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조회 수 3153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12월 14일 22시 53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아르놀트 하우저는 예술사회학자로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예술사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하우저는 루카치, 만하임과 더불어 헝가리의 지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1892년 헝가리의 테메스바에서 태어났다. 독일에서 이주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하우저는 부다페스트, 베를린, 빈, 파리의 대학에서 문학사와 미술사를 전공했다. 하우저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부다페스트에서 활동한 젊은 지식인 클럽 ‘일요서클’에 참여하면서 루카치와 만하임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하우저에게 학문에 대해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일요서클’은 루카치, 만하임, 발라츠 등이 속해 있었으며 현대문학과 예술에 대하여 토의했다. 12명 이내의 소수인원으로 구성된 모임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그의 정신적 스승인 앙리 베르그송을 만난다.

하우저는 1919년 헝가리에 세워진 소비에트 정권에서 잠시 부다페스트대학의 교수로 일했으나 정권이 붕괴하면서 빈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 망명은 그의 일생동안 이어진 망명생활의 시작이기도 했다. 빈에서의 생활은 고달픈 삶이었다. 아무도 그를 고용해주지 않아서 그는 생계를 위해 영화사의 사환으로 일한다. 그 생활마저도 1938년 나치가 빈을 점령하면서 끝이 나고 하우저는 영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영국에서의 생활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여서 곤궁한 생활속에 희망마저 없는 망명자의 생활을 이어간다. 영화사 사환으로 일하던 하우저는 대영도서관에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하고 영국 리드대학에서 전임강사 직을 얻는다. 1950년대 말에는 교환교수로 미국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1977년 50여년이라는 기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헝가리로 돌아온 하우저는 이듬해인 1978년 부다페스트에서 눈을 감았다.

하우저의 명성을 높여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영국 망명시기에 저술되었다. 망명자인 하우저는 영화사에서 사환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일이 끝난 저녁시간과 주말에 영화미학과 예술사회학에 대한 저술을 했다. 어느 날 칼 만하임으로부터 그가 담당하고 있던 예술사회학 선집의 서문을 청탁받은 하우저는 관련 서적을 찾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마땅한 책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하게 된다. 그가 원고를 탈고한 뒤 출판을 하려 했으나 무명 학자의 저술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때 하우저의 학문적 입장과는 반대였던 영국 미술사가 허버트 리드가 출판 보증인이 되어 준 덕분에 명저가 출판될 수 있었다. 하우저는 그의 또 다른 저작인 ‘예술사의 철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 자신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저는 늦포도를 따는, 즉 첫서리가 내린 후 포도가 가을의 향내를 그윽하게 내뿜을 때 포도송이를 수확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최초의 주목할 만한 책을 쓴 것은 47세와 57세 사이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창조의 정점이 지나가 버린 연배입니다. 이것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이루어진 10년간입니다.”

1958년 ‘예술사의 철학’ 1965년 ‘매너리즘’ 1974년 ‘예술의 사회학’ 등의 책을 집필했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1.로코코와 새로운 예술의 태동

프랑스 대혁명에서 그 정치적 절정에 이르고 낭만주의에서 그 예술적 목적지에 이르는 시민예술의 발전은 필리프 섭정시대(Philippe Regence, 1715년 루이 14세가 죽고 증손자앤 5살의 어린 루이 15세가 즉위하자 루이 14세의 조카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가 섭정으로 정국을 장악하여 1723년까지 계속하는데 이 기간을 가리킴)에 절대적 권위의 원리로서의 왕권이 붕괴되고, 예술과 문화의 중심으로서의 궁정이 와해되며, 절대주의의 권력추구와 권력에 대한 자의식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던 예술양식으로서의 바로크 고전주의가 해체되면서 시작한다.  [17]

토크빌이 이미 주목했던 바이지만,18세기 사회발전의 고유한 특징은 여러 상이한 신분과 계급을 가르는 경계선들이 아무리 강조되더라도 결국 문화적 평준화 과정은 멈춰질 수 없었고 사람들이 외면적으로는 서로 상대방과 구별되려고 안달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점점 더 닮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단지 두개의 커다란 집단, 즉 일반 민중과 그 민중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집단만 존재하게 된 사실이다. 두번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똑같은 생활습관, 똑같은 취미를 가졌으며 똑같은 언어로 말했다.  [21]

중앙집권화의 진행에 따라 세습귀족과 시민계급 사이의 좋은 관계는 대단히 손상을 입었는데도 세습귀족은 시민계급과 함께 왕실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과거에 이 두 계급은 흔히 자기들이 동일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해결해야 할 공동의 행정적인 문제들도 종종 있어서, 이것이 자연히 그 들을 서로 결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귀족이 시민계급이야말로 자기의 가장 위험한 경쟁자임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때부터 국왕은 늘 그들 사이에 끼여들어 중재를 하고 투정하는 귀족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왕은 겉으로는 두 집단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도 실은 그들에게 계속 양보를 해서 때로는 이편에, 때로는 저편에 호의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22]

