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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7일 11시 46분 등록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돌베개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신영복(1941. 8 ∼ )


그의 이름 석자를 접했을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머리 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20년 20일간의 장기 복역이 아닐까? 시대가 만들어 낸 억울하고도 안타깝기만 한 그 통탄할 세월들. 20년이란 시간의 양은 무엇과도 비교하지 못할 무거움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인생을 80년이라 보더라도 1/4 에 해당하는 시간이며, 가장 소중한 시기이자 피가 끓는 젊음의 시기인 20대와 30대를 희생했다면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그는 현재 60대인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았을 때 모두 대학생활이었다고 말한다. 감옥 이전의 20년, 감옥에서의 20년 그리고 그 이후의 20년 모두 대학시절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감옥 이전 20년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배우는 시기였고, 감옥 20년은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그런 대학 공부와 같은 시간이었고, 출소 후 20년은 줄곧 성공회대학교 교단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보면 느낄 수 있지만 강하고 힘이 있지만 희망이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관조의 이미지와 함께 그가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보이며, 그 길을 가기 위한 강한 개인적 의지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감옥 20년은 그에게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 관점과 함께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희망과 나눔정신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가 그 시련의 20년을 자신의 의지를 ‘조종’하여 정신, 영혼 속에 차곡차곡 배이도록 했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숙성되지 못한 시련은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시련은 이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시련에 대해 시인 고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진 시련은 인간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드물게는 그것은 인간을 승화시키기도 합니다. 신영복교수는 지난날 긴 시간의 시련을 통해서 그 자신을 어떤 증오나 착각에 파묻히게 하는 교조적 황폐화 대신 그 자신을 간단없이 단련하였습니다. 그 정신으로서의 절도는 가히 수행의 그것이었고, 고금을 오고 간 지식의 오랜 섭렵은 순결한 기도와도 방불하였습니다.(시인 고은이 읽은 <신영복의 엽서>,《중앙일보》1997년 12월 30일)


그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그 시간들을 자신을 포함한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성찰에 몰입하였으며, 그러한 생각들을 자신의 부모, 형수, 조카 등에게 엽서로 보냈다. 그리고 1988년 5월 창간한 <평화신문>에 그 내용이 실렸으며, 이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이름의 책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 처녀작인 이 책이 나왔을 때, 세상 사람들은 이 무명의 낯선 저자의 약력에 놀랐으며, 그 내용에 다시한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위안과 격려를 주어야 할 감옥의 낯선 이에게 거꾸로 책을 통해 일반인들이 감동과 함께 위로를 받은 것이다.


당시 그의 책을 읽은 유명인들의 소감을 같이 보도록 하자.


신영복의 글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너그럽고 온화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역사와 사회와 인간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냉철하고 준엄한 비판의 칼이 들어 있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삶을 배우고 또 문장의 극치에 도달한 아름다움을 배우는 것이다. -조정래-


그의 글은 인생, 사물, 우리 일상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은 깨우침을 주기 때문에, 한번 읽고 마는 글이 아니라 항상 삶의 지침서로서 되새김하고 싶은 그런 소중한 글이다. -이해인-


봉함엽서 한 장 분량에 쏟아져 있는 글을 읽고 나면, 바로 다음 글로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밀도 있고 감동이 있는 글들이다. 어떤 때는 책장을 편 채로 가슴에 대고 멍하게 생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책 한권을 읽는 데 두달이나 걸렸다. -유홍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인문학 서적으로는 예외적으로 단번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창간 80주년을 맞은 지난 2005년 ‘책 읽는 대한민국’ 시리즈 중 두 번째로 ‘21세기 신고전 50권’을 소개했는데, 20세기 중반 이후 출간된 수 많은 책들 중 다양한 장르의 전문가들의 추천에 의해 당당히 ‘신고전’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1941년 8월 경남 밀양에서 교사인 아버지와 봉건지주의 외동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까지 교장 아버지의 사택에서 자랐으며, 이 사택은 후에도 계속되는데, 대학 때는 연구실, 통일혁명당 사건이후에는 감옥이라는 이름의 장소로 바뀌게 된다.


3형제 중 둘째가 대체 그러하듯이 그는 집에서보다는 바깥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서를 읽는 누나들과 형님을 따라 그 뜻도 모르면서 비교적 조숙한 독서를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박계주의 ‘순애보’, 이광수의 ‘흙’이나 ‘유정’ 등이 독서 목록에 들어있었다. 그 후 아버지 서가에서 이시첸코의 ‘철학사전’, 보차로프의 ‘세계사 교정', 마르크스의 ’자본‘ 등도 읽었다.


