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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4일 17시 55분 등록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소명출판/2001.08



1. 책에 밑은 그은 부분들 (인용)

책머리에

[6]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과잉이 원인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천 개의 손을 내 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인가 구걸하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 당신은 지금 “어떤 사막도 옥토로 바꿀 수 있을 만큼” 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메말라 있는가?


서장


[17] 천 개의 눈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Wille zur Optik) 혹은 시각체제-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 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18] 천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삼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19] 천 개의 젖가슴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 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19] 천 개의 주사위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 우리에겐 매 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 겨우 천 번? 우리는 벌써 천 한 번째 주사위를 주시하고 있다. 여섯 개의 면밖에 없다고? 우리는 동전의 앞뒤면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서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


[20] 천 개의 화살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


[20] 천 개의 가면

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구요? 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시오.


[21] 천 개의 이야기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법 - 나는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 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 넘나드는 법-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법-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 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제1부


제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한 철학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25] “운명애(Amor fati),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운명애(Amor fati), 이것이 나의 가장 내면적인 본성이다.”


[25]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26]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33]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이 아닌가?


[34] 그것이 인간들의 세계임이 드러나자 그는 서글프게 말한다. “모든 것이 작아졌구나. 도처에서 나는 더 낮아진 무들을 본다. 나 같은 사람은 아직 저 문을 지나다닐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이어진다. “내가 (문을 지나다니기 위해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곳, 소인들 앞에서 내가 더 이상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나의 고향으로 나는 언제 돌아갈 것인가?” 그는 한숨을 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35] 잘못은 신의 몫이다. 내가 당시 그녀에게 미쳐 있었던 이유는 에로스의 화살에 맞았기 때문이야! 그가 그토록 강해진 이유는 여신 아테네가 돕고 있기 때문이야! 그들은 자신의 긍지를 위해 신들을 이용한다. 신은 그렇게 활용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35] 그리스 신화 속에서 죄가 들끓는 곳은 ‘이 세계’가 아니라 신들의 세계다.


[37]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삶’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려 ‘삶으로부터 이탈’,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다음으로 나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위대한 영웅일지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37] 과잉에서 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38]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9] 그리스의 비극은 삶의 비극성을 극복하려는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을 드러낸다. 삶의 비극성은 삶에서 오지 않고 죽음에서 온다. 삶의 비극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죽음이 주는 공포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와 관계한다.


[40]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41]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때문이었다.


[45] 차라투스트라는 동굴 속에서 깨달은 풍요로운 지혜들을 나누기 위해 동굴 바깥으로 나간다. 플라톤의 동굴이 무지의 장소이고 철학자의 눈을 멀게 한 장소라면,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깨달음의 장소이고, 치료와 회복의 장소이며, 초인으로의 변신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45] “우리가 철학을 하는 체 하면 안도며, 실제로 철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쾌락』


[47]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선 극장에 있어선 안된다. 극장에서 사람은 집단으로만 정직하다. ... 극장엘 갈 때 사람들은 그 자신들을 집데 놓고 간다. 스스로의 발언권과 선택권을 방기하다. 자기의 취미도 버린다.... 가장 개별적인 양심도 최대다수로 평등화하는 마력에 굴복한다.”


[48] 극장이 관객들을 바보로 만든다면 법정은 그들을 죄수로 만든다. 물론 법원과 극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법정이야말로 하나의 극장이다. 세련된 해석의 체계를 따라서 배우들이 움직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법정을 극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다. 세련된 해석의 체계는 오로지 최종적인 심판을 준비하는 예비적 과정일 뿐이다.

.....

기독교 사제들은 이 혹성의 역사에 있어 본 적이 없던 가장 큰 재판정을 만들어냈다. 그리스도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보복과 심판의 법정이 열린 것이다. 기쁜 소식이라는 ‘복음’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들인 보복과 징벌, 심판대와 같은 장치들이 등장한다. 메시아가 온다는 기대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적을 심판하러 온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으로 바뀌었다. 신은 왜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죄 지은 자들을 위해서 죄 없는 자가 희생을 당한 것이다. 이로써 복음은 끝장나 버렸다.


