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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8일 21시 37분 등록

진도를 맞추기 위해 한권 끼워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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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01 - 박노자 지음, 한겨레 출판, 2001


● 저자에 대하여

박노자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박노자라고 부르는 한국이름이고 하나는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는 러시아 이름이다. 귀화라는 과정을 거쳐 한국인이 된 박노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인 이었다.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에서 유태계 러시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상트페테부르크 국립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교에서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5세기 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라는 논문으로 아시아 및 아프리카 학부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경희대 러시아어과에서 전임강사를 지냈다. 한국 여자와 결혼하고 2001년 한국으로 귀화했으며 현재는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의 부교수로 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춘향전’ 때문이었다. 사춘기 때였던 구 소련 시절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북한영화 ‘춘향전’을 보고 흥미를 느끼면서 한국과의 인연은 학문적 관심으로 이어졌다. 대학에 들어간 뒤 그는 한문학을 배우면서 한시의 맛에 푹 빠져든다. 부운(浮雲-떠다니는 구름) 고봉(孤蓬-외롭게 떠다니는 다북쑥) 공담(空潭-인기척이 없는 못)같은 한시의 술어들에 취해들었다고 그는 말한다. 한국과 소련의 관계가 공식화되고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그는 원래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기로 되어있던 계획이 바뀌어 생각지도 않았던 한국으로 오게 된다. 1991년 9월 박노자는 학생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고려대로 온다. 3개월 과정의 유학은 매우 짧았지만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사람’으로 말해지는 박노자는 진보주의 역사학자다. 한국 사회에 대한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한겨레에 칼럼을 쓰고 ‘아웃사이더’의 편집위원을 맡기도 했던 그는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솔직하게 들춰낸다. 노르웨이에서 생활하는 지금도 그의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과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그의 논문으로는 ‘가락국기에 있어서의 왕권신수설’ ‘신라 경문왕의 유불선 융화정책’ ‘6~7세기의 신라 지배층의 선민의식’ 등이 있으며 송영 박경리 김원일 등 한국 작가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등 종교, 사회주의 관련 논저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당신들의 대한민국 2’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나를 배반한 역사’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의 만감일기’ 등이 있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 서문

동족을 잘 때려죽이는 것을 명예와 업적으로 아는 사회는 과연 어떤 역사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졌는지, 그 저변의 대중심리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령-027’을 본 뒤에 많이 고심하게 되었다. [13]

해방을 위한 복종과 폭력이라는 운동권의 의식구조를 비판하려면, 1년에 주변부 국가의 아이들을 몇 십만 명씩 굶어죽게 만드는, 현재의 세계체제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제도적 폭력부터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18]

그러나 그것은 돈에 몸을 파는 동족의 수모에 대한, ‘상처받은 민족주의’에 따른 민족적 감정이 결코 아니었다. 인간의 몸에 값을 매기는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그 사회에서 누릴 것을 두루 누리는 ‘귀족’들의 단세포성에 대한 혐오증일 뿐이었다. 당시 나는 우리의 시간, 우리의 신체가 일회용 상품이 된 지옥에서 “어떻게 해야 남에게 짓밟히고 남을 짓밟는 우리를 다시 한 번 인간으로 복원할 수 있을?”하는 화두를 부여안고 살아야 했다. [23]

노조의 지원을 받는 좌익 정당들이 국회 의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공산당의 기관지까지도 국고 보조금을 받아 발간하는 다양성의 나라, 입사 때 여성이나 장애인이 ‘정상적인 남성’보다 더 유리한 평등의 나라에서 살면서, 노동운동가들이 감옥에 잡혀가고, 여성들이 손님의 냉면을 잘라주는 ‘음식집 아줌마’정도의 역할밖에 맡지 못하는 고국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기가 가슴이 아프다.  [28]

자기가 남을 잡아먹고 싶으면서도, 남에게 잡아먹히기를 겁내며… 다들 의심 깊은 눈으로 서로서로 쳐다보면서… ‘노신, 광인일기 중에서’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병들을 앓고 있는지,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 논해보고, 나아가서 ‘치료과정’에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에서 이 책을 내놓았다.  [29]

1부 한국사회의 초상

전근대와 근 현대라는 이분법의 함정에 빠져 박정희의 근 현대화 모델이 얼마나 많은 전근대적인 요소를 유기적으로 내포하는지, 또 전근대적인 요소와의 상호작용이나 전근대적 요소의 재해석과 의미 재부여 재확인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망각하는 오류다. [39]

이순신 동상의 주요 의미론적 특징은 전체주의적 정권들이 즐겨 쓰는 ‘역사적 연상의 이용’이 지닌 함축성이다.  [43]

