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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9일 21시 15분 등록

I.     저자 소개

 

고병권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사회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학문 자율 공동체 수유 + 너머의 공동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니체 사상의 정치 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틀뢰즈의 니체: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 「투시주의와 차이의 정치」 「노동 거부의 정치학: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이 등이 있다.

 

그 외 저서

『화폐, 마법의 사중주』그린비, 2005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2003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세종서적, 2001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소명출판, 2001

 

 

II.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4]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7]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7]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는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우세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세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서장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부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29]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다.

 

[29]니체는 자신과 대결하고 있는 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른다.(z;84) 죽음의 설교자들 속에서는 모든 것들 포기하고 진리에 목을 매는 철학자들이 포함된다.

 

[31]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6]그렇다면 기독교인들과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비극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보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소인족처럼 삶의 고통과 죄의 크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소인들의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GT;46)그리스 인들은 실레노스의 지혜를 과감하게 바꾼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여 삶으로부터의 이탈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GT;47)

 

[42]차이는 순교한 것에 있지 않다. 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되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49]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은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순한 사유의 체계가 거짓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순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52]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보편적 신념이다”(FW;128)

 

[56]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다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살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을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디 때문이다.”(Z;80)

 

[59]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 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AC;154)

 

2. 강한 자와 선한 자

 

[63]겁에 질려 있는 소심한 사람은 사물이나 사태를 단순화해서 쉽게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아무렇게나 임의로 추출해서 제멋대로 정리한 도덕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결론들은 도덕의 굳건한 기초가 되지 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JGB;108)

 

[64]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JGB;119)라고 불렀다.

 

[66]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Z;215)가치들도, 가치를 판단했던 인간들도 더 이상 동질적이지 않다. 출신과 혈통, 영양 상태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존재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가치 판단들이 존재했는가.

 

[77]”라투카족의 추장 코모로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WM;227)

 

[78]’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83]”형벌은 오히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준다. 감옥에 들어온 자가 깨닫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하는 조심성이다.”(GM;91) 그러나 원죄는 채무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원죄의 채무를 지게 되면 그 누구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가 되고 만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물인 인간은 제 자신을 한탄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

 

[84]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이다.

 

[85]환자들의 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막는 것, 다시 말해서 성직자가를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GM;135)

 

[90]스피노자가 권유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그 풋과일은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 태초에 있었다는 어떤 과일이 선악과라고 불렸다는 사실은 인간의 유치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신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을 때, 그 과일이 원래 악한 존재라고 말했던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은 아담의 무능력에서 기인한다. 신은 아담의 능력에 맞추어 그 과일은 다른 짐승에게는 좋은 (선한)과일일 수 있지만 지금 아담의 몸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나쁜(악한)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린애처럼 이것을 도덕적 금지로 이해했던 것이다.

 

3.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107]”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WM;182)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 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GD;41)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체제(regime)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10]”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M;256)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111]”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Z;118)

 

[112]니체가 절대주의나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 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주장과 진리란 없다는 주장은 정반대의 것이지만, 사실 숫자 1 0은 매우 큰 숫자 N에 비하면 아주 가까운 숫자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0에 가깝다.

 

[113]지나치게 많이 배운 자들의 해석은 너무 노쇠하다. “많이 배운 자들은 모든 격렬한 욕망을 잊어버렸다. 오늘 모든 거리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속삭인다. ‘지혜는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말라.’ 오 나의 형제들이여 이 새로운 표도 부수어다오. 이 표는 염세적인 자들이 걸어 놓은 것이다.”(Z;247)

 

[114]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U;151)위대한 일은 무엇인가?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119]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이다.

 

[120]다양성이 건강을 증명한다는 자연의 생태주의적 가르침도 우리에게는 이해되고 있지 않다. 오직 우리에게 말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135]자유주의적 제도는 그것이 이룩되자마자 자유주의적이기를 그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제도 보다도 더 철저하게 자유에 해가 되는 것은 없다. ……자유주의 그것은 쉽게 말하면 가축으로의 몰락이다.(GD;96)

 

[152]전쟁이라 내가 주권적 능력을 그대로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5.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1)

 

[153]”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얻었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황급히 손을 뻗어 서투른 말(언어)을 사용해서 잡았다. 그러자 통찰력은 말라 비틀어져 말에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응시하면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왜 행복한 느낌이 들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F.Niezche,FW;s298;247)

