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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6일 11시 54분 등록
 피터드러커 자서전/ 피터 드러커/ 이동현 옮김/ 한국경제신문


1. 저자에 대하여

현대 경영학의 구루라고 일컬어지는 작가를 난 경영학자로만 알고 있었다. 헌데 이 책을 읽고 저자는 단순한 경영학자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경영학에 기반을 둔 ‘인간학자’란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 다양성과 다원성을 가지며,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미 50여 년 전에 나온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내 모든 책 속에 내재돼 있는 핵심은 바로 이런 신념이다.”[12]

드러커가 인간사회의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전문성을 높여갈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저자의 지적 호기심이 원천이겠지만, 그의 경력도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는 은행, 보험회사, 증권회사에서 일을 했고, 신문사의 통신원, 경영컨설턴트, 교수로 일하기도 했다. 다양한 직업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배움을 얻은 것도 그의 지적 스팩트럼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대학에서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전반, 신학과 철학에서 문학과 역사는 물론 행정학과 경영, 경제, 통계학에 이르는 열댓 가지 과목을 가르쳤다. 가르침으로써 더 많이 배울 수 있지 않았겠나. 이렇게 많은 과목을 가르칠 수 있었다는 게 요즘처럼 전공이 세분화, 전문화 된 대학을 생각하면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다. 20세기 중반에나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지적 역량이 부족했다면 가능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단한 천재임에 틀림없다.

저자가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경영학자로 또는‘인간학자’로 성공적인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은 저자의 뛰어난 문필력이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글쓰는 데 자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고 한다. 복잡하고 난해할 수 있는 경영학 관련 내용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저자의 타고난 재능과 어린 나이에 ‘엘자와 소피’처럼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드러커가 저술활동을 시작한 1940년대는 집중화와 단일화, 획일화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대에 그는 탈집중화, 분권화, 상이성과 다양성 등 세상의 조류와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펼쳐 나갔다. 당시로선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비영리조직이나 공익단체인 '제3섹터'의 중요성과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60여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그가 주장했던 대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가 세상의 흐름을 예측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중심 역할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대단한 일 아닌가.

그는 자신의 저서들에서 조직설계와 분권화, 다양성 등 추상적인 개념을 많이 다루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들은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에게서 발췌했고, 실제 인물을 자기 주장에 대한 사례와 증명자료로 삼았다. 그는 언제나 개념보다는 인간에 더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책이며, 따라서 나 자신을 위해 쓴 책"이라고 말한다.

이번 달에는 드러커의 책을 세권이나 읽게 된다. 기대되고 읽고 싶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 출판사 소개 >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하였다. 빈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1933년 런던에 이주하여 경영평론가가 되었다. 1937년 영국 신문사의 재미통신원으로 도미하여 학자 겸 경영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사라로렌스 대학, 베닝턴 대학, 뉴욕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편 1942년에 집필한 『산업인의 미래The Future of Industrial Man』(독일에서는 『산업사회의 미래』로 번역)에서 20세기 사회의 발전 과정을 연구했다. 이 저서의 출간으로 드러커는 1943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던 제너럴모터스에서 2년간 경제 분석가로 일하게 되었다. 1946년 이 기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해 『법인의 개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이로써 학문적 분과로서의 경영에 대한 초석을 마련했다. 그 후 드러커는 제너럴일렉트릭, 코카콜라, 시티코프, IBM, 인텔 등의 대기업과 수많은 중소기업, 정부 부처, 국내외의 비영리 단체를 위해 컨설턴트로서 활동했다. 1950년과 1971년 사이에는 뉴욕 대학 비즈니스 스쿨의 경영학 교수를 역임했고, 1969년에 이 대학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총장상을 받았다. 1971년부터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경영대학원에서 사회학과 경영학을 가르쳤고, 미국과 벨기에, 일본, 스위스, 스페인, 체코 등지의 대학에서 다양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과 1985년 사이에는 클레어몬트 대학의 포모나 칼리지에서 극동 지역 예술을 가르쳤다.

피터 드러커는 사회, 경제, 정치, 경영의 모든 주제를 다룬 뛰어난 저술가로서 30여 권 이상의 저서를 발표했다. 그의 저서는 2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번역되었고 총판매 부수는 600만 권을 넘어섰다. 2002년에는 미국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고 2005년 11월 11일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현대를 대량생산원리에 입각한 고도산업사회로 보고, 그 속에서 기업의 본질과, 이를 바탕으로 한 경영관리의 방법을 전개하였다. 기업은 영리심의 존재와 관계없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이윤은 손실회피·생산액증대를 위한 2대 지도원리로써 미래의 기업이 존속하기 위한 필요한 비용에 불과하다는 그의 이론은 이윤이나 비용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를 보여 주었다. 제도파적 기업관(制度派的企業觀)에서 분권관리(分權管理)나 직장자치를 전개하는 등 미국에서는 크게 체계화된 경영관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평론가들은 드러커의 수많은 저서와 기사를 4가지 범주로 분류하는데 『경제적 인간의 최후 The End of Economic Man』(1939), 『새로운 사회 The New Society』(1950) 등과 같은 초기 작품은 산업사회의 특성을 논술한 것이다. 제2기의 작품은 『법인의 개념 The Concept of the Corporation』(1946), 『경영의 실제 The Practice of Management』(1954) 등으로 현대의 기업경영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설명한 것이다. 후기 작품들인 제3기 작품은 『미국의 향후 20년 America's Next Twenty Years』(1957), 『단절의 시대 The Age of Discontimuity』(1969), 『기술·경영·사회 Technology, Management and Society』(1970) 등으로서 기술변화의 발전 등으로 인한 미래의 영향에 대해 예측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실제적인 회사경영 문제를 다룬 『험난한 시대의 경영 Managing in Turbulent Times』(1980)과 『변화하는 경영진의 세계 The Changing World of the Executive』(1982, 수필 모음집) 등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나는 인간이 다양성과 다원성을 가지며,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미 50여 년 전에 나온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내 모든 책 속에 내재돼 있는 핵심은 바로 이런 신념이다.[12]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책이며, 따라서 나 자신을 위해 쓴 책이다. 물론 나 자신에 관한 내용은 없다. 영국에서 출판된 책의 부제목인 ‘내 생애의 다른 사람들 Other Lives and My Times' 이라는 말에 나의 의도가 잘 나타난다..... 분명 이것이 내 저서들 가운데서 그리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쓴 책임에는 틀림없다.[16]

이 책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이고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사회적 초상화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이런 시도를 통해 나는 어떤 본질과 분위기, 느낌 등을 포착해서 전달하려고 하는데, 그 내용은 현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 될 것이다.(중략)

이런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처음 떠올랐던 것은 케네디 대통력의 재임시기였다. 나는 그 무렵 몇 년 동안에 걸쳐 벌어졌던 사건들이 아직 역사가 되기에는 너무 가까운 시기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들이나 학생들 또는 나보다 더 젊은 친구들이 자료를 구하기가 어렵고 이해하기는 더욱 힘들어서 마치 니네베(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옮긴이)니 아슈르(북이라크의 티그리스 당 서쪽에 있던 고대도시-옮긴이)처럼 멀게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중략)

