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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0일 17시 17분 등록

1.저자소개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전통적인 서구 종교, 도덕, 철학에 깔려 있는 근본 동기를 밝히려 했으며, 신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 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를 반성했다.
"신은 죽었다"는 그의 주장은 20세기 유럽 지식인의 주요한 구호였다.


[생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5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나움부르크로 이사하였다.
포르타 김나지움 시절에는 음악과 그리스·로마 문화에 심취하였고, 1864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을 배웠으나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시절 동안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고, 바그너와 음악을 통해 깊은 관계를 맺었다.
69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스승 리츨의 추천을 받아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터지자 위생병으로 종군하였으나 병에 걸려 제대한 뒤 평생 병고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당시 유명한 작곡자로 알려졌던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특히 비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를 듣고 매혹된 나머지 처녀작인 <비극(悲劇)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die, 1872)>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비극의 정신이 진실한 문화창조의 원천임을 인식하고,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의 두 가지 원리로 그리스비극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 정신을 현대에서 부흥시킨 것이 바그너의 음악임을 논하여 그의 신예술운동을 지원하려 하였다. 뒤이어 발행된 <반(反)시대적 고찰 (Unzeitgemsse Betrachtungen, 1873-76)> 4편은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독일 국민과 문화에 통렬한 비난을 가하는 한편 유럽문화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고 천재(天才)를 위대한 창조자로서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1편은 헤겔학파의 신학자 슈트라우스의 <교양(敎養)을 가진 속물(俗物)>에 대한 공격으로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2편은 역사를 기념비적·골동품적·비판적인 3종류로 구분한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이었다.
3편은 쇼펜하우어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니체 자신의 실존적 결의의 표명이기도 하다.
4편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서 공연한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에 관한 찬사이다. 그러나 이 저술을 계기로 바그너와 절교하였으며, 이리하여 천재적인 재질에 의하여 새로운 게르만적 헬레니즘문화를 세우려고 한 낭만적 이상은 무너졌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79년 대학에서 퇴직하고 알프스산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해변을 전전하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사색을 계속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1878-80)> <서광 (Morgenrte, 1881)> <기쁜 지혜 (Die frhliche Wihssenschaft, 1882)>등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들은 잠언(箴言)과 사상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서 종래의 낭만주의를 파괴하고 실증주의적·심리적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83-85년에 걸쳐서는 전에 알프스 산중에서 깨달은 <영겁회귀> 사상을 기반으로 한 <초인(超人)>의 이상을 그린 철학적 서사시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1883-91)>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 니체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모두 표현되고 있으나, 이 추상성에 불만을 품고 구체적 논문식으로 해설한 <선악(善惡)의 피안 (Jenseits von Gut und Bse, 1886)>을 저술하였다.
이 저술에서는 고귀한 정신적 귀족의 육성을 주장하고 장래의 위대한 입법자를 암시하는 한편 퇴폐적인 근대의 여러 현상과 단순히 객관에만 치우치고 있는 과학정신, 동정(同情)에 기반을 두었다는 그리스도교적 도덕, 역사의식의 과잉 등을 예리하고 독특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 후 <도덕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 1887)>가 유럽 윤리사상의 비판서로서 출판되었으며, 이때 이미 <권력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가 준비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사망 후에 유고(遺稿)만이 수집되어 출판되었다.
88년에는 <바그너의 경우> <우상(偶像)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안티 그리스도> <니체와 바그너>등이 저술되었다.
그 중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89년 1월 정신착란 증세에 빠져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동생의 간호 아래 여생을 보냈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善)과 참(眞) 대신 권력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深淵)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內在的)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원숙한 문장과 함께 주로 문학자들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시대 변천과 함께 사상적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날의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었다.


