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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4일 11시 54분 등록
소유의 종말/제레미 리프킨/이희재 옮김/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미래를 진단하는 저술가들의 책을 읽다보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나는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므로 소설 쓰듯이 자기 맘대로 얘기해도 된다는 자유로움이다. 앞으로 20년, 30년 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현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독자들이 생각해보지 못하는 분야를 그럴듯하게 엮어 내면 그만이다. 독자들이 감동 받을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고 포장을 잘하는 기술을 갖추면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미래학자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강한 불안감이다.
미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앞으로 20년, 30년 뒤의 미래라고 예측한 일이 불과 10년 만에 허구임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특히 정보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그렇다. 작가로서의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어려움이고 불안감이다.

그래서인지 미래학자들의 책에는 유난히 “인용”이 많은 것 같다. 설사 잘못 예측되더라도 그 잘못이 다른 분야의 광범위한 전문가들의 의견 속에 묻혀 들어가는 위험회피 전략의 하나가 아닐까?


제레미 리프킨에게는 몇 가지 별명이 있다. 그는 저술 활동과 강연을 통해 활발한 사회운동에 참여했고, 그러다보니 상반된 생각을 가진 집단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유전자 변형 식품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여 식품업계로부터 <식품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었고, 노벨상을 수상한 한 미생물학자로부터는 <생물학 근본주의자>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다. <<타임>>지에서는 <과학계에서 가장 증오하는 인물>로 그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리프킨은 인류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심각한 상황이 야기될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광범위한 검토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신념과 용기는 저자가 이책을 쓰기위해 보여준 노력과 끈기 만큼 저자를 돗보이게 하는 점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워튼 경영 대학원WHARTON SCHOOL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터프츠TUFTS 대학의 플레처 법외교학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1994년부터는 워튼 경영 대학원 최고 경영자 과정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전세계의 최고 경영자와 고위 간부들에게 과학, 기술의 새로운 조류와 이것이 글로벌 경제,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또한 비영리 조직인 <경제 조류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사회의 공공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활발한 계몽운동과 감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20여 년 동안 15권의 저서를 통해 경제, 노동,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특히 1995년에 발표한 『노동의 종말』은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노동 시간 삭감을 위한 사회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고, 『바이오테크 시대』(1998)는 생명공학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리프킨은 미국과 세계 각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수많은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했으며 환경과 기술 분야의 많은 분야에 대해 정부의 책임 있는 정책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CNN의 「LARRY KING LIVE」, 「ABC NIGHTLINE」, 「FACE THE NATION」과 같은 미국 의 주요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으며, 영향력 있는 일간지와 주간지에 기고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내셔널 저널NATIONAL JOURNAL》이 선정한 <연방정부 정책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150명>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1부 자본주의의 새로운 프론티어

1, 접속의 시대가 오고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10]

앞으로 25년 정도만 지나면 소유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구태의연하다는 인식이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서 일반화될 것이다. 소유는 모든 것이 휙휙 바뀌는 풍토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느려터진 생각이다.[13]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변화 밖에 없는 세상에서, 소유하고 축적하는 태도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14]

2050년이 되면 성인 인구의 불과 5퍼센트만으로도 기존의 산업 영역을 차질 없이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농장과 공장, 사무실을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17]

다가올 시대의 가장 큰 화두는 <정부와 문화 영역이 크게 축소되고 상업 영역만이 인간 생활의 으뜸가는 매개 고리로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과연 문명이 살아남겠느냐> 하는 것이다.[19]

2. 시장이 네트워크에 밀리는 날

제품의 생명력이 짧아지는 것은 무어의 법칙으로도 설명된다.[34]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앞으로 10년만 있으면 주문형 무결함 자동차를 3일 안에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35]

할리우드는 수직으로 통합된 고전적 거대 기업으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네트워크 경제로 변신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지식 집약 산업이 할리우드와 똑같은 납작한 원자 상태로 해체될 것이다. 할리우드는 그저 가장 빨리 거기에 안착했을 뿐이다.[45]

3. 무게 없는 경제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사고 파는 것은 아이디어와 이미지이다. 이런 아이디어와 이미지의 물리적 구현물은 경제 과정에서 점점 부차적 존재로 밀려난다. 산업 시대의 시장에서는 물건을 교환했다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물리적 형태 안에 담겨 있는 개념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거래한다.
새로운 상행위의 저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나이키다.
나이키는 내용으로 보아도 그렇고 추구하는 바도 그렇고 이제는 가상 회사가 되어버렸다. 일반인들은 나이키를 운동화 제조업체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나이키는 정교한 마케팅 원리와 유통망을 갖춘 연구 디자인실이라고 보아야 옳다. 나이키는 내세울 만한 공장도, 기계도, 설비도, 부동산도 없다. 대신에 나이키는 동남아시아에 광범위한 공급업자들의 망 - 나이키는 이들을 <생산 협력업체>라고 부른다 - 을 구축하여 본사에서 디자인한 수백 종의 운동화와 각종 운동 장비를 이들을 통해 생산하고 있다. 나이키는 광고와 마케팅 업무도 과감히 아웃소싱했다.[73, 74]

나이키는 개념을 판다.[74]

아웃소싱은 경영진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즐겨 쓰는 수단이 되었다.[75]

작가이며 언론인인 프레드 무디는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유일한 공장 자산은 직원들의 상상력이다.> 라는 말로 핵심을 찔렀다.[78]

산업 시대는 육체와 근육, 완력이 지배하던 세계였다.[83]

산업 시대의 인간이 물질을 축적하고 가공하는 데 빠져들어 있었다면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정신을 관리하는 데 훨씬 관심이 크다. 사업의 성패를 아이디어가 좌우하는 접속과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가장 드높은 꿈이다.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확장하여 보편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업 활동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84]

상업권에서 아이디어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길한 생각도 든다. 인간의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다면, 중요하지만 상업성이 없는 사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기 인생의 길라잡이가 될 만한 생각을 상업의 영역에서 가져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문명에서,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관점, 의견, 관념, 개념이 존립할 수 있는 여지가 과연 있을까? 온갖 유형의 아이디어가 거대 기업들이 관리하는 지적 재산권의 형태로 얽히고 설켜 있는 사회에서 우리의 집단 무의식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이고 미래의 사회적 담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85]

4. 지적 재산의 독점

체인점 : 소유가 아닌 접속[88]
DNA 임대[97]

5. 서비스 세상

재산의 흥망성쇠[115]
서비스 경제의 탄생[124]

산업의 중심축이 상품에서 서비스로 이동하면서 기업이나 개인도 소유를 예전처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126]

인쇄본의 종말은 여러 해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온 주제이지만 컴퓨터와 함께 자랐고 책을 들추기보다는 화면에서 정보를 찾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가 등장하면서 자료의 온라인화는 이제 대세로 자리 잡았다.[131]

크라이슬러는 일리노이 주 벨버디어에 있는 공장에서 PPG 인더스트리와 절감분 공유 계약을 맺었다. PPG는 크라이슬러가 만드는 자동차의 세척, 처리, 코팅에 들어가는 일체의 화공약품을 책임지고 공급한다. 크라이슬러는 돈을 주고 PPG의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자 없이 생산되는 자동차 한 대당 일정액을 PPG에 지급한다. 다시 말해서 PPG는 이제 더 이상 페인트를 파는 것이 아니라 도색 공정 자체를 관리하는 서비스를 크라이슬러에 제공하는 것이다.[135]

지금은 많은 이동통신 회사들이 모토롤라 휴대폰을 공짜로 주면서 신규 가입자를 늘리고 있다.... 정보기술 산업에서는 제품을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 영업의 관행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141]

세상만사가 서비스화 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교환하는 데 바탕을 둔 체계에서 경험 영역에 접속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에어컨 자체를 사지 않고 에어컨 서비스를 받기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에어컨을 통해 얻는 경험에 대해서 돈을 지불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물질의 차원보다는 시간의 차원이 훨씬 중요하다. 장소와 물건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서로의 시간과 식견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 필요한 것을 빌린다. 그것은 우리가 한시적으로 구입하는 활동이나 사건이 된다. 자본주의는 물질에서 출발했지만 물질성을 벗어던지고 점점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개별적 사건으로 나아가고 있다.[143]

6. 인간관계의 상품화

앞으로 생산 중심에서 마케팅 중심으로, 판매 중심에서 관계 구축 중심으로 궤도를 수정하는 기업반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마케팅 전문가와 경영 컨설턴트, 경제학자, 미래학자가 쏟아내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145]