훌륭한 컬러 사진이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초원의 경험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통계수치로는 인간이 무엇을 보고 무엇에 따라 행동하는지 표현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오직 한편의 ‘사회 초상화’만이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 초상화는 사회를 개인들 속에 반사하기도 하고 개인들을 통해 사회를 굴절시키기도 한다.[17]


이 책에 기술한 인물들은 내게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택됐다. 그들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내게 반사하거나 굴절시켜 보여주었던 방식 때문이었다.[19]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이 좋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한데 합치면, 개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구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20]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역사가 아니며, 그렇다고 ‘나의 시대’의 역사도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자서전이다. 여기서는 주로 내가 살아온 삶의 순서에 따라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결코 ‘나 자신’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에서 내 경험과 삶, 연구성과들은 단지 부속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책은 대단히 주관적인 작품이다. 일급 사진가가 항상 주관적이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다루는 사람이나 사건들은 내게 강한 느낌을 주었으며 여전히 그 영향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로, 기록하고 검토하고 재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과 사건들을 기존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사고유형에 적용하고, 서로 분리된 채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내 시각에 끼워 맞춰야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주변세계와 내면의 세계를 보았다.[21, 22]


1부 사라진 제국 아틀란티스


할머니 - 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준 유쾌한 사람


드러커를 다방면에 박식한 르네상스 지식인으로 키운 사람은 그의 할머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피아노와 음악, 그리고 사회생활에서의 예의를 가르쳤고, 드러커는 할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드러커의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피아니스트였으며, 클라라 슈만의 제자였다. 스승의 요청에 따라 요하네스 브람스를 위하여 피아노를 친 것이 생애 최대의 자랑이었던 드러커의 할머니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얘깃거리를 제공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순박하고 고지식한 드러커의 할머니는 하인, 점원, 창녀까지도 모두 똑같이 대했고 누구나 드러커의 할머니를 좋아했다. 드러커의 할머니는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직관적으로 20세기를 이해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으며,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난 명쾌한 사람이었다.[36]


“하지만 할아버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조금도 안 했지. 할아버지는 저녁식사 때는 늘  집에 돌아왔단다. 나는 그저 멍청한 늙은 여편네에 불과했지만, 남자에게는 위장이 성기나 마찬가지라 사실을 알 정도의 머리는 있었지.”[45]


할머니가 손녀들에게 해주는 약간 불가사의한 충고도 이야깃거리다. “얘들아,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거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란다.”

손녀들 가운데 한 명이 반쯤은 우습고 반쯤은 기분이 상해서 할머니에게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 전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니에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꾸했다. “네가 어떤 종류의 여자인지는 그때 가서 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지.”[51]


운전사가 할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병원으로 모셔다드릴까요? 의사 선생님께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당신은 멍청하고 늙은 여편네를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구려. 하지만 대신 앰뷸런스를 불러주시는 게 좋겠소. 당신 차에 낯선 여자가 타고 있으면 당신의 명예가 손상될지도 모른다오. 세상 사람들은 말이 많거든.” 10분 뒤에 앰뷸런스가 도착했지만 할머니는 관상동맥 출혈과다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69]


헤메와 게니아 - 경영의 귀감으로 삼은 괴짜 부부


헤메와 게니아는 독특한 부부다. 헤메는 심술궂고 고집센 독설가였으나 사물의 핵심을 꿰뜷어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무뚝뚝하고 신랄하다고 여겼으나 그는 옳다고 믿는 일에 온몸을 바쳐 싸우는 용기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관료제적 국가체제를 이상으로 삼은 그는 관리로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 오스트리아 금융재정을 책임지는 재정황제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내 게니아는 여학생의 입학을 거부하는 오스트리아의 대학제도를 타파하고자 직접 학교를 설립한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다. 게니아는 전략을 수립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능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는지 묻지 말고 할 일을 지시하라’는 게니아의 좌우명은 훗날 드러커의 경영이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71]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 다루기 힘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러니까 누군가 겁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 필요하거나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에 그건 전부 헤메의 일이 됐지. 그리고 그는 언제나 기대에 부응했어. 그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기꺼이 불쾌한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배짱도 있었으니까.”[96]


여기서 헤메의 후임자가 오스트리아의(아마 유럽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인 요제프 슘페터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100]


게니아는 학교와 관련된 모든 직책을 포기하고 몇 시간의 대리수업에 대한 강의료 조차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학교를 운영하는 일은 분명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가 학교를 설립한 이유는 그것이 여성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이 달성되자 학교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이 될 수 없었다.[116]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마라. 항상 그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라.” 이것이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만약 그것이 잘못됐거나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그 사실을 지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행동보다는 연구에 몰두할 것이다.”[119]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아마 당신은 컴퓨터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을 겁니다.(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컴퓨터와 관련된 문제를 한두 가지씩 갖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전혀 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그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해 줄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신속하게 움직인다면 그 사람을 채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은 누구누구라는 해군 중령인데, 마레 섬 해군 정비창에 컴퓨터를 설치하는 일을 얼마 전에 끝마쳤죠. 그럼요, 아마 한 시간 뒤면 그가 당신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돼서 정말 기쁩니다.”

이런 방법은 거의 실패를 모른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해도 대화는 다시 이런 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잠깐만요. 당신이 말한 사람은 제 친구가 원하는 인물 같군요....”[122]


“통계치를 다룰 때는 명심해. 절대로 그것을 신뢰하지 마. 그 통계를 집계한 사람이 네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어떤 경우에도 통계수치는 의심해 봐야 해. 내가 직접 경험해 본 일이야. 난 거의 12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수출현황에 대한 통계를 담당하고 있었어.”[140]


엘자와 소피 - 교육의 길을 제시한 노처녀 자매 선생님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는 드러커의 어린 시절 학교 선생님이다. 이들은 자매였지만 자매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상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미스 엘자는 절대적인 권위의 소유자로, 어린이에게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담임으로 취임한 날 아이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우고 학생들의 성격을 파악하는 완벽한 성격의 교사였다.

