한 의도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웃소싱은 경영진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즐겨 쓰는 수단이 되었다. 노조의 힘이 강하지 않은 기업이나 노조가 아예 없는 기업에 업무를 넘김으로써 회사는 골치 아픈 단체협상을 피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나라에서 노조의 힘이 줄어드는 배경에는 아웃소싱이 있다. [75]

작가이며 언론인인 프레드 무디는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유일한 공장 자산은 직원들의 상상력이다> 라는 말로 핵심을 찔렀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21세기의 새로운 비즈니스는 딱딱한 물리적 자산이 아니라 아이디어로 가치를 평가하는 <가벼운> 기업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78]

물질적 가치만이 재산으로 인정되고 시장에서 거래되었던 시대에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가장 드높은 꿈이었다. 물질적 재산을 최대한 많이 소유하여 자신의 육체적 존재를 부풀리는 것은 재산을 가진 모든 인간의 갈망이었다. 마돈나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물질이 판을 치는 세계>였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비물질적이고 사색적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형상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원형의 세계다. 개념의 세계, 픽션의 세계다. 산업시대의 인간이 물질을 축적하고 가공하는 데 빠져들어 있었다면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정신을 관리하는데 훨씬 관심이 많다. [84]

앞으로는 자기 몸 안에 있는 DNA, 세포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믿기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몸, 노동, 정신 능력을 소유한다고 주장했다. 접속의 시대에는 이런 전통적 소유 관념이 흔들린다. [105]

산업 자본주의의 첫 단계에서, 그전까지는 집에서 만들거나 아니면 숙련공이 주로 교환을 위해서 그리고 어쩌다가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 만들었던 물건은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대신 그것들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가구와 옷감, 그리고 나중에는 옷, 식기, 비누, 헤아릴 수 엇이 많은 가정용품이 상업 영역에서 더 질 좋고 더 저렴하게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물건을 그 동안 집에서 만들어 써온 수많은 노동자는 이제 공장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시장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가정 자체가 생산의 중심지에서 소비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122]

독창성, 기민성, 순발력만으로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술의 원가가 제로로 곤두박질치는 경제에서 가치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만 살아남는다. 머지않아 이런 급락은 거의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똥값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라는 것은 처음 개발한 제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만 창출될 수 있다. [142]

지나간 산업 경제 시대에는 개개인의 노동력은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는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하루하루 생활을 하고 경험을 하는 데 필요한 접속의 권리가 상품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며 추구해야 할 무형 자산으로 여겨진다. [152]

제품의 생산과 판매에서 상업적 관계의 장기적 구축으로 기업의 관심이 이동하면서 마케팅이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산업 시대를 지배했던 생산 제일주의는 점점 마케팅의 하위 기능으로 간주된다. 물건 자체가 서비스 관리를 위한 플랫폼의 역할을 맡고, 세계 무역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서비스에서 나오면서, 최종 사용자와 안정된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마케팅이 중심에 오며 고객을 관리하는 것이 상업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152]

1994년 현재 세계 25개국에서 버거킹 키드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회사측은 키드 클럽 운영이 추구하는 목표를 굳이 숨지기 않는다. 버거킹의 마이클 에번스에 따르면 <아이의 가슴과 머리를 사로잡아 예순 살까지 묶어두자는 것>이다. 1990년 클럽이 처음 설립된 이후 버거킹 아동식의 매출은 3배로 늘었다. [164]

공간과 물자의 상품화가 인간의 경험과 시간의 상품화로 바뀌는 현상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시간 중에서 조금이라도 남아도는 시간은 금세 모종의 상업적 연결 고리로 채워진다. 그래서 시간 자체가 가장 희귀한 자원이 되어 버린다. 팩스, 이메일, 음성 메일, 휴대폰, 24시간 온라인 증권 거래 시장,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현금 자동 입출금기와 온라인 뱅킹, 밤새도록 할 수 있는 전자 상거래와 검색, 24시간 계속되는 텔레비전 뉴스와 오락 프로, 24시간 문을 여는 식당, 약국, 수리점은 모드 우리의 관심을 끌려고 고성을 질러댄다. [166]