[작품]

1. 비극(悲劇)의 탄생(誕生) (Die Geburt der Trag Udie)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의 영향을 받은 니체의 처녀작. 1872년 <음악 정신에서의 비극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86년 <자기비판 시도>를 머릿글에 넣어 <비극의 탄생 또는 그리스정신과 염세주의>로 제목을 바꾸어 출판되었다.
고전문헌학 연구를 토대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사상을 원용하면서 그리스비극의 성립과 변천을 더듬고,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후 에우리피데스 등이 전개한 주지주의의 비판을 통하여 바그너의 음악에서 근대 독일문화의 헬레니즘적 생명부흥을 기대한다는 내용이다. 종래 고대관의 중심이었던 조화로운 그리스적 청랑(晴朗)함은 아폴론적 가상(假象)에 지나지 않으며 그 배후에 더욱 근원적인 음악 정신, 충동적·파괴적인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역동적 그리스관을 제시하였다.

1-1.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켈트족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중세의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2명의 주인공.
이 켈트족의 전설은 실제로 고대 픽트족(브리튼 섬 북부에 살았던 고대인)의 한 왕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여러 가지 유사한 전설들을 파생시킨 원래의 시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현재 남아 있는 초기 이본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원래 시의 주요내용을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젊은 청년 트리스탄은 이졸데 공주의 도움을 얻어 그의 아저씨이자 콘월의 왕인 마크를 도울 목적으로 아일랜드로 모험을 떠난다.
아일랜드에 도착한 그는 그 나라를 괴롭히고 있던 거대한 용을 퇴치함으로써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한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불운하게도 이졸데의 어머니가 자기 딸과 마크 왕을 위해 준비해놓은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만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불후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사랑은 모든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지만 왕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 서로 대응되는 2개의 기본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마크 왕과 신하들은 두 연인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지만 두 연인은 그들을 잡으려고 꾸며놓은 함정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결국 마크 왕은 그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를 찾아내어 벌을 내린다.
화형장으로 가던 트리스탄은 절벽에 있는 예배당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해 마크 왕이 나병 환자들의 무리 속에 집어 넣어버린 이졸데를 구해낸다. 두 연인들은 모뢰아 숲으로 달아나 거기서 지내던 어느날 마크 왕은 이들이 칼을 칼집에서 빼내어 두 사람 사이에 놓은 채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후 곧 두 연인은 마크 왕과 화해를 하고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마크 왕에게 돌려주고는 나라를 떠난다.
브르타뉴에 도착한 트리스탄은 '이졸데와 이름이 같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브르타뉴 왕의 딸인 '흰 손의 이졸데'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이졸데와 이름이 같다는 점에서만 그녀를 자기 아내로 여길 뿐이었다.
독이 묻은 무기에 부상을 당한 트리스탄은 원래의 이졸데에게 전갈을 보내 그녀만이 자기를 치료해줄 수 있으며 만약 자기를 치료하러 올 생각이라면 타고 오는 배에 흰 돛을 달고 그렇지 않으면 검은 돛을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비밀을 알아챈 질투심 많은 트리스탄의 아내는 옛 애인을 도울 생각으로 서둘러 오는 이졸데의 배를 보면서 트리스탄에게 배가 검은 돛을 달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트리스탄은 얼굴을 벽을 향해 돌린 채 죽고, 너무 늦게 도착해서 연인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이졸데도 마지막으로 트리스탄을 껴안고 죽고 만다. 이들이 죽고 나자 기적이 일어난다.
두 그루의 나무가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솟아나와 서로 가지를 뻗쳐 얽히더니 다시는 풀리지 않게 되었다.

