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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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지음/소명출판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고병권(1971 ∼ )
니체 하면 제일 떠오르는 문장이 ‘신은 죽었다’이다. 이것은 그의 유명한 저서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신은 죽었다.... 신은 왜 죽었을까? 여기에 얽힌 우스개 소리가 하나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 옛날 한 옛날, 거대한 신전에서 모든 신들이 모여 한가롭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신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신은 오직 나 하나다."
그 소리를 듣고 주변에 있던 모든 신들이 일제히 배꼽을 잡고 웃다가.... 웃다가....
그만 모두 죽었단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_-;
이제 곧 겨울이라 마음도 몸도 모두 추울텐데, 금상첨동(錦上添凍)하여 미안하다. 진도 나가겠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이 책 안에 소개된 내용을 약간 각색한 것에 다름 아님을 알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저자 고병권은 소위 ‘니체통’ 요즘말로 하면 ‘니체빠’이다. 만약 그가 니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확실한 것 하나는 결코 지금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그만큼 니체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의 삶에 들어와 그를 온통 흔들어 놓았다. 그가 니체와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그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맑스를 그 근본에서 새롭게 살펴보자는 흐름에 나도 끼여들고 싶었던 때였다. 때마침 대학원 동기들 사이에 맑스 원전을 읽는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경철초고』를 읽은 직후였을 것이다. 누군가 머리 좀 식히자며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소개했다. 하나의 휴식으로서. 그렇다. 니체는 내게 하나의 휴식으로 찾아왔다.
강력한 감전. 원인은 모른다. 다만 맑스 원전을 통해 좀더 깊어지고 있다던 내 믿음은 그때 박살이 났다. 나는 깊이 내려가고 있었던 게 아니라 더 무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게와 깊이의 혼동! 표정만 심각했지 난 결코 급진적이지 않았다. 급진적인 것은 오히려 니체의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가벼웠으나 단단했다. 말들이 부딪히면 깨지는 건 내 쪽이었다. 하지만 말들의 패배는 내게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과 니체’ 중에서
그가 니체라는 이름의 휴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전형적이고 나름의 깊이를 가진 마르크스 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현실에서 자신의 주장을 마음대로 펼치며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그는 니체라는 급진주의자를 통해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삶의 속도와 깊이를 조절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지금 현실에서 펼치는 활동은 지극히 인상적이다. 그는 책을 집필, 출간하고 사회적 이슈가 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며, 때때로 강연을 나가기도 한다. 내가 ‘지극히 인상적’이란 표현을 쓴 것은 그의 강연내용과 그 대상 때문이다. 저자 고병권이 그의 저서 <고추장, 책으로 말하다>를 출간하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 한 중학교에 강연을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그가 쓴 책의 면면을 살펴보아 중학교에 강연을 나갔다는 사실은 내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강연 후 어떤 중학교 학생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남긴 강연후기를 남겼는데, 그 후기 내용이 또한 내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내용을 여기에 옮겨본다.
<중2 학생의 후기>
나는 여름방학에 수유 연구실로 니체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다니던 중에 고병권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하나하나의 말들 때문에 방학이 끝나고서 까지 괴로워했었다. 그 말들은 이제까지 내가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생각'이라는 것에대해 내가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그때의 강연이 안겨준 골칫거리들과 씨름하는것 조차 차츰 잊어가고 있을때 학교에서 고병권 선생님의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특기적성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대형 강의실로 달려왔던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 나를 비롯한 많은 청중들에게 토해낼 말들이 또다시 나를 들볶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냥 지나쳐버릴수가 없었다.
강의 내용은 지난번에 내가 들었던 것과 거의 똑같았다. 내가 듣기엔 강연 내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항상 생각하라(그리고 변화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 몇마디로 표현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간단한 말이지만 문제는 실제로 이 말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각하며 사는 것'에 대해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이라는 단어의 원래의미를 이제껏 모르고 살아온 것이 놀라웠고 생각없이 용케도 살아온 내가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강연이 끝났을 때 나는 조금이라도 생각이란걸 해보려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마 나만 이렇게 느낀게 아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의 강연이 끝나고서 같이 들었던 애들의 표정을 보니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고병권 선생님의 말은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꾼다. 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생각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되고 조금이라도 생각하려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건 그 생각이 머리에서만 그치지 않고 우리의 몸을 바꾸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라진 생각은 달라진 몸을 만든다. 나는 나에게 너무 익숙해서 아무런 것도 느낄 수 없는 이 정지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매일매일 같은 곳만 보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생각하는것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같은 것을 생각하고 똑같은 결론을 반복하면 또 항상 같은 문제때문에 괴롭게 된다. 우린 항상 다른 곳에 서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선 생각하고 몸을 변화시키고 또 생각하고 몸을 바꾸는 수 밖엔 없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자유란 것도 우리가 한곳에 멈춰있지 않기 하기위한 수단일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느것에서건, 어떤 상황에서건 내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멋진말이다!) 나는 자유롭기위해선 자유를 얻기위한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얻은 자유가 또 다른 벽에 부딛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그 과정속에서 변화해야 할 것이다. 자유는 목적인 동시에 그 과정 안에 항상 존재한다.
