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소은
  • 조회 수 2757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8년 11월 11일 09시 02분 등록

1. 저자소개

 

고병권

 

이 책의 저자는 고병권이다. 아마 이 책이 잘 쓰여진 책이라고 느끼는 것은 고병권이 가진 건강한 사유와 균형 잡힌 시각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공동 대표로 그곳의 자유로운 공기와 토론 문화의 주춧돌이 되어왔다. 그는 그곳에서 공부하기, 산책하기, 사랑하기를 배우며 자신의 지적 토양을 다졌다고 고백한다. 그것 없이는 니체의 철학과 윤리, 정치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위험한 철학자 니체를 우리의 삶의 한 복판으로 끌어들이는 건 순전히 니체를 해석하는 고병권, 그의 건강한 시선 때문이다. 니체를 통해 생의 상투성이 푸른 희망으로 싱싱하게 살아올 수 있기를 바라는 건 먼저 그 자신이다. 그런 그의 염원이 책을 통해 전달된다.

 

니체

 

24세에 유명한 스위스바젤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된 사람, 34세에 스스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알프스 산맥을 방황하면서 독창적인 철학을 개척한 사람, 44세에 정신병에 걸려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 믿었던 사람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니체의 짧은 이력이다.

 

니체는 꿈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이 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인지 꿰뜷은 철학자다. 그는 물처럼 흘러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유한한 생을 너무나 아쉬워해서 영원하고 무한한 신을 버렸다. 니체에게 있어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인간이 본래의 자신이 되도록, 초인이 되도록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초인은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완전하게 사용하고 생을 긍정하는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초인은 인간으로서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고, 내세에 의해 위로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니체 자신도 엄청난 병으로 평생 고생했지만 절대 동정이나 연민은 바라지 않았다.

 

헤겔 이루 유럽철학사에서 니체 만큼 영향을 미친 철학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의 철학은 유럽의 실존주의와 영미의 분석철학, 그리고 후기 구조주의 사상까지 골고루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유럽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현대의 다양한 문화 현상들을 이해하고 이른바 근대의 이성적 인간이라는 굴레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니체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 중의 하나다.

 

인간으로서 니체는 너무 슬픈 삶을 살았다. 니체는 아주 젊었을 때부터 편두통과 다른 질병으로 고통받았고, 24세에서 34세까지 짧은 교수 생활 후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외톨이로 알프스 산맥을 떠돌며 사색하는 방랑자로 살았다. 44세에 정신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죽은 후에는 파시즘 철학의 선구자로 오해를 받아 살아있을 때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슬픈 삶이 만들어낸 철학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운명애였으며 그런 슬픈 운명이 되풀이되는 영원회귀도 받아들이겠다는 생의 적극적인 긍정이었다. 니체는 아마도 자신이 주장하는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초인의 삶을 스스로 잘 실천했을 것이다.

 

2. 마음에 다가오는 귀절

책 머리에

3.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라고 답할 것이다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개의 주름을 본다.

4.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광학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들으려 한다.”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7.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악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추다 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 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8.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며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라도 실천이 필요하다.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 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서장

1. 천 개의 눈

17.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 혹은 시각 체계-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2. 천 개의 길

18.“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의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3. 천 개의 기원

18. 역사의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묻혀져 있어야 했는가! 그러나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

4. 천 개의 젖가슴

19. 과학적 인식이라고? 가치 중립이라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양성 공유자도 아니고, 다만 중성일 뿐인 인간들, 성적 불능자들.” 대낮같이 밝은 인식을 떠들면서도 밤만 되면 열린 창을 훔쳐보기 위해 지붕 위를 싸돌아다니는 수고양이들.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5. 천 개의 주사위

19.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 우리에겐 매 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 겨우 천 번? 우리는 벌써 천 한 번째 주사위를 주시하고 있다. 여섯 개의 면밖에 없다고? 우리는 동전의 앞 뒤 면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

6. 천 개의 화살

20.아포리즘은 모두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 아포리즘들만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 있다! 저기 니체하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

7. 천 개의 가면

20.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호기심 많으신 분이시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주시려거든 부디... 또 하나의 가면! 2의 가면을 주시오.”허락하신다면 제3의 가면도..... 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구요? 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시오.