우리는 상업적 영역 안에서 서로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온갖 활동, 시간과 노동을 절약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만들었지만 이제까지의 역사에서 인간이 지금처럼 시간에쫓기며 산 적도 없었다. 이것은 시간과 노동을 절약하는 서비스가 급증하면서 우리 주위에서 상품화되는 활동의 다양성과 속도만 늘어났기 때문이다. [167]

우리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이 유료 활동으로 바뀌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그 자체도 상품이 되어버리고 상업적 영역은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쥐게 된다. [168]

CID는 단순히 집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을 파는 것이다. 집 그 자체는 독특한 생활 경험을 제공하는 서비스 네트워크안에 끼워 넣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집은 서비스와 경험을 제공하는 수용체 내지는 플랫폼이 되어버린 여타의 제품이나 부동산과 아주 비슷해진다. [172]

사람의 인격은 소유되는 대상 안에 늘 나타나기 때문에 재산은 인격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소유한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을 알고 확인하게 된다. 재산은 그저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헤겔은 보지 않았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재산은 개인적 자유를 표현한다. 재산으로 자기를 감쌈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인격성을 시공간 속에서 부풀리고 자기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소유의 시대를 다른 시대와 구별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소유의 자부심> 이었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한 것이다. [193]

CID에는 전통이 살아 있는 공동체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CID는 아무런 역사적 준거점 없이 설계 내역에 따라 하나부터 열까지 몽땅 인공적으로 만들어 허허벌판에다 툭 떨어뜨린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모르는 공동체이다. CID를 고향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리적 좌표가 있다면 그것은 출근 시간과 방향을 산정하는 의미밖에는 갖지 못한다. 전통적 공동체 안에서 느꼈던 아늑함을 CID에서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땅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상징한다는 이 심오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생활 경험을 공유하는 사회적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가 가져다주는 좀더 편리한 시간적 가치가 그 자리를 메운다. [197]

인간이 가진 창조성을 표현하는 이런 기본적 요소를 집단적 공동체적 기원으로부터 자꾸만 분리하여 돈을 내는 사람에게만 팔아먹으려는 시도가 파죽지세로 확산되고 있다. [205]

20세기에 들어와 정치 영역과 문화 영역의 가치는 경제 영역으로 포섭되어 끊임없이 상품화되었다. 민주주의적 참여와 개인적 권리라는 관념은 소비자 주권과 소비자 권리로 변신하여 시장에서 다시 태어났다. 수많은 미국인에게는 상품을 구입하고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투표소에서 공민권을 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개인적 자유의 표현수단이 되었다. [207]

<참여>는 정치적 영역의 고매한 횃대에서 굴러 떨어져 상업적 영역에서 소비자로서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기회로 격하되었다. [207]

과거의 생산 지향 자본주의가 창조성, 자기 충족, 쾌락과 유희를 추구하는 욕망을 억누르기에 급급했다면 새로운 소비 지향 자본주의는 이 억눌린 심리적 욕구를 예술이라는 분출구로 해방시켜 거대한 소비를 창출한다. 새로운 소비자 지향의 시장은 예술을 문화적 영역으로부터 시장으로 끌고 나왔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를 전달하는 중요한 소임을ㄹ 맡았던 예술은, 이제 광고 회사와 마케팅 전문가의 볼모가 되어 <생활양식>을 파는 데 동원되었다. [210]

미래학자 제임스 오길비는 이렇게 지적한다. <체험산업의 성장은 산업 혁명이 생산한 물건의 효용성이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이제 소비자는 ‘내가 안 아직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 뭔가?’ 라고 묻지 않고 ‘내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 중에서 체험하고 싶은 것이 뭔가?’라고 묻는다.> [213]

문화체험을 상품으로 제공하는 산업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각광을 받고 있다. 새로운 체험 경제의 선봉장 역할을 하는 것은 관광산업이다. 불과 반세기 전에 경제 활동의 가장자리에서 슬며시 등장한 이 문화상품은 이제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업의 하나가 되었다. 관광업은 문화 체험의 상품화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분야다. [214]

과거의 산업 자본주의가 물자와 서비스를 생산할 목적으로 자연 자원과 노동력을 포획하고 이용했다면, 새로운 문화 자본주의는 문화 생산을 위해 문화 자원을 징발한다. [222]