그 이전의 어떤 아카데미 원장도 동의하지 않았을 앙뜨완느 끄와뻴(Antoine Coypel)의 말, 즉 그림도 인간만사와 마찬가지로 유행의 변화에 따라 변해간다는 말처럼 바야흐로 열리는 새 시대의 자유주의와 상대주의를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은 없다. 이러한 말 속에 표현된 예술관의 변화는 실제 작품창작에도 두루 적용되어, 예술은 이제 더욱 인간적이고 더욱 친밀하며 더욱 차분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반신(半神)과 초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을 위한, 즉 약하고 감각적이며 즐거움을 찾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위대함과 권력이 아닌 인생의 미와 우아함을 표현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켜 압도하는 대신 매력과 쾌감을 주려한다.  [27]

중세의 전원문학은 베르길리우스의 우화문학과 직접 연결된다. 사실 고대세계가 몰락하고 중세의 궁정 도시문화가 성립되기까지 수세기 동안 복가문학으로서 남아 있는 것은 근소할 뿐 인데, 그나마 현존하는 것은 진짜 창조가 아닌 단순한 학식의 산물이며 고대 시인,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모작이다. 단테의 목가시도 그러한 학식에 의한 모방이며, 최초의 근대적인 전원문학 작가라 할 보카치오에게서도 아직 과거의 전원우화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장르의 발전에 새로운 전환을 마련한 목가소설의 발흥과 동시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단편소설에도 목가적 주제가 등장하는데, 다만 이 경우에는 목가시 전원소설 전원극에서 이 주제와 결합되어 있는 낭만적 특징들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단편소설이 전형적인 시민계급의 문학이고 따라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을 갖는 데 비하여 전원문학은 궁정적 귀족적 장르이고 낭만주의로 기울어지기 쉽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현상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34]

17세기 프랑스 전원소설은 지친 시대의 읽을거리이다. 내란으로 피폐해진 이 사회는 사랑에 빠진 목동들의 아름답고 나긋나긋한 대화를 읽으면서 고단함을 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기가 회복되고 루이 14세의 정복전쟁이 이 사회에 새로운 야심을 불러일으키자 곧 가식적 소설에 대한 반동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가식성(preciosite)에 대한 브왈로나 몰리에르의 공격과 나란히 진행된다(당시 살롱에 출입하던 인사들은 지나치게 세련된 언동을 추구한 나머지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표현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들의 취미와 표현법을 프레씨오지떼preciosite라 함) 뒤르페의 전원소설은  아마딜스 풍 소설의 끊어진 전통을 잇는 장르인 라 깔프르네드(La Patprenede)와 스뀌데리 양(Mile M. de Scudery)의 영웅소설 및 연애소설로 대체된다.  [43]

소설은 17세기에만 해도 그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저급한, 어떤 점에서 아직 후진적인 문학형태를 대변했으나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주도적인 장르가 된다.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들이 이 장르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진보라고 할 만한 의미있는 발전이 이 분야에서 일어난다. 18세기는 심리학의 시대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소설의 시대인 셈이다. [45]

바로크는 왕실예술이었으나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대부르즈와지의 예술이다. 왕실과 국가의 건축사업이 개인들의 견축활동에 밀려나 성이나 궁전 대신에 저택과 멋진 별장이 지어지고, 공공건물의 싸늘한 대리석과 육중한 청동보다도 침실과 사실의 아늑하고 우아한 맛을 더 좋아하게 되며, 근엄하고 장중한 색조 및 갈색과 자색, 암청색과 금빛의 밝은 파스텔 색조, 회색과 은빛, 회녹색과 장밋빛으로 바뀐다. 섭정시대의 예술과는 대조적으로 로코코는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형적인 사교계 예술로 발전하지만, 다른 한편 소규모 형식들을 애호하는 시민계급의 취미에 접근해간다. 바로크가 묵직하고 조각적이며 사실적 공간성을 지닌 양식이라면 이를 대신하여 나타난 로코코는 날카롭고 미묘하고 민감한 하나의 능란한 장식예술이다.  [49]

