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양재우
  • 조회 수 316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12월 1일 10시 46분 등록
 

국화와 칼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노재명 옮김/북라인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 ∼ 1948)


Ruth Benedict 1.jpg


미국 뉴욕출신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저술가이다. 한때 교사와 시인으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문화인류학에 입문한 이래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종, 문화, 민화, 종교 등 인류학적인 연구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그녀의 삶은 어쩌면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불꽃과 같은 삶을 살고자 가슴 속 열정을 가득 태웠고, 남성 위주의 사회적, 시대적 편견에 대항하여 자신의 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전심을 다하였다. 그녀는 속으로는 괴로움, 고통, 안타까움, 불평등, 스스로에 대한 자책 등에 시달리며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으나, 겉으로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모습을 보이고자 매사에 자신을 세우고 또 세우려 노력하였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시대를 앞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운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스로가 그 방법을 찾았고, 자신이 원하는 수준까지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다간 입지자전적인 여성이자, 선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출생 및 성장


베네딕트는 1887년 뉴욕에서 외과 의사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두 딸의 장녀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두 살 무렵 아버지가 급사하게 되면서 그녀는 뉴욕주 북부에 있는 섀넌 농장을 운영하던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졸지에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게 된 어머니는 교사와 도서관 사서 등으로 일하면서 힘겹게 두 딸을 키웠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라게 된 베네딕트는 정신정 안정감 보다는 내면적인 불안정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생활고에 지친 그녀의 어머니는 장녀지만 어리기만 했던 베네딕트에게 과부로 살아가는 어려움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토해내었고, 그것을 듣고 자란 그녀는 마음 속으로 어머니에 대한 심한 염증을 느끼게 되었으며, 때에 따라 발작 비슷한 격심한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한번은 어린 베네틱트가 아버지의 관 옆에 서 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라고 채근한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들로 인해 그녀는 자신이 신경질적인 여자가 되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신체적 장애도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 열병을 앓아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이 때문에 성격이 우울해졌는데, 두 살 아래 여동생 마저리는 성격이 밝고 예쁘고 활달한 아이여서 더욱 대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우울한 성격을 혐오하여 심적으로 대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눈물 없는 외양을 꾸며야 했기 때문에 더욱 자기 혐오감이 깊어졌다.


그러한 환경으로 인해 그녀는 점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동생과 달리 집안 살림에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는 글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글을 써서 자아를 내보이고 싶다. 그것을 포기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자아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썼고 1909년에는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인 바사대학 영문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녀는 한때 문필업에 전념할 생각도 있었으나 문화인류학에 입문하면서 시 쓰기는 중단했다.


● 결혼과 학문

 

베네딕트는 1914년 여름,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했다. 이 무렵 남편은 뉴욕 시 코넬 의과대학에서 생화학자로 근무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문제를 두고 남편과 갈등을 빚었다. 그녀는 그런 갈등을 해결해줄 촉매제로서 아이의 출생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1919년 결정적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 해에 그녀는 아주 위험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남편이 그 수술에 반대하면서 부부 관계는 더욱 틀어지게 되었다.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베네딕트는 더욱 자신의 길을 가야겠다고 각오하게 되었다.


그녀는 32세가 되던 1919년, 우연한 기회에 사회연구를 위한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 강의를 들으면서 그것이 아주 흥미로운 학문임을 알게 되었고, 곧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된다. 이 학문은 그녀가 평소 늘 고민 속에 갖고 있던 질문들, 가령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가?" "나는 왜 인생에 많은 두려움을 느끼는가?" "나는 왜 현대 미국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문화인류학에서 찾을 수 있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1921년 그녀는 34세의 나이에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자신의 평생 스승이 된 프란츠 보아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인류학 연구에 빠져들게 된다.


그녀는 1923년 아메리카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에 관한 연구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그리고 1934년 문화의 상대성과 문화가 개인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 <문화의 패턴 Patterns of Culture>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곧 이어 <인종 Race : Science and Politics>을 출간함으로써 미국 인류학계의 대표적인 학자가 된다. 1943년에는 대학에서 나와 전쟁공보청 해외정보 책임자로 일하게 되고, 1946년에는 만년의 역작인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을 출간하여 전세계적인 큰 호응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 베네딕트에 대한 전기, <루스 베네딕트, 인류학의 휴머니스트> -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 지음


“나는 바너드 대학 4학년이던 1922년 가을에 루스 베네딕트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당시 프란츠 보아스 밑에서 대학원 과정을 막 마치고 1년간 바너드 대학에서 보아스의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학생들을 데리고 미국 자연사박물관에 데려가기도 했다.


