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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3일 23시 1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1971~ )

그가 니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확실한 것 하나는 결코 지금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그만큼 니체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의 삶에 들어와 그를 온통 흔들어 놓았다. 그가 니체와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그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맑스를 그 근본에서 새롭게 살펴보자는 흐름에 나도 끼여들고 싶었던 때였다. 때마침 대학원 동기들 사이에 맑스 원전을 읽는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경제학 철학 초고』를 읽은 직후였을 것이다. 누군가 머리 좀 식히자며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소개했다. 하나의 휴식으로서. 그렇다. 니체는 내게 하나의 휴식으로 찾아왔다. 강력한 감전. 원인은 모른다. 다만 맑스 원전을 통해 좀더 깊어지고 있다던 내 믿음은 그때 박살이 났다. 나는 깊이 내려가고 있었던 게 아니라 더 무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게와 깊이의 혼동! 표정만 심각했지 난 결코 급진적이지 않았다. 급진적인 것은 오히려 니체의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가벼웠으나 단단했다. 말들이 부딪히면 깨지는 건 내 쪽이었다. 하지만 말들의 패배는 내게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과 니체’ 중에서

그가 니체라는 이름의 휴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전형적이고 나름의 깊이를 가진 맑스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현실에서 자신의 주장을 마음대로 펼치며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그는 니체라는 급진주의자를 통해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삶의 속도와 깊이를 조절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항상 생각하라(그리고 변화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것! 눈을 감은 채, 잠든 채, 멍한 채, 어렴풋한 정신만으로 세상을 살지 않고 눈을 뜬 채, 깨어있는 상태로, 맑은 정신을 지니고서 세상을 맞으라는 것이다. 생각하는 삶이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것, 너무나 쉬운 사실 아닌가! 우리는 그 쉬운 사실조차 자주 까먹고 살아가는 건망증 환자들이다. 아니, 우리가 건망증이 있는 지 없는 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치매 환자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추장으로 있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는 최근 한 출판사와 손잡고 ‘부커진R’이라는 책과 잡지의 형식을 합쳐 놓은 ‘북잡지’를 발간하였다. 책(Book)과 잡지(Megazine)의 합성어가 바로 ‘부커진’이다. R은 혁명을 의미하는 Revolution의 대표글자인 R을 의미한다고 한다. 왜 R을 넣어야만 했을까? 저자 고병권은 창간사에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몇 번을 곱씹어도 좋을 좋은 말이라 생각한다.

“모든 혁명은 첫 글자 ‘R’만을 필요로 한다. 혁명이란 완성할 수 없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매번 새로 쓰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기에 그렇다. 우리는 과거 혁명이 제 자신의 철자를 계속 이어가려 할 때마다 단호하게 미래 혁명의 첫 글자 ‘R’을 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R’을 쓴다. 너무나 오랫동안 발전해온 ‘발전’과 결별하기 위해, 너무나 선진화된 ‘선진’과 결별하기 위해 ‘R’이라고 쓴다. 우리에게는 발전론 자체가 낡은 과거다. 아니 반대로 말해도 좋다. 발전론과 결별한 우리에게는 어떤 과거도 충분히 미래적이다.”

■ 저자 약력

1971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서유럽에서 근대 화폐구성체의 형성』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논문으로는「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등이 있다.

저서로는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등이 있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등을 옮겼다. 코뮨주의,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지속적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현재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추장(대표)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부커진R의 편집인이기도 하다.

