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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6일 21시 28분 등록


강의, 나의 동양고전독법 - 신영복

● 저자에 대하여

저자 신영복을 말하려면 통일혁명당 사건을 빼놓고 지나가기는 불가능하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알려진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의 발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찰의 발표에 의하면 남파된 간첩 김종태가 통혁당을 조직하고 혁신적 지식인과 학생 등을 대거 포섭하고 요인암살 등을 기도하다 적발되었다. 사건 관련자는 158명이었는데 문화인 종교인 학생 등이 많았다. 김종태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이문규등 4명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신영복은 군법회의 1심과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되어 고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에서는 통혁당을 조선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이남간첩조직으로 몰아갔으나, 오늘날은 이남의 독자적인 전위정당 건설로 보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당시 박정희 군부정권 아래서 민주화와 통일을 이야기하던 4.19세대와 진보인사들이 많은 탄압을 받았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던 대표적인 인사로는 조동일, 임중빈, 박성준 박사(한명숙 전 국무총리 남편) 등이 있다.

1941년 밀양에서 태어난 신영복은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중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과 전주교도소에서 20년간 복역했다. 1988년 8월 15일에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중국고전강의 등을 강의하고 있다. 출소 10년만인 1998년 3월 달에 사면복권 되었다. 1998년 5월에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손잡고 더불어’ ‘나무가 나무에게’ 등이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저자가 수형생활 동안 부모님과 형수, 제수 등에게 보낸 서간을 묶은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애정,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 수형생활의 일상과 단상, 가족에의 소중함 들을 그려냈다.

인간에 의하여 가장 상처를 받았을 것 같은 그는 20년 이라는 복역생활을 마치고 나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강조한다. 경제학을 거쳐 인문학으로 이동한 그의 관심은 인간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왜곡된 현대사의 피해자로 삶을 살았고, 수감생활 때문에 격동의 현대사에서 비켜나 있었던 그는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인간에 대한 왜곡 현상을 정확히 지적해 일깨우고 있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1장, 서론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21]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무한 경쟁 체제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론 그리고 최대한의 사회 건설 담론이 개화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22]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오래된 미래’란 책을 알고 있지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교수가 인도 서북부 티베트 고원의 라다크에서 17년 동안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책의 부제가 ‘라다크로부터 배운다’입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게 길을 가는 것이지요. [2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4]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사회의 신념체계인 자본주의는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특정 분야의 불균형적인 자기 확대가 곧바로 다른 것과의 생성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도성장과 과잉 축적이 이러한 생기의 장을 파괴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39]

2장, 오래된 시(詩)와 언(言)-시경(詩經) 서경(書經) 초사(楚辭)

원래 시경에 실려있는 시들은 가시(歌詩)였다고 합니다. 악가(樂歌)지요. 시(辭)+노래(調)+춤(容)이었다고 전합니다.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은 없어지고 가사만 남은 것입니다.  [55]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58]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1]

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재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분열된 정서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이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64]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2]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75]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77]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인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81]

3장, 주역의 관계론

주역에 담겨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 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물 긷는 그릇에 비유할 수도 있지만 또 안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그러한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97]

자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101]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제3효는 하괘의 상효입니다. 한 단계가 끝나는 시점입니다. ‘무평불피无平不陂 무평불복无往不復’은 어려움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한번 겪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마음을 곧게 가지고 최초의 뜻, 즉 믿음을 회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3]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交)와 통(通)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泰)인 까닭, 그것이 비(丕)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 [119]

박괘는 늦가을에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裸木)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124]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29]

제 4장,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공자는 식읍을 봉토로 받는 대부가 되기를 원했지만 결국 그러한 신분으로 상승하지 못하고 녹(祿)을 받는 사(士), 즉 피고용자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퇴하여 결국 사설학원 원장으로 일생을 끝마치게 됩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엽지 않으니 어찌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라는 1인칭 서술은 물론 공자 자신의 달관의 일단을 피력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공자의 이러한 술회가 공자학단의 역사적 책무에 관한 소명 의식을 천명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그러한 달관이 사회적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가치’에 대한 언급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143]

