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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0일 11시 54분 등록
 로버트 프로스트의 자연시/ 신재실/ 태학사

1. 저자에 대하여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시를 배운 것 외에 내가 시를 읽은 적이 있었나?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나는 시에 관해 문외한이다. 다행스럽게도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는 길」은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있었던 시라서 희미하게나마 기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읽은 외국 시 중에서 지금도 몇 구절이 기억에 남을 만큼 의미 있게 다가왔던 시이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난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에 못지 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더 나은 듯도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비숫했지만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해서였습니다.

그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직
발자국에 더렵혀지지 않은 낙엽에 덮여 있었습니다. 
먼저 길은 다른 날로 미루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리라 알고 있었지만.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처럼 바꿔 놓은 것입니다" 라고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프로스트는 여러 가지 별칭으로 불려진다. 자연시인, 농부시인, 고전 시인, 휴머니스트, 상징주의자, 반 낭만주의자, ‘대중시인(bard)’, '무서운 시인(terrifying poet)', 국민 시인, ‘도피주의자’ 등 다양하면서도 때로는 상반적인 명칭들이다.

이들 명칭이 시사하듯 시인 프로스트의 삶과 시는 매우 모순적이었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인간적인 시인이었음을 증명한다. 그의 나의 39세, 그것도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출판된 첫 시집 『소년의 의지』는 오랜 세월 불확실한 장래와 씨름 끝에 얻은 결실이었으며, 이것은 그가 89세의 나이로 삶을 끝낼 때까지 농부시인의 신화를 일구며, 미국의 사실상의 계관시인으로 군림하는 그의 화려한 인생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케네디 정부의 문화 특사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후르시초프와 회담을 하기도 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연설할 때 프로스트의 시를 즐겨 인용하곤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가 사망했을 때 직접 추모연설을 했다. 인터넷을 뒤지다 찾게 된 추모연설이 명문인지라 그 전문을 실어본다.


<< 케네디 대통령의 詩人 로버트 프로스트 추모 연설(1963년 10월27일) >>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모하는 오늘은 詩人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정치가들도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우리 시대 미국의 화강암과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최고의 면모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술가였다는 것이고, 또 하 나는 미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는 그 나라가 배출하는 인물만이 아니라, 그 나라가 기념하는 인물 , 기억하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미국의 영웅들은 보통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대학과 이 나라는 우리의 규모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에 기여한 사람을 기념 합니다. 우리의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우리의 통찰에 기여한 사람을 기념합니다. 우리의 自尊(자존)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기여한 사람을 기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버트 프로스트를 기념함으로써 우리나라 힘의 가장 깊은 원천을 기념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눈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반드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 나라가 위대해지는 데 권력을 창조하는 사람들의 기여는 불가결합니다. 그러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기여 역시 불가결합니다. 그 문 제 제기가 私心(사심) 없는 태도에서 나온 것일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권력을 이용하느냐 아니면 권력이 우리를 이용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힘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의 본질을 이루며 그 힘을 통제하는 정신 역시 똑같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그는 현실을 가차없이 꿰뚫는 直觀(직관)을 통하여 사회의 진부하고 위선적 인 태도들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인간의 비극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기만과 손쉬운 위안에 굳건하게 저항했습니다.

『나는 밤을 아는 사람이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대낮만이 아니라 한밤중도 알았기 때문에, 인간 정신의 승리만이 아니라 시련도 이해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의 바탕에는 인간 정신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詩와 권력을 결합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권력을 권력으로 부터 구원하는 수단이 詩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인간을 오만으로 몰고 갈 때 詩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줍니다. 권력이 인간의 관심 영역을 좁힐 때 詩는 인간 존재의 풍요와 다양성을 일깨워줍니다. 권력이 부패할 때 詩는 정화해줍니다.

예술은 우리 판단의 시금석이 되는 기본적인 인간 진실들을 확립합니다. 예술가가 현실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충실히 따른다 해도, 결국 그는 사회의 침입과 국가의 개입에 맞서 개인적 정신과 감성을 옹호하는 마지막 보루가 됩니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는 고독한 인물입니다. 프로스트 말대로, 예술가는 「세상과 사랑싸움을」합니다. 예술가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좇다 보면 시대의 조류를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기 있는 역할이 아닙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생전에 큰 명예를 누렸다 해도,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 드러낸 어두운 진실들을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예술가의 충실성은 우리나라의 삶의 핵심을 강화해주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이 우리 사회에 가장 비판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의 동력인 예민한 감수성과 정의 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리나라가 잠재적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와 우리 문명의 미래를 놓고 볼 때 예술가의 자리를 온전히 인정 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예술이 우리 문화의 뿌리를 북돋워주는 것이라면, 사회는 예술가가 자신의 비전이 이끄는 대로 어디로 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예술이 선전의 형식이 아님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술은 진리의 형식입니다. 매클리시가 시인들에 대해 말했듯이, 『업으로 치자면 시를 쓰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자유 사회에서 예술은 무기가 아니며, 논쟁과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영혼의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다른 곳에 가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 사회에서는 작가, 작곡가, 화가의 최고의 의무는 결과에 관계없이 끝까지 자신에게 진실한 것입니다. 예술가는 진실에 대한 자신의 비전에 복무함으로써 나라에 가장 큰 봉사를 합니다. 예술의 임무를 경멸하는 나라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詩에 나오는 고용된 사람의 운명을 맞이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돌아볼 것도 없고, 희망을 가지고 바라볼 것도 없는 운명』입니다.