감각주의적, 유미주의적요소를 지닌 로코코의 향락문화는 바로크적 의식성과 전기 낭만파 운동의 감상주의 중간에 위치한다. 루이 14세시대의 궁정귀족들은 실제로는 대개 개인적 만족만을 추구하면서도 아직 영웅적 합리적인 생활이상을 찬양했다. 그런데 그 똑같은 귀족들이 루이15세 시대에는 돈 많은 부르즈와지의 세계관 및 그들의 생활방식과도 상통하는 일종의 쾌락주의를 신봉한다. “1789년 이전에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달콤한 맛을 알지 못한다”는 딸레랑 뻬리고르(C. Talleyrand Perigord,대혁명 전후의 정치가, 외교가, 자유주의적 귀족의 입장을 대표함) 의 언명은 이 계급이 어떤 생활을 영위했는지 능히 짐작케 한다. ‘인생의 달콤함’이란 물론 여자의 달콤함을 가리키는 것인데, 어떤 향락적 문화에서나 그렇듯이 여자는 가장 환영받는 소일거리가 되었다. 사랑은 그 ‘건강한’본능도 극적 정열도 모두 잃어버리고 기교적이고 오락적이며 고분고분한 것이 되었으며 뜨거운 정열이 아니라 단순한 습관이 되었다.  [52]

18세기의 정신적 주도권은 프랑스에서 경제 사회적 및 정치적으로 훨씬 진보적인 영국으로 옮아간다. 영국에서는 이 세기 중엽에 거대한 낭만파 운동이 봉화를 올리는데, 그러나 이미 계몽주의 역시 이 나라에서 결정적인 추진력을 얻는다. 당대의 프랑스 작가들은 영국의 온갖 제도들에서 진보의 정수를 보고 영국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하나의 전설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사실과 일치하는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낸다. 프랑스 대신 영국이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유럽의 지도적 권위를 누려오던 프랑스왕권이 몰락한 것과 나란히 진행된 일로서, 18세기의 역사는 정치영역에서나 예술과 학문 영역에서나 영국의 상승의 역사이다. 왕권의 약화가 프랑스에서는 국가적 쇠약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데 비하여, 경제발전의 추세를 파악하고 여기에 스스로 적응할 줄 아는 기업가계층이 통치를 떠맡을 태세를 갖춘 영국에서는 그것이 도리어 국력의 원천이 되었다.  [58]

새로운 독자층의 성장을 가져온 문화적 수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8세기 초부터 보급된 잡지(정기간행물)로서 그것은 이 시대의 위대한 발명이다. 시민계급은 거기에서 문학적인 교양과 아울러 세속적인 교양의 세례를 받는데, 물론 이 교양들은 아직 근본적으로 귀족계급의 가치기준에 입각해 있었다.  [66]

이 세기의 중엽 이후 마침내 패트런 제도는 완전히 끝장이 나며 1780년경에는 개인적인 후원에 의지하는 작가는 한 사람도 없게 되였다. 펜대만 가지고 살아가는 독립적인 시인과 문필가들의 숫자는 날로 늘어가며, 이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사며 그 저자와 순전히 책을 통한 비개인적 관계만을 가지는 사람들의 숫자 또한 매일매일 증가했다. 존슨과 골드스미스는 이제 그런 독자들만을 위해서 글을 썼다. 출판사가 패트런 제도를 대신하며, 집단적 패트런제라고 아주 적절하게 지적되었던 예약구독제가 독자와 출판사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패트런제가 저자와 독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순수한 귀족주의적 형태라면, 예약구독제는 그 유대를 이완시키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관계가 지니는 개인적 성격의 어떤 특징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저자가 전연 알지 못하는 일반대중을 위한 책의 출판이야말로 비로소 익명적 상품거래에 기초하는 부르조와 사회의 구조에 대응하는 형태이다. 저자와 독자대중을 연결하는 출판사의 매개적 역할은 귀족계급의 독재에서 시민적 취미가 해방되면서 시작된 일로서 그 자체가 이러한 해방과정의 한 표현이다.  [74]

18세기 중반까지 작가들은 자기 작품에서 생기는 직접적인 수입이 아니라 자기들이 쓴 저작의 내면적 가치나 그것의 일반적인 배력과 거의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금, 자선금, 은급 따위로 살았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문학작품은 자유시장에서의 판매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사람에 다라서는 이러한 변화를 환영하기도 하고 개탄하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자본주의 시대에 문필업이 독립된 정규적 직업으로 발전한 현상은 문학작품의 개인적 봉사에서 비개인적 상품으로의 이러한 전환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75]

새로운 유형의 자본가, 즉 산업경영자는 경제생활에서의 새로운 기능과 더불어 새로운 재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노동규율 및 노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발전시켰다. 그는 상업적인 이익을 어느 정도 보류하고라도 기업의 내부적인 조직화에 전력을 집중했다. 합목적성과 계획성 및 타산성이라는 원칙은 15세기 이래 유럽의 지도적인 국가들의 경제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기업가는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나 종업원과 꼭 같이 자기 기업의 노예가 되었다. 노동을 하나의 윤리적인 가치로 끌어올려 이를 찬양하고 숭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공과 이익을 위한 노력의 이데올로기적 변형이자, 노동의 열매에서 가장 적은 몫을 차지하는 노동자들까지도 감격해서 협력하도록 자극하려는 시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83]