강연 이후 생각하고 변화하면서 살려고 나름 노력하는데도 항상 같은 곳에서 엉킨 실타레를 붙들고 씨름하는 기분이 든다. 이것만 풀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엉키고 있다.
나의 세계를 소리없이 감고있던 태엽이 움직임을 멈춘 것 처럼. 끄악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 후기를 읽으며 스스로 후회하고 반성하는 어른들이 제법 될 것이다. 저자 고병권이 아직 어린 중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사실 별게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항상 생각하라(그리고 변화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것! 눈을 감은 채, 잠든 채, 멍한 채, 어렴풋한 정신만으로 세상을 살지 않고 눈을 뜬 채, 깨어있는 상태로, 맑은 정신을 지니고서 세상을 맞으라는 것이다. 생각하는 삶이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것, 너무나 쉬운 사실 아닌가! 우리는 그 쉬운 사실조차 자주 까먹고 살아가는 건망증 환자들이다. 아니, 우리가 건망증이 있는 지 없는 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치매 환자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추장으로 있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는 최근 한 출판사와 손잡고 ‘부커진R’이라는 책과 잡지의 형식을 합쳐 놓은 ‘북잡지’를 발간하였다. 책(Book)과 잡지(Megazine)의 합성어가 바로 ‘부커진’이다. R은 혁명을 의미하는 Revolution의 대표글자인 R을 의미한다고 한다. 왜 R을 넣어야만 했을까? 저자 고병권은 창간사에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몇 번을 곱씹어도 좋을 좋은 말이라 생각한다.
“모든 혁명은 첫 글자 ‘R’만을 필요로 한다. 혁명이란 완성할 수 없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매번 새로 쓰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기에 그렇다. 우리는 과거 혁명이 제 자신의 철자를 계속 이어가려 할 때마다 단호하게 미래 혁명의 첫 글자 ‘R’을 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R’을 쓴다. 너무나 오랫동안 발전해온 ‘발전’과 결별하기 위해, 너무나 선진화된 ‘선진’과 결별하기 위해 ‘R’이라고 쓴다. 우리에게는 발전론 자체가 낡은 과거다. 아니 반대로 말해도 좋다. 발전론과 결별한 우리에게는 어떤 과거도 충분히 미래적이다.”
■ 저자 약력
1971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서유럽에서 근대 화폐구성체의 형성』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논문으로는「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등이 있다.
저서로는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등이 있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등을 옮겼다. 코뮨주의,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지속적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현재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추장(대표)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부커진R의 편집인이기도 하다.
■ 니체 약력 및 소개
프리드리히 니체(1844.10.15 ~ 1990.8.25)
1844년 : 10월 15일. 독일의 작센 주 뤼첸 근교 레켄 마을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남
1849년 : 부친 뇌연화증으로 사망
1858년 : 나움부르크 근교의 슐포르터 고등학교 재학
1861년 : <트리스탄>의 피아노 발췌곡이 발표되어 바그너를 알게 된 이 무렵부터 세익스피어, 괴테, 휠덜린 등을 애독
1864년 : 슐포르터 졸업. 10월 본대학에 입학.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
1865년 : 10월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김. 쇼펜하우워 철학을 알게 되어 탐독
1867년 : 나움부르크 야전포병대 기병대대에 입대
1868년 : 10월 제대. 대학에 복학. 11월 8일 라이프찌히에서 처음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됨
1869년 :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원외교수로 강의
1870년 : 바젤 대학의 정교수가 됨
1872년 : <비극의 탄생> 출판
1873년 : 두통으로 시달림. <반시대적 고찰> 제 1편 (신앙 고백자로서의 저술가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 라우스) 출판. 단편 <그리스인의 비극 시대의 철학>이 쓰여지다.
1874년 : <반시대적 고찰> 제 2편 (생에 대한 역사의 이해)와 제3편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워) 출판 1876년 : <반시대적 고찰> 제 4편(바이로이트에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 출판. 병이 악화 되어 10월 대학을 휴직
1878년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출판
1879년 : 중병. 바젤대학 교직 사임
1880년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 2부 하권에 해당하는 <방랑자와 그 그림자> 출판
1888년 : 게오르그 브란데스가 코펜대학에서 니체에 대해 강의 <바그너의 경우>출판, <디오니소스 찬가>완성, <우상의 황혼>집필, <반기독교인>완성. 연말부터 정신착락의 증후가 나타남
1889년 : 1월. 예나 대학병원 정신과에 입원 1897년 : 어머니 사망. 누이동생과 함께 바이마르로 이주 1900년 :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56세로 사망. 고향인 뢰켄에 안장됨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찌히 근처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니체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후 그의 가족은 나움부르크의 할머니 집으로 이사했다. 음악과 시를 좋아했고 이미 14세 때에 「나의 인생에서」라는 자전적 소품을 썼을만큼 조숙했던 니체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벌써 권위주의적인 모든것에 저항적 태도를 보였고, 학교 수업 과정을 우습게 보고 그리스 철학 서적을 주로 탐독했다. 20세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 문헌학을 전공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공부보다는 술과 여자 등 쾌락을 좇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활에 혐오감을 느끼고 다시금 엄숙하고 고독한 생활로 돌아갔다. 본 대학 문헌학 교수였던 유명한 처칠 교수가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가자 니체 역시 친구 로데오와 함께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갔다.