나는 미국의 위대한 미래를 바라봅니다. 우리나라의 군사력이 도덕적 억제력에 부합하고, 富가 지혜에 부합하고, 권력이 목적에 부합하는 미래입니다. 나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국, 환경의 아름다움을 보호하는 미국, 과거로부터 내려온 오래고 큰 집과 광장과 공원을 보존하는 미국,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균형 잡힌 당당한 도시를 건설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나는 사업이나 정치적 업적에 보답을 하듯이 예술적 업적에도 보답을 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예술적 성취 수준을 꾸준히 높여가고, 국민 모두를 위하여 문화적 기회를 꾸준히 확대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비단 힘 때문만이 아니라 그 문명 때문에 全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나는 민주주의와 다양성만이 아니라 개인적 우수성도 안전하게 육성될 수 있는 세계를 바라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인간의 개선을 위한 기획들에는 회의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런 희망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불확실한 시기에 그가 이렇게 노래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간을 모두 모아보아라… 인간에게 호의적인 쪽이 그래도 조금 더 많을 것이다. 다만 일 퍼센트의 몇 분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 行星에 대한 우리의 지배력이 이처럼 확대되지는 못했으리라. 프로스트의 생애와 작품 때문에, 이 대학의 역사와 업적 때문에,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배력은 확대되었습니다.(추모연설 끝)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

1874년 샌프란시스코 출생. 1912년 영국으로 건너가 <소년의 의지> <보스톤의 북쪽> 등을 출판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1915년 미국으로 돌아와 앰허스트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퓰리쳐 상을 4번 수상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J.F.K시대의 시인이기도 했다. J.F.K는 연설에 즐겨 프로스트의 시를 인용했고, 1963년 10월 27일 그의 죽음을 기리는 추모연설을 직접 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프로스트가 죽은 뒤 채 한 달이 되기 전에 암살당하고 만다.


저자 : 신재실 

1941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4년 대전공업전문대학을 시작으로, 1976년 청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거쳐, 1980년 인하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5년 하와이 주립대학 교환교수, 1991년 인디애나 대학 방문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영미문학개론ㅊ(공저), 『프로스트와 뉴잉글랜드: 실존과 종교』, 『영국 소설의 흐름』(공저)이 있으며, 역서로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플로베르의 앵무새』, 『내말 좀 들어봐』, 『태양을 바라보며』(근간) 등 현역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즈의 대표작들과, 20세기 그리스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의 『불타』(근간) 등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머리에


20세기 미국의 국민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 1874 - 1963)는 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등 서정성 깊은 시를 통해 한국에서도 낯익은 시인이다.[5]


자연시인으로서 그는 미국의 에머슨과 소로우, 영국의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등 낭만적 작가들과 유사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프로스트는 모더니즘으로 상징되는 당대의 혁명적 시의 원리들을 거절하고, 대신 “새로운 옛 방법(the old-fashioned way to be new)"을 선택했다.[6]


분명 20세기의 도시 문명은 인간과 자연의 대화보다는 인간과 사회의 대화를 요구한다. 만약 프로스트의 자연시가 인간과 사회의 대화를 외면하고, 인간과 자연과의 대화에 천착(穿鑿)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시대착오적 낡은 시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프로스트의 관심은 20세기적 감각을 반영한다. 에머슨, 소로우, 워즈워스의 자연과 달리 프로스트의 자연은 도덕적 확신이 아닌 불확실의 상징적 언어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표면적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내면적으로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계를 천착한다. 프로스트의 숲은 어둡고, 깊으며, 비합리적이다. 프로스트의 농촌 풍경은 황량하고, 혼돈스럽다. 프로스트의 세계는 무정하며, 이 곳에 거주하는 인간은 버림받아 혼자이고, 도와주는 자 없어 당혹스럽다. 20세기의 나는 사회적 집단에 속하면서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실존의 존재다. “... 나는 나의 집에 혼자였다/ ... 나는 나의 인생에서 혼자였다/ ... 나에게는 신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Poetry 251)[7]


「가지 않은 길」의 화자가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노란 숲속의 두 길”이 아니다. 숲속의 두 길은 오늘 한 길을 가보고, 다음 기회에 돌아와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길은 길로 뻗은 것이기에” 되돌아와 다시 갈 수 없는 길은 ‘혼자’ ‘한번밖에’ 갈 수 없는 인생길이다. 프로스트에게 자연에 있는 “숲속의 두 길”은 사회에 있는 ‘인생의 갈림길’의 상징으로 존재할 뿐이다(Poetry 105). 이 시를 단순한 서정으로 읽을 수 없는 이유다.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는 표면적으로는 숲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미적 감각을 칭송하는 시다. 그러나 결론은 숲의 유혹을 뿌리치고 사회적 약속으로 회귀를 강조한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자기 전 갈 길이 멀다/ 자기 전 갈 길이 멀다”(Poetry 224-225).[8]


어느 대담에서 프로스트는 “나는 자연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속에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시는 단 두 편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단 두 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자연은 워즈워스나 롱펠로우의 낭만적 자연이 아니라, 피를 갈망하는 실존의 무대이기도 하다. 프로스트의 실존은 땅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며, 시는 이런 사랑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도형이다. 프로스트에게 시는 실존의 혼란에 대항하여 만든 하나의 도형이다.[11]


프로스트에게 시는 자연과 문화의 변증법적 대립의 소산이다. 자연이 여자라면 문화는 남자이고, 이의 대립에서 발견되는 시적 비전을 이브(Eve)라 한다면, 이를 시적 언어로 전환하는 시인은 아담(Adam)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2]


1장 프로스트의 자연시


1. 자연과 상상어(想像語)


프로스트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성공적인 시인으로 평가되기보다는 문학을 애호하는 비(非)유럽적 대중 및 대학의 일반 독자들에게 성공적인 시인으로 남기를 선택했다.... 그 결과 미국 최고의 문학상인 퓨리처 상을 네 번이나 수상하고, 대학에서 수많은 명예 학위를 수여 받고, 많은 동료 시인들의 찬사를 받는 국민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엘리트 비평가들로부터의 평가는 엘리엇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엘리엇이 받은 노벨문학상은 끝내 받지 못했다.[20, 21]


