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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30일 14시 02분 등록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오인석 옮김

● 저자에 대하여

1887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베네딕트는 두 살 때 열병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홀로 된 어머니는 베네딕트와 동생을 돌볼 수 있는 시골의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시골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란 베네딕트는 열병을 앓아 한쪽 귀의 청력을 잃어버렸다. 거기에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딸을 정신적으로 괴롭혔다. 그 영향으로 베네딕트는 심한 조울증을 앓았다. 조울증은 긴 시간동안 그녀를 따라다녔다.
1905년 베네딕트는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인 배서 대학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교사로 일하면서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인생에 두려움을 느끼는가?” 하는 의문에 매달렸고 삶은 어두웠다. 1913년 스탠리 베네딕트라는 젊은 생화학자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삶의 변화가 있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 번민의 삶이 이어진다. 조울증이 다시 심해진 것도 이 시기였다. 그 시절 베네딕트는 이렇게 썼다. “열정적인 이상과 일치하는 생활방식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1919년 그녀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뉴욕의 ‘사회연구를 위한 뉴스쿨’에 등록한 베네딕트는 거기서 인류학과 만나게 된다. 인류학을 통해 삶의 전망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2년 뒤 서른네 살의 베네딕트는 컬럼비아대학 인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서 그녀느 프란츠 보아즈 교수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인류학 연구에 몰두한다. 1923년 베네딕트는 아메리카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에 관한 연구인 ‘북아메리카 수호 신령의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모교인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던 베네딕트는 인류학 전공의 학부생이었던 마거릿 미드를 만난다. 미드와의 동성애 체험을 스스로 온전히 받아 들이까지는 1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 베네딕트는 1934년 출세작인 ‘문화와 패턴’을 썼다. 그 책에서 그녀는 문화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했다. 그 분석으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 혼란이 자기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혼란을 야기하는 문화 자체의 문제임을 암시했다.

1943년에 미국 전시정보국 해외정보부에 부임하게 된 베니딕트는 1944년 미 국무부로부터 일본에 대한 연구를 의뢰받아 1946년에 ‘국화와 칼’을 출간했다. 단 한 차례의 일본 방문 없이 이루어진 이 연구는 학문적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거나 체험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엄밀한 검토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일본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세계적으로 상당한 기여를 했다. 저서로는 ‘문화의 유형 Pattern of Culture(1934)’과 ‘종족 Race: Science and Politics(1940)’ 등이 있다. 1948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일본인은 미국이 여지껏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중에서 가장 낯선 적이었다. 일찍이 대국을 적으로 하는 전쟁에서 이처럼 현격히 이질적인 행동과 사상의 습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 앞서 1905년에 일본과 싸운 제정 러시아처럼 미국도, 서양의 문화 전통에 속하지 않는 완전히 무장되고 훈련된 국민과 싸웠다. [7]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는 날줄과 씨줄로 되어있다. 그러한 모순은 모두가 진실인 것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인 것이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공격적이자 비공격적이며, 군국주의적이고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리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맞이한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르게 될 때는 범죄의 유혹에 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 이다.  [8]

20세기의 핸디캡 가운데 하나는,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을 미국인의, 프랑스를 프랑스 인의, 러시아를 러시아 인의 나라답게 하는 것에 관해서 우리가 여전히 가장 막연하고도 편견에 가득 찬 관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식이 결핍으로 세계 각국은 서로 오해하고 있다. 때문에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닮은 두 개 국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난 경우라도 우리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는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18]

이 책은 일본에 있어서 예기되고 당연한 것으로 보여지는 습관에 관해 기술한 것이다. 일본인은 어떤 경우에 예의를 지키며 또 지키지 않는가,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 수치를 느끼며, 당혹감을 느끼며,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가 등등에 관해 기술한 책이다. 이 책 속에 기술된 일의 이상적 전거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이름난 시정인(市政人)일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이 각각 특수한 경우에 행한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그러한 조건 아래서는 그러한 행위가 행해진다고 인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구의 목표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태도를 기술하는 데에 있다. 가령 이 책이 거기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하튼 그렇게 하는 것이 이상(理想)이다.  [20]

