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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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박병규 역,민음사
1. 저자 소개
파블로 네루다, 그가 내 인생에 걸어 들어온 건 몇 년 전 보았던 영화 한 편을 통해서다. 네루다가 망명지 카프리섬에서 우정을 나누었던 이태리 시골 우체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네루다의 처연한 심정 너머로 펼쳐지던 시 한편,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로 시작하던 그 ‘시(Poetry)’는 느닷없이 내 가슴으로 흘러 들어와 오래도록 머물렀다.
책을 펼쳤다. 이미 내 안에는 뜨겁게 한 시대를 살다간 시인에 대한 존경과 흠모, 그리고 지극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시인 다운 언어들로 벼려진 첫 페이지, 역시 인트로부터가 다르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는 회고록을 쓰는 사람의 회상과 시인의 회상은 다르다고 적고 있다. 그의 자서전은 시인의 회상으로 시인이 살아간 시대의 불꽃과 어둠 속에 명멸하는 환영들을 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잠깐만, ‘비밀의 성지’를 감싼 넝쿨 숲에 발 먼저 불쑥 들여놓기 전에 나만의 의식을 치르자. 그래 일 포스티노 영화를 한번 더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네루다를 만나러 그의 성지로 들어가자.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 네루다 보다는 우체부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네루다 스피릿에 젖어보려던 애초의 의도는 잊고 우체부 마리오에게 빠져들었다. 답답한 이 친구, 말 하는 것도 답답하고 구부정한 어깨로 힘없이 앉아 있는 모습도 답답하고 낡고 볼품없는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 해안 도로를 덜덜거리며 달리는 모습도 답답하다. 베아트리체를 보고 넋을 놓은 채 한 마디도 못하는 모습도 답답하다. 온통 답답해 죽겠다. 어깨 좀 한 번 쭉 펴고, 말도 똑 부러지게 하는 걸 좀 봤으면 좋겠는데 영화가 다 끝나도록 그는 그대로였다.
영화가 끝날 무렵 나는 막 울었다. 끝내 피지도 못하고 어이없이 시위 군중에 밟혀 죽어버린 그가 답답해서 울었고, 그가 만들어낸 시심이 묘하게 교차하는 영화라는 공간 안에서 너무 슬프도록 아름다운 희망을 보고 울었다. 그의 답답함은 시가 살아나는 순수한 터전이었다. 그의 희망은 그의 어린 아들 파블리코의 눈 안에 들어있었다. 그는 가난하고 척박한 이태리 시골 바닷가에서 그 애비가 그랬듯 희구할 것 없는 어부의 삶을 숙명처럼 살진 않을 것이다. 그아이에게는 아비가 남긴 시와 시심이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내 머릿 속에는 여러 장면과 대사들이 흘러다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이 영화의 마리오는 다름아닌 네루다인 것을 깨닫는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네루다의 시 한 편. 네루다는 둘이 자주 찾았던 카프리 섬의 바닷가에 서 있다. 연락도 없이 무심했던 그가 카프리를 찾았을 때는 이미 마리오는 그곳에 없다. 포말이 부서지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진정한 시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루다의 얼굴 위로 그의 시가 펼쳐지고, 그 시 속에는 마리오가 선연하다.
나는 어렴풋이 첫 줄을 썼다/ …/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순수한 지혜/그리고 나는 문득 보았다/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파도소리,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소리,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소리, 교회의 종소리, 아내 뱃 속에서 아이의 심장이 뛰는 소리…마이크를 들고 다니며 네루다를 위해 고향의 아름다움을 소리에 담는 마리오는 영락없는 시인이다. 그의 시가 심원한 자신의 존재와 만나는 순간, 그는 현실을 저항할 힘까지 얻는다.
아, 에머럴드 빛으로 출렁이는 카프리 섬 바닷가를 처연히 걷고 있는 네루다 얼굴 위로 한 점 더럽힘도 없이 순수히 시에 다가갔던 마리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제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And it was at that age...Poetry arrived/ in search of me. I don't know, I don't know where/ it came from, from winter or a river/ I don't know how or when/ no, they were not voices, they were not/ words, nor silence/ but from a street I was summoned/ from the branches of night/ abruptly from the others/ among violent fires/ or returning alone,/there I was without a face/ and it touched me.
다시 책을 펼친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262-263)
카프리 섬은 네루다가 자란 칠레 남부의 숲이고, 마리오의 시 속에 스며든 카프리 섬의 모든 숨결은 네루다의 시 속에 스며든 칠레 자연의 숨결이다. 그들에게 고향의 자연은 마르지 않는 시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그 땅과 숲, 바다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노래했던 것이다.
2. 마음에 들어온 글귀
16. 칠레의 숲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삶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56. 수줍음이란 마음이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이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66.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물론 이성이 우위를 점해야 하며 정의의 근간인 이성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
77.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빳빳한 새 책이 모습을 드러낸 저 순간, 날개를 활짝 펼치고 훨훨 날아가는 듯한 저 황홀한 도취의 순간,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첫눈에 들어오는 꽃봉오리를 응시하는 그런 환희의 순간은 시인의 일생에서도 단 한 번밖에 없다.
83.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84. 우리말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말은 이 야만적인 정복자들의 장화 밑바닥에 박혀있던 조약돌처럼 수염에서, 투구에서, 편지에서 떨어졌습니다. 지금 그 빛나는 말이 여기 남아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패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자였습니다. 저들은 황금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황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갔지만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우리들에게 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91. 발파라이소는 골목도 많고 모퉁이도 많고 숨겨진 것도 많은 곳이다. 산동네에는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집집마다 내걸린 빨래와 끊임없이 늘어나는 맨발의 아이들은 벌집같은 판자촌에서도 사랑은 식지 않았다는 증거다.
94. 지진은 도시의 심장에 붙어있는 공포의 꽃잎이다.
