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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자서전 - 피터 드러커 지음, 이동현 옮김
● 저자에 대하여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교수이며 작가이고 경영 컨설턴트이면서 미래학자이기도 하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의 경영자 잭 웰치가 회장이 되어서 가장 먼저 드러커에게 100년 뒤에도 초우량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묘책을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만큼 피터 드러커는 이론가가 아니라 ‘경영학’을 실천적인 경영지혜로 전달해온 ‘경영의 구루’다. 90세가 넘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한 그는 생전에 ‘영원한 현역’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피터 드러커는 1909년 1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재무성 장관을 지냈고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에서 최초로 의학을 공부한 여성으로 프로이트의 제자였다. 드러커가 5세가 되던 해인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은 드러커가 9세가 되던 해인 1918년 종전이 되지만 당시 인구 6천만명 규모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되고 오스트리아는 소규모 국가로 전락한다.
당시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바젤 같은 상업도시처럼 빈의 재력 있는 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식은 대학에 진학시키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진학할 필요가 없던 그들은 14세쯤에 회계사무소나 가게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러 나갔다. 그러나 드러커의 부친은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드러커의 집안은 관리와 변호사와 의사의 가계였다. 또한 부친은 드러커가 상인으로서의 기지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1927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드러커는 그 해에 독일 함부르크대학 법학부에 입학하고 재학 중 작은 무역회사에서 3개월간 견습생으로 근무했다. 1929년 드러커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이적한다. 재학중 독일의 오래된 어느 머천트 뱅크의 증권 애널리스트로 취업했다. 이 머천트 뱅크는 나중에 미국 월 스트리트의 주식중개업자의 유럽지점이 되었다. 증권 애널리스트로서 드러커의 일은 1929년 가을의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와 더불어 짧게 끝났지만, 드러커는 프랑크푸르트 제일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프랑크푸르트 게네랄 안짜이거’(Frankfurt General Anzeiger)의 금융기자로 채용되었다. 193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드러커는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법학부에 시간강사로 일한다. 1931년에는 국제공법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무렵에는 이미 친한 사이가 되어 있던 국제법 담당의 병약한 노교수 대역으로 법학부 강단에도 섰던 것이다.
1933년 드러커는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가 런던의 보험회사와 은행에 근무했다. 1934년 드러커는 베링턴 아케이드(Barrington Arcade)에서 개최된 일본회화전을 감상했는데, 그것은 드러커가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런던에서 근무하던 중 도리스 슈미트(Doris Schmidt) 여사와 만나 1937년 초 결혼했는데, 드러커 부부는 그후 4명의 자녀와 6명의 손자녀를 두었다.
드러커는 학문적인 일을 원했지만 단순한 학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학문과 실무라는 두 개의 희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영국에서는 불가능한 데 반하여 미국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해 1937년 말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그는 몇 개의 유럽은행과 신탁회사의 주미 이코노미스트로 일하고 있었으며 영국 신문사의 주미 경제 주필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드러커는 1939년 뉴욕교외 브롱크스 빌에 있는 사라 로렌스 여자대학(Sara Lawrence Women College)에서 시간강사 자격으로 1주일에 하루씩 경제학과 통계학을 가르쳤다. 안정적인 생활이 아니었지만 드러커는 교수생활이 즐거워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으로부터도 강의 권유가 왔다.
드러커는 1942년 버몬트에 있는 소규모 대학인 베닝턴대학(Bennington College)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드러커는 주로 철학, 정치, 그리고 종교를 강의하는 한편 자문위원으로서 정부의 일을 맡기도 했다. 드러커는 1949년까지 7년 동안 이 대학에 근무했는데, 그 동안에 자문위원으로서 주로 다룬 문제는 산업과 기업의 문제였으나, 나중에는 금융문제에서부터 조직문제와 경영방침에 관한 문제에까지 확대되었으며, 연구도 이에 집중되었다.
드러커는 1950년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Graduate School of Business, New Youk University)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이후 드러커는 교수로서 그리고 컨설턴트로서 산업과 기업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1943년경 드러커는 이미 명성 높은 자유기고가로 자리를 굳혔다. ‘하퍼즈 매거진(Harpers Magazine)’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었고 (1940년부터 25년 이상에 걸쳐 그 잡지에 가장 많이 기고한 사람은 드러커로서, 매년 짤막한 논문 5, 6편을 게재하였다), 또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여러 편의 논문을 기고했는데, 그 가운데 몇 편은 맥킨지 상(Mckinsey Award)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드러커는 ‘월간 애틀랜틱(The Atlantic Monthly)’ 그리고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와 같은 잡지에도 자주 기고했다. 또한 1975년부터 1995년까지 20년간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에 칼럼을 고정 기고했다. 그 무렵 드러커는 신문 이외에 집필활동도 시작하고 있었다.