기업들이 한번에 최대한 많은 고객에게 제품을 파는 것을 포기하고 개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곧 개인이 일평생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상품화될 수 있다는 잠재성에 주목함을 뜻한다.... 자동차 대리점을 운영하는 칼 슈얼은 캐딜락 자동차 대리점으로 들어서는 고객 한 명이 가지는 잠재적 평생가치(LTV : Life Time Value)를 32만 2천 달러로 추정한다.... 기술 지원 연구 프로그램 연구소 대표는 한 수퍼마켓의 <열성> 고객 한 명이 갖는 평균 가치는 1년에 3천8백 달러 이상이라고 추산한다.[147]

이런 서비스의 세세한 내용을 일일이 알 필요가 없었던 고객은 그쪽 세계의 사정에 점점 어두워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일을 <전문> 대리인에게 맡기는 의존도가 높아진다.<아웃소싱의 문제점> [155]

1950년대는 판매자가 시장을 주도했다. 제조업이 왕이었고 기업은 생산비와 유통비를 어떻게 절감하느냐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소비자 시장에서 물건이 남아돌기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시장에 물건을 얼마나 신속하게 공급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소비자의 관심을 유도하여 충실한 고객으로 만드느냐 였다.[157, 158]

고객은 사업의 기초이며 기업의 존재 이유이다. 고객만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 사회가 부를 낳는 자원을 기업에 위임한 것은 고객에게 그것을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기업의 목표는 고객을 창출하는 데 있으므로 모든 기업은 오직 두 가지 기능, 즉 마케팅과 혁신에만 전념하면 된다. 마케팅은 제품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특이한 기능이다.... 모든 사업을 최종 결과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마케팅에 대한 관심과 소명이 모든 사업 부문으로 확산되어야 한다.<피터 드러커> [158]

백드로 같은 회사는 앞으로 소비자 성향, 생활 양식, 지출 패턴을 토대로 유망 고객을 발굴하기 위해 R-기술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다. 소프트웨어 분석 기법이 더욱 발전하면 유망 고객의 취향을 여행 상품에 더욱 정확하게 반영하여 더욱 뜻 깊은 경험을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고 고객 사이의 공동체적 결속력도 자연히 강화될 것이다.[164]

물건의 판매에서 관계의 상품화, 공동체의 구축으로 상거래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사업 방식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165]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경제는 연결의 속도를 높이고, 지속 시간을 줄이고,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서비스화 함으로써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계가 상업적 관계로 변하고 모든 개인의 삶이 24시간 내내 상품의 틀에 갇혀 있을 때, 비상업적 관계, 다시 말해서 혈연, 이웃, 문화적 취향의 공유, 종교적 결사, 민족의식, 형제애, 시민 의식에 바탕을 둔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167]

우리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이 유료 활동으로 바뀌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그 자체도 상품이 되어버리고 상업적 영역은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쥐게 된다.168]

7. 삶으로서의 접속

CID(Common-Interest Developments, 공동 관심 단지)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가치관, 감수성, 라이프스타일이 엇비슷한 사람들의 네트워크에 끼어드는 대가로 개인 재산의 권리 일부를 기꺼이 포기한다. CID의 일원으로 들어가면 단독 주택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사유 재산 체제에 수반되는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품화된 관계를 구입하는 데 수반되는 상호 의존성을 선택한다.[179, 180]

어느 모로 보나 재고가 가장 부족한 상품은 시간이다.... 맞벌이를 하거나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 가정은 빠듯한 예산과 시간으로 전통적 방식으로 살아가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들이는 시간에 비해 훨씬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공정, 제품, 서비스를 시급히 제공할 필요가 있다. 시간을 절약하거나 아예 들일 필요가 없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185]

아직은 주택 소유가 대세를 점유하고 있지만 앞으로 사회 전체가 접속의 시대로 나아가는 추세에 발맞추어 젊은 세대가 소유보다는 접속을 선택할 경우 주택 임대가 서서히 주류로 부상할 것이다.[188]

렌트, 시간 공유 콘도 구입, 점수 구입은 모두 <시간화> 사업의 다양한 방식이다. 이제는 부동산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의 접속권을 사는 시대이다. 아파트, 콘도미니엄, 빌라 같은 시설을 지정된 기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빠르게 부상하는 네트워크 경제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판매자 - 구매자 관계는 서서히 공급자-사용자 관계나 서버-클라이언트 관계로 바뀐다. 재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접속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191]

장소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있지만 공간을 폐지하고 우리의 경험을 시간화하려는 욕망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공간을 소유에서 접속으로 어느 정도까지 탈바꿈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21세기를 어떤 식으로 살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감수성의 우열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198]

2부 문화를 고갈시키는 자본주의

8. 자본주의의 새로운 문화

미디어 이론가 리 데이어는 말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인간 문화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는 뜻이며, 어떤 인간 문화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문화를 매일매일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보며 알고 세계와 소통한다는 뜻이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커뮤니케이션이 문화의 핵심, 아니 생명 그 자체의 핵심>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문화는 소통>이라고 작고한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는 말했다.[203]

인류학자는 의사소통을 텍스트의 전달을 통한 사회적 의미의 생산으로 이해한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피어스가 선구적으로 개척한 기호학은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의미를 확립하고 공동의 가치를 생산하며 사람을 사회적 관계로 묶는지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구조주의자는 언어, 신화 같은 상징 체계가 공동의 사회적 경험에 의미를 불어넣는 데 어떻게 이용되는지에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은 문화를 표현하고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을 표현한다는 말이 성립한다.[204]

문화-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는 공동의 경험-는 미디어 시장으로 인정 사정 없이 끌려 들어가서 상업적으로 개조된다.[205]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더 이상 살 것이 없다>는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의 말은 바로 이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212]

미래의 기업은 사람의 생활 전체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점점 더 떠맡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미래학자가 늘어나고 있다. 앨빈 토플러도 그중 한 사람이다. <궁극적으로는 체험의 생산자가 경제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축을 떠맡게 된다>고 토플러는 내다본다. 그것이 실현되는 날에는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체험이라는 가장 일시적이면서도 가장 지속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212]

미래학자 제임스 오길비는 이렇게 지적한다. <체험 산업의 성장은 산업 혁명이 생산한 물건의 효용성이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이제 소비자는 ‘내가 아직 안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 뭔가?’ 라고 묻지 않고 ‘내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 중에서 체험하고 싶은 것이 뭔가?’ 라고 묻는다.>[213]

관광을 어엿한 산업으로 발전시킨 주역은 토머스 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관광 여행 산업의 아버지로 사람들은 선뜻 이 사람을 꼽는다. 쿡은 관광을 패키지로 만들고 여행을 유료 체험으로 전환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출발은 소박했다. 수백 명의 금주회 회원을 더비, 노팅엄 같은 중부 도시에서 대중 집회가 열리는 레스터까지 할인 철도 요금으로 수송하는 데서 그의 사업은 시작되었다.[216]

1990년 클럽 메드는 세계 전역에서 98개의 휴양촌을 소유하거나 임대 운영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클럽 메드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은 관광과 여행과 오락을 골고루 즐길 수 있다.... 클럽 메드가 추구하는 것은 <현금을 안 갖고 다니는 여행> 이다. 고객의 온갖 변덕과 요구에 부응하고 고객이 클럽 메드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하나부터 열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이 클럽 메드의 목표다.[220]

자연 경관, 성당, 박물관, 궁전, 공원, 의식, 축제 같은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 영역이 점점 시장으로 흡수되어서 여유 있는 사람의 오락과 정서 함양을 위한 문화 상품으로 탈바꿈되고 있다. 한때는 당당히 제몫을 해냈던 역사적 유산이 이제는 그저 돈을 받고 문화적 체험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무대나 소도구, 배경이 되어 버렸다.[222]

상업자본주의 => 산업 자본주의 => 문화 자본주의[223]

몰은 문화의 다양한 부분들을 상업화된 형태로 모사하여 재현하기 위해 설계된 정교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몰은 인공의 문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최첨단의 전자 기술을 총동원한다. 세심하게 배치된 건축학적 모티프, 늘 쾌적한 상태로 유지되는 실내 기후, 세련된 조명 체계, 컴퓨터가 통제하는 감시 시스템이 어우러져 쇼핑몰 바깥에 존재하는 공유 지향의 문화 공간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른 문화의 자리를 <전달>한다.[228]

<20세기 말, 미국을 이끌어가는 사업은 더 이상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락이다.> 개블러에 따르면 <미국의 성장 산업은 점점 전통적 오락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분야>가 주도하고 있다.[236]