자명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민주적인 정통성도, 문치주의 국가인 한국의 역사적(전통적) 정통성도 전무한 박정희 정권은 이순신 동상의 건립을 통해 과거 무인과 군부가 차지한 위치를 강조함으로써 넌지시 군부독재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44]

수도 서울의 성지를 지키는 박정희 정권의 두 ‘수호신’-이순신과 김유신 장군의 동상-은 거시적인 문맥으로 봐서는 전통 계승의 탈을 쓴 탈아입구(脫亞入歐)와 국민 총동원 욕망의 표현 확인 강요라는 의미를 지닌다. [45]

탑의 물리적인 높이는 하나의 기호로서 한 나라-나아가서 전세계-의 ‘높은 사람’인 지도자와 그 ‘높음’이 요구하는 ‘충성’에 대한 관객의 ‘적절한’의식을 조장한다. [50]

분명한 것은 ‘집단에 대한 충성’에서 ‘개인의 자유 책임’으로 가치 중심이 이동하지 않는 한, 주연(酒宴)에서 쓰러진 폭군에 대한 ‘사모’와 그 ‘사모’의 정치적 상업적 이용이라는 희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51]

한마디로, 현재 국민의 정신적 성숙으로 국가가 더는 주민들을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움직일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갈 전망이다. 이 역사적 진화를 ‘교실의 붕괴’나 ‘사기 저하’, ‘국가관의 위기’로 보는 파쇼적 국수주의자 일부는, 학생들에게 단군 숭배를 강요함으로써 어린 뇌리에 ‘국가’와 그 권력에 대한 공포와 무조건 존경을 주입하려 한다. [54]

그러면 요즘 한국사회에서 ‘친구’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보다 이 말은 원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양반’이란 말과 같이 삼인칭 대명사로 쓰인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자기 또래나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이 친구, 저 친구”라고 말하다 보면, 온 세상이 다 친구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57]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드높은 이상을 과감히 지향하는 이 패기 찬 젊은이들에게는 옛 선조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친교와 친분이 일종의 ‘기브 앤 테이크’나 동업관계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서야 감지했다.  [58]

친구에게서 영적인 동질성과 도덕적인 지도를 요구하던 사회적 풍토가 ‘네가 나를 밀어주면 나도 보답하겠다’는 식의 새로운 ‘친구’관계로 전락하는 것을 문화의 진보로 볼 수 있겠는가? [59]

새롭고 멋지고 편한 것은 추구하고, 오래되고 못생기고 어려운 것은 피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안락주의가 이념 없는 사회의 새로운 이념으로 등장한 지 오래다.
우리가 일제시대에 일제와 타협해 가면서 산 유산층을 비판하는 것처럼, 어쩌면 물질적인 안락함과 잘사는 데만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 역시 정직한 후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60]

현재 한국을 포함한 준주변부 국가의 폭력구조는 어떤가. 누구나 체감적으로 할 수 있듯이, 한국처럼 단일민족임을 표방하는 사회에서는 대학 못가고, 정규 직장 못 갖고, 재산 못 모은 이른바 ‘삼무’계층이 주변층의 뼈대를 이루는데, 이러한 주변층에 대한 국가와 주류사회의 태도는 극히 폭력적이며 멸시적이다. 미화원, 수위, 대학교 시간강사 등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무시와 착취는 극에 달한 상태고, 철거민 등 주변층 하부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은 일상적이다. 학위와 정규 직장, 재산을 가진 ‘삼유’계층인 의사들의 폐업에는 몹시 신사적이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 정부가 삼무계층의 권리 주장에는 곤봉과 기만으로 맞서는 것은, 역시 준주변부 사회인 한국의 산 단면을 잘 보여준다. [62]

그들은 말로는 우리를 같은 민족, 같은 동포라고 부르지만, 각자의 의식을 들여다보면 같은 인권을 가진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들에게 단지 불쌍히 여겨 동냥해야 할 하층민들이죠. [70]

한국에 체류 중인 대다수 고려인과 조선족을 노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적 우열에 따른 단순한 차별이라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재러 재중 교포에게 적용하는 일종의 한국식 오리엔탈리즘 논리였다. [70]

북방 교포와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근대적 정신, 즉 평등과 인권의식이다. 경제적 우열과 국적, 심지어 핏줄과도 관계없이 모든 인류를 평등한 인권의 소유자로 인식할 줄 알아야만 부득이하게 ‘수혜자’가 된 사람의 자존심과 인권이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73]

그러나 내가 소련 시절에 상대해 본 북한 사람의 언행으로 봐서는 북한과 소련이 한 가지 본격적인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바로 인간을 상품화하지 않는다는 비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점이 비자본주의 지역의 주민들이 느끼는 상대적 행복감의 원천이다.  [78]

집단주의와 돈이라는 속된 논리가 성스러워야 할 교회까지 침범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82]