문화의 집결지라는 막중한 소임을 맡았던 공공의 광장은 그러나 불과 30년도 못 되는 사이에 거의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상업 관계로 급격히 기우는 새로운 공동체 관념에 의해 삼켜지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시장 활동은 문화 활동의 조역이었고 파생물 이었지만 이제는 이런 관계가 뒤집어졌다. 공공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문화 활동은 쇼핑몰 안으로 흡수되었고 판매를 위한 상품이 되었다. 쇼핑몰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새로운 건축공간을 창조했다. 그 상품화된 세계에서 문화는 상품화된 체험의 형태로 존재한다. 쇼핑몰은 이런 점에서 현대의 관광산업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 [226]

물론 가장 큰 차이는 쇼핑몰은 접속과 관련된 규칙과 규제가 적용되는 사유지라는 점이다. 보도, 벤치, 가로수가 늘어선 시원시원한 공간은 몰을 광장처럼 보이게도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몰에서 벌어지는 문화 활동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살아있는 체험을 물건과 오락물의 구입이라는 형태로 상품화하는 중요한 소임을 돕기 위해 옆에서 들러리를 서는 데 불과하다. [228]

오늘 날 몰은 소비라는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연극 공간 내지는 정교한 무대가 되었다. [229]

미국인은 열흘에 한 번꼴로 몰을 찾고 평균 1시간 15분 동안 그곳에 머문다. 이렇게 뻔질나게 몰을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어서이다. <몰은 입체 텔레비전과도 같다>고 코윈스키는 말한다. TV와 함께 성장한 세대에게 휙휙 바뀌면서 스쳐 지나가는 점포의 이미지, 끝없이 이어지는 선전문과 드라마를 방불케하는 무대 장치는 너무나 친숙하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몰에서는 시청자가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가서 실타래처럼 펼쳐지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이다. TV와 몰은 <시청자>와 <고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여 제품이나 서비스, 아니면 길이 기억될만한 사건 같은 상품화된 체험을 팔기 위해 정교하게 연출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매체라고 할 수 있다. [231]

경제는 거대한 공장에서 거대한 극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상업 활동을 묘사하는 데 동원되는 이미지와 비유도 글로벌 경제에서 문화 상품이 부상하는 현실에 발맞추어 달라지고 있다. 효율성, 생산성, 실용성, 납품 가능성, 계산력 같은 기계적 이미지는 문화 상품의 연극적 이미지에 의해 차츰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241]

문화 생산은 21세기의 고부가 가치 산업을 선도할 것이다. 접속의 시대에 문화 생산은 경제 생활의 제1열로 부상하고 정보와 서비스는 2열로, 제조업은 3열로, 농업은 4열로 내려간다. 이 네 개의 열은 소유 관계에 바탕을 둔 체제를 접속에 바탕을 둔 체제로 꾸준히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를 통합한 네트워크 관계 안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할 것이다. [246]

인공 환경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상품으로 바뀐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삶을 만들어주고 우리는 그것을 구입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소비자가 되어 버린다.
라인골드는 <화면 저 너머로 현실이 사라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현실 자체가 상품으로 제조되고 계량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깨어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컴퓨터가 만든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인간은 타인과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반문한다. [251]

고급 상표가 붙은 제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 디자이너가 창조한 가치와 의미의 세계에 자기도 끼여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저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싸구려 포장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은 먹혀들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조금도 의심해 보려 하지 않고 이 세련된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돈을 뿌린다.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이 박힌 옷, 전자제품은 상상 속에서 꿈꾸었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의상과 배경이 된다. 문화의 시장에서 누구나 똑같은 게임을 즐길 때 대용물은 현실의 자리를 차지한다. [253]

나이키는 운동화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화를 신으면 어떻게 보일까 하는 이미지를 파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254]

광고주는 이제 대중을 단순한 제품의 소비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상징의 소비자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자연히 광고는 문화적 의미를 해석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다. 광고는 개인이 스스로 떠올리는 삶의 줄거리를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좀더 원대한 줄거리로
끊임없이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한다. 소비자는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퍼부어지는 수많은 광고 메시지를 통해서도 문화와 그 다양한 의미에 접하게 된다. 광고는 소비자에게 문화에 대해서 한 수 가르쳐주고 무엇을 사야만 그럴듯한 문화적 함의와 체험을 누릴 수 있는지를 일러준다. 따라서 고도 자본주의의 본질은 단순한 제품의 생산도 아니고 서비스의 수행도 아니고 정보의 교환도 아니다. 그것은 정교한 문화 상품의 창조다. [260]