20세기의 시인이 19세기의 초월주의 전통의 계승자임을 공언하는 것은 그가 계승한 전통과 자신 간에 뚜렷한 유사점이 있으면서도, 전통과 전혀 다른 현대적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해석된다.[26]


에머슨과 소로우에게 자연은 형이상학적 존재를 확인하는 증거, 인간과의 영적 대화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제공하는 인자한 스승이었지만 프로스트의 자연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분리된 존재로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제공할 수 없을뿐더러 인자한 스승도 아니다. 자연의 질서는 인간 질서에 중립적이다. 때로는 호의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은 실존의 무대로서 인간과 불가분의 역학 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스트에게 자연은 여전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텍스트로 남아 있다.[29]


자연의 텍스트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것을 찾아 탐험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모든 여행자에게 간편한 짐이 현명하듯이, 정신적 여행의 경우도 “육체적 욕구를 단순화함으로써 초월적 리얼리티 추구를 위한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남기는 것이 가장 잘 여행하는” 길이다(Schneider, “Walden" 98). ‘새로운 관점’을 찾기 위해서는 돈과 일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정신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정신에 필요한 양식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언어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맑게 하는 ‘자기단련’이 필요한 것이다.[32]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흔히 구어(口語)와 문어(文語)로 양분된다. 그러나 시적 진리를 표현하는 상상어(想像語)는 분명 이들과 차별된다. 상상어는 거의 모든 시적 비유 - 제유(synecdoche), 직유(simile), 메타포, 상징, 우화(parable), 알레고리(allegory) 등 - 를 포함하는 언어다. 자연에서 관찰된 사실적 진리와 시적 상상력의 교배(交配)가 산출한 시적 진리를 담는 이들 상상어는 프로스트 자연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시인 프로스트는 이 상상어를 ‘보는’ 방법을 소로우의 월든에서 배운 바 많다.


소로우는 『월든』의 「독서」(Reading)에서 “잘 읽는 것,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풍조가 존중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의 노력을 요하는 운동이다. 책은 그것이 처음에 쓰여졌을 때와 똑같이 용의주도하게 그리고 신중히 읽어야 한다”(Walden 92)면서 독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36]


고전은 ‘과거의 정신’이지만 ‘현대적인 질문’에 대한 모든 해답이 저장되어 있는 책이다. 자연 역시 의구(依舊)한 자연이되 항상 새로운 지혜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43]


언어는 역사와 함께 타락하거나 죽는다. 낡은 언어를 현대에 맞게 ‘재발견’하고, 죽거나 잠자고 있는 진리를 살아 있는 언어로 ‘회복’시키거나 ‘깨울’ 것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언어를 새롭게 고쳐 쓰는 노력과 함께 신선한 자연의 ‘소리’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잠자고 있거나 죽어 있는 인간 정신을 다시 깨우거나 되살리려면 언어의 쇄신이 필수적이며, 이런 언어를 발견하고, 다듬고, 형(형)을 부여함으로써 ‘너무 의미가 깊어 귀로는 들리지 않는 언어’로 성숙시키는 일은 시인 또는 작가의 몫이다. 소로우와 프로스트 모두 이러한 일에 충실했던 작가이고 시인이었다.[45]


우리는 항상 ‘볼 가치가 있는 것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어떤 방법과 훈련도 항상 주의 깊게 보는 자세의 필요성을 대신할 수 없다. 볼 가치가 있는 것(what is to be seen)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보는 훈련과 비교해볼 때, 가장 빼어난 역사, 철학, 또는 시, 가장 훌륭한 사회, 또는 가장 존경할 만한 생활 습관을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신은 단순한 독자, 학생이 되겠는가? 아니면 보는 사람(seer)이 되겠는가? 당신의 운명을 일고, 당신 앞에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미래로 계속 걸어가라.(Walden 102)[47]


소로우는 「독서」에서 언어를 ‘듣는 언어’인 구어와 ‘읽는 언어’인 문어로 구분하고 후자가 우리의 정신을 위해 더 필요한 언어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소리들」에서 또 다른 언어인 ‘보는 언어’를 최상위에 놓는다. 이 언어는 ‘소리들’로 존재하고 그 안에 포함된 의미는 상상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구어(口語 spoken), 문어(文語 written)와 함께 상상어(想像語 imagined)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48]


2. 자연시와 ‘전략적 후퇴’


시인 프로스트에게 농부시인의 이미지는 하나의 가면이고 전략이었다. 우수한 자연시를 쓰기 위해서 시인이 농부가 될 필요는 없다. 사실 프로스트가 농촌에 살았던 것은 도시에서 팔 시를 쓰는데 필요한 조용한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의 시는 도시 사람들이게 팔기 위한 것이었다.[62]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이미 일상화된 도시취향의 모더니즘시, 그러면서도 일반 독자들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주지주의시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대중에게 친숙한 자연의 세계로 일탈한 시적 모험의 산물이다.[63]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현대적 혼돈, 경험, 실패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이들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비춰볼 수 있는 전략적 요지(要地), 보다 더 맑은 렌즈 확보를 위한 후퇴다. 전통적 목가시는 경험과 실패의 렌즈를 사용하지만, 프로스트의 시는 보다 맑은 전원의 렌즈로 현대의 혼란과 경험을 비춰보는 특징을 보인다. 프로스트의 자연시와 전통적 목가시의 차별성이다.[67]


프로스트의 시에서 자연의 사실은 거의 항상 사실을 일탈한 시적 상상력과의 교배로 상상어-시적 은유 또는 표현-로 변형된다.[70]


자연의 일상적 사실과 시인의 일탈의 상상력의 변증법적 결합은 시적 은유를 생산한다. 그러나 사실은 은유간의 경계가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다.[70]