8. 천 개의 이야기

21. 아직도 천 개의 이야기가 남았다.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법-나는 어떤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 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을 넘나드는 법-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법-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 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1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25.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이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26.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플라톤의 저 유명한 언급처럼철학은 전체를 본다알튀세는 이 말을철학에는 외부가 없다는 선언으로 이해한다. 진정한 철학이라면 자신의 체계를 벗어난 사물이나 사건으로 존재하게 놔두지 않는다. 헤겔 역시 자연으로 도피하는 루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세계정신의 훈풍이 도달하지 못할 곳은 없다.”

29.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있다.

30. 서구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죽음의 설교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들에게이 세계는 죄로 가득한 세계이며 천국은저 세계안에만 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와 연관시킨다.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클수록 우리가 지은 죄는 커진다. ‘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의 크기는 역산된다. 이 세계는 죄로 출발한 세계이며, 그 죄가 번성하는 세계이고, 그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세계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벌어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며 삶을 살지 않으면 된다.

31. 철학을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불행히도 서규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있다.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32.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진다. 진리는 고딕의 첨탑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고 진리를 잃어버린 개별적 존재들은 한없이 낮아졌다.

33.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 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 더 이상 신과 진리의 공과를 묻지 못하고 신과 진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묻는 인간의 왜소증,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하여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37.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37. 그리스인들은 고통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38. 오디오푸스가 수동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프로메테우스는 능동적으로 죄를 범한다. 불을 훔친 범죄자 프로메테우스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누가 오디오푸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라고 무든 그리스인들은 이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 세 개의 죽음    

39. 그리스 비극은 삶의 비극성을 극복하려는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을 드러낸다. 삶의 비극성은 삶에서 오지 않고 죽음에서 온다. 삶의 비극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죽음이 주는 공포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관계한다.

39.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 죽음이다. 그러나 으 죽음이 대등하게 나열되는 것은 아니다. 선명한 대비는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다른 두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39.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 받는다. .

41.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41.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 긍정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십자가에 달린 신이 삶의 저주라면, 디오니소스는 토막토막 잘리어 있으면서도 삶을 약속하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며 파괴로 부터도 돌아온다.”

42. 디오니소스적 죽음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다. 니체는 이 철학자의 죽음에 대해 흥미로운 소절을 하나 남겨놓았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라는 제목이 붙은 소절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염세성을 그의 유언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p.44.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타락이 일어난 두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극장과 법원이다.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그러나 언제부턴가 비극은 연극으로 전락했고, 사람들은 관객으로 전락했다.

47. 이 때문에 니체의 철학처럼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은 연극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네가 이해하는 것처럼 나는 본질적으로 반연 극적이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가령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어릿광대에 불과하며, 바그너 역시 배우일 뿐이다. 관객들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러나 아직 세계를 회전시킬 수 있는 가치들의 발명자들은 나타나고 않고 있다.

48. 심판만큼 삶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법을 죽였습니다. 시체가 생명 있는 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은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라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5. 미래의 철학자

49.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 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50. 니체는 감리교의 원조로 알려진 존 웨슬리의 예를 통해 사상이 어떻게 물질적 힘으로 전화하는지 훌륭하게 설명했다. 웨슬리는 그의 스승 피터 뵐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대가 신앙을 가질 때 까지 신앙을 설교하라. 그 다음부터 그대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한 것이다. 신앙이 삶을 생산하면 이제는 삶이 신앙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삶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신앙은 극복되지 않는다.”