또한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붓글씨를 배우게 되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할아버님의 사랑방에 불려가서 유지에 습자를 하곤 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친구분들이 방문하시기만 하면 그를 불러 글씨를 쓰게 했고, 그러면 친구분들은 푸짐한 칭찬과 함께 자상한 가르침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 당시의 붓글씨는 한낱 습작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의 정서로써 자신이 성장했을 때까지도 내부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30년 후 그가 옥중에서 할아버지의 묘비명을 쓰게 되었을 때 자신의 정서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시한번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해서 무기수가 되었을까? 어떠한 중대차한 과오를 저질렀기에 사형이나 다름없는 극형을 받아야만 했을까? 세상의 어떤 세력이 그를 꼭 감옥에 넣어야만 했을까? 전 강원대 초빙교수로 한국현대사를 강의했던 윤무한씨의 글을 통해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195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으며, 입학한지 꼭 1년만에 4·19를 겪었다. 5·16까지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신영복은 ‘푸른 하늘’을 보았다. 그것은 엄청난 감동이며 충격이었다. <자본론>강독이 정식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5·16이란 반동이 왔다.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노동운동 등 각 부분의 새싹들이 군부세력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혔다.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신영복은 서울대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서클을 만들었다. 모택동(毛澤東)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글을 번역해서 돌려 읽고, 고리키의 《어머니》도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 읽곤 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서클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과 대학원에는 한 해 위에 안병직(安秉直)과 신용하(愼鏞廈)가 있어 친하게 지냈다. 대학원을 마치고 1965년 2학기와 1966년 초에 《청맥(靑脈)》이란 잡지의 예비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참석, 여기서 신영복은 6, 7년 선배인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몇차례 만나게 되었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로,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이들 모임은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되었다.


1968년 8월 24일 악명높았던 김형욱(金炯旭)의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통일혁명당사건을 발표했다. 북한에 연계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지하당 조직인 통일혁명당이 적발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태·이문규·김질락 등이 사형당했고, 신영복은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모두 여섯 번이나 사형이란 무거운 꼬리표가 붙은 뒤 정상참작(?)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통혁당에는 가입한 적도 없고,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던 신영복이었다. 그런 그가 ‘통혁당 지도간부’이며 무기수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젊은 날의 아슬아슬한 임사체험(臨死體驗)이었다.



2006년에 <신영복 함께 읽기>란 책이 나왔다. 여기에는 신영복 교수의 다양한 인간적인 면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의 신영복과 대학생 시절의 신영복은 어떠했는지, 그 주변 어린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선배와 후배들은 어떻게 신영복을 느끼고 있는지, 20년 20일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던 죄수신분으로서 신영복은 어떠했는지, 감방 동료들에게 신영복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출옥 후 20년 동안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과연 그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 그 제자들은 신영복을 향해 뭐라 말하는지 등을 들을 수 있다.


"이 시절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예전에 즐겨하던 예지 넘치는 유머나 해학도 없었고, 사건과 관련된 언급도 별로 없었다고 기억된다. 그는 이미 삶의 문제가 아닌 죽음의 문제와 대면하고 있는 듯 보였고 언어 너머 침묵에 드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같은 방에 수감된 병사들의 한 많은 사연이나 억울한 하소연을 들어주는 데는 후했고, 억울하게 중형을 받고도 변호사 구할 형편이 못되는 병사들을 위하여 '항소 이유서'를 써 주는 데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289쪽)


"그렇지만 내가 정작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은 단지 그의 책에 담겨 있는 성찰과 사상의 깊이 때문만이 아니다. 그와 한솥밥을 먹으며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발견한 신영복은 그의 책만을 읽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도사나 도인이 아니라 가장 평범하고 성실한 생활인이다. 그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여럿이 함께 담소를 나눌 때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는 사람이고, 함께 자장면을 시켜 먹고 나서는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치우고 청소를 하는 사람이다. 그의 그런 모습은 그의 글이 세속을 초월한 도사의 잠언이 아니라 실천하는 생활인의 진솔한 자기표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349쪽)