이 라이프찌히 대학 시절에 그는 헌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사 읽고서 충격적인 감동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그가 평소 그 음악을 좋아해 왔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후기 낭만주의의 두 대표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와의 만남은 청년 니체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1879년 그는 25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 문헌학 조교수로 임명되었고, 이 바젤 대학 재임시에 그는 바그너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가 그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1879년 그의 나이 35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그는 10년간 강의해 왔던 바젤 대학 교수직을 사임했고, 그 이후 그가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약 10년간을 이탈리아 해안가나 스위스 산중의 요양지를 전전하면서 병과 고독과 싸우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중에서 8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루 살로메와 사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5개월 만에 헤어졌다.
병과 고독과 싸우는 이런 생활 중에서도, 점점 더 원숙해져 가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는 그치지 않았고, 그리하여 진행성 뇌마비의 발병에 의해 정신 착란에 빠질 때까지의 그 짧은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무르익은 사상들을 수많은 저술들을 통해 쉴새없이 토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1889년 1월 튀린에서 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11년 후인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 정신 병원에서 결국 그는 가장 사랑했고 가장 친했던 누이 엘리자베드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kks8498.do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머리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어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 “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라고 답할 것이다.(3P)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개의 주름을 본다.(3P)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들으려 한다.”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4P)
이 미래의 철학자가 오해되었던 것은 신비함이나 모호함 때문이 아니다.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5P)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5P)
그는 “단여섯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천개의 의미를 하나의 의미아래 그 천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다.(6P)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악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7P)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추다 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7P)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며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라도 실천이 필요하다.(8P)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지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8P)
서장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18P)
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21P)
제1부
제1장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이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25P)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를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27P)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를 삼았다.(27P)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27P)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있다.(29P)
서구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 ‘죽음의 설교’ 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계’는 죄로 가득한 세계이며 천국은 ‘저 세계’ 안에만 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 ‘죄’와 연관시킨다.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클수록 우리가 지은 죄는 커진다. ‘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의 크기는 역산된다. 이 세계는 죄로 출발한 세계이며, 그 죄가 번성하는 세계이고, 그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세계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이후에 버러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30P)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박되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다. 죽음의 설교, ‘몰락에의 의지’, 삶을 경멸하고 영원한 부정의 무게 아래 두는 것은 “삶에 있어 가장 깊이 든 질병일 뿐이다.”(31P)
생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이 부딪힌 과제 : 철학을 치료하는 철학, 삶으로부터 나쁜 기운을 덜어주는 철학, 삶으로부터 죄의식을 걷어 내는 철학,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가능할까? 불행히도 서구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31P)
소크라테스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 이라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을 때, 부풀어 있던 사유의 공간 역시 단 하나뿐인 진리를 향해 급속히 얼어붙었다. 빅뱅을 상쇄할 만한 거대한 냉각으로 진리에 관한 사유는 완전히 가라앉았다.(32P)
이로써 극단적인 두 세계가 생겨난다. 초라함과 부족함의 세계, 그리고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세계, “존재안의 피안에서 하나의 세계가 날조되었고, 그것이 참된 세계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참된 세계는 마침내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이제 상상된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평가한다.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32P)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 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 더 이상 신과 진리의 공과를 묻지 못하고 신과 진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묻는 인간의 왜소증,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하여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 이다. 이 세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33P)
그것은 비극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소인처럼 고통과 죄의 크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소인들의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36P)
오디오프스가 수동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프로메테우스는 능동적으로 죄를 범한다. 불을 훔친 범죄자 프로메테우스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누가 오디오푸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라고 무든 그리스인들은 이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38P)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 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 긍정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십자가에 달린 신이 삶의 저주라면, 디오니소스는 토막토막 잘리어 있으면서도 삶을 약속하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며 파괴로 부터도 돌아온다.”(41P)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 비국의 타락이 일어난 두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극장과 법원이다.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44P)
플라톤의 동굴은 극장의 전형이다. 관객을 쇠사슬에 묶여 스크린만을 보도록 강제된다. 벽은 어둡고 사람들은 뒤에서 날아온 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들의 운동을 보게 된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가 동굴밖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극장을 끌어 들였지만, 그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극장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45P)
심판은 삶을 완전히 암울한 것으로 만들었다. 심판만큼 삶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법을 죽였습니다. 시체가 생명 있는 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은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라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48P)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49P)
지배적 사상은 지배적 삶의 방식과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49P)