오락 산업이 급속히 부상하는 현상은 물건을 축적하고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온 세대가 체험을 축적하고 관계에 접속하는 것을 선호하는 세대로 바뀌고 있음을 웅변한다.[241]

경영 컨설터트 톰 피터스는 자문을 요청해 온 기업들에게 <사업의 성패는 고객의 머리에 감동적 드라마를 얼마나 많이 집어넣느냐에 좌우된다>고 조언한다. 이제 사람들에게 <신화>, <상상>, <환상> 같은 단어가 먹혀 들어간다.[242]

문화 생산은 21세기 고부가 가치 산업을 선도할 것이다. 접속의 시대에 문화 생산은 경제 생활의 제1열로 부상하고 정보와 서비스는 2열로, 제조업은 3열로, 농업은 4열로 내려간다. 이 네 개의 열은 소유 관계에 바탕을 둔 체제를 접속에 바탕을 둔 체제로 꾸준히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를 통합한 네트워크 관계 안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할 것이다.[246]

9. 문화의 광맥을 찾아서

그런 생활 양식 마케팅 행사로서 가장 먼저 언론과 대중의 크나큰 관심을 끈 것은 미국 대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미국 인간 띠잇기> 라는 행사였다.... 이 행사는 세계 기아 문제를 여론에 부각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내기 위해 비영리 문화 단체들에서 구상했다. 이 단체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연대의 뜻으로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고서 4천마일에 이르는 미국의 동부 해안과 서부 해안을 인간 띠로 잇자는 계획을 짰다.... 코카 콜라는 이 행사를 기업체가 후원하는 문화적 체험의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1986년 5월 25일 4백여만여 명이 손에 손을 맞잡고 미국을 하나로 이었고 200만 명은 각 지역 학교와 교회에서 벌어진 별도의 행사에 참가했다.... 코카 콜라로서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256, 257]

이제 자본주의가 문화의 생산 단계로 이행하고 체험의 상품화가 진전되면서 새로운 엘리트 계급이 정치 영역과 시민 사회에서 공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있다. <문화의 중개자>로 불리는 이 새로운 계급의 실력은 지식과 창조성, 예술적 감수성과 기획력, 전문가적 식견과 마케팅 안목 같은 무형 자산에서 발휘된다.[268]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구어의 종류는 6천 가지가 넘지만 1백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가진 언어는 3백 개에도 못 미친다. 6천 개의 언어 가운데 절반은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반면 영화와 텔레비전의 주역이며 사이버스페이스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영어는 꾸준히 사용자가 늘어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영어를 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미디어 기업들이 전세계의 문화 상거래를 주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앞으로 1세기 안에 영어는 세계 구석구석으로 파고들 것이다.[272]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웨이드 데이비스는 <언어가 사라지면 문화도 소멸한다>고 지적한다. <이 세상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인류가 쌓아온 지적 성취가 살아 있는 지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데이비스는 언어의 소멸이 급속히 진행되는 현실을 개탄한다.[272]

산업 시대에는 자연 자원과 노동력에 대한 식민주의와 그 이후의 신식민주의 지배를 놓고 지정학적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소유와 재산권의 문제는 민족과 국가가 벌이는 쟁패의 본질이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대로 새로운 시대에는 지역 문화와 세계 문화에 대한 접속의 문제, 상업화된 형태로 문화적 내용을 담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회로를 둘러싼 지정학적 쟁탈전이 점점 전면으로 부각된다.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문화 중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접속이 체험의 유일한 통로가 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지기의 노릇을 하게 된다.[273]

10. 탈근대

새로운 인간형이 탄생하고 있다. 21세기의 주역으로 등장할 이 새로운 인간은 산업 시대를 살았던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부르주아 인간형과 종자부터 완전히 다르다.

심리학자 로버트 리프턴은 이 새로운 세대를 <변화 무쌍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공동 관심 단지 안에서 성장했고 의료보험 회사를 통해 의료 서비스를 받으며 자동차를 임대한다. 물건은 온라인으로 구입하고 소프트웨어는 으레 공짜려니 여기지만 추가 서비스와 업그레이드에는 당연히 돈을 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초 안에 할 말을 모두 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정보에 즉각 접속하여 인출하는 데 익숙하고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며 성찰적이기보다는 찰나적이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기자라고 생각하고 근면하다는 말보다는 창조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더 뿌듯해한다. 임시직에 익숙하고 과제 해결을 중심으로 편성된 조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부모 세대처럼 단단히 뿌리 박은 삶보다는 아주 유연하고 순간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념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이고 글자보다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쪽이다.
작문 실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전자 데이터를 처리하는 실력은 한 수 위다. 분석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디즈니월드와 클럽 메드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쇼핑몰을 공공의 광장으로 여기며 소비자 주권 운동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믿는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 영화, 사이버스페이스에 나오는 허구적 인물과 어울리는 데 쏟아 붓는다. 심지어는 이런 허구적 인물의 성격과 경험에 대해서 친구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만큼 이들에게 허구 세계는 현실 세계의 일부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이들의 세계는 경계가 불확실하고 유동적이다. 하이퍼텍스트, 웹사이트 링크, 피드백 고리와 함께 자란 이들은 현실을 직선적이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것은 시스템을 통해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라는 발상에 익숙하다. 실제로 어디에 사는지는 알지 못하고 또 관심조차 없지만 가상 주소로 얼마든지 이메일을 보낼 수 있다. 세계는 하나의 무대이며 삶은 공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단계단계마다 새로운 생활 양식을 과감히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끊임없이 바꾸어나간다. 이 변화 무쌍한 남녀를 끌어당기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스타일과 패션이다.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혁신을 도모한다. 정신없이 바뀌는 이들의 생활 공간에 습속, 관행, 전통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274, 276]

탈근대와 근대가 이토록 다른 원인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그것은 바로 시간, 문화, 실체험의 상품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탈근대와 맞물려 있는 반면, 근대의 자본주의는 토지와 자원의 상품화, 노동력의 고용, 제품 생산, 기본적 서비스의 제공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276]

근대가 목적을 추구했다면 탈근대는 유희를 추구한다.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아무튼 질서라는 것은 무조건 답답한 것, 숨막히는 것이라고 요즘 사람은 생각한다. 반면에 창조적 무질서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권장하는 쪽에 가깝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질서는 자발성이다. 탈근대의 분위기에서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진지하지 않다. 아이러니, 역설, 회의가 득세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보다는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더 관심을 보인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군림하면서 자연이나 사회를 지배하던 역사적 틀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관심 자체도 시들해진다. 역사는 이제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투사하기 위한 참조틀이 아니라 언제든지 재활용할 수 있고 현대 사회의 각본에 써먹을 수 있는 느슨한 이야기의 단편처럼 되어버렸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중요한 것은 순간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 생활에서도 사회 생활에서도 절정감과 카타르시스는 효율성과 생산성보다 윗자리에 놓인다.[286, 287]

새로운 시대는 모호하고 다양하며, 재미와 유머를 추구하며, 어수선하고 너그럽다. 절충을 중요하게 여기며 권위를 우습게 여긴다. 이데올로기, 만고 불변의 진리, 절대로 어겨선 안 되는 철칙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고 대신 그 자리에 온갖 유형의 공연이 펼쳐진다.[288]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화면이, 인터페이스가.... 네트워크가 제공하는 허구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모든 기계는 화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 역시도 화면이 되었다. 인간과 인간의 어울림은 화면과 화면의 어울림이 되었다.... 우리는 도처에서 이미 현실의 ‘미학적’ 환각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292]

인생은 역사나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기에는 너무 짧다는 각성이 움튼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는 그런 생각에 더욱 끌리게 마련이다. <역사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살아가지만 <치료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위해 살아가며 거창한 역사적 사명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300]

래시는 <우리는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감각, 과거의 세대와 미래의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식을 빠르게 상실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 시간 감각의 소멸이다> 라고 말한다.[301]

인쇄가 자율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관념이 싹트는 것을 도왔던 것처럼 컴퓨터는 관계를 중시하는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북돋운다.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하고 다양한 네트워크에 참여하면서 성장한 세대는 연결성과 접속 관계에 치중하는 상업 세계에 친근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컴퓨터 의식과 새로운 사업 방식이 하나로 결합되고 있다. 머지 않아 치밀한 그물망이 완성될 것이다.[308]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바뀌었다.[309]

페린바나야감에 따르면 연극 정신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상징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한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타인들도 그들 나름으로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세계는 교감을 주고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적 사실이나 사회적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런 사실이나 대상이 연극적으로 전개되어서 하나의 주제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극장은 사회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극장은 사회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현상,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의 실상을 응축하고 정형화해 놓은 곳이다.[320]