179. ‘에르난데스, 드디어 직업이 생겼어. 자작이 자네에게 한자리 주겠대. 이제 아주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거야. 원하는 자리가 뭔지 말해 봐. 그래야 임명을 하지.’ 에르난데스는 생각에 잠겼다. 때 이른 주름살이 깊이 파인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몇 시간이 지난 오후에야 그는 대답을 주었다. 인생 문제의 해답을 찾은 사람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마드리드 근처에서 염소 데를 키울 수 있게 해줄 수는 없을까?’
186. 로르카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수가 없었다. 로르카는 또 다른 교살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95. 지성사에서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사건도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
209.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10. 시는 언제나 평화적 행위이다. 밀가루가 있어야 빵을 만들듯이 평화가 있어야 시인도 있다…그러나 시는 죽지 않았다. 시는 동요에 등장하는 고양이처럼 목숨이 일곱 개나 되는 불사신이다. 시를 괴롭히고 길거리로 끌고 다니고 침을 뱉고 조롱거리로 만들고 목 졸라 죽이려 들고 추방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총알을 난사해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갓 씻은 해맑은 얼굴을 보이고 갓 찧은 쌀알 같은 웃음을 짓는다.
214. 이제 우울한 시는 쓸 수 없었다.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우수에 찬 주관주의나 <지상의 거처>에 담긴 고통스러운 애상은 막을 내렸다…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28.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것,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강렬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이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을 뿐이다. 인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를 바라보았으니 텅 빈 도시만 눈에 들어왔다. 비참한 모습의 공장을 둘러보았으나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이다.
228.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고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228. 내 시에서 가장 신비한 재료로 만든 새로운 대륙이 솟아나고 있다. 나는 이 대륙에 정착하고, 이 대륙에 이름을 붙이고, 신비한 해안선을 만져보고, 파도를 잠재우고, 동물들이 사는 땅을 둘러보고, 지형을 측량하는데 어둡고 고독하고 아득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257. "내가 칠레 시인이라면 파블로 네루다처럼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아니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이탈리아 소설가)
262.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로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 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주는 시인이 있어.”
1945년 7월 15일, 나는 칠레 공산당에 가입했다.
272. 칠레에서는 하찮은 돌멩이까지도 내 목소리를 알아먹는다…무성한 숲과 호수의 화산과 밤을 손아귀에 집어 넣은 빗줄기는 이 인간의 은신처가 다른 법을 따르고 또 자신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격노한 나머지 계속 공격해 댔다.
298. 문학에서 새로운 형식, 즉 기존 형식의 혁신은 관습적인 틀을 넘어서거나 깨뜨려야 한다. 하지만 문학이 어떻게 철저하고 광범위한 혁명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이 경험한 승리, 갈등, 인간적인 문제, 풍요, 진보, 성장을 핵심적인 주제에서 제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잔인한 침략자들에게 짓밟히고 집요한 식민주의자들과 온갖 종류의 우민화를 자행하는 세력에게 포위된 저 소련의 민중들과 연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문학이나 예술이 이처럼 본질적인 사안을 외면하고 공허한 자율성만을 고집해도 된다는 말인가?
300. 작가의 작업도 저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싯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341. 나는 파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 역시 그 누구도 파문시키지 않을 것이다…사람은 사람일 뿐, 그 외의 어떤 규칙이나 호칭이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또 대다수 사람들이 읽고 듣고 번영하기를 바란다.
375. 전쟁과 혁명, 그리고 대규모 사회 변동을 경험한 우리 시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땅에 시를 경작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나는 칠레 구석구석을 다니며 동포들에게 내 시를 뿌렸다.
377-378. 버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고 있었다..사람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이런 걸 경험한 뒤에 달라지지 않을 시인은 없을 것이다.
387.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8.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는 노력이 필요했다.
391.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그러나) 시인의 자부심은 보여주고 싶다…적어도 몇몇 작가들은 신성한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다.
392.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4.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합리와 비합리라는 양극단은 시 내부에서 부단히 다투고 있으며 한 번은 이쪽이 승리하고 한 번은 저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시 자체가 패배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집도 장난감처럼 지어놓고 그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다.
397. 지식인들은 술집으로 도피했다. 술을 마시면 빈곤마저도 다음 날 아침까지는 황금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406. 사랑의 노래여! 균형감각을 회복하고 고통을 노래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다오. 진정 이 세계는 전쟁을 쓸어낼 수 없고 증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실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 또한 사람들이 고통을 딛고 일어나, 피와 부서진 유리조각을 딛고 일어나 서로를 이해하리라고 확신한다.
436.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446. 사실, 이 땅에서, 이 땅이 부르는 노래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피와 이름 모를 꽃이다.
495.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를 바란다 ? 월트 휘트먼
496. 나는 군중에게 인생을 배웠다…고독과 군중은 이 시대 시인이 떠맡아야 하는 기본 의무이다. 나는 군중이라는 거대한 물결에서,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정한 눈길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모든 시인이 이런 경험을 할 수는 없으나, 한번 경험한 사람은 이를 가슴에 간직하고, 작품으로 풀어놓을 것이다. 단 1분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다.
506. 낯선 식물이 도시의 담벼락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증오의 이끼였다.
517. (아옌데) 시신은 칠레 군인들이 난사한 기관총에 맞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저들은 또 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3. 내가 저자라면
네루다의 시 세계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한 여자의 육체〉에서)
사랑의 관능과 환희가 솔직하고도 과감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시는 사랑을 실존의 이념으로 삼겠노라는 젊은이의 선언이라 할 만하다. 그런 시인에게 대지의 생명력과 연애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과 시대적 상황에 눈을 뜨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 계기는 1936년에 시작된 스페인 내전이다.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비참한 공장의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내란이 끝나자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에게로 눈을 돌린다. 이후 그의 연작시들은 대지 위에서 억압받는 민중들을 열렬히 노래한다.