일본은 게다가 전쟁 승리의 가능성을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근저 위에 놓고 있었다. 일본은 정신력으로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 물론 미국은 대국이며 군비가 우수하다. 그렇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러한 것은 모두 처음부터 예상된 것이며 우리는 처음부터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 무렵 일본인들은 일본의 유력한 일간지 마이니치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다. “만일 우리가 숫자를 두려워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의 풍부한 자원은 결코 이번 전쟁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26]

서양의 군인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중과부적이란 점을 알면 항복을 한다. 그들은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가지들을 명예있는 군인이라 생각하며, 그 명단은 그들이 살았음을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 본국으로 통지된다.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국민으로서도 또 그들 자신이 가정에 있어서도 모욕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경우 일본인은 사태를 전혀 다른 식으로 규정한다. 일본인에게 있어 명예란, 즉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절망적 상황에 몰렸을 때에는 일본군은 최후의 수류탄 하나로 자살하든가 무기 없이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집단적 자살을 하든가 그 둘 중의 하나이지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만일 부상했든가 기절하여 포로가 된 경우조차도 그는 “일본에 돌아가면 얼굴을 들고 걸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는 명예를 잃었다. 그 이전의 생활에서 본다면 그는 ‘죽은 자’였다.  [40]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먼저,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가 어떠한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질서와 계층 제도에 대한 그들의 신뢰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우리들이 계층 제도를 하나의 가능한 사회 기구로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본인의 계층 제도에 대한 신뢰야말로 인간 상호관계 및 인간과 국가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어서 가족, 국가, 종교생활 및 경제 생활 등과 같은 그들의 국민적 제도를 기술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우리들은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일본인은 국내 문제를 계층 제도의 견지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국제 관계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에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국제적 계층 제도 피라밋의 정점에 점점 도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리하여 그 위치를 이미 서구 여러나르들이 차지해 버린 지금에도, 그들이 여전히 현재의 사태를 감수하고 있는 태도의 밑바닥에는 똑같은 계층 제도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깔려 있다. [44]

일본은 근래 두드러지게 서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귀족주의적인 사회다. 사람들과 인사하고 접촉할 때는 반드시 서로간의 사회적 간격의 성질과 정도를 암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은 남을 향해 ‘이트(eat:먹어라)’ 든가, 싯다운(sit down"앉아라)이라고 말할 때, 상대방이 친한 사람인가 손아랫사람인가 윗사람인가에 따라 각기 다른 말을 쓴다. 같은 유(you:그대)라도 각기 그 경우에 따라 다르게 쓰며, 같은 의미의 동사가 여러 종류의 다른 어간을 갖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인에게도 다른 많은 태평양 여러 민족과 같이 ‘경어’가 있다. 또한 이와 함께 구푸리는 인사와 꿇어 앉는 방식을 행한다. 이러한 동작은 모두 세밀한 규칙과 관례에 의해 지배된다. 누구에게 허리를 굽히는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위에, 구푸림이 어느 정도까지인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바르고 정당한 절일지라도, 절을 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약간 차이가 있는 다른 사람에게는 모욕이 되어 노엽게도 한다. 따라서 절에는 무릎꿇고 앉아서 마룻바닥에 댄 손까지 이마를 나직히 수그리는 것으로 것으로부터 머리와 어깨를 조금 수그리는 간단한 것까지 여러 가지로 나열된다. 사람들은 어떠한 절이 각각의 경우에 합당한가를 어려서부터 배우고, 또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48]

사무라이와 다른 세 계급, 즉 농 공 상인과의 사이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 세 계급은 서민이었지만, 사무라이는 그렇지 않았다. 사무라이가 그들의 특권으로서, 또 그 카스트의 표시로서 허리에 찬 칼은 단순하 장식이 아니었다. 사무라이는 서민에 대해 그것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도쿠가와 시대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그러했다. 이에야스의 법령이, “사무라이에 대해 무례하게 군다든가, 그들의 상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서민은 즉석에서 참해도 좋다.”라고 규정한 것은 실상은 전부터의 습관에다 법적 효력을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62]