근 현대의 한국은 스칸디나비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폭력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결과 폭력이라는 것이 한국 사회 전체에, 한국인 각자에게 철저하게 내면화 되어있다. 약자를 완력으로 짓밟아도 된다는 것은 폭력 진압으로 ‘유명한’ 경찰, 성추행으로 오명을 쓴 재벌, 구타로 악명 높은 군대에게는 기본 상식이다. [92]

약자이자 하급자에 대한 무제한적인 폭력이 가능할 뿐 아니라 정당하다는 것을 한번 배운 사람들로서는 약자이자 일종의 이류시민인 아내나 아이들을 존중해주고 평등하게 대해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104]

막연한 평화 지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나부터 입대를 거부해야 정권이 전쟁 도발을 못한다는 서구 반전운동식의 확고한 입대 거부 의지를 가진 이가 별로 없었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산다는, 전체주의적 사회의 그릇된 상식이 대다수 응답자들에게 충분히 내면화 되어 있었다. [105]

구타가 완전히 없어질 수 없는 이유는 군대에 대한 지배층의 실제적 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도 나라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한국의 보수정객들과 재벌들이 요구하는 인간상은 평상시에는 ‘상전’을 위해서라면 비자금 조성이든 세금 탈루든 필요없는 자동차 공장 계획이든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복’이고, 유사시에는 아무런 생각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동족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강인한 애국자’다. [108]

그리고 무엇보다 내무반의 악몽이 사라져야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군대문화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군대의 맹종문화가 직장생활을 지배하는 한, 하급자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 상급자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 거침없는 자기 권리 주장 등 자유민주 사회의 직장문화가 한국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무반의 의무적인 성경험 공개, 등이 이 땅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야 여성에 대한 멸시와 가정폭력, 직장동료와 단체로 사창가에 가는 행위 등 이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없어질 것이다. ‘군대문화로부터의 해방’ 이 한국 시민운동의 하나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112]

한국 젊은이들의 열성과 재능이 당에 묻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폭력문화’에 대한 인식과 반성이 있어야 하고, 군부대 일상에 대한 시민단체 등의 감시가 강화되어야 한다.  [119]

각각 중국과 구소련에서 독자적이고 탄력성 있는 문화권을 형성한 조선족(재중 교포)과 고려족(재소 교포)의 독특하고 이질적인 경험에 대해, 경제력부터 먼저 밝히는 남한 사회가 지금까지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나 싶다. [123]

그들이 가난하다는 얇은 생각 이전에 독특하고 깊은 그들의 문화를 눈여겨 볼 줄 알아야 한다.  [124]

그런데 19세기 말 일제를 포함한 식민주의 열강들의 주요 철학이념인 ‘적자생존’을 다시 살려, 같은 나라 안에서 빈자와 부자 간의 새로운 ‘분단’을 초래하면서까지 일부 큰손들의 이득을 ‘국제 수준’으로 극대화 하는 것이 진정으로 민족의 장래를 위한 것인가? 직장 간부??? 평소에 미워 보이는 평직원이나 임신한 여직원을 무조건 자르는 식의 공포유도형 구조조정보다, 독일처럼 노조가 경영진과 동등하게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삼성자동차 설립과 같은 무의미하고 무모한 재벌 총수의 행각을 더 잘 견제할 수 있지 않을까?  [127]

한국보다 더 ‘선진적인’ 나라로 여기는 미국에서 이 땅으로 왕림하신 파란 눈의 젊은이에게는 선웃음까지 띠면서 애써 길을 설명해 주면서도, ‘후진국 시민’으로 여기는 중국 동포나 파키스탄 사람은 폭력과 고함으로 대하는 평범한 중소기업인이나 일부 시민의 태도는 일제의 ‘문명’과 ‘미개’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127]

예수의 희생과 톨스토이와 같은 수많은 사상가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아직 검투사의 죽음을 재미있게 보면서 음식이나 맛있게 먹던 로마인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40]

예를 들어 최근 한국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대재벌들은 갖은 방법으로 젊은층의 소비심리를 자극하여 온 나라가 소비주의라는 고질병으로 멍들게 만들었다. 단순히 ‘과소비’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쓰는 것이 유일한 인생의 이상이 되고 만 것이다. 신앙도, 문화도, 사랑도 이 ‘벌이와 씀씀이’라는 단순한 등식 앞에서 무력하게 부서지고 있고, 결과적으로 인간이란 ‘벌고 쓰는’ 기계적 존재로 취급받게 된다. ‘못 벌고 못 쓰는’ 사람이면 ‘고장난 기계’ 취급을 받고 사회에서 ‘폐기’ 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143]