미국 시인이 되기 위해서 영문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미국 시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영국으로 가고, 세련된 시를 쓰면서도 난해성과 엘리트주의의 대안으로 인식되는 자연시를 쓴 것은 일상적이고 안전한 길을 일탈하여 모험적 미지의 길을 택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숲 속에 두 길이 갈라져 있어, 나는-/ 나는 덜 다닌 길을 택하였다./ 그랬더니 큰 차이가 있었다”(Poetry 105)는 시 구절이 시사하는 것처럼 프로스트 시는 다닌 길과 덜 다닌 길, 일상과 일탈의 변증법적 관계의 산물로서 엘리엇이나 파운드의 시와는 큰 ‘차이’가 있는 시를 썼고, 그 차별성이 곧 프로스트 시의 존재이유다. 자연시는 20세기 도시의 일상과는 분명 거리가 먼 일탈의 시다.[77]


「내키지 않음」의 화자의 생명력-‘마음’-은 겨울잠의 흐름에의 합류를 거부하고 싶다. 그러나 그의 이성-‘발’은 회의적이다. 일상 생활의 ‘흐름’에서 일탈하여 독립하려는 일탈의 욕망이 마음 한 족에 있지만, 흐름에 합류함으로써 잠자고 있는 다른 꽃과 잎들처럼 휴식과 정지를 택하려는 욕망 또한 있다. 전자가 비이성적 생명력에 상당한다면, 후자는 이성적 체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체념과 생명력, 흐름과 저항, 일상과 일탈 사이에 절대적 경계선은 없다. 양자간의 전진과 후퇴, 확장과 축소, 담의 구축과 파괴가 반복되는 것이 자연과 삶의 리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항과 일탈은 창조적 삶의 시작이고 ‘흐름’에의 영원한 합류는 허약한 삶의 종말이다.[86]


생명력이 창조적 ‘마음’과 결합할 때 사물의 ‘흐름’을 거스르는 사랑의 회복, 새로운 시절의 창조 등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인 프로스트는 증거한다. 일상-‘흐름’-과 일탈-‘마음’-의 변증법적 결합은 창조로 이어진다.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단순한 도피의 산물이 아니다. 20세기 미국 문단의 일상이 되어버린 도시취향적 모더니즘의 영향에서 벗어나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프로스트는 뉴잉글랜드의 자연과 농촌생활로 전략적 후퇴를 한 것이다.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도시와 농촌, 문명과 자연, 일과 사랑, 사실과 상상력, 일상과 일탈의 변증법적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87]


2장 일탈의 미학


1. 상상적 일탈(逸脫)의 양상(樣相)


17세기 미국으로의 이민은 새로운 성지 탐색과 유럽 문명의 층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역사 창조의 신화를 위한 일탈의 여행이었다. 19세기의 소로우에게 유럽은 과거의 역사, 예술, 문학을 공부하러 가는 것이고 서부는 여전히 미래의 역사, 예술, 문학의 광야(광야)로 존재한다. 20세기의 프로스트는 영국 문학과 유럽의 고전문학을 공부한 다음, 점점 유럽을 닮아가고 있는 20세기 미국시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뉴잉글랜드의 시적 광야로의 일탈을 감행한다.[92]


엘리엇의 전통이 수용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를 주장한 반면 프로스트는 ‘흐름’에 대한 저항과 개성으로의 도피를 주장한다. 상반적 주장으로 보이지만 이는 역설적 진리의 양면을 각기 대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93]


모든 메타포는 한계가 있다. 다시 흐려지는 인생의 해명을 위해서는 또 다른 메타포가 필요한 것이다. 쓰여진 시는 또 다른 메타포의 필요가 생길 때까지 새로 지은 집처럼 “혼란에 대항하는 일시적 지주(a momentary stay)"(Prose 18)로 기능한다. 그러나 새 집이 낡은 집이 되면 보수하거나, 새로 짓거나, 떠나야 되는 것처럼 낡은 메타포는 새로운 메타포로 거듭나거나 창조되어야 한다.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은 형의 필요를 절감케 하고, 형의 한계와 제약은 일탈의 동기를 제공한다.

프로스트의 최고의 시는 형과 일탈의 변증법적 긴장에서 출현했다..... 프로스트는 죽음을 두 달도 남기지 않은 1962년 12월 다트머스 대학에서 일탈(extravagance)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일종의 일탈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수상쩍게 생각하는 어떤 것입니다. 시의 필요성은 무엇입니까?-알다시피, 그 답은, 필요 없다-특별히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게 첫째 답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미국의 국민시인으로 일생을 지낸 노 시인 프로스트는 시는 삶의 일상, 즉 실용에서의 일탈이라고 정의한다.[94]


“우리는 너무나도 철저하고 진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고 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다’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그을 수 있는 반경의 수만큼이나 많은 방식이 있다. 생각해보면 모든 변화는 기적이며, 그 기적은 시시각각 일어난다”(Walden 12). ‘유일’을 신봉하는 삶의 일상과 ‘변화’를 찾는 일탈간의 변증법적 관점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월든』의 중심 전략이다.