"종교는 인간의 속 깊은 곳을 넘나드는 것이다. 통혁당의 활동 속에서 인적이 없는 새벽길을 오간 그런 삶을 걸으시면서 내면의 여행을 깊이 하신 선생님은, 분명 종교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예비 사제들인 신학원생들의 신부 수업에 가장 적합했던 곳이 바로 합수리 농촌야학의 연장인 선생님의 합수리 야외 수업장이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했고, 몸에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자신을 보호해야 했던 사람들의 속내를 깊이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 예비신부들의 수업은,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356쪽)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신영복 선생이 보여준 면면들이 너무나도 다채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진정 한 얼굴만을 내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실천적인 삶, 그것이 곧 얼굴로, 그리고 가르침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모신문사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피력하는 관계론에 대하여 말하면서 얼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는 일단 산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낮고 겸손한 위치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물과 같습니다. 물이 다른 물을 만나려면 낮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예컨대 힐러리는 어떠냐, 어느 당 여자 대변인의 인상이 어떠냐는 질문입니다. 그럴 때면 농담삼아 ‘사람의 얼굴은 어원이 얼골이다. 얼의 꼴이란 뜻이다. 정신의 모양이 바로 얼굴이다’라고 답합니다. 얼굴은 아름다움보다는 진정성이 드러나야 됩니다. 사람들이 겸손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진정성이 묻어나는 얼굴을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상품사회에서 상품은 팔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포장이나 디자인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만 상품미학적 문화가 인간의 품성에도 침투해서 진정성이나 만남, 겸손 등의 가치들을 폄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6년 6월 8일 성공회대학교 성당에서는 신영복교수의 고별강의가 있었다. 17년간의 성공회대학교 교수생활을 마감하면서 신영복은 이 날 <주역>의 64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는 ‘박괘’의 ‘석과불실(碩果不食)’을 주제로 삼았다. ‘석과’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실을 뜻한다.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한 개의 선만 남아 있어 그 한 개마저 악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다. 신영복은 이런 상황에서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며,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라고 한국사회를 진단했다.


그는 이 날 “WTO·IMF·FTA로 상징되는 세계화의 물결로 모든 것을 빼앗기는 위기상황이 박괘를 연상시키지만, 마지막 과실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듯 진정한 희망찾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거품이 걷히고 난 후의 우리 경제의 모습과 함께 우리 삶을 돌이켜 봐야 한다”며 “엄청난 외세에 떠밀리고 불의의 폭력에 가위눌리며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날 또 박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겨울을 지나 씨앗을 뿌리고 새로운 싹과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사람을 키워내야 한다면서, “나무는 짧고 숲은 길다. 숲은 전체로서의 완성을 뜻하며, 나무(개인)의 결함까지도 품는다는 점에서 나무의 완성”임을 일깨웠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그의 약력 및 저서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1963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년 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2006년 8월 정년퇴임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석좌교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권 (1998년 6월)

더불어 숲 2권 (1998년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년 8월)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년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년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 12월)


역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년)

사람아 아!사람아(1991년)

루쉰전(1992년)

중국역대시가선집(1994년)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6P)



1 서론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하다면 노촌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19P)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21P)


근대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 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24P)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24-25P)


과거의 사상과 현대의 사상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래는 오래된 과거라 했습니다. 이것은 이를 테면 사상의 시간적인 존재 형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은 시간적인 존재 형식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존재 형식도 갖습니다.(27P)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29P)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29P)


현대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패권국가의 일방주의적 세계 전략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습니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이 말하자면 대립면을 상실한 질주입니다.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존재론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패권주의적 세계 전략은 자기 증식 운동의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그러한 전략은 결국 위기를 심화할 뿐이라는 것이 모순이지요. 이를테면 패권주의적 질주는 자기의 목표를 부단히 허물어버리는 모순 운동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32P)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32P)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34P)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베버의 체계에는 동양 사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관계론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36P)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知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과 수首의 회의문자 會意文字입니다. 착?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36P)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 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37P)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 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38P)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生氣의 장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 生住移滅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39P)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場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41-42P)


화和는 쌀(禾)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皆)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言)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42P)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용中庸이 그것입니다.(43P)


동양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5P)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52P)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詩의 정수精髓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52P)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魂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바로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61-62P)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64P)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卽物的이지 않습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64-65P)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65P)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67P)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소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68P)


한마디로 무일無逸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72P)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75P)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77P)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81P)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82P)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각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84P)



3 『주역』의 관계론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87P)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89P)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이면서 동시에 연역지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입니다.(90P)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92P)


주관적 판단 형식은 근본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철학적 사유에 기초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서구적 판단 형식과 주역의 판단 형식의 차이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관계론적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94P)