■ 니체 약력 및 소개

프리드리히 니체(1844.10.15 ~ 1990.8.25)
1844년 : 10월 15일. 독일의 작센 주 뤼첸 근교 레켄 마을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남
1849년 : 부친 뇌연화증으로 사망
1858년 : 나움부르크 근교의 슐포르터 고등학교 재학
1861년 : <트리스탄>의 피아노 발췌곡이 발표되어 바그너를 알게 된 이 무렵부터 세익스피어, 괴테, 휠덜린 등을 애독
1864년 : 슐포르터 졸업. 10월 본대학에 입학.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
1865년 : 10월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김. 쇼펜하우워 철학을 알게 되어 탐독
1867년 : 나움부르크 야전포병대 기병대대에 입대
1868년 : 10월 제대. 대학에 복학. 11월 8일 라이프찌히에서 처음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됨
1869년 :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원외교수로 강의
1870년 : 바젤 대학의 정교수가 됨
1872년 : <비극의 탄생> 출판
1873년 : 두통으로 시달림. <반시대적 고찰> 제 1편 (신앙 고백자로서의 저술가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 라우스) 출판. 단편 <그리스인의 비극 시대의 철학>이 쓰여지다.
1874년 : <반시대적 고찰> 제 2편 (생에 대한 역사의 이해)와 제3편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워) 출판 1876년 : <반시대적 고찰> 제 4편(바이로이트에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 출판. 병이 악화 되어 10월 대학을 휴직
1878년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출판
1879년 : 중병. 바젤대학 교직 사임
1880년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 2부 하권에 해당하는 <방랑자와 그 그림자> 출판
1888년 : 게오르그 브란데스가 코펜대학에서 니체에 대해 강의 <바그너의 경우>출판, <디오니소스 찬가>완성, <우상의 황혼>집필, <반기독교인>완성. 연말부터 정신착락의 증후가 나타남
1889년 : 1월. 예나 대학병원 정신과에 입원 1897년 : 어머니 사망. 누이동생과 함께 바이마르로 이주 1900년 :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56세로 사망. 고향인 뢰켄에 안장됨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찌히 근처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니체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후 그의 가족은 나움부르크의 할머니 집으로 이사했다. 음악과 시를 좋아했고 이미 14세 때에 「나의 인생에서」라는 자전적 소품을 썼을 만큼 조숙했던 니체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벌써 권위주의적인 모든 것에 저항적 태도를 보였고, 학교 수업 과정을 우습게 보고 그리스 철학 서적을 주로 탐독했다. 20세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 문헌학을 전공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공부보다는 술과 여자 등 쾌락을 좇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활에 혐오감을 느끼고 다시금 엄숙하고 고독한 생활로 돌아갔다. 본 대학 문헌학 교수였던 유명한 처칠 교수가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가자 니체 역시 친구 로데오와 함께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갔다.

이 라이프찌히 대학 시절에 그는 헌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사 읽고서 충격적인 감동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그가 평소 그 음악을 좋아해 왔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후기 낭만주의의 두 대표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와의 만남은 청년 니체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1879년 그는 25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 문헌학 조교수로 임명되었고, 이 바젤 대학 재임 시에 그는 바그너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가 그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1879년 그의 나이 35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그는 10년간 강의해 왔던 바젤 대학 교수직을 사임했고, 그 이후 그가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약 10년간을 이탈리아 해안가나 스위스 산중의 요양지를 전전하면서 병과 고독과 싸우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중에서 8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루 살로메와 사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5개월 만에 헤어졌다.

병과 고독과 싸우는 이런 생활 중에서도, 점점 더 원숙해져 가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는 그치지 않았고, 그리하여 진행성 뇌성마비의 발병에 의해 정신 착란에 빠질 때까지의 그 짧은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무르익은 사상들을 수많은 저술들을 통해 쉴 새 없이 토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1889년 1월 튀린에서 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11년 후인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 정신 병원에서 결국 그는 가장 사랑했고 가장 친했던 누이 엘리자베스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책 머리에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4p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4p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 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 되었는가를 이해하는가?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5p

그가 ‘미쳤던’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보편적 신념이나 시대 정신의 구속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5p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7p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7p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7p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8p

대지가 제 위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들에게 존재 이상의 보답을 기대하지 않듯이 동료들도 이 책에 별도의 보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입 속에만 맴돌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으니 받아주길 바란다.  9p

모든 책들은 동료를 구하는 몸짓이다. 9p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20p

철학자가 철학의 가치를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한 철학자는 신의 가치를 묻는 신앙인보다도 훨씬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그는 기도와 신앙이라는 방패도 없이 제 자신의 질문과 대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26p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 엘도라도의 실존을 확신하고 황금을 찾아 남미의 정글로 떠나는 모험가들처럼, 전체를 설명해 주는 질서를 알아내고 싶어하는 철학자들도 ‘하나의 질서,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27p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  27p

니체는 철학자로 살기보다는 철학을 진단하는 의사로 살고 싶어한다.  28p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자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28p

<에리카>의 저자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31p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벌어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30p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1p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37p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49p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52p

아픈 광인은 병원에 갇힌 환자지만 건강한 광인은 자유 정신을 지닌 전사로 등장한다. 52p

‘왕후장상이 어디 씨가 따로 있는가?’라고 외쳤던 만적의 외침을 두고 1198년의 고려인들은 ‘미친놈!’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왕후장상과 천한 노예가 어떻게 동등한 출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적이 ‘미친놈’이었던 것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그의 시간은 자유와 평등을 내세웠던 1789년 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53p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56p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철학의 사랑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56p

그리스도가 전하려 했던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59p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작업을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자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이다.  65p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65p