프로스트의 시도 이러한 전략에서 출발한다. 시는 ‘특별히 필요하지 않다’는 현대 사회의 메마른 정서에 반해서 시를 쓰고 읽는 것 자체가 시를 일종의 ‘일탈’로 규정케 한다. 일탈은 가능성의 탐구다. 일탈은 상상의 자유다. 일탈은 과장이다. 시는 일탈에서 출발한다.[96]


적절한 일탈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과 아름다운 미래 창조의 충동을 자극하지만, 지나친 일탈은 파괴 충동에 의한 자아의 소멸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101]


시적 자아의 확립을 위해서는 일상에서의 일탈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탈의 위치다. 프로스트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상적 위치는 숲과 들, 숲과 마을의 경계선 등 사회와 자연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요지다.[104]


소로우와 프로스트의 전략적 일탈은 위대한 작가가 갖추어야할 보다 높고 넓은 시야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맑은 눈을 제공하였다. 20세기의 프로스트가 보다 덜 복잡한 자연 세계로 후퇴한 것은 도피주의나 농본주의가 아니고 현대 생활의 논평에 필요한 시야 확보를 위한 노력이었다.[106]


“소로우가 현대적 속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데서 나[프로스트]는 내 자신의 성향에 대한 가장 큰 옹호를 발견합니다. 그[소로우]는 의도적으로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 곳에 간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한 시간에 반 마일까지 속도를 낮출 수 있는 완전한 기어장치가 장착된 자동차의 속도를 내게 주면, 나는 하나의 꽃과 또 다른 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현대적 속도를 불평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치는 무리들입니다. 우리가 보조를 맞출 동반자들은, 산 자건 죽은 자건, 선택의 폭이 아주 넓습니다, 문명 생활에서도, 좌우간, 규정된 템포 같은 것은 없습니다”(Interview 146-147)[130]


소로우의 『월든』과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현대적 속도를 불평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치는 무리들’에게 ‘하나의 꽃과 또 다른 꽃을 구분할 수 있는’ 수준까지 삶의 속도를 낮추는 지혜를 일깨우기 위한 동반자로 존재한다. 프로스트는 이미 죽은 자인 소로우의 『월든』에서 자신이 ‘보조를 맞출 동반자’를 발견하였다.[131]


프로스트의 시 「진흙 시간의 두 뜨내기 일꾼」


내 인생의 목표는

두 눈이 합쳐 하나의 시력을 이루듯

나의 도락(도락)과 생업을 결합하는 것이다.

사랑과 필요가 하나가 되고,

일이 심각한 목적을 위한 놀이인 경우에만

그 행위는 과연

하늘과 미래를 위한 것이다.


My object in living is to unite

My avocation and my vocation

As my two eyes make one in sight.

Only where love and need are one,

And the work is play for mortal stakes,

Is the deed ever really done

For Heaven and the future's sake. (Poetry 277)


소로우와 프로스트는 모두 산업화로 상실된 인간성의 구원에 관심을 갖는다. 농부의 삶은 산업화 이전의 전형적 인간의 삶이다. 산업주의를 모방하여 콩의 증산에만 집착하는 농부, ‘경쟁적 외부 생활에 뛰어든’ 농부는 ‘밖에 나가서 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존심, ‘많은 즐거움’과 ‘필수품’들을 ‘공짜로’ 공급하는 ‘시골의 장점’을 포기한 것이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이 자존심의 상실, ‘놀이’를 모르는 ‘일’의 노예, 정신적 영양 실조, ‘조영한 절망’의 삶과 ‘체념’인 것이다. 이의 치유와 구원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산업 이전의 시골로 ‘후퇴해서 자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농부의 강점’과 ‘시골의 장점’을 되찾는 일이다. 이것은 실제로 시골로 내려가서 농부가 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소로우와 프로스트의 농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이미 산업화되어 농부의 ‘자존심’을 상실하고 실패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산업주의 모방에 따른 자존심의 상실, ‘일’의 노예가 됨에 따른 미래 비전 부재의 극복은 농경사회에서 나와 산업사회로 들어간 현대인 공통의 과제다. 이런 일반적 과제의 해결 가능성을 소로우와 프로스트는 뉴잉글랜드라는 지역적 모델에서 탐색했다. 그 핵심적 열매가 소로우의『월든』과 프로스트의 자연시로 수확되었다고 할 수 있다.[139]


경쟁적인 외부사회의 혼란과 긴장을 벗어나 잠시라도 자유로운 개성과 평화의 고독으로 철수하여 내적 자아를 회복하는 일, ‘우리에게 너무 힘겨운’ 각종 사회적 의무, 계약, 약정으로부터 일시적이라도 자신을 독립시키는 일은 유한한 지상의 삶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평화와 구원의 첫 걸음이다. 일상적 자아를 벗어나야 비로소 우리는 내적 자아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세상을 잃어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관계의 무한한 범위를 깨닫기 시작한다”(Walden 154).[140, 141]


프로스트는 1946년 『불멸의 상징』이란 글에서 “시는 메타포로서, 갑을 말하고 을을 뜻하는 것, 갑을 을로 환산하여 말하는 것, 간접(間接 ulteriority)의 즐거움이다. 시는 메타포만으로 만들어진다” 고 하였다.[142]


예술은 자연 사랑이 출발점이다. 삶을 예술적으로 사는 사람은 일에 있어서도 서두르지 않고 일의 ‘멋’과 ‘장식’을 즐기며, ‘자연의 선(線)’을 사랑한다.[149]


산업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의 진정한 가치를 외면하고 끝없이 일하고 먹고 잠자는 일을 반복하는 기계적인 삶을 계속한다. 육체적 잔존과 금전적 이익만을 위한 이들의 삶은 자아의 상실과 ‘조용한 절망의 삶’으로 인도한다. 주변의 양키들처럼 쫓기듯 불안해 하지 않고 그들의 일에서 예술적 ‘멋’과 ‘장식’을 즐기는 소로우의 나무꾼이나, 자신이 만든 도끼 자루의 ‘길고 흰 몸뚱이’를 쓰다듬으며 즐기는 프로스트의 나무꾼은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예술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프로스트 자연시의 미학적 특성은 자연 사랑과 장인정신이다. 두 특성 모두 상업성의 일탈을 요구하는 예술의 보편적 특성과 맥을 같이한다. 금전적 이익에서 일탈한 예술적 행위는 시간의 경제성을 물질적 가치가 아닌 정신적, 심리적 가치에서 찾는다. 예술은 무형의 가치를 추구한다. 프로스트의 자연시가 지향하는 또 다른 미학적 특성이 바로 무형의 정신적 가치 추구이다.[154, 155]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소로우의 『월든』과 함께 일탈의 미학을 지향한다. 도시와 문명으로부터 시골과 자연으로의 일탈, 생업과 필요로부터 도락과 사랑으로의 일탈,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시간의 자유로의 일탈, 상업적 가치로부터 무형적 ‘향기’로의 일탈을 지향한다. 일탈의 목적은 일상과는 새로운 어떤 경험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일상에 갇힌 사람들은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일상은 현재의 방식이 유일한 것이고 다른 선택이 없다고 체념한다. 그러나 소로우와 프로스트는 절망과 체념의 일상에서 구원과 희망으로의 일탈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구원과 희망으로의 일탈은 일탈의 미학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이다.[160]