어쨌든 개인이게 있어서 그 자리(位)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101P)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101P)


주역의 관계론적 철학사상이 이러한 사회 역사적 지반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107P)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과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23P)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허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립성, 정치적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124-125P)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127P)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128P)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28P)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전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128-129P)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129P)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0P)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달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131P)



4 『논어』, 인관관계론의 보고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141P)


중요한 것은 이 습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 어린 새가 날개 짓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가 기쁜 것이지요.(143P)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145P)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149P)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149P)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150P)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모두 익혀야 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文史哲 시서화詩書畵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고전, 역사, 철학이라는 이성理性뿐만 아니라 시서화와 같은 감성感性에 이르기까지 두루 함양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152P)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관계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이지요. 사회적 질서는 이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54P)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156P)


이글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미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소素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소의 의미는 인간적 품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품성이란 바로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도야되는 것이며 인간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157P)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니라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는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 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의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상품미학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주변부의 종속 문화가 갖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중심부로부터 문화가 이식되는 주변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미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159P)


소위 독특獨特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identity)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他者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데리다J. Derrida의 표현에 의하면 관계 맺기와 차이 짓기, 즉 디페랑스differance(差延)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F. Saussure의 언어학이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차이란 두 실체 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형성하는 두 개의 독립 항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의 경우에는 이러한 독립 항목이 전제되지 않는 것이지요. 모든 것에 대한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차이가 본질이 되는 역설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동양적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대비의 방식은 이러한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우회하고 뛰어넘는 탁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60P)


논어의 화동론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로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이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162P)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 그 근본적인 구성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164P)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164P)


마음(心)이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68P)


운동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과의 접촉 국면을 확대하는 것, 그 과정을 민주적으로 이끌어가는 것 그리고 주민과의 정치 목적에 대한 합의를 모든 실천의 바탕으로 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로서의 덕이 사업 수행에 뛰어난 방법론으로서 검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169P)


정正은 정整이며 정整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172P)


논어 전체의 구성에서 보더라도 그럴 뿐만 아니라 인仁과 지知, 애인愛人과 지인知人은 논어의 근본담론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인知人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知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174P)


상품 가치와 자본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지知는 지인知人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無智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사회일 뿐입니다.(175P)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빈천의 역사를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 일입니다.(177P)


글자의 구성도 ‘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179P)


우리는 주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大同은 멀고 소이小異는 가깝지요.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學과 사思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182P)


「학이」편에 ‘학즉불고’學則不固란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학學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온고溫故와 지신知新을 아울러야 하는 것이지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 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不患人之不知己 患不知人也)이라 할 것입니다.(182-183P)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87P)


모든 타인은 그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189P)


상품미학이란 상품의 표현형식입니다.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디자인된 형식미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상품미학은 광고카피처럼 문文, 즉 형식이 승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감성이 상품미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의상과 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적 상황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지요.

형식미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미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하게 되고 급기야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상품 사회의 문화적 상황입니다. 상품의 구매 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 등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광고 카피 역시 소비자가 상품이나 상품의 소비보다 먼저 만나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그 상품에 담겨 있는 사용가치에 대하여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소비 단계에서 그 허위가 드러납니다. 이 약속이 배반당하는 지점, 즉 그 형식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지점이 패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196-197P)


바로 그러한 이유로 패션의 속도가 더욱 빨라집니다. 그러다가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오기도 하지요. 어쨌든 패션은 결국 ‘변화 그 자체’가 됩니다. 상품 문화와 상품미학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새로운 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변화의 신선함이라는 메시지는 실상 환상이고 착각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품 사회에서 도달할 수 있는 미학과 예술성의 본질이 이러한 것이지요. 상품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세포라고 합니다. 세포의 본질이 사회체제에 그대로 전이되고 구조화되는 것이지요. 형식을 먼저 대면하고 내용은 결국 만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 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197-198P)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이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199-200P)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를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200P)



5 맹자의 의義


사실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 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문, 감탄, 부정구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자애하여 한문의 문법과 예문의 교범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215P)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동류同類라는 안도감과 동감同感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久遠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가는 것이지요. 마치 잉걸불처럼 서로가 서로를 상승시켜주는 것이지요.(219P)


여하튼 맹자의 성선설은 사회 원리인 예가 인간 본성에 순응하는 천리라는 것을 밝혀 두고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 윤리인 인보다는 객관적 구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객관적인구조가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보다 효과적인 이론으로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맹자의 성선설은 불인인지심을 확충하는 체계이며 이 불인인지심의 확충이 곧 본성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227P)


