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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7일 11시 55분 등록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돌베게


1. 저자에 대하여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저자에 대한 조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남들의 시각으로 재단된 저자에 대한 선입관을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서 처음 저자를 접하면서 느끼고 생각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나만의 감각으로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작가는 책으로 말한다'는 글귀처럼, 온전히 책 내용을 통해서만 작가에 대한 느낌을 갖는 것이 그 작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고 믿는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저자(대부분이 그렇지만)의 책을 접하게 되면 설레임이 찾아든다.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어떤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할까? 왜 이렇게 무리한 논리를 전개할까? 책을 읽는 과정 중에 찾아드는 다양한 느낌들이 ‘저자에 대하여’를 쓰게 하는 재료가 된다.

저자가 오랜 수형생활을 통해 쓴『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이전에 이름을 들어본 바 있는 유명한 책이다. 하지만 그 책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이 책이 저자의 첫 책이다. 그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한 후 출소했다. 28세부터 48세까지 인생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를 저자는 감옥에서 보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당시 비슷한 사건의 주인공들 처럼 저자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을 수도 있을 게다. 그렇다면 얼마나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을까? 이런 경험을 갖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겉표지에 나와있는 짤막한 저자소개를 보고서 책머리말을 읽기 전부터 유난히 궁금증이 많이 생기는 사람이었다.

저자의 글은 20년 옥살이를 한 사람 같지 않게 아주 차분하다. 저자는 겸손하고, 친절하고, 논리적이다. 동양 사상을 섭렵하는 이런 책을 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고, 어려움이었을 텐데 저자는 그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실타래를 풀어가듯 서두르지 않고 여유있게 풀어간다. 그리고 독자에게 동양고전 읽는 법에 대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책 한권을 통해 동양 사상 전반에 대해 이 정도의 맛을 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바다. 이런 책을 만난 건 행운이다. 이런 저자를 만난것도 그렇다.


< 출판사 저자 소개 >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숙명여대 정경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하다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을 강의해왔으며 1998년 3월 13일 사면 복권되어 1998년 5월 1일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정식 임명되어 현재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엽서』(1993),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1, 2(1998)가 있으며, 역서로는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 『사람아 아! 사람아』(1991), 『노신전』(1992, 공역), 『중국역대시가선집』(1994, 공역)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필자가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어서 미루어오다가 전공 교수 두 분의 검토를 거쳐 책으로 내게 되었습니다.[5]


1장 서론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21]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21]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무한 경쟁 체제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론 그리고 최대한의 사회 건설 담론이 개화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22]


우리가 걸어놓은 화두는 ‘관계론’關係論 입니다.[23]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 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自己增殖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23, 24]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교수의 『오래된 미래』에서> [24]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본질적인 차이가 지적된다 하더라도 이른바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의 본질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논리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28, 29]


궁극적으로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우리가 고전 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29]


동양 문화라는 개념은 서양 문화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조어造語입니다. 세계를 주도하는 문화는 서양 문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양 문화는 그 자체로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문화 일반의 준거準據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 문화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변적 위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 문화가 조명되는 구도이지요.

근대사는 서구 문명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 세계의 기본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29, 30]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善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30]


과학이 자신의 대립면對立面을 상실하고 무한 질주를 거듭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과학은 희망을 주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과학 이성에 대한 종교의 지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그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30, 31]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32]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死活的 공세攻勢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 과정이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본 축적 과정의 전형적 형태입니다.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왔고 또 당분간 주도해갈 세계 질서 역시 동일한 모순 과정을 답습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와 존재론적 운동 형태를 지양하지 않는 한 다른 경로가 없기 때문이지요.[33]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38]


동양 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42, 43]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서양 문명이 갖는 모순구조)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요중용이 그것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순과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人文世界의 창조에 있습니다.[44]


노장노장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무욕無爲無欲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입니다. 유가와 도가는 이로써 서로 견제하고, 이로써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44]


2장 오래된 시와 언


『시경』의 시는 약 3천여 년 전의 세계 최고最古의 시입니다. 은말殷末 주초周初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春秋 중엽인 기원전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시詩와 가歌를 모아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56]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詩三百篇 一言以蔽之思無邪).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58]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인이 연탄이란 하나의 대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연탄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봅니까? 안도현의 시는 이러한 내용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65]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