나와 함께 올라 다시 태어나라 형제여./ 네 고통이 뿌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이 생명의 잔에 땅에 묻힌 그대들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그리고 밑바닥부터 얘기해 다오, 이 긴긴 밤이 다하도록/ 내가 닻을 내리고 그대들과 함께 있으니 내게 모두 말해다오, 한땀 한땀,/ 한구절 한구절, 차근차근. 품고 있던 칼을 갈아 내 가슴에 내 손에 쥐어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피로 말하라.(<마추피추의 산정>의 연작시 중에서)
시대와 현실이 그렇게 그에게로 왔다. 그에게 시는 투쟁의 무기이자 선동의 수단이 되었다. 그는 1966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가해 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쿠바 혁명을 옹호하는 시를 수 천명의 청중 앞에서 낭송한다. 젊은 시절 초현실주의에 기울었던 시인은 이제 누구보다 결연한 현실주의자로 변모한 것일까.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394)
그의 마음은 민중에 대한 희망, 열정, 사랑으로 가득하다. 다만 그것들은 이제 거대한 자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여과된다. 그는 몸을 낮추고 민중의 언어와 삶 속으로 들어갔다. 네루다에게는 리얼리즘이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입장’이나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일체의 것들에 갇히지 않았다.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그에게 시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휴머니즘의 큰 그릇이었다. 그의 시는 어려운 미학적 단련과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하며 성장하였다. 그의 시는 칠레 남반구의 깊은 자연에서 발원하여 아메리카 대륙으로 흘러 들어갔다. 흘러가는 물살과 함께 그는 어느 것 하나 배척하지 않고 그 열정을 흡수하고 신비한 세계를 천착하며 민중들의 마음과 마음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는 고통받으며 투쟁했고, 동시에 사랑하며 노래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눈물과 입맞춤을 경험했고, 고독과 민중을 경험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시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시는 그의 투쟁과 사랑의 밑거름이었다. 그는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뼈 속까지 타고난 시인이었던 것이다.
"(1973년 현재) 첫 시집을 출간한지 50년이 지났다. 나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나는 내 수중의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소재들로 작업한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투쟁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391-2)
자서전에 대한 관심
왠지 모르지만 내 인생에 한 번쯤은 자서전을 쓰게 될 것 같다. 올해는 유난히 자서전을 많이 읽었다. 연구원 목록에 든 난중일기, 백범일지, 구본형, 라즈니쉬, 피터 드러커 자서전 외에도 오노요코, 마크 트웨인 자서전을 읽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나는 늘 글의 구성과 문체에 눈길이 간다. 사실 위주의 디테일한 전개보다는 시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해 느낌을 살린 자서전들이 내게는 더 친근하다. 사건 배열도 시간 순서보다는 무작위로 주제를 넘나드는 구성이 더 마음에 끌린다. 이래저래 이 책 네루다 자서전은 읽는 내내 나의 맘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노벨상을 받은 대 시인답게 그는 책 곳곳에 많은 감동을 숨겨두었다. 그는 노벨 평화상도 함께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이 책은 인간과 시의 승리를 증거하는 책이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민중의 편에 서려고 했던 네루다의 진정성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시적 서정과 함께 이 책 가득히 꿈틀거린다.
마지막 장 ‘살바도르 아옌데’ 편에서 그는 '이 회고록의 몇 줄을 위대한 동지 아옌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에 서둘러 쓴다’고 밝히고 있다. 아옌데 정권은 그가 민중과 함께 한 긴 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아예데의 집권은 너무나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 세력의 공습으로 불꽃과 화염에 휩싸인 왕궁에서 망명을 거부한 채 아옌데가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자, 마지막 생의 불꽃을 태우던 네루다의 생의 의지는 갑자기 꺾여버렸다. ‘저들은 또 칠레를 배신했다’로 자서전의 마지막 문장을 마감한 그는 그로부터 9일 후 아옌데를 따라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1973년 9월 23일의 일이다.
이 책의 번역
이 책의 번역은 참 훌륭하다. 옮긴 이의 언어 구사력이 그 어느 것보다 필요한 책인데, 네루다의 시적인 글맛을 한국어로 잘 살렸다. 번역서라는 느낌 없이 마치 우리 책을 읽듯이 편안하게 잘 읽었다. 역자의 박사학위가 절대적으로 아깝지 않은 번역이다. ‘옮긴 이의 말’에 책을 깔끔하게 요약해 놓았다. 저력이 보인다. 뒤에 첨부한네루다 연보도 매우 유용하다. 책을 읽는 동안 사건과 사건을 잇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정서의 원천
그는 아메리카 대륙, 칠레 남부 황량한 테무코에서 가난한 철도 기관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바로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 그의 시가 다루지 않은 영역은 없어 보인다. 그는 열 아홉의 나이에 문단에 데뷔한 이래 40여권의 시집과 3500 여편의 시를 불꽃처럼 터트렸다. 이쯤 되면 애정, 환상, 자연, 인간, 민중 이란 주제를 오가며 저항시와 연애시를 동시에 쓸 수 있었던 그의 정서적 토양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자유롭고 분방하고, 아름답고 싱그럽고, 거침 없고 사려 깊고, 활화산처럼 강렬하고 관능적인 그의 시어들. 시인 미스트랄의 시 세계를 설명하며 그는 미스트랄의 작업장 용광로 속에 들어간 최고의 요소, 즉 항상 애절한 고통으로 사무치는 그의 시의 비밀 재료는 무엇일까 궁금해한다.(422) 나는 그의 작업장의 용광로를 붉게 타오르게 한 비밀의 재료들이 궁금하다. 그것은 탱고가 대변하는 남미 특유의 정열이요, 남미 예술 고유의 페이소스가 아니겠는가.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를 주문했다. '내 심장을 위해서는 네 가슴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뭇잎은 내 영혼의 물에 떨어졌다', '너는 오래된 길처럼 사물을 너에게로 모은다',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렇게도 길다' , '내 몸에 묶여 우는 정염',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와 같은 시어들이 어떻게 19세 소년에게서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인지...
