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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3일 20시 16분 등록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고병권, 소명출판

● 저자에 대하여

니체는 독일의 철학자이며 시인이다. 실존 철학의 선구자로 불리며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 이다. 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기독교적·민주주의적 윤리를 약자의 노예 도덕으로 간주하고 강자의 군주 도덕을 찬미하였으며, 그 구현자를 초인(超人)이라 명명하였다.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인 것을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허무주의에 의하여 모든 것의 가치 전환을 시도했다. 전통적인 서구 종교, 도덕, 철학에 깔려 있는 근본 동기를 밝히려 했으며, 신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 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를 반성했다.

니체는 루터의 경건주의를 신봉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열네 살 때 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음악과 그리스·로마 문화에 심취했다. 1864년 스무 살 때 본대학에 입학,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배웠다. 스승 리츨 교수가 대학을 옮기자 스승을 따라서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는다. 또한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69년에 스승인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에 의무병으로 지원했지만 한달도 안되어 환자를 수송하다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렸다.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온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시달렸다. 니체의 첫 저술인 ‘비극의 탄생(1872)’은 당시 심취했던 바그너의 비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듣고 매혹되어 지었다고 한다. 1878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져 이듬해인 1879년 교수직을 사임한다. 1879~1889년의 기간에는 책을 쓰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 기간동안 중병에 시달렸고 기력도 잃었다. 알프스산과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변을 전전했는데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접촉도 하지 않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883~1885년에 4부작으로 출판되었는데 4부는 자신의 돈으로 출판했다. 그가 쓴 대부분의 책들도 그랬지만 이 책도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철학을 직접적인 산문형식으로 표현한 ‘선악의 피안(1886)’과 ‘도덕 계통학(1887)’도 독자를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1888은 니체의 정신이 정상적이었던 마지막 해였다. 그해에 ‘바그너의 타락’ ‘우상의 황혼’ ‘반그리스도’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등을 썼다.
니체는 1889년 1월 이탈리아의 토리노 길거리에서 쓰러져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1900년 8월 25일 사망했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善)과 참(眞) 대신 권력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深淵)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內在的)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원숙한 문장과 함께 주로 문학자들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시대 변천과 함께 사상적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날의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었다.

니체는 훗날 그가 혐오했던 히틀러와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되었는데 이는 그의 누이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표적인 국수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인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했는데,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했다. 그녀는 니체의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통제했고 탐욕에 사로잡혀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모아 ‘권력에의 의지(1901)’등을 출간했다.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히틀러와 연결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니체는 20세기 철학 신학 심리학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셸러, 카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는 니체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도 마찬가지다. 철학과 문학비평에서 일어난 실존주의와 해체주의는 그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신학자 파울 틸리히, 레프 셰스토프는 ‘신은 죽었다’의 신학자인 토머스 알타이저와 마찬가지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위대한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니체가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니체가 자기를 그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이해했다고 말한 지크문트 프로이트, 알프레트 아들러, 카를 융 등 심리학자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앙드레 말로, 앙드레 지드, 존 가드너 등의 소설가와 조지 버나스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슈테판 게오르크,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시인과 극작가도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니체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의 한사람이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 책머리에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ㅑ.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4]

이 미래의 철학자가 오해되었던 것은 신비함이나 모호함 때문이 아니다.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 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5]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7]

제1부

제1장, 아모르 파티:삶을 사랑하는 철학

서구 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 ‘죽음의 설교’인 것은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계’는 죄로 가득한 세계이며 천국은 ‘저 세계’에만 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 ‘죄’와 연관시킨다.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클수록 우리가 지은 죄는 커진다. “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는 역산된다.” 이 세계는 지로 출발한 세계이며, 그 죄가 번성하는 세계이고, 그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세계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벌어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면 삶을 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조롱한다. “그들 역시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음을 비웃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소망한다. 그렇게 죽음이 좋은 것이라면 제발 빨리 그들이 원하는 세계, 천국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기를... [30]

철학자들이 삶을 개념으로 포착할 때 그것 역시 일종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사유 공간은 극장이며 그들이 세운 체계는 무대이고 개념들은 장치들이다. 니체가 “체계를 세우려는 자들의 연극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일차적으로 겨냥하거 있는 것은 이론적 인간 즉 철학자들이다. 플라톤의 동굴은 극장의 전형이다. 관객은 쇠사슬에 묶여 스크린만을 보도록 강제된다. 벽은 어둡고 사람들은 뒤에서 날아오는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들의 운동을 보게 된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가 동굴밖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극장을 끌어들였지만, 그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극장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45]

그러나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52]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58]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여기서 평가 양식상의 중요한 차이가 나타난다.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77]

이제 매 맞고 있는 것은 강자나 귀족이 아니라 바로 약자 자신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질병처럼 학대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관리한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사악한 것의 침투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을 체크하는 청교도가 근대인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신이 보고 있다. 신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있다!  더구나 이제 죄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니가. 인간은 이미 원죄를 타고 났으므로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형벌도 이처럼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82]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사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서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다. [95]

헤르메스를 떠올려보자. 해석학자들은 제우스를 보고 싶어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보고 배워야 할 스승은 헤르메스다. 재치와 배짱의 신 헤르메스는 전령이기 이전에 해석자이다. 그는 메시지를 해석하는 자이고, 창조하는 자이다. 헤르메스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고통으로 여겨지는 한 해석학자들은 창조하는 해석의 즐거움을 모른다. [119]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123]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니체가 저작의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쓰고 있는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라는 표현은 가치의 습속화를 통한 근대적 정치 주체의 생산을 분석함에 있어 매우 유용하다. [127]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 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136]