반면 미스 소피는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기 좋아하고 아이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재주를 지닌, 프뢰벨식 교육을 채용한 교사였다. 미스 소피는 아이들에게 깨달음과 학습을 제공하고 미스 엘자는 아이들에게 기술과 비전을 제공했다. 미스 소피가 교사였다면 미스 엘자는 교육자였던 것이다. 이들은 드러커가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후 수업 방식의 기준을 설정하도록 사례를 제공한 사람들이기도 하다.[157]


“그리고 너는 네 장점 가운데 하나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아니?”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너는 작문에도 능해. 하지만 별로 연습을 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너도 동의하니?” 이때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럼 그것을 목표로 삼자. 일주일에 두 개씩 작문을 해서 제출하렴. 하나는 네가 쓰고 싶은 내용을 마음대로 쓰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주제를 정해 주마.”[160]


사실 지금까지 어떤 과목도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나의 흥미를 끌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생들은 그것을 얼마나 지루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렇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스스로 수업을 끔찍하고 지루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그 정도로 능력이 떨어져서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고, 학생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경우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인 선생들과 그들 사이의 엄청난 차이가, 그들이 가르친 것이 로마사 같은 과목보다 훨씬 흥미로워서 생긴 차이는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적 수준은 그들이 가르쳤던 과목이 오히려 더 낮았다. 하지만 미스 엘자는 결코 그것을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도 흥미롭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미스 소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망치로 못을 똑바로 박는 방법을 열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학생인 내가 결코 그 방법을 습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81]


그러고 나서 슈나벨이 피아노 앞에 앉더니 슈베르트의 안단테를 자신의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했다. 그러자 릴리는 ‘갑자기’ 차이를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깨달음의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미스 소피의 학생들 얼굴에서 봤던 바로 그 미소 말이다. 그 순간 슈나벨은 연주를 멈추고 말했다. “이제는 네가 연주해 봐라.”... “네 귀에도 들리니? 그거 대단하구나. 네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하는 한, 너도 음악을 연주하는 거란다.”

나는 음악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잘 들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내가 언제나 성과를 통해 학습을 해왔으며, 효과가 있거나 성과를 거두는 사람을 찾아 그것을 배우는 것이 내게 알맞은 학습방법이란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실수를 통해서 배운 것이 없었다. 성공만이 내게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아마 그것은 마르틴 부버의 초기 저서였던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다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신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저지르게끔 만드셨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배우려고 하지 마라. 다른 사람이 뭔가를 올바로 했을 때 그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186, 187]


슈나벨의 연습실에서 깨달음의 순간을 가진 이후로 나는 진정으로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을 찾아다녔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관찰하고 그들의 방식을 즐기기 위해 가끔 나는 내 본연의 길에서 잠시 벗어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뛰어난 선생이라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강연장이나 교실에 숨어들어 그들의 수업을 직접 확인하려고 애썼다.... ‘선생 관찰’은 오랫동안 내게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스포츠 관람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다. 스포츠처럼 여기에서도 끊임없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나는 아직도 선생 관찰을 멈추지 않고 있다.[187]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다른 종류의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학생들을 학습하도록 이끄는 방법을 사용해 가르침을 전수한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시절 미스 엘자가 썼던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개개의 학생이 가진 장점을 찾아내고 그들의 장점을 개발하기 위한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설정한다. 이 작업을 꿑낸 뒤에 비로소 그들은 학생들의 단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 단점은 학생들이 자신의 장점을 완벽하게 발휘하는 데 제한사항으로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학생들의 성취에 항상 피드백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이 자제력을 발휘하고 스스로를 이끌어가게 한다.

이런 선생들은 비난보다 칭찬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매우 드물게 칭찬하기 때문에 칭찬이 학생의 동기를 유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거나 학생이 스스로 느껴야만 하는 성취감과 만족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한다.[193, 194]


마사 힐은 미스 엘자가 초등학교 4학년생들에게 적용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녀는 학생들을 며칠 또는 몇 주일 동안 관찰하면서, 학생 각자가 할 수 있는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의 관점에서 그들을 생각했다. 그녀가 각각의 학생에게 적절한 계획을 수립하면 학생이 스스로 그것을 실천했으며, 힐은 진척상황만 감독했다. 그녀는 학생이 이미 잘하고 있는 부분을 더 완벽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도록 강요하고, 또 하고, 또 했다. 그녀는 학생들을 친근하게 대했지만 칭찬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생의 실력이 좋아질 때마다 언제나 그 사실을 확실하게 표현했다.[197]


미스 소피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미스 엘자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미스 소피가 깨달음을 주었다면 미스 엘자는 기술을 제공했다. 미스 소피는 비전을 전달했고, 미스 엘자는 학습을 이끌었다. 미스 소피가 선생이었다면 미스 엘자는 교육자였다.[198]


소크라테스의 시대 이후로 거의 200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가르침과 학습이 ‘인지적’인지 또는 ‘행동적’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그것은 잘못된 논쟁이다. 가르침과 학습은 인지적이며 동시에 행동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 특별한 요소를 더 갖고 있다. 그들은 또한 열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열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교육자는 학생들의 깨달음에 같이 도취됨으로써 열정을 얻는다. 학생의 얼굴에 떠오르는 깨달음의 미소는 어떤 마약이나 약물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교실에 만연된 무시무시하고 학생을 고사시키는 전염병인 교사의 권태감을 치유하는 것이 바로 열정이다(교사의 권태감은 가르침과 학습을 완벽하게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다).[200]


선생의 열정은 자기 자신에게 있고, 교육자의 열정은 학생들의 내면에 존재한다. 하지만 가르침과 학습은 언제나 열정이고, 그 열정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거나 다른 사람의 열정에 자신이 중독되는 것이다.[201]


진정한 선생과 진정한 교육자에게는 게으르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멍청한 학생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선생이 잘했거나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201]


프로이트 - 프로이트에 대한 프로이트적 분석


프로이트는 자기 동정을 혐오하는 아주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 대한 세 가지 허상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그 허상을 믿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문화와 예술에 창의적인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으며, 모두들 그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이 이루어낸 그런 성과를 거부했다. 그는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 인정받기를 갈망했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들을 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다. 이 글에서 드러커는 전통적인 허상에 등장하는 프로이트보다 훨씬 흥미로운 현실의 프로이트를 프로이트적으로 분석하고 있다.[202]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영어권에 사는 사람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거의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이 세 가지 ‘사실’은 모두 완전한 허상이다. 어린 시절 프로이트는 유복했으며, 젊은 시절에 처음 의사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수입이 좋았다. 또 프로이트가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히틀러가 그를 망명 보내기 전까지는 인종차별로 고통을 받은 적도 결코 없었다. 오스트리아 의학사에서 프로이트만큼 일찍 공식인정과 학위를 받은 사람도 드물다. 제다가 그는 오스트리아의 엄격한 기준에 따르면 자격이 되지 않는데도 젊은 나이에 그런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205, 206]


빈 의사들은 모두 의료활동을 하는 중간에 신경증을 겪는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특별한 치료가 없이도 호전됐고, 특히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그런 징후가 아주 급속히 사라지거나 감소했던 것이다. 신경증이 자연스럽게 치유될 확률은 얼마나 될 것이며, 정신분석학자들의 치료결과는 이보다 얼마나 더 나을 것인가? 하지만 이에 대한 모든 자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부석학자들은 이 질문을 논의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리치료 방법을 모두 똑같은 결과를 내거나 전혀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216, 217]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 발을 들인 건 당시 퍼지고 있던 계몽시대의 합리주의(이 시대의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는 다름 아닌 현대의 과학적 의학일 것이다)가 감정변화의 동역학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으면서였다. 하지만 그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즉 과학적인 세계관을 저버리지는 못했다. 프로이트는 죽는 날까지 정신분석학이 엄격히 과학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작용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로, 또 화학 및 전기적 현상으로, 또 물리학의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적인 합리성과 비합리적인 내면의 경험이라는 두 세계를 하나의 종합이론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다. 그것은 계몽시대가 낳은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프로이트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인인 프로이트를 한 개체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던 것이다. 이런 통합으로 정신분석학은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허약해지기도 했다.[230, 231]