51. 철학이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때에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나 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류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이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2. 분명히 광인은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미친 것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미쳤다고 본다. 니체는미친 것의 반대가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길들여진 두뇌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미쳤다는 것은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항상와 있지만항상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항상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의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54.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려고도, 기념하려고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6. 사랑의 의미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5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9.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것이다.

59. 말년의 니체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러한 신호를 발견했다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회개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2 - 강한 자와 선한 자 -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1 - 비판

62. 도덕 학자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이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

63.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 -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가까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2. 계보학2- 탐사

65.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Genealogie)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자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이다. 도덕은 전체를 보고 싶어하지만 계보학자는 전체로 환원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본다.....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층들,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68. 계보학자의 현미경은 미래 철학자의 망치만큼이나 강력한 전쟁무기이다. 그 작은 렌즈는 동일자의 세계에 거대한 지진을 만들어 내는다이너마이트가 될지도 모른다.

3 도덕의 자연사

69.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위조행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의 보편적 기준을 찾아 나선 도덕학자들의 노력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지만,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도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행위인 것이다….도덕이야말로 인위적 조작이다자연에 대한..어느 만큼의 억압이다.

4. 강한 자와 선 한자

72.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특정한 환경과 계급, 교회, 시대 정신, 풍토에서 나온 도덕적 가치 판단을 일반화하는 무모함을 가져온다.

77.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 한자는억압하지 않는지,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고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80. 양에게 독수리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똑같이 독수리에게 양처럼 약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양은 자신이 독수리보다 강하다고 위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함을 억제하는 힘, 즉 유혹에 견디는 힘이며, 독수리는 이 힘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의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83. 원죄의 채무를 지게 되면 그 누구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가 되고 만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물인 인간은 제 자신을 한탄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 “누가 강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약자가 자신을 방어했던 수단이 본능이 되고, 인간성이 되고, 제도가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4.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능동성 개념을 박탈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6. 도덕이라는 동물원

85. 성직자라는 의사들은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첫 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 두 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노동의 축복’.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에대해 분석했던 바대로 니체는 노동이야말로 충동을 억누르는 훌륭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세 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선을 행할 때 유용한 보답을 해주는 것. 네 번째 가장 결정적인 수단, 삶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86.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성직자들은 인간들이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약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87. 칸트에서 헤겔로,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이르기 까지, 또한 초기 기독교적 원한의 정신에서 불교의모든 것은 헛되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부정의 운동은 무를 행해서만 나아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쇠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죽어가고 동물원을 폐쇄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7. 선악을 넘어서

88. 선악이라는 도덕적 가치판단을 넘어서도 여전히- 좋음과 나쁨이라는-가치평가는 남는다.

89. 중력이나 전자기력처럼 덕도 사람을 당기고 밀치면서 행사되는 실재적인 힘인 것이다. 덕을 하나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도덕학에 대한 비판이 자연학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학자들은 사람들이 종교나 미신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예속을 원할 수도 있음을 경고해 왔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잘 아는 일,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선/악의 개념은 좋고 나쁨의 의미만을 가진,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자연학적인 것이다.

90.니체는 『에티카』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좋은 것나쁜 것이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귀족과 노예, 거인과 난쟁이, 덕과 도덕, 건강과 질병,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가치 평가한다.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3.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시지

93.그러나 이는 결국 해석학자가 신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해석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이중의 해석을 거쳐야 한다는 것 의미한다. 이 이중의 해석은 참뜻을 알고 싶어 하는 해석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가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94.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그와 거래를 해야 한다. 해석학자들은 어떤 거래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2. 진리의 해석학

p95.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선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보다차이(거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해석학자들은 헤르메스를 제우스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로 여긴다.

96. 이들과 달리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99.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이다. 상호 주관성을 과학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주관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설 수 있는 방법이다. 행위자들은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수정해가고 결국에는 하나의 합의를 향해 점차 접근해 간다.