그리고 살인적인 경쟁 속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형식화되어 가고, 남을 밟고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 된 사회에 ‘군자는 다투지 않는다’는 교훈만큼 시의적절한 것이 있을까? 미국식 무한경쟁에 한국이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사양의 정신’이다. 그리고 감투를 얻기 위해서 갖가지 파벌의 보스들에게 아부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파벌에 기대지 않는’ 군자의 이상이 어떤 시사를 주지 않는가? [143]

인간이 역지사지의 지혜를 가졌다 해도, 남의 처지에 서서 세상을 볼 줄 아는 슬기로움을 지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45]

2부 대학, 한국사회의 축소판

대학을 안 나온 소규모 기업의 주인은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아도 ‘서민’ 이라고 부르고, 대학을 나오면 말단 공무원도 ‘인물’로 받드는 곳이 한국 사회다. [149]

‘투사’가 며칠 사이에 그토록 미워하던 족벌체제의 ‘충복’으로 변신하는 것도, 족벌체제가 엊그제의 ‘투사’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기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개인적인 ‘변절’과 ‘안주’의 차원을 뛰어넘는, 제도적 장치들이 뒷받침하는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보인다. ‘제도와 투쟁하는 것’과 ‘제도에 순종하는 것’이 그토록 얽히고 설킨 대학 사회의 주요 제도적 장치들은 무엇일까? [150]

학부생과 교수의 관계에서도 다분히 ‘절대적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논리가 작용하지만, 학계에서의 입지가 문제되는 석 박사 과정생들은 심지어 지도교수의 대필 요구를 고맙게 받아 들여 ‘써줄수록 잘 시켜주겠지’라고 여길 정도다. 보편적인 진리나, 인권, 학리(學理) 등을 위해서 봉사하기보다는 ‘영향력’많은 사람에게 매달려야 ‘밥 그릇’이 보장된다는 것은 한국 학계 ‘새싹’들의 ‘생활의 지혜’가 되었다.  [151]

즉, 유교적 이념에 따라서 전통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선배들에게 일단 ‘잘 보이고’, 성공한 선배와 나중에 ‘먹이사슬’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적 선후배 관계의 여러 논리 중 하나다. 형식이야 유교에서 따온 것이지만, 내용은 다분히 정실 자본주의의 산물로 보인다. [152]

사실, 커닝의 폐습은 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심리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첫째,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도덕 윤리 염치보다 눈앞의 작은 이득이 더 중요해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학생들끼리 커닝을 수치로 여기거나 자체적으로 단속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속임수를 써도 좋다’는 속물적인 원칙이 이미 학생사회에서 일종의 불문율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했다. [158]
셋째, 공부의 내용보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는 입시 위주 학교교육의 기본 의식이 대학에 들어온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학생들의 순수한 학문 탐구 의욕을 묶어버린다는 것이다.
넷째, 국방 납세 등 국민의 의무를 교수와 똑같이 지는 학생이 교수의 눈에 그래도 ‘아이’로 비추어지고, 학생이 저지르는 부정행위가 ‘아이 장난’으로 비추어진다는 것이다. 사제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려는 전통은 대단히 좋지만, 후배에게 폭탄주를 강권하여 숨지게 하는 등의 행위는 단순한 ‘장난’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158]

‘직장’을 사람의 ‘얼굴’로 인식하는 신분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164]

내가 만난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사회적으로 심한 박탈감을 느낀다고 토로하며 “이 사회에서는 정직한 방법으로 출세할 수 없다”고 자신있게 주장했다. 출세를 생각하지 않고도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라도 가끔 비도덕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특히 지나친 굴종이나 아첨, 또는 뇌물 증여 등)를 저질러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인 주장이었다.
제도에 대한 불신 못지않게 대인관계에서 드러나는 근원적인 경계의 자세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였다. 대인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전제는 “모든 사람이 타인과 관계하는 이유가 본인 이득의 극대화”라는 ‘삼국지’를 생각나게 하는 ‘생활의 지혜’였다(동양 고전을 일반적으로 많이 망각한 한국에서, 삼국지가 유독 인기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따라서 소위 삼연(혈연, 지연, 학연)이 닿지 않거나 특별한 ‘결속감 구축 의례(술자리, 회식, 적어도 제3자의 소개)’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무조건 남에 대해 친절하고 이타적인 자세를 갖추는 것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171]

‘영향력 있는 신문에서 무게 있는 발언을 하는 사람’과 ‘교수’가 거의 동의어가 된 상황에서는 좌익적 성향의 교수마저 조선일보와 같은 매체에서 발언하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강준만이 많이 지적 비판한-괴이한 현상도 일어난다. [177]