길들이기의 작업이 끝나면 길러내기의 작업, 즉 재생산의 작업이 시작된다. 강제된 덕목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본능이 되어야 한다.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니체는 학교보다 군대가 열등한 수단이라고 보았으며, 학교의 도움으로 정부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142]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3]

우리는 육체가 느끼는 수동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같은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 느끼는 육체가 뛰어나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능력으로 지배한다. [178]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모든 불멸하는 존재의 죽음은 결코 슬퍼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기쁜일이다. “장례식의 비가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성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상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 “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 “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 [182]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은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192]

긍정이 부정보다 원리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들뢰즈는 이렇게 표현했다.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과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 부정이 포함된다. 긍정은 부정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사원을 지으려는 자는 기존의 사원을 부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표를 써넣으려는 자는 낡은 가치표를 지워야 한다. [203]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이란 것을. [209]

제7장, 인간

“수많은 별들로 반짝거리는 우주의 외딴 어는 곳엔가” 인간이라는 이름의 “영리한 동물이” 사는 지구라는 혹성이 있다. 지구는 자신의 나이에 비하면 ‘방금’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인간이라는 동물의 탄생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준비해 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혹성이다. 그러나 지구는 반문한다. 내가 인간을 위해 준비된 혹성이라고? 하하! 인간이 지구의 대표라고? 그건 건 “숲 속의 개미가 자신이야말로 숲의 존재 목적이라고 단단히 믿는 것”과 같다. 혹시 인간은 “세계의 희극 배우”로 데뷔할 생각은 없는가? [210]

푸코는 인간을 바닷가 모래밭에 그려진 얼굴에 비유하면서 밀물이 한 번 밀려들고 나면 지워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제 발로 서서 스스로를 자가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듯이 그의 운명이 끝날 날도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216]

그런데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더 이상 세계를 검열하는 심판이 사라졌으며, 저 세계에서 죄를 묻는 일은 없다는 것, 천국이란 믿음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222]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231]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다가 광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그가 썼던 모든 가면들, 그를 대신했던 모든 인물들은 그가 벌인 탐험의 결과물이다. 누구보다도 차라투스트라가 여행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여행 기록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제2권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바로 그 자신이다. [250]

이제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53]

제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과 딜레마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268]

훈육의 최고 목적은 능동적 자제다. 특히 능동적 겸열과 관련해서 일기가 수행한 기능은 놀랍기까지 하다. 원래 일기는 교회 지도자들이 여신도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하루동안 행한 일들을 적어오게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하루의 일들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약속을 하는 수단이 되었다. 아마도 교회가 마을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약속하는 신체는 더욱 큰 계산 가능성을 보장하고 더 큰 사회적 안정을 가져온다. 약속은 미래행위를 고정시키는 일이고 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변동을 최소화시키는 일이다. 이제 통제는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이 되고,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이 된다. 베버가 말하는 철창이 왜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그것은 제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내적인 감옥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움직일수록 감옥은 더 강력하게 조여든다. [274]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서구 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적 상황은 좌파와 우파에게 모두 큰 충격이었다. 월러스틴 등이 말했던 것처럼 국가를 하나의 도덕적 버팀대로 삼고, 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해왔던 기존의 정치세력들에게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난동이고 폭발이었다. 68혁명으로 불리느 이 운동은 전통적인 영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학개혁, 가부장적 권위주의, 권위적 민주주의, 성에 대한 억압, 여성 문제 환경 문제, 권위적인 노동조합과 당에 대한 거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욕망과 가치의 투쟁을 불러왔다. 그 공격을 단지 부당하게만 여겼던 구좌파들은 68혁명에 대한 어떤 이해나 대응도 취하지 못했고, 결국 68을 뒤집은 89의 복수로 쇠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파들에게 68혁명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288]

이것이 바로 국가, 리바이어던의 탄생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상호 계약에 의해 평화와 공동 방위를 위해 모든 힘과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격이다. 정의와 소유권은 국가의 탄생과 함께 하며, 평화와 안전을 위해 사람들이 또한 만든 시민법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 보장받는다. 신민의 자유는 시민법이 그 규제를 면하는 것들, 가령 매매의 자유, 계약의 자유, 주거 선택의 자유, 생업 선택의 자유 등에 존재한다. [297]

이제 국가는 공동선과 정체성, 공동체에 실재성을 부여해 주는 실체가 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레이건과 부시가 모두 도덕과 가족의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은 국가가 이제 경제적 개입을 넘어서 도덕적 개입을 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신자유주의가 강력한 도덕과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효율성과 정의에 대한 가치 판단들이 전면에 내세워진 것은 윤리적 실체로서의 국가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313]


● 내가 저자라면

목불식정(目不識丁)은 고무래를 보고도 정(丁)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속담으로 풀어보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말과 같다. 아주 무식한, 까막눈이라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짙은 어둠 속에서 코끼리를 만지는 듯 했다. 어둠 속이라 코끼리의 모습이 어떠한지 짐작도 하지 못했고 코끼리가 너무 커서 내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어느 부분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검은 것은 글씨이고 흰 것은 종이더라 해도 과히 지나치지 않아 보였다. 인용문을 적어내었지만 그 말들의 문구와 글자만 적었을 뿐 글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철학적 글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것이다. 개념서 같은 종류의 책은 읽어내기에 무리가 없었지만 깊은 눈을 가진 철학책을 만나면 글자 위에서 눈이 헛돌다 책을 덮어버리고는 했다. 젬병이 되는 것이다.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은 아주 잘 쓴, 그리고 아주 쉽게 풀어 쓴 책이라는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니체를 우리 옆에 끌어다 놓았다’든가 ‘니체를 읽으면 아포리즘을 적어내고 싶다’는 느낌은 남의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니체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할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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