아래로는 천민에서, 위로는 천황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형태로 실현된 봉건 시대의 일본 계층 제도가 근대 일본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봉건 제도가 법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은 요컨대 겨우 75년 전일 따름이다. 그 뿌리깊은 국민적 습성이 겨우 인간의 일생에 불과한 75년이라는 짧은 기간내에 소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근대 일본의 정치가들도, 다음 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국가 목적의 근본적 변경에도 불구하고 이 계층 제도의 많은 부분을 보존하기 위해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도 행동의 끝에서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규정되고, 모든 사회적 지위가 정해진 그러한 세계 속에서 생활하도록 조건지워져 있다. 법과 질서가 이러한 세계 속에서 무력에 의해  유지된 200년간, 일본인은 이 면밀히 기획된 계층 제도를 안전과 보증으로 동일시하도록 훈련되었다. 그들은 이미 아는 영역에 머무는 한, 이미 아는 의무를 이행하는 한, 그들의 세계를 신뢰할 수가 있었다. 도적떼들은 제압당했다. 다이묘간이 내전도 방지되었다.  [68]

일본의 근대화 초기의 절규는 손노조이(尊王攘夷), 즉 천황을 복벽(復?)하고 이적(夷狄)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을 외국에서 짓밟히지 않게 하는 것과 함께, 또 천황과 쇼군의 이중통치 속에 있었던 14세기의 황금시대로 복귀하려는 슬로건이었다. 교토에 있는 천황의 궁정은 극단적으로 반동적이었다. 천황 지지자에 있어서 존왕파의 승리란, 외국인을 굴복시켜 추방하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회복하고 개혁파의 정치적 발언권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73]

그러면 이토록 철저하고 평판 나쁜 개혁을 단행한 정부는 대체 누구였는가? 그것은 특수한 일본의 여러 제도가 이미 봉건 시대부터 육성시켜 온 하층 사무라이 계급과 상인 계급과의 특수한 연합이었다. 즉 그들은 다이묘의 어용인(御用人)과 가로(家老)로서 정치적 수완을 닦아, 광산업, 직물업, 판지 제조 등 번의 독점 사업을 경영해 온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들은 사무라이의 신분을 사서 사무라이 계급속에 생산 기술의 지식을 보급한 상인들이었다. 이 사무라이와 상인의 동맹이, 메이지 정부의 정책을 작성하고 그 실행을 계획한, 유능하고도 자신에 가득 찬 위정자들을 급속히 무대 앞으로 내세운 것이다. [75]

이러한 방법에 의해 일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과 그 후 여러 단계의 일반적 순서’를 수정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비재의 생산과 경공업에서 출발하는 대신, 먼저 중요한 중공업에 손을 댔다. 조병창 조선소 제철소 철도 건설 등에 우선권이 주어져서, 급속하게 기술적 능력이 고도의 수준에 달했다. 산업이 전부 민간의 손으로 이양된 것은 아니다. 거대한 군수 산업은 여전히 정부 관료의 지배하에 남겨두어, 정부의 특별회계에서 자금이 공급되었다.  [88]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일본의 도덕 체계는 다른 어느 곳에도 기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나라들에는 그러한 도덕률이 없었다. 그것은 진짜 일본만의 산물인 것이다. 일본의 저술가들은 이 윤리 체계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앞서 먼저 그 도덕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91]

온에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는데 그 용법 전부에 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의 힘으로써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의 윗사람이 아니거나 도는 적어도 그 사람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 행위는 불쾌한 열등감을 그 사람에게 주게 된다. 일본이이 “나는 누구에게서 온을 입었다.”라고 하는 것은 “나는 누구에 대하여 위무의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라서 그들은 채권자나 은혜 입힌 사람을 그들의 온진(恩人)이라고 부른다. [94]

일본의 거리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인 군중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자발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관헌이 아닌 사사로운 사람이 손을 대면 그 행위에 의해 그 사람에게 온을 입히는 짓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메이지 이전의 가장 유명한 법령의 하나에 “싸움이나 말다툼이 났을 때, 필요없는 간섭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있었다. 그런 경우에 분명한 권한이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인간은 무언가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받게 된다. 도움을 베풀면 상대가 크게 은혜를 입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상, 어떻게 해서든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할 법도 한데 반대로 원조를 베풀지 않으려 애써 조심한다.  [98]