이 당시, 소녀 시절에 그리고 그 후에 하나의 전설이 되었던 그녀의 미모는 완전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수줍음이 많고 정신이 산만한 중년 부인 같아 보였고, 가느다란 쥐색 머리카락은 잘 고정되어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 법이 없었다. 여러 주가 지나가도록 계속 엉성한 모자를 쓰고 다녔고 칙칙한 색깔의 같은 옷을 입었다. 남자들은 매일 같은 옷을 입잖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여자는 왜 그렇게 하면 안 돼?“ (25P)


"그녀는 나보다 15세 연상이지만 인류학에 입문한 것은 나보다 3년 정도 앞설뿐이다."


1974년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를 한 권의 책으로 기억했다. 25년 동안 동료 학자로서, 다정한 벗으로서, 때로 연인 사이로서, 둘은 관포지교도 못 따라올 관계를 유지했다. 이 책은 1948년 베네딕트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뜬지(61세) 26년 뒤에야 나온 것으로 영혼의 동지가 학문적으로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기록이다.


1922년 미드는 대학생으로, 베네딕트는 조교로 조우했다. 이후 서로의 아픔을 알게 된 그들은 둘도 없는 인간 관계를 키워 간다. "나는 그녀가 쓴 글들은 모두 읽었고, 그녀 또한 내가 쓴 것이라면 모두 읽었다." 미드가 쓴 글이지만, 베네딕트가 썼어도 똑같은 내용이다.


인간으로서 두 사람은 평탄치 못했다. 베네딕트는 화학자와 결혼, 불행한 가정 주부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미드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는데, 공격적 성취욕 탓에 인간 관계를 홀대하고 출세 지향적이었다. 두 사람간의 연대와 이해는 상대적으로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1930년대, 미국의 대학에서도 극명했던 성차별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여교수들은 남자 교수들의 식당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인류학과가 소속된 사회과학대학은 아예 남성 전용 클럽이나 다름 없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네딕트는 20세기 전반기의 위대한 여성 학자지만, 생시에는 남자 학자들 사이에서 과소 평가됐던 것이다.


이 책은 그러나 미드와 베네딕트 간의 성적 관계를 은폐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베네딕트는 40대 초반이 되던 1930년대 초에 레즈비언이 되기로 했으며, 미드는 1930년대 후반 결혼하면서 양성애를 선택했다. 당시 이들의 이러한 선택은 파격적이다 못해 감히 입 밖에 꺼내기도 힘든 엄청난 일이기도 했다. 실례로 미드가 이 책을 집필했던 1974년만 해도 미국 내에서 동성애는 반드시 숨겨야 할 혐오 사항이었다. 따라서 미드는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깊은 관심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이 책의 행간을 읽어보면 그런 관심사가 배어 나오는데, 가령 미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학 시절 그녀는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주 외로운 학생이었으나 기이한 방식으로 다른 외로운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베네딕트가 외로운 여성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사람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녀의 아름다움이 시들어가던 1924년 무렵"란 내용이 있는데, 이때는 베네딕트가 자신의 성 정체성과 관련하여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이 회복된 1931년"에 이르러서는 베네딕트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미드와의 사랑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기도 했다.


베네딕트는 이런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문화인류학 연구에서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변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런 만큼 그녀의 글에는 자기 지칭성(베네딕트 자신의 문제를 문화의 분석에 원용하는 것)의 경향이 강하다. 전기 뒤에 붙어 있는 6편의 논문도 이런 자기 지칭성의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다.


● 저서


<문화의 유형 Pattern of Culture>(1934)

<종족 Race : Science and Politics>(1940)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역자 서문

일본의 양면성에 대한 인류학적 재구성…그 역설의 미학


보통 일본 문화를 ‘혼네 本音, 본심’와 ‘다테마에 健前 표면상의 방침’의 두 축으로 분석하곤 한다. 일본인은 겉으로 하는 말과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다. 《국화와 칼》은 바로 이런 이중성을 인류학적으로 재구성한 책으로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10P)


어떤 의미에서 천황제란 일본의 근대를 책임졌던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들이 일본인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었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나 싶다.(11P)


제1장? 연구과제…일본



인간 사회에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일정한 방식과 그러한 상황을 평가하는 일정한 틀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런 틀을 인간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이해한다. 사람들은 이런 틀을 상식이라 부른다.(28P)


‘국화와 칼’은 서구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 체계는 정말 독특한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적인 것도 아니었고, 유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일본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응축되어 있는 대상이 바로 ‘국화와 칼’이었다.(37P)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원래 가미카제神風 라는 말은, 13세기 칭기즈칸이 일본을 침략하려 했을 때 그 침략선을 전복시켜 일본을 구한 성스러운 바람을 뜻한다.(45P)