[50] “인간의 시대의 목적을 향해 훈련받아야 한다.” 어떤 사상이 자신에 부합하는 삶을 생산해내는 과정은 폭력과 훈련을 동반하고 있다. 불행이도 지금까지의 철학은 이 과정에 동원되어 왔다.


[51] 철학이 하나의 통지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 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이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1]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 니체


[52]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아픈 광인은 병원에 갇힌 환자지만 건강한 광인은 자유정신을 지닌 전사로 등장한다.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길들여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가 가지고 잇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디.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unzeit)‘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 와우


[54]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는 갖는다.” 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의 보고이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려고도, 기념하려고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57]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너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러면 너는 친구를 가질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구했던 것은 진대적 진리가 아니라 친구다 “창조하려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도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청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59]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59]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 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63]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 위험하다. 원칙주의자인 내게는 지켜야 하는 룰이 셋팅되는 것과 함께 그것을 따르는 것이 위험하다. 타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지키게 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69] “모든 도덕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 어느 만큼의 억압이다.”

[71] 불화조차도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도덕적 감각은 얼마나 다양한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휴식이나 안정, 충족이나 화합조차도 특정한 형태의 행복관이다. 니체는 이것을 “진정제적 사고”라고 부른다.


[71] 그리스인들은 시기심 자체도 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감정이 본래 선하거나 악하다는 생각은 이들에겐 낯설었던 것이다. 이 두 여신에 대한 설명은 다름과 같다. “한 여신은 끔찍한 전쟁과 불화를 요구한다. 어떤 사멸적 존재도 이 여신을 당해낼 수 없다. 이 여신은 연장자로서 어두운 밤을 낳았다. 그러나 최고의 지배자 제우스는 다른 여신을 대지의 뿌리와 인간들의 편에, 훨씬 선한 신으로 세워 놓았다. 이 여신은 미숙한 남자를 노동으로 내몬다. 재산이 없는 한 남자는 부유한 다른 남자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는 재빨리 같은 방식으로 씨를 뿌린다. 이웃은 번영을 추구하는 이웃과 경쟁한다. 이 불화의 여신은 인간들에게 선하다. 도공은 도공을 시기하고, 목공은 목공을, 거지는 거지를, 가수는 가수를 시기한다.”

[76] ‘좋음’이라는 규정에는 귀족적 인간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가 들어 잇다. 이들은 ‘좋음’을 우월한 자, 명령하는 자, 지배하는 자인 자신들에게 부여했다.


[76] ‘우리’와 ‘그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구별은 “‘우리’를 좋은 인간, 예의 바른, 고상한, 잘 생긴,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그들’을 악당, 겁쟁이, 쓸모없는 인간들”로 나누는 것이다.


[77]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


[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0"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78] 신이 볼 때 인간들의 차이가 커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차이는 보편적 가치 앞에서, 신 앞에서 부정된다. 신 앞에 영혼은 평등하며, 법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

* 신과 법은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82] 『차라투스트라』에서 신의 살해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보는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깊이와 밑바닥을, 인간의 숨겨진 모든 치욕과 추악함을 보고 보았다. .... 그는 나의 가장 추악한 구석 속으로 숨어들어 왔다. 호기심이 지나치게 뻔뻔스럽고 지나치게 동정적인 이 신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 인간은 그러한 목격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견딜 없었다.“ 신은 어디서나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인간은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결국 그것이 신의 죽음의 원인이 된다.

* 음. 이 대목에는 나와 겹치는 부분이 많군.


[84] 반동적 힘이 행사되는 양상을 보자. 용수철을 누를 때 알 수 있듯이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행사된 이후에 그 힘을 상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서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에서 그 능력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빼앗는다.”


[84]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당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89]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굳이 ‘악’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내 신체에 해로운 존재-나쁜 음식이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사람 따위-와의 마주침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96]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107]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 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Du sollst)”는 것은 다양한 시선에 특정한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계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7]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모든 새로운 것들, 모든 차이적 존재들을 하나의 틀에 끼워 넣는 동일화의 의지. 그 동일화의 의지는 “모든 사건의 근본적 위조”가 행해지고, 시선에 대한 광학적 훈련이 수행된 뒤에 목표를 달성한다.