그러나 19세기의 소로우와 20세기의 프로스트의 일탈의 미학이 지향하는 바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쿠우루의 우화에서 보듯, 추월주의자 소로우의 가장 특징적인 우화는 완전주의의 열망을 구현하는 반면, 「자작나무」나 「장작더미」 같은 시에서 보듯, 사실주의자 프로스트의 가장 특징적인 우화시는 완전주의의 이상에 회의적이다..... 19세기와 달리 20세기는 이미 신화의 시대가 아니다.[162, 163]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육체적 노동에 충분할 정도로 깨어 있지만, 백만에 한 사람만이 효과적인 지적 노력에 충분할 만큼 깨어 있고, 1억 명 중 한 사람만이 시적 또는 신적 삶에 충분할 만큼 깨어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Walden 83)[164]


일탈의 미학은 깨어 있음의 미학이다. 상상력의 자아가 잠자고 있으면 시적 비전도 얼어붙는다. ‘육제척인 노동에 충분할 만큼 깨어 있는’ 사람은 많지만, ‘시적 또는 신적 삶에 충분할 만큼 깨어 있는’ 사람은 드물다. 쿠우루의 장인처럼 ‘새로운 체계, 충실하고도 균형잡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만큼, ‘모든 점에서 완전한’ 지팡이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뱁티스트의 도끼자루, 향기 짙은 사과, 수공품 같은 장작더미, 또는 한편의 시 같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작은 완전’의 성취는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다만 정신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상상력이 깨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일상의 흐름에 따라 동면하고 있는 들쥐와 다름없다. 사물의 일상적 흐름에 굴복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배반이다.

“아, 사물의 흐름에 영합하고,/ 이성에 기꺼이 굴복하여,/ 사랑이나 계절의 종말을/ 고개 숙여 받아들임이/ 사람의 마음에게는 언제나 배반이 아니겠는가?” (Poetry 30). 우리가 들쥐 같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사물의 흐름에서 일탈하여야 한다. 부단히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일탈은 새로운 변화를 탐색하는 상상력의 자아를 깨우는 행위다. 또 일탈은 깨어 있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잠자고 있는 “우리는 다시 깨어나야 하며 깨어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계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깊은 잠에 빠졌더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 새벽에 대한 무한한 기대로 깨어 있어야 한다”(Walden 83).

소로우의 『월든』과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잠자고 있는 이웃을 깨우는 새벽의 수탉과 같이, 시적 자아를 상실하고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잠에서 깨어날 필요성, 정신적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164, 165]


3장 자연과 문화의 변증법


1. 시는 여인이다.


20세기 미국이 낳은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에게는 여러 가지 명칭이 붙여져 있다. 자연시인, 뉴잉글랜드 양키, 농부시인, 고전 시인, 휴머니스트, 상징주의자, 반 낭만주의자, ‘대중시인(bard)’, '무서운 시인(terrifying poet)', 국민 시인, ‘도피주의자’ 등 다양하면서도 때로는 상반적인 명칭들이다.

이들 명칭이 시사하듯 시인 프로스트의 삶과 시는 매우 모순적이었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인간적인 시인이었음을 증명한다. 그의 나의 39세, 그것도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출판된 첫 시집 『소년의 의지』는 오랜 세월 불확실한 장래와 씨름 끝에 얻은 결실이었으며, 이것은 그가 89세의 나이로 삶을 끝낼 때까지 농부시인의 신화를 일구며, 미국의 사실상의 계관시인으로 군림하는 그의 화려한 인생의 출발점이 되었다.[169]


시를 쓰거나 읽는 행위 또한 사랑이다. 프로이드 이후 시 쓰기는 일반적으로 성적 충동-리비도(libido)-의 예술적 승화, 즉 ‘억제된 사랑하기’로 이해된다.[176]


자연의 ‘소리들’-사실들-의 표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적 상상력이라야 자연의 ‘말소리’의 의미-시적 ‘비유’와 ‘표현’ 또는 ‘은유(metaphor)'-를 발견, 포착, 또는 부여할 수 있다. 시인과 시의 독자는 이런 능력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갖는다.[179]


시인은 타락한 세계에서도 에덴을 회복할 수 있는 꿈을 꾸는 사람이다. 이것이 시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다. 시는 일종의 일탈이다. 시인은 ‘위축된 세계’를 일탈해서 보다 나은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시인은 시끄러운 소리를 아름다운 ‘말’과 ‘가락’으로 전환시키는 가인(가인)이다. “우리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을 꾸는 자들이다, ... / 세계를 잃고 세계를 버린 자들이다”(Poems, Prose & Plays 903)[182]


시인들은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시인들은 “우리[시인들]의 한숨으로 니네베(Nineveh)를 세웠다,/ 그리고 우리의 환희로 바벨(Babel)을 세웠다./ 그리고 옛 세계에 새 세계의 가치를/ 예언함으로써 그것들을 뒤집어엎었다.” 알다시피 “모든 시대는 죽어가고 있는 하나의 꿈이고,/ 탄생하고 있는 하나의 꿈”이다(Poems Prose & Plays 903). 시인의 꿈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183]