드러커가 GM으로부터 GM의 조직을 연구하기 위해 초빙된 것은 1943년이었는데, 이 해에 드러커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가 진정한 의미의 경영학자로서 역량을 발휘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었지만 그것은 나로서는 무척이나 바라던 초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마샬 플랜을 추진하는 과정에 드러커는 마샬 장관의 특별고문(special adviser) 역할을 했다. 드러커는 1947년 민간인 신분으로 마샬 플랜의 지도를 위해 프랑스·영국·이태리·벨기에·서독을 순방했다. 마샬플랜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경제 부흥을 위한 미국의 원조계획으로서, 1947년 6월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 1880∼1959)에 의해 입안되어 1948년부터 1952년까지 4년동안 지속되었다.
1943년 드러커는 처음으로 GM에서 경영컨설팅 활동을 시작한 뒤 여러 회사에 대한 크고 작은 컨설팅을 했고, 1951년에는 GE에 대해서도 컨설팅을 했다. 그 뒤 그는 영국, 유럽, 남미 그리고 아시아 특히 일본을 상대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컨설팅 대상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부기관, 그리고 비영리단체가 포함되었다. 비영리단체에 대한 컨설팅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1990년에는 ‘비영리단체의 경영’을 펴냈다. 현재 드러커는 ‘드러커 비영리 재단’(Peter F. Drucker Foundation for Non Profit Management)‘의 명예 이사장이다.
드러커는 경영학 교수로서 장기간 뛰어난 경력을 쌓았는데, 처음에는 뉴욕 대학의 경영대학원(New York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Business, 1950∼1970)에서, 1971년부터는 지금까지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대학원(Claremont Graduate School)에서 일하고 있다. 1987년 클레어몬트 대학은 경영대학원의 명칭에 드러커의 이름을 붙여 경영대학원의 명칭을 Peter F. Drucker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로 바꾸었다.
드러커는 최고경영자들에 대한 컨설턴트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지난 50여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최우수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드러커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점은 정부의 정책입안가들이나 비영리부문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드러커는 미국, 벨지움, 체코, 일본, 스페인, 스위스, 그리고 영국의 많은 대학들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피터 드러커는 사회, 경제, 정치, 경영의 많은 주제를 다룬 30여 권 이상의 저서를 발표했다. 그의 저서는 2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번역되었고 총판매 부수는 600만 권을 넘어섰다. 2002년에는 미국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고 2005년 11월 11일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많은 내용을 http://www.jklee.com/data2.htm에서 심하게 옮겨 왔음.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 개정판을 내며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다양성에 매료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름대로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가 얼마나 인습에 순종적인지, 또는 얼마나 보수적인지, 아니면 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지 등과는 상관없이, 일단 그가 자신의 일이나 지식, 흥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매력적인 존재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결국 개별적인 존재다. [11]
이 책에 기술한 인물들은 내게 중요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선택됐다. 그들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내게 반사하거나 굴절시켜 보여주었던 방식 때문이었다. [19]
1부, 사라진 제국 아틀란티스
*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 그 창녀에게 기침약을 갖다 줬잖아요.”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다. “너희는 언제나 그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옮기는 끔찍한 성병만 걱정하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나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녀가 젊은 남자에게 감기를 옮기는 일은 예방할 수 있다고.” [42]
그말에 나는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데도 화가 안났어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하지만 할머니”라고 말하곤 했던 것 같다. “물론 화가 났지. 하지만 내가 정부를 두지 않는 남자를 만나려고 했다면 결코 결혼하지 못했을 거야. 그런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거든.” [45]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할머니의 어리석음 때문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라틴 경구에서 말했듯이, 하느님도 바보와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62]
할머니의 영리한 조카들과 손자들, 사위들(물론 상점 점원들도 포함된다)이 그녀가 푼수(사랑스런 푼수)라는 증거로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할머니가 근본적인 가치라고 믿고 실천한 것들이었다. 할머니는 그 믿음을 20세기에 주입시키려고 노력했고, 적어도 자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65]
* 헤매와 게니아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곡 필요한 사람이었지. 다루기 힘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러니까 누군가 겁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에 그건 전부 헤매의 일이 됐지. 글리고 그는 언제나 기대에 부응했어. 그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기꺼이 불쾌한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배짱도 있었으니까.” [96]
하지만 게니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언제나 최고의 인사에게 바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확하게 어떤 조치를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화기를 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마라. 항상 그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라.” 이것이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만약 그것이 잘못됐거나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그 사실을 지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행동보다는 연구에 몰두할 것이다.” [119]