인이라는 것은 활 쏘는 것과 같다.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쏘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과녁에 맞지 않은 까닭을)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231P)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反求諸己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넋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232-233P)


반구제기(半球諸己)의 자세란 IMF 사태에서 우리의 종속적이고 비자립적인 구조를 먼저 보는 것이지요. 물론 친인소연을 다 아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인因을 미루어 놓고 먼 연緣을 먼저 보는 것은 사태를 그릇되게 보는 것이지요. 사활적 공세를 전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패권주의와 그러한 세계 경제체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는 우리의 경제적 위상을 아울러 보아야 하겠지만, 반구제기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원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233P)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242P)


일원이 모든 틈새를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영과불행 不盈科不行 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는 학과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245P)


맹자의 사회주의와 민본주의는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맹자는 그 사상이 우원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패자들에게 수용되지는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맹자의 민본 사상은 패권을 추구하는 당시의 군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아마 제선왕이었지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맹자는 참으로 명쾌하고도 단호하게 답변하여 군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인을 밟은 자를 적이라 하고, 의를 짓밟는 자를 잔이라고 합니다. 잔적한 자는 일개 사내에 불과합니다. 주의 무왕이 일개 사내일 뿐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249P)



6 노자의 도와 자연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253-254P)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反文化的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 의지建築意志에 대한 비판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이며 바로 이 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254P)


도道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262P)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고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입니다.(264P)


도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윤리적인 강상의 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 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269P)


"도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270P)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게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상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 어머니 때문에 복잡한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271P)


무위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272-273P)


노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대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상호 전화轉化될 수 없는 고정 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입니다.(273P)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 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 합니다.(280P)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82P)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하기도 하고 할수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려가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285P)


춘추전국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이 속출하게 됩니다. 직접 일하지 않고 패자覇者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 계층이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287P)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288P)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289P)


제66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이기선하지以其善下之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구절의 선은 well이 아니라 more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289P)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부쟁唯不爭 고무우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291P)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292P)


변화하는 이유는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이러저러한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가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집단적으로 터득해갑니다. 그래서 나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강의도 하나의 골목이기를 바라지요. 여러분이 걸어가는 여러 골목 중의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이 자신의 사상을 정돈하는 작은 계기로서 추체험追體驗되기 바라는 것이지요.(297P)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298P)


대직약굴大直若屈에 대해서 왕필은 “곧음이란 한 가지가 아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직大直을 대절大節 즉 비타협적인 절개와 지조의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으로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300P)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맷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 세계의 소통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연상 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301-302P)


그것의 핵심은 동動보다는 정靜을, 만滿보다는 허虛를, 교巧보다는 졸拙을, 웅雄보다는 자雌를 그리고 진進보다는 귀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데 있습니다.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장자, 열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노자 사상은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데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304P)


노자의 철학은 귀본의 철학입니다. 본은 도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 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제25장.” 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305P)



7 장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309P)


2천년을 격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장자를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 한다면 혹시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과도기는 언제나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많은 담론의 와중에서 우리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패권 경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장자 독법의 핵심적 과제라고 생각하지요.(310P)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 1편 소요유逍遼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는 보행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311P)


장자의 정치학은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모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 자유와 소요를 장자의 정치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궁극적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자와 노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314P)


그러나 장자는 그 전편에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론과 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도 그것은 드높은 차원에서 조감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조감자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물속의 개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317P)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319P)


포정해우의 이야기는 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도에 관한 이야기임은 물론입니다. 장자 사상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평가됩니다.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것을 체득하고 있는 경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논어의 지지자知之者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호지자好之者 불여낙지자不如樂之者와 통하는 경지라 할 수 있지요.(325P)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래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328P)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331P)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효율성 논의에 그치지 않고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333P)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을 강요하는 제국과 패권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335P)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도는 상품생산에 유용한가? 아닌가 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적 가치 나아가 근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문명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어야 하고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능력과 경쟁력이란 고연 무엇인가를 조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340P)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되어 있다는 비판을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343P)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학파간 차이는 그 시대의 과제를 인식하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파간의 차별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학파간의 침투가 진행되는 것이 사상사의 일반적인 과정입니다.(363P)


맹자에 따르면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가가 주공을 모델로 했다면 묵가의 모델은 하나라의 우임금입니다. 우임금은 황하의 치수를 담당하여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신명을 바쳐 일했던 사람입니다.(366P)