[107]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7]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108]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대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109]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을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하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110]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이다.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성의 욕구이며,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정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해서는 안된다.”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1]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12]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주장과 진리란 없다는 주장은 정반대의 것이지만, 사실 숫자 1과 0은 매우 큰 숫자 N에 비하면 아주 가까운 숫자들이다. 그것은 모두 0에 가깝다.


[114]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115] 자신의 작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鷄姦)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생아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다. 자식을 본 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임을 부인한다.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 그런데 들뢰즈는 이 계간의 작업이 니체에 대해서는 다소 엉뚱하게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니체를 계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 뒤에 올라타고 있던 것이 바로 니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들뢰즈를 상대로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


[117] “니체의 스타일은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니체에게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119]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 주의자다.


[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22]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3]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123] 정치란 ‘행위(프락시스 parxis)’의 영역인데, 행위란 항상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 ‘주도하는 것’이며, 타자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124] ‘허무주의의 극복’이 철학이나 도덕의 과제인 것 이상으로 정치적 과제일 수 있는 이유는 ‘허무주의’가 바로 ‘정치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역의 위축’, ‘정치의 쇠퇴’야 말로 근대사회를 표현해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126]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 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127]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Zuchtung)’가 개입한다.


[127]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142] 체제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 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는 ‘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하나의 도덕이 자연스러운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적인(prehistorical)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한 뿐이다.


[143] “나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하고, 그것을 기억에다 새겼다.”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144]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니체는 학교보다 군대가 열등한 수단이라고 보았으며, 학교의 도움으로 정부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148]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152] 니체의 경고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초월적 기구에 양도하면 양도할수록, 가장 평균적인 자들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대 다수자들의 지배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권리는 양도하는 만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니체가 법과 관습, 문화에 대한 적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자연학 + 윤리학)


[154] 세계가 ‘무’에서 시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또한 ‘무’로 돌아갈 수도 없다. 세계(우주)에는 구성 요소들이 빠져나갈 어떤 외부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에 외부가 없다는 사고방식은 세계를 창조할 창조주가 서 있을 공간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59]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차제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하나의 힘이 정의되기 위해서도 복수의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힘은 차이와 거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159]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159] “어떤 양의 힘이란 사실 그것과 같은 양의 충동, 의지,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충동 작용, 의지 작용, 활동 작용에 불과하다.”


[161]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힘은 ‘정지’나 ‘불변’과 항쟁하고 있으며, 그 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유동적인 것이다.”


[167] 들뢰즈는 ‘능동적인 것(active)’과 ‘반동적인 것(reactive)’이야 말로 힘의 질적인 구분이라고 말한다.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167] 반동적인 힘의 작동방식에 들어난 의지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능동적인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능동적 힘을 무력화 시키는 것, 그것이 반동적 힘의 내적의지이다.


[168] 능동적인 힘 역시 반동적인 힘의 질을 변화시킨다. 능동은 “반동을 뒤로 밀거나” 그것에 “무관심한 듯” 자기 능력의 한계까지 나아간다. 능동적인 힘은 “정면에서 공격한다.” 이때의 능동적인 힘 역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더 많은 것들을 생성시키는 것, 더 많은 거리들을 생산하는 것, 하나의 생성을 다음이 또 다른 생성의 디딤돌로 삼는 것. 그것은 반동적인 힘의 내면에 있는 의지를 바꾼다.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 능력을 박탈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많은 힘들(수단들)이 능력의 확장을 위해 다시 사용된다. 능동적 힘에 의해 수많은 부정적 수단들이 긍정적 수단으로 변한다.


[173]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 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173]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그 자체는 권력의지이다.”