1-2. 디오니소스형과 아폴론형 (Dionysisch·Apollinisch)

그리스신화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의 도취적·창조적 충동과 태양신 아폴론의 형식·질서에 대한 충동과의 대비에서 유래한 용어.
디오니소스적·아폴론적이라고도 한다.
셸링은 내용이 형식에 우월하는 시와 양자가 조화된 본래의 시와의 대립을, 니체의 스승 리츨은 피리와 하프의 음색의 대비를 이러한 대립개념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런 대립개념이 확산된 계기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1872)>이다.
여기서 니체는 그리스조각의 맑고 밝으며 사물을 관조하는 분위기를 아폴론적, 음악의 격정적인 약동을 디오니소스형이라고 표현했다. 온갖 것을 가상(假象) 속에 형태화·개체화하는 조형예술의 원리로서의 아폴론적인 것이, 개체를 도취로써 영원한 삶 속에 해체하는 음악예술의 원리로서의 디오니소스형인 것과 결합되어 그리스 비극이 탄생한다.
이 비극은 일단 낙천적·이론적인 소크라테스주의 탓으로 멸망했지만, 바그너의 악극(樂劇) 속에 재생한다고 젊은 니체는 생각했다. 다만 훗날의 니체는 이 대립개념을 쓰지 않고 영원히 창조하고 파괴하는 생(生)의 긍정이라는 그의 철학의 핵심을 <디오니소스형>이라고 규정했다.
그리스예술의 발전에서 추출해 낸 니체의 이러한 개념은 훗날 예술체계적 구분의 원리 및 역사원리 혹은 예술제작의 전형으로서 널리 채용되었다.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니체의 저서. 4부로 된 철학적 산문시로 1883-85년에 저술되었다.
니체 자신의 이상적 분신(分身)인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를 통해 초인(超人), 권력을 향한 의지, 영원회귀(永遠回歸) 등 니체의 중심사상을 교설한 설교집의 모습을 띠고 있다.
서설(序說)과 제1부에서는 10년간 산상(山上)의 고독한 생활을 보내던 주인공이 <신은 죽었다>는 깨달음을 얻고 인간세계에 내려와 초인의 이상을 논한다.
제2부에서는 영원회귀의 사상이 그의 내면에서 성숙해가나, 이를 세계에 전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함을 느끼고 더욱 성숙한 인식을 위해 산으로 되돌아간다.
제3부에서는 영원회귀사상의 성숙을 기다리며 삶의 절대적 긍정을 노래한다.
제4부에서는 동굴생활을 하던 중 7명의 더 높은 사람을 만난 차라투스트라가 초인도, 대중도 아닌, 고뇌하는 인간들에게 동정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동정은 그에 대한 새로운 유혹이요 시련이다. 그는 결국 동정이라는 마지막 시련을 이기고 성숙한 영원회귀사상을 알리기 위해 홀로 산을 떠난다

<자료출처 : 네이버 검색>

2. 내 마음속에 들어 온 문구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7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7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8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19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를 삼았다.27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27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52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행위들, 그것이 비록 완성된 것일지라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53

사실 시간으로 따져서 가장 늦게 연회에 참석한 사람이 가장 말석에 앉듯이 현재는 과거의 뒷자락에 앉아 마땅하다. 그러나 현재가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가 상석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재가 미래를 건축하고자 할 때이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54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56

사랑은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56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58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59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 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63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84

신은 아담의 능력에 맞추어, 그 과일은 다른 짐승에게는 좋은 과일일 수 있지만 지금 아담의 몸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린애처럼 이것을 도덕적 금지로 이해했던 것이다.90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96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96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107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108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109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 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110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111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또는 경영)’을 알지 못한다.120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123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지 못한다.127

니체는 “서구 전체가 그 제도(민주주의)를 낳고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은 어떤 힘으로도 작동하지 못하고 모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가축 떼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이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138

 “문명(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대항하여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142

노동이 칭찬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없이 이야기 되는 경우…나는 저의를 본다.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142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144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166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169

의지는 욕구나 갈망, (무엇보다도) 결핍과는 다른 것이다. 의지는 명령하는 것이다.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의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171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자체는 권력의지다.”173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17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186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은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192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205

지구는 자신의 나이에 비하면 ‘방금’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인간이라는 동물의 탄생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준비해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혹성이다.210