일본인은 양에 있어서나 계속 기간에 있어서나 다 같이 무제한 온에 대한 보답과, 받은 분량이 동일하며 특정한 기한에 끝나는 보답을 각기 다른 규칙을 가진 별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채무에 대한 한없는 갚음은 기무(義務)라고 불리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인은 “이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무는 양친에 대한 보은인 고(孝)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忠)라는, 의무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형태를 함께 배합하고 있다. 기무라는 이 두 개의 의무는 강제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다. 일본의 교육은 기무 교육이라 불리는데, 이것은 정말 적절한 명칭이다. 이 말처럼 유감없이 필수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말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우발적 사건들이 어떤 사람의 기무의 세목을 수정하는 수는 있으나 기무는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짊어지워진 것이며 일체의 우발적 사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108]

천황은 일체의 세속적 고려에서 떠난 신성한 수장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일본인의 최고의 덕인 천황에 대한 충절, 즉 주(忠)는 속세와의 접촉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는 하나의 환상적인 선량한 아버지를 무아지경적인 정관(靜觀)으로서 받들어야 한다. [117]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했을때 세계는 이 주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한 사실을 목격하였다. 일본에 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많은 서구인은 일본이 항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여러 섬 곳곳에 산재한 일본인들이 순순히 무기를 버리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지식한 생각이라고 그들은 주자하였다. 일본군의 대부분이 아직 지역적으로 패배를 당하지 않았고, 그들은 그들대로 전쟁 목적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다. 또한 일본 본토의 여러 섬도 최후가지 완강히 항전하는 군인들로 충만되어 있다. 따라서 점령군은 그 전위부대가 소부대로 구성되지 않는 한 함포의 사정권을 넘어서 진격할 경우에는 전부 살육을 당할 위험이 있다. 전쟁 중 일본인은 어떠한 단호한 일이라도 간단히 해치웠지 않았던가. 그들은 호전적인 국민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을 분석하고 있던 미국인은 주를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천황이 입을 열자 전쟁은 끝났던 것이다.  [122]

기리는 두 개의 아주 다른 부류로 나누어진다. 여기에서 ‘세상에 대한 기리’-문자 그대로 기리를 갚는 것-라 부르는 것은 동배에게 온을 갚는 의무요, ‘누구의 명에 의한 기리’라 부르는 것은 대체로 독일인의 명예와 같은 것으로서 자신의 명과 명성이 어떤 오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럭 하는 의무이다. 기무가,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 데 비하야 세상에 대한 기리(義理)는 거칠게 말하면,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기리는 벌률상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하고, 기무는 직계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한다. 법률상의 아버지는 기리의 아버지로 불리고, 법률상의 어머니는 기리의 어머니, 법률상의 형제 자매는 각각 기리의 형제, 기리의 자매라고 불려진다. [126]

그들은 사람이 기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만일 그렇게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 불리고, 세상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의 소문이 무섭기 때문이다. [132]

훌륭한 사람은 모욕에 대해서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도 그것에 보답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이다. 그들은 우리들처럼 이 두 가지를 구별하여 한쪽은 침해 행위, 다른 한쪽은 비침해 행위라고부르지 않는다. 어떤 행위가 침해행위로 인정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기리의 세계 밖에서 행해지는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사람이 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씻는 한, 결코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137]

한 예를 들면, 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해-거기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지만-모든 교실에 걸려 있는 천황의 사진이 타 버렸다는 이유만으로 자살한 교장이 많이 있다. 교사 중에도 또한 이 사진을 구해 내기 위해 불타는 교사로 뛰어들었다가 타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죽음으로써 그들의 이름에 대한 기리와 천황에 대한 주를 얼마나 중요시 하고 있는가를 증명하였던 것이다. 또한 교육 칙어인지 군인 칙유인지를 봉독하다가 중간에 잘못 읽고는, 자살을 함으로써 오명을 씻은 사람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천황의 치세에도 자식의 이름을 우연히 히로히토라고 지었다가(일본에서는 천황의 이름을 결코 입에 올리지 못한다) 그 아이와 더불어 자결한 사람이 있었다. [142]