[175] 우리는 앞에서 내면의지가 ‘부정의 의도’를 가졌는가, ‘강화의 의도’를 가졌는가에 따라 힘이 전혀 다른 질을 획득한다고 했다. 힘이 어떤 권력의지 아래서 다루어지느냐가 그 질을 결정한다. 힘들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 권력의지의 차이에서 온다는 것은 힘들만큼이나 권력의지도 질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가 힘의 질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 아멘.


[176]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나는 “약화시키는 것, 초췌하게 만드는 것 모두에 대해 아니오(das Nein)를 가르친다. 나는 강화하는 것, 힘을 저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 모두에 대해 에(das Ja)를 가르친다.”


[178]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 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 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같은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 느끼는 육체가 뛰어나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능력으로 지배한다.


[179]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정방식이다.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180]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


[180-181]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한다. 전자에게는 반복이 기쁨일 테지만 후자에게는 큰 고통일 것이다. 전자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에 대해 “한 번 더!”라고 말하겠지만, 후자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할 것이다.


[182]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 죽지 않는 것은 새로 태어나지 못한다.


[186]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다수이다.” 오 위대한 어린아이 제우스!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 사상은

만물은 흐르며 아무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강의 한 지점에서 좀전에 내가 들어갔던 물은 이미 하류로 흘러갔기 때문에 지금의 물이 아니며, 그 동안에도 나 역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세의 철학자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다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만물도 <영원히 흐르고 있다>는 것. 이 세상의 본질적인 운동은 바로 변화요 생성이란 뜻이다. 우리가 개념이나 체계를 통해서 무언가를 포착하려고 해도 그 순간에 이미 세상은 변해 있다. 예를 들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제의 감정과 오늘의 감정이 같지 않고, 어제와 다르게 몸이 성장하거나 쇠퇴해간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어떠한가. 정치체제, 권력구조, 과학의 패러다임 등 일체가 변화하고 있다. 이런 생성하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도 표현했다. 불은 바로 끝없는 움직임을 말한다.


이 세계란, 정도에 따라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었으며,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 헤라클레이토스


[187]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은 영원히 흐르지 않는다. 이데아의 세계처럼 영원 불멸하는 곳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어떤 생성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사실상 사물들이 벌이는 생성에 다름 아니다.

* 성경에 [창세기 1:3-1:5]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1-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생기면서 하루가 있는 것이다.


[189] 학자들은 주사위를 600번 정도 던지면 1의 눈금이 나오는 일이 100번 정도 반복될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도박사들은 1의 눈금이 여러 번 반복되었어도 동일한 상황은 단 한번도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도박사들은 동전의 두 면 만으로도 충분하도 말한다. 영원회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도박사들이다.


[191]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니체의 저서 속에 등장하는 영원회귀가 항상 의지를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원회귀를 시험하는 악마들은 ‘반복이란 새로울 것도 없는 피곤한 일인데 계속할 것인지, 그것을 원하는지’ 묻는다.


[191]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트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번 더!”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복하기를 원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권력의지이다.” 존재하는 것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will) 것이다.


[192]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의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193] 어느 밤 한 악마가 살그머니 다가와 속삭인다. “네가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다시 한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다시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무엇하나 새로운 것이 없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너의 생애의 일일이 얼키고 힘든 크고 작은 일이 다시금 되풀이 된다. 모조리 그대로의 순서로 돌아온다.” 네가 살아온 삶이 아무런 새로움도 없이 그대로 반복된다.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 ”는 질문이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 위에 가로 놓일 것이다.”


[196]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이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런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196]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입구에서 하나의 기나길 길은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순간들을 통해 본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197]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축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과거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미래를, 그리고 미래의 건축물로 변형된 과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 이 소절을 상기하면서 ‘윤’의 꿈그림을 구상한다.


[199] 영원회귀를 이해한 뒤의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히 긍정적으로 돌변했다. “나는 어느 심연으로도 축복하는 예(Ja)라는 말을 가져갈 것이다. 나는 축복하는 자, 예라고 말하는 자가 되었고, 그러기위해서 오랫동안 씨름했고, 씨름꾼이 되었다.” 중력의 영? 그것은 전혀 무겁지 않다. 두더지와 난쟁이? 그것들은 놀이감이다.