이 글(『서경』의 周書, 無逸)은 주공이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형인 무왕武王이 죽은 후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주나라 창건 초기의 어려움을 도맡아 다스리던 주공의 이야기입니다. 군주의 도리로서 무일無逸하라는 것이지요. 안일에 빠지지 말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70]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노인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을 반성하는 교훈으로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석지인 무문지’昔之人無聞知에서 노인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태였음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IMF 사태 이후 구조 조정 과정에서 퇴직 연령이 낮아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노인들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早老化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75, 76]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77]


3장 『주역』의 관계론


강의 서두에 합의한 바와 같이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 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87]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神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89]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89]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90]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占卜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經)에 대한 해석(傳)의 시대입니다. 경經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傳은 그것의 해설입니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란 책은 『춘추』라는 텍스트(經)를 좌씨左氏(좌구명左丘明)가 해설한(傳) 책이란 의미입니다. 공자학파가 경에 대한 해설을 이루어 놓기 이전에 『주역』은 복서미신卜筮迷信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해설의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철학적 해석이 곧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바라보는 판단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로서의 경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였지요. 유구한 삶의 역사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91]


『주역』의 경은 8괘, 64괘와 괘사, 효사의 네 가지입니다. 괘와 효는 고대 문자이며, 괘사와 효사는 점을 친 기록이라고 합니다.... 『주역』의 전傳은 괘사와 효사에 관한 10개의 해설문을 말합니다. 경에 달린 10개의 날개란 뜻으로 십익十翼이라 합니다.[92]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 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 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92]


『주역』의 독법에서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위位입니다. 즉 ‘자리’입니다. 어떤 효의 길흉화복을 판단할 때 그 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고 판단합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 즉 1, 3, 5에 있는 경우와 음효가 음효의 자리인 2, 4, 6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합니다.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 이를 실위失位라 합니다.[100]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101]


☞ 책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능력 범위의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너무 큰 목표를 잡으면 결국 거짓과 위선으로 채워진 책을 쓰게 되거나 책을 쓰지 못하게 되거나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의 비결입니다.[102]


자신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得位와 실위失位의 개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과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입니다.[102]


나도 물론 중간을 매우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 선호하는 이유가 무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둑 7급이 바둑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바둑 1급은 비슷한 상대를 만나기가 쉽지 않지요.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103]


『주역』 사상에서는 위보다 응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칩니다. 이를테면 ‘위’의 개념이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이를테면 개체 간의 관계론이지요. 그런 점에서 위가 개인적 관점이라면 응은 사회적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중략)

위보다 응을 더 상위의 개념으로 치는 것이 『주역』 사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德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05]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107]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107]


공자는 『주역』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 하였습니다. 죽간竹簡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107]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交와 통通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泰인 까닭, 그것이 비否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119]


태괘는 선길후흉先吉後凶임에 비하여 비괘는 선흉후길先凶後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양적 사고에서는 선흉후길이 선호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괘가 흉하고 비괘가 길하다는 도치의 독법도 가능한 것이지요. 『주역』은 이처럼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대성괘 역시 다른 대성괘와의 관계에 의하여 재해석되는 중첩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120]


이 박괘는 흔히 혼돈 세상에서 사상적 순결성과 지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 세란식충신世亂識忠臣,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 등이 그러한 풀이입니다. 가정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123]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128]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28, 129]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129]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매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29]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130]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避苦取樂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주역』에는 사물의 변화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구도가 있으며 그것이 사물과 사건과 사태에 대한 일종의 범주적範疇的(kategorie) 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64괘를 칸트의 판단 형식判斷形式과 같은 철학적 범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범주적 판단 형식은 근본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 형식陳述形式이나 최상위 유개념類槪念과 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주역』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130, 131]


4장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공자의 시대는 기원전 500년 춘추전국시대입니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으로, 중국 사상의 황금기인 소위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춘추전국시대는 철기鐵器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원전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 특유의 광범하고도 혁명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국강병에 의한 패권 경쟁이 국가 경영의 목표가 되고 침략과 병합이 자행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패권주의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둘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구舊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입니다..... 셋째,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화제방의 시기입니다.[138, 139]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들어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대한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41]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 「學而」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142]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인간관계의 사회적 존재 형태가 사회 구성체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인간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요.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145]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 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재편 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정치 혁명 또는 경제 혁명이나 제도 혁명 같은 단기적이고 선형적線型的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不可逆的 구조 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146]


君子不器   - 「爲政」

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릇(器)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군자의 품성에 관한 것이며 유가 사상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기도 합니다.[150]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구格   - 「爲政」