실제로 일본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맹렬한 노력과 단순한 상태의 무기력 사이를, 기분이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인 것이다. 일본인은 지금에 와서는 패전국으로서의 명예를 옹호하는 데 모든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연합국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에서 “무엇을 해 보더라도 안 될 테니 잠시 제자리걸음으로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다. 무기력은 퍼진다. [159]

일본인의 영원 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는 수단은 그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거나 또 버려두는 도구일 뿐이다. 사태가 변하면 일본인은 태도를 일변하여 새로운 진로를 향하여 걸어갈 수 있다. 일본인은 태도의 변경을 서구인처럼 도덕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60]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가 아니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중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내에 머물게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쾌락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 [165]

로맨틱한 연애 또한 일본인이 함양하는 인정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결혼 형태와 가족에 대한 의무에 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일본인의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일본 소설은 그것을 많이 다루고 있으며, 프랑스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요 인물은 기혼자이다. 정사(情死)는 일본인이 즐겨 읽고, 또 즐겨 화제에 올리는 테마다. [170]

그들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이 두 영역은 모두 다 공공연히 자인하는 것이고, 다른 쪽은 남의 눈을 피하여 몰래 발을 들여 놓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한쪽이 인간의 주요한 의무의 세계에 속하는 데 반하여, 다른 한쪽은 사소한 기분 전환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저마다의 영역이 ‘알맞은 위치’에 정해지는 습관은, 가정의 이상적인 아버지에게도 혹은 풍류인에게도 이 두 영역을 다른 세계로 보게 한다. [171]

이상과 같은 일본인의 ‘인정’관은, 몇 가지 중요한 귀결을 수반한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개의 힘이, 각자의 생활에서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철학을 근저에서부터 뒤엎는다.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肉)은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에 대립하는 2대 세력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인은 이 신조를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라고 하는 결론으로까지 가져간다.  [176]

일본인의 인생관은 그들의 주(忠) 고(孝) 기리(義理) 진(仁) 닌조(人情) 등의 표현에 나타나 있는 대로이다. 그들은 ‘인간 전체의 의무’가, 마치 지도 위의 제 지역처럼 명확하게 구별된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인생이 ‘주의 세계’ ‘고의 세계’ ‘기리의 세계’ ‘진의 세계’ ‘닌조의 세계’, 그밖에 또 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한다. 저마다의 세계는 각각 특유하고, 세밀하게 규정된 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다른 인간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판단하지 않고, ‘고를 모른다’든지, ‘기리를 모른다’든지 하는 말로 판단한다. 그들은 미국인처럼 어떤 사람을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대신에, 인간이 해야 할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지 않은 행동의 세계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어떤 사람이 이기적이라든지 불친절하다든지 하고 비난하는 대신에, 일본인은 그 인간이 위반한 법도의 특정 영역을 명시한다.  [181]

일본인은 각기 자신의 생활, 혹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만일 의무의 법도와 상용되지 않는 개인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약자로 판단한다. 모든 종류의 사태가 이런 형태로 판단되는데, 그 중에서도 서구의 윤리와 가장 대조적인 것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태도이다. 아내는 고(孝)의 세계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데 불과하지만 부모는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남편의 의무는 명백하다. 공고한 도덕적 품성을 자긴 인간은 고를 따르며, 만일 어머니가 아내와 이혼하기를 결정하면 그 결정을 수락한다.  [193]

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쓸 때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 및 일본 정신에 의하여 지도상에 그려진 ‘길’을 따르려는 열의라는 것이다. 개개의 문맥에 있어서 마코토라는 말이 아무리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일본정신의 어떤 측면의 칭찬, 덕의 지도 위에 세워져 있는 공인된 이정표의 칭찬이라고 해석하면 틀림이 없다. [202]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빌어서 말하면,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구어 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서 예리한 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물론, 그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던 것이다. [219]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일본인은 자기의 행위를 관찰하고, 타인이 무슨 말을 할까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그 시비를 판단하도록 철저히 훈련받는다. 그의 ‘보는 나는’ 매우 상처입기 쉽다. 영의 삼매경에 몰입할 때, 그는 이 상처입기 쉬운 자아를 배제한다. 그는 이제, ‘지금 내가 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그때 그는, 이로써 자기는 마음의 수양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것은 검술을 배우는 사람이, 자기는 이제 겁먹지 않고 한 개의 기둥 위에 서는 훈련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232]