[199] 영원회귀가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의 이름이라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럼 변하게 하면 된다! 세상이 영원회귀하지 않는다고? 그럼 영원회귀하게 하면 된다!


[200]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praxis)이다.


[201]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 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2] 긍정을 ‘고통을 인내하는 정신’으로 착각하는 낙타의 긍정을 들 수 있다. 낙타는 “아니오”를 모르기 때문에 “예”라고만 답한다. 주인이 어떤 짐을 싣더라도 낙타는 “예”라고 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사막이 되고 만다.


[203] ‘보다 높은 인간’은 모든 가치의 파괴가 일어나는 지점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가치 판단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 ‘최후의 인간’도 새로 태어나기 원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새로운 자기를 만들려는 자는 기존의 자기를 버려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익지 못한 과일들이 그렇듯이 살기를 원해서” 줄기에 강하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긍정이 단순히 “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니체는 “부정과 파괴야말로 긍정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디오니소스의 사명에 대한 전제 조건은 망치의 단단함, 파괴에서 느끼는 기쁨이다.”


[204] 새로운 사원을 지으려는 자는 기존의 사원을 부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표를 써넣으려는 자는 낡은 가치표를 지워야 한다.


[204]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의 긍정이다. 두 번째의 긍정을 통해서만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이 되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하나의 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다음의 긍정을 기다린다.


[208] 우연이란 차이기 모든 것 속에 분포된 상황이다. 필연적인 법칙으로부터 일탈하는 흐름이 우발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 이건 K를 그릴 때 쓰고 싶은 소재다.


[209]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 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영원회귀를 멈추지 않는가? 그것은 즐겁기 때문이다.

* 호모 루덴스, 어린이


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215] 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인간이 제 자신의 척도에 자연을 끼워 맞추고, 제 스스로 생각하는 자연과 다른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자연과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215]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und)’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응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 났기 때문이다.


[217] 니체는 인간의 유일하게 위대한 점은 곧 몰락할 존재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하나의 과도이며 몰락이라는 점”이다.


[219]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각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222]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니체는 신이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신은 시체로도 살 수 있다! 신앙의 대상이 죽으면 신앙이 소멸할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왜냐하면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222] 천국이란 믿음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223] 루터는 “신 그 자신이 현명한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니체는 그가 정작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신은 우매한 인간 없이는 더더욱 존재할 수 없다”는 것.


[225] 마이스터 에카르트(Maister Eckhart)처럼. "나는 나로부터 신을 제거해 줄 것을 신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스탕달처럼. “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25] 모든 옛 신들이 황혼 속에서 슬픈 죽음을 맞이했던 것은 아니다. 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했던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 .... 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 있든 죽어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


[228] 신은 연민 때문에 숨을 거두었다. 추악한 인간은 지며보는 자에게 복수를 하는 자이다. 항상 어느 곳에서나 그를 지켜보는 눈으로서의 신, 그가 추악한 인간의 복수를 받은 것이다. 추악한 인간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 즉 인간의 숨겨진 치욕과 추악함까지 본 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추악함을 본 목격자를 그는 살려둘 수 없었고, 가장 추악함을 내보임으로써 그 목격자에게 복수를 했던 것이다.


[231]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장한다. 내가 원했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죽음을.”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랄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233]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드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 차라투스트라의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4]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 시켰는가


[237] 오해와 착각이란 다른 이름을 쓰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신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이름을 쓰는 데서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237] 나와 내 작품은 별개의 문제다. .....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나를 나 자신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238] 니체는 “우산을 잃어버리듯” 쉽게 이름을 잃어버렸다.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져 버렸다.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239]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46]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은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프리드리히 니체”


[253]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도니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인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Nitm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 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제2부

베버-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258] 근대는 제 발로 ‘설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 시대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항상 새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67] 노동수단과 노동자의 관계에서의 생산자는 노동자이지만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서의 생산자는 기계다.