3. 스핑크스의 눈

103.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마치 풍경화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

105. 니체의 해석학은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체계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4. 가치의 발명

109. 우리가 해석을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

110.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2.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이다. 해석행위는 모드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113. 니체의 해석은 지배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니체의 역사에 대한 세 가지 관점

첫 번째 기념비적 방식. 과거의 고전적인 것이 다시 한 번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태도다.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 그러나 대개의 기념식이 그렇듯이 이러한 시도 속에서 수많은 차이들은 재현을 위해 깎이고 휘어진다. 두 번째 관점, 골동품적 역사관으로서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려고만 한다. 세 번째 비판적 방식. 인간이 살기 위해서 과거를 파괴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생각. 이들은 과거를 법정에 끌어내 심문하고,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과거와 대립해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은 곤란한 욕망이다.

114.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115. 니체는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질서도 천천히 녹아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115. 해석자가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칸트, 마조흐, 니체, 푸르스트, 푸코 등 여러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을 각각 책으로 내놓았던 들뢰즈는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작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鷄姦)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생아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다. 자식을 본 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임을 부인한다.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 그런데 들뢰즈는 이 계간의 작업이 니체에 대해서는 다소 엉뚱하게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니체를 계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뒤에 올라타고 있던 것이 바로 니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들뢰즈를 상대로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

118.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이다.

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우리는 아직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122. 아마도 니체는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역사가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3.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한다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124.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정치가 아니라사회이다.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표준화.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1 - 근대국가와 전쟁

.126.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27.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31. 칼을 든 군주는 전쟁을 막으면서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의지는 칼 없이도 전쟁을 막아낸다. 모두에게 주어진 한 표가 전쟁의 힘을 흡수해 버렸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 억제 수단이다.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2-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136.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 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138.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능동성이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 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4.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142.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3.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144.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갈 물린 이들을 매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청년층은 국가에 유익한 것을 교육받는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된 생활 진로만이 사회적 영예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그러한 성향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전염된다.

5. 아곤의 정치

152. 전쟁을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의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5장 권력의지와 영원 회귀(1) 자연학 + 윤리학

5-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156.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158. 데모크리토스가 필연성을 중시했다면 에피쿠로스는 우발적인 사건들과 그것들의 복수의 원인들을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성의 세계만 보았다면, 에피쿠르소에게 세계는사건들의 사건’, ‘변화로서의 변화가 구성하는 시간이 흐르는 생성의 영역이었다.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159.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힘의 두 번째 특성은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161. 이제 니체는 세계를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은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이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힘들의 바다, 그것이세계 그 자체" 이다.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164. ‘무거운 정신은 중력의 상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들의 모든 우발적 운동을 잠재우는 족쇄이다. 그것은순수하고 드높은 하늘에 던져진주사위영원한 이성의 거미줄로 묶어 버린다. 던져진 모든 주사위들은 지구의 중심을 행해서만 떨어지고, 모든 반응들은 평형상태를 향해서만 돌진한다.

.166. 니체에게 강함은 무엇보다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173.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이다.”

174.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무의 의미’, 혹은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 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두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175.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며, 그리스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부정으로 다루는가아니면긍정으로 다루는가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다룰 때, 그것은저축이고 강화이다.

177.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좋음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179.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1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그리스적 사유로부터

182. 모든 불멸하는 존재의 죽음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기쁜 일이다.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상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

186.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이 다수다.” ,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 제우스, !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익숙한 오해

192.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

3. 반복의 경우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196.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두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가지가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p4 긍정을 부르는 긍정

201.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 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의지가 영원회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초인이란 다른 느낌 방식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이기 때문이다.