디디 고든 같은 유행 사냥꾼은 샌들이 크게 유행하리라는 것을 가장 먼저 간파했다.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누비고 다니다가 고든은 십대 소녀들이 몸에 착 달라붙는 새하얀 민소매 러닝 셔츠, 두툼한 목양말, 샤워 샌들이 뜰 것이라고 확신하고 디자이너에게 의뢰하여 1970년대에 유행한 컨버스 원 스타 운동화와 비슷한 복고풍 스니커 샌들을 제작했다.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고 컨버스 사는 큰돈을 벌었다.
유행 사냥꾼 베이시 와이트먼은 멀린 애드버타이징의 부사장이다. 그녀는 최근 점점 많은 아이들이 면잠옷 차림으로 학교에 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녀의 고객인 면제품 의류 제조업체 L. L. 빈은 여기에 흥미를 보였다. <파자마 룩>은 최근 Y세대(12~21세)가 집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유행 사냥꾼 그레그 채프면에 따르면 <젊은이들은 이 클럽 저 클럽 돌아다니는 데도 이골이 나 이제는 친구들과 집에서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 이제는 저녁 파티를 집에서 여는 것이 유행이다. [270]

문화 상품의 세계 무역 규모가 불과 10년 만에 3배로 늘어나면서 지구 문화의 동질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동질화 과정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전세계의 많은 언어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있으며, 그 빈자리에 영어가 새로운 문화 상품의 표준어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현재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구어의 종류는 6천가지가 넘지만 1백만명 이상의 사용자를 가진 언어는 3백개에도 못미친다. 6천개의 언어 가운데 절반은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MIT의 언어학 교수 켄 헤일은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루브르 박물관이 폭격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8장에서 보았듯이 언어는 한 문화가 공유하는 의미, 표현, 가치관, 이해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문화를 특집으로 다룬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웨이드 데이비스는 <언어가 사라지면 문화도 소멸한다.>고 지적한다. [272]

새로운 인간형이 탄생하고 있다. 그는 사이버스페이스의 가상 세계 안에서 자기 몫의 인생을 즐기고 네트워크 경제가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고 물건을 쌓아두는 데는 관심이 없지만 흥미롭고 신나는 체험에는 관심이 많고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고 가짜든 진짜든 눈앞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현실에 자신의 인격을 재빨리 적응할 수 있다. 21세기의 주역으로 등장할 이 새로운 인간은 산업 시대를 살았던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부르주아 인간형과는 종자부터 완전히 다르다. [274]

근대가 목적을 추구했다면 탈근대는 유희를 추구한다.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아무튼 질서라는 것은 무조건 답답한 것, 숨막히는 것이라고 요즘 사람은 생각한다. 반면에 창조적 무질서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권장하는 쪽에 가깝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질서는 자발성이다. 탈근대의 분위기에서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진진하지 않다. 아이러니, 역설, 회의가 득세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보다는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더 관심을 보인다. [286]

현실을 이리저리 건너뛰면서 촌각을 다투는 현대 문화의 빠른 속도는 개인과 집단이 가진 시간의 지평을 현재라는 짧은 순간으로 축소시켰다. 전통과 유산 앞에서 사람들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중요한 것은 순간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 생활에서도 사회 생활에서도 절정감과 카타르시스는 효율성과 생산성보다 윗자리에 놓인다. 쇼와 연예, 정교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세련된 공연으로 이 세상은 가득 찬다. 종교 개혁부터 산업혁명까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해 온 <현실 원칙>은 폐위 되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버림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쾌락 원칙>이 군림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유희와 쾌락의 추구가 판을 친다. [287]

물리적 자원을 가공, 변형하는 데 주려하던 경직된 시대는 지나갔다. 탈근대는 부드럽고 가볍고 느낌과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시대다. 그것은 거꾸로 된 세계이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유가 지배하는 의식은 의심받고 성적 욕망, 몽상, 환영에 이끌리는 무의식이 전면에 나서서 사실상의 현실이,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이퍼 현실이 된다. 지하 세계에 갇혀 있던 환상은 찬양을 받으면서 표면으로 떠오른다. [289]