첫째, 형刑과 예禮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입니다......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부끄러움(恥)에 관한 것입니다.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중략)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154, 156]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 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158]


우리는 미를 상품화하는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과장되기도 합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상품미학에 이르면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주목되지 않습니다.[158, 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159]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 子路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중략)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160, 163]


이 강의 서론 부분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21세기의 구성 원리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문명을 가장 앞서서 실험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자부심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대륙적 소화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해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佛學이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이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지요.[163]


근대사의 정점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패권적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논리가 바로 존재론적 논리이며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同의 논리입니다.[164]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165]


화의 원리는 통일 과정의 출발점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우리의 통일 과정에 있어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가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구도를 모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화의 원리는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세계사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165]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화의 논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물론 보다 종합적이고 심도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166]


子曰 德不孤 必有隣    - 里仁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선생이 상서尙書의 한 구절인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의 뜻은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것으로 미모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고 건강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166]


마음(心)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신호불여심호’에 한 구절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심호불여덕호’心好不如德好가 그것입니다. “마음 좋은 것이 덕德 좋은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덕의 의미는 논어의 구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웃’(隣)입니다. 이웃이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입니다. 심심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성과 품성의 의미라면 덕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덕은 당연히 인간관계에 무게를 두는 사회적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168]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옛말에 쉰 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내용 자체를 인간적이고 덕성스럽게 영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복지 문제를 삶의 문제로 포용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68]


자공인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足食), 군사(足兵)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民信之)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去兵). “만약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去食).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170]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신信은 그 글자의 구성에서 보듯이 ‘인人+언言’의 회의會意로서 그 말을 신뢰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신信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고 풀이되고 있지만 언言은 원래 신神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신信이란 곧 신神에 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 간의 믿음이라는 뜻은 후에 파생되었다고 보지요. 그만큼 신信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171]


정正은 정整이며 정整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172]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爲政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179]


진정한 지知란 무지無知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知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愚야 말로 지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186]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87]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190]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다.  - 옹야


광고 카피의 문장과 표현이 도달하고 있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완성도에 대하여는 누구나 감탄하고 있는 일이지만 광고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소비자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사史하다(사치스럽다)고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회운동 단체의 성명서처럼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을 전개하는 형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질이 승하여 야野한(거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195]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 옹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199]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200]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 옹야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靜的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201]


5장 맹자의 의


맹자의 생몰 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자 사후 약 100년경인 기원전 372년에 태어났다고 하며, 향년 74세에서 84세, 94세, 97세 등 여러 설이 많으나 사전史傳에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대체로 공자 사후 약 100년 뒤에 산동성 남부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가軻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211]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212]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뵈었을 때 왕이 말했다. “선생께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찾아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져오셨겠지요?”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212]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大夫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領地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士人이나 서민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 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利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213]


만승萬乘의 천자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천승千乘의 제후일 것이고, 천승의 제후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백승百乘의 대부 중에서 나올 것입니다. 일만一萬의 십분의 일인 일천一千을 가졌거나, 일천의 십분의 일인 일백一百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적게 가졌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의義를 경시하고 이利를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진(仁)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義로운 자로서 그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길 일이지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214]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문, 감탄, 부정구否定句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자재하여 한문의 문법과 예문의 교범으로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215]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民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임금을 몰아내고 현인을 새 임금으로 세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직단도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직단은, 비유한다면 로마교황청입니다. 그로부터 임금의 권력이 나오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민본 사상입니다.[217]


맹자의 유면한 연민동락與民同樂 사상입니다. 주자가 주를 달아서 강조하고 있듯이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고 한 대목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즐거움(樂)과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낙樂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獨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19]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써 미루어 볼진대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仁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知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네 가지 싹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선善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이 네 가지 싹을 가지고 있는 사람 누구나 그것을 키우고 확충시켜 나갈 줄 안다면 마치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나 막 솟아나기 시작한 샘물처럼 될 것이다(크게 뻗어나갈 것이다). 그 싹을 확충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는 천하라도 능히 지킬 수 있고 그것을 확충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자기 부모조차도 제대로 모실 수 없게 될 것이다.[225]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장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표명된 구절입니다. 성선설의 요지는 모든 사람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우물에 빠지는 어린아이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으로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을 모두 이끌어낸다는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입니다. 우물의 어린아이 이야기로써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측은지심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논리적인 비약과 무리를 남겨둔 채 서둘러서 인의예지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매우 선언적 주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장의 목적이라는 ‘사단의 확충’으로 넘어갑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장에서 맹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인의예지의 사단과 이 사단의 확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은 다분히 윤리적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226]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윤리적 차원의 선언이기는 하지만 “만민萬民은 평등하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매우 중요한 맹자 사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27]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중략) 반구제기反求諸己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自己反省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自慰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232. 233]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치恥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무관심과 냉담을 도시 문화의 속성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239}????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242]