그리고 산업화 가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최근에 한국 특권층이 전체적으로 세습화의 경향을 상당히 나타내는 까닭에 교수사회에 비특권층 출신이 진출하기도 매우 어려워졌다. 몇몇 특수 분야(국학 등)를 제외하면, 교수가 되기 위한 거의 필수적인 조건이 미국(적어도 서구) 박사학위 소지인데, 고액 학비로 유명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는 것은 학습능력뿐만 아니라 상당한 재력을 일단 요구한다.  [178]

‘위로부터의’ 요구에 무조건 응해야 하는 관계로 연구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도 적어지고, 개인의 정직성을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덕성여대나 계명대와 같이 재단 횡포가 극심한 대학교의 경우에는 ‘아부 교수’ ‘어용 교수’로 전락하거나 ‘목을 내놓고’ 투쟁해야 한다. [181]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한국에서 거액의 자금과 탁월한 로비 능력으로 무장한 ‘큰 주먹세계의 두목’들이 정의와 법을 무시해서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건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정치적 비리와 유착을 방지해야 하는 메커니즘이 약하거나 없다는 슬픈 이야기가 된다.
이번 비리재단이 자행한 폭거의 역사적 퇴보성 비합리성 극악무도한 폭력성 못지않게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은 공론의 장이어야 할 신문들의 보도 태도와 수준이다. [191]

즉, 1990년도에 그 ‘부패 네트워크’의 ‘부단한 노력’으로 사립학교법이 또 한 번 개악되어 재단이사회가 학교 운영의 핵심인 인사권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교직원의 ‘밥줄’이 족벌재단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는 학원민주화 반부패투쟁은 사실상 ‘목을 내놓고 하는’ 영웅적인, 그리고 매우 어렵고 드문 행위가 됐다. [195]

‘거짓말 공장’으로 전락한 보수 족벌 언론의 문제를 당장 해결할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195]

3부 민족주의인가 국가주의인가

실제로 약 100년전에 일본어를 거쳐서 조선어와 중국어에 들어온 ‘민족’이라는 ‘nation’의 번역어도, ‘민족’이나 ‘민족주의’ 개념도 극히 최근의 일이고, 조선 전근대의 풍토나 전통과는 관계가 희박한 극히 근현대적인 현상이다. [200]

보편적인 의미의 인간적 존엄성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에게는 이해가 잘 안되는 이야기다. ‘보편적인 도덕’도 그렇다. ‘우리’와 관계있는 것은 본래 다 도덕적이다. ‘남’의 도덕성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남’이 ‘우리’의 적대자로 간주되면, ‘남’이 악마가 되고, ‘우리’가 천사가 되는 흑백논리가 당장 적용된다. [204]

그러나 고등학교 교과서의 평가는 과연 어떤가? 평가는 매우 간단하다. ‘이는 태조의 자주 북방 정책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말이 전‘나’부다.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논리는 무엇인가?‘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적대자의 생명은 물론 무고한 동물의 생명까지 희생시켜도 도덕적인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즉, ‘우리’의 이해관계가 문제되는 한, ‘보편적인 도덕’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도덕적인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세상, 참 편안한 세상 아닌가? [205]

‘나’를 포함한 ‘우리’쪽이 늘 타당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것은 그야말로 신들도 부러워할 만큼 마음 편한 태도다. [205]

그런데 요즘도 5공 독재정권의 은밀한 지원을 받던 소위 ‘재야사학자’ 사이에서 가끔 들리는 “만주는 우리 땅” 이라는 소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현실성이 전무할 뿐 아니라, 중국과 선린관계를 모색해야 하는 한국의 현실적인 국익과도 완전히 상반되는 소리가 왜 요즘까지도 끊임없이 들리는가? 그 소리는 한국의 민족주의적 신화의 골자를 이루는 혈통적 세습의 신화라는 문맥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만주 벌판을 화려하게 다스린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후손이라면, 우리의 일부분인 그쪽 ‘우리 땅’을 적어도 명분상 포기할 수 없다는 논리인 셈이다. 현실성이야 어떻든, 불변의 ‘역사주체’로서 고조선부터 현재가지 살아 온 우리의 신화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만주’의 신화가 절실히 필요한 노릇이다. [215]

그리고 민족의식과 민족 주체성의 강조는 반권위주의적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민족적 명분’을 조작 강요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민족 주체성’으로 세뇌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혹독한 체벌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학교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의무 군대, 주당 평균 55시간의 세계 최고 강도의 노동을 강요하는 회사라는 남한의 현실을 과연 달갑게 받아들이겠는가. [220]

그렇다면 중국 동포의 배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귀화한 외국인마저 이질시하는, 그러면서도 ‘남’에 대한 서구적인 적극적 폭력을 삼가는 ‘한국적 자기 민족 중심주의’의 유형은 과연 무엇인가? [228]