나는 상상하는 귀의 기능에 여러분의 관심을 촉구하고 싶다. 여러분의 관심은 흔히 출중하게 생생한 시각(視覺), 그리고 그 시각에 매우 인상적인 단어들을 선택하는 능력을 가진 시인에게 관심을 쏟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똑같이 귀중한 것은, 작문에 쓸 재료를 위한 귀의 사용이다. 여러분이 어떤 화자의 말을 경청할 때, 여러분은 단어를 듣는다. 틀림없이-그러나 여러분은 또한 어조(tones)를 듣는다. 문제는 그들을 유념하고, 그것들을 다시 상상하고, 그것들을 글로 쓰는 것이다.(Parini 165에서 재인용)<프로스트가 어느 독회(讀會)에서 한 말>[221]


20세기의 주요 시인들이 도시 지향성을 보이는 데 반해, 프로스트가 자연과 농촌을 고집하는 것은 자연시 전통에 대한 그의 애착뿐만 아니라 다른 시인들과의 차별성을 염두에 둔 듯하다. 자신을 이미지스트나 상징주의자로 부르지 않고 제유주의자(synecdochist)로 불렀다는 사실이 엘리엇이나 파운드같은 모더니스트와 자신을 차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240]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 대해서는 그다지 느낌이 많지 않고 그래서 쓸 내용도 많지가 않다. 워낙 시에 문외한인지라, 저자 신재실이 기술한 내용이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시 몇 편을 예로 들면서 구절마다, 단어마다 의미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해서 시가 말하는 바와 시인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처음에는 흥미롭더니만, 책의 중반을 넘어서니 좀 지겹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고등학교시절 시를 배우면서 단어마다 밑줄을 쳐가며 상징하는 의미를 적어서 암기하던 기억이 났다.

시는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의 시로 읽어야 하는 것 아닌가? 편안한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읽을 때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느낌. 이것이 진짜 시의 매력이 아닐까? 복잡하게 의미를 파헤쳐 들어가다 보면 그 시가 갖는 본연의 모습을 오히려 회손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서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시인들과 그들의 시 세계에 대해서 짧은 상식이나마 같게 된 것은 다행이다.  앞으로 시를 읽게 되면 이런 지식들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yes24의 짧은 서평만 읽고 책을 구매를 했기 때문에, 이 책이 시집인지 아니면 해설집인지도 잘 몰랐다. 하지만 읽으면서 눈에 띄는 멋진 시적 구절들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자연의 텍스트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것을 찾아 탐험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모든 여행자에게 간편한 짐이 현명하듯이, 정신적 여행의 경우도 “육체적 욕구를 단순화함으로써 초월적 리얼리티 추구를 위한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남기는 것이 가장 잘 여행하는” 길이다(Schneider, “Walden" 98). ‘새로운 관점’을 찾기 위해서는 돈과 일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정신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정신에 필요한 양식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언어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맑게 하는 ‘자기단련’이 필요한 것이다.[32]

언어는 역사와 함께 타락하거나 죽는다. 낡은 언어를 현대에 맞게 ‘재발견’하고, 죽거나 잠자고 있는 진리를 살아 있는 언어로 ‘회복’시키거나 ‘깨울’ 것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언어를 새롭게 고쳐 쓰는 노력과 함께 신선한 자연의 ‘소리’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잠자고 있거나 죽어 있는 인간 정신을 다시 깨우거나 되살리려면 언어의 쇄신이 필수적이며, 이런 언어를 발견하고, 다듬고, 형(형)을 부여함으로써 ‘너무 의미가 깊어 귀로는 들리지 않는 언어’로 성숙시키는 일은 시인 또는 작가의 몫이다. 소로우와 프로스트 모두 이러한 일에 충실했던 작가이고 시인이었다.[45]

우리는 항상 ‘볼 가치가 있는 것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어떤 방법과 훈련도 항상 주의 깊게 보는 자세의 필요성을 대신할 수 없다. 볼 가치가 있는 것(what is to be seen)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보는 훈련과 비교해볼 때, 가장 빼어난 역사, 철학, 또는 시, 가장 훌륭한 사회, 또는 가장 존경할 만한 생활 습관을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신은 단순한 독자, 학생이 되겠는가? 아니면 보는 사람(seer)이 되겠는가? 당신의 운명을 일고, 당신 앞에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미래로 계속 걸어가라.(Walden 102)[47]

모든 메타포는 한계가 있다. 다시 흐려지는 인생의 해명을 위해서는 또 다른 메타포가 필요한 것이다. 쓰여진 시는 또 다른 메타포의 필요가 생길 때까지 새로 지은 집처럼 “혼란에 대항하는 일시적 지주(a momentary stay)"(Prose 18)로 기능한다. 그러나 새 집이 낡은 집이 되면 보수하거나, 새로 짓거나, 떠나야 되는 것처럼 낡은 메타포는 새로운 메타포로 거듭나거나 창조되어야 한다.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은 형의 필요를 절감케 하고, 형의 한계와 제약은 일탈의 동기를 제공한다.

프로스트의 최고의 시는 형과 일탈의 변증법적 긴장에서 출현했다..... 프로스트는 죽음을 두 달도 남기지 않은 1962년 12월 다트머스 대학에서 일탈(extravagance)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일종의 일탈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수상쩍게 생각하는 어떤 것입니다. 시의 필요성은 무엇입니까?-알다시피, 그 답은, 필요 없다-특별히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게 첫째 답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미국의 국민시인으로 일생을 지낸 노 시인 프로스트는 시는 삶의 일상, 즉 실용에서의 일탈이라고 정의한다.[94]

“우리는 너무나도 철저하고 진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고 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다’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그을 수 있는 반경의 수만큼이나 많은 방식이 있다. 생각해보면 모든 변화는 기적이며, 그 기적은 시시각각 일어난다”(Walden 12). ‘유일’을 신봉하는 삶의 일상과 ‘변화’를 찾는 일탈간의 변증법적 관점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월든』의 중심 전략이다.