202.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 버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는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다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204-205. 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 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207. 놀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부정이다. 변증법이 그렇듯이 부정은 차이를 적대로 발전시킨다.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

209.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써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게, 영원회귀의 유혹,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있는 밧줄

216. 푸코는 인간을 바닷가 모래밭에 그려진 얼굴에 비유하면서 밀물이 한 번 밀려들고 나면 지워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제 발로 서서 스스로를 자각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듯이 그의 운명이 끝날 날도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위버멘쉬)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221.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광장에 나와 “신을 찾고 있노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

233.“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238.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철학이 변모의 예술이라면, 철학은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239.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46. 『차라투스트라』는 1883년부터 84년 사이에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니체의 변신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변신의 비밀을 담고 있다『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246, 247]

250.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다가 “광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그가 썼던 모든 가면들, 그를 대신했던 모든 인물들은 그가 벌인 “탐험”의 결과물이다. 누구보다도 차라투스트라가 여행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여행 기록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제3권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바로 그 자신이다.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253. 이제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은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2부 베버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263.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뒤집어졌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다.

267. 우리는 기계로서의 관료제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 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270. 베버는훈육은 모든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전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283. 현대 정당들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많은 규율들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규율들은 더 많은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것이다. 정치가가 대중들의 의사를 더 잘 대표할수록 대중들은 더욱 복종한다. 계몽은 계몽 대상의 계몽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킬 뿐이다.

285. 신체의 능력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도 받거나 내면화시킴으로서 성장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신체는 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해야 함을 여러 번 주장했다.

319.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의 징표다. 차이의 아상블라주로서의 생태학에 못지않게, 여러 잡다한 것들이 모여 만든 예술품으로서의 아상블라주 또한 같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퀼트처럼 각각의 것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전혀 양도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이룬다. 우리가 생태적이고 미적인 패러다임을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어떤 생태적 신비화나 심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해야 할 정치적 주체들과 그들의 새로운 소통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인간이 위대해지기 위해 내가 제안하는 공식은 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이다. 즉현재의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되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미래에도, 과거에도, 그리고 영원히.”  --- <이 사람을 보라> 니체

 

 

지난 1년 모닝페이지를 하면서 나는 여러 각도에서 자기 보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오해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니체 책을 읽으면서 그 점에 대해서는 더욱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자기를 가장 잘아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이 사실 오해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니체를 통해 나와, 사물과, 대상과, 삶과, 인생의 다면적인 얼굴을 알아간다는 것은 일종의 충격이고 반란이었다. 니체를 읽고 내 자신에게 거는 주문 1 1항은 반란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 인생 2막은 제대로 써라! ‘이다.

 

이 책은

 

이 책으로 니체를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수많은 철학자가 등장하고, 방대한 니체의 사상이 깊은 설명 없이 요약된, 니체에 대한 책이라고는 하나 니체에 접근하기 위한 단초로 그의 철학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다른 철학자들의 개념까지 섭렵해놓은 이 책은 철학 책을 손에서 놓은 지 너무 오래된 나에게는 사실 좀 벅찬 책이었다.

 

바쁜 일주일 사이 사이 정해진 책을 미진하게 읽고, 리뷰를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꽤나 착잡해진다. 유쾌하게 해야 할 일을 마지못해 하는 기분 때문이다. 무작정 마음이 쏠려 집어든 책 한 권을 감동으로 읽고 난 후, 채 그 감동이 가시기 전에 자발적으로 쓰는 리뷰는 얼마나 살아있는지. 어느덧 나의 리뷰가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난다. 그러나 제대로 이 책을 읽지 못한 미진함 한 켠에는 니체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있다는 걸 안다. 내 불편한 감정은 실은 시간을 제대로 내서 읽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다.

 

나는 어느 봄 날 책을 읽다 갑자기 니체를 알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빠졌고 사부님께 니체 책을 많이 읽게 해달라고 주문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니체를 읽는 주간이 왔다. 그러나 제대로 읽지 못했다. 간신히 턱걸이로 읽고, 그래서 이렇게 미진한 마음으로 리뷰를 쓰고 있다. 실은 이런 책은 시간을 들여 관련 개념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가며 읽어야 한다.