 

[166]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창조하는 것’,’자율적인 것’,’넘치는 것’,’선사하는 것’,’공격하는 것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무리짓는 것’,’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결여된 것’,’적응하는 것’,’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을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172]한 사회에서 이 높이 평가되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결핍된 을 강하게 의욕한다면 대부분은 돈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174]허무주의자들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 권력 의지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으며 상황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GM; 170)허무주의는 무의 의미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든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176]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을 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되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FW;252)

 

[176]나는 실제로 이러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되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FW;252)

 

[176]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아니면 긍정으로 자극하는가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나는 약화시키는 것, 초췌하제 만드는 것 모두에 대해 아니오를 가르친다. 나는 강화하는 것, 힘을 저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 모두에 대해 예를 가르친다.

 

[178]우리는 육체가 느끼는 능력을 수동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Z;73~74)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같은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 느끼는 육체가 뛰어나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능력으로 지배한다.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 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장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들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6.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185]니체는 헤겔조차 보지 못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PG;132)

 

생성과 소명,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채에 있으며, 이 세계에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 아이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놀이를 하듯 영원히 생동하는 불은 놀이를 하며, 무구하게 세웠다고 부순다. 영겁의 기간 에온은 자신과 놀이를 한다. 마치 아이가 바닷가 모래성을 쌓았다가 부수듯이…..이따금 그는 놀이를 새롭게 시작한다.(PG;135)

 

[186]세계는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명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명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다수이다.”(PG;135),위대한 세계의 어린 아이 제우스!(PG;141) ,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192]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MW;355)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그것은 피로를 조장하는 의지, 무를 의지하게 하는 의지와 대결한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부정의 권력의지로부터 그것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 같은 것이다.

 

[196]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Z;198)

 

[203]”친구여! 그대들 속에 숨겨져 있는 저 긍정은 그대들의 시대적 병인 저 모든 부정보다 더 강력하다.”(FW;355)

 

[207]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하는 것은 부정이다.

 

7. 인간

 

[215]니체는 인간자연’,’인간세계사이에 끼어있는 (und)’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지 때문이다.

 

[224]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인가의 귀에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FW;185)

 

[225]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했던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 …….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Z;224)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Z;358)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 있든 죽어 있는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 거리인 것을 …….

 

[23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WM;590)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WM;549)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235]나는 첫 번째 말고도 두 번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니 아마 세 번째 얼굴도 있는지 모른다. (EH;198)

 

[238]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져 버렸다.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EH;274)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언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239]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살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여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FW;335)가 독자로 적당하다.

 

[241]”예술이야말로 삶의 최고의 과제이며, 진정한 형이상학적 행위이다.”(GT;36)음악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형이상학적인 위안을 제공한다.

 

[247]니체의 놀라운 긍정의 정신은 질병 속에서도 활동적인 자극을 발견한다.

 

전형적으로 병약한 사람은 건강해지지 않으며 애써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도 없다. 반대로 전형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그 병을 인생을 사는 데, 아니 풍요로운 생을 살기 위한 활동적인 자극으로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오랜 세월 동안의 병이 내게 그러한 활동적인 자극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EH;197)

 

[247]”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은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GD;19)

 

[247]긍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부정 역시 새롭게 이해 되었다. 니체의 보복은 선사하는 것이다. “나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안 듣기 위해서 과자 한 상자를 보내는 것이다. 나에게 나쁜 짓을 한 번 더 해보라. 그러면 나는 그렇게 보복할 것이다.”(EH;202)어떤 철학자도 이보다 멋진 부정을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250]아주 희미하게라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 스스로를 방랑자 이 외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다. 여행자는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MA-I:284)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253]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III.   내가 저자라면

 

나 그리고 철학 이야기

 