孟子曰 公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

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 盡心 上


맹자께서 말하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魯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泰山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니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243]


맹자의 사회주의와 민본주의民本主義는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맹자는 그 사상이 우원迂遠하기 때문에 당시의 패자들에게 수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맹자의 민본사상은 패권을 추구하는 당시의 군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249]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 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 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맹자 離婁 상>[249]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춘추전국시대는 결국 法家법가 사상에 의하여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秦始皇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 사상계의 통일도 당연히 뒤따르게 됩니다. 焚書坑儒분서갱유도 그러한 사상 통일의 일환입니다. 유묵儒墨 논쟁이나, 유법儒法 논쟁은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통일의 주역인 법가 사상은 난세亂世를 평정하는 과정에서는 대단한 역동성을 발휘했지만 치세治世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은 단기전에서는, 법가적 정책이 그 역량을 결집하고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가동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진정한 부국강병을 만들어내는 데는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부국강병이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문의 자생력自生力을 길러 내고 꽃피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장기적인 재생산성을 법가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그리하여 유가 사상이 지배층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진한 이후의 제도 폭력이 지배하는 역사적 조건에서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저항적 지반이 광범하게 형성된 것은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할 것과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노자의 반문화反文化 사상이 지배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비판 담론뿐만 아니라 나아가 저항 담론과 대안 담론으로서 그 지반을 넓혀가게 됩니다.[255, 256]


자본주의 역사는 자본 축적의 역사이고 자본 축적은 모순의 누적 과정입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누적된 모순으로 말미암아 축적 과정 그 자체의 작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전반적 위기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위기는 패권 국가들의 집단적 담합과 폭력적 개입에 의하여 그것이 억제된 상태일 뿐입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물리적 억압과 간섭이 그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의식구조에 있어서 엄청난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가 구축됩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물리적 강제를 은폐하고 유화宥和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현대 자본주의는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대중 조작(記號操作) 체계를 장악하고 이성의 포섭뿐만 아니라 감성의 포섭까지 완성해놓고 있습니다. 엄청난 건축을 완성해두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해체주의자로서의 노자가 생환生還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노자의 언어와 담론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조명해내고 자본주의 문화의 허구와 총체적 낭비 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자가 생환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256, 257]


노자의 생존 연대는 『사기』에서조차도 확실한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학자들은 대체로 맹자孟子 뒤, 한비자韓非子 앞이라고 주장합니다..... 『노자』는 81장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은 도道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는 노자 개인의 저작이 아님은 물론이며,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을 뿐이며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대체로 기원전 350 - 기원전 200년경의 집단 창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258]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 제1장

도道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262, 263]


(1장의) 핵심 개념은 무無와 유有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제1장의 핵심 개념은 무와 유이고 그것이 같은 것이라는 선언이지요.[263]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無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無名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有名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264]


전체의 의미 맥락에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자구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는 서로 용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노자 사상은 그 함축적인 수사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다른 표현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267]


도道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윤리적인 강상綱常의 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 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269]


이처럼 노자의 도道와 명名은 서양의 사유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개념이 없으면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을 노자류老子類로 표현한다면 ‘도비도道非道 비상도非常道 명비명名非名 비상명非常名’이 되는 것이지요.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선험적 인식 구조에 의하여 구성될 뿐이지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노자의 도와 명에 관한 제1장의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270]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 형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 어머니 때문에 복잡한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271]


널리 알려진 미美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혐오스러운 것이다.