프로이트는 분명 자신의 입지가 얼마나 좁은지 알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융의 동양적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 전설을 인류의 경험으로 불러내고, 역경의 괘와 무당, 마법사, 점쟁이의 비현실적 이야기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이전 제자인 오토 라이히의 ‘오르곤 집적함’으로 빠지게 되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조금만 움직이면 또 한 명의 변절자 제자인 알프레트 아들러의 사소한 문제에 빠져든다. [231]


프로이트는 자신이 위태롭지만 세심하게 잡아놨던 종합의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골상학자나 전기막대를 사용하는 최면술사들처럼 신앙요법 치료사의 마법과 다름없는 방법이나, 18세기 극단적 합리주의자가 낳은 아주 무익한 기제를 가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하나의 주장에 치료를 위한 과학적 방법과 우주론 모두를 담아야만 했다.

그 균형상태가 얼마나 위태했던지는 현재 우리가 아는 것과 같다. 그 붕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231, 232]


완공된 건물이 공개되기 전의 준비작업 틀을 프로이트만큼 정교하게 해체한 사상가는 없다. 그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과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물음을 논의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오직 무의식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방법론에 대한 문제, 결과에 대한 정의와 대조군 실험의 문제, 완전히 신비적인 방법을 비롯해 모든 심리요법의 치료성과가 똑같다는(혹은 비슷하다는) 등을 논의하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과학적 이론 및 치료법과 인간의 인성 및 철학이라는 신화를 한데 포함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이중적 특성을 논의하는 순간에 말이다. 그는 이런 질문을 무시함으로써만 통합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빈 의사들을 무시하기 위해 빈 의사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척해야만 했던 것이다.[233]


현실의 프로이트는 전통적인 허상에 등장하는 프로이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사람인 것 같다. 허상보다는 현실에서 더욱 위대한 그는 비극적 영웅이기도 하다. 불편한 모든 질문을 무시해 버림으로써만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세계와 영혼의 암흑세계 사이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프로이트의 이론은 종국에는 무너져버리고 말 약한 이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좀더 매혹적인 이론인 동시에 인간적 감동을 주는 이론이기도 하다.[233]


트라운 트라우네크 -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회주의자의 고백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매혹적인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마리아 뮐러와 하반신 불구의 트라운 트라우네크 백작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사이다. 마리아 뮐러의 목소리에 마음을 뺏겨 존재를 잊고 있던 트라운 백작이 드러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국립도서관에서였다. 국립도서관의 행정담당 부관장이었던 백작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팸플릿’이라는 소책자를 가명으로 쓴 사회주의자였다. 이 장에서는 전쟁이 불러온 동지들의 죽음을 괴로워하고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백작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잃어버린 세대의 잃어버린 꿈에 대한 백작의 쓸쓸한 고백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전쟁의 비극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하게 만든다.[234]


당시에는 견습사원으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대학 공부를 포기한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정규직 사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는 것도 가능했는데, 특히 법학 쪽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나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났다. 사실 전업이든 시간제든 직장을 갖지 않고서는 도저히 하루를 보낼 수 없을 정도로 법학은 공부할 내용이 적었다.[248]


학생들은 강의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학기 중에 시험이나 과제를 제출하는 일도 없었다. 졸업에 필요한 자격은 4학년 때 졸업고사를 통과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졸업시험 몇 달 전부터 졸업고사 전문학원에 다녔다(나도 하루나 이틀 정도 학원에 다녀봤는데 내게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미스 엘자의 학습장이 학원수업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249]


하지만 학문의 세계에서는 학자나 연구자로서 일류가 돼야만 했다. 내게 글쓰기 재능이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과연 내게 연구나 학문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해 학문의 길을 가기 전에 내 능력을 검증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부족한 면이 발견된다면 미련 없이 취업하는 것이다.[252]


나는 그분에게 법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형벌의 이유를 설명하는 문제’라는 것이 삼촌의 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과 열여섯 살의 나이에 범죄의 형벌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에 대한 명쾌한 내용의 책을 써보겠다고 결심했다.(중략)

그래서 나는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법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했다. 내가 사회학자들의 주장을 처음 접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었고 오랫동안 지워지지도 않았다.[253]


그 무렵 나는 논리적 사고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고된 독서를 통해 이들 위대한 사상가들이 엉뚱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불과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만약 수십가지 설명들이 모두 전적으로 다르지만 자명한 사실을 전제로 해서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 뒤에 기초적인 논리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합리화이고 결국 요점을 벗어나게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요점은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형벌은 사회 속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하나의 사실이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사회에 만연된 현실이었다. 진정 설명이 필요한 것은 범죄의 존재였고, 그것은 내 능력의 한계를 크게 초월하는 분야였다.[254]


“피터, 그거 아니? 오스트리아에 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정부를 구성했을 때, 그들이 내게 교육부 장관직을 제안했다는 사실 말이야. 그건 내가 늘 꿈꿔오던 자리였고, 게다가 나는 그 일을 맡을 준비도 되어 있었지. 하지만 나는 그 일을 맡을 수 없었어. 나는 단지 내 어린 시절의 친구들, 그리고 같은 이상을 갖고 있던 동지들의 죽음을 대가로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던 거야. 때때로 나는 쓸모없이 부서진 내 육체와 함께 아직도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심한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기꺼이 생을 마감하고 싶어질 정도니까. 단지 마리아가 아직도 나를 원하지만 않았다면....”[267]


오늘날 제1차 세계대전이 얼마나 심각하게 유럽의 지도층을 제거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미국에는 거의 없다). 트라운 트라우네크 백작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몇 년이 더 흐른 뒤에서야 그것을 깨달았을 정도니 말이다. 나는 20대 초반에 커다란 신문사의 편집장이 됐는데, 내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내 앞의 세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주변에 30대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플랑드르나 베르됭, 러시아, 이손초의 장교 무덤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일생 동안 불구로 생활했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육체적으로만 불구였지만, 대부분은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았다. 이런 현상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이 틀림없다.[270]


영국의 몰락이 빅토리아 여왕이나 에드워드 7세 시절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것이 요즘의 유행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한 지도층의 전멸과 생존자의 의욕상실이 가장 중요한 요인임은 틀림없다. 영국은 젊은 장교들의 사망률이 다른 나라들보다 더 컸는데, 다른 나라의 지도층은 신사도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식 신사도는 약간 무모한 행동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교육받은 젊은이의 수가 훨씬 더 부족해졌다.[270]