이러한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묵자는 겸애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라는 상생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370P)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373P)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자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382P)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388P)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 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생산규모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 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활동의 일환인 것입니다.(390P)


“양성군과 나는 스승과 제자이기 이전에 벗이었고, 벗이기 이전에 신하였다. 우리가 죽기를 마다한다면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엄격한 스승을 구할 때 묵자학파는 반드시 제외될 것이며, 좋은 벗을 구할 때도 제외될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택하는 것은 묵자학파의 대의를 실천하고 그 업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엄정하고 결연한 태도입니다.(396P)


묵자가 죽은 후에도 200여 년 동안 여전히 세력을 떨쳤지만 그 후 2천년이라는 긴 망각의 시대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가는 좌파 사상과 좌파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모여준 역설적이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400P)



9 순자, 유가와 법가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자의 탁론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유가의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정통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405P)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하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408P)


순자의 성악설도 그런 점에서 같은 구조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는 논리의 일환입니다.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라는 사회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와 법도를 알 수 있는 지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417P)


순자의 가장 크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주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의 예는 전국시대의 예이며,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에 도덕적인 내용 이외에 강제라는 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하누 순자의 예론은 전국 말기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19P)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방금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이러한 제도와 법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요. 더 푸르게 만들기도 하고, 둥글게 만들거나 곧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리지도 하는 것, 이것이 교육입니다.(423P)



10 법가와 천하통일


그리고 법은 기본적으로 강제력입니다.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법일 수 없는 것이지요. 법가가 형벌을 정책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법가의 정치형태가 중앙 집권적 전제군주 국가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39P)


이러한 한비자의 사상은 그것이 군주 철학이란 점에서 비판되기도 하지만, 한비자의 군주 철학은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야말로 난세를 평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논리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혼란 역시 임금의 권위가 무너짐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이 한비자의 인식입니다.(447P)


그러나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그것의 분리가 바로 관념화의 과정이고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더구나 법가 이론은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를 심하게 왜곡합니다.(456P)


군주의 술치는 군주의 은밀하고 부정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관료제라는 새로운 제도의 작동원리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법가를 다시 읽는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성과 법치주의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462P)



11 강의를 마치며


동양고전은 5천년동안 쌓여온 것으로 엄청나기가 태산준령입니다. 우리의 강좌는 호미 한자루로 그 앞에 서 있는 격입니다.(471P)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474P)


이 깨달음의 문제는 우리가 이번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해온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그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구조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를 포섭하고 잇슨 문화적 기제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 시대의 지배 담론이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깨달음을 다집해 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475P)


이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들은 우리가 그 전체를 볼 수 없는 거대한 과정 위에서 생멸하는 작은 점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은 점들에 대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점들이 의식된 또는 의식되지 않은 다른 사건들로부터 독립적으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떤 것은 원인이고 어떤 것은 결과라고 판단합니다. 해체解體 철학의 논리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원천적 협소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정체성은 애초부터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76P)


송대의 신유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통일국가를 재건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해야 하는 시대적 대응과제의 일환으로서 등장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종교와 이성의 갈등기에 비종교적 엘리트들이 직면했던 고뇌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무정부적 상황은 당대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게 있어서 시급히 개변하지 않을 수는 없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정치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485P)


어쨌든 불교와 신유학은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의 어떤 전형을 엿보게 합니다. 역사의 매 단계에는 이러한 구도가 중층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이러한 중층적인 구도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것이 역사 이해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486P)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 즉 “물物에 격格하여 지知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지知란 인식이나 깨달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격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만 격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식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실천을 통하여 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이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관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외계外界의 독립적 대상을 의미합니다. 물질과 같은 의미입니다. 인식과 깨달음이 외계의 객관적 사물과의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합니다.(488P)


중요한 것은 송대 신유학은 노불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해이해지 사회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당대 지식인들의 지적 대응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700년 동안 중국사회는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회적 모델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가기 때문입니다.(499P)


중국의 유학 사상은 이처럼 송대의 새로운 재편과 중흥을 거쳐 대단히 안정적인 체제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바로 그 견고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대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견고한 구조는 변화에 대한 무지와 지체로 이어지고 당연히 19세기 말 근대 질서의 도전을 맞아 힘겨운 대응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500P)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충분히 낡은 것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505P)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506P)


이것은 서구적 가치가 개인의 존재성을 강화하고 개인의 사회적, 물질적 존재 조건을 확대하고 해방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구별됩니다. 서구적 가치는 인성의 고양보다는 개인의 존재 조건을 고양하는 것이며, 그 존재 조건들 간의 마찰과 충돌을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506P)