국부의 원천 중 하나인 관광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부국 출신 손님들에게 매우 친절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관념도, 국가에 세금을 내는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빈국 출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불가피하다는 중소기업협회의 주장도, 결과적으로 다 위와 같은 ‘자본주의적 국가주의’의 대외관과 연결된 듯 하다. [229]

4부 인종주의와 대한민국

역사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러시아의 대국화는 나라 안의 위로부터의 강제적인 공업화와 군사화, 농민층의 무한한 희생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나라 밖의 원주민 말살과 환경 문화 파괴를 수반하는 영토 팽창에 따른 것이었다. 이 영토팽창 과정에서 러시아 세력이 원주민을 말살 예속 주변화 시키면서 시베리아를 정복하지 못하였다면, 과연 지금 러시아가 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과연 나 같은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생존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결국 한국에서 내가 포식난의(飽食暖衣,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바트자갈이 속한 몽골 등 수많은 ‘주변 종족’의 피와 눈물, 희생과 좌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추상적인 역사적 부채 의식이 아니었다. 러시아를 문화적 상징적 자본 삼아 한국에서 생활하던 나에게는 매일 찾아오는 두통같은 느낌이었다. [239]

그러나 특정 전공에 별 관심도 없이 서열이 높은 대학교의 아무 학과에나 들어가서 4년 동안 돈 들여가며 억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트자갈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한 구소련의 사회가 개인적인 교분관계와 혈연, 학연 관계로 묶여 있었듯이, ‘진지한 근대’로 생각하던 한국 사회도 학벌이라는 커다란 몇 개의 패거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누구와 보드카를 마시는가, 누구와 목욕탕에 다니는가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던 소련과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한국에서도 4년 동안 선후배와 부지런히 잔을 기울이면서 ‘튼튼한 인연’을 쌓는 것이 러시아어 회화 같은 부차적인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251]

바트자갈이 아주 놀란 것은, 자신과 달리 한국어를 완벽하게 하는 조선족들도 자신과 똑같은 수준의 차별을 받는 일이었다. 그가 비로소 깨달은 것은 한국의 민족 개념이 몽골과 달리 국가와 국적, 경제력과 같은 요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핏줄이 한국계통이라 해도 국적이 다르고 이렇다 할 만한 재력이 없는 중국의 조선족은, 적어도 주인과 관리자의 눈에는 한민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가 무조건 ‘밑으로 들어가는’, 자존심과 존엄성을 까맣게 잊어야 할 이 무서운 질서 속에서는 숲 속의 야수들이나 잘 살수 있을 것 같다는 게 바트자갈의 느낌이었다.  [253]

인권을 유린하는 자에게는 민족이란 따로 없다.

배고픈 자가 배부른 자보다 관대하다는 것이 이 세상의 원칙인가 보다. [262]

마음속의 나라 차별, 인간의 내면을 보기 전에 그 소속 국가의 명칭을 보는 우리의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이 그가 사회주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꿈꾸어 온 진정한 자유였던 셈이다. [263]

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는 목사 신부 승려를 많이 봤지만, 인간으로서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이 대목을 몸으로 행하는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다.  [265]

저임금 지대 출신은 인건비 따먹기를 갈망하는 (상대적으로)고임금 지대의 영세 자본가들에게는 임금 착취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법적인 신분마저 박탈당한 이른바 ‘불법 체류자’라면 권리 주장도 못하는 저임금 노동력을 노리고 있는 중소기업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봐도, 주변부의 값싼 노동력과 자연자원이 핵심부와 준주변부의 경제적 성장의 원천이 되는 것은 현재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핵심 법칙이다. 몽골과 같은 위성국가들을 자국 중심의 ‘미니’세계체제에 편입시켜 자원을 약탈한 과거의 소련처럼, 지금의 한국 영세 자본가들이 몽골 노동력을 싸게 부리는 것은 그 핵심 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일일 뿐이다. 경제적 착취를 위주로 하는 세계체제에서 바트자갈이나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몽골 지성인들을 지성인으로, 같은 인간으로 대접할리 만무하다. 준주변부인 한국의 자본가들에게는 그들이 단지 주변부(한국 언론이 잘 쓰는 표현대로 ‘후진국’)의 하나의 값싼 ‘자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트자갈을 포함하여 무수한 ‘불법 노동자’에 대한 멸시를, 과연 노동력 등 주변부 자원의 약탈을 당연시하는 국제 자본주의의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현대적 자본주의란, 경제적 우열이 바로 심성적 태도로 직결되는 단순한 체제가 결코 아니다. 자본 소유관계가 사회의식을 결론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변동 없는 기본 논리지만, 자본주의적 체계체제가 존재해 온 최근 500년 동안 누적되어 굳어져버린 몇 가지 주요 의식 패러다임이 또 하나의 ‘정신적 현실’의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그 패러다임들은 자본즈의 발전과정에서 형성됐지만, 나중에 와서 역으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발전 방향에 상당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사회의식을 지배하는, 이와 같이 고착된 패러다임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이다. [268]