어떤 사람이 물건 하나를 덤불 뒤에 숨겨 놓은 다음 그것을 바로 그 자리에서 찾아낸다면, 이것을 칭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소위 이성이라는 것을 통해 벌이고 있는 일이 바로 그와 같다.) 내가 포유동물을 정의하고, 낙타 한 마리를 보고 난 뒤 ‘봐라, 포유동물이다’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제한된 가치만이 있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 자체와는 상관없으며, 세계를 인간과 같은 종류의 사물로 이해하고 하는 기껏해야 동화의 감정을 쟁취하는 것일 뿐이다.212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사이에 끼여 있는 ‘과’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215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216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221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222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231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23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수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 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233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239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렸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용감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244

니체의 오랜 좌우명 “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247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250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253

 

3. 내가 저자라면…

깊고 푸른 가을하늘의 텅 빈 공간사이로 천 개의 햇살과 천 개의 바람이 나를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휴일마다 카메라를 들고 낮은 뒷산이나 고궁으로 발을 옮겨 사물을 대할때마다 시선이 머무는 것에서 그 천개의 햇살과 천개의 바람으로 부터의 아름다움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모든 완벽해지는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때가 되었도다”라고 말하는 니체의 말처럼 무릇 생물들은 떠날때가 되었음을 알고 있는듯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한다. 빛이 없는 곳에서 어두커니 서 있는 나무는 얼마나 초라한가! 그러나 제 잎을 다 떨구어 낸듯한 앙상한 가지와 한 떨기 마지막 잎새 위에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머물 때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을 빛.jpg 

 

 

그는 천개의 눈과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가보지 못한 천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로 독자를 초대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익숙한 것들만 보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 들으려 한다.더 이상 우리는 자유인이 아니며 신체조차도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닌 것이다.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노예가 아닌 선택권을 가진 자유인으로서 나의 의지와 내밀한 욕망이 빚어내는 결과물이라 여겼던 내 삶의 조각들이 누군가의 의지와 명령에 의한 길들여짐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섬뜩한가?

 

그렇게 길들여짐으로 내 안에 동물적 야성은 사라지고 창살에 갖혀 창살에 몸을 비벼대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고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과 같은 두려움과 자유와 야수성을 맞 바꾸어 버린 나를 발견하면서 내 자신에 대한 참지 못할 분노에 휩싸였다.

 

대학 1학년시절, 소명이라 여기고 선택했던 나의 길에 대한 깊은 회의와 더불어 읽었던 몇권의 철학서적에서 회의와 허무를 보았다. 그가 삶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과 행복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니체는 “철학자는 꿀을 많이 모으는 꿀벌”이지 않으면 안되며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폐부 깊숙히 찔러 들어오는 칼날 같은 날카로움과 더불어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길에 깊은 회의에 나를 깊은 수렁으로 쳐 넣었을 무렵 “나는 어쩌면 불행에 익숙해 있는지 모르겠구나. 행복이란 것이 웬지 낯선 것 같다. 마치 내것이 아닌 것 같다”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 나는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인 것이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니체는 건강과 생명을 중시하는 삶의 철학자이며 생의 철학자 임을 알게 된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던 병과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유난히 고통스러웠던 그의 삶이 건강한 삶에 대한 열망을 갖게 했을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철학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다.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번!” 이렇게 외치며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 얻게 되는 자신을 찾는 여행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길이 내게 충분한 길잡이가 되지는 못했다. 나의 무지 때문이다.

나의 무지는 종종 벽을 만난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책을 중간에 덮어버리지 못했다. 무지 만큼이나 강하게 자극하는 깊은 호기심 때문이다.

니체는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니체가 말하는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괴물’같은 독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겼고 내 안에서 ‘모험가’나 ‘발견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다. 비록 그의 철학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만하면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니체의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그의 책을 다 이해할 수 조차 없고 이해하겠다 욕심내지 못하지만, 그의 책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내게서 '천개의 햇살과 천 개의 바람'으로 재해석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의미있는 책읽기였으며 가치있는 일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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