MTV는 아무런 맥락이 없는 체험이다. 그래서 무의식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온갖 종류의 환상이 화면 위로 거품처럼 솟아올랐다가 이내 사라지는 과정이 반복되는, 시간을 초월한 영역이다. MTV는 역사나 지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꿈결처럼 가벼운 오락이다. MTV는 문화의 자투리를 가지고 수많은 젊은이에게 일종의 꾸며진 체험을 자극적으로 제공하는 환상으로 재포장한다. MTV는 탈근대 세계의 이상적 상징물이다. [291]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에서 체험의 소비로 다시 한번 글로벌 경제의 중심축이 바뀌고 있는 오늘날, 인간의 본성도 다시금 변화를 겪고 있다.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변화 무쌍한 새로운 인간형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부모 세대나 조부모 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난 세대의 사람은 자신을 <양식 있는 인간>으로, <매력 있는 인간>으로 여겼다. 거기에는 생산 중심의 가치관, 소비 중심의 가치관이 각각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 사이에서는 스스로를 문화라는 장터를 이루는 수많은 드라마에서 연기하면서 각본과 무대 사이를 경쾌하게 옮겨다니는 <창조적 공연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297]

철학자 게으로크 지멜은 20세기의 가속화하는 도시 세계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인간형에 대하여 성찰하면서 삶 자체의 <본질이 불안정해졌다>고 말한다. 인간 활동의 속도가 워낙 빨라지다 보니 고정된 형태가 자리 잡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발밑에 놓여 있는 무정형화된 삶의 심연을 응시한다>고 지멜은 말한다. [298]

20세기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역사의식은 쇠락하고 심리 치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역사적 사명감을 의식하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사를 훨씬 비중있게 생각했다. 사회학자 필립 리프에 따르면 새로운 탈역사의 시대에 <사람들은…… 시대를 향유하는 차원을 넘어서려는 몸짓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으면서 살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 치료에 눈을 돌리는 남녀는 <드높은 상징의 울타리로 주변을 둘러싸지 않고도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리프는 지적한다. 생산활동을 하고 스스로를 무언가로 만들어가는 것은 생산 지향의 역사 의식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맞았을지 모르나 이제는 그야말로 고역이 되었다. 인생은 역사나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기에는 너무 짧다는 각성이 움튼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는 그런 생각에 더욱 이끌리게 마련이다. 역사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살아가지만 치료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위해 살아가며 거창한 역사적 사명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300]

래시에 따르면 역사의식이 붕괴하고 치료의식이 부상하는 것은, 한 인간의 성취와 역사에 대한 공헌을 평가하는 잣대를 재산에서 찾던 세계가 막을 내리고, 개인이 얼마나 다채로운 심리적 경험을 했고 자기 변신에 얼마나 투자 했는가를 중시하는 세계가 부상하는 추세와 맥락을 같이 한다. 래시는 이렇게 덧붙인다. <예전에는 자기 이해 하면 부를 합리적으로 획득하고 누적하려는 노력을 의미했지만 이제 그것은 쾌락과 영혼에 대한 관심을 뜻할 뿐이다.> 치료 의식은 새로운 남녀, 다시 말해서 탈근대 인간형이 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301]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자투리 시간은 또 다른 접속을 위한 기회로 이용된다. 우리는 서로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붙들어 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회에서 살아간다. [309]

인간은 끝없는 변신의 과정을 밟는다. 자꾸만 존재의 상태를 바꾸어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 다른 누군가가 된다. 문화행사가 벌어지는 자리, 교제의 장, 사업, 환경에서 인간은 의혹을 접고 기꺼이 하나의 역할을 맡는다. 인격을 뜻하는 라틴어 는 원래 가면을 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317]

우리가 살고 일하고 쇼핑하고 노는 공간을 설계하고 건설하고 장식하고, 우리의 의상을 창조하고, 우리의 머리에서 윤기가 흐르고 얼굴을 훤하게 만들고, 우리의 몸을 날씬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소도구를 제공하는 것을 주업무로 삼는 영역의 비중이 미국 경제에서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317]