“인간에게 주어지는 기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연히 부딪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는 반드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사이고 다카모리-(49P)


미국인은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외부의 도전 세력에 적합하게 조정한다. 그리고 그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면 일반인은 미리 계획되고 진로가 결정된 생활양식에서만 안도감을 얻을 수 있고, 자신들이 예견하지 못한 사태에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51P)


“일본인은 천황의 명령이라면 죽창 한 자루 이외에 아무런 무기가 없더라도 주저 없이 싸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천황의 명령이라면 즉각 싸움을 멈출 수도 있을 것이다.”(57P)



제3장? 적절한 위치 찾기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자가 적절한 위치를 찾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그들의 직접적인 설명을 들어야 한다.  계층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는 인간 상호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일본인이 품고 있는 사상의 기초가 된다.(70P)


평등은 더 좋은 세계를 위한 도덕적 기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압제와 간섭, 원하지 않는 중압감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법률 앞에서의 평등과 개인이 스스로의 처지를 개선할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오늘날 기본적 인권의 바탕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평등이라는 가치를 침해하는 경우에도 평등의 덕을 지지한다. 그리하여 평등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계층제도에 맞선다는 것이다.(72P)


상대방에게 머리를 숙이는 행위는 자신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고 싶지만 상대방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또 인사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에 합당한 책임을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성별과 세대 간의 구별, 장자상속권에 입각한 계층제도가 가정생활의 근간이다.(77P)


가족의 의사에 복종하는 것은, 그 요구가 부당하더라도 가족 모두에게 관계된 문제라는 명분 아래서 요구된다. 즉 공동체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것이다.(84P)


일본인이 가정생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결정이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가족 전원이 동의했느냐의 유무에 있다.(85P)


일본사회의 계층적 조직은 가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엄격하다. 일본은 전 역사를 통해 철저한 카스트적 사회였다. 일본에서 카스트 제도는 역사를 일관하는 생활원리였다.(86P)


황실을 의미하는 일본어는 ‘구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며, 이들만이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빈번하게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일은 한 번도 발생한 적이 없다.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며, 천황의 몸은 신성한 대상이었다.(87P)


일본의 사무라이는 중세 유럽의 기사들처럼 자신의 영주와 농노를 소유한 작은 영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신의 영주를 선택하지 않는 유한무인有閑武人 도 아니었다. 이들은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가문에 따라 수령액이 정해진 연금생활자였다.(93P)


도쿠가와 시대의 사무라이는 단순하게 칼만 휘두르는 무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점차 자기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나 고전극이나 다도 같은 예능의 전문가가 되어 갔다. 모든 의정서는 이들의 소관이었고, 다이묘의 정책은 이들의 머리로 수행되었다. 평화로운 100년은 긴 세월이라고 할 수 있다.(94P)



제4장? 메이지유신


일본 근대화 초기의 구호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왕정을 복고하고 오랑캐를 추방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이 외세에 짓밟히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천황과 쇼군의 ‘이중 통치’가 존재하지 않았던 14세기의 황금시대로 복귀하자는 슬로건이기도 했다.(110P)


메이지유신이라는 대사업을 기획하고 수행한 사무라이들과 사무라이 신분을 사서 신분 상승을 이루고 생산 기술 지식을 보급한 상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결코 이데올로기적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들이 머리에 그리고 있는 목표란 일본을 세계 열강의 대열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113-114P)


일본인의 생활양식은 적절한 권위를 할당하고 각자에게 알맞은 영역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웃어른은 서구에서 보다도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웃어른 역시 그에 상응하는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모든 것은 그에 알맞은 장소에 둔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의 좌우명이다.(122P)


국가는 특히 국민적 통일과 그 국민의 우월성을 선양하는 국교는 국가 관할에 두고, 다른 여타의 종교는 개인의 자유로운 신앙에 맡겼다. 국가의 통제를 받는 영역은 바로 국가신도國家神道 다. 국가신도는 미국식으로 생각해보면 국기에 경례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국민적 상징에 정당한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다.(123p)


종교에 관한 일본의 공식적인 태도는 이와 같다. 그러므로 국가신도는 ‘거대한 국립교회 Established Church’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거대한 국립기관Establishment'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듯 하다.(124P)


자신의 ‘적절한 위치’가 보장되는 한 일본인은 불만없이 살아간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행복이 최대한 보호되느냐의 관점에서 문제가 제기될 수는 있지만, 지금까지 계층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점에서는 안전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인이 인생을 바라보는 특징이다. 이는 평등과 자유 기업에 대한 신뢰가 미국인의 생활양식의 특징인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133P)