일본의 생활 곡선은 미국의 생활 곡선과 정반대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저변이 얕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와 관대함이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바로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자의대로 할 수 있는 자유는 최저선에 도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기를 통하여 몇 십 년 계속되는데, 그 후 곡선은 다시 점차로 상승하여 60세가 지나면 유아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움과 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된다.  [238]

아이들아 배워야 할 것은 앉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자는 방법도 있다. 일본 부인이 자는 모양을 보이기를 삼가는 것은 미국 부인이 나신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대단하다. 일본인은, 정부가 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운동을 벌여 부끄러운 일이라고 시끄럽게 선전하기 전에는, 나체로 목욕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지만, 자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감정은 대단히 강렬하였다. 사내아이는 아무렇게나 잠을 자도 괜찮지만 계집아이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신체를 곧게 편 채고 자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사내아이의 훈련과 계집아이의 훈련을 구별하는 최초 규칙의 하나이다. [251]

여자는 이름에 대한 기리를 배우지 않으며, 사내아이처럼 중학교나 군대교육이라는 근대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애는 사내아이의 생애에 비하여 훨씬 변화가 적다. 유아기의 기억이 남는 시기부터 그녀들은 어떤 일에 있어서도 사내아이가 우선적이며, 사내아이에게는 계집아이에게 부여되지 않는 보살핌과 선물이 주어진다는 사살을 인정하도록 훈련되어져 있다. 계집아이들이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세술은 공공연히 자기 주장을 할 특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261]

서구인을 놀라게 하는 일본 남성의 행동 모순은, 그들의 어린 시절 훈육의 불연속성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칠’을 한 다음에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그들이 자신의 작은 세계에 있어 작은 신이었던 시절, 마음대로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시절, 어떤 소망이든 들어 주던 시절의 깊은 상처가 남는다. 이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이중성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 로맨틱한 연애에 빠졌다 하더라도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듯 가족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한다. 쾌락에 빠져 들고 안일을 탐하는 하면 극단적으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해치운다.  [266]

그러나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많은 요구를 한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배척되어 비방을 받는 큰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처럼 맛을 알게 된 개인적인 즐거움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인생의 중대한 일에 있어서는 그 충동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패턴을 위반하는 소수의 인간들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는 위험에 빠진다. 스스로를 존중하는(자중하는)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느냐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냐는 것을 목적으로 진로를 정하여 세상 사람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버린다. [268]

이러한 그들의 정신적 자유를 증대할 수 있는 과도기에 처하여 일본인은 두세 가지의 오랜 전통적 덕에 의지하여, 평형을 잃지 않고 무사히 거센 파도를 넘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그들이, ‘몸에서 나온 녹슨’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자기 책임의 태도이다. 이 비유는 자신의 신체와 칼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칼을 찬 인간은 칼이 녹슬지 않고 번쩍이게 할 책임이 있는 것같이, 사람이란 각자 자기의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란 자신의 약점, 지속성의 결여, 실패 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를 승인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책임이라는 것은 일본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미국보다 훨씬 철저하게 해석된다. 이러한 일본적인 의미에서의 칼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며 훌륭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으로 비유된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시대에 있어서 이 덕은 가장 훌륭한 평형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덕은 일본 아이들의 훈육과 행위의 철학을 통해 일본 정신의 일부로서 일본인의 마음에 심어 온 덕이다. 오늘 날 일본은 서구적 의미에 있어서 ‘칼을 버릴’ 것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일본적인 의미에서는 일본인은 잘못하면 여전히 녹이 슬기 쉬운 마음속의 칼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도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은 보다 자유롭고 보다 더 평화로운 세계에 있어서도 아직 그들이 보존하고픈 상징인 것이다. [271]