이 책의 독특함은 남미 특유의 정서에 빚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에서 호흡할 수 있는 공기와 냄새는 어쩔 수 없이 남미의 것이다. 네루다의 영감의 원천은 의심할 바 없이 칠레의 대자연이었다. 여인의 육체를 탐닉하는 시 속에서 조차도 남미의 자연은 은유로 함께 한다. 일상적인 사물의 소박함을 노래하는 시에도 텁텁한 남부의 흙 냄새와 각종 나무와 꽃들의 그림자가 어려있다. 아직 위대한 시인이 아니었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시 속에는 칠레 남부의 자연이 자리를 틀었다. 그는 타고난 보헤미안이었다. 그가 평생 세상을 떠돌아 다닌 것은 단지 직업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보헤미안 기질은 여성과의 사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밀집 더미 위에서 멋모르게 나눈 16살 풋내기의 하룻밤 사랑을 시작으로 그는 실로 다양한 여인들을 품에 안았고, 본능이 욕망하는 대로 어느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연애시에만 머물지 않고 민중에 대한 고결한 사랑의 시로 거듭났다. 그는 한 평생 시로 민중들을 위무했으며, 그의 시는 민중들의 칼이 되어 그들 곁에 머물렀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
네루다 자서전 속에는 다양한 시인들과 문학가, 혁명가, 독재자,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우리가 이름을 들어본 유명 예술인들도 많고,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더 많다. 그들과의 에피소드는 작은 단편처럼, 나름의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아름답고 치밀한 언어로 쓰여져 있다. 각각의 글은 그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참으로 깊은 애정의 헌사이자, 유머와 인간미가 가득 넘치는 감동의 송가이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스페인 시인 로르카에게 바치는 송가는 슬픔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있으며 고전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시 세계를 펼친 시인 살바토레 콰지모토에게 바치는 송가는 우정의 헌사로 넘친다. 그리고 흙냄새 물씬 풍기는 농부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에게 바치는 송가는 매우 시적이며 감동적이다.
시의 힘, 몇가지 에피소드
전쟁과 혁명, 그리고 대규모 사회 변동을 경험한 네루다 시대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넓은 땅에 시를 경작할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 그는 칠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에게 그의 시를 뿌렸다. 시는 곧 힘이었다.
1. 산티아고의 베가 센트럴 시장에서의 시 낭독회, 처음엔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던 검고 시들한 눈동자의 노동자들은 <가슴 속의 스페인> 시를 한 편 한 편 낭독하자 그의 시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그의 시에 감동하였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눈시울이 젖은 그들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거리로 나왔다. ‘이런 민중의 열광을 경험한 뒤에 달라지지 않을 시인은 없다’고 네루다는 적고 있다.
2.. 칠레 로타 지방에서 약 1만 명의 광부들을 위한 집회가 열렸다. 먼저 정치인들의 지루한 연설이 시작되었다. 연단에 앉아있던 네루다의 눈에는 광부들의 헬멧과 검은 모자만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 연사였다. 마침내 그의 이름과 시 ‘스탈린그라드에 바치는 새 찬가’가 소개되자 사람들은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있는 모자들을 보았다. 잔잔한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난 듯 1만 개의 모자가 일제히 무언의 존경을 담아 검은색 포말을 일으키며 아래로 사라지는 풍경은 그에게 벅찬 감동을 안겼다.
4. 젊었을 때, 탱고가 유행하고 건달이 판을 치던 시절에 친구들과 허름한 술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무대 위에서 쌈박질을 벌이던 두 건달을 혼내주려고 호기롭게 돌진했던 그는 전직 권투선수였던 건달의 주먹 앞에 죽을 뻔한 일을 당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건달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시 한 편을 꺼내 낭독하는 것이 아닌가. 그 시는 건달이, 꿈꿔볼 수도 없는 순수한 여인을 애인으로 얻게된 의미있는 시였던 것. 그녀와 건달을 엮어준 시 한 편 때문에 그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작가 베끼기
“나는 도둑이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플라톤, 피카소, 베르트람로스, 누구라도 최고의 인물에게서 생각을 훔친다. 나는 도둑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내가 훔친 것의 진가를 잘 알고 있고, 늘 소중히 간직한다. 물론 나만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물려줄 유산으로 여긴다.” ? 마사 그레이엄
이 책에는 내 글쓰기에 응용할 시적인 표현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예비 작가들이 습작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자신이 사모하는 대작가의 글을 무작정 옮겨 적는 것이라고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 스타일을 무작정 많이 베끼고 묘사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이 방법을 네루다에 적용해 보고 싶어졌다. 가슴에 고요히 젖어드는 문학적인 표현 뿐 아니라, 유머로 양념을 치는 그의 수법까지도 배우고 싶다. 그냥 쓴 것 같지만, 그의 타고난(혹은 의도된) 구성 감각이 여기 저기 돋보인다. 한 가지 더 배우고 싶은 것은 사람 자체에 집중하는 그의 미덕이다. 책 뒷부분에 네루다는 그가 기억하는 여러 사람들에 대한 단상을 적고 있다. 간명하게 피력되어 있지만 사람을 귀히 여기는 그의 심성이 그대로 만져진다.
거부할 수 없는 시의 운명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아침 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며/한번 붙으면 잠시도 놓아 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으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이 시는 이규보의 시벽(詩癖)이라는 시다. 여기에는 시가 숙명인 자의 어쩔 수 없는 넋두리가 애교스럽게 펼쳐져 있다. 네루다에게도 시는 불가항력,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그 자체였다.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 여명에 새소리에 끌려 베란다 창가에 섰다. 아, 예쁜 새소리가 들린다.네루다의 영이 나를 깨우는 소리처럼 들린다. 칠레의 숲 한 가운데에 서 있다고 상상하며 주문을 건다. 네루다의 시심이여 내게도 찾아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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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파블로 네루다, 그가 내 인생에 걸어 들어온 건 몇 년 전 보았던 영화 한 편을 통해서다. 네루다가 망명지 카프리섬에서 우정을 나누었던 이태리 시골 우체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네루다의 처연한 심정 너머로 펼쳐지던 시 한편,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로 시작하던 그 ‘시(Poetry)’는 느닷없이 내 가슴으로 흘러 들어와 오래도록 머물렀다.