트라운 트라우네크 백작과 마리아 뮐러도 탈출했다. 독일 군대가 위풍당당하게 빈으로 행진해 왔던 바로 그날, 그들은 조용히 동반자살했다.[275]


2부 명멸하는 시대의 사람들


폴라니 가 -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흥미로운 가족


그 커다란 목소리로 어찌나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지 마치 화산에서 돌맹이들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281]


네 사람 모두 나를 쳐다보며 합창이라도 하듯이 동시에 말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군요. 월급을 자신을 위해 쓰다니! 우리는 그런 소린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카를의 아내인 일로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논리적인 사람들이죠. 빈은 헝가리 피난민들로 넘쳐나고 있어요. 공산주의를 피해서 온 사람들과 공산주의에 이어진 백색 테러를 피해서 온 사람들이에요.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지만 카를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카를의 월급은 다른 헝가리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우리가 나가서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논리적인 일이죠.”[285]


크레머 - 키신저를 만든 외교정치 고문


스스로 힘을 갖고 있으며 뒤에 힘을 남겨놓는 지도자, 즉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자 진짜 ‘지도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이며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이끌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339]


헨슈와 셰퍼 - 나치즘이 불러온 개인의 비극


악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지만 인간은 평범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조건으로든 악과 흥정해서는 안 된다. 그 조건은 언제나 악의 조건이지 인간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헨슈처럼 악을 자신의 야망에 이용하겠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악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셰퍼처럼 더 나쁜 것을 막기 위해 악과 손을 잡을 때 인간은 또한 악의 도구가 된다.[364]


나는 가끔 이 둘 가운데 어느 편이 더 해로울까를 생각한다. 괴물일까, 어린 양일까? 그리고 권력을 탐한 헨슈의 죄와 셰퍼의 자기과신과 오만의 죄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나쁜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죄는 아마도 이 두 가지 고전적인 죄가 아닐 것이다. 가장 커다란 죄는 20세기에 새로 나타난 무관심의 죄, 아무도 죽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오래된 찬송가 구절처럼 “그들이 내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증언하길 거부한 저명한 생화학자의 죄가 아닐까?[364]


브레일스포드 - 영국의 마지막 반체제자


브레일스포드는 정직성을 의미했다. 독립성을 의미했다. 이기적이지 않음을 의미했다. 특히 당시(늘 그렇듯이) 정치와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던 젊은이와 지성인에게 그는 그런 의미였다.[388]


브레일스포드의 힘은 언제나 그가 양심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것이 언제나 반대자의 힘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일을 원상복귀시키는 것 역시 반대자의 힘이라는 것을 브레일스포드는 잘 알고 있었다.[390]


프리트베르크 - 19세기의 탁월한 개인금융업자


“말도 안 되는 소리!” 프리트베르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떤 정부든 반드시 훌륭하고 바른 일을 해야 한다고 믿지 말게. 정부란 일반 서민을 속여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생긴거야. 정부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란 그들이 깨뜨릴 수 없는 자연의 법칙뿐이지.”[411]


프리트베르크의 말에 내가 항의했다. “하지만 사장님, 루이스는 부기부서에서도 가장 어린 직원 아닙니까? 그리고 며칠 전에 보셨다시피 좀 멍청해요.”

“바로 그거야. 그가 자네의 제안서를 이해하면 그대로 할 걸세. 그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건 자네 제안서가 너무 복잡하다는 뜻이야. 어떤 일이든 반드시 멍청한 사람이 다룰 수 있어야 해. 결국 일은 늘 멍청한 사람들이 하게 마련이거든.”[412]


“우리는 이 회사의 공동경영자를 위한 일종의 비서로서 자넬 채용한 거야. 그런데도 자넨 회사에 도움이 될 일을 해서 봉급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도통 생각하지 않는군.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다음 주 화요일까지 자네의 계획표를 서면으로 제출하게. 자네에게 맡겨진 일을 더 잘 해나가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 보란 말이야.”

내가 화요일에 목록을 만들어가자 그는 한 번 쭉 훓어 보더니 말했다. “80퍼센트 정도는 됐군. 하지만 아직 20퍼센트가 부족해.”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주말 내내 그일에 매달려 있었고, 결과물에 상당히 만족했던 나는 그렇게 물었다.

피노키오를 닮은 코 끝에 반달모양 돋보기를 걸친 그는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주려면 봉급은 왜 주나?”[416]


“어리석은 고객은 없어. 단지 상인이 게으른거지. 고객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해서는 안 돼. 고객을 ‘재교육’시키려고 해서도 안 돼. 그건 상인이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고객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 만일 고객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 같다면, 밖으로 나가 고객의 입장에서 상점과 상품을 살펴보는 거야. 그러면 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단지 그들의 현실이 상인의 현실과 다를 뿐인 거야.”[424]


“재무제표 따위는 볼 필요도 없다. 난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조작했으니까. 이번에 그 체인에서 10여 명의 구매자들과 얘기를 해보았다. 그들은 아주 영리하더구나. 하지만 다들 회사를 위해 싸게 구매하고 있었지. 고객을 위해 싸게 구매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잘못된 일이야. 고객을 잃고, 매출을 잃고, 수익을 잃게 된다는 의미다.”[427]


나는 좋은 예술가난 좋은 과학자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좋은 상인의 마음은 헨리 아저씨의 마음이 움직이는 식으로 가장 분명하고 가장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일반화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428]


지금 우리는 다시 헨리 아저씨와 찰리 켈스타트가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검증되지 않은 수량화에 의존하고, 경험보다는 가정에 근거한 논쟁을 하고, 대칭적이고 형식적일 뿐인 모델을 만들고, 구체성을 지닌 견고한 현실을 다뤄보지도 않는 채 관념에서 관념으로 움직인다.[430, 431]


일요일에 나는 굉장히 특이한 모습을 한 사람을 만났다. 사람처럼 옷을 입은 까마귀를 만난 건지, 아니면 거대한 까마귀처럼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만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에 수척한 몰골의 파르붐은 마치 장례식에 가는 것처럼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고 있었다. 검은 구두, 검은 양말, 검은 양복, 흑진주가 박힌 타이핀에 빳빳하게 풀 먹인 칼라가 높이 올라온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까마귀같이 목쉰 소리에 네델란드어의 억양이 너무 강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나는 내심 그가 두 번 다시 깍깍거리지 않기를 바랐다.[432]


“우리에게 정식으로 소개시켜 달라고 하지 그러셨소? 그 회사와 회장을 다 알고 있는데 말이오. 영국에서는 제대로 된 소개가 없으면 비즈니스를 하지 않아요.” 프리트베르크가 말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부탁드리지 않은 겁니다. 전 다른 사람이 하는 방식대로 일하지 않습니다.”[438]


로베르트와 파르크 하슨 - 사업가에 여성이 미친 영향


여성혐오자이면서 성을 적대시했던 톨스토이가 나타샤와 안나 카레리나를 유럽 소설 가운데서 가장 여성적이고 매력적인 두 여인으로 묘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461]