‘게니아의 아이들’ 가운데 한 명과 결혼한 젊은 신문기자가 그녀를 인터뷰하며 사람들이 원칙을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물었다. 그러자 게니아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것이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원칙이란 내게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야.” 이는 절대주의의 세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이단이다. 교육과 심리, 환경, 경제, 정치, 심지어 인종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이상적인 미래나 ‘절대 다수를 위한 선’이라는 망상을 위해 인간이 희생해야 한다는 사상이 판을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괘씸한 이단이더라도 게니아의 신념은 결코 평가절하당할 만한 사상이 아니었다. [146]
* 엘자와 소피
당시 유럽에서 상류가정의 자제들이 자기 손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대단히 유별난 생각이었다. 물론 미술은 상관이 없었다. 자신의 지위를 잘 지키고 있는 한은 말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바느질과 자수, 뜨개질을 배우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요리는 상류사회 여성이 손수 해야 하는 일들에 끼지 못했다. 집주인께서 자기 주방에 발을 자주 들여놓으면 자존심 강한 요리사는 결코 그 집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가정이 당연히 요리사를 두고 있었다. 중하류계급의 정의는 하인을 둘 이상 둘 수 없는 가정이었다. [168]
하지만 신사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손으로 벌어먹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 있어서 누구도 청나라의 고위관료들을 흉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도 손을 사용하는 것을 비천한 일로 봤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손톱을 거의 30센티미터나 길렀다. 하지만 19세기 유럽도 청나라의 관료들에 근접하는 수준이었다. 할아버지는 189년에 돌아가셨으며, 당시 우리 어머니는 열네 살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나며두신 양복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양복에는 시계를 넣어두는 조끼 주머니를 제외하고는 단 하나의 주머니도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너희 할아버지는 신사였단다. 그리고 20년 전 신사들은 뒤에 항상 하인들이 따라다녔지. 필요한 물건은 전부 하인이 들고 다녔어. 신사는 자신의 손을 사용하지 않았거든.” [169]
미스 소피는 결코 야단을 치지 않았으며 비평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 질렸을 때는 이단아의 옆에 앉아서 그 녀석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엄청나게 크게 쌓아올린 철회색 머리채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머리 꼭대기를 향해 한 길 한 길 땋아 올려서 수백만 개의 머리핀(나는 그렇게 생각했다)으로 무질서하게 고정된 것이었다. 그녀가 머리를 가로젓기 시작하자 머리핀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머리채를 더 심하게 흔들면 머리핀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결국 머리채가 풀려서 폭포수처럼 밑으로 떨어지면 아이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지경이 됐다. 마침내 소피도 함께 웃고는 모두가 머리핀을 줍는데 열중했다. 머리채는 다시 원위치로 올라가고 머리핀들은 전과 다름없이 아무렇게나 꽂혔다. 그런 후에는 이단아도 다시 작업을 시작해서는 보통은 우수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적어도 이전 것보다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냈다. [175]
그렇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스스로 수업을 끔찍하고 지루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그 정도로 능력이 떨어져서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고, 학생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경우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나는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인 선생들과 그들 사이의 엄청난 차이가, 그들이 가르친 것이 로마사 같은 과목보다 훨씬 흥미로워서 생긴 차이는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적 수준은 그들이 가르쳤던 과목이 오히려 더 낮았다. 하지만 미스 엘자는 결코 그것을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도 흥미롭게 끌어갈 수 있었다. 미스 소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망치로 못을 똑바로 박는 방법을 열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학생인 내가 결코 그 방법을 습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81]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은 언제나 좋은 선생을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류급 선생들에게도 과도하게 높은 점수를 줄지 모른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선생 가운데 어떤 선생은 수업 중에 재미있는 농담만 하는데, 그들은 한낱 재담가에 불과해서 학생들을 웃기기나 한다. 다른 선생은 학자로서 높은 명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을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선생이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인기는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주는 영향력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하지만 학생들이 선생을 가리켜 “우리는 그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어도 된다. 학생들은 분명히 좋은 선생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187]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다른 종류의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쩌면 학습을 하게 만드는 선생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선생’이 됨으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르치는 데 타고난 재능을 가졌기 때문에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들은 학생들을 학습하도록 이끄는 방법을 사용해 가르침을 전수한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시절 미스 엘자가 썼던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개개의 학생이 가지 장점을 찾아내고 그들의 장점을 개발하기 위한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설정한다. 이 작업을 끝낸 뒤에 비로소 그들은 학생들의 단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 단점은 학생들이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는 데 제한사항으로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드은 학생들의 성취에 항상 피드백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이 자제력을 발휘하고 스스로를 이끌어가게 한다.