책을 펼쳤다. 이미 내 안에는 뜨겁게 한 시대를 살다간 시인에 대한 존경과 흠모, 그리고 지극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시인 다운 언어들로 벼려진 첫 페이지, 역시 인트로부터가 다르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는 회고록을 쓰는 사람의 회상과 시인의 회상은 다르다고 적고 있다. 그의 자서전은 시인의 회상으로 시인이 살아간 시대의 불꽃과 어둠 속에 명멸하는 환영들을 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잠깐만, ‘비밀의 성지’를 감싼 넝쿨 숲에 발 먼저 불쑥 들여놓기 전에 나만의 의식을 치르자. 그래 일 포스티노 영화를 한번 더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네루다를 만나러 그의 성지로 들어가자.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 네루다 보다는 우체부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네루다 스피릿에 젖어보려던 애초의 의도는 잊고 우체부 마리오에게 빠져들었다. 답답한 이 친구, 말 하는 것도 답답하고 구부정한 어깨로 힘없이 앉아 있는 모습도 답답하고 낡고 볼품없는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 해안 도로를 덜덜거리며 달리는 모습도 답답하다. 베아트리체를 보고 넋을 놓은 채 한 마디도 못하는 모습도 답답하다. 온통 답답해 죽겠다. 어깨 좀 한 번 쭉 펴고, 말도 똑 부러지게 하는 걸 좀 봤으면 좋겠는데 영화가 다 끝나도록 그는 그대로였다.
영화가 끝날 무렵 나는 막 울었다. 끝내 피지도 못하고 어이없이 시위 군중에 밟혀 죽어버린 그가 답답해서 울었고, 그가 만들어낸 시심이 묘하게 교차하는 영화라는 공간 안에서 너무 슬프도록 아름다운 희망을 보고 울었다. 그의 답답함은 시가 살아나는 순수한 터전이었다. 그의 희망은 그의 어린 아들 파블리코의 눈 안에 들어있었다. 그는 가난하고 척박한 이태리 시골 바닷가에서 그 애비가 그랬듯 희구할 것 없는 어부의 삶을 숙명처럼 살진 않을 것이다. 그아이에게는 아비가 남긴 시와 시심이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내 머릿 속에는 여러 장면과 대사들이 흘러다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이 영화의 마리오는 다름아닌 네루다인 것을 깨닫는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네루다의 시 한 편. 네루다는 둘이 자주 찾았던 카프리 섬의 바닷가에 서 있다. 연락도 없이 무심했던 그가 카프리를 찾았을 때는 이미 마리오는 그곳에 없다. 포말이 부서지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진정한 시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루다의 얼굴 위로 그의 시가 펼쳐지고, 그 시 속에는 마리오가 선연하다.
나는 어렴풋이 첫 줄을 썼다/ …/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순수한 지혜/그리고 나는 문득 보았다/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파도소리,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소리,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소리, 교회의 종소리, 아내 뱃 속에서 아이의 심장이 뛰는 소리…마이크를 들고 다니며 네루다를 위해 고향의 아름다움을 소리에 담는 마리오는 영락없는 시인이다. 그의 시가 심원한 자신의 존재와 만나는 순간, 그는 현실을 저항할 힘까지 얻는다.
아, 에머럴드 빛으로 출렁이는 카프리 섬 바닷가를 처연히 걷고 있는 네루다 얼굴 위로 한 점 더럽힘도 없이 순수히 시에 다가갔던 마리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제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And it was at that age...Poetry arrived/ in search of me. I don't know, I don't know where/ it came from, from winter or a river/ I don't know how or when/ no, they were not voices, they were not/ words, nor silence/ but from a street I was summoned/ from the branches of night/ abruptly from the others/ among violent fires/ or returning alone,/there I was without a face/ and it touched me.
다시 책을 펼친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262-263)
카프리 섬은 네루다가 자란 칠레 남부의 숲이고, 마리오의 시 속에 스며든 카프리 섬의 모든 숨결은 네루다의 시 속에 스며든 칠레 자연의 숨결이다. 그들에게 고향의 자연은 마르지 않는 시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그 땅과 숲, 바다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노래했던 것이다.
2. 마음에 들어온 글귀
16. 칠레의 숲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삶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56. 수줍음이란 마음이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이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66.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물론 이성이 우위를 점해야 하며 정의의 근간인 이성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
77.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빳빳한 새 책이 모습을 드러낸 저 순간, 날개를 활짝 펼치고 훨훨 날아가는 듯한 저 황홀한 도취의 순간,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첫눈에 들어오는 꽃봉오리를 응시하는 그런 환희의 순간은 시인의 일생에서도 단 한 번밖에 없다.
83.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84. 우리말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말은 이 야만적인 정복자들의 장화 밑바닥에 박혀있던 조약돌처럼 수염에서, 투구에서, 편지에서 떨어졌습니다. 지금 그 빛나는 말이 여기 남아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패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자였습니다. 저들은 황금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황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갔지만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우리들에게 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91. 발파라이소는 골목도 많고 모퉁이도 많고 숨겨진 것도 많은 곳이다. 산동네에는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집집마다 내걸린 빨래와 끊임없이 늘어나는 맨발의 아이들은 벌집같은 판자촌에서도 사랑은 식지 않았다는 증거다.
94. 지진은 도시의 심장에 붙어있는 공포의 꽃잎이다.