‘좋음’이란 규정에는 귀족적 인간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가 들어 있다. 이들은 ‘좋음’을 우월한 자, 명령하는 자, 지배하는 자인 자신들에게 부여했다. 76p

약자들은 “적의 상태를 살핌으로써 인위적으로 자신들의 행복을 꾸미거나, 혹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기만할 필요”가 있었다.  79p

‘원죄’는 채무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원죄의 채무를 지게 되면 그 누구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가 되고 만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물인 인간은 제 자신을 한탄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  83p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3p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  85p

가장 결정적인 수단 삶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성직자들이 마법사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자를 죄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든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함으로써 환자들이 고통에 더 이상 항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오히려 죄수가 된 환자들은 고통을 갈구한다.  86p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다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3p

니체는 객관성을 믿지 않고 있다. 104p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107p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109p

지난 시대 많은 사상가와 운동가들이 사회주의의 실패에 그토록 예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체제’ 자체를 문제 삼는 거대한 비판과 새로운 체제에 대한 소중한 꿈이 깨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에 대한 실험의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121p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123p

니체적으로 보자면 순응주의 사회, 즉 사람들이 한 무리의 가축떼로 전락한 사회는 오래 지속되어온 서구의 형이상학과 기독교 그리고 그것이 습속화된 삶이 도달한 곳이다. 근대성이란 허무주의 운동의 귀결점이다.  124p

근대란 ‘정치의 쇠퇴 형식’, 혹은 ‘정치의 소멸’이다.  124p

시장이나 국가, 사회의 보존 수단 정도로 전락한 정치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정치를 상실한 정치’, 혹은 ‘과소 상태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근대의 정치를 ‘작은 정치’라고 불렀다.  125p

“이제 작은 정치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 더불어 지상의 지배를 위한 투쟁이 막을 열 것이고, 필연적으로 우대한 정치가 도래할 것이다.”  125p

니체의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 2가지

첫째는 정치의 형이상학화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125p

공동의 가치, 공동의 선을 찾아 나서는 근대 정치는 형이상학적은 물음의 방식, 즉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무엇’(what)에 해당하는 것이 보편적 가치들이다. 126p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127p

둘째는 허무주의적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7p

“너희는 전쟁에서 지쳤고 이제 너희의 피곤함이 이 새로운 거짓 신에게 봉사한다. ……너희가 국가, 그 새로운 거짓 신을 숭배할 때 국가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하리라. 그렇게 해서 국가는 두 눈의 심안을 매수하는 것이다. ……선한 자나 약한 자나 모두가 음독자가 되는 곳,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131p

 “국가가 끝나는 곳, 거기서 비로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의 노래, 유일한 그리고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가락이 시작된다.”  132p

“혁명이 성공하면 아름다운 인간성의 자랑스런 신전이 솟을 것”이라는 ‘위험스런 꿈’은 적대적 변증법을 통해 유토피아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136p

 사회주의를 “전제주의의 공상적 동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전례는 없을 정도의 예속을 필요로 한다.” 137p

‘체제(체제)’라는 말은 한자풀이 그대로 ‘신체를 통제한다’라는 뜻이다. 139p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어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인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2p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152p

‘무’에서 시작한 기독교의 창조론이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유’에서 시작한 원자론은 세계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154p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159p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159p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이다. 161p

니체가 말하는 ‘의지’는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힘 안에 내재하는 그야말로 ‘어떤 것’이다.  165p

권력의지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171p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3p

“장례식의 비가(悲歌)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186p

“모든 별들에 있어서도 그 존재했던 시기를 측정해 보면 생명이란 한 순간에 확 타오르고 만 존재였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이라는 것이 별들의 존재 목적이나 궁극적 의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211p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과 같다. 더 이상 이 세계를 검열하는 심판이 사라졌으며, 저 세계에서 죄를 묻는 일은 없다는 것. 천국이란 믿음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222p

과학자는 확실성이 결여된 모든 비합리적 지식을 미신으로서 경계한다. 하지만 미신에 대한 경계에는 커다란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과학자는 과학이 공포에 자라난 덕이며 안전함을 찾는 과정에서 생겨난 세련된 종교라는 사실을 자인한다.  227p

어린 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해서 부른다.  232p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233p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는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251p

확실히 유목민의 기질이 니체를 이끌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252p

여행과 탐사는 그치지 않는다. 가면 놀이는 멈출 줄 모르고, 변신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252p

어제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더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253p

모호함과 신비함을 통해 힘을 발휘했던 보편적 종교의 주술적 힘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제는 구체적인 계산을 통해서 측정 가능한 힘들만이 적합한 형태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베버는 ‘합리화’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탈주술화’와 ‘계산가능성의 증대’를 의미했다.  259p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260p