 

그토록 방대한 니체를 제대로 알려면 얼마의 시간을 들여야 할까.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단 한 권의 책에 의지해 니체에 다가서려 한다면 그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니체를 잘 정리한 좋은 안내책은 나 같은 입문자들을 위해 필요하다. 이 책은 입문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고병권, 그는 훌륭한 가이드지만 니체 초보자를 위한 가이드는 아니다. 이미 철학적 개념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에게나 이 책은 잘 읽힐 것이다. 나는 오히려 다이제스트 같은 류의 다른 책, 로이 잭슨의 <30분에 읽는 니체>에서 더 명확하게 니체 저서들의 개념들을 건질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니체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잘 이해하고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길 기대한 건 그저 기대로 끝난 느낌이다.

 

그러나 몇 가지 고민하게 하는 주제들과 만났다. 철학을 거창한 하나의 학문으로 이해했던 것을 깨고 계속 생각을 이어가봐야 할 주제들이다. 특히 신과 죽음, 생성과 소멸, 시간의 문제 등에 관한 니체의 고찰은 돋보였다. 읽는 동안 몇 번의 전율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해 니체가 이미 오래 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이 시사하는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길은 니체 철학의 자유와 광기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하겠다. 철학이 사람들의 두뇌를 훈련시키기 위해 국가의 시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때 니체는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특유의 광기로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거부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는 니체의 광기는 미친 자의 것으로 오해되었다. 니체의 광기는 건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대에 갇힌 사상을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가 소위 미쳤던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보편적 신념이나 시대정신의 구속을 그 스스로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니체의 광기가 내게도 전염되길 바란다. 나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이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인 것을 간파하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철학자가 되고 싶다. 끊임없이 묻고 고민하며 가장 최선의 하루를 살아내고 싶다. 그 길 위에서 마주치는 온갖 우연을 요리하며 놀이를 즐기기를 멈추지 않는 유목적인 삶을 살고 싶다.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기고서도 어떻게 살아야하지 몰라 방황을 멈추지 못한 내게 니체는 방황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다양성, 차이에 대한 이해

니체에 의하면 공공영역에서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음이라고 본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아직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고 있다. 다양성은 건강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연의 생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차이가 생기면 불안해하고 그것이 평화를 해친다고 믿는다. 새로운 것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을 즐기는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있다. 분분한 논란 가운데도 니체는 차이의 앙상블라주(assemblage)를 전망하게 한 사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의 징표다. 퀼트(quilt)처럼 각각의 것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전체의 부분으로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다. 

니체의 결론은 슈테판 클라인이 <행복의 법칙>에서 내린 결론과도 상통한다. 행복을 찾아나서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연습은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특별한 방법을 배워야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것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하는지 주의깊게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습관에 대입해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실험을 해보면 된다. 대답은 각자가 다르다.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에게는 행복에 이르는 길 역시 60억 개다.

윌 듀란트 책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 읽었던 귀절도 불현듯 생각이 난다.

이 도시에서는 과거의 창조적 정신이 기억과 전통의 기적에 의해 아직도 살아서 작용하고 모습을 다듬고 형태를 만들고 노래를 부른다. 거기서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 함께 철학을 가지고 논다. 세익스피어가 매일 밤 보물을 가지고 온다. 키츠는 아직도 나이팅게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셸리는 서풍에 실려 떠다닌다. 니체가 거기서 미친 듯 떠들어대며 폭로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빵을 함께 나누자고 우리를 부른다. 이들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이 가져다준 선물이 인간 종족의 엄청난 유산이다. 씨줄과 날줄로 짜인 역사라는 피륙을 이어가는 황금의 혈통이다.” <역사 속의 영웅들> 윌 듀란트, 22p

 

이 소란스럽고 더러운 강 위에, 부조리함과 고통 한가운데에 진짜 신의 도시가 감추어져 있다고 믿는 윌 듀란트의 낙관주의는 어딘가 모르게 니체와 통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많이 너그러워지고 있다. 날카로운 비판의식도 함께 무디어간다. 사회와 인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자신에게조차 냉정했던 젊은 시절은 어느덧 속절없이 흘러가버렸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더 많이 보인다. 가슴으로 철학을 이해할 때가 된 것 같다.