제5장? 과거와 세상에 빚진 사람들


‘온’이라는 단어의 공통적인 의미는 인간이 짊어질 수 있는 부담이나 채무, 즉 무거운 짐이다. 일본인이 ‘나는 누구에게 ’온‘을 입었다’고 말하는 의미는 ‘나는 누구에게 부담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본인은 채권자나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을 가리켜 ‘온진恩人’이라고 부른다.(138P)


‘온’은 ‘천황의 온 皇恩’에 대해서 사용할 때에는 무한한 헌신을 의미한다. 이것은 천황에 대한 채무로서, 사람들은 황은 皇恩을 무한한 감사의 의미로 받아들인다.(139P)


일본의 전 역사를 통해 일본인이 채무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항상 그가 속한 세계의 가장 윗사람이었다. 이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지방 영주, 봉건 영주, 쇼군 등으로 변했다. 오늘날 그 사람은 천황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수세기 동안 일본인의 관습에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40P)


자식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것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아이를 부모가 자신을 키워 준 것처럼 잘 양육함으로써 부모로부터 받은 ‘온’의 일부를 갚은 것이다. 자식에 대한 의무는 ‘부모의 온’ 속에 포섭되고 만다.(141P)


이제까지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사람으로부터 단지 담배 한 개비를 얻어 피워도 일본인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경우 고마움을 표현하는 정중한 화법은 “아아! 기노도쿠데쓰네 氣の毒ですね”다. 이는 곧 ‘독毒 이 있는 감정이군요’라는 의미다.(144P)


대도시의 근대적 백화점에서 사용하는 ‘아리가토우有難う’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Oh, this is difficult things”라는 뜻이다. 일본인은 이 ‘쉽지 않은 일’을 손님이 상점에 들어와서 물건을 삼으로써 그 상점에 베푸는 커다란 은혜라고 생각한다.(145P)


상점 주인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라는 의미의 ‘스미마센 濟みません’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즉 ‘나는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경제체제 아래에서 나는 당신에게 입은 은혜를 갚을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이런 입장에 놓인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는 의미다.(145P)


제6장? 1만 분의 1의 보은



채무에 대한 끝이 없는 변제는 ‘기무 義務’ 라고 한다. 이에 관해 보통의 일반인은 “받은 온의 1만 분의 1도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무’는 양친에 대한 보은인 ‘고 孝’와, 천왕에 대한 보은인 ‘주 忠’라는 두 가지 의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162P)


미얀마에서는 싫은 것을 의미하는 속담에 ‘화재?홍수?도둑?관리?악인’ 등을 열거하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지진?벼락?오야지 the Old Man(가장, 아버지)’를 들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167P)


어떤 일본인 저술가는 “일본인은 가정을 대단히 중요시하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나 그들 사이의 가족적 유대는 크게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170P)


일본의 정치가들은 천황을 신성한 수장으로 받들고, 그를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존재로 만들어냈다. 천황은 책임 있는 국가원수로서가 아니라 국민 통합의 최고의 상징으로 필요한 존재였다.(171P)


일본인은, 미국인이 준법정신이 결여된 국민이라고 판단한다. 이에 반해 미국인은, 일본인이 민주주의 관념이 결여된 굴종적인 국민이라고 판단한다. 미국인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판단한다는 태도를 중시하는 반면, 일본인은 자신의 행동 기준을 자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그것을 갚는다는 면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태도는 모두 맹점을 지니고 있다. 미국인의 맹점은, 새로운 법규가 미국인 전체에 이익을 주는 경우에도 국민의 승인을 얻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일본인의 맹점은, 무엇보다도 어떤 사람에게 그의 온 생애를 뒤덮을 만큼 큰 부채를 지우기가 어렵다는 점에 있다.(177P)



제7장? 기리만큼 쓰라린 것은 없다


‘기리’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요소로 나뉘어진다. 먼저 세상에 대한 ‘기리’를 갚는 것은 동년배에게 ‘온’을 갚는 다는 의미이고, ‘이름에 대한 기리’는 대체로 독일인의 ‘명예 die Ehre'와 동일한 개념으로 자신의 이름과 명성이 외부의 어떤 비난에도 더렵혀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다. ’기무‘가 태어나자마자 부여되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면, 세상에 대한 ’기리‘는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183P)


일본인은 복수라는 의식을 충정만큼이나 흔쾌히 찬양한다. 그리고 이 모두는 당연히 ‘기리’의 영역에 속했다. 충절은 주군에 대한 ‘기리’였고, 모욕에 대한 복수는 자기 명예에 대한 ‘기리’였다. 일본에서 이 두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189-190P)



제8장? 오명을 씻는다


일본인은 세상에 대한 기리는 친절을 갚는 의무이고, 이름에 대한 기리는 복수를 의미한다는 사실로 기리를 구별하지는 않는다.(197P)