널리 알려진 선善을 선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 제2장


이 구절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다시 한 번 노자의 기본 사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위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입니다. 무위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제1장 유와 무의 통일적 인식에서 이미 표명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273]


노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대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상호 전화轉化될 수 없는 고정 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 체계입니다.{중략)

『노자』의 텍스트에서 대부분의 爲는 인위人爲, 작위作爲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자 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儒家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예악禮樂, 명분名分, 문물文物 들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 전편을 일관하고 있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최고最高, 최선最善, 최미最美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알고 있는 美와 善이란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인식이지요. 자연스러움을 외면한 인위적인 미나 선은 진정한 미나 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273, 274]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갇혀 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존의 인위적인 미와 인위적인 선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제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하고, 나아가 실천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제2장의 핵심 개념은 인식과 실천의 반성입니다.[274]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이 구절에서는 간단히 말해서 有無, 難易 등의 구분 자체를 부정합니다. 有와 無가 상대적인 것이고 구별할 수 없는 것임은 제1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어려움과 수월함, 긺과 짧음, 노래와 소리, 앞과 뒤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 간의 차이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못 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인위적인 개입이며 불필요한 ‘차이의 생산’이라는 것이지요. 차이의 생산이 곧 자연의 분열이며, 자연의 훼손이며 그것이 곧 인위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차별적 인식이 특히 ‘어려움’, ‘없음’, 짧음‘, ’낮음‘ 등의 의미를 부당하게 폄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의 본성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위적인 구분의 초래할 수 있는 혼란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75]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276]


결론적으로 『노자』의 제2장은 인식론이며 실천론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分別智를 반성하고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의 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OX 식의 이분법적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有無, 難易, 高低, 長短은 비교할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요. 더구나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춘추전국시대를 지배하는 협소한 인식을 반성하고 조급한 실천을 지양하자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悠長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277]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해야 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無知無欲하게 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면 혼란이 있을 리 없다.[278]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CF 광고나 쇼윈도 앞에서도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구매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것이 지식 상품의 CF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상품입니다. 상품으로 생산되고 상품으로 유통됩니다. 상품의 운동 원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비가 미덕이 되고 부단히 새로운 상품이 생산됩니다. 그리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상품 이외의 소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 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언어도 상품이 됩니다. 지식의 도구인 언어 그자체가 가장 이윤 폭이 큰 첨단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도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도무지 무욕無欲할 수도 없고 무지無知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

노자는 또 지자智者들로 하려금 함부로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자들이 벌이는 일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들을 지자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현賢을 숭상하고, 難得之貨를 귀하게 여기게 하고,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해내고, 심지心志를 날카롭게 하는 등 작위적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지자들이지요.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자들은 특히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노자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작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280, 282]


유가에서는 이 제3장을 들어 노자 사상은 우민 사상愚民思想이며 도피 사상逃避思想이라고 비판합니다. 無知, 無欲 그리고 無爲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전체의 의미를 읽고 전체적 연관 속에서 부분을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구와 부분을 도려내어 확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요. 미운 사람을 험담하는 경우에 그렇게 하지요. 부분의 집합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의 확대는 전체의 본질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노자』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無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無不治)입니다. 혼란(不治)이 없는(無)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隱遁돠 피세避世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改世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283]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 제8장


노자의 철학은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특히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면서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投降主義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 되는 것을 노자는 ‘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대단히 풍부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84, 286]


춘추전국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이 속출하게 됩니다. 직접 일하지 않고 패자覇者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 계층이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노자는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사회학과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 철학적 논리로 승화시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체계를 완성합니다. 여기에 시대를 초월하고 있는 『노자』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로 패권 경쟁을 둘러싼 일체의 행위를 반자연의 무도無道한 작위로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286, 287]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有가 이로운 것은 無가 用이 되기 때문이다.  - 제11장[292]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293]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품성은 백성, 즉 민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함으로써 신뢰받는 일입니다. 백성을 믿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상의 정치이며, 이를테면 무치無治입니다. 무치가 가능하기 위해서 임금은 백성을 신뢰하고 백성은 임금을 신뢰하는 관계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295, 296]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근본적인 것입니다. 功을 세우고 일을 성취했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功成而弗居: 제2장)은 물론이며 그 공로를 이야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功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遂身退 天地道: 제9장)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백성개위아자연’百姓皆謂我自然, 즉 모든 성취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게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96]


노자의 자연은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 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298]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 제45장 [299]


『노자』 강독을 끝내자니 미진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노자 사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動보다는 靜을, 滿보다는 虛를, 巧보다는 拙을, 雄보다는 雌를, 그리고 進보다는 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데 있습니다.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장자莊子, 열자列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노자 사상은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노자 사상은 상당 부분이 법가 사상으로 계승되기도 합니다. ‘상선약수’를 설명하면서 언급했습니다만,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사실은 노자를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노자』는 도교의 기본 교리로 경전화되기도 하고, 불교 사상의 정착과 송대 성리학의 본체론과 인식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입니다. 그 이외에도 문학, 회화, 藝道, 舞蹈, 그리고 무위無爲의 관조적 삶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에 걸쳐 깊이와 多彩를 더했다고 평가됩니다. 韓非子의 通御術, 兵家의 虛實 戰法도 노자의 영향에서 발전했음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철학은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당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 제25장)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305]