11. 접속자와 비접속자

벌써 20년 전에 다니엘 벨은 앞으로 나타날 시대의 성격을 이렇게 진단했다. <통신 서비스에 대한 지배가 권력의 원천이 되고 통신에 대한 접속이 자유의 조건이 된다.>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새로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는 <누가 접속권을 소유하느냐가 핵심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라는 점을 강조했다.[324]

거의 모든 남자, 여자, 아이를 통제된 이미지와 단어로 둘러쌀 수 있는 힘, 자라나는 세대의 의식을 지배하는 힘, 국가의 정치적 의제마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세력이 등장했다는 것이 문제다. 이 집단의 영향력은 학교, 종교, 부모, 심지어는 정부 자체의 영향력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다.[331]

20년 전 미국 정부의 한 관리는 <무역은 이제 국기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통신 시스템을 쫓아간다>고 말했다.[331]

사이버스페이스 혁명을 선전하는 4대 전도사라 할 수 있는 에스더 다이슨, 조지 길더, 조지 키워스, 앨빈 토플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통신 시장의 특징이 ‘규모의 경제’와 ‘자연적 독점’이었다면 기술의 진보는 이것을 전형적인 경쟁 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정부의 임무는 이런 변환을 적극 후원하는 것이다. 새로운 경쟁자와 새로운 기술이 자꾸만 나타나 과거의 자연적 독점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332]

경제와 사회에서 비중 있는 활동이 상품화된 문화 체험의 형태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세계에서, 정부의 역할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주파수와 통신 채널에 대한 관리권을 포기할 경우 정부의 역할은 더욱 왜소해질 것이다.[336]

인간 활동의 기초가 지리적 공간이었을 때에는 정부의 존재 이유가 분명했다. 하지만 경제 활동과 사회 활동이 점점 가상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여전히 중요할까? 지리에 기반을 둔 항구적 공동체보다는 가상 세계 안에서 어울리면서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일시적 공동체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한 나라가 통합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 오래전부터 여겨져 온 땅과 국토에 대한 애정과 집단적 연대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장 마리 게노는 『국민 국가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시민과 국가의 관계가 시민이 국가 바깥에 세우는 무한히 많은 연합체들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제 정치가 사회생활을 조직하는 원리라는 소리는 그야말로 옛말이 되어버린다. 정치는 현대 세계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력하기만 한 인위적 구성물로 전락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아무튼 주변적 지위로 밀려난다.>[338]

네트워크 바깥의 사람들은 전자 네트워크로 들어가는 대문 바깥에서 가난과 절망이 지배하는 또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 인생은 육체적으로 생존하기에도 고달픈 나날의 연속이다. 세계 인구의 부유한 1/5이 문화 체험과 개인적 변신을 찾아 소유를 과감히 포기하고 있지만 나머지 4/5는 아직도 초라한 살림살이 속에서 더 많은 재산을 갈망하고 있다.[339]

<미래는 풍족하고 어디서나 살 수 있으며 교육을 많이 받은 우리 중의 소수에게만 기회의 낙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 다시 말해서 대학을 나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소위 불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디지털 암흑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클라인>[340]

빌 게이츠는 미국 인구의 절반을 합친 것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전 세계의 30억 노동자 가운데 1/3은 일자리가 없거나 생활비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1998년 국제 노동기구의 보고서 내용이다. 그 결과 전 세계의 가장 부유한 인구 집단은 오락을 wmf기면서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현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반면 거의 10억에 달하는 인구는 빈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수십억 명은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다.[341]

모두 16억 명이 살아가는 전세계 약 1백여 개의 국가에서 경제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89개국은 소득이 10년 전보다 떨어졌으며 35개국은 1930년대 대공황기보다 더욱 큰 폭으로 국민 소득이 떨어졌다. 아프리카에서는 가구당 평균 소득 수준이 20년 전보다 20퍼센트 이상 하락했다.[341]

실제로 미국인이 화장품 구입에 쓰는 돈(연간 80억 달러)과 유럽인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데 쓰는 돈(연간 110억 달러)은 학교 교육을 못 받고 공동 화장실을 쓰면서 살아야 하는 세계 20억 명의 인구에게 기본 교육, 깨끗한 물, 위생 시설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돈보다도 많은 액수이다.[342]

부유층은 점점 전자 대문의 안쪽으로 넘어가는 반면 미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은 교도소로 들어가고 있다.[342]

전화도 못 쓰는 미국의 7백만 가구에게 빌 게이츠가 구상하는 정보 고속도로로 연결된 세계는 무의미한 소리다.[343]

앞으로 인간이 영위하는 문명 생활의 상당 부분은 전자 세계에서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접속의 문제는 다가오는 시대가 성찰해야 할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가 된다.[346]

12. 문화와 자본주의의 생태학을 향하여

접속의 시대는 인간의 경험을 조직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도대체 <접속>이 무엇을 뜻하는가이다.... 접속 관계의 사회학적, 정치적 의미를 정의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348]

그러나 점점 확대되는 글로벌 네트워크 세계에서 정부가 과연 누구나 접속의 권리를 누리도록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354]

사회적 공동체, 다시 말해서 문화는 상업 영역보다 먼저 나타났다.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인간은 늘 사회적 공동체를 먼저 세웠다. 사회적 교환의 규칙을 수립하고 복잡한 사회 관계 안으로 구성원을 끌어들이고 사회적 신뢰를 구축했다. 이런 관계를 통해 굳건한 신뢰가 형성된 다음에야 비로소 공동체는 상업적 교역에 나서고 교환을 위한 시장을 만들었다. 시장은 본질적으로 신뢰를 고갈시키기 때문이다.[358]

시장은 어디까지나 파생적 성격을 가지며 거래 조건을 확신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가 충분히 조성되어 있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 서유럽과 미국의 기업은 동구권이 몰락하고 난 뒤 이런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많은 기업이 과거 공산국이었던 나라로 너도나도 몰려가서 사업체를 차렸지만 상당수는 실패했다. 상거래를 보장하는 사회적 신뢰, 이른 바 <사회 자본>이 모자랐던 탓이다. 공산주의 정부는 제3부문, 그러니까 사회적 신뢰를 창출하여 시장이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문화 기구들을 없앴다. 자연히 기업과 기업의 합의는 어렵거나 심지어는 불가능에 가까운 형편이 되었고 설령 상업적 계약이 맺어졌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나라는 시장이라고 하는 제1부문과 정부라고 하는 제2부문을 중심으로 공공 정책을 운용하면서 문화라는 제3부문은 당연시한다. 사회 자본을 수립하고 시장과 교역을 가능하게 만드는 막중한 역할이 문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화 기구 -교회, 세속 기관, 민간 단체, 상조회, 스포츠 클럽, 예술 집단, 비정부 기구-는 사회적 신뢰의 샘물이다.[359]

자본주의 체제가 앞으로도 계속 문화 영역의 상당 부분을 상업화된 문화 상품, 공연, 체험의 형태로 자기 영역 안으로 흡수할 경우, 문화가 더 이상 사회 자본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할 만큼 위축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고 그렇게 되면 경제도 타격을 받는다. 어디까지나 문화에 의해 생산되는 사회 자본은 경제의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사회 자본이 고갈되면 문화와 상업의 섬세한 균형은 무너져버린다.[362]

리프턴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한다>. 사회적 신뢰는 공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서 타인 안에서 감정의 둥지를 틀고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함께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런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배려하게 된다.
공감은 다른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접할 때 길러진다. 다른 인간의 체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줄어든다. 가령 코소보의 끔찍한 살육 현장이나 소말리아에서 굶어 죽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면 가슴이 찌릿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감했다고 말하기에는 미진하다. 하지만 현장에 가면 반응이 180도 달라진다. 갑자기 사람과 상황은 생생한 현실이 되고 그들의 곤경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362, 363]

화면 앞이나 가상 세계 안에서 성장한 세대-그들의 상호 소통은 기술과 상징의 두꺼운 층위를 통해 이루어진다-가 남들과 또는 다른 생명체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모사의 세계에서 사람은 공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모사된 세계에서 자라고 문화 상품과 체험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산다는 발상을 낯설게 생각하지 않는 세대는 공감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할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던지는 사회학자와 심리학자가 늘어나고 있다.... 서로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세대는 문화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 사회적 신뢰와 공감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우리는 상업과 교역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363, 364]

경제는 문화와 인간성의 기본틀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와 감정, 다시 말해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 상업 영역이 인간 문화와 체험의 조각조각을 닥치는 대로 짜깁기하여 제공할 때, 우리가 중요한 인간적 가치와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우물은 독으로 오염될 위험성이 있다.[364]