사람이 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씻는 한, 그것은 결코 침해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일본인은 모욕이나 비방이나 패배를 보복으로 제거하지 않는 한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 훌륭한 사람은 세상을 다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악덕은 아닌 것이다.(197P)


사무라이가 극단적인 육체적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면, 평민은 극단적인 순종을 강요당하고 무기를 지닌 사무라이의 공격을 감수해야만 했다.(200P)


"어린 새는 먹이를 찾아 울지만, 사무라이는 이쑤시개를 물고 있다“(200P)


토크빌의 말에 따르면, 미국은 여러 가지 훌륭한 미덕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존엄성이 결여된 사회다. “진정한 존엄성이란 항상 지나치게 높거나 낮지 않고 자신에게 알맞은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202P)


“복수에는 우리의 정의감을 만족시켜 주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우리의 복수에 대한 관념은 우리의 수학적 능력처럼 엄밀한 것으로서, 방정식의 양변이 만족되지 않는 한 우리는 무언가 못 다한 것이 남은 듯한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없다.” -니토베 이나조-(215P)


“일본의 공적?사적인 생활에서 자주 부딪치게 되는 복수는 깨끗함을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결벽증에 걸린 국민이 행하는 아침 목욕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본인은 활짝 핀 벚꽃 만큼 신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는 생활을 한다.” 《일본의 생활과 사상 中》-오카쿠라 요시사부로- (216P)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는 민족이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 보다는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219P)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념에 따르면, 자살은 그것이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기만 한다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명예를 회복하는 구실을 한다.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시하여 삶에 대해 자포자기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일본에서 자살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221P)


봉건시대에 자살은 용기와 결단을 드러내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살은 스스로 선택한 자기 파멸의 행위가 되었다. 최근 50~60년간 일본인은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느낄 때, ‘방정식의 양변’이 맞지 않는다고 느낄 때, 혹은 오명을 씻어내기 위해 ‘아침 목욕’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다른 사람을 해치는 대신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 많아졌다.(223P)



제9장? 인정의 세계


극단적인 의무의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일본인의 도덕관은 당연히 개인적 욕망을 죄악이라고 단정한다. 이는 전통적인 불교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일본의 도덕관이 그토록 관대하게 오관의 쾌락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중적이라는 느낌을 준다.(236P)


일본 남자들은 아내의 영역과 성적 향락의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이 두 영역은 모두 공공연하게 인정된다. 이 둘은 한쪽이 인간의 중요한 의무의 세계에 속한다면, 다른 한쪽은 사소한 기분 전환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별된다.(244P)


“일본에서 결혼의 진정한 목적은 아이를 낳고 그에 의해 가문의 핏줄을 이어가는 데 있다. 이외의 목적은 어느 것이나 결혼의 참된 의미를 왜곡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245P)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다.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대립되는 대상이 아니다. 일본인은 이 신념을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조지 샌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인은 어느 시대에나 이와 같은 악의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그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태도를 회피해 온 것으로 보인다.”(250P)



제10장? 덕의 딜레마


일본인의 인생관은 주忠?고孝?기리義理?진仁?인정人情 등에 나타난 바 그대로다. 그들은 ‘인간의 의무’가 마치 지도 위의 여러 지역처럼 몇 개의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258P)


강자란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하고 기무를 완수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인간의 성격이 강인하다는 것은 반항으로써가 아니라 복종으로써 증명된다고 생각한다.(273-274P)


기리는 아직도 일본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덕이다. “기리를 모르는 놈”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가장 심한 욕 중의 하나다.(279P)


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관념이나 ‘일본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길’을 따르려는 열정을 가리킨다. 구체적인 문맥에서 ‘마코토’라는 말이 아무리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일본 정신’이라고 인정되는 어떤 측면의 칭찬, 혹은 그 기반 위에서 행해진 어떤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칭찬이라고 보면 틀림없다.(285P)


'마코토‘는 일본인의 도덕법전의 어떤 항목도 고차의 거듭제곱으로 높여 주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독립된 덕이 아니며, 스스로의 교의에 대한 광신적인 열정이다.(287P)


일본인은 죄과의 중대성보다는 수치羞恥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291P)


참다운 죄의 문화는 내면적인 죄의 자각을 통해 선행을 하게 한다. 반면 진정한 수치의 문화는 외면적인 강제력을 통해 선행을 하게 한다. 수치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다. 보통 인간은 다른 사람 앞에서 조소나 거부를 당하거나, 혹은 자신이 조소를 당했다고 분명히 믿게 됨으로써 수치를 느낀다. 어떤 경우에나 수치는 강력한 강제력의 근원이 된다.(292P)