각본으로 만들고 공연할 수 있는 개인의 드라마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은 엄청난 상업적 잠재력을 가진 평생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세계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개인 재산의 유일한 자취는 공연의 배경을 제공하는 소도구뿐일지도 모른다. 세계를 연극무대로 보는 데 익숙한 새로운 시대의 남녀에게는 상업 세계가 제공하는 대본, 무대, 다른 배우, 청중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사는 것이 자신들이 거느리고 살아가는 다양한 인격을 살찌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연기를 할 수 있고 변신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322]

인터넷은 상업 광고의 경연장이 되었다. 소비자에게 비싼 요금을 물리기는 어려운 실정이므로 포털 기업의 입장에서는 회사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상업 광고를 유치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비자는 끊임없이 상업광고에 노출된다. 그것은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류하기 위해 사용하는 통신 인프라를 지배하는 것은 물론 포털과 관문에 대한 접속권까지 움켜쥐고, 나아가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문화 콘텐츠까지 거머쥔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은 전무후무한 권력을 누리게 된다. [330]

거의 모든 남자, 여자, 아이를 통제된 이미지와 단어로 둘러쌀 수 있는 힘, 자라나는 세대의 의식을 지배하는 힘, 국가의 정치적 의제마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세력이 등장했다는 것이 문제다. 이 집단의 영향력은 학교, 부모, 종교, 심지어는 정부 자체의 영향력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330]

세계 통신, 방송망의 규제 완화와 상업화가 가속화되면서, 국민 국가는 자국 영토안에서 통신을 감독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글로벌 미디어 기업은 정치적 국경선을 가뿐히 뛰어넘는 통신망을 전세계에 깔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정치의 근본적 성격까지 바꾸어 놓고 있다. [331]

그렇다면 이 새로운 시대에 국민 국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까지 정부가 의지한 것은 지리적 기반이었다. 정부는 국토를 통치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러나 인류의 사업 범위와 교제 범위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비물질적 세계로 이동하게 되면 영토에 기반을 둔 정부의 지위가 점점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경제와 사회에서 비중 있는 활동이 상품화된 문화체험의 형태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세계에서, 정부의 역할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다. [336]

통신혁명과 미래의 네트워크 세계에 대한 대담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면 세계인구의 65퍼센트가 평생 전화를 걸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들이고 40퍼센트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에서 살고 있다. 뉴욕의 맨해튼 한곳에 있는 전화기 수가 사하라 사막 남쪽의 전체 아프리카에 있는 전화기 수보다 많다. [339]

소유관계와 시장교환의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철학은 그 시대의 의미를 정의하는데 이바지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통신기술과 이 기술을 가지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네트워크 자체가 우리가 접속을 추구하는 목적은 아니다. 네트워크는 새로운 시대에 펼쳐질 인간의 행로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요 입구일 뿐이다. 접속 관계의 사회학적, 정치적 의미를 정의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다. [348]

인간의 활동을 조직하는 두 가지 방식은 판이하게 다른 전제와 가치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들은 동질적이라기보다는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관계는 친족, 민족, 지리, 공유하는 정서로부터 탄생한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이런 전통적 관계를 뒷받침하는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의미를 끊임없이 확보하고 재생산하며, 이렇게 공유되는 의미가 공동의 문화를 이루어 나간다. 관계와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반면에 상품화된 관계의 핵심은 그것이 도구적이라는데 있다. 이런 관계를 유지시키는 유일한 결속력은 쌍방이 합의한 거래 가격이다. 이 관계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호혜성보다는 계약성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이것은 쌍방이 계약상의 의무를 존중하는 동안 존속하는 공동 관심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된다. [356]

상품화된 관계에서는 당사자들 사이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 돈을 교환하는 것 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고는 처음부터 쌍방이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다. 관계를 맺으면서 쌍방이 겪는 체험은 피상적이고 정략적이며 일시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전체 과정에서 잠시 불신을 유보해야 하다. 그래서 이것은 모사된 체험의 전형이 된다. [357]

결국 상업 영역은 깊은 공동체 이식과 개인적 변신으로 나아가는 관문을 제공할 수 있는 것처럼 과시하지만 그것은 자기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경제는 물질적 안녕, 육체적 안락, 특정한 지식, 오락과 유희 같은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며, 이것들은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데 하나같이 중요하다. 하지만 경제는 문화와 인간성의 기본틀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와 감정, 다시 말해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만들어 낼 능력은 없다. 상업 영역이 인간 문화와 체험의 조각조각을 닥치는 대로 짜깁기하여 제공할 때, 우리가 중요한 인간적 가치와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우물은 독으로 오염될 가능성이 있다. [364]