니체는 감리교의 원조로 알려진 존 웨슬리의 예를 통해 사상이 어떻게 물질적 힘으로 전화하는지 훌륭하게 설명했다. 웨슬리는 그의 스승 피터 뵐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대가 신앙을 가질 때 까지 신앙을 설교하라. 그 다음부터 그대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한 것이다. 신앙이 삶을 생산하면 이제는 삶이 신앙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삶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신앙은 극복되지 않는다.(50P)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국가를 통치하는 철학자의 꿈이지만, 현실에서 철학은 국가의 시녀였다.(50P)
철학이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때에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나 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류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이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51P)
분명히 광인은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 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 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52P)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의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53P)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려고도, 기념하려고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54P)
니체의 법정은 질서나 평화를 선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전쟁을 예고한다. 비판은 법정에 세우는 것이지만 재판을 받는 것은 기존의 가치들이다. 니체에게 심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55P)
그가 비판하는 것은 ‘부패’이며 ‘타락’이다. 죄에 대한 심판이라기보다는 병에 대한 진단,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은 무엇인가? 바로 가치 평가이다. “우리는 그 숙명적 불행이 시작된 재수 없는 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왜 기독교 최후의 날로부터 계산하지 않는가? 오늘부터, 모든 가치의 재평가가 이루어진 오늘부터 따져서 말이다.”(56P)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에 문제가 있다는 그것은 철학의 사랑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56P)
니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우려하는 까닭은 그가 가진 폭군적 본능 때문이다. 그는 “아고는 이루어지고 있는 장에 칼을 들고 나타난 검술선생이었다.” 그는 철학에 토너먼트씩 칼싸움을 도입했다. 진리를 가리기 위한 칼싸움.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57P)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57P)
이런 식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추하다.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57P)
‘삶’을 ‘사랑’하는 것. ‘운명애’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시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58P)
놀랍게도 말년의 니체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러한 신호를 발견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 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59P)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도덕학자나 도덕 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도덕에 합리적 기초를 제공하기를 원했고, 이제까지 모든 학자들은 자신이 그러한 일에 성공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도덕 그 자체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생각해왔다.” 도덕 학자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이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61P)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 -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가까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리라’ 라든지, ‘모든 사람을 도우라’ 혹은 ‘거짓을 자행하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 등등 모든 가르침은 어떤 인간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63P)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64P)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니체는 도덕학자들에게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에게 역사학이 없는 아니다. 문제는 역사학이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서 차이들을 난폭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65P)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층들,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65P)
푸코는 계보학자의 탐사 작업을 ‘잃어버린 사건들의 해방’이라고 불렀다.(65P)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위조행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의 보편적 기준을 찾아 나선 도덕학자들의 노력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지만,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도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행위인 것이다.(69P)
우리가 도덕을 인위적인 것으로 본다면 자연은 분명히 도덕의 외부에 위치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자연 안에도 가치를 심어놓았고, 결국 우리는 자연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본다.(69P)
니체가 ‘도덕의 자연사’를 이야기 할 때 그는 ‘자연의 도덕사’가 꿈꾸는 선한 자연(루소의 자연)을 인정하지 않는다. 19세가가 18세기보다 조촐하나마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이 있다면 자연의 비도덕성을 승인한 것이다. “자연에의 복귀는 아니다……. 결코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자연이란 바꿔 말하면 자연처럼 감히 비도덕적인 것이다.(70P)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의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72P)
여기서 평가 양식상의 중요한차이가 나타난다.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 한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자는 “억압하지 않는지,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77P)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고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78P)
이제 매 맞고 있는 것은 약자나 귀족이 아니라 바로 약자 자신이다. 인간을 인간 자신을 질병처럼 학대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관리한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사악한 것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을 체크하는 청교도가 근대인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제 죄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이미 인간은 ‘원죄’를 타고 났으므로 살아있는 한,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형벌도 이처럼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82P)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83P)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84P)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 시킨다.(85P)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 지도 모르다 는 생각…….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악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86P)
선악이라는 도덕적 가치판단을 넘어서도 여전히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평가는 남는다.(88P)
중력이나 전자기력처럼 덕도 사람을 당기고 밀치면서 행사되는 실재적인 힘인 것이다. 덕을 하나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도덕학에 대한 비판이 자연학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학자들은 사람들이 종교나 미신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예속을 원할 수도 있음을 경고해 왔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잘 아는 일,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89P)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90P)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90P)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선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다.(95P)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96P)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이다. 상호 주관성을 과학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주관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설 수 있는 방법이다. 행위자들은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수정해가고 결국에는 하나의 합의를 향해 점차 접근해 간다. 그는 ‘이상적 조건의 담화 상황’에서는 서로를 접근하도록 마드는 힘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물론 가다머는 이러한 ‘이상적 담화상황’ 이라는 가정을 “충격적일 만큼 비현실적”이라고 비꼬았다.(99P)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크게 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작게 보기도 한다. 마치 풍경화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103P)