바다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고전 독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독법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근대성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사적 과제와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506-507P)


창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508P)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509P)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509P)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510P)


그림은 우선 ‘그림’이라는 의미에 충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511P)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이 책은 말 그대로 대학교의 노교수님이 진행하는 동양고전 독법을 위한 강의다. 이제 막 겨울이 지나가고 따스한 봄볕이 드는 강의장 한켠에서 아스라이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면서 듣는 강의다. 인생의 경험과 사상이 일치된, 존경해 마지않는 노교수님과 함께 뼈가 있는 역사 속 고전들을 탐구하는 강의시간이다.


이틀간 거의 이 책만 붙들고 살았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중국의 역사 속 특히 춘추전국시대를 아우르는 성인들, 소위 군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해 조곤조곤 말씀해 주시는 신영복교수님의 강의를 듣느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지난 2일은 역사 속 여행이었다. 무려 3,000년을 넘나드는 긴 여행이었으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들을 느끼고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들이었다. 불이무이(不二無異)라고 했던가? 우리는 둘이 아니며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관계론적 입장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을 걷고 있을 뿐 같은 공간을 살고 있는 것이며, 같은 인간으로써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처한 시대적 상황이 다름으로 인한 생각이 조금 다른 것일뿐.


신영복교수는 동양고전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다. 동감하는 바이다. 세워진지 2,000년도 넘는 이집트 피라미드에 이런 말이 써있었다지?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고. 그래. 동양고전의 주인공들은 바로 우리의 인생선배들인 것이다. 우리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잘 새기고 배워서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머리에, 몸에 그리고 뼈에 잘 새겨 생활하면 좋은 것이다. 다소 시대적 문제로 인해 구태의연하다거나 유연하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끼리도 몇 년의 차이만 나도 세대차이를 느낀다고 하는데, 하물며 3,000년의 시간차이를 감안한다면 그 정도는 애교의 수준으로 넘길 수 있는 일 아닌가!


이 책은 두고두고 나의 스테디셀러가 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와 신영복 교수의 이야기는 시간을 두고 계속 곱씹을 필요가 있다. 세상을 살아가며, 인생을 겪어가며, 인간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며 앞으로 수많은 일들과 사건들이 내 앞에 벌어질 것이다. 문제가 생길 것이며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이야기를 되짚어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생각하지 못하는 그러한 관점으로 그들은 일을 바라볼 것이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생각하지 못하는 그러한 사고로 명쾌한 해답을 줄 것이다. 아니 해답도 필요없다. 그러한 방향만 제시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든든한 구원군이 생긴 기분이다. 멀리서만 아득하게 바라만보던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 등의 군자들을 우리집에 모시고 살게 된 느낌이다. 앞으로 인생 대선배들에게 깍듯이 하고 많은 도움을 받아야 겠다. ㅎㅎ


상품미학의 문제점


미美는 글자 그대로 양羊자와 대大자의 회의會意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믓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의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 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 (159P)


‘아름다움’의 반대는 ‘모름다움’이란 해석이 파격적이다. 신영복 교수의 주장대로 본다면 우리는 디자인, 패션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유행이다, 트렌드다 하는 새로운 것에 현혹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 ‘아름다움’이 우리가 오래되고 익숙하여 잘 아는, 그러한 것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한다면 현재의 미학, 특히 상품미학은 자본구조의 논리에 의해 그 본질이 뒤바뀌어진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긴 어디 상품미학뿐이랴! 현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들이 자본구조의 논리에 의해 뒤바뀌어진 것을. 모든 것의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바로 자본, 즉 돈이다. 돈이 사람을 만든다. 돈에 의해 사람이 부려진다. 돈 때문에 사람이 죽어간다. 사람들은 말한다. 돈돈돈... 지금 세계는 금융경제 위기로 인해 돈 때문에 아우성이고 한국에서는 주식시장에서 날아간 돈, 내 돈을 건지기 위한 무지막지한 소송이 진행중이다.