문화를 소생시켜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문화 생산하는데 원료가 되기 때문이어서만도 아니고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문화가 만들어내기 때문만도 아니다. 문화는 다른 이유를 모두 접어두고서라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소생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낳은 유일한 원천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가 소생하면 시장도 분명히 득을 보겠지만 문화가 단순히 시장의 원료로 사용되는 것을 방치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문화에서 흘러나와서 인간성을 창조하는, 인간과 인간이 공유하는 의미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고, 개인적 오락과 치유의 형식으로 체험을 상품화하는 초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문화를 격하시키는 발상이다. [372]

많은 미국 학교가 오래전부터 핵심적 교육 목표로 표방해 온 경쟁력있는 기술의 습득은, 마차를 말 앞에 놓는 것처럼 본말이 전도된 발상이라고 시민 교육 이론가들은 비판한다. 시장에서 자기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21세기의 교육 이념으로는 지나치게 옹색하다. 이런 교육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진 균형잡힌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남에게 팔아 먹을 수 있는 재산쯤으로 치부하는 어른을 양산한다. [376]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문화와 상업의 갈등은 내재 가치와 효용 가치의 갈등이다. 두 가치가 모두 지난 몇백 년동안 사회담론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내재 가치가 효용 가치에 점점 밀려나고 있다. 사회의 준거틀이 자꾸 효용성으로 치우치는 것은 상업 영역이 점점 득세하고 문화 영역이 퇴조하는 시대 추세를 정확히 반영한다. [379]

자기만의 문화 정체성을 앞세우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 시민 사회 조직운동의 성격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많은 시민 사회 조직의 정서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 집약되어 있다. <나는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문을 굳게 닫아놓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온 세계에서 불어오는 문화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온 문화에 덩달아 휩쓸려 가지는 않겠다.> [383]

자유에서 자율성을, 자율성에서 나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능력을 연상하면서 우리가 근대를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동의 결실로 얻은 재산은 우리가 가진 자유의 징표로 여겨졌다.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부터 남을 배제하는 권리는 우리의 자율성과 개인적 자유를 지키는 최선의 길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고 공감하고 포용할 수 없으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390]

상업 영역에서 오락 형식의 놀이를 돈 내고 즐기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지만 문화영역에서 성숙한 놀이는 씨가 마르고 그 빈 자리를 온통 유료 놀이가 차지할 때 문명은 심각한 와해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391]

적절한 제약을 가하지 않을 경우, 시장의 힘은 문화 영역을 집어삼켜 상업적 오락물, 체험, 유료 공연, 금전 관계의 상품화된 파편들로 변질시킬 것이다. 수천년을 이어온 살아 있는 인간 체험의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생물 다양성을 잃는 것 못지않게 앞으로 우리가 생존하고 번영하는 데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문화와 상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일은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그리고 다음세대들도 지금 세대가 자연 경제와 인간 경제의 적절한 균형을 찾기 위해 기울인 것과 똑같은 정성과 노력을 이 운동에 쏟아부어야 한다.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접속이라는 것은 참여의 수준만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21세기에 우리가 만들어나갈 사회의 성격은 이 답변에 좌우될 것이다. [392]