3부 순수의 절정기


헨리 루스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은 공격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 책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었다.[474]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루스가 권모술수가가 아니라 훨씬 더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다. 그는 중국인에 가까웠다. 나는 헨리 루스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연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의 고대 한나라부터 내려온 조직운영방식을 적용했다. 헨리 루스가 잡지를 운영하는 방식대로 마오쩌뚱은 정권과 당을 운영했다. 파벌을 조성하고, 직함과 책임이 있는 사람을 피해 일하고, 하급자들이 자기에게 오도록 장려하지만 상급자에게는 말하지 않게 이르고, 반목과 상호불신과 반대파가 유지되게 하는 것이었다.[489]


풀러와 맥루안 -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예언자


버키 풀러와 마셜 맥루안은 내게 한 가지 목표에 정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지를 실례로 보여준 사람들이다.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어떤 것을 이룰 수 있다. 나는 포함해서 나머지 사람들은 좀 더 다양한 재미를 wmf기기는 하겠지만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 하지만 풀러나 맥루안 같은 사람은 ‘사명’을 수행한다. 어떤 일이 달성될 때마다 나는 그것이 사명감을 갖고 한 가지에 정진하는 사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버키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도 없이 황무지에서 40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비전에 헌신했다. 맥루안은 비전을 찾는 데 25년을 소비해서 마침내 비전이 그를 붙잡았다. 그 역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시대가 왔을 때 영향을 주었다.[526]


앨프레드 슬론 - 절대적 권위로 GM을 이끈 전문경영인


지금으로부터 불과 40년도 안 되는 과거에는 고등교육이 제조업에서뿐만 아니라 금융업계와 심지어 공직에서조차 자산이라기보다는 장애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믿기 힘든 일이다. 정식교육을 받은 사람이 ‘비실용적’이라고 치부되는 것, 슬론의 세대를 특징짓는 이 같은 선입견은 오늘날 학위취득에만 미친 사람들이 성실히 일하는 젊은이들을 무시하는 편견보다는 덜 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세대가 가지고 있던 편견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GM 기술연구소를 대중에게 알리기를 거부하던 슬론의 태도가 오늘날 가능하면 오랫동안 일하지 않고 여러 개의 학위를 취득하는 데만 열중하는 풍조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보게 된다. 그 당시 미국 산업계는 그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슬론이 GM 기술연구소를 대중화시키는 선례를 세우기만 했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노동과 교육에 있어 좀 더 바람직한 균형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539, 540]


이 책은 경영학(이전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던)이라는 학문분야를 세우는 성과를 거뒀다. <<기업의 개념>>이 지난 30년 동안 지속됐던 ‘경영학 선풍’을 일으킨 것은 내겐 행운이었다. 나는 우연히 그런 시류의 선구자격인 사람이 됐다. 어쨌든 경영학이라는 학문의 주요한 관심사인 조직과 사회적 책임, 개인과 조직의 관계, 최고경영자의 기능과 정책결정 과정, 관리자의 양성, 노사관계, 집단관계, 소비자관계(심지어는 환경까지도) 등이 모두 <<기업의 개념>>에서 다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제들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다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43]


그 문제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윌슨이 1950년에 자신의 연금계획을 통과시켰을 때 나는 그 계획을 ‘연금의 신기루’라고 명명하며 신랄하게 비평하는 기사를 <하퍼스 매거진>에 실었다. 나는 회사의 연금은 개인의 유동성을 구속하고, 연금을 주는 것, 다시 말해 근로자에게 자기들의 연금에 대해 기득권을 갖게 하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연금 부담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런 계획이 규모가 적고 힘들게 운영되는 영세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돈이 많고 성공한 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에게 불공평한 이득을 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보적인 세금 과세에 기초한 보편적인 정부연금정책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내세운 주장들을 결국 옳았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윌슨의 계획은 세상에 널리 퍼져서 지금까지 미국에는 50만여 종류의 개인연기금이 있다. 예상대로 이것들은 모두 나름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연기금들은 미국 경제를 조정하고 미국의 대기업, 또는 중견기업의 주식자본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머지 않은 미래에 고용인이나 그들의 대리인은 연기금위원회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함으로써 근로자가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1950년 <하퍼스 매거진>에서 예언했듯이 연기금은 바닥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연금은 이미 미국의 근로자들을 자본가로 탈바꿈시켜놨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모형제작소 노조지부장이자 유진 데브스를 신봉하던 사회주의자이며 GM의 회장이자 위대한 자본주의자인 찰리 윌슨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575, 576]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실패하면, 드레이스타트 씨, 당신은 캐딜락에거 직업을 잃게 되겠죠. 캐딜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GM이 있는 한, 내가 이끌고 가는 한, 자기 책임을 다하고, 솔선수범하며, 용기와 상상력이 있는 사람을 위한 자리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슬론 씨는 계속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캐딜락의 미래를 걱정하세요. 하지만 GM에서의 당신의 미래는 내가 걱정하겠소.’”[577]


그는 자기가 한 약속대로 내 연구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한 번도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끝까지 지원해 주고 내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579]


슬론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만 난 항상 좋은 친구들을 곁에 두고 싶어하죠. 하지만 나는 직장에서 친구를 만들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는 공평해야 하고 누군가를 편애하는 모습조차도 내 비쳐서는 안 돼요. 사람들이 어떻게 업무를 달성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죠. 그들의 의견과 그들이 자신의 몫을 완수하는 방법을 찬성하느냐 마느냐가 내 임무는 아닙니다.” 그는 특정 인물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적이 한 번도 없다. 늘 그들의 성과에 대해서만 논했다.[588, 589]


슬론은 째째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경제와 산업의 역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검소했고 개인적인 허례를 싫어했다. 그가 있는 사무실은 황무지와 다름없었다. 디트로이트에 머무는 동안 그는 호텔 스위트룸이나 별도의 아파트도 없이 GM 빌딩의 꼭대기 층에 있는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방에서 잤다. 그는 개인 식당을 사용하지 않고 간부용 카페테리아에서 식사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필요한 건 침대가 전부예요.”[590]


슬론은 결정을 내릴 때 사람 수를 세거나 투표를 통해서 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이해를 통해서 결정을 내렸다.[595]


그들은 항상 ‘공적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전문적’인 것에만 제한하려는 고집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사회에서 조직들은(그리고 그 조직을 관리하는 ‘전문인들’까지도) 반드시 공공복리를 위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문경영자밖에 없다. 모든 역사는 다원론의 사회가 분쟁과 공공의 복리를 만들어내고 공익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 특별한 ‘관심사’들의 분쟁과 합류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606, 607]


그 밖의 사람들 - 대공황 시기 미국 사회에 대한 스케치


서로가 도우면서 살아가는 자세는 대공황에 대한 미국인만의 대처법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없었고, 오리혀 대공황으로 인해 의심과 무뚝뚝함, 두려움, 질시만 더 깊어졌다. 대공황에 대응하는 미국인의 방식은 자연재해를 극복할 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지진이나 홍수, 태풍이 지나간 뒤에 그렇듯이, 공동체는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갖자가 상대방의 구원자가 됐다. 1930년대 미국인들은 대공황을 마치 자연재해를 회상하듯 이야기 했다.[619]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원제는 『Adventures of a Bystander』이다. 영국에서 출판된 책의 부제목은 “Other Lives and My Times"라고 한다. 직역하면 “구경꾼의 모험 - 동 시대를 산 타인의 삶”이라고 해야 할까.