이런 선생들은 비난보다는 칭찬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매우 드물게 칭찬하기 때문에 칭찬이 학생의 동기를 유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거나 학생이 스스로 느껴야만 하는 성취감과 만족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들은 효과적 학습을 계획할 뿐, ‘가르치지’않는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떤 학생을 만나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비록 그들이 많은 학생들을 맡더라도 결국은 학생 개개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방법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193]
진정한 선생과 진정한 교육자에게는 게으르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멍청한 학생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선생이 잘했거나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201]
* 프로이트
물론 당시에도 유대인들을 비롯해서 돈을 추구하는 의사들은 많이 있었다. 당시 이런 이들은 ‘칼 쓰는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의사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할 경우, 예를 들어 피부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나 위장장애가 있는 환자들에게 이런 ‘칼 쓰는 사람’들을 소개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칼 쓰는 사람’이라는 말에는 경멸감이 담겨 있었다. 아주 악명 높은 ‘칼 쓰는 사람’조차도 병원의 원장이나 대학 임상학과의 부서장이 되어 빈곤한 환자들을 돌보곤 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탐욕 때문에 바라는 것 없이 베푼다는 치료사로서의 전통적 윤리를 어긴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윤리를 경멸한 프로이트는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중요시 되는 치료사라는 유대인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의학을 ‘장사’로 만들었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옳을 수도 있다며 동조하는 의사들이 생겨났다. 적어도 감정이나 정신장애에 대해서는 상당한 진료비를 요구하는 것이 치료효과가 있을 수 있고, 대가 없는 치료는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211]
하지만 프로이트는 의사가 동정심(실제로는 환자에 대한 인간적 호기심)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가 환자를 인간적으로 대하면 환자는 의사에게 의존하게 되고, 그러면 회복과 치료가 더뎌질 수밖에 없으므로 의사는 고통을 받는 환자를 형제가 아닌 사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사를 치료사에서 기계공으로 강등시키는 것과 같았다. 빈의 모든 유대인 의사들은 물론, 유대인이 아닌 의사들에게 이는 의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에 대한 정며 s부정이자 자신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자부심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시믹를 한층 더 불편하게 만든 것은,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가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거이다. 적어도 정신분석학자에 관해서는 말이다. [213]
프로이트의 저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가 성적불안, 성적 불만, 성기능 장애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19세기 말 빈(실제로는 19세기 말의 유럽)의 다른 모든 기록에서 강조됐던 한 가지 신경증이 빠져있다. 바로 ‘금전 신경증’이다. 프로이트 시대 빈에서 억압의 대상이 됐던 것은 성이 아니라 돈이었다. 돈이 이미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상태였지만, 동시에 언급돼서는 안될 대상이기도 했다. [224]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적인 합리성과 비합리적인 내면의 경험이라는 두 세계를 하나의 종합이론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다. 그것은 계몽시대가 낳은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프로이트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인인 프로이트를 한 개체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던 것이다. [230]
* 트라운 트라우네크
네 아버지나 헤메 슈바르츠발트처럼 나이든 사람은 여전히 자유주의자였지. 하지만 아직 20대 전후의 젊은 세대들은 자유주의가 다음에 벌어질 전쟁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에 의지하기로 했지. 그 힘이 조직과 헌신, 그리고 대중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그게 바로 사회주의였지, [262]
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피해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우리의 희망을 파괴횃다는 게 아니야. 그건 전쟁이 유럽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는 거야. 전쟁으로 한 세대의 지배계층이 사라져 버렸어. [265]
사회주의는 1914년8월의 총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 사회주의 대중들은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포기하고, 그 대신 열광적으로 민족주의를 수용하면서 동지들 간의 상장인 전쟁을 택했던 것이다. 그것은 신학으로서 마르크시즘의 끝이 아니었다 신학은 신앙보다 더 질겼다. 그것은 또한 정치세력으로서 사회주의자들의 끝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이상으로서 사회주의의 종말이었다. 비록 영원히 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하나의 세대 전체에 관한 한 말이다. [268]