 

생성만이 진실이다.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선 진정한 자유인 차라투스트라, 그는 바로 니체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니체였다.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진 이질적인 삶의 파편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를 거부하고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관습과 법을 거부했다.

지난 주 연구원 오프수업 때문에 양평 <숲속의 아침>에서 일박할 때 새벽에 일어나 오솔길을 산책했다. 오솔길 옆으로는 계곡 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 바위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모닝페이지를 썼다. 고인 듯 보이지만 실은 쉬지 않고 흐르는 계곡의 물을 바라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사색하게 되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한다. 여기서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니체 식으로 이해하자면 우리를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계속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바로 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변화하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지는 존재다.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는 병이 낫지 않는다.

내 책상에 적어둔 글귀다. 어떤 컨텍스트에서 니체가 이 말을 쓴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우연히 발견한 글귀다. 나는 무릎을 쳤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강렬히 열망하던 내게 이 글귀는 강령처럼 다가들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절규는 현재 삶에 대한 강한 혐오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지독한 사랑인 것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 니체는 운명애를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행위다. 니체는 그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는 아주 놀라운 말이다.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할만하게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운명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이보다 더 강한 삶에 대한 긍정이 있을까.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삶을 사랑하려거든 삶을 맛보는 혀부터, 냄새 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까지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천 개의 길이 있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금지되어온 모든 것들을 찾아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식량을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니체가 말한 삶의 철학, 즉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철학인 것이다. 니체에게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IP *.51.218.189

프로필 이미지
한명석
2008.11.12 10:14:57 *.209.32.129

반란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 인생 2막은 제대로 써라! ‘

그래요,
소은이 가진 에너지와 절실함으로 봐서
언제고 자기만의 세상을 가지리라 믿어지네요.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52 <28>액티비티 리뷰 - 위대한 승리 이은미 2008.11.25 1931
1751 [30] 두 번째 액티비티 윤동주 [2] 서지희 2008.11.24 2662
1750 [31] 액티비티 리뷰 - 프로페셔널의 조건 - 피터 드러커 [1] 정산 2008.11.24 2408
1749 [31] 코끼리와 벼룩 - 찰스 핸디 최코치 2008.11.24 2159
1748 [31] Activity Review 소유의 종말 - 제러미 리프킨 file 양재우 2008.11.24 2322
1747 [31] Activity Review -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고병권) [1] 거암 2008.11.23 2596
1746 [Activity review 2] 영적인 비즈니스 - 아니타 로딕 [1] 현정 2008.11.23 2258
1745 [32] 액티비티 리뷰 2- 인생으로의 두번째 여행 2008.11.22 2359
1744 <27>강의-신영복 이은미 2008.11.17 2555
1743 [29] 윤동주 시선집 서지희 2008.11.17 3240
1742 [30]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_신영복 정산 2008.11.17 2685
1741 [30]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 신영복 양재우 2008.11.17 2193
1740 [60] 프로페셔널의 조건 / 피터 드러커 교정 한정화 2008.11.17 2657
1739 [30] 강의 - 신영복 거암 2008.11.17 2198
1738 [30] 도적놈 셋이서 - 천상병, 중광, 이외수 [1] 최코치 2008.11.17 5429
1737 [28]강의 -신영복 현정 2008.11.16 2279
1736 [31]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신영복 2008.11.16 2303
» (26)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 [1] 소은 2008.11.11 2757
1734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file 이은미 2008.11.10 3144
1733 [28] 신영복 강의 file 서지희 2008.11.10 2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