니체의 해석학은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105P)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 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 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체계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107P)
이것은 일종의 ‘항변할 수 없다는 식의 주관적 강요’다고할 수 있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 때는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108P)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해석이 진리위에서 논의 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위에서 논의 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109P)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109P)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 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110P)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이다. 해석행위는 모드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112P)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112P)
니체의 해석은 지배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113P)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 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니체가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던 로렌스 스턴은 작품이 그렇다. “그가 정말로 칭찬 받아야 할 점은 완결한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다.(114P)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114P)
니체는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질서도 천천히 녹아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115P)
그녀는 니체의 스타일, 특히 경구나 은유가 ‘저속한 무리를 내쫒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경구나 은유는 단일하고 결정적인 해석을 쉽게 무너뜨린다. 해석은 항상 무한하게 열리기 때문이다.(116P)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이다.(118P)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120P)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아마도 니체는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귿대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122P)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증명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예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실패는 혁명 때문이 아니라 노쇠함 때문이겠지만.(122P)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한다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여이다.(123P)
니체는 근대의 정치를 ‘작은 정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간다고 말한다.“이제 작은 정치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 더불어 지상의 지배를 위한 투쟁이 막을 열 것이고, 필연적으로 위대한 정치가 도래할 것이다.”(125P)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 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127P)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패자의 것은 부인, 자식, 재산과 핏줄을 포함하여 모두 승자에게 속한다. 폭력은 최조의 권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국가의 원형은 전쟁을 통해, 그리고 군사계급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전쟁은 혼돈 상태의 대중들을 군사적 카스트 계급들로 분리시켜 전사적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내는 효과가 있다.(128P)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모두가 지쳐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할 때, 새로운 우상인 국가가 등장한다.(131P)
근대 시민사회에서 주권은 전체에게 있지만, 어느 시민도 그 주권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다만 자신이 복종해야할 법을 만드는데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추상화 되고 균질 화된 사회에서 전쟁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칼을 든 군주는 전쟁을 막으면서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의지는 칼 없이도 전쟁을 막아낸다. 모두에게 주어진 한 표가 전쟁의 힘을 흡수해 버렸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 억제 수단이다.(131P)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선험적인 개별화된 자아라는 개념에 동의하며, 사회적 관계에 우선한 완전한 인간을 단위로 삼는다. 더구나 ‘자유로운 개인’은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을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옴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고 말한다.(132P)
결국 이 외침은 사회주의의 실패, 정치의 쇠태와 연결되고 민주주의라고 하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승리로 연결된다.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 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 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137P)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142P)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143P)
아곤은 오히려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사회의 항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체제이다.(146P)
전쟁이란 내가 주권적 능력을 그대로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을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의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152P)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자연학+윤리학
니체는 원자론을 이렇게 비꼬았다. “저울에 달아보아 차이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다이아몬드와 흑연과 석탄이 동일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동일한 어떤 것, 불변의 어떤 것을 공상해야 했던 것 아닌가?(155P)
데모크리토스가 필연성을 중시했다면 에피쿠로스는 우발적인 사건들과 그것들의 복수의 원인들을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성의 세계만 보았다면, 에피쿠르소에게 세계는 ‘사건들의 사건’, ‘변화로서의 변화’가 구성하는 시간이 흐르는 생성의 영역이었다.(158P)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힘의 두 번째 특성은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힘 사용의 극대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능력을 남겨두지 않는 힘의 속성을 절묘하게 드러냈다.(159P)
“어떤 양의 힘이란 사실 그것과 같은 양의 충동, 의지,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충동작용, 의지 작용, 활동 작용에 불과하다.”(159P)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은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이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 이다.(161P)
클리나멘이란 직선으로 날아가던 원자가 그로부터 이탈해서 편위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편위는 원자들의 새로운 충돌과 거기서 기인하는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낸다. 에피쿠로스는 편위야말로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차적 원리라고 생각했다.(162P)
힘을 사유했던 니체 역시 자연과학적 법칙화에 반대했다. 니체에게 중력은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등장한다. ‘무거운 정신’은 중력의 상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들의 모든 우발적 운동을 잠재우는 족쇄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드높은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를 “영원한 이성의 거미줄”로 묶어 버린다. 던져진 모든 주사위들은 지구의 중심을 행해서만 떨어지고, 모든 반응들은 평형상태를 향해서만 돌진한다.(164P)
‘힘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질을 가지고 행사되는가?’ 는 물리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다. 양적인 차이에서도 우리는 힘의 내적 의지를 확인할 수 있지만, 니체가 힘을 분석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적인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이지이다.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165P)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166P)