2부, 명멸하는 시대의 사람들
* 폴라니 가
그들은 19세기를 극복하려 했다. 자유를 추구하되 부르주아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번영을 이루되 경제에 종속되지 않는, 공동체를 지향하되 마르크스주의의 집산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추구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다섯 형제는 각자 독자적인 길을 걸었지만 결국 똑같은 목표를 추구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똑같은 성배를 찾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길을 나선 원탁의 기사를 떠올렸다. [286]
그러나 카를 자신은 크게 절망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선사학과 문확인류학은 존속 가능한 대안,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뛰어넘는 좋은 사회에 대한 탐구에 뒤따르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가 경제사에서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해답이었다. 하지만 그는 점점 더 수수께끼 같은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 선사시대로, 원시경제로, 고전고대와 고전기 이전의 고대로 파고들면 들수록 시장이 없는 좋은 사회는 더욱 더 찾기 어려워졌다. [305]
그는 노예무역이 오랫동안 알려져 왔던 것처럼 자유를 사랑하고 화목하게 사는 흑인 종족사회에 사악한 외부인(동양의 아랍인, 서양의 백인)이 우격다짐으로 강요한 일이 아님을 발견했다. 실제로는 흑인 왕과 추장들이 노예상인을 불러들여 노예투매를 조직하고 지휘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그 이유 가운데 일부는 자기 부족이나 왕국 외부의 경쟁자나 적을 파멸시키거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고, 또 다른 일부는 자기 부족에 대한 통치권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총 같은 물건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호혜와 재분배를 기초로 공동체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였다. [306]
그러나 그들이 특별한 이유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품었던 이상과 실패 때문이었다. 폴라니 가의 사람들은 각자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그들은 모두 사회의 구원에 의한 구원을 믿었다. 하지만 그 후에 사회에 대해 단념하고 절망했다. [309]
* 크레머
내가 정치적 이단자로서의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 진정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 크레머는 그 누구보다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내 관심사는 그의 관심사와 같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나 자신을 알게 된 것이었다. 나 역시 그에게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331]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 [339]
* 헨슈와 셰퍼
나치의 대량학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에 관한 책에서 독일계 미국인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함’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이는 아주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악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악행을 하는 사람이 평범할 뿐이다. 아렌트는 스스로 ‘위대한 죄인’이라는 낭만적인 환상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세상에는 수많은 이아고(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나오는 악한), 엄청난 죄를 짓는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약간의 맥베스 부인(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여주인공으로 권력욕이 강한 여인)이 있다. 악은 극악무도하고 사람은 평범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악은 헨슈나 셰퍼같은 사람을 통해 작용한다. [363]
* 브레일스포드
노엘 브레일스포드는 절대로 권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양심이었다. 그는 딱 한 번 하원의원에 입후보한 적이 있었지만 완전하게 패배했다. 그래서 오히려 구제될 수 있었다. 정치가가 됐다면 그는 6개월도 안 돼 파멸했을 것이다. 항상 그 시대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는 ‘체제 내 인물’이었지만 원칙적으로는 물론 기질적으로도 반대자였다. 그는 영국의 마지막 ‘반대자’였으며, 그 때문에 중요한 사람이 됐다.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그가 무엇을 대표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367]
브레일스포드 사후에 체코인들은 공산주의를 개혁하려던 그들의 노력을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375]
찰스 디킨스의 작품 가운데 가장 강하고 어두운 소설인 ‘어려운 시절(1854)’의 주인공이자 반대자인스티븐 블랙풀은 자신이 양심이 권력과 야합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의심받고 추방당해 파멸에 이른다. 그의 죽음조차도 실패였다. 그가 죽었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아무런 동요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디킨스의 19세기형 반대자는 순교자조차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상가였을 뿐이다.