둘째로 부끄러움에 관한 것입니다.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155]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옛말에 쉰 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내용 자체를 인간적이고 덕성스럽게 영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복지 문제를 삶의 문제로 포용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8]

그러나 “지(知)란 지인이다”라는 단호한 선언이 실용적 의미로 왜소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논어 전체의 상에서 보더라도 그럴 뿐만 아니라 인(仁)과 지(知), 애인(愛人)과 지인(知人)은 논어의 근본 담론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知)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174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7

중요한 것은 무욕과 무사를 설파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공과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치장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이 말에 대하야 아마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타자의 시각이 정곡을 찌르는 법입니다. [188]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8]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는 아는 것, 호는 좋아하는 것, 낙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199]

제 5장, 맹자의 의(義)

인과 의의 차이가 곧 공자와 맹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3]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낙(樂)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獨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동류(同類)라는 안도감과 동감(同感)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久遠)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가는 것이지요. 마치 잉걸불처럼 서로가 서로를 상승시켜 주는 것이지요. 유행(流行)이 바로 동류와 동감의 현실적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정서입니다. 이를테면 소외의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독락의 정서는 오히려 개별 상품이 추구하는 디자인의 차별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해야 합니다. [219]

그때 떠오른 것이 이 곡속장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여자와 내가 만난적도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를 승차한다고 합니다. 승객들은 평균 열 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일 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치(恥)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잠시만 지나고 나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239]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사회입니다. 상품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전체적인 사회 구성에 있어서 전 자본주의부문도 온조하고 있으며 비자본주의 부문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부문에 주목하고 이 부문을 진지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적 과제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 자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 자본주의, 비자본주의 부문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인 화폐 관계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일회적 화폐관계가 전면화되고 있는 인간관계는 사실상 인간관계가 황폐화된 상태이며, 인간관계가 소멸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타자화되어 있는 상태이며 ‘불인인지심’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지요. 지하철에서 있었던 작은 사건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40]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太甲篇)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249]

제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인위(人爲)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위(僞)는 인(人)+위(爲)입니다. 거짓(僞)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274]

어려움과 수월함, 긺과 짦음, 노래와 소리, 앞과 뒤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 간의 차이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못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인위적인 개입이며 불필요한 ‘차이의 생산’이라는 것이지요. [275]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無知無慾)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CF 광고나 쇼윈도 앞에서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구매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 [280]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87]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293]

제 7장, 장자의 소요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311]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며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仁義)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仁)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입니다.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은 것을 가르면 울고, 육손을 물어뜯어 자르면 소리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장자가 주장하는 것은 인의(仁義)는 사람의 천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325]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입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닙니다. 도의 깨달음과 도의 체득 그리고 합일입니다. 물론 현대의 동양에서는 이미 이러한 가치와 정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양의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현대의 특징입니다. 기계에 대한 장자의 주장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30]

장자의 논거는 오늘날의 논의와는 그 장을 달리합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고,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경멸적 문화가 자리 잡는 그러한 일련의 반노동 과정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지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支出)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331]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ㅣ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되어 있다는 비판은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343]

불교의 연기설에 인(因)과 과(果)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면서도 둘이 아닌” 즉 서로 다르면서도 둘이 아니며 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제물과 물화의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침투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7]

제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자는 혼란이 궁극적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묵자는 천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결국 어떠한 사태로 전락하는지를 매우 설득력있게 전개 합니다. 국(國)과 국 간의 공(攻), 가(家)와 가 간의 찬(簒), 인(人)과 인 간의 적(賊), 군신 부자 형제 간의 불충 불효 불화가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373]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뮬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382]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386]

자본주의 체제하의 생산과 소비 수준은 한마디로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하야 그 규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나는 사실 거리마다 즐비한 그 많은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해야 할지 걱정됩니다. 마찬가지로 10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계속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경기를 벌여야 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장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생산 규모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하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390]

제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예(禮)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418]