저자는 이 책을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을 쓴 이유와 저술 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처음 떠올랐던 것은 케네디 대통력의 재임시기였다. 나는 그 무렵 몇 년 동안에 걸쳐 벌어졌던 사건들이 아직 역사가 되기에는 너무 가까운 시기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들이나 학생들 또는 나보다 더 젊은 친구들이 자료를 구하기가 어렵고 이해하기는 더욱 힘들어서 마치 니네베(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옮긴이)니 아슈르(북이라크의 티그리스 당 서쪽에 있던 고대도시-옮긴이)처럼 멀게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6]

“훌륭한 컬러 사진이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초원의 경험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통계수치로는 인간이 무엇을 보고 무엇에 따라 행동하는지 표현할 수 없는 법이다. 오직 한편의 ‘사회 초상화’만이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17]

“이 책에 기술한 인물들은 내게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택됐다. 그들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내게 반사하거나 굴절시켜 보여주었던 방식 때문이었다.”[19]

“이 책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이고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한데 합치면, 개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구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20]

창조적인 발상이고 공감 가는 저술 방법이다. 저자가 알고 있고, 저자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들을 구경꾼의 눈으로 관찰하면서 역사가 되기에는 너무 가까운, 그러나 젊은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거에 대한 ‘사회 초상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구경꾼인 저자의 눈에 비친 동 시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그 시대의 사회와 인간을 알 수 있는 장을 제공해 줄 뿐이다. 형식도 자유롭고 작가의 주관에 따라 내용이 전개된다.  역사소설을 쓰게 된다면 이렇게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훌륭한 책을 읽게되면 느끼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혜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 또는 혼돈스러웠던 개념들이 정리되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한다. 이런 깨달음은 주로 인생을 사는 방법,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 등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둘째, 항상 그렇듯이 훌륭한 작가들은 정직하고 매우 용감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드러커는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은 공격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474] 자기 주장을 펼친다는 것은 누군가의 주장과 상충되는 부분에 대해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과 상반된 주장이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키려면 논리적으로 타당해야 하고 적절하게 감성적으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이 책에서 드러커는 프로이트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한다. 프로이트는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였으며, 드러커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였다. 이런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서 작가는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자신의 논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에 입각해서 글을 쓰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 또한 작가의 임무다.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글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정직하고 또 용감해야 한다.
이 책에는 이런 요소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 것 같다.


배울점

우선 이 책은 재미있다. 부담없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면서 한편으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저자의 깊은 통찰과 교감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할머니, 사회주의자, 학자, 금융업자, 기술전문가, 전문경영자 등 다양하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독특한 개성과 특징을 갖는 사람이 대부분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번역도 전반적으로 우수하다. 번역자는 각 장의 서두에 해당 인물에 대한 내용을 요약해서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도 배울만한 점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나는 인간이 다양성과 다원성을 가지며,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미 50여 년 전에 나온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내 모든 책 속에 내재돼 있는 핵심은 바로 이런 신념이다.[12]

“하지만 할아버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조금도 안 했지. 할아버지는 저녁식사 때는 늘  집에 돌아왔단다. 나는 그저 멍청한 늙은 여편네에 불과했지만, 남자에게는 위장이 성기나 마찬가지라 사실을 알 정도의 머리는 있었지.”[45]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마라. 항상 그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라.” 이것이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만약 그것이 잘못됐거나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그 사실을 지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행동보다는 연구에 몰두할 것이다.”[119]


“통계치를 다룰 때는 명심해. 절대로 그것을 신뢰하지 마. 그 통계를 집계한 사람이 네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어떤 경우에도 통계수치는 의심해 봐야 해. 내가 직접 경험해 본 일이야. 난 거의 12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수출현황에 대한 통계를 담당하고 있었어.”[140]


“그리고 너는 네 장점 가운데 하나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아니?”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너는 작문에도 능해. 하지만 별로 연습을 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너도 동의하니?” 이때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럼 그것을 목표로 삼자. 일주일에 두 개씩 작문을 해서 제출하렴. 하나는 네가 쓰고 싶은 내용을 마음대로 쓰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주제를 정해 주마.”[160]


그러고 나서 슈나벨이 피아노 앞에 앉더니 슈베르트의 안단테를 자신의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했다. 그러자 릴리는 ‘갑자기’ 차이를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깨달음의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미스 소피의 학생들 얼굴에서 봤던 바로 그 미소 말이다. 그 순간 슈나벨은 연주를 멈추고 말했다. “이제는 네가 연주해 봐라.”... “네 귀에도 들리니? 그거 대단하구나. 네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하는 한, 너도 음악을 연주하는 거란다.”

나는 음악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잘 들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내가 언제나 성과를 통해 학습을 해왔으며, 효과가 있거나 성과를 거두는 사람을 찾아 그것을 배우는 것이 내게 알맞은 학습방법이란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실수를 통해서 배운 것이 없었다. 성공만이 내게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아마 그것은 마르틴 부버의 초기 저서였던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다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신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저지르게끔 만드셨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배우려고 하지 마라. 다른 사람이 뭔가를 올바로 했을 때 그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186, 187]


이런 선생들은 비난보다 칭찬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매우 드물게 칭찬하기 때문에 칭찬이 학생의 동기를 유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거나 학생이 스스로 느껴야만 하는 성취감과 만족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한다.[193, 194]


소크라테스의 시대 이후로 거의 200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가르침과 학습이 ‘인지적’인지 또는 ‘행동적’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그것은 잘못된 논쟁이다. 가르침과 학습은 인지적이며 동시에 행동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 특별한 요소를 더 갖고 있다. 그들은 또한 열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열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교육자는 학생들의 깨달음에 같이 도취됨으로써 열정을 얻는다. 학생의 얼굴에 떠오르는 깨달음의 미소는 어떤 마약이나 약물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교실에 만연된 무시무시하고 학생을 고사시키는 전염병인 교사의 권태감을 치유하는 것이 바로 열정이다(교사의 권태감은 가르침과 학습을 완벽하게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다).[200]


선생의 열정은 자기 자신에게 있고, 교육자의 열정은 학생들의 내면에 존재한다. 하지만 가르침과 학습은 언제나 열정이고, 그 열정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거나 다른 사람의 열정에 자신이 중독되는 것이다.[201]


진정한 선생과 진정한 교육자에게는 게으르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멍청한 학생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선생이 잘했거나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201]