20세기 현실의 반대자인 노엘 브레일스포드는 효과를 위해 자신의 양심을 권력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396]
* 프리트베르크
“소매에는 오직 두 가지 원칙만 있네. 첫 번째 원칙은 ‘2%에누리에 안 넘오오는 고객은 없다’이고 두 번째 원칙은 ‘진열해 놓지 못한 상품은 팔 수 없다’는 거지. 나머지는 모두 노력이야.” 또는 “어리석은 고객은 없어 단지 상인이 게으른 거지. 고객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해서는 안 돼. 고객을 재교육 시키려고 해서도 안 대. 그건 상인이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고객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 만일 고객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 같다면, 밖으로 나가 고객의 입장에서 상점과 상품을 살펴보는 거야. 그러면 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단지 그들의 현실이 상인의 현실과 다를 뿐인 거야.” [424]
메뚜기처럼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예를 들면 스타킹에서 단추로, 또는 한 실험에서 다른 실험으로) 옮겨 다니기만 할 뿐 일반화나 개념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상인만큼이나 많이 눈에 띈다. 하지만 나는 좋은 예술가나 좋은 과학자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좋은 상인의 마음은 헨리 아저씨의 마음이 움직이는 식으로 가장 분명하고 가장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일반화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428]
“바로 그 점 때문에 부탁드리지 않은 겁니다. 전 다른 사람이 하는 방식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438]
“당신들이 그 채권을 사려는 이유는 단 하나, 확실한 이익을 얻기 위해서죠. 난 내가 그 회사를 위해 기여하고 뭔가 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투자하지 않소. 머리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은 오래전에 버렸지요.” [443]
“하지만 저는 은행가가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445]
스탈린, 히틀러,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세상, 1930년대의 세상에서 프리트베르크와 헨리 아저씨, 그리고 파르붐 같은 사람들의 문명(매매와 거래의 문명)은 아마존 인디언들처럼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모르는 석기시대 문명처럼 생각됐다. [446]
3부, 순수의 절정기
* 헨리 루스
좋은 편집자는 관대하지 않다. 그들은 동료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은 ‘신문이 해야 할 일’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위대한 편집자는 말할 것도 없고 좋은 편집자는 인정사정 없는 지독한 독재자다. 그는 모든 기사가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정확하게 부합할 때까지 쓰고 또 쓰고 또 다듬는다. 노엘 브레일스포드의 말에 의하면 ‘맨체스터 가디언’의 스콧은 신문에 실릴 원고를 한 줄도 빠짐없이 읽고 다시 썼다. 뿐만 아니라 강아지를 찾는다는 사소한 광고를 포함해 모든 광고를 읽고 문법과 구두점, 표현법과 분위기까지 고쳐 썼다고 한다. [471]
루스는 타임, 라이프, 포춘에 능력있는 사람들을 무척 많이 고용했다. 그러나 일단 직원이 되고 나면 대부분이 일생동안, 심지어는 회사를 떠나고 나서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돈을 많이 주고 호사를 시킨 루스의 친절이 그들을 망쳐버린 것이다. 과연 내게 그런 것을 버틸 만한 꿋꿋함과 성숙함이 있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475]
20세기 초반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잡지로 만든 호레이스 로리머는, 잡지수입은 광고에서 나오며 구독은 기본적으로 광고수입을 얻기 위한 판촉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그의 원칙에 이르지 못했으며 1930년대 말이 돼서야 광고수입이 부수입으로 붙어서 상당한 이익을 거두었다. 로리머의 원칙은 후에 미국의 출판업자와 미국 잡지 투자자 사이에서 하나의 신조가 됐다.
그러나 이는 아주 위험한 헛소리다. 구독에서(그리고 가판에서) 수지가 맞지 않는 잡지는 소멸하게 마련이다. 돈을 들여 구독자를 늘릴 수도 있지만,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나 ‘룩’ ‘라이프’는 모두 발행부수가 최고일 때 폐간됐다. 편집자들은 늘 왜 금융기관이나 광고업체들이 자신들의 훌륭한 ‘편집의 성공’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그러나 잡지가 구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특별 사은행사나 경품, 끼워팔기 등의 명목으로 구독자에게 받을 것 이상을 지출한다면 그것은 편집의 성공이 아니다. [495]
* 풀러와 맥루안
맥루안에게 기술이란 인간의 자기 완성이며, 인간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시켜 완성해 가는 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동물이 자연적인 진화를 통해 특정 기관을 새롭게 발달시켜 다른 동물이 되는 것처럼, 인간은 새로운 도구를 개발해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다른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508]
다시 말해 기술은 인문주의자와 과학기술자 모두가 갖고 있던 전통적인 생각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기술은 생산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정체성을 정의하거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정의했다. [520]
맥루안의 가장 중요한 통찰력은 “미디어는 메시지다”가 아니라, 기술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확장’이라고 본 것이다. 기술은 ‘인간의 주인’은 아니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킨 바로 그만큼 인간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을 변화시켰다. [524]
버키 풀러와 마셜 맥루안은 내게 한 가지 목표에 정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례로 보여 준 사람들이다. 한가지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어떤 것을 이룰 수 있다. 나를 포함해 나머지 사람들은 좀 더 다양한 재미를 즐기기는 하겠지만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 하지만 풀러나 맥루안 같은 사람은 사명을 수행한다. 어떤 일이 달성될 때마다 나는 그것이 사명감을 갖고 한 가지에 정진하는 사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버키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도 없이 황무지에서 40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비전에 헌신했다. 맥루안은 비전을 찾는데 25년을 소비해서 마침내 비전이 그를 붙잡았다. 그 역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시대가 왔을 때 영향을 주었다. [526]
* 앨프레드 슬론
슬론은 내게 말했다. “우리는 대학교육을 받은 근로자들이 필요합니다. 산업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에 정식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곳에도 발붙일 수가 없게 될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복한 부모를 두지 못한 젊은이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538]
드레이스타트를 뛰어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미시오.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이라고 하세요.” 노동조합에서 제정한 약정에 의거해서 새로운 고용인은 90일 동안 견습기간을 거쳐야 했다. 그 기간 동안 특별한 이유로 인해 하고당하지 않는다면 90일 이후에 바로 정규직으로 고용됐다. 1940년대 중반까지 캐딜락은 적어도 8000명에 이르는 고용인들이 일하는 거대한 회사였다. 하지만 캐딜라에 있는 현장주임은 드레이스타트의 승낙이 있는 경우가 아니며 그 누구도 새로운 고용인을 거부할 수 없었다.