그들은 혁명가가 아니다. 일본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대중 운동에 희망을 걸고 있던 서구의 저술자들, 전쟁중 일본의 지하 세력을 과대평가하여 항복 직후엔 그 지하 세력이 실권을 쥘 것으로 기대한 학자들, 또 대일 전승일 이래 선거에 있어 급진적 정책이 승리할 것으로 예언한 저술가들은 심히 사태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예언은 적중하지 않았다.  [276]
유럽이나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도 앞으로 10년간 군비를 갖추지 않는 나라가 군비를 갖추는 나라를 능가할 가능성이 있다. 까닭은 군비가 없는 나라는 경제 건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아시아 정책과 유럽 정책 수행에 있어, 이러한 사정을 거의 안중에 두지 않는다. 우리들은, 우리 나라에서 다액의 비용을 요하는 국방계획을 실시해도, 그 때문에 나라가 빈곤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86]

미국이 할 수 없는것-어느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은 명령으로써 자유로운 민주적 일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어떠한 피지배국에서도 아직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어느 외국인도 자기와 같은 습관이나 가정을 가지지 않은 국민에게 자기와 같은 생각이나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법률의 힘으로써 일본인에게 선거에 의해 뽑힌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시켜서, 그들의 계층 제도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바의 ‘알맞은 위치’를 무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법률의 힘으로써, 그들에게 우리 미국인에게는 습관이 되어 버린, 허물없이 사람들과 접촉하는 태도, 아무래도 자유 독립을 요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기분, 각자가 갖고 있는, 친구들, 직업, 사는 집, 맡은 의무를 선택하는 정열을 받아들이게끔 할 수는 없다. [287]


● 내가 저자라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일본에 단 한번도 가보지 않고 일본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들어야 할 특징은 그럼에도 책의 내용이 아주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학계에서는 ‘학문의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엄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러한 의견에는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다.
이 책은 저자가 1944년 6월 미국 국무성의 위촉을 받고 시작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각종 일본에 대한 방대한 문헌, 일본에서 자란 일본인들의 경험, 일본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 많은 서양인 관찰자들, 서양인이 기록한 생생한 체험, 일본인이 기록한 자신들의 모습, 일본에서 씌어지고 제작된 영화 등을 참고로 하여 인류학에서 기념비가 될만한 연구결과를 만들어냈다.

책은 마치 일본인과 몇 세대에 걸쳐 생활을 같이하면서 세세히 기록한 듯 묘사가 상세하다. 다루고 있는 분야도 일본인에 대한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 역사에서 시작해 문화 가정 사회 국가의 문제까지 폭 넓게 다루고 있다. 현지에서 생활하지 않고는, 그리고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는 알기 어려운 가정의 구조나 성(性)에 관련된 개개인과 사회의 연결고리와 행태 까지 저자는 집어내고 있다.
더욱 감탄스러운 것은 일본인들의 심리 구조에 관한 것이다. 입에서는 맴돌지만 글이나 말로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일본인들의 특질들을 저자는 아주 명확하게 글로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들은 너무 적확하고 세세해서 살짝살짝 전율이 일어날 정도이다. 아마 일본인 자신들도 알지 못했던, 알고는 있었지만 표현해내지 못했을 것 같은 문제들이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를 저자는 ‘국화와 칼’ 이라는 말로 압축해냈다. ‘국화와 칼’은 아주 단순하지만 아주 강렬한 단어로 책의 모든 것과 일본인들의 모든 것을 표현해낸 뛰어난 선택이다.

책을 읽는 독자로서 다소 불편했던 것은 서술의 방식이다. 논문의 기록처럼 이어진 내용은 어느 순간 독자의 몰입을 흐트러지게 만들면서 책을 읽기 시작할 때의 흥미로움과 몰입이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책의 내용에 따라 독자는 다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하지만 한 번 끊어진 맥은 좀처럼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책의 내용도 책이 담아내고 있는 일본 사회의 모습처럼 꽉 짜인 매뉴얼에 의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한 느낌은 책을 읽는 동안 답답함과 잦은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책읽기는 중간을 넘어서면서부터 지겨운 듯한 기분을 준다. 흥미는 충분히 유발하고 있지만 그 흥미를 이끌어 가는 데는 힘이 부족한 듯 하다.
물론 이 저작은 일반 독자를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원천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저작을 다양한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다는 것은 계속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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