[268] 처음엔 시간표는 무엇디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273]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고 그들의 신체에 잔인한 기억이 시어지면 훈육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잔인한 기억술로 심어진 행동방식이 반복되어 습속의 도덕으로 자리하면 이른바 ‘능동적 자제’라는 게 생겨난다. 처음엔 공포로 시작된 검열이 이제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검열로 대체된다.


[274] 훈육의 최고 목적은 능동적 자제다.


[285] 신체의 능력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도 받거나 내면화시킴으로써 성장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신체는 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다.


[286] ‘내적인 거리’를 ‘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 가치 생산자들에게 있어 거리는 다양화된다. 이전의 가치들과 새로 생산된 가치들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하며, 내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한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294] 답은 대게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은 질문들과 동떨어진 채 답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그 답의 형식과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302] 각 개인은 직업단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그 계층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그에 적합한 삶의 양식을 창출한다. 각 개인이 이들 공동체 속에 속하지 않고 고립된 상태에서 이기적 측면에만 집착한다면 그의 생계나 향유는 균형을 잃을 것이다. 오직 공동체적인 것만이 시민사회에 실존하고 그에 합당한 삶의 양식을 생겨나게 한다.


2. 내가 저자라면


1) 고병권, 차라투스트라, A man(보편적인 인간)

이들은 모두 니체를 닮았을까? 누가 니체이고, 누가 저자인가?


각 절의 뒷부분을 읽을 때는 소포클레스의 희곡을 읽는 듯 하다. 코러스와 주요등장인물의 독백이 뒤섞인 그리스의 비극처럼, 책의 어느 부분에서는 코러스처럼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듯 강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고뇌하는 주인공처럼 자신을 드러낸다.  연극에서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캐릭터대로의 어조를 가지고 있듯이 저자의 어조는 무엇을 기술하는 가에 따라 달라진다.  저자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통해서 설명할 때, 읽는 이로 하여금 ‘차라투스트라가 선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차라투스트라’가 된 듯 착각을 일으킨다. 또한 몇 개의 문장은 뒤쪽 술어를 빼거나 조사를 빼면서 매우 강력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고대 비극의 ‘코러스’와 같다.  이러한 어조는 이 책을 매우 풍성하게 만든다. ‘철학책들은 딱딱하다’라는 세계를 무시해 버린다.


 ‘영원회귀’의 장에서 그것의 주요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삶의 고통이 다시 반복되어도 좋으냐?’는 악마의 물음에 답을 하는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하는 데, 그는 병에 걸리고 회복한다. 차라투스트라가 겪는 과정은 하나의 이야기로, 철학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것보다 니체의 영원회귀의 문제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등장시켜서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과 같이 저자도 ‘차라투스트라’를 이 장에서 적절히 등장시킨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의 등장 때마다 희곡의 주인공이 무대위에서 대사를 하는 듯 하다. 차라투스트라가 선 무대는 니체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저자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헛갈릴 만큼 저자는 니체의 사생아이다.


이 책은 저자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인지, 니체의 철학을 설명하려 하는 것인지 헛갈릴 만큼 저자와 니체는 서로 겹쳐있다. ‘니체, 천개의 강’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물론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사이에 저자는 교묘하게 숨어있다. 자신보다 앞선 철학자들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의 철학을 흡수하여 자신의 양분으로 삼아 자신의 뼈대를 이루는 것을 만들고, 살을 만들어 자신을 만들어낸다. 후대에 선 사람들은 -뉴튼이 자신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크다라고 말한 것처럼- 앞선 사람들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을 키워간다. 저자는 니체의 사람, ‘차라투스트라’를 끌어들이고, 니체를 녹여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설명한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니체는 ‘니체의 시대에 살았던, 니체의 생각을 가졌던’ 그 니체가 아니다. 저자에게서 니체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니체는 철학자인 저자를 낳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다시 니체를 낳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이 점은 니체의 철학을 잘 서명한다. 니체에 대한 설명으로 ‘니체는 철학자들을 계간하여 사생아를 낳았다. 어느 철학자가 그를 계간하려 하였으니 어느새 니체는 그의 뒤에 있었다.’라고. 이 책은 그 점을 그대로 반영한 부분에서도 니체이고 전체에서도 니체이다.