세계 음악 옹호론자들은 전세계인에게 토착 음악을 제공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와 관용의 폭을 넓히고 세계는 바야흐로 다문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장르와 장르의 혼합 교배는 하나의 글로벌 공동체로 연결되어 가는 오늘날의 탈근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갖는 새로운 음악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각에서는 집단이 공유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일차적 회로였던 음악을 판에 박힌 대중 오락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음악의 세계화는 지역 문화를 심각한 수준으로 약화시켰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본질과 맥락을 토착 음악에서 고스란히 제거했다는 것이다.[367, 368]

상업 영역은 문화 영역에 의존하기 때문에 토착 음악이 상업 논리에 흡수당하여 결국 고갈되면 상업 영역도 약화된다. 경제는 인간이 문화적 토양에서 길러왔고 상업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상품화와 교환의 원료를 제공하는 감정, 가치, 공유 체험, 의미 같은 자원 기반을 삼켜버릴 것이다.[369]

마을, 지역, 국가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동질감을 부여하는 문화적 가치가 글로벌 시장의 무자비한 힘에 압도당할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가 지역 문화나 국가 문화, 그리고 이것들을 지탱하는 창조성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 향상되는 방향으로 세계화의 충격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199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보고서> [370]

문화와 상업이 생태학적으로 균형을 회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임무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적절한 균형을 되찾으려면 시장에 나와 있는 문화 상품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 못지않게 지역 문화를 소생시키는 데도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371]

전자 통신이 매개하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21세기에는 지리적 공동체 안에서 같은 인간끼리 직접 살을 맞대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들을 모든 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등한시한다면 가장 깊은 수준의 체험을 통해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은 깡그리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도 시간 문제다.
문화를 소생시켜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문화 생산하는 데 원료가 되기 때문이어서만도 아니고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문화가 만들어내기 때문만도 아니다. 문화는 다른 이유를 모두 접어두고서라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소생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낳는 유일한 원천이 문화이기 때문이다.[372]

가장 깊은 인간의 교류는 언제나 지리적 공간에서 일어난다. 문화 체험은 방송 매체와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달될 수 있지만 원산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진정한 의미의 공유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줄어든다.... 지리적 맥락을 박탈당한 문화 표현은 총체적 체험의 그림자일 뿐이다. 물론 그림자도 엄연한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즐거움도 줄 수 있지만 원래의 무용이 전달하려고 했던 대지와의 깊은 일체감은 맛볼 길이 없다.
모든 현실 문화는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친밀감은 지리적 공간에서 움트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밀감이 없으면 사회적 신뢰망을 구축하기도 어렵고 진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문화를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려면 적어도 사이버스페이스에 쏟아 붓는 만큼의 관심을 지리적 공간에도 보여야 하고 채팅방에 들이는 만큼의 정성을 현실 공동체에도 기울여야 한다.[373]

미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시민 사회와 저변 문화에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교육시키는 데 목적을 둔 풀뿌리 교육 혁명이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다.... 시민 교육은 학생이 살아가는 동네와 지역 사회에서 직접 체험하는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기본 가정에서 출발한다. 가령 동물이나 자연 생태에 관한 공부를 할 경우 야생 동물 보호 시설이나 수목원으로 현장 견학을 가는 것이 학습효과가 가장 높다는 것이다.[374]

많은 미국 학교가 오래전부터 핵심적 교육 목표로 표방해 온 경쟁력 있는 기술의 습득은, 마차를 말 앞에 놓는 것처럼 본말이 전도된 발상이라고 시민 교육 이론가들은 비판한다.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을 팔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21세기의 교육 이념으로는 지나치게 옹색하다. 이런 교육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 의식을 가진 균형 잡힌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남에게 팔아먹을 수 있는 재산쯤으로 치부하는 어른을 양산한다.
시민 교육 옹호론자들은 문화를 자기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길 수 있도록 학생의 자기 정체성을 심화 확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은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육성하고 타인과의 유대를 권장하며 문화가 문명 생활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는가를 학생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시장에서 팔아먹을 수 있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수적인 조역에 그쳐야지 시민 교육을 희생시키면서 맨 앞자리를 차지해서는 곤란하다.[376]

인간 관계에서 문화가 예전에 차지하던 높은 자리를 되찾으려면 더욱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문화는 시장과 정부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화 부문은 시장 부문과 정부 부문 사이에서 일종의 새로운 식민지처럼 찬밥 대접을 박고 있다. 문화는 독자성을 크게 잃어버린 채 다른 두 부문에 기대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문화 기구는 예전의 독립성을 많이 잃고 정치 기구와 상업 기구에 얹혀 지내고 있다.[377]

제3부문이 우위를 차지하려면 다양한 기구, 활동, 이익을 공동의 사명감 아래 결속시켜 정치 세력화하는 것이 중요하다.[378]

근대의 정치 형세는 무엇보다도 계급과 계급 사이에 형성된 전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상류층, 중산층, 노동자층, 빈민층은 물리적 자본을 가용하고 물자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재산을 분배하는 최선의 방안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생산 수단을 누가 장악하고 인간 노동의 결실을 누가 주도적으로 분배할 것인가 하는 골치 아픈 문제는 지난 3백여 년 동안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접속의 시대에는 좌우가 대립하는 정치가 내재 가치와 효용 가치가 갈등을 빚는 새로운 사회 구도에 흡수된다. 내재 가치는 가장 깊은 의미의 문화적 정체성을 뜻한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는 절대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문화 자원, 의식(儀式), 활동은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중략)
따라서 좀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문화와 상업의 갈등은 내재 가치와 효용 가치의 갈등이다. 두 가치가 모두 지난 몇 백 년 동안 사회 담론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내재 가치가 효용 가치에 점점 밀려나고 있다. 사회의 준거틀이 자꾸 효용성으로 치우치는 것은 상업 영역이 점점 득세하고 문화 영역이 퇴조하는 시대 추세를 정확히 반영한다.[379]

생물 다양성과 문화 다양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21세기의 중요한 두 사회운동이다. 이 두 운동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화라는 것은 결국 대지와의 친밀한 결속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모든 문화는 자연에 공동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음악, 노래, 무용, 이야기, 미술, 의식, 축제는 자연이라는 현실과 자연에 존재하는 리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식물 동물 풍경, 하루의 주기, 변화하는 계절은 모두 문화적 형식을 만들고 문화적 표현을 낳는 데 영감을 주었고 은유로 활용되었다.
문화는 자연을 이루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한결같은 외경과 헌신에서 탄생했다. 문화는 대체로 생명을 긍정한다. 문화는 자연에 우리가 진 빛을 이야기하며 우리를 더 큰 생명의 힘으로 이끈다. 이런 생명의 긍정이 바로 내재 가치의 핵심이다. 따라서 문화는 모든 현상이 효용성으로 환원되고 편의와 징발이 행동의 표준으로 수용되는 상업 영역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380]

글로벌 사이버스페이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먼저 다양한 지역 문화를 되살려 놓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문화의 다양성을 되살리기 위해 문화의 복원을 부르짖는 것은 좋지만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고약한 형태의 근본주의가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근본주의가 떠오르고 있다. 극우 민족주의 정당, 분리주의 집단, 민족 청소운동, 종교 회복운동은 세계화와 탈근대화 추세에 맞서는 대항 운동의 극단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운동은 늘 지리적 공간과 깊숙이 결부되어 있다.... 근본주의 세력은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부동의 질서를 찾으려 하고 세계가 감히 넘볼 수 없도록 영토를 다시 거룩하게 만들려 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배타적이어서 접속은 무조건 불순한 영향력으로 간주한다.[381, 382]

시민 사회 조직은 지역 문화의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다른 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의식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국지적으로>라는 말은 너무나 남용된 나머지 상투적 구호로 변질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전세계의 제3부문 조직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을 잘 대변한다.... 자기만의 문화 정체성을 앞세우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 시민 사회 조직운동의 성격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많은 시민 사회 조직의 정서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 집약되어 있다. <나는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문을 굳게 닫아놓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온 세계에서 불어오는 문화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온 문화에 덩달아 휩쓸려 가지는 않겠다.>[382, 383]

산업 자본주의가 문화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지금, 노동 정신은 놀이 정신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놀이는 간단히 말해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놀이는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 범주에 해당한다. 놀이가 없으면 문명도 존립할 수 없다.[384]

네델란드의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는 놀이가 사회를 만드는 데 맡았던 중요한 역할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호칭으로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호모 사피엔스(사유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와 동렬에 올려놓자고 제안했다. 다른 생물도 놀기를 좋아하지만 인간은 그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384]