7장 장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井底蛙)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입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조敎條에 묶인(束於敎) 굽은 선비(曲士)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一喝합니다.[309]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거대한 사상적 혼란기였습니다. 사이비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횡행하는 이른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음은 물론이고 겨우 패권 경쟁을 위한 정책 대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우물을 벗어나지 못한 개구리에 지나지 않으며 여름을 넘기지 못하는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310]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311]


일제하에서부터 해방 전후의 격동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폭압적인 군사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에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는 실로 엄청난 무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절망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장자』는 많은 사람들이게 일탈의 논리로, 패배의 미학으로 읽혀졌음이 사실입니다.[312]


아마 이러한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에 우리의『장자』 독법이 부정의 철학으로 기울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소요유가 단지 소요를 위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소요유는 장자의 고차원의 사회 철학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312]


『노자』의 서술 방식은 사설辭說을 최소한으로 하는 엄숙주의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선언적 명제命題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만연체를 기조로 하면서 허황하기 짝이 없는 가공과 전설 그리고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책의 제1장이 그러한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314]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317]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기대지 않고(無待),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無碍)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318]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상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319]


『사기』 「노장신한 열전」老莊申韓列傳에 장자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몽蒙(하남성 商丘縣 동북부) 출신으로 이름은 주周이며, 양혜왕, 제선왕, 맹자와 동시대인으로서 박학하였고, 근본은 『노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몽이란 곳은 장자 당시에는 송宋이라는 작은 나라에 속했습니다..... 장자는 약속국의 가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사상을 키워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자유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거의 사상 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1차적 가치는 ‘생명生命 그 자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반反생명적인, 반자연적인 그리고 반인간적인 모든 구축적(construct) 질서를 해체(deconstruct)하려는 것이 장자 사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신의 자유입니다.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320]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 관점(自彼)에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自知)에서만 본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여 이것을 (혜시惠施는) ‘저것과 이것의 모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生과 死, 사와 생 그리고 可와 不可, 불가와 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모순 관계에 있다. 가가 있기에 불가가 있고 불가가 있기에 가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不由)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322]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324]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328]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機事)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純白不備).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神生不定)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道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329]


그 다음 이야기도 매우 신랄합니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하고 있는 자공에게 댁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노인이 묻습니다. 자공은 공구孔丘의 제자라고 대답하자 노인은 공자를 신랄하게 욕합니다. 그자는 많이 아는 체하고, 성인을 자처하고, 백성들을 속이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이 노래하며, 천하에 명성을 팔고 다니는 자가 아닌가! 자네도 그런 생각을 버리고 심신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있겠네. 제 몸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느 여가에 천하를 다스린단 말인가? 내가 하는 일을 어리석다 하지 말고 그만 가보시게.[329, 330]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기계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계는 그 속성인 기사機事와 기심機心으로 인하여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기계의 발명과 산업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노동 문제, 노동자 문제, 노동 계급 문제 등은 장자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나아가 공황이나 실업 문제에 대해서도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짚어보지요. 장자의 논거는 오늘날의 논의와는 그 장을 달리 합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고,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경멸적 문화가 자리 잡는 그러한 일련의 반 노동 과정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지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331]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322]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효율성 논의에 그치지 않고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가 우려했던 당시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333]


(목수) 윤편이 말했다.

“신은 신의 일(목수 일)로 미루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축 즉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중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337]

☞ 책의 한계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가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되어 있다는 비판은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343]


< 나비 꿈 >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


장자를 夢蝶主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나비 꿈’ 때문입니다. 장자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핵심적인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비 꿈’은 인생의 허무함이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일장춘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實在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長空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345]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interpenetrate)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347]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자에 관한 『사기』의 기록은 단 24자입니다. “묵적은 송宋나라 대부로서 성城을 방위防衛하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절용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동시대 또는 후세의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현재의 통설은 묵자는 은殷나라 유민遺民들의 나라인 송 출신으로 주周 시대의 계급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반대하고 우禹 시대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 동안 검은 옷을 입고 반전反戰,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367, 368]