2) 왜 ‘니체, 천개의 강’이란 제목을 붙였을까?

이 책의 키워드는 천개의 강, 천개의 바다, 아모르 파티, 권력의지, 약한자와 강한자, 선한자와 악한자, 영원회귀, 죽음 등이다. 이중에서 무엇에 중점을 두고 책 내용을 기술하는가에 따라 책 제목으로 쓰일 키워드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장들은 하나의 철학을 담고 있을 텐데, 이 중에서도 각 장들을 모두 포괄하여 전체로 하나로 묶어줄 키워드로 저자는 ‘천개의 강’을 선택했다. ‘천개의 강’의 ‘천개의’의 의미는 생명과 생성의 의미이다. 삶이 있는 것은 죽음이 있고, 자신 안에 죽음을 포함한 것들만이 ‘권력의지’에 의해 영원회귀를 할 수 있다. 죽은 것은 변하지 않고, 다른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있다와 없다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0과 1’의 세계이다. ‘천개의 강’은 바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니체, 천개의 강’이란 제목은 그래서 삶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니체의 철학을 담은 제목이다.


3) 내가 니체에 관한 책을 쓴다면 어떤 방식으로 구성할까?

이 책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목차를 보면서도 알 수 없는 구성이다. 왜 이런 구성을 했는지에 대해서 답을 할 수가 없다. 물론 저자는 니체가 언급했던, 니체가 중요하게 여겼던 개념들을 다루었을 것이고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것은 책의 내용이고, 왜 이런 식으로 큰 뼈대를 잡았는지에 대한 답은 아니다. 그 이야기의 큰 줄기는 무엇이었을까? 저자와 니체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나로서는 이 부분을 장님이 코끼리는 만지는 행위 같은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이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천개의 강’ ‘천개의 화살’ ‘천개의 눈’ ‘천개의 젖가슴’ 등은 이 책을 부드럽게 하는 부분이다. 삶을 찬양하는 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게하는 이 앞부분은 니체를 설명하기보다는 니체를 느끼게 해 준다. 어떤 철학자의 철학을 자신의 언어로 기술하는 과정에서 쓸 수 있는 방법으로는 매우 독특한 도입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각각의 아름다운 싯구같은 이 작은 절 속에서도 몇 개가 문장이 니체의 글 중에서 인용했을을 알리는 문구가 표시되어 있다. 참 독특한 구성이다.


앞부분을 제외한다면 다른 부분은 여타의 연구논문과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저자가 된다면 니체가 철학을 정리해 가는 과정을 하나의 큰 여정으로 만들어서 그의 철학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전체의 큰 틀로 쓰고 싶다. 니체가 발표한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과정에서 발표했을 니체의 철학의 단편들(즉 별개의 개념들)이 하나의 징검다리 돌이 되도록 배치한다. 그 징검다리 돌은 니체가 하나씩 써낸 글(칼럼, 논문)들의 순서로 배치된다. 그 순서가 니체가 성숙하고 확장시킨 방향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인생이 점진되는 과정에서 그의 철학도 틀을 갖추게 되고 몇 가지의 것은 특화되고 심화될 것이고, 앞서 주장한 것들이 나중의 것과 연결될 것이다. 이 방법으로 구성하게되면 니체의 행적을 따라가는 구성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구성에는 니체가 그 논문을 발표할 당시에 영향을 받았을 것들이 더 들어갈 수도 있다. 그 요소로는 당시의 철학, 니체에 빠져든 바그너의 음악, 니체가 공부한 의학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음악과 철학, 건강과 철학을 어떻게 연결시켰나를 니체가 되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으로는 니체가 사용한 방법으로 ‘차라투스트라’라는 어떤 인물을 등장시켜서 그가 보는 세계, 그가 겪는 세계 속에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에 담았듯이 ‘니체’씨를 별도로 구성한 세상에 여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여행도 니체를 잘 표현하는 방법이 될 듯 하다. 니체는 ‘천개의 이야기’로 만들어져도 여전히 니체이면서 니체가 아닌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성은 매우 흥미로운 구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설명을 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끌어들였다(마음에 드는 구절들)