많은 학자들, 특히 경제학자들은 놀이를 이렇게 비중 있게 다루는 데 난색을 표할지 모른다. 그들은 노동이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 범주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학자들은 아득한 원시 시대부터 산업 시대 이전까지 인간의 생활에는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믿는다. 가령 중세의 그리스도교 달력을 보면 1년의 절반 가까이가 공휴일, 축일, 안식일 명목으로 노는 날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혁명 정부가 그리스도교 달력을 폐지하고 공휴일이 훨씬 적은 세속 달력을 도입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자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일이 인간 생활을 지배하고 놀이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산업 시대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놀이를 지배하는 전제와 규칙은 전통적으로 일을 지배해 온 전제와 규칙과 크게 다르다. 우선, 놀이는 신나고 즐겁다. 즐거운 일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의 일 - 산업 사회에 존재하는 직업의 75퍼센트 이상 - 은 기본적으로 단순 반복 업무라서 따분하고 지루하다. 둘째, 놀이는 자발적이다. 놀기 싫은데 억지로 놀라고 할 수는 없다. 자기가 선택해서 자유롭게 끼여드는 활동이 놀이다. 물론 일도 자기가 선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렇게 이 일 저 일 골라가면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전세계 노동 인구의 20퍼센트밖에 안 된다. 나머지 사람들이게 일은 생존의 문제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하는 일이다. 자연히 근로조건도 혹독하고 열악하다.

진정한 놀이는 살과 살이 맞닿는 친숙한 분위기에서 일어나며 이때 사람들의 참여도도 높아진다. 놀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겉으로 드러난 규칙과 드러나지 않은 규칙이 있고 심각하고 방향성이 있으며 목적 지향적인 놀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공장이나 사무실의 통상적인 근로 환경에 비하면 훨씬 덜 딱딱하다.

놀이는 또 일보다 친밀감을 주고 더 많은 몸놀림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이를 통해 자신의 감각을 한껏 발현할 수 있다. 고독하게 혼자서 즐기는 놀이보다는 여럿이서 함께 어울리는 놀이가 훨씬 많다.

일과는 달리 놀이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가 목적이다. 논다는 행위 자체에서 보상을 얻는다. 치밀하게 조직된 시합이나 운동 경기와는 달리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놀이는 일처럼 쉽게 계량화할 수가 없다. 놀이는 도식적인 잣대를 거부한다. 놀이가 추구하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즐거움이다.[385, 386]

놀이는 현실에 뿌리를 두면서도 가볍고 경쾌하다. 놀이를 하는 사람은 <놀이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놀이에 빠진다.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놀이는 일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일과 놀이의 비중이 뒤바뀌었다. 일은 인간 활동의 주역이 되었고 놀이는 일과 잠 사이에 잠깐잠깐 끼어드는 조역으로 밀려났다. 문화 영역과 상업 영역의 관계가 바뀌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시장이 사회적 교제보다 우위를 점하고, 시장 자본이 사회 자본을 압도하고, 놀이가 여가 활동으로 밀려나는 동안 일은 단단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다시 일의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 돌아왔다.... 전체 노동력의 극히 일부만 동원하여 전체 인구에 필요한 온갖 유형의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현대 농업에서는 이미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다.[388]

산업 경제에서 일이 중요했던 것처럼 문화 경제에서는 놀이가 점점 중요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생산되는 놀이는 문화 영역에서 생산되는 놀이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시장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능동적, 집단적 체험이 아니라 수동적, 개인적 체험에 가깝다. 시장의 힘이 놀이를 점령하면 놀이의 문화적 의미는 평가 절하되기 십상이고 놀이 활동에서 탄생하고 자양분을 얻는 문화 영역도 존립 근거를 잃는다.
순수한 놀이는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가장 높은 수준의 표현 형식이다.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795년에 쓴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프리드리히 실러는 <사람은 가장 아름다울 때 놀고, 사람은 놀 때 가장 인간답다> 라고 썼다.[389]

남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희열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놀이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놀이도 희열도 결국은 경험의 공유이다. 숲을 혼자 거닐 때 느끼는 잔잔한 희열도 나를 둘러싼 생명과 혼연 일체가 된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로움을 두려워하여 자유를 쓰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하는 것이 놀이다.> 라고 말했다.[390]

진정한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고 공감하고 포용할 수 없으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390]

새로운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에 대한 접속을 보장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건강하고 다양한 지역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안정된 길을 보장하는 것이다. 적절한 제약을 가하지 않을 경우 , 시장의 힘은 문화 영역을 집어삼켜 상업적 오락물, 체험, 유료공연, 금전 관계의 상품화된 파편들로 변질시킬 것이다.[392]

문화와 상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일은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지금 세대가 자연 경제와 인간 경제의 적절한 균형을 찾기 위해 기울인 것과 똑같은 정성과 노력을 이 운동에 쏟아 부어야 한다.[392]

옮긴이 후기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정보화 시대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리프킨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정보화 추세가 아니라 접속화 추세다... 정보는 인터넷이라는 부분적 세계를 전체 세계로 확대 적용한 개념이지만, 접속은 인터넷은 물론 자동차, 주택, 전자제품, 공장, 체인점 같은 다양한 실물 영역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되는 포괄적 조류이다.[441]

접속은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권리다. 접속의 반대는 소유다... 변화와 혁신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시대에 소유에 집착하는 것은 불리하다... 기업에게 중요한 것은 고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는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지상 과제였지만 이제 기업은 고객의 시간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고객의 <평생 가치>라는 개념이 나온다.
세상 만사가 서비스화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교환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에서 경험 영역에 접속하는 데 바탕을 둔 체제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441, 442]

리프킨은 인간의 모든 경험을 상품화라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실은 자본주의의 토대를 허물고 있다고 주장한다. 리프킨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문화는 늘 상업에 선행했다. 상업은 문화의 파생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다. 문화는 어디까지나 상업화를 위한 재료 공급원으로 전락했다. 문화 자본주의는 인류가 수 천 년 동안 발전시켜 온 문화적 다양성을 샅샅이 발굴하여 상품화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문화적 다양성은 소멸한다는 것이 리프킨의 진단이다.[443]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는 것은 생물 다양성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리프킨은 말한다. 인간 가치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문화 영역마저 상업 영역에 완전히 흡수당하게 되면 사회적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건강한 시민 사회의 기반은 완전히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문명은 위기에 처한다.[443]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이 유료 활동으로 바뀌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 그 자체도 상품이 되어버리고 상업적 영역이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쥐게 되기 때문이다.[444]

사회는 점점 시민적 가치보다는 기업적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다.[444]

수천 년을 이어온 인간 체험의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생물 다양성을 잃는 것 못지않게 앞으로 우리가 생존하고 번영하는 데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리프킨은 결론짓는다.[445]

자본주의의 무서운 이윤 추구 논리를 비판한 학자들은 무수히 많지만 리프킨이 단연 돋보이는 것은 그가 구체적, 실증적으로 비판하기 때문이다.... 리프킨은 경제 통계 수치로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한다.[445]

리프킨은 단편적인 현상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표면적으로는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현상들의 저변에 흐르는 조류를 날카롭게 파악한다.[445]

리프킨의 혜안은 열성과 부지런함에서 나온다. 이 책을 쓰는 데 꼬박 6년이 걸렸다. 350권의 책과 1천여 편의 논문, 5만장의 색인 카드와 약 2천 개의 주석이 동원되었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인류 문명에 초래할 수 있는 위기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446]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자본주의의 새로운 프론티어)에서는 “접속”이라는 새로운 트랜드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2부 (문화를 고갈시키는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의 모든 경험을 상품화하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실은 자본주의의 토대를 허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가치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문화 영역이 상업 영역에 흡수당하게 되면 사회적 신뢰는 땅에 떨어지게 되고, 건강한 시민사회의 기반이 허물어지게 된다. 결국 인간의 문명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진단이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한 학자는 많았지만 리프킨이 돋보이는 이유는 그의 비판이 구체적, 실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저자는 논리적, 철학적 비판에 그치지 않고 경제 통계 수치로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한다. 이 책을 쓰는 데 350권의 책과 1천여 편의 논문, 5만장의 색인카드와 약 2천개의 주석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꼬박 6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인류 문명에 초래할 수 있는 위기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미래 예측서로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은 2000년에 발간되었고 6년 동안 씌여졌다고 하니 인터넷이 충분히 발달되지 못한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접속”이라는 새로운 트랜드를 설명하는 1부에서는 부적절한 비유와 과장이 군데 군데 엿보인다.