179. ‘에르난데스, 드디어 직업이 생겼어. 자작이 자네에게 한자리 주겠대. 이제 아주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거야. 원하는 자리가 뭔지 말해 봐. 그래야 임명을 하지.’ 에르난데스는 생각에 잠겼다. 때 이른 주름살이 깊이 파인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몇 시간이 지난 오후에야 그는 대답을 주었다. 인생 문제의 해답을 찾은 사람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마드리드 근처에서 염소 데를 키울 수 있게 해줄 수는 없을까?’
186. 로르카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수가 없었다. 로르카는 또 다른 교살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95. 지성사에서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사건도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
209.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10. 시는 언제나 평화적 행위이다. 밀가루가 있어야 빵을 만들듯이 평화가 있어야 시인도 있다…그러나 시는 죽지 않았다. 시는 동요에 등장하는 고양이처럼 목숨이 일곱 개나 되는 불사신이다. 시를 괴롭히고 길거리로 끌고 다니고 침을 뱉고 조롱거리로 만들고 목 졸라 죽이려 들고 추방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총알을 난사해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갓 씻은 해맑은 얼굴을 보이고 갓 찧은 쌀알 같은 웃음을 짓는다.
214. 이제 우울한 시는 쓸 수 없었다.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우수에 찬 주관주의나 <지상의 거처>에 담긴 고통스러운 애상은 막을 내렸다…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28.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것,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강렬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이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을 뿐이다. 인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를 바라보았으니 텅 빈 도시만 눈에 들어왔다. 비참한 모습의 공장을 둘러보았으나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이다.
228.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고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228. 내 시에서 가장 신비한 재료로 만든 새로운 대륙이 솟아나고 있다. 나는 이 대륙에 정착하고, 이 대륙에 이름을 붙이고, 신비한 해안선을 만져보고, 파도를 잠재우고, 동물들이 사는 땅을 둘러보고, 지형을 측량하는데 어둡고 고독하고 아득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257. "내가 칠레 시인이라면 파블로 네루다처럼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아니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이탈리아 소설가)
262.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로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 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주는 시인이 있어.”
1945년 7월 15일, 나는 칠레 공산당에 가입했다.
272. 칠레에서는 하찮은 돌멩이까지도 내 목소리를 알아먹는다…무성한 숲과 호수의 화산과 밤을 손아귀에 집어 넣은 빗줄기는 이 인간의 은신처가 다른 법을 따르고 또 자신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격노한 나머지 계속 공격해 댔다.
298. 문학에서 새로운 형식, 즉 기존 형식의 혁신은 관습적인 틀을 넘어서거나 깨뜨려야 한다. 하지만 문학이 어떻게 철저하고 광범위한 혁명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이 경험한 승리, 갈등, 인간적인 문제, 풍요, 진보, 성장을 핵심적인 주제에서 제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잔인한 침략자들에게 짓밟히고 집요한 식민주의자들과 온갖 종류의 우민화를 자행하는 세력에게 포위된 저 소련의 민중들과 연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문학이나 예술이 이처럼 본질적인 사안을 외면하고 공허한 자율성만을 고집해도 된다는 말인가?
300. 작가의 작업도 저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싯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341. 나는 파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 역시 그 누구도 파문시키지 않을 것이다…사람은 사람일 뿐, 그 외의 어떤 규칙이나 호칭이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또 대다수 사람들이 읽고 듣고 번영하기를 바란다.
375. 전쟁과 혁명, 그리고 대규모 사회 변동을 경험한 우리 시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땅에 시를 경작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나는 칠레 구석구석을 다니며 동포들에게 내 시를 뿌렸다.
377-378. 버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고 있었다..사람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이런 걸 경험한 뒤에 달라지지 않을 시인은 없을 것이다.
387.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8.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는 노력이 필요했다.
391.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그러나) 시인의 자부심은 보여주고 싶다…적어도 몇몇 작가들은 신성한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다.
392.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4.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합리와 비합리라는 양극단은 시 내부에서 부단히 다투고 있으며 한 번은 이쪽이 승리하고 한 번은 저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시 자체가 패배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집도 장난감처럼 지어놓고 그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다.
397. 지식인들은 술집으로 도피했다. 술을 마시면 빈곤마저도 다음 날 아침까지는 황금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406. 사랑의 노래여! 균형감각을 회복하고 고통을 노래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다오. 진정 이 세계는 전쟁을 쓸어낼 수 없고 증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실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 또한 사람들이 고통을 딛고 일어나, 피와 부서진 유리조각을 딛고 일어나 서로를 이해하리라고 확신한다.
436.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446. 사실, 이 땅에서, 이 땅이 부르는 노래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피와 이름 모를 꽃이다.
495.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를 바란다 ? 월트 휘트먼
496. 나는 군중에게 인생을 배웠다…고독과 군중은 이 시대 시인이 떠맡아야 하는 기본 의무이다. 나는 군중이라는 거대한 물결에서,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정한 눈길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모든 시인이 이런 경험을 할 수는 없으나, 한번 경험한 사람은 이를 가슴에 간직하고, 작품으로 풀어놓을 것이다. 단 1분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다.
506. 낯선 식물이 도시의 담벼락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증오의 이끼였다.
517. (아옌데) 시신은 칠레 군인들이 난사한 기관총에 맞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저들은 또 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3. 내가 저자라면
네루다의 시 세계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한 여자의 육체〉에서)
사랑의 관능과 환희가 솔직하고도 과감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시는 사랑을 실존의 이념으로 삼겠노라는 젊은이의 선언이라 할 만하다. 그런 시인에게 대지의 생명력과 연애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과 시대적 상황에 눈을 뜨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 계기는 1936년에 시작된 스페인 내전이다.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비참한 공장의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내란이 끝나자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에게로 눈을 돌린다. 이후 그의 연작시들은 대지 위에서 억압받는 민중들을 열렬히 노래한다.