니체는 강함과 약함이 능동과 반동을 고유함으로 갖고 있다고 보았다. “본성의 강함은 반동을 대기시키고 연기시키는 일에서 나타난다. 어떤 종류의 무관심이 강함에는 고유하다. 마치 약함에는 반동의 부자유함이 고유한 것과 같다.”(167P)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용수철을 누를 때를 생각해보자.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167P)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169P)
권력의지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의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171P)
의지는 욕구나 갈망, (무엇보다도) 결핍과는 다른 것이다. 의지는 명령하는 것이다.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의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171P)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이다.”(173P)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 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두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174P)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며, 그리스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175P)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다루는가’ 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176P)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느냐(약자의 생성)’을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곧바로 윤리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좋음’과 ‘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177P)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는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179P)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모든 불멸하는 존재의 죽음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기쁜 일이다.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상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 “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 “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182P)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하다.(184P)
헤라클레이토스는 무규정자이든 이데아든 별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생서의 세게만 존재한다고 선언한다.(185P)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이 다수다.” 오,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 제우스,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186P)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터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 놀이란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고 등장하는 놀이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우리는 학자들에게 영원회구가 왜 어려운 개념인지를 안다. 그들은 주사위는 잘 알고 있지만, ‘놀이’가 대해선 잘 알기 못하기 때문이다.(189P)
영원회귀란 존재의 세계를 생성의 세계로 만드는, 혹은 “그것들을 근접시켜” 이해하는 표현이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인 생성의 세계이며, 존재의 세계에 대한 극한적 근접이다.” 이로부터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192P)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가지가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196P)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197P)
영원회귀는 두 개의 권력의지를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긍정의 권력의지와 부정의 권력의지, 더 할 것인가, 그만할 것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이해해 가는 속도와 긍정의 권력의지에 다가가는 속도가 일치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영원회귀를 이해한 뒤의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히 긍정적으로 돌변했다. “나는 어느 심연으로라도 축복하는 예라는 말을 가져갈 것이다. 나는 축복하는 자, 예라고 말하는 자가 되었고, 그러기 위하여 오랫동안 씨름을 했고 씨름꾼이 되었다.” 중력의 영? 그것은 전혀 무겁지 않다. 두더지와 난쟁이? 그것들은 장난감이다.(199P)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deion)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praxis)이다.(200P)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작은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201P)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긍정은 부정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사원을 지으려는 자는 기존의 사원을 부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 표를 써넣으려는 자는 낡은 가치 표를 지워야 한다.(204P)
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 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 번 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204P)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205P)
떨어지는 주사위는 새로운 느낌을 만들고 던져지는 주사위는 새로운 힘을 표출한다. 결국 주사위 놀이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놀이이다. 차이를 만들어 내는 놀이! 놀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부정이다. 변증법이 그렇듯이 부정은 차이를 적대로 발전시킨다.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207P)
주체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이다. 주체 역시 건강 상태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대상들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체도 복수로 존재한다.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208P)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208P)
모든 즐거움들은 계속 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써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게, 영원회귀의 유혹 -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209P)
제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야말로 지구 위에 난 뾰루지 따위가 아닐까? 아니면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잘 해야 대지의 살갗에 생긴 피부병” 이거나 “작은 구더기가 아닐까?” “인간은 우주의 눈들이 자기 방에서 망원경을 통해 자신의 행위와 사유를 보고 있다.” 생각하지만, “우리가 모기들과 의사소통한다면 그들도 동일한 파토스를 가지고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211P)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연에 자기 잣대를 들이댄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나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끌어냈을 때, 데카르트가 드러낸 것은 존재의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분리와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이점에서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 노력한 세기”라고 말한다.(213P)
사실 인간은 자연을 잘못 이해함으로 자기 자신도 잘못 이해한다.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세계’ 하지만 모든 것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해도 남아 있는 게 하나 있다. 니체는 ‘인간’과 ‘자연’,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 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 났기 때문이다.(215P)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저 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216P)
니체가 보기에 인간의 역사는 약자들이 승리한 역사이며, 따라서 진화라고 말할 게 아니라 퇴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진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의 목적임을 증명하려고 한다. 인간은모든 생물의 시간을 인간을 향한 ‘양의 축적’과 ‘질의 변화’로서 이해한다.(217P)
니체는 왜 신이 죽음을 복음리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사실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222P)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나 강함이 초인간적인 것으로서, 밖에서 온 것으로 포착되고 있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극히 가련하고 약한 면과 극히 강하고 놀라운 두 가지 면을, 두 가지 영역 가운데로 분열시키고, 전자를 ‘인간’, 후자를 ‘신’이라고 부른 것이다.(223P)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223P)
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한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비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225P)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하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번 더’ 라고 말하는 것이다.(231P)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231P)