일본인은 치욕을 도덕 체계를 형성하는 원동력으로 파악한다. 치욕은 분명하게 용인된 선행의 기준을 따를 수 없는 것, 다양한 의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앞으로 발생할 우연을 예견하지 못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293P)



제11장? 자기 수양


수양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을 떨어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서 예리한 칼로 만든다.(306P)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금욕과 고행을 강조한다. 이것이 윤회로부터 해탈을 얻는 방법이다. 인간은 이 같은 해탈 즉 열반 이외에는 달리 구원을 얻을 방도가 없다. 인간의 이런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는 인간의 욕망이다. 욕망은 스스로에게 고행을 강조하고, 스스로를 모욕하며, 스스로를 가혹하게 책망하여 괴롭힘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요가 수행은 육신과 욕망의 세계를 떠나 영원의 세계로 회귀하는 방법이다.(310P)


죽은 자는 이제 온 恩을 갚을 필요가 없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따라서 ‘나는 죽은 셈치고 산다’는 말은 모순으로부터 궁극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의미다.(326P)



제12장? 아이는 배운다


유년 시절의 후기가 다가오면 아이는 점차 개인적인 만족을 포기할 것을 요구받게 되고, 이제 보상과 벌이 확실해진다. 보상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며, 벌은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370P)


일본에서 칼은 공격의 상징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인간을 비유한다. 일본인의 도덕적인 어법에 따르면, 칼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해야 하는 상징이다.(380P)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일본에서 청년기는 부모의 권위에 반항하는 시기가 아니다. 오히려 청년기는 아이가 한 집안의 일원으로 그의 책임을 무겁게 여겨 순종하면서 세상의 비판 앞에 서게 되는 시기다.(388P)


일본인의 윤리에 따르면 인간이란 자기 행위의 결과로 인한 모든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하며, 반대로 어떤 결과를 통해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 속에는 총력을 기울인 전쟁에서의 참혹한 패배도 포함된다.(395P)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대한민국과 일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의 나라이다. 일단 거리 상으로 제일 가깝고, 역사적으로 연관성이 제일 높은 나라이며 국민의 외모 또한 유사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외면에만 치중한 관계적 유사성이고, 내면으로 깊게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두 나라 사이의 골은 깊을 데로 깊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두 나라의 관계를 표현하자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모든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일단 1592년 임진왜란은 두 나라간의 관계가 크게 벌어지게 되는 시작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간헐적인 침략이 있었지만 이처럼 대규모의 전쟁은 두 나라의 관계에 치명상을 입히고 말았다. 또한 1945년 광복까지의 일제 식민치하에서의 조선인들은 절대 일본인이란 종족에 대해 잊지 못할 치욕적 과거를 가지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세대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가며 그 감정들이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두 나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골이 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일방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양호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일본인에 대해,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은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 특히 감정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세계 속의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과의 관계 속에서의 일본을 끄집어 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사실 이 책 ‘국화와 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다소 삐딱한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다소 시비조에 가까운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과연 어느 것이 객관적인 것인지, 어디까지가 나의 감정에 의한 사고인지..... 어려웠다.


이 책은 확실한 목적이 있는 책이다. 그 목적달성을 위해 쓰여진 Target Report라 할 수 있다. 책 내용 중의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책을 어떠한 목적으로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에 대해 연구하였는지 들어보도록 하자.


1944년 6월, 나는 일본에 대한 연구를 위촉받았다. 연구의 주제는 일본인이 과연 어떤 국민인가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미국이 일본을 향해 대공세를 펼쳐 미국의 힘을 본격적으로 보여 주던 해의 초여름 무렵이었고,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일본과의 전쟁이 3년이나 10년, 혹은 10년 이상이 소요될 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 전쟁은 100년은 걸려야 끝난다는 말도 나돌았다. (중략)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일본 정부가 국민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우리는 일본인의 사상과 감정은 물론이고, 이런 것들의 본질에 내재하는 문화의 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또한 우리는 이런 문화의 틀의 이면에 존재하는 문화의 힘을 알아야만 했다.(20P)


이 책은 일본인의 일반적인 특성을 그들의 생활방식에서 찾고자 한 책이다. 즉 일본인의 외적인 활동이 무엇이든 그 속에서 일본인의 일반적인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기술한 책이다. 이 책은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연구한 책이다.(30P)


결국 미국 국무부가 루스 베네딕트에게 요구한 것은 일본인에 대해 제대로 알아내고, 그들을 항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한가지 조사상의 맹점이 있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커다란 장벽이 있어 일본에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현지 답사가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을 주변 문화와의 비교 연구나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모델 연구를 통해 보완하였다.