공자는 서주西周 이래의 예악禮樂에 나타난 귀족 중심의 통치 질서를 새로운 지식인(君子)의 자기 수양과 덕치德治의 이념을 통하여 회복(維新)하려고 노력했지요. 이네 반하여 묵자는 종래 귀족 지배 계층의 행동 규범인 예악을 철저히 무정하고 유가의 덕치 이념 대신에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인민의 협동적 연대(兼相愛)와 경제적 상호 이익(交相利)을 통하여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려고 했습니다. 유가와는 달리 숙명론을 배격하고 인간의 실천 의지, 즉 힘(力)을 강조합니다. 실천 의지를 추동推動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鬼와 신神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리고 천자의 절대적 통치권을 주장합니다. 만민 평등의 공리주의公利主義와 현자 독재론賢者獨裁論을 표방합니다. 묵가 학설의 이러한 개혁성과 민중성은 유가 사상과 대항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러한 과도기가 끝나고 중국 사회가 토지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 계층의 엄격한 가부장적 신분 사회로 정착되면서 묵가학파는 사라지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고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묵가 학설은 결국 그 학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의 와해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지요.[372, 373]


天下之亂物 皆起不相愛   - 兼愛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374]


그렇다면 겸상애와 교리지법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묵자가 말하기를, 그것은 다른 나라를 자기 나라 보듯이 하고, 다른 가家 보기를 자기 가 보듯이 하고, 다른 사람 보기를 자기 보듯이 해야 한다.[375]


만약 천하로 하여금 서로 겸애하게 하여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한다면’ 어지 불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 겸애

그러므로 천하가 서로 겸애하면 평화롭고 서로 증오하면 혼란해진다. 묵자께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까닭이 이와 같다. - 겸애[376]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379]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禮論, 제도론制度論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제거를 실천적 과제로 삼았던 순자가 그의 주장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천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성선설의 관념성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성악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른다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 性惡 [413]


예禮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멋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불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 禮論[418]


10장 법가와 천하 통일


유가나 묵가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법관이 형벌을 집행하면 음악을 멈추고, 사형 집행 보고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선왕의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수는 없다.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임금이 자기의 인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정치를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내海內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의 인仁을 따르고 그 의義를 칭송했지만 제자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겨우 70명에 불과했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장악해야 하는 것이지 인의를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의를 행해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공자같이 되기를 바라고 백성들이 그 제자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차가지이다.[434]


한비자(BC. 280-233)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법가 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먼저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을 듭니다..... 이러한 중앙 집권적 체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단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끌어낸 나라가 바로 진秦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추진한 사람은 재상인 상앙商?이었습니다.[437, 439]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된다.   - 有度


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먹줄이 굽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이 시행됨에 있어서 지자智者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자勇者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함에 있어서 대신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을 상줌에 있어서 필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잡고, 아랫사람의 속임수를 꾸짖으며, 혼란을 안정시키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공평하게 하여 백성들이 따라야할 표준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 관리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위압하며, 음탕하고 위험한 짓을 물리치고 속임과 거짓을 방지하는 데는 형보다 나은 것이 없다. 형벌이 엄중하면 귀족이 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하며, 법이 자세하면 임금은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다. 임금이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으면 임금의 권력이 강화되고 그 핵심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 임금들이 이를 귀중하게 여기고 전한 것이다. 임금이 법을 버리고 사사롭게 처리하면 상하의 분별이 없어진다.   - 有度 [441]


법가의 ‘법’法은 오늘의 법학法學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통치론, 지도자론, 조직론 등 오늘날 정치학 분야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훨씬 광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새로운 정치 상황에 대한 새로운 대응 과정에서 형성된 학파였습니다. 천하 쟁패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살벌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래의 낡은 방식과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도 광범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445]


춘추전국시대가 법가에 의해 통일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 국가라는 권력 형태는 진秦을 거쳐 한漢으로 이어지고 다시 역대 왕조를 거쳐 20세기 초 신해혁명 때까지 이어짐으로써 2천 년 이상 지속되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448]


11장 강의를 마치며


고전 강독을 끝내자니 미진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계론關係論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緣起論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중략)

불교에 관한 논의 이외에도 또 한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관한 것입니다. 송대의 신유학은 1천여 년에 걸쳐서 동양적 정서와 사유 구조를 지배한 소위 주자학朱子學입니다. 더구나 이 송대 신유학의 성립은 그 자체가 당면한 사회문제에 대한 절박한 논구論究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72]