캘비니즘의 예정설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263p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다.  263p

시간표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주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꿈꾸던 철저한 자기관리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시간표였던 것이다. 가정은 물론이고 학교와 공장에서 시간표는 아이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자신들의 이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  266p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268p

베버는 신체를 계획된 것,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의 발생지를 수도원과 군대로 본다.  270p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했다. “훈육은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정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270p

과학적 경영이라고 불리는 것이 수도원과 군대의 합리적 훈육이 발전된 형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271p

베버는 계급이나 분파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의회나 관료제적인 당 관료들을 넘어서기 위해서 국민투표제를 통해 강력한 힘을 획득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81p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출현하려면 잘 훈육된 수동적 대중들이 필요하고, 그러한 지도자가 정치를 하기 시작하면 대중들은 더욱 정신을 상실해 간다. 관료제로 대표되는 시스템이 만들어 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만 것이다.  281p

근대가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를 ‘영혼의 상실’로 보고 있다는 베버는 그 해결책을 영혼의 회복에 두는 것 같다.  282p

합리성이란 프로테스탄트로 대표되는 근대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가치들을 위해 제 안에 있는 욕망과 능력을 효과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이었다.  287p

답은 대개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은 질문들과 동떨어진 채 답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그 답의 형식과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294p

왈쩌

“대규모 사회 내에서의 경제적, 종교적, 인종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투쟁 역시 계급이나 신념공동체, 혹은 인종을 철폐한다고 해서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 이상이 종종 종교와 인종에까지 일반화되고 있다. 사실 맑스주의 이상은 경제에서조차 올바른 것이 아니다. 평범한 노동자들에게는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신념보다는 노동 계급의 임금, 노동조건, 정치적 영향력, 사회적 지위를 집단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315p

상식과 보편성을 발견하기보다 차이와 특이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결코 정치에 생소한 것이 아니다. 낯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 정치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320p


3. 내가 저자라면

과거 대학시절 잠시 철학의 주변을 기웃거린 적이 있다. 물론 얄팍한 수준이었지만, 철학이라는 학문은 매력적인 분야였다. 물론 내 자신의 낮은 지적 수준을 발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헤겔을 만나면서 두통이 생겼고, 포이에르바하의 면전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맑스와 친해지려 했지만, 그는 쉽게 거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다가설수록 멀어짐을 느꼈다. 니체라는 인물은 뛰어난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니체라는 이름은 낯설다. 낯설음의 크기만큼 니체라는 인물은 새침을 떤다. 다가가기 쉽지 않다. 솔직히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을 통해 그를 이해하려 하였으나, 그것마저 쉽지 않다. 니체에 대한 고병권의 친절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니체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른 저작들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수유연구소 + 연구공간 ‘너머’>의 동료인 ‘이진경’씨의 <철학과 굴뚝 청소부>라는 철학입문서의 도움을 받았다. 이진경의 니체 해석을 잠깐 빌려보자.

“니체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움인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는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고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진리라는 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대체 어떤 것인가? 진리를 점령하고 있는 의지는 어떤 것인가? 진리라는 것 속에는 어떤 것인가? 진리라는 것 속에는 어떤 것이 표현되거나 숨어있는가?”를 묻고 있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237p

니체는 진리를 찾기 보다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를 밝히려고 했다. 여기서 ‘의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념, 바람과는 상관이 없다. 단어의 의미 속에서 감춰져 있는 지배적인 힘과 피지배적인 힘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관관계의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작업이 바로 ‘계보학’이다. 진리(眞理)는 ‘틀림이 없는 옳음’이다. 즉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다. 여기서 계보학은 우리들은 왜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래서 니체는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고 말한다. 즉 이 세상에 자명하고 확실한 것; 진리(眞理)는 존재하지 않음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니체는 “진리란 반박되지 않는 그러한 종류의 오류”라고 말한다. 절대진리는 없으며, 오직 ‘진리의지’만이 있다는 말이다. 이 진리의지가 가공할 만한 결과들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 진리의지를 사수하기 위해 다른 거짓들과 결연히 투쟁할 것을 선전포고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안내한다.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니체와 저자는 근대철학 전반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바라보고 있다. 동일성의 철학은 자신이 옭고, 자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배타적인 사상들을 인정할 수 없다. 이는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정치의 형이상학화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25p

저자의 책 제목 숫자 ‘천’(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다양성’과 ‘차이’를 의미한다. 전체성이 아닌 다양성을,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와 저자는 절대진리를 쫒는 모든 사상적 무리(?)들을 혐오한다. 그리고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이러한 의미에서 대부분의 서양근대 철학은 예외가 될 수 없다. 니체는 수많은 근대철학에 대해 요란하게 대포를 쏘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니체를 통한 고병권의 독백이다. 저자는 니체를 평가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철저하게 니체 식으로 사고하고, 니체 식으로 말하고 있다. 사실 니체의 눈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고병권이 어느덧 니체가 되어버렸음을 느낄 수 있다.