저자는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경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서비스화 하면서 상품화, 유료화 해 갈 것으로 예측한다. 그렇게 되면 비상업적 관계 즉 이웃, 문화적 취향의 공유, 형제애, 시민의식에 바탕을 둔 관계 등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지를 걱정한다.

이건 과대포장이고 불필요한 걱정이다. 사실 인터넷이 통제하기가 어려운 괴물이 될 수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터넷의 발전과정을 보면 비상업적인 관계(시민운동 등)가 인터넷 카페나 블러그 등을 통해 더 활성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점점 시민적 가치보다는 기업적 가치관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 CID(Common-Interest Developments, 공동 관심 단지)의 경우도 뭔가 어색하다.

“CID 주민은 소유권과 재산권을 교묘하게 박탈당하고 접속 생활 공간에서 장점을 누리는 한편 그에 수반되는 함정까지도 감수하면서 점점 단순한 점유인으로서 위상 변화를 겪는다.”[176]

CID는 인종이나 계층 간의 갈등이 심하거나 그로인해 치안 불안을 걱정하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 많이 나타날 수 있는 특이한 주거형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은 소비자의 선택에 관한 문제다. 소비자가 CID를 필요로 하면 그 집단에 소속되길 바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 거주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소비자가 원하지 않으면 그런 문화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접속(Access)이라는 개념에 자동차, 주택, 공장 등 일시적인 서비스에 대한 사용권을 모두 포함시킨 것은 참 재미난 발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정보화 시대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리프킨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정보화 추세가 아니라 접속화 추세다... 정보는 인터넷이라는 부분적 세계를 전체 세계로 확대 적용한 개념이지만, 접속은 인터넷은 물론 자동차, 주택, 전자제품, 공장, 체인점 같은 다양한 실물 영역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되는 포괄적 조류이다.”[441]

하지만 이런 개념들은 이전부터 있어 왔었고,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객관계관리(CRM), IT 솔루션, 금융서비스 등의 분야에서는 고객의 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한 통합 솔루션베이스(Turn-Key베이스)의 다양한 상품들이 개발되어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적자산에 속하는 인터넷과 물리적 자산을 포함한 기타 서비스를 “접속” 이라는 한 가지 트랜드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에겐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 같다. 주택같은 부동산은 앞으로도 투자자산으로서의 의미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저자의 저술 내용 중에 예측이 어긋난 부분, 과대포장된 부분 등 지엽적인 사례를 들어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 책은 시민사회, 문화 또는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해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깨우침을 주었고, 미래에 발생 가능한 여러 문제점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 훌륭한 책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의 트랜드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작업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근대가 목적을 추구했다면 탈근대는 유희를 추구한다.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아무튼 질서라는 것은 무조건 답답한 것, 숨막히는 것이라고 요즘 사람은 생각한다. 반면에 창조적 무질서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권장하는 쪽에 가깝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질서는 자발성이다. 탈근대의 분위기에서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진지하지 않다. 아이러니, 역설, 회의가 득세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보다는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더 관심을 보인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군림하면서 자연이나 사회를 지배하던 역사적 틀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관심 자체도 시들해진다. 역사는 이제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투사하기 위한 참조틀이 아니라 언제든지 재활용할 수 있고 현대 사회의 각본에 써먹을 수 있는 느슨한 이야기의 단편처럼 되어버렸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중요한 것은 순간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 생활에서도 사회 생활에서도 절정감과 카타르시스는 효율성과 생산성보다 윗자리에 놓인다.[286, 287]

새로운 시대는 모호하고 다양하며, 재미와 유머를 추구하며, 어수선하고 너그럽다. 절충을 중요하게 여기며 권위를 우습게 여긴다. 이데올로기, 만고 불변의 진리, 절대로 어겨선 안 되는 철칙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고 대신 그 자리에 온갖 유형의 공연이 펼쳐진다.[288]

래시는 <우리는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감각, 과거의 세대와 미래의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식을 빠르게 상실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 시간 감각의 소멸이다> 라고 말한다.[301]

네트워크 바깥의 사람들은 전자 네트워크로 들어가는 대문 바깥에서 가난과 절망이 지배하는 또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 인생은 육체적으로 생존하기에도 고달픈 나날의 연속이다. 세계 인구의 부유한 1/5이 문화 체험과 개인적 변신을 찾아 소유를 과감히 포기하고 있지만 나머지 4/5는 아직도 초라한 살림살이 속에서 더 많은 재산을 갈망하고 있다.[339]

<미래는 풍족하고 어디서나 살 수 있으며 교육을 많이 받은 우리 중의 소수에게만 기회의 낙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 다시 말해서 대학을 나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소위 불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디지털 암흑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클라인>[340]

빌 게이츠는 미국 인구의 절반을 합친 것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전 세계의 30억 노동자 가운데 1/3은 일자리가 없거나 생활비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1998년 국제 노동기구의 보고서 내용이다. 그 결과 전 세계의 가장 부유한 인구 집단은 오락을 wmf기면서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현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반면 거의 10억에 달하는 인구는 빈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수십억 명은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다.[341]

모두 16억 명이 살아가는 전세계 약 1백여 개의 국가에서 경제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89개국은 소득이 10년 전보다 떨어졌으며 35개국은 1930년대 대공황기보다 더욱 큰 폭으로 국민 소득이 떨어졌다. 아프리카에서는 가구당 평균 소득 수준이 20년 전보다 20퍼센트 이상 하락했다.[341]

실제로 미국인이 화장품 구입에 쓰는 돈(연간 80억 달러)과 유럽인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데 쓰는 돈(연간 110억 달러)은 학교 교육을 못 받고 공동 화장실을 쓰면서 살아야 하는 세계 20억 명의 인구에게 기본 교육, 깨끗한 물, 위생 시설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돈보다도 많은 액수이다.[342]

부유층은 점점 전자 대문의 안쪽으로 넘어가는 반면 미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은 교도소로 들어가고 있다.[342]

전화도 못 쓰는 미국의 7백만 가구에게 빌 게이츠가 구상하는 정보 고속도로로 연결된 세계는 무의미한 소리다.[343]

시장은 어디까지나 파생적 성격을 가지며 거래 조건을 확신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가 충분히 조성되어 있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 서유럽과 미국의 기업은 동구권이 몰락하고 난 뒤 이런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많은 기업이 과거 공산국이었던 나라로 너도나도 몰려가서 사업체를 차렸지만 상당수는 실패했다. 상거래를 보장하는 사회적 신뢰, 이른 바 <사회 자본>이 모자랐던 탓이다. 공산주의 정부는 제3부문, 그러니까 사회적 신뢰를 창출하여 시장이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문화 기구들을 없앴다. 자연히 기업과 기업의 합의는 어렵거나 심지어는 불가능에 가까운 형편이 되었고 설령 상업적 계약이 맺어졌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나라는 시장이라고 하는 제1부문과 정부라고 하는 제2부문을 중심으로 공공 정책을 운용하면서 문화라는 제3부문은 당연시한다. 사회 자본을 수립하고 시장과 교역을 가능하게 만드는 막중한 역할이 문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화 기구 -교회, 세속 기관, 민간 단체, 상조회, 스포츠 클럽, 예술 집단, 비정부 기구-는 사회적 신뢰의 샘물이다.[359]

리프턴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한다>. 사회적 신뢰는 공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서 타인 안에서 감정의 둥지를 틀고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함께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런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배려하게 된다.
공감은 다른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접할 때 길러진다. 다른 인간의 체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줄어든다. 가령 코소보의 끔찍한 살육 현장이나 소말리아에서 굶어 죽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면 가슴이 찌릿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감했다고 말하기에는 미진하다. 하지만 현장에 가면 반응이 180도 달라진다. 갑자기 사람과 상황은 생생한 현실이 되고 그들의 곤경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362, 363]

경제는 문화와 인간성의 기본틀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와 감정, 다시 말해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 상업 영역이 인간 문화와 체험의 조각조각을 닥치는 대로 짜깁기하여 제공할 때, 우리가 중요한 인간적 가치와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우물은 독으로 오염될 위험성이 있다.[364]

마을, 지역, 국가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동질감을 부여하는 문화적 가치가 글로벌 시장의 무자비한 힘에 압도당할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가 지역 문화나 국가 문화, 그리고 이것들을 지탱하는 창조성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 향상되는 방향으로 세계화의 충격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199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보고서> [370]

문화와 상업이 생태학적으로 균형을 회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임무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적절한 균형을 되찾으려면 시장에 나와 있는 문화 상품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 못지않게 지역 문화를 소생시키는 데도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371]