‘정의의 양심가’인 학자의 말대로 과학이 불안과 공포를 본질로 한다면,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하여 부른다.(232P)
디오니소스는 가벼움과 기쁨 자체이다. 그의 춤은 생성과 생성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웃음은 다수성과 다수성의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며, 주사위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에 대한 긍정이다.[233P]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변신하는 장에서 긍정의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초인의 삼위일체를 보게된다. 차라투스트라에거는 영원회귀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긍정의 권력의지를 획득하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신체를 생성시키는 과정이었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요청한다. 영원회귀 하지 못하면 긍정을그 질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만이 영원회귀한다. 영원회귀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화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234P)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니체는 우산을 잃어버리듯 쉽게 이름을 잃어버렸다.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졌다. “사람을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238P)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벅고 있는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239P)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보면 그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240P)
병균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의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247P)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나는 전에 아무도 나만큼 거역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거역한다. 그럼에도 나는 부정적 정신의 소유자와는 반대자다. 나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는 복음의 사자이다. 모든 것이 허위였으므로 지상에는 미증유의 전쟁이 있게 된다. 나의 출현과 함께 세상은 위대한 정치를 펼치게 된다.(248P)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서명이 붙어 있는 전하는 메시지도 이제 “니체씨로부터 떠나라” 는 것이다. 여행객은 항상 그 사회의 이방인이고 외부자이다. 니체는 그 자신을 독일 안에 있는 이방인이라고 소개한다.(250P)
확실히 유목민의 기질이 니체를 이끌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252P)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이다.(253P)
제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어떤 점에서 근대는 제 발로 ‘설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 시대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항상 새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258P)
제 아무리 숭고한 가치라 해도 합리성을 갖지 못한다면 공공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다.(259P)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260P)
동양의 승려들은 도를 닦으면서 시간 의식을 갖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도를 닦는데 방해가 되는 충동이나 잡념을 억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표가 이용되었다.(265P)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 합리적인 시스템이 개인들의 일상생활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이나 제도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 관료제다. 베버는 관료제를 기계라고 불렀다. 관료제란 개인적 수준에서는 책상 앞에 붙여놓은 게획표일 것이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거대한 행정체계 및 사회제도들을 의미한다.(266P)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268P)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했다. “훈육은 모든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전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270P)
베버의 정치학은 합리적 훈육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고 개인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형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명’을 가진 정치인, 강한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의 출현이었다. 영혼이 사라진 강철 겉옷 속에 다시 영혼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 스스로 강철 감옥보다 더 강한 영혼을 소우하고 있는 사람!(276P)
베버는 바람직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중의 하나가 이러한 내적거리라는 점을 주장했다. 정치인에게는 소명에 대한 열정과 함께 뛰어난 목측능력이 요구된다. 목측능력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내재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277P)
베버는 소명 의식과 거리 두기 능력, 책임감 등을 가진 정치인에게서 관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발견한다. 이러한 정치인이야말로 그가 보기엔 관료제 기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279P)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과 관료제적 정치인의 차이는 진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학자와 단순한 효율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의 차이와 같다.(280P)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유주의에서처럼 약화되지는 않는다. 군사적 지출의 확장이나 경제적 조정비용의 확장은 물론이고 가치와 도덕적 구조물에 대한 위기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현대 국자의 또 다른 중요한 얼굴이며,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적 국가의 이상이기도 하다.(293P)
답은 대개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은 질문들과 동떨어진 채 답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그 답의 형식과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294P)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국가에 대해서는 서로의 편차 이상으로 그 둘 모두를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가치들의 투쟁, 차이들의 투쟁을 정치 영역으로 보내서 경제적 영역의 자유를 확실히 보장받고자 했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열망은 동일한 요소를 정치의 영역에서도 배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자 열망과 그리 멀지 않다. 자유의 보증자로서의 국가, 국가의 영역, 정치의 영역들의 범위는 계속해서 줄어들지만, 그것은 네그리의 표현대로 ‘핵심으로서의 축소’라고 할 수 있다.(298P)
“공허한 이치를 내세우며 반성을 일삼는 오성의 것”이라고 말하며, 완전성은 결코 “진행의 영속적 진행”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수령이 오래된 거목이 계속해서 가지를 뻗는다고 해서 새로운 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301P)
생산 공간으로서의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왈쩌나 테일러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단순히 인간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공동체, 바로 문화적이고 언어적이며 종교적인 공동체 등에 의해 규정된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숙고해서 선택하는 연합체란 일종의 '악성 유토피아'일 뿐이다. 우리는 항상 미리 존재했던 '비자발적 공동체'에 들어가 있다.(309P)
3. ‘내가 저자라면’
철학이란 무엇인가, 왜 철학을 하는가
한마디로 철학은 앎을 추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진리탐구를 하는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좀 더 들어가 보면 철학은 그리스어로 필로소피아라 불리는데, 이것은 필로스와 소피아의 합성어로써 풀어보자면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철학이란 앎이나 지혜를 향한 인간의 학습 욕구 또는 욕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철학을 할까? 다음을 읽어보자.
철학은 대상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 할 수있겠다. 이 점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철학이 가지는 한 특징이 사유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질문을 던진다는것은 사물에 대한 관심이 선행이 되어야만 한다. 관심없는 사물에 대해 우리는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그런 사물에 대한 관심이 질문을 낳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사유함으로서 답을 향한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 여정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어라고 규정지을 순 없을 것이다. 답을 향한 여정동안 사고의 폭이 넓어질 것이고 그러한 사고에 대해 체계가 잡힐 것이고, 스스로 답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서 객관적인 관점에서 자신에 대해 평가해보는 기회도 가지게 될것이다. 궁극적으로 질문한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므로 우리는 아주 사소한 사물에 대해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된다.