문제는 신영복교수가 말하는 대로 신자유주의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자유가 말 그대로의 순수한 자유인줄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본이라는 큰 틀 아래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그것조차도 자본을 소유했을 경우에만,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할수록 더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이다.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더 많은 자본,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녀야 하고, 벌면 벌수록 더 자유를 갈망하게 되는 악순환의 수레바퀴. 우리는 자본시장이라는 햄스터의 적당한(딱 키우기 알맞은) 우리에서 열심히 바퀴를 돌리고 있는 중이다. 혹시나 먹이를 더 줄 손길이 오기를 기대하며.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패션은 결국 흐름이고 트렌드, 곧 유행이다. 철 지난 유행은 천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새로워져야 하며, 수시로 업데이트되어야만 한다. 변화하지 못하면 바로 사라진다. 결국 아름다움의 ‘알음’은 알지 못한채, 모름다움의 ‘모름’으로만 계속 파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아무도 모른다. 아는 척 하는 사람이 시장을 주도한다. 하지만 그 사람 조차도 곧 모름다운 사람에게 밀려나고 말게 될 것이다. 변화를 위한 변화에 중독되는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변화이며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도 모른채 그냥 그저 변화해야 한다고, 변화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떠벌리게 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장자와 기계와 노동과 현대인


세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장자-


1810년대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는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운동으로 기계 때문에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하자고 일으킨 운동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기계가 가진 효율성이 자본주의의 논리상 필요하다는 요구에 의해 퇴출되고 말았다. 결국 사람의 노동보다는 기계의 효율성이 더 중요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위에서 든 인용구처럼 세계적 패권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제체제 하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국가의 지도자도 모르며,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국민들 또한 모른다. 그냥 흘러간다. 하루하루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데만 급급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 한가지는 언젠가는 죽음이 우리 앞에 올 것이라는 것뿐. 하지만 가엾게도 그 조차도 까먹고 살기 일쑤다. 바쁜 와중에 언제 그것을 가슴에 새기고 살 것인가. 그러다 아스라이 아쉬움의 한숨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장자는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며, 도와 함께 소요해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일하는 것 자체가 삶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도 로 이어져야 하며 결국 도와 함께 즐기고 놀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적인 사회다. 일을 통해 자신을 찾고 자신의 소명을 다할 수 있으며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결론이다. 우리는 장자의 주장을 다시한번 새길 필요가 있다. 왜 일을 하는지,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결국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 다시한번 원점에서부터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무리


약간의 아쉬움이라면 계속적인 같은 내용들을 계속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강의의 특성상 지난 시간에 했던 내용을 되새기기 위한 효과의 반복이겠지만 책으로 읽는 독자에게는 반복이 그리 반갑지는 않은 듯 하다. 책을 편집할 때 강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당시의 분위기나 효과의 전달을 위해 필요할 수 있었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서라면 다소의 중복은 과감히 절제하는 미학도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처음에도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주말 2일이란 시간을 온전히 앗아간 나쁜(?) 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의 대선배들을 신영복이란 가슴 따스한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시간은 꽤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몸은 천근만금 무거워졌고, 월요일로부터 시작되는 직장의 일주일이 무척이나 고달프겠지만 정신이 맑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책 한권으로 느낄 수 있는 호사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겠다. 특히 제대로 알지 못한채 이름만 알고 지내던 맹자, 순자, 묵자의 사상들은 역사 공부뿐 아니라 그들의 살아간 시대와 더불어 그들의 사상이 어떻게 발생되었고, 전개되었으며 자리잡게 되었는지까지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최근 직장업무뿐 아니라 주변환경의 변화로 많이 힘이 들고 지쳤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칼럼이나 북리뷰, 그리고 첫 책을 쓰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시간 내기도 힘들고 몸도 피곤하여 다소 주춤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좀 쉬면서 해도 충분할텐데...’하는 안이한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중의 원인을 ‘반구제기 反求諸己’의 태도로 찾으라는 교훈에서 다시한번 나를 추스르는 기회가 되었다. 일주일의 한권의 책과 북리뷰, 칼럼을 쓰는 연구원 생활은 내가 자청하여 시작한 것이며, 내가 원하여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는가. 결코,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것임을. 그렇다면 즐거이 하는 것이 몸에도 좋고 정신에도 장땡이라는 것을.


맹자는 ‘불영과불행 不盈科不行’이라고 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채운 다음 앞으로 나아가지 절대 건너 뛰는 법이 없다고 했다.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정도正道로 계속하여 꾸준하게 정진하라고 하였다. 벌써 11월이다. 좀 더 피치를 올려 나아갈 때다. 잔머리나 꽁수를 부려 몸의 안위를 위하고 우선순위를 바꾸거나 할 때가 아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 다시한번 나를 정신차리게 해 준 신영복교수님과 중국 고대의 선배님들에게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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