4)-1 (p.94) 장사꾼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그와 거래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까? 그리스인들에게 헤르메스는 상업과 부귀의 신이기고 했다. ‘어떤 그럴듯한 변명을 갖다 붙인다고 해도 재산이란 결국 도둑질의 결과’라는 푸르동의 말처럼, 상업과 부귀는 거짓말과 도둑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리스인들도 이해했던 걸까?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이 말이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그와 거래를 해야 한다. 해석학자들은  어떤 거래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은 헤르메스의 맹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들에게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의 방법은 존재하는가?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통해서 신의 뜻을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헤르메스’의 또 다른 특성인..... 상인의 거짓말과 도둑들을 옹호한다는 것을 끌어왔다. 상인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거래하는 것, 해석법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해석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그것을 묘하게 대비시켜서 설명한다.


4)-2

3장의 2절은 너무 어렵다. 베티, 가다머, 하버마스, 헤겔이 나오는 대목은 어렵다. 차이, 해석학의 구분이 내게는 없다.


4)-3

p.108. 논리학처럼 동등화가 선행된다면 그 조건에서 논리학이 요구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범주가 조건으로 돌변할 때 진리가 나온다. 니체는 대표적인 예로 ‘유클리드 공간’을 든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사실이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유클리드적 공간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리만 공간에서는 그러한 공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항변할 수 없다는 식의 주관적 강요’라고 할 수 있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 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으로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위 구절은 ‘스핑크스의 눈’이란 절의 마지막 구절이다.

수학을 끌어다가 논리학을 설명한다. 유클리드 공간만을 인정하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른 공간(리만공간)에서는 다른 진리가 적용된다는 식으로 도약하고, 그 이야기를 빗대어 논리학이나 진리가 갖는 폐쇄성을 이야기한다. 하나의 관점은 하나의 진리는 내포하고, ‘다른 관점에서는 다른 진리가 성립한다.’ 


4)-4 p.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의 마지막 절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이 부분의 마지막 부분은 마지막 문장에 의해서 이해을 하지 못하겠다. 다양한 해석, 헤르메스, 차이라는 것을 이해하며 저자를 쫒아오다가 ‘디오니소스의 웃음’에서 막혀버린다. ‘헤르메스’와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연결시키는 지 못하겠다. 1,2,3장 안에서 둘을 연결시켜서 설명한 것이 나왔던가? 아니면 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비약이 있었던가?

4)-5 영원회귀를 설명하는 제6장에서는.....

영원회귀를 설명하는 제6장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말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니체도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가상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이책에 빠져있는 순간 나는 저자가 만들어 놓은 니체의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이된다. 잠시 차라투스트라라고 불리우는 니체가 만든 프랑켄슈타인(인조인간)의 삶을 살펴보자.


4)-6

p. 90-91 니체는 『에티카(윤리학)』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 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귀족과 노예, 거인과 난쟁이, 덕(윤리)와 도덕, 건강과 질병,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가치 평가한다.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뭔가를 인식할 때, A를 설명할 때, A가 아닌 것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이 아닌’ 이란 수식어가 붙은 설명이 많이 쓰였을 것이다. 지금 이 대목에서도 서로 대비되어서 우리가 서로 반대로 인식하는 것을 나란히 언급함으로써 철학적인 뭔가를 인식하게 한다. 이 절은 가치평가에 대한 설명 절이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거인국과 소인국이 나오는 대목을 읽고 싶어졌다. 인간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5) 2부는 이 책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느껴진다.

2부는 서술은 책의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다.  내용 또한 베버, 정치쪽이어서 이 책에서 2부를 덜어냈으면 한다.


IP *.247.8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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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12.04 19:45:32 *.244.220.253

짝짝짝!!! 분석력 좋고~~~ ^^   그런데 설명하기는 뭐한데......뭔가 좀 아쉬운데.......암튼 내 서평보다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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