완공된 건물이 공개되기 전의 준비작업 틀을 프로이트만큼 정교하게 해체한 사상가는 없다. 그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과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물음을 논의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오직 무의식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방법론에 대한 문제, 결과에 대한 정의와 대조군 실험의 문제, 완전히 신비적인 방법을 비롯해 모든 심리요법의 치료성과가 똑같다는(혹은 비슷하다는) 등을 논의하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과학적 이론 및 치료법과 인간의 인성 및 철학이라는 신화를 한데 포함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이중적 특성을 논의하는 순간에 말이다. 그는 이런 질문을 무시함으로써만 통합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빈 의사들을 무시하기 위해 빈 의사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척해야만 했던 것이다.[233]


그 무렵 나는 논리적 사고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고된 독서를 통해 이들 위대한 사상가들이 엉뚱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불과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만약 수십가지 설명들이 모두 전적으로 다르지만 자명한 사실을 전제로 해서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 뒤에 기초적인 논리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합리화이고 결국 요점을 벗어나게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요점은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형벌은 사회 속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하나의 사실이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사회에 만연된 현실이었다. 진정 설명이 필요한 것은 범죄의 존재였고, 그것은 내 능력의 한계를 크게 초월하는 분야였다.[254]


오늘날 제1차 세계대전이 얼마나 심각하게 유럽의 지도층을 제거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미국에는 거의 없다). 트라운 트라우네크 백작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몇 년이 더 흐른 뒤에서야 그것을 깨달았을 정도니 말이다. 나는 20대 초반에 커다란 신문사의 편집장이 됐는데, 내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내 앞의 세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주변에 30대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플랑드르나 베르됭, 러시아, 이손초의 장교 무덤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일생 동안 불구로 생활했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육체적으로만 불구였지만, 대부분은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았다. 이런 현상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이 틀림없다.[270]


스스로 힘을 갖고 있으며 뒤에 힘을 남겨놓는 지도자, 즉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자 진짜 ‘지도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이며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이끌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339]


“말도 안 되는 소리!” 프리트베르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떤 정부든 반드시 훌륭하고 바른 일을 해야 한다고 믿지 말게. 정부란 일반 서민을 속여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생긴거야. 정부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란 그들이 깨뜨릴 수 없는 자연의 법칙뿐이지.”[411]


프리트베르크의 말에 내가 항의했다. “하지만 사장님, 루이스는 부기부서에서도 가장 어린 직원 아닙니까? 그리고 며칠 전에 보셨다시피 좀 멍청해요.”

“바로 그거야. 그가 자네의 제안서를 이해하면 그대로 할 걸세. 그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건 자네 제안서가 너무 복잡하다는 뜻이야. 어떤 일이든 반드시 멍청한 사람이 다룰 수 있어야 해. 결국 일은 늘 멍청한 사람들이 하게 마련이거든.”[412]


“어리석은 고객은 없어. 단지 상인이 게으른거지. 고객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해서는 안 돼. 고객을 ‘재교육’시키려고 해서도 안 돼. 그건 상인이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고객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 만일 고객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 같다면, 밖으로 나가 고객의 입장에서 상점과 상품을 살펴보는 거야. 그러면 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단지 그들의 현실이 상인의 현실과 다를 뿐인 거야.”[424]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은 공격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 책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었다.[474]


그 문제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윌슨이 1950년에 자신의 연금계획을 통과시켰을 때 나는 그 계획을 ‘연금의 신기루’라고 명명하며 신랄하게 비평하는 기사를 <하퍼스 매거진>에 실었다. 나는 회사의 연금은 개인의 유동성을 구속하고, 연금을 주는 것, 다시 말해 근로자에게 자기들의 연금에 대해 기득권을 갖게 하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연금 부담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런 계획이 규모가 적고 힘들게 운영되는 영세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돈이 많고 성공한 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에게 불공평한 이득을 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보적인 세금 과세에 기초한 보편적인 정부연금정책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내세운 주장들을 결국 옳았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윌슨의 계획은 세상에 널리 퍼져서 지금까지 미국에는 50만여 종류의 개인연기금이 있다. 예상대로 이것들은 모두 나름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연기금들은 미국 경제를 조정하고 미국의 대기업, 또는 중견기업의 주식자본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머지 않은 미래에 고용인이나 그들의 대리인은 연기금위원회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함으로써 근로자가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1950년 <하퍼스 매거진>에서 예언했듯이 연기금은 바닥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연금은 이미 미국의 근로자들을 자본가로 탈바꿈시켜놨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모형제작소 노조지부장이자 유진 데브스를 신봉하던 사회주의자이며 GM의 회장이자 위대한 자본주의자인 찰리 윌슨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575, 576]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실패하면, 드레이스타트 씨, 당신은 캐딜락에거 직업을 잃게 되겠죠. 캐딜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GM이 있는 한, 내가 이끌고 가는 한, 자기 책임을 다하고, 솔선수범하며, 용기와 상상력이 있는 사람을 위한 자리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슬론 씨는 계속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캐딜락의 미래를 걱정하세요. 하지만 GM에서의 당신의 미래는 내가 걱정하겠소.’”[577]






IP *.97.37.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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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언
2008.10.07 17:30:30 *.239.150.118

피터드러커 본인도 누가 자기를 구루라고 부르는 걸 싫어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구루란 '전문지식이 있는 체하는 허풍쟁이나 협잡꾼'이란 단어를 신문에 쓰기 너무 길때 줄여서 부르는 거다'라고 하기도 했답니다.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읽으면서, 피터 드러커의 보라색 양장 자서전도 언젠가 꼭 읽어보아야 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이렇게 칼럼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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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10.09 11:34:00 *.97.37.242

해언씨, 오랫만이야... ^)^

그런데 '구루'에 그런 의미가 있었나? 
'전문지식이 있는 체하는 허풍쟁이나 협잡꾼'을 짧게 표현하면 prig 이란 단어도 있는 데... 그건 너무 평범한가?
여하튼 드러커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걸 별로 즐기지 않았던 모양이구먼. 독특한 구석이지? ㅎㅎ

난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지금 읽고 있는 데, 읽으면서 반성을 하고 있다네...
2001년에 한번 읽었던 책인데, 그때 밑줄 쳐놓았던 말들을 보니 지금도 역시 좋은 구절들이야.
반성하게 되는 건, 그때 그렇게 느꼈으면서 그 좋은 말대로 변하려는 노력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야.
읽는 것, 느끼고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다 따로라면 밤낮 책은 읽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ㅎㅎㅎ

하지만 그래도 읽어야지. 그래야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는거니까.
앞으론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바꾸어가는 독서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읽고 있다네.
그리고 시간나면 이 책도 한번 읽어보게. 프로페셔널의 조건보다는 재밌거든.

댓글 고맙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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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 (21) 피터 드러커 자서전 - 피터 드러커 이한숙 2008.10.06 3368
1674 [24] 프로페셔널의 조건 - 피터 드러커 file 최지환 2008.10.06 2646
1673 [24] 피터드러커 자서전 - 피터 드러커 거암 2008.10.06 2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