나와 함께 올라 다시 태어나라 형제여./ 네 고통이 뿌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이 생명의 잔에 땅에 묻힌 그대들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그리고 밑바닥부터 얘기해 다오, 이 긴긴 밤이 다하도록/ 내가 닻을 내리고 그대들과 함께 있으니 내게 모두 말해다오, 한땀 한땀,/ 한구절 한구절, 차근차근. 품고 있던 칼을 갈아 내 가슴에 내 손에 쥐어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피로 말하라.(<마추피추의 산정>의 연작시 중에서)
시대와 현실이 그렇게 그에게로 왔다. 그에게 시는 투쟁의 무기이자 선동의 수단이 되었다. 그는 1966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가해 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쿠바 혁명을 옹호하는 시를 수 천명의 청중 앞에서 낭송한다. 젊은 시절 초현실주의에 기울었던 시인은 이제 누구보다 결연한 현실주의자로 변모한 것일까.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394)
그의 마음은 민중에 대한 희망, 열정, 사랑으로 가득하다. 다만 그것들은 이제 거대한 자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여과된다. 그는 몸을 낮추고 민중의 언어와 삶 속으로 들어갔다. 네루다에게는 리얼리즘이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입장’이나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일체의 것들에 갇히지 않았다.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그에게 시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휴머니즘의 큰 그릇이었다. 그의 시는 어려운 미학적 단련과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하며 성장하였다. 그의 시는 칠레 남반구의 깊은 자연에서 발원하여 아메리카 대륙으로 흘러 들어갔다. 흘러가는 물살과 함께 그는 어느 것 하나 배척하지 않고 그 열정을 흡수하고 신비한 세계를 천착하며 민중들의 마음과 마음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는 고통받으며 투쟁했고, 동시에 사랑하며 노래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눈물과 입맞춤을 경험했고, 고독과 민중을 경험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시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시는 그의 투쟁과 사랑의 밑거름이었다. 그는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뼈 속까지 타고난 시인이었던 것이다.
"(1973년 현재) 첫 시집을 출간한지 50년이 지났다. 나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나는 내 수중의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소재들로 작업한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투쟁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391-2)
자서전에 대한 관심
왠지 모르지만 내 인생에 한 번쯤은 자서전을 쓰게 될 것 같다. 올해는 유난히 자서전을 많이 읽었다. 연구원 목록에 든 난중일기, 백범일지, 구본형, 라즈니쉬, 피터 드러커 자서전 외에도 오노요코, 마크 트웨인 자서전을 읽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나는 늘 글의 구성과 문체에 눈길이 간다. 사실 위주의 디테일한 전개보다는 시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해 느낌을 살린 자서전들이 내게는 더 친근하다. 사건 배열도 시간 순서보다는 무작위로 주제를 넘나드는 구성이 더 마음에 끌린다. 이래저래 이 책 네루다 자서전은 읽는 내내 나의 맘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노벨상을 받은 대 시인답게 그는 책 곳곳에 많은 감동을 숨겨두었다. 그는 노벨 평화상도 함께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이 책은 인간과 시의 승리를 증거하는 책이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민중의 편에 서려고 했던 네루다의 진정성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시적 서정과 함께 이 책 가득히 꿈틀거린다.
마지막 장 ‘살바도르 아옌데’ 편에서 그는 '이 회고록의 몇 줄을 위대한 동지 아옌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에 서둘러 쓴다’고 밝히고 있다. 아옌데 정권은 그가 민중과 함께 한 긴 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아예데의 집권은 너무나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 세력의 공습으로 불꽃과 화염에 휩싸인 왕궁에서 망명을 거부한 채 아옌데가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자, 마지막 생의 불꽃을 태우던 네루다의 생의 의지는 갑자기 꺾여버렸다. ‘저들은 또 칠레를 배신했다’로 자서전의 마지막 문장을 마감한 그는 그로부터 9일 후 아옌데를 따라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1973년 9월 23일의 일이다.
이 책의 번역
이 책의 번역은 참 훌륭하다. 옮긴 이의 언어 구사력이 그 어느 것보다 필요한 책인데, 네루다의 시적인 글맛을 한국어로 잘 살렸다. 번역서라는 느낌 없이 마치 우리 책을 읽듯이 편안하게 잘 읽었다. 역자의 박사학위가 절대적으로 아깝지 않은 번역이다. ‘옮긴 이의 말’에 책을 깔끔하게 요약해 놓았다. 저력이 보인다. 뒤에 첨부한네루다 연보도 매우 유용하다. 책을 읽는 동안 사건과 사건을 잇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정서의 원천
그는 아메리카 대륙, 칠레 남부 황량한 테무코에서 가난한 철도 기관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바로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 그의 시가 다루지 않은 영역은 없어 보인다. 그는 열 아홉의 나이에 문단에 데뷔한 이래 40여권의 시집과 3500 여편의 시를 불꽃처럼 터트렸다. 이쯤 되면 애정, 환상, 자연, 인간, 민중 이란 주제를 오가며 저항시와 연애시를 동시에 쓸 수 있었던 그의 정서적 토양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자유롭고 분방하고, 아름답고 싱그럽고, 거침 없고 사려 깊고, 활화산처럼 강렬하고 관능적인 그의 시어들. 시인 미스트랄의 시 세계를 설명하며 그는 미스트랄의 작업장 용광로 속에 들어간 최고의 요소, 즉 항상 애절한 고통으로 사무치는 그의 시의 비밀 재료는 무엇일까 궁금해한다.(422) 나는 그의 작업장의 용광로를 붉게 타오르게 한 비밀의 재료들이 궁금하다. 그것은 탱고가 대변하는 남미 특유의 정열이요, 남미 예술 고유의 페이소스가 아니겠는가.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를 주문했다. '내 심장을 위해서는 네 가슴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뭇잎은 내 영혼의 물에 떨어졌다', '너는 오래된 길처럼 사물을 너에게로 모은다',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렇게도 길다' , '내 몸에 묶여 우는 정염',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와 같은 시어들이 어떻게 19세 소년에게서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인지...