‘검둥이’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경제적 관계를 이미 떠나버린 무조건적 가치 부정과 멸시 일변도의 그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발달과정에서 굳어져 버린, 지금도 경제문제와 무관하게 세계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종주의 패러다임이다. [269]

‘가난뱅이’라는 ‘죄’뿐만 아니라, ‘검둥이’라는, ‘속죄’도 불가능한 ‘원죄’ 때문에 이중삼중의 고통을 받는 동남아시아 계통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인종주의로 인한 각종의 좌절과 수모, 번민의 연속이다. ‘미국인쯤으로 보이는’ 백인에게 말을 계속 걸어보려는 젊은이가 자신에게 말걸기는커녕 옆에 앉지도 않으려는 지하철에서, 몽골사람에게 고함 반말 정도의 ‘비교적 얌전한’ 태도를 보이는 한국인 간부 동료가 자신을 때리기까지 하는 공장에서, 러시아인이나 몽골 사람들이라 해도 꼭 고객을 붙잡으려는 상인이 자신에게 “검둥이 놈아, 너는 꺼져도 돼!” 식으로 손님 취급도 하지 않으려는 시장에서, 어디를 가나 ‘잘못 타고난’  피부는 낙인이다. ‘잘못 타고난’ 피부는 폭력 욕설 멸시를 부를 뿐만 아니라 ‘잘못 태어난 사람’의 경제적인 몸값마저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어릴때부터 영어를 사실상의 제2국어로 익혀온 스리랑카, 필리핀 계통의 지식인의 영어회화 지도는 그 질이나 수준과 무관하게 ‘백인 네이티브’의 과외보다 절반 가까이 싸지 않을 수 없다. [296]

도리와 예의에 통달하면 ‘남’을 ‘우리’의 일원으로 삼을 수 있던 전통시대가 가고, 여권과 피부색이 현대판 노예문서의 역할을 하여 세계에서의 개인의 위치를 결정짓는 침략과 학살의 시대, 근대가 도래했다. 서구의 살인적인 인종적 광기를 문명으로 오인하여 한국에 그대로 수입한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류의 일그러진 ‘유산’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조직에 순응하는 것, 부, 성공, 출세 등과 함께 ‘미국/서구’ ‘백인종’이 무조건 위에 있다는 단선적인 가체체계의 단조로움이 이미 습관이 된 사람들로서는 아주 힘든 일이지만, 다양성만이 가치가 있다는, 다양하고 다른 것들 사이에 우열을 가리면 안 된다는 다원주의를 마음으로 익히는 것이 첩경이 아닌가 한다.  [299]

비싼 옷이나 자동차처럼 환심과 자동차처럼 환심과 선망을 일으키는 하얀 피부, ‘빈티’처럼 거부감을 일으키는 까만 피부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기란 빈부귀천에 너무나 집착하는 사회에서 대단히 힘들다. [300]

‘성공’의 신화를 믿고, ‘성공열’에 불타는, 아직까지 사회과학적인 안목이 일반화되지 못한 사회로서는 ‘실패’로 생각되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빈곤의 탓을 그 ‘민족성’에서 찾으려는 것이 너무나 손쉽고 당연해 보이는 논리다. [300]


● 내가 저자라면

법적으로 진짜 한국인이고 스스로도 “나는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박노자의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노라면 이곳저곳이 쿡쿡 쑤셔온다. 통증이다. 몸의 통증이 아니라 마음의 통증, 머리의 통증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사회의 통증이다. 예전에는 모르고 있었던, 또는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그런 통증들이 새삼스레 툭툭 불거져 나온다. 잊고 있던 통증들은 강한 반발력으로 한꺼번에 튀어나온다. 그래서 책을 읽고 있노라면 아프다.