좀더 명확하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면 만약 그 동안 살인이란것에 별관심이 없어서 한번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교육되어진 '사람을 죽이는것은 나쁜일이다. 사람을 죽이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된다' 이 외에 생각들을 그 사람이 살인을 저질럿을 때 생각 할수 있을까?
물론 양심이란 면이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예외로 두고 스스로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물음에 대해 교육되어진 대답을 할 뿐이다. 간단하게 생각되어지는 이런 생각들에 비추어 볼때 철학을 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사소한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좋은 질문을 하고 답해 봄으로서 자신의 사고의 폭을 넓히고 더 나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철학을 해야한다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철학을 하는 이유는 사물에 대한 관심, 현상에 대한 호기심 등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을 사유해 봄으로써 사고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우리의 시각을 좀 더 넓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겠다.
니체의 철학은
니체의 철학은 철학의 영토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철학, 혹은 외부에 위치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25-26P)
니체의 철학은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에,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에 진리를 문제삼기 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즉 철학의 내부가 아닌 철학의 외부에 서서 철학을 바라본다.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으며 고로 니체가 철학과 맺는 관계, 그 자체가 우리에겐 문제가 된다.(27-28P)
다른 철학자들이 현상이나 사건 그 자체에 집착하고 빠져들어갈 때 그는 온도나 습도 같은 기후 조건, 차나 포도주와 같은 음식물을 대하듯 철학하는 일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평가한다. 그가 보기에 잘못된 사상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으며, 어쩌면 청명한 날씨가 철학보다도 훨씬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 속의 영웅들>의 저자 윌 듀란트가 ‘기자의 일몰이 피라미드보다 더 위대하다’라고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사람들은 니체의 철학을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진단하는 철학이라고 말한다. 니체의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결국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아쉬움 그리고 반성
어렵다. 쉽지 않다. 계속해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느낌이다. 책을 덮고 난 지금도 머리 속은 온통 헝클어져 있는 느낌이다. 어떤 구절은 고개가 끄덕여 지다가 어떤 구절은 아무리 읽어도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머리 속을 비우고 이야기 자체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다. 또한 어떤 구절은 마치 언어의 유희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학교시절에 배운 소피스트들, 궤변론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이다. 듣는 중엔 맞는 것 같은데, 정리를 하고 보면 뭔가 아구가 어긋나 있는 느낌이다. 계속 몽환적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니체를 머리털 나고 처음 접해 보았음을 인정해야겠다. 물론 학교 시절, 니체의 이름과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들어 보았지만, 본격적으로 그 내용을 접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철학이란 나의 생활과 동떨어져 있었고, 그것에 대한 생각조차 하고 살지 않았음을 고백해야겠다. 나만 그런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왜 같은 언어로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해가 어려운 것일까?
결국 결론은 나의 무지 때문이란 것이다. 나의 사상의 틀이, 생각의 넓이가, 사고의 깊이가 작고, 좁고, 얕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이 어려운 것이다. 8개월 째 오면서 가장 어려운 상대를 만났다. 이번은 나의 완패다. 제대로 잽 한번 날려보지 못하고 링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제 경기는 끝났다. 하지만 다시 시작이란 걸 내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야 겠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철학이란 ‘앎을 위한 학문’이자, ‘지혜를 갈구하기 위한 학문’이기 때문에 어차피 인생을 가는 동안 동행해야할 학문인 것이다. 좀 더 넓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겠다. 사건과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나를 떠나, 내 주변의 환경을 떠나 객관적, 상호 주관적 시각으로 더 넓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겠다. 그래서 다음번 이 책을 다시 도전할 때는 머리 뿐 아니라 가슴으로도 읽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
마무리
니체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예로 자주 그리스인들을 언급한다. 그리스인들은 공포와 고통에 대항하여 힘들어하고 어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자신들의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이러한 연유로 니체는 그들을 ‘거인들’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전환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신들 또한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제우스, 아폴론, 아프로디테, 헤라, 디오니소스 등등 그리스의 신들은 고통과 고민에 괴로워하는 캐릭터가 없다. 그들의 생활은 매우 활기차며 적극적이고 밝으며 활동적이다.
그리스인들은 ‘살레노스의 지혜’ 조차 긍정적으로 바꾸어 버린다. 즉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삶’ 때문이 아니라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따라서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다음으로 나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고통은 ‘삶’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삶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며,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오기 때문에 더욱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살라고 요구한다.
니체는 말년에 정신병으로 힘들게 죽어갔지만, 살면서는 ‘신의 존재’조차 부정할 정도로 적극적인 삶, 능동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개인의 판단에 달린 문제이고, 우리가 니체에게서 배울 것은 인간성의 회복과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해 더욱 열심히 그리고 가치있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