이 책의 독특함은 남미 특유의 정서에 빚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에서 호흡할 수 있는 공기와 냄새는 어쩔 수 없이 남미의 것이다. 네루다의 영감의 원천은 의심할 바 없이 칠레의 대자연이었다. 여인의 육체를 탐닉하는 시 속에서 조차도 남미의 자연은 은유로 함께 한다. 일상적인 사물의 소박함을 노래하는 시에도 텁텁한 남부의 흙 냄새와 각종 나무와 꽃들의 그림자가 어려있다. 아직 위대한 시인이 아니었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시 속에는 칠레 남부의 자연이 자리를 틀었다. 그는 타고난 보헤미안이었다. 그가 평생 세상을 떠돌아 다닌 것은 단지 직업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보헤미안 기질은 여성과의 사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밀집 더미 위에서 멋모르게 나눈 16살 풋내기의 하룻밤 사랑을 시작으로 그는 실로 다양한 여인들을 품에 안았고, 본능이 욕망하는 대로 어느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연애시에만 머물지 않고 민중에 대한 고결한 사랑의 시로 거듭났다. 그는 한 평생 시로 민중들을 위무했으며, 그의 시는 민중들의 칼이 되어 그들 곁에 머물렀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
네루다 자서전 속에는 다양한 시인들과 문학가, 혁명가, 독재자,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우리가 이름을 들어본 유명 예술인들도 많고,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더 많다. 그들과의 에피소드는 작은 단편처럼, 나름의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아름답고 치밀한 언어로 쓰여져 있다. 각각의 글은 그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참으로 깊은 애정의 헌사이자, 유머와 인간미가 가득 넘치는 감동의 송가이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스페인 시인 로르카에게 바치는 송가는 슬픔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있으며 고전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시 세계를 펼친 시인 살바토레 콰지모토에게 바치는 송가는 우정의 헌사로 넘친다. 그리고 흙냄새 물씬 풍기는 농부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에게 바치는 송가는 매우 시적이며 감동적이다.
시의 힘, 몇가지 에피소드
전쟁과 혁명, 그리고 대규모 사회 변동을 경험한 네루다 시대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넓은 땅에 시를 경작할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 그는 칠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에게 그의 시를 뿌렸다. 시는 곧 힘이었다.
1. 산티아고의 베가 센트럴 시장에서의 시 낭독회, 처음엔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던 검고 시들한 눈동자의 노동자들은 <가슴 속의 스페인> 시를 한 편 한 편 낭독하자 그의 시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그의 시에 감동하였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눈시울이 젖은 그들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거리로 나왔다. ‘이런 민중의 열광을 경험한 뒤에 달라지지 않을 시인은 없다’고 네루다는 적고 있다.
2.. 칠레 로타 지방에서 약 1만 명의 광부들을 위한 집회가 열렸다. 먼저 정치인들의 지루한 연설이 시작되었다. 연단에 앉아있던 네루다의 눈에는 광부들의 헬멧과 검은 모자만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 연사였다. 마침내 그의 이름과 시 ‘스탈린그라드에 바치는 새 찬가’가 소개되자 사람들은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있는 모자들을 보았다. 잔잔한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난 듯 1만 개의 모자가 일제히 무언의 존경을 담아 검은색 포말을 일으키며 아래로 사라지는 풍경은 그에게 벅찬 감동을 안겼다.
4. 젊었을 때, 탱고가 유행하고 건달이 판을 치던 시절에 친구들과 허름한 술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무대 위에서 쌈박질을 벌이던 두 건달을 혼내주려고 호기롭게 돌진했던 그는 전직 권투선수였던 건달의 주먹 앞에 죽을 뻔한 일을 당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건달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시 한 편을 꺼내 낭독하는 것이 아닌가. 그 시는 건달이, 꿈꿔볼 수도 없는 순수한 여인을 애인으로 얻게된 의미있는 시였던 것. 그녀와 건달을 엮어준 시 한 편 때문에 그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작가 베끼기
“나는 도둑이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플라톤, 피카소, 베르트람로스, 누구라도 최고의 인물에게서 생각을 훔친다. 나는 도둑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내가 훔친 것의 진가를 잘 알고 있고, 늘 소중히 간직한다. 물론 나만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물려줄 유산으로 여긴다.” ? 마사 그레이엄
이 책에는 내 글쓰기에 응용할 시적인 표현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예비 작가들이 습작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자신이 사모하는 대작가의 글을 무작정 옮겨 적는 것이라고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 스타일을 무작정 많이 베끼고 묘사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이 방법을 네루다에 적용해 보고 싶어졌다. 가슴에 고요히 젖어드는 문학적인 표현 뿐 아니라, 유머로 양념을 치는 그의 수법까지도 배우고 싶다. 그냥 쓴 것 같지만, 그의 타고난(혹은 의도된) 구성 감각이 여기 저기 돋보인다. 한 가지 더 배우고 싶은 것은 사람 자체에 집중하는 그의 미덕이다. 책 뒷부분에 네루다는 그가 기억하는 여러 사람들에 대한 단상을 적고 있다. 간명하게 피력되어 있지만 사람을 귀히 여기는 그의 심성이 그대로 만져진다.
거부할 수 없는 시의 운명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아침 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며/한번 붙으면 잠시도 놓아 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으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이 시는 이규보의 시벽(詩癖)이라는 시다. 여기에는 시가 숙명인 자의 어쩔 수 없는 넋두리가 애교스럽게 펼쳐져 있다. 네루다에게도 시는 불가항력,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그 자체였다.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 여명에 새소리에 끌려 베란다 창가에 섰다. 아, 예쁜 새소리가 들린다.네루다의 영이 나를 깨우는 소리처럼 들린다. 칠레의 숲 한 가운데에 서 있다고 상상하며 주문을 건다. 네루다의 시심이여 내게도 찾아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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