대학시절 나는 말 그대로 어둠의 자식들이었다. 그것에 후기 구조조의 철학자의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그 시기 나의 음울한 하루하루는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이 컸다. 사실, 난 특별히 자발적으로 그들의 책을 읽으려고 했었던 것은 아니었었던 같다. 처음에는 내가 듣던 강의들과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님들의 추천으로 그 철학자들의 책들을 읽게 되었는데 점점 그들이 말하는 철학의 세계에 점점 나를 가두고 말았었다. 내 지력의 한계 때문에 아마 나는 그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에 나를 얽매어 두어 버렸다. 그리고는 절망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모두 구조주의적인 틀 안에 갇혀 사는 것이고 나는 그 구조 안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우울한 생각에 사로 잡혔었다. 나는 날마다 음모(conspiracy)에 갇혀 사는 인생 같았다. 내 삶이 통째로 후기 자본주의의 음모(conspiracy)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며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건강도 무척이나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리고 철학이 이 세상에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무척이나 큰 의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 철학자들의 말 안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꼼짝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그 이론 안에 얽매어 두고서 나를 거기에 가두어 놓고 말았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생을 살지 못하고 생을 생각만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고병권의 책을 읽고 나니 이제 니체가 보이고 그 시절의 개인적인 암울함이 떠오른다. 삶과 분리된 철학을 필요 없다. 아니 그건 철학이 아니다. 그 시절 내가 니체까지 마저 읽었더라면 그 말들의 감옥에서 좀 더 빨리 빠져 나올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더 늦기 전에 어려운 니체를 고병권의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알게 되어 감사하다.

 

[31]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고병권 식의 글쓰기 : 비교, ‘대상을 명쾌하게 만들어 주는 글쓰기

 

글을 읽으며 나는 저자의 글쓰기 기법에 주목을 했다. 그가 주로 쓰는 글쓰기의 방법은 비교이다. 그의 비교는 두 대상 간의 차이의 정곡을 찌른 뒤에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간극을 점점 더 자세히 밝혀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자들을 두 대상간의 차이를 점점 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 글은 그가 니체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디오니소스의 죽음을 비교하는 글이다. 그는 비교하는 두 대상간의 차이를 죄의식이라는 것에서 찾는다. 그리고 죄의식이 존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를 차근차근 밝힌다. 우리는 그의 이 비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디오니소스의 죽음을 확연히 구분하게 된다.

 

[42]차이는 순교한 것에 있지 않다. 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다음 글에서도 그의 특유의 비교의 방법이 부정과 긍정 각각에 권력 의지가 작용하는 차이를 확연히 보여 준다.

 

[176]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자극하는가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나는 약화시키는 것, 초췌하게 만드는 것 모두에 대해 아니오를 가르친다. 나는 강화하는 것, 힘을 저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 모두에 대해 예를 가르친다.

 

이와 같이, 논리적인 글쓰기 특히, 철학과 같이 개념의 차이를 설명하는 글쓰기를 할 때 그의 비교의 글쓰기는 매우 효율적인 것으로 보인다. 논리적인 글쓰기를 하기 싫어하는 내가 특별히 배워야 할 부분이다.

 

 

니체식 아이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디를 왜 바꾸었냐구요? 글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상태입니다.

제가 니체를 이해하는 고로 한 순간 한 순간이 다른 존재일진대, 어제의 구라쟁이라는 아이디가

오늘의 나와 어찌 같으리오?

 

암튼, 니체는 어쩌면 정말로 앞서 간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컴퓨터 상에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아이디나 이모티콘이 순간 순간의 자신을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지니고 있는데 요즘 사람들은 아이디나 이모티콘을 이용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지요. 그런데 니체는 그 까마득한 옛날부터 각 저서마다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 적는 그런 깜찍한 장난을 해 왔으니까요.

 

덧붙여서, 매 순간 다른 나를 표현해 내는 아이디나 이모티콘을 만들어 낸다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흠흠, 니체 진작 읽었더라면 좀 더 가벼워 지지 않았을까요? 모르죠 뭐. 그 당시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이므로 읽었어도 이해를 못했을 수도 있을 것 아닌가요?

 

글을 쓰는 동안에도 또 다른 나로 변신 중입니다  이번엔 졸립습니다.

이번 아이디는 졸리운 손가락 음하하하 이것도 재밌군요.

 

졸리운 손가락, ㅋㅋ 매우 재밌습니다 그렇습니다. 혹시 졸리운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거나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보신 적이 있나요?

 

졸리운 손가락, 졸리운 손가락, 조 ㄹ 리 우 ㄴ ㅅ ㅗ ㄴ가라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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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린서강이
2009.02.18 09:05:32 *.146.2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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