1부는 니체를, 2부에서는 베버와 다양한 정치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1부는 니체와 철학의 관계, 계보학,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니체의 근대정치 비판,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에 대한 개념을 을 다루고 있다. 특히 5~6장은 니체 철학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2부에서는 베버로부터 시작하여 푸코까지 이르는 수많은 철학적 파편들을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미완성의 혁명 69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각 장들은 유기적 연관성이 있다기 보다는 독립적인 니체의 영토를 탐험하고 있다.

과거에 절대 진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믿었다. 나침반을 챙겨서 진리가 있는 보물섬을 찾아 헤맸던 기억이 있다. 길 위에서 만난 사상가들이 처음에는 진리의 비책을 전수해 줄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니체는 누구도 절대진리의 비책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니체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근대철학을 훌쩍 넘어선 사람이다. <철학과 굴뚝 청소부>의 저자 이진경씨는 근대철학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으로 ‘니체, 맑스, 프로이드’를 꼽고 있다. 그들을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넘어선 사상가들로 평가하고 있다. 니체는 ‘진리의지’로, 맑스는 ‘실천’으로, 프로이드는 ‘무의식’으로 서양의 근대철학 전반을 해체하고 있다.

그런데 문득 니체를 읽으면서,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향기를 강하게 느꼈다. 조셉 캠벨은 각 민족의 신화(神話)를 독해하면서,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제시한 학자이다. 니체가 ‘진리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절대진리의 성벽을 허물었듯이, 캠벨 또한 신화를 통해 절대 진리의 성벽을 넘어서고 있다.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 <신화의 힘> 18p

니체는 중세 기독교적 전통과 이론을 분석 하면서, 유일신 종교 전체를 부정하고 있다. 유일신 종교가 이야기하는 절대적 진리와 천국의 개념을 해체하고 있다. 조셉 캠벨은 신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절대진리를 해체하고 있다. 캠벨은 기독교를 하나의 ‘신화’(神話)일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두 사람은 ‘천국’의 개념을 ‘저기 어느 곳’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곳이 천국이라 말하고 있다.

“천국이란 믿음의 문제이기는 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222p

“영원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없는 데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입니다.”<신화의 힘> 404p

조셉 캠벨은 니체와 같이 철학사의 전통으로 분류되고 있지 않고 있다.  다만 맑스, 프로이드, 니체와 같은 철학자가 근대철학의 한계를 자신들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훌쩍 뛰어 넘었듯이, 조셉 캠벨 또한 신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근대 철학 허물기에 일조하고 있다. 조셉 캠벨을 새롭게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글이 너무 확장된 감이 없진 않지만, 존재론에 근간하고 있는 서양 철학이 인류의 새로운 길을 열기에는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환자 스스로가 자신의 병을 치유할 수 없듯이, 새로운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동양철학에서는 니체가 설파했던 ‘차이’와 ‘다양성’에 주목해 왔다. 동양철학은 서양의 이분법적 관점이 필연적으로 모순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주목은 ‘관계’에 대한 재인식이다. 그리고 실천이다.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사상을 서구철학이 아닌 동양철학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예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흐른 듯 하다. 고병권의 영토는 니체의 영토와 다르지 않으면서도, 다르다. 고병권은 최대한 독자들이 니체의 영토를 찾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너무나 많은 인용과 어려운 개념들이 등장해 독자들이 니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자는 너무나 많은 니체와의 산책 속에서, 이미 니체적 글쓰기에 동화 되어버린 듯하다. 아니 그는 이미 니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다만 저자에게 작은 바램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천 개의 길로 세상을 걸어갈 수 있도록 친절한 길라잡이가 되어 주기를 희망한다. 니체는 분명 세상을 자기답게 걸어 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훌륭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시적인 경구도 좋고, 신비스런 영감도 좋다. 다만 더욱 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영토에서 덩실덩실 춤출 수 있는 그 날이 올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니체를 읽으면서 얼굴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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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11.23 23:21:18 *.123.249.252
이 리뷰의 저자 소개는 양재우 연구원의 글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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