‘자기가 남을 잡아먹고 싶으면서도, 남에게 잡아먹히기를 겁내며… 다들 의심이 깊은 눈으로 서로서로 쳐다보면서… (노신, 광인일기 중에서)’
박노자가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초상화를 축약하는 말로 선택한 이 한마디는 시종일관 책을 끌어간다. 저자로서는 적절한 선택이고 ‘태어날 때부터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추하고 부끄러운 몸뚱이를 그대로 드러낸 듯한 느낌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연이어 질문을 던진다. 한국에 깡패적 차별이 횡행하는 이유는? 폭력적인 군대에서 배워오는 것은? 사회적 폭력이 일반화 되어 있는 이유는? 종교가 배타주의에 젖어 있는 이유는? 교수가 되려면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는 스스로 질문에 답한다. 아니 스스로 답하는 게 아니라 그 답변을 ‘한국인’들에게 들려준다.
그 답변에는 때로는 한숨이 섞여 있고 때로는 울분이 덮여 있다. 그것은 제도적 사회적 폭력에 대한 한숨이고 울분이다. 저자가 파헤치고 헤집어 놓는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문제의 표피만을 들추어 놓는 게 아니라 몸속의 깊은 근원에 숨겨져 있던 문제들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단단히 박혀 있어 스스로도 그런 것들이 있었는지 몰랐던 것 들이다. 한국인으로 한국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당연시 되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단번에 문제점으로 바뀌어 튀어 나온다. 전근대적인 우상숭배, 패거리 문화, 힘과 계급에의 맹종, 경제적 약자에 대한 멸시, 강요된 민족주의, 일상화 된 폭력문화… 저자가 툭툭 던져놓는 말들은 헛헛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다. “선배가 시킨 대로 ‘미국 침략사’를 달달 외우는 것보다 선배가 강권하는 술을 한 번이라도 뿌리치는 게 훨씬 더 진보적인 행동” 이라는 지적 등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 들이다.
저자는 쉴 새 없이 문제들을 끄집어내고 날카로운 해부와 함께 처방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처방은 ‘인권의 보편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할 수 있는 상식과 윤리, 부당한(한국인들에겐 부당하게 느껴지지 않고 당연시되는) 사회적 억압에 맞서는 사회구성원들의 인식,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사회 구조는 그러한 의식의 소유자들과 행동가들에게 ‘반란자’나 ‘불만세력’ 또는 ‘좌파’라는 이념적 방향성까지 덮어씌우고 있다. 저자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외친 메아리에 대답이 돌아오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저자는 책의 첫 페이지에 ‘아직도 감옥에 있는 모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고 적었다. 흔치 않은 경우이고 그의 사상성과 사고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다. 진보주의 역사학자라는 저자의 ‘명함’이 말해주듯 저자의 시각은 여일하게 사회개혁적이고 비판적이다. 그의 비판은 한국 사회의 성역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누가 건드리지 말라고 한 적은 없으나, 아무도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고 누구도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한 무의식에 저자는 돋보기를 들이댔다. 그것도 굴절의 각도가 여느 돋보기와는 전혀 다른 돋보기를 들이댔다. 그래서 저자의 한국인, 한국사회 비평은 다른 어느 시각보다 깊은 통찰이 있다. 자유롭고 서로 평등하고 다양성을 서로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그의 제안도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과는 색다르다. 추상적이면서 실질적인 제안은 그가 펼친 비판의 논리위에서 빛을 발한다.

저자가 짚어낸 한국사회의 문제들은 거시적이다. 결국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미시적 문제로 연결되지만 테두리는 사회적 틀을 흔드는 거시적인 것 들이다. 거시적인 틀에서 내려와 개인들의 미시적 틀을 짚어보는 글의 구조는 매끄럽게 흘러내리고 어렵지 않게 공감을 끌어낸다. 그러나 반면에 거시적 틀 이라는 전제에 붙잡혀 개인의 삶을 상세히 다루지 못하는 점도 있다.
처음부터 개개인의 삶에서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사람들은 사회전체를 통찰하는 문제들에 어렵지 않게 공감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이고 자신이 살면서 겪은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삶과 곧바로 연결이 되지 않을 때는 쉽게 잊어버리고 무관심해진다. 삶이라는, 생활이라는 괴물에 항상 쫓겨 다니느라 그리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다.
개개인의 삶이라는 미시적 접근을 토대로 하자는 것은 거시적 통찰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구성원들인 개개인의 삶과 관심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편으로 유용하리라는 것이다. 생활이라는 현실에 밀려다니는 개인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접근은 현실적이고 체감적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동네에서, 공공의 장소에서, 삶의 궤적 속에서 겪어 온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문제들을 저자의 책은 다루지 않고 있다. 개인이라는 아래로부터, 사회라는 위로 훑어 올라가는 접근이 있었다면 책은 더 현실적이고 피부에 찰싹 달라붙는 내용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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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8.09.18 22:03:23 *.47.177.88
저도 한 2~3년 전에 읽고 낯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성급한  면도 있습니다.  병역 거부에 관한 일은 신중히 접근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왜 나는 저항하지 못 할까?" 고민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폭력이 내면화 되어 이것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날선 모습들을 보면 제 살이 베이는 느낌을 받습니다. 전 둔하게 살아야 겠다 다짐을 하곤 합니다. 아마 우리나라에 살다보니 이런 방어기재가 형성된 것 같습니다.
강금실 장관님의 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저항하되 증오하지는 말자"
과연 이렇게 살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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