역자는 이 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통 일본 문화를 ‘혼네 本音, 본심’와 ‘다테마에 健前 표면상의 방침’의 두 축으로 분석하곤 한다. 일본인은 겉으로 하는 말과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다. 《국화와 칼》은 바로 이런 이중성을 인류학적으로 재구성한 책으로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10P)


어제까지 도저히 항복할 것 같지 않던 적이 어느 날 갑자기 두 손을 들고 악수를 청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규명하여 미국인의 궁금증을 풀어 준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요한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다.(11P)


《국화와 칼》은 위대한 저서라기보다는 한 민족의 행동 특성을 분석하려고 노력했던 인류학자의 진솔한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13P)



책의 장단점


이 책은 리포트나 어쩌면 논문에 가까운 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사실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저자의 전문인 인류문화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려고 노력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분석적이며 논리적인 것이 사실이다. 또한 책, 영화, 신문, 잡지, 인터뷰 등 광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풍부하게 제시되는 예시들은 자료의 신빙성을 더해 준다.


이 책을 통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일본의 역사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도쿠가와 막부시대에서 메이지시대로 넘어가는 그 과도기에 대한 역사들은 그 전에 어렴풋한 기억들을 보다 명확히 밝혀주었다. 또한 메이지유신이 왜 일본역사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쳤는 가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자세히 알 수 있어 좋았다. 특히 대한민국 역사에 오명을 남긴 역적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부미란 일본인들이 일본에서는 어떠한 존재들이었는지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어 더 좋았던 시간이었다.


또한 일본인의 여러 가지 많은 사상들, 특히 기무와 기리에 대한 관계성, 그리고 수치의 문화에서 빚어지는 각가지 사례들. 어렸을 때부터의 교육방법 등 잘 모르고 있던 일본인의 문화에 대해 그 내부까지 들여다 본 것 같아 시원하기 까지 했다. 하지만 역시나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제일 먼저 저자의 욕심이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래도 저자의 전공이 인류문화학이지, 철학이 아닌 관계로 동양사상에 대한 깊이는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일본에 대한 동양철학 부분을 언급하여 그들의 문화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역량이 떨어짐이 느껴지고 그로 인해 글의 설득력 또한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한가지 예로 무아(無我)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 의미가 명확치 않아 보인다. 과연 저자가 얼마나 무아(無我)에 대해 깨닫고 있는 지 사실 공감가지 않는 부분이 꽤나 많아 보였다. 또한 일본에서 장례식, 결혼식 또는 축하 행사에 장기적 또는 단기적인 상호부조가 행해지는 것이나 한국에서의 품앗이 등을 서구의 변제와 비교하는 것 자체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상호부조란 단순히 수치와 양만 가지고 비교되지 않는 것이다. 그 뒤에 숨은 동양인만의 ‘정 情’이란 부분을 작가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193P 내용관련) 이러한 이해, 공감의 부족 때문일까? 번역 또한 부실한 것도 사실이다. 설명을 위해 애 쓰지만 원문자체가 그렇다면 아무리 번역을 잘 한다해도 분명 한계는 있을 것이다.


형식 상의 문제도 눈에 띈다. 이 책은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 안에는 소제목으로 구분된 소단락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하나의 장을 읽기 시작하면 그 장이 마무리 될 때까지 계속 진행해야만 한다. 중간 중간 쉴 공간이 없는 것이다. 숨이 찰 때가 많았다. 책을 읽으며 아쉬움이 많았다.


사소한 일에 과장된 반응을 보이거나 쉽게 상처받는 현상은 미국에서는 폭력배의 행동이나 신경쇠약증 환자의 병력 기록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것은 미덕이다.


또한 위의 문장처럼 객관적이지 못한 작가의 태도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책을 쓰며 일본에 대한 감정이 있었던 듯 싶다. 아니면 책의 특성상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는 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은 동양인에 대한 그녀의 좋지 못한 감정을 살짝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맘 편하진 않았다.



독이 있는 감정?


이제까지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사람으로부터 단지 담배 한 개비를 얻어 피워도 일본인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경우 고마움을 표현하는 정중한 화법은 “아아! 기노도쿠데쓰네 氣の毒ですね”다. 이는 곧 ‘독毒 이 있는 감정이군요’라는 의미다.(144P)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 일본인 고문님이 한분 계시다. 그 분은 재일동포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관계로 국적은 엄밀한 일본인이다. 우연한 일로 인하여 그 분과 친해지게 되었다. 한국말도 잘 하시기 때문에 대화에 어려움은 없었다. 고문님은 대화를 같이 나눌 대화상대가 필요했었고, 나는 고문님과 대화하며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으셨지만 순수하셨고, 늘 친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고문님은 회사내 상근은 아니셨고 일본에 사시면서 일이 있을 때만 한국에 1주일에서 2주일 정도씩 머무르곤 하셨다.