프로스트의 시도 이러한 전략에서 출발한다. 시는 ‘특별히 필요하지 않다’는 현대 사회의 메마른 정서에 반해서 시를 쓰고 읽는 것 자체가 시를 일종의 ‘일탈’로 규정케 한다. 일탈은 가능성의 탐구다. 일탈은 상상의 자유다. 일탈은 과장이다. 시는 일탈에서 출발한다.[96]

소로우의 『월든』과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현대적 속도를 불평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치는 무리들’에게 ‘하나의 꽃과 또 다른 꽃을 구분할 수 있는’ 수준까지 삶의 속도를 낮추는 지혜를 일깨우기 위한 동반자로 존재한다. 프로스트는 이미 죽은 자인 소로우의 『월든』에서 자신이 ‘보조를 맞출 동반자’를 발견하였다.[131]


프로스트의 시 「진흙 시간의 두 뜨내기 일꾼」


내 인생의 목표는
두 눈이 합쳐 하나의 시력을 이루듯
나의 도락(도락)과 생업을 결합하는 것이다.
사랑과 필요가 하나가 되고,
일이 심각한 목적을 위한 놀이인 경우에만
그 행위는 과연
하늘과 미래를 위한 것이다.

예술은 자연 사랑이 출발점이다. 삶을 예술적으로 사는 사람은 일에 있어서도 서두르지 않고 일의 ‘멋’과 ‘장식’을 즐기며, ‘자연의 선(線)’을 사랑한다.[149]

산업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의 진정한 가치를 외면하고 끝없이 일하고 먹고 잠자는 일을 반복하는 기계적인 삶을 계속한다. 육체적 잔존과 금전적 이익만을 위한 이들의 삶은 자아의 상실과 ‘조용한 절망의 삶’으로 인도한다. 주변의 양키들처럼 쫓기듯 불안해 하지 않고 그들의 일에서 예술적 ‘멋’과 ‘장식’을 즐기는 소로우의 나무꾼이나, 자신이 만든 도끼 자루의 ‘길고 흰 몸뚱이’를 쓰다듬으며 즐기는 프로스트의 나무꾼은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예술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프로스트 자연시의 미학적 특성은 자연 사랑과 장인정신이다. 두 특성 모두 상업성의 일탈을 요구하는 예술의 보편적 특성과 맥을 같이한다. 금전적 이익에서 일탈한 예술적 행위는 시간의 경제성을 물질적 가치가 아닌 정신적, 심리적 가치에서 찾는다. 예술은 무형의 가치를 추구한다. 프로스트의 자연시가 지향하는 또 다른 미학적 특성이 바로 무형의 정신적 가치 추구이다.[154, 155]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소로우의 『월든』과 함께 일탈의 미학을 지향한다. 도시와 문명으로부터 시골과 자연으로의 일탈, 생업과 필요로부터 도락과 사랑으로의 일탈,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시간의 자유로의 일탈, 상업적 가치로부터 무형적 ‘향기’로의 일탈을 지향한다. 일탈의 목적은 일상과는 새로운 어떤 경험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일상에 갇힌 사람들은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일상은 현재의 방식이 유일한 것이고 다른 선택이 없다고 체념한다. 그러나 소로우와 프로스트는 절망과 체념의 일상에서 구원과 희망으로의 일탈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구원과 희망으로의 일탈은 일탈의 미학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이다.[160]

일탈의 미학은 깨어 있음의 미학이다. 상상력의 자아가 잠자고 있으면 시적 비전도 얼어붙는다. ‘육제척인 노동에 충분할 만큼 깨어 있는’ 사람은 많지만, ‘시적 또는 신적 삶에 충분할 만큼 깨어 있는’ 사람은 드물다. 쿠우루의 장인처럼 ‘새로운 체계, 충실하고도 균형잡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만큼, ‘모든 점에서 완전한’ 지팡이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뱁티스트의 도끼자루, 향기 짙은 사과, 수공품 같은 장작더미, 또는 한편의 시 같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작은 완전’의 성취는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다만 정신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상상력이 깨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일상의 흐름에 따라 동면하고 있는 들쥐와 다름없다. 사물의 일상적 흐름에 굴복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배반이다.

“아, 사물의 흐름에 영합하고,/ 이성에 기꺼이 굴복하여,/ 사랑이나 계절의 종말을/ 고개 숙여 받아들임이/ 사람의 마음에게는 언제나 배반이 아니겠는가?” (Poetry 30). 우리가 들쥐 같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사물의 흐름에서 일탈하여야 한다. 부단히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일탈은 새로운 변화를 탐색하는 상상력의 자아를 깨우는 행위다. 또 일탈은 깨어 있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잠자고 있는 “우리는 다시 깨어나야 하며 깨어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계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깊은 잠에 빠졌더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 새벽에 대한 무한한 기대로 깨어 있어야 한다”(Walden 83).

소로우의 『월든』과 프로스트의 자연시는 잠자고 있는 이웃을 깨우는 새벽의 수탉과 같이, 시적 자아를 상실하고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잠에서 깨어날 필요성, 정신적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164, 165]

시인들은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시인들은 “우리[시인들]의 한숨으로 니네베(Nineveh)를 세웠다,/ 그리고 우리의 환희로 바벨(Babel)을 세웠다./ 그리고 옛 세계에 새 세계의 가치를/ 예언함으로써 그것들을 뒤집어엎었다.” 알다시피 “모든 시대는 죽어가고 있는 하나의 꿈이고,/ 탄생하고 있는 하나의 꿈”이다(Poems Prose & Plays 903). 시인의 꿈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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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실
2009.03.07 07:32:31 *.135.162.183
선생님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선생님의 이 글을 제 블로그로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신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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