3. 내가 저자라면

책을 읽으며 구체적인 내용을 소화하기에 급급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다만, 저자가 친절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을 하기 때문에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동양고전은 그다지 많이 읽히는 책이 아니다.  내용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고전을 현대에 맞게 재조명해서 해석한 내용이 독자에게 뜻 깊게 읽혀질 수 있어야 하는 데 이 부분이 쉽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다르다. 현대적 관점에서의 해석 면에서 다른 어떤 책보다 훌륭하다는 느낌이 든다.(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책에는 유달리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그리고 '기억 속에 심어두고 싶은 글귀'들이 많다. 책의 내용이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시경, 주역 등 유명 고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절묘한 해석과 질곡을 거쳐온 저자의 삶의 철학이 그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주역에서 '위'와 '응'을 설명하면서 이런 해설을 달았다.

"사람이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101]

☞ 이에 대한 나의 해설은 이렇다. "책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능력 범위의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너무 큰 목표를 잡으면 결국 거짓과 위선으로 채워진 책을 쓰게 되거나 책을 쓰지 못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저자의 겸손함과 치밀함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흔쾌히 하면서도 이렇게 겸손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존대말을 쓰는 문체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어떤 의견이든지 홀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 하지만 반대 논리도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설사 많은 사람들이 정론으로 받아들이는 의견이 있고,  그와 다른 소수 의견이 있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양쪽을 모두 설명한다.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고, 이렇게 설명의 객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오히려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자는 이 책의 기본 골격은 물론 앞의 몇장 몇절에서 어떤 설명을 했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뒷편에서 그 이야기가 나올 때는 앞절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언급하며 독자의 기억을 환기시켜준다. 이것은 저자의 치밀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이런 내용은 저자는 물론 이 책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읽었는데도 제대로 파악을 못한 부분이 많다는 느낌이다. 한 번 읽어서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책이 아닌 것 같다. 시간을 갖고 자세히 읽어봐야 할 책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21]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 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自己增殖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23, 24]


궁극적으로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우리가 고전 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29]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32]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서양 문명이 갖는 모순구조)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요중용이 그것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순과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人文世界의 창조에 있습니다.[44]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詩三百篇 一言以蔽之思無邪).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58]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70]


마지막으로 노인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을 반성하는 교훈으로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석지인 무문지’昔之人無聞知에서 노인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태였음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IMF 사태 이후 구조 조정 과정에서 퇴직 연령이 낮아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노인들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早老化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75, 76]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77]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90]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101]


☞ 책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능력 범위의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너무 큰 목표를 잡으면 결국 거짓과 위선으로 채워진 책을 쓰게 되거나 책을 쓰지 못하게 되거나 하게 됩니다.


태괘는 선길후흉先吉後凶임에 비하여 비괘는 선흉후길先凶後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양적 사고에서는 선흉후길이 선호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괘가 흉하고 비괘가 길하다는 도치의 독법도 가능한 것이지요. 『주역』은 이처럼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대성괘 역시 다른 대성괘와의 관계에 의하여 재해석되는 중첩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120]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130]


이 강의 서론 부분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21세기의 구성 원리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문명을 가장 앞서서 실험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자부심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대륙적 소화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해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佛學이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이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지요.[163]


子曰 德不孤 必有隣    - 里仁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爲政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 옹야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중략) 반구제기反求諸己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自己反省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自慰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232. 233]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 盡心 上


맹자의 사회주의와 민본주의民本主義는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맹자는 그 사상이 우원迂遠하기 때문에 당시의 패자들에게 수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맹자의 민본사상은 패권을 추구하는 당시의 군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249]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 제1장


이 구절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다시 한 번 노자의 기본 사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위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입니다. 무위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제1장 유와 무의 통일적 인식에서 이미 표명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273]


노자는 이 장(2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춘추전국시대를 지배하는 협소한 인식을 반성하고 조급한 실천을 지양하자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悠長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277]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CF 광고나 쇼윈도 앞에서도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구매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중략)

도무지 무욕無欲할 수도 없고 무지無知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280]


『노자』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無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無不治)입니다. 혼란(不治)이 없는(無)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隱遁돠 피세避世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改世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283]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근본적인 것입니다. 功을 세우고 일을 성취했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功成而弗居: 제2장)은 물론이며 그 공로를 이야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功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遂身退 天地道: 제9장)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백성개위아자연’百姓皆謂我自然, 즉 모든 성취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게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96]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311]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상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319]


장자를 夢蝶主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나비 꿈’ 때문입니다. 장자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핵심적인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비 꿈’은 인생의 허무함이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일장춘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實在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長空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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