전자 통신이 매개하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21세기에는 지리적 공동체 안에서 같은 인간끼리 직접 살을 맞대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들을 모든 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등한시한다면 가장 깊은 수준의 체험을 통해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은 깡그리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도 시간 문제다.
문화를 소생시켜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문화 생산하는 데 원료가 되기 때문이어서만도 아니고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문화가 만들어내기 때문만도 아니다. 문화는 다른 이유를 모두 접어두고서라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소생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낳는 유일한 원천이 문화이기 때문이다.[372]

많은 미국 학교가 오래전부터 핵심적 교육 목표로 표방해 온 경쟁력 있는 기술의 습득은, 마차를 말 앞에 놓는 것처럼 본말이 전도된 발상이라고 시민 교육 이론가들은 비판한다.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을 팔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21세기의 교육 이념으로는 지나치게 옹색하다. 이런 교육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 의식을 가진 균형 잡힌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남에게 팔아먹을 수 있는 재산쯤으로 치부하는 어른을 양산한다.
시민 교육 옹호론자들은 문화를 자기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길 수 있도록 학생의 자기 정체성을 심화 확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은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육성하고 타인과의 유대를 권장하며 문화가 문명 생활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는가를 학생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시장에서 팔아먹을 수 있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수적인 조역에 그쳐야지 시민 교육을 희생시키면서 맨 앞자리를 차지해서는 곤란하다.[376]

인간 관계에서 문화가 예전에 차지하던 높은 자리를 되찾으려면 더욱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문화는 시장과 정부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화 부문은 시장 부문과 정부 부문 사이에서 일종의 새로운 식민지처럼 찬밥 대접을 박고 있다. 문화는 독자성을 크게 잃어버린 채 다른 두 부문에 기대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문화 기구는 예전의 독립성을 많이 잃고 정치 기구와 상업 기구에 얹혀 지내고 있다.[377]

근대의 정치 형세는 무엇보다도 계급과 계급 사이에 형성된 전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상류층, 중산층, 노동자층, 빈민층은 물리적 자본을 가용하고 물자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재산을 분배하는 최선의 방안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생산 수단을 누가 장악하고 인간 노동의 결실을 누가 주도적으로 분배할 것인가 하는 골치 아픈 문제는 지난 3백여 년 동안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접속의 시대에는 좌우가 대립하는 정치가 내재 가치와 효용 가치가 갈등을 빚는 새로운 사회 구도에 흡수된다. 내재 가치는 가장 깊은 의미의 문화적 정체성을 뜻한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는 절대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문화 자원, 의식(儀式), 활동은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중략)
따라서 좀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문화와 상업의 갈등은 내재 가치와 효용 가치의 갈등이다. 두 가치가 모두 지난 몇 백 년 동안 사회 담론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내재 가치가 효용 가치에 점점 밀려나고 있다. 사회의 준거틀이 자꾸 효용성으로 치우치는 것은 상업 영역이 점점 득세하고 문화 영역이 퇴조하는 시대 추세를 정확히 반영한다.[379]

시민 사회 조직은 지역 문화의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다른 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의식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국지적으로>라는 말은 너무나 남용된 나머지 상투적 구호로 변질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전세계의 제3부문 조직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을 잘 대변한다.... 자기만의 문화 정체성을 앞세우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 시민 사회 조직운동의 성격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많은 시민 사회 조직의 정서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 집약되어 있다. <나는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문을 굳게 닫아놓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온 세계에서 불어오는 문화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온 문화에 덩달아 휩쓸려 가지는 않겠다.>[382, 383]

산업 자본주의가 문화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지금, 노동 정신은 놀이 정신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놀이는 간단히 말해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놀이는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 범주에 해당한다. 놀이가 없으면 문명도 존립할 수 없다.[384]

네델란드의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는 놀이가 사회를 만드는 데 맡았던 중요한 역할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호칭으로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호모 사피엔스(사유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와 동렬에 올려놓자고 제안했다. 다른 생물도 놀기를 좋아하지만 인간은 그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384]

많은 학자들, 특히 경제학자들은 놀이를 이렇게 비중 있게 다루는 데 난색을 표할지 모른다. 그들은 노동이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 범주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학자들은 아득한 원시 시대부터 산업 시대 이전까지 인간의 생활에는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믿는다. 가령 중세의 그리스도교 달력을 보면 1년의 절반 가까이가 공휴일, 축일, 안식일 명목으로 노는 날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혁명 정부가 그리스도교 달력을 폐지하고 공휴일이 훨씬 적은 세속 달력을 도입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자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일이 인간 생활을 지배하고 놀이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산업 시대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놀이를 지배하는 전제와 규칙은 전통적으로 일을 지배해 온 전제와 규칙과 크게 다르다. 우선, 놀이는 신나고 즐겁다. 즐거운 일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의 일 - 산업 사회에 존재하는 직업의 75퍼센트 이상 - 은 기본적으로 단순 반복 업무라서 따분하고 지루하다. 둘째, 놀이는 자발적이다. 놀기 싫은데 억지로 놀라고 할 수는 없다. 자기가 선택해서 자유롭게 끼여드는 활동이 놀이다. 물론 일도 자기가 선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렇게 이 일 저 일 골라가면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전세계 노동 인구의 20퍼센트밖에 안 된다. 나머지 사람들이게 일은 생존의 문제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하는 일이다. 자연히 근로조건도 혹독하고 열악하다.

놀이는 또 일보다 친밀감을 주고 더 많은 몸놀림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이를 통해 자신의 감각을 한껏 발현할 수 있다. 고독하게 혼자서 즐기는 놀이보다는 여럿이서 함께 어울리는 놀이가 훨씬 많다.

일과는 달리 놀이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가 목적이다. 논다는 행위 자체에서 보상을 얻는다. 치밀하게 조직된 시합이나 운동 경기와는 달리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놀이는 일처럼 쉽게 계량화할 수가 없다. 놀이는 도식적인 잣대를 거부한다. 놀이가 추구하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즐거움이다.[385, 386]

놀이는 현실에 뿌리를 두면서도 가볍고 경쾌하다. 놀이를 하는 사람은 <놀이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놀이에 빠진다.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놀이는 일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일과 놀이의 비중이 뒤바뀌었다. 일은 인간 활동의 주역이 되었고 놀이는 일과 잠 사이에 잠깐잠깐 끼어드는 조역으로 밀려났다. 문화 영역과 상업 영역의 관계가 바뀌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시장이 사회적 교제보다 우위를 점하고, 시장 자본이 사회 자본을 압도하고, 놀이가 여가 활동으로 밀려나는 동안 일은 단단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다시 일의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 돌아왔다.... 전체 노동력의 극히 일부만 동원하여 전체 인구에 필요한 온갖 유형의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현대 농업에서는 이미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다.[388]

1795년에 쓴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프리드리히 실러는 <사람은 가장 아름다울 때 놀고, 사람은 놀 때 가장 인간답다> 라고 썼다.[389]

문화와 상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일은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지금 세대가 자연 경제와 인간 경제의 적절한 균형을 찾기 위해 기울인 것과 똑같은 정성과 노력을 이 운동에 쏟아 부어야 한다.[392]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는 것은 생물 다양성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리프킨은 말한다. 인간 가치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문화 영역마저 상업 영역에 완전히 흡수당하게 되면 사회적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건강한 시민 사회의 기반은 완전히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문명은 위기에 처한다.[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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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8.08.05 18:31:11 *.160.33.149

정산이 꼼꼼하게 인용했다. 앞으로 책을 쓰고 작가의 길을 가려면 오래 생각해 보아야할 대목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래 두 인용에 오래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상업권에서 아이디어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길한 생각도 든다. 인간의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다면, 중요하지만 상업성이 없는 사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기 인생의 길라잡이가 될 만한 생각을 상업의 영역에서 가져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문명에서,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관점, 의견, 관념, 개념이 존립할 수 있는 여지가 과연 있을까? 온갖 유형의 아이디어가 거대 기업들이 관리하는 지적 재산권의 형태로 얽히고 설켜 있는 사회에서 우리의 집단 무의식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이고 미래의 사회적 담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p 85]


"자본주의 체제가 앞으로도 계속 문화 영역의 상당 부분을 상업화된 문화 상품, 공연, 체험의 형태로 자기 영역 안으로 흡수할 경우, 문화가 더 이상 사회 자본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할 만큼 위축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고 그렇게 되면 경제도 타격을 받는다. 어디까지나 문화에 의해 생산되는 사회 자본은 경제의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사회 자본이 고갈되면 문화와 상업의 섬세한 균형은 무너져버린다.[p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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