● 내가 저자라면

책을 펼치고 잠시 읽다보면 태풍 같은 바람이 덮쳐온다. 바람이 쏟아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강풍이 몰아친다. 책을 읽는 사람이 그 바람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바람은 사물을 흔들리게 하지만 책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람을 책 속으로 빨아들인다. 정신없이 기제들이 쏟아지고 책을 읽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소유의 시대가 가고 접속의 시대가 되었다’는 저자의 말은 그 한마디로 시대를 읽고 내다보는 혜안을 보여준다. ‘엔트로피’와 ‘노동의 종말’에서 이미 미래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제러미 리프킨은 이 책 ‘소유의 종말’에서도 여전한 시대의 통찰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인터넷의 등장과 발달에 놀라고 있을 때 리프킨은 그 영향으로 지구의 문명과 자본주의가 바뀌어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소유’는 개인이 모든 것의 점유권을 갖는 지금까지의 자본주의를 대표적으로 규정하는 개념이다. ‘접속’은 영구적인 사용이 아니라 일시적인 사용을 의미한다. 일시적인 사용을 위하여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개인이 점유권을 갖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접속’은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접속은 그러한 행위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고 자본주의를 새롭게 바꾼다고 말한다. 현시대의 문명이 바뀌는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것이다. 문명이 바뀌는 것은 인류의 미래상이 바뀐다는 말과 같다. 저자는 ‘다가올 시대에서 상업 영역만이 인간 생활의 으뜸가는 매개 고리로 남아있는 상황에서 과연 문명이 살아남겠느냐’고 까지 말한다. ‘접속’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것을 저자는 책 속에서 세세히 풀어내고 있다.
저자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접속이 지배하는 것은 인터넷만이 아니다. 컴퓨터나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 이상의 의미다. 자동차, 주택, 가전제품, 공장, 체인점 같은 다양한 실물 영역은 물론이고 사람의 경험과 삶 자체를 상업화 시키는 것 까지도 포함된다. 기업은 공장을 소유하지 않는다. 브랜드만 갖고 있는 기업은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개념을 판다. 대표적으로 나이키 같은 회사가 되고자 한다. 나이키는 이제 가상회사이다. 나이키는 운동화 제조업체가 아니라 정교한 마케팅 원리와 유통망을 갖춘 연구 디자인실일 뿐이다. 소유가 아닌 접속만 남은 것이다. 포드는 자동차를 팔려고 하지 않고 임대하여 고객과 지속적 관계를 맺는다. 고객에게 소유를 부추기는 게 아니라 고객의 관심과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맥도날드는 햄버거를 파는 것보다 매장을 파는 회사로 변하고 있다. 개념이 곧 재산이고, 아이디어, 문화가 생산의 중추를 이루는 시대이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개인의 삶은 어떻게 변화될까.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 반가운 형태는 아니다. 접속의 시대는 인간 경험의 상품화가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과로 인간의 공동체적 경험은 상업적으로 개조되고 ‘문화적 상업주의’가 삶을 이끌게 된다. 문화적 자원이 돈을 주고 사야하는 오락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자기 몸 안에 있는 세포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믿기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저자의 예측은 단순한 예측 이상의 당혹감을 불러온다. ‘적절한 제약을 가하지 않을 경우, 시장의 힘은 문화 영역을 집어삼켜 상업적 오락물, 체험, 유료 공연, 금전 관계의 상품화된 파편들로 변질시킬 것이다’는 말은 또 어떤가. 온통 반갑지 않은 결과들이다.
저자가 던진 질문은 그러한 형태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재산을 소유하는 것보다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 문화 자체가 최고의 상품으로 각광받는 세상, 인간관계에 항상 돈이 개입되고 체험도 돈을 내야만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대신에 저자는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는 것이 생물 다양성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사회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문화영역에서 성숙한 놀이는 씨가 마르고 그 빈 자리를 온통 유료 놀이가 차지할 때 문명은 심각한 와해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자신의 논리에 근거한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과제를 부여한다. 문화와 상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생태계를 복원시켜야 하고 그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노라면 저자가 강조하는 사회운동에 참여해야 할 것만 같은 동력을 제공 받는다. 책은 그만큼 설득력 있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을 갖추고 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과학을 넘나들며 높은 조망대에서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저자와의 대화는 그래서 재미있고도 즐거우며 눈이 트이는 경험을 제공한다. 리프킨의 책을 만나는 것은 탁월한 경험과 지식에의 제대로 된 접속, 바로 그것이다.

‘소유의 종말’은 남다른 노력이 뒷받침 되었다는 것도 알아두자. 리프킨은 이 책을 쓰기 위해 350권의 책과 1000편의 논문, 5만장의 색인 카드, 2000개의 주석을 동원했다고 한다. 책을 완성하는 데는 6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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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8.03 23:25:12 *.36.210.11
창이 창을 확 꽂아버리는 겨. 뚫어버리는 겨. 350권, 1000편, 5만장, 2000개, 6년을 곱배기로 해 뻔져 불어~라. 사나이 장부라면 그 정도는 되야지 않겠남? 벌써 리뷰도 2배로 길어졌네용. 계속 돌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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