나는 고문님의 친절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 내가 좋아하던 노래들을 CD에 담아 선물로 드렸다. 고문님은 굉장히 당황해 하셨다. 표정에서 알 듯 모를 듯 편치 않은 감정을 보이셨다. 나는 당시 그것을 제대로 몰랐다. 그저 나이 어린 사람이, 직급 낮은 사람이 즉, 아랫 사람이 주는 선물이기 때문에 당황하시나 생각한 정도였다. 그리고 1, 2주 후 고문님이 일본을 갔다가 다시 오셨다.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봉투 꾸러미를 안기신다. 뭔가 보았더니 이것저것 꽤나 다양하다. 아무 소리하지 말고 아내에게 가져다 주란다. 사양을 하려 했지만 하도 강제로 안기는 바람에 집으로 가져 오고 말았다. 꽤나 과분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내가 선물을 드리면 고문님은 꼭 그에 상응하는 답을 가져다 주셨다. 난 단순히 고문님도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후 고문님의 감정이 바로 ‘氣の毒です’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이 있는 감정, 상대는 기쁜 마음에 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받는 내게는 ‘독’으로 느껴진다는 것. 이 글을 읽는 순간 괜히 고문님께 미안해졌다. 아랫 사람에게 받는 선물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난 단순히 한국식으로 생각했을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밀어 붙이기로 했다. 고문님도 엄연히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한국식 문화를 받아 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내가 가끔 선물을 드려도 별로 불편해 하지 않으신다.


“에이~ 뭘 이런걸 또 줘? 안 줘도 되는데......”


ㅋㅋ. 거의 한국인이나 진배없다. 이제는 한국사람이라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낀 나라 한국


저자는 이 책을 쓰며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중국과 태국, 필리핀, 미얀마 등에 대해서만 인용할 뿐(한군데인가 ‘조선’이란 말을 쓴 것은 있다), 이 책에서 대한민국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과연 일본이란 나라가 기무의 나라이자 기리의 나라이며 인정의 나라 그리고 수치의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결론이라고 본다면 과연 대한민국은 어떠한 나라일까?


책을 읽으며 먼저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한마디로 낀 나라이다. 중국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고 그 영향을 다시 일본으로 전달해 준 역할을 한 나라다. 백제가 일본의 조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중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달하는데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조선은 일본을 왜구라고 부를 정도로 천대했고 멸시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의도 모르는 오랑캐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낀 나라 아닌가?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려하고 있는 중국, 이미 세계 경제대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그 가운데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한국.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러한 메우기 힘든 큰 간격이 벌어진걸까?


중국은 예로부터 전세계 문명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전설적인 국가다. 땅의 크기에서부터 사람의 숫자 그리고 각종 자원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어 문명을 일으키기에 적합한 나라였고, 그에 따라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힘을 이어오고 있다. 일본은 책에서 언급한 대로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일본식으로 소화하여 자신들을 열강의 하나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은 무엇을 한 것일까?


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체성에 있다고 판단된다. 한국의 문화는 ‘체면’의 문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자신을 돌아보고 키우고 교육시키고 성장시키지 않은 채 그저 포장만 잘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체면’의 문화. 결국은 ‘체면’이란 ‘~한 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실속도 없이 포장만 남는다. 평소에는 별다는 문제가 없지만 결국 급할 땐 ‘뻥!’하고 터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체면’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중국에서 우리나라가 받아들인 학문은 ‘유학’이었다. ‘유교’ 즉, 공자의 사상이었다. 이 유학은 사실 매우 어려운 학문이다. 배우고 또 익히고, 수련하고, 수양하지 않으면 제대로 깨닫기 어려운 학문이다. 우리 양반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깨우친 사람은 몇 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양반둘은 유학을 알아야만 했고, 그렇지 못하다면 아는 체를 해야 했을 것이다. 몰라도 알고, 알아도 아는 것, 그것이 조선시대 유학의 실태 아니였을까?


결국 결론은 하나다. 우리는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상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활용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현재 벌어진 중국, 일본과의 크나큰 차이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솔직하지 못한 채 아는 척, 잘난 척 하는 ‘체면’의 문화가 현재의 우리 위치를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머리의 역할을 해야할 사람들이 이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암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대한민국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차근차근 나아가야 할 것이다. 주체성을 회복하고 솔직해져야 하며,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해야만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의 민족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코리아니티’로 재창조하여 성장의 초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낀 나라 한국’에서 진정한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는 길이 될 것이다. (마무리가 너무 거창해졌다... 쩝....)



IP *.122.143.15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