현장주임들은 그에게 와서 하소연 하곤 했다. “드레이스타트씨, 그 사람은 우리의 생산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면 드레이스타트는 이렇게 묻곤 했다. “그가 공구를 어떻게 사용하던가? 또 그의 동료들은 어떻게 다루고 있지? 그리고 자네는?”
“공구는 괜찮게 다루는 편이에요. 하지만 자기일을 해나지 못하는 게 문제에요.”
“우리가 사람을 뽑을 때는 90일 동안만 일을 시키려고 뽑은 게 아니라네. 우리는 앞으로 30년 동안 일을 시키려고 그들을 고용한 것일세. 앞으로 30년이란 기간 동안 그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 연장과 직장동료들에 대해 존중하는 자세를 갖게 된다면 그느 자신의 책임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수준이 될걸세.” [557]
드레이스타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그들 인생에서 처음으로 괜찮은 월급을 받으며 쾌적한 작업환경에서 일하고 자기들의 권리라는 것도 일부 갖게 됐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존엄성과 자부심이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한 번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거나 모욕당하지 않도록 그들을 구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여성 근로자들을 내보내야 할 시기가 되자 많은 여자들이 자살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닉 드레이스타트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은 채 눈물을 머금고 자기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신이여, 저를 용서하소서. 저는 저 불쌍한 영혼들을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561]
전문가란 자신의 관심사와 신념과 사생활을 공적인 업무와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을 뜻했다. 슬론에게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개인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전문적으로 주의해야 할 대상이 됐다. [602]
“그렇다면 책임에 대해 말하지 맙시다. 당신은 일개 대기업의 고위관리직에 있으니 제1법칙을 알고 있겠죠. 권위와 책임은 반드시 일치해야 하고, 서로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권위를 원하지도, 그것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면, 책임에 대해서는 말하지 맙시다. 또한 당신이 책임을 원하지도 않고 책임질 이유가 없다면 권위에 대해서 논하지 맙시다.” [605]
* 그 밖의 사람들
이민국의 아일랜드계 사무관이 보여주는 것처럼 대공황 속의 미국은 그리 약삭빠르지도 않았고 치밀하지도 못했다. 심하게 독선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시샘은 없었다. 어떤 사람의 성공은 결국 모두의 성공이었고, 가난이라는 공통된 적에 대한 반격이었다. [612]
대공황에 대응하는 미국인의 방식은 자연재해를 극복할 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지진이나 홍수, 태풍이 지나간 뒤에 그렇듯이, 공동체는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각자가 상대방의 구원자가 됐다. 1930년대 미국인들은 대공황을 마치 자연재해를 회상한 듯 이야기 했다. 그럴 때마다 장황한 개인적 사연이 등장하는데 보통“내가 어떤 식으로 극복했냐 하면” 또는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냐 하면”으로 시작하지만, 긴 이야기의 끝은 결국 이랬다. “당신도 봤지? 내가 그런 고통에서 벗어난 것처럼 당신도 할 수 있어” [621]
프스크 대학의 현명한 흑인사회학자인 모데카이 존슨 박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는 두 개의 도가니가 끓어 넘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주 아주 천천히 끓고 있죠. 하지만 그 도가니 속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3세대가 지난 후에는 앵글로색슨 족으로 변합니다. 다른 하나는 매우 빨리 끓어서 무엇이든 그 속에 들어가면,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는 것 가운데 상당수가 흰색을 띠고 있는데고 불구하고 불과 아홉 달 뒤에는 흑인과 흑백혼혈이 되어 나옵니다” [638]
백인 농부들은 은행에서 돈을 융자받을 수 있게 되자 곧바로 일하지 않을 때도 먹여 살려야 할 필요가 없는 기계를 도입했다. 1879년부터는 이미 트랙터나 채면기로 목화를 수확했던 것이다. 흑인 소작농을 밀어낸 것은 바로 풍요의 경제학 이었다. 흑인이 구시대 남부에 대해 향수를 품게 된 것은 한 세대가 지나 최근에야 발생하기 시작한 현상이다. [643]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책이며, 따라서 나 자신을 위한 책이다.’라는 저자의 말은 책을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적확한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다양성에 매료되었고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저자가 사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매력적인 존재이며 개별적인 존재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는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한 것들이 들어있다. 그것은 사람이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가 그만큼 매력적이며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책은 사람의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다. 