더 예시하지 않겠습니다만 순자가 악론을 전개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자는 법과 제도적 통제가 가져올 폐단을 경계했던 것이지요. 나아가 사회의 질서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감과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를 계승한 법가의 이론이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가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7]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의(仁義)의 정치는 변화된 현실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고삐 없이 사나운 말을 몰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법가의 인식입니다. [433]

주(周) 이래로 규제 방식에는 예(禮)와 형(刑)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공경대부와 같은 귀족들은 예로 다스리고 서민들은 형으로 다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는 서민들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이것이 법 집행의 원칙이었습니다. 법가는 주대(周代)의 이러한 예와 형의 구분을 없앱니다. 귀족을 내려 똑같이 상벌로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442]

다음 예시문은 망징편(亡徵篇)에 있는 구절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일곱가지 징후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신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법령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써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좇고, 대부의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으며,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놓고, 백성들이 곤궁하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 의복 가구들을 호사스럽게 하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재화를 낭비하면 나라는 망한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르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한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면 나라는 망한다. [449]

악양은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고, 진서파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임을 받았다.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
교사(巧詐)가 졸성(拙誠)보다 못하다는 이 말이 뜻을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읽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457]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58]

제 11장, 강의를 마치며

벽암록(碧巖록錄)의 제2칙에서 조주스님은 사람들에게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로지 간택을 경계할 따름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경우 간택이 바로 분별지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개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476]

8조목 중에서 주자가 가장 의미를 둔 것은 격물과 치지라고 생각합니다.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 즉 “물(物)에 격(格)하여 지(知)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지(知)란 인식이나 깨달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격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만 격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식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실천을 통하여 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488]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無人之境)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505]

고전 강독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창신(創新)과 관련된 것입니다. 창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신은 재조명과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는 시와 산문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508]


● 내가 저자라면

‘나의 동양고전독법, 강의’는 음풍농월이다. 책상 위에서 즐겁게 삶과 세상을 지그시 내다보며 거니는 음풍농월이다. 물론 그 거닐기가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5천년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양고전을 끌어와 현대의 문명을 투사한다. 그러한 투사에는 문명뿐만 아니라 개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따가움이 있다. 결코 편하지 않은, 마음이 불편한 음풍농월은 그래서 더 마음에 와 닿는다. 20년 이라는 시간 동안 수감생활을 한 저자는 뜻밖에도 관계론의 실천을 말한다.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배타적인 존재들이 아닌 서로의 존재를 보완하고 유기적인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감옥에서 실천해 온 관점이다. 긴 시간동안 수감생활을 한 저자가 말하는 인간관계론은 ‘밖’에서만 생활한 사람을 머쓱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책을 따라 거닐다보면 책으로만 만나던 시경, 주역, 논어, 맹자, 노자 등은 어느새 일상 속으로 들어와 숨을 쉰다. 동양고전은 오랜 시간을 거쳐 내려온 경구警句들과 지혜로 가득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수천 년 전의 사상과 인식이 지금의 시대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수천 년 전의 경구는 초현대적 삶을 사는 우리들을 끌어간다. 그것은 고전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선인들의 경험과 지식이 검증되고 집약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수천 년 전이든 수천 년 후이든 그 내용을 되씹으면 되씹을수록 새로운 즙이 흘러나온다.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물질의 낭비를 지적한다. 상품미학과 허위의식에 물든 현대의 사람들에게 근원으로 돌아가라고 소리는 크지는 않지만 울림이 큰 목소리로 외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모든 것을 평가한다. 그 평가의 대상에는 재화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포함된다. 인간이 하나의 상품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효율성은 뛰어올랐다. 효율성이 향상되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그 풍요로움은 인류의 일부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선진국의 거대 자본들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착취의 결과물은 선진 거대자본들의 기름진 식탁을 마련하는데 사용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미 인간적 면모를 상실했다. 인간을 읽어버린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저자는 고전에서 읽어오고 있다.

책에서 가져올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찰이다. 동양고전에 대한 성찰은 물론이고 우리가 속해있는 문명, 우리가 살아나갈 사회, 내가 살아나갈 삶에 대한 성찰의 관점을 배운다면 고전읽기는 세상읽기의 방법을 배우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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