역사에 하나의 족적을 남길 정도의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까닭에 장삼이사(張三李四)에 속하는 우리들과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들 주변 누구의 것이든 사람의 이야기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사람의 삶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시이며, 한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보다 극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저자와 같은 통찰력으로 활자를 이용해 풀어낸다면 개개인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파노라마 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은 사람의 이야기만큼이나 읽을수록 매력적이다. 책을 읽으면 한편의 시대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드러커가 태어나 자라는 궤적을 따라가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영화의 중요한 부분에 등장하는 비중있는 배역들과 같다. 그 배역들은 영화 속에서처럼 중요한 이야기와 재미를 던져주고는 자신의 차례가 끝나면 사라져 간다. 한사람의 배역이 등장하고 사라질 때마다 저자인 드러커는 한 단계씩 변화하고 성장해간다.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도 책의 매력이다. 할머니부터 시작해 앨프레드 슬론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은 마치 만화 같은 독특한 캐릭터를 지니면서 자신의 길도 그렇게 만들어 갔다. 그것은 또한 단순한 한 사람의 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 간 길이기도 했다. 대공황 시기 속의 사람들은 진정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역사 속에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 속 비중의 크기는 차이가 있지만 책 속의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열어 온 사람들 이었다.
그렇기에 책은 인간과 역사를 보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준다. 책을 쓴 저자는 책에 기술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중요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중요한 사람들이다. 책 속의 그들이 경영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저자에게만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책을 쓴 저자나 책을 읽는 독자나 같은 시대를 살며 같은 것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학문적, 사회적 입지가 남다른 저자를 단순히 책을 읽는 독자들과 같은 반열에 놓을 수는 없겠지만, 개개인의 삶이란 문제로 들어가면 어차피 저자와 독자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은 개별적인 존재이며 삶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와 저자인 드러커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투사해 보곤 한다. 그 투사의 결과는 개개인 따라 다르겠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과 역사를 보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 이라는 책의 제목은 양면의 날을 가지고 있다. 자서전이라는 표현이 아주 좋은 제목인 것 같으면서도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의 원제목처럼 ‘이상한 관찰자’라는 표현을 쓴다면 책의 내용에 충실한 제목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케팅이라는 측면에서는 저자의 이름을 앞세운 ‘자서전’이라는 표현이 더 나은 선택으로 보인다. 결국 독자를 위한 충실한 안내인가, 아니면 독자들의 접근을 쉽게 하면서 마케팅적인 면을 고려하는가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래서 책은 쉽게 접근이 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것을 자서전이라고 해도 좋은가 하는 생각이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많은 매력적인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 속에는 그만큼 매력적인 문구와 내용들이 채워져 있다. 많은 내용을 마음에 담아 두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드러커의 한마디 말이 가장 가슴에 남는다.
“하지만 저는 제가 은행가가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445)
프리트베르크사에서 일하다 미국에 건너 온 드러커에게 파르붐은 자신의 미국 대리인이 되어달라고 한다. 드러커는 거절하고 그 사실을 프리트베르크에게 보고한다. 그 때 프리트베르크가 돈을 모아서 작은 금융기관을 사들여 큰 은행으로 키우면 어떻겠느냐는 말에 드러커가 한 말이다.
짐 콜린스가 ‘좋은 기업을 넘어서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강조했던 고슴도치 컨셉과 겹쳐지는 듯 하다. 책을 읽다 일순 멍해지더니 이내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개인과 사회의 역사는 그런 것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빠르게 흘러가고 사람은 역사 속에서 여전히 망설이고 혼란스러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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