낭만주의와 같은 양식사적 운동들의 경우 일정한 기점을 규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운동들은 때로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대수로운 반향을 얻지 못한 채 다시 스러져버린, 요컨대 특별한 사회학적 비중 없이 개별적인 시도로 남아 있는 경향들에 연유하기도 했다. 17세기에 이미 ‘낭만주의적인’ 양식의 현상들이 있었으며 18세기 전반기에는 곳곳에서 그것들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리처드슨 등장 이전에는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낭만주의 운동을 운위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이 새로운 양식의 본질적인 특징들이 그에게 와서 처음으로 통일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주관주의와 감상주의를 수반하는 낭만주의 문학 전체가 그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 만큼 이 새로운 취미방향을 적절히 대변하는 표현을 발견한 것이다.  [90]

루소가 끼친 영향력의 깊이와 폭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후일의 맑스(K. Marx)나 프로이드(S. Freud)처럼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수백만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또한 일일이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상을 변화시킨 위대한 정신들 중의 하나이다. 어떻든 18세기 말이 되면 지식인의 범주에 드는 사람치고 루소 사상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러한 영향력이란 한 작가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자기 시대의 대표자요 대변자일 때에만 가능한 법이다. 루소가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소시민계층과 일반 빈민대중, 피압박계층과 법적 보호에서 쫓겨난 사람들 등 더욱 광범한 사회계층이 문학적인 발언대에 오른다.  [101]

영국의 전기 낭만주의 및 루소의 작품과 함께 일어난 문학에서의 양식변화, 즉 객관적 규범적 형식 대신에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이 등장하게 된 변화는 아마 음악분야에서 가장 극명하게 표현되었을 터인데, 이때에 와서야 처음으로 음악은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대표하고 주도하는 예술이 된 것이다. 어떤 다른 장르에서도 음악에서처럼 그렇게 돌연하고 격렬한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당시 사람들도 ‘거대한 파국’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104]

그러니까 작곡가란 궁정음악가거나 교회음악가 아니면 시의회 전속음악가였다. 그들의 예술활동도 직책상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한정되었고, 위촉 없이 자기 독단으로 작곡을 한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기 힘들었다. 일반 시민들은 교회예배나 축제행사 혹은 무도회 같은 데서가 아니면 음악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으며 귀족악단과 궁정악단의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은 아주 예외에 속했다. 18세기 중엽이 되자 사람들은 여기에 불만을 가기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시립연주협회 같은 것을 개설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적인‘음악협회’정도였던 것이 공개적인 연주회로 발전되고 이와 더불어 시민계급의 독자적인 음악생활이 시작되었다. 연주협회에서는 점점 더 큰 회당을 빌리게 되었고, 청중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음악가들은 보수를 받고 연주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치 신문, 잡지, 출판사를 기반으로 문학시장이 형성되었듯이 이에 대응하여 음악작품에도 일종의 자유시장이 형성되었다.  [106]


2. 계몽시대의 예술

시민극의 진정으로 새로운 점은 이제 극적 갈등이 개별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사회제도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것, 일정한 사회적 집단의 대표자인 주인공이 어떤 정체 모를 비개인적인 힘과 싸우며 그리하여 그가 자기 입장을 하나의 추상적인 이념으로, 기성의 사회질서에 대한 고발로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119]

새로운 도덕적 태도의 특징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현자(賢者)나탄>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도 강제되어서는 안된다”는 레싱의 말로서, 그것은 물론 인간이 일체의 의무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라기보다 내면적으로 자유롭다는 즉 수단의 선택에 있어 자유로우며, 자기 행동에 대해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거의 연극에서는 내적인 구속이 강조되었고 새로운 연극에서는 외적인 구속이 강조되는데, 그러나 외적인 구속은 그것이 아무리 강압적이라 하더라도 극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완전히 자유롭게 전개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129]

18세기는 극장을 좋아하던 시대요 연극사에서 비상하게 풍요했던 시대이지만 비극적인 시대는 아니었다. 즉 인간존재의 문제들이 가차없는 양자택일의 형식으로 제기된 시대는 아니었다. 위대한 비극의 시대란 사회적으로 혁명적인 변동이 일어나고 지배계급이 갑자기 힘과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그러한 시대이다. 비극적 갈등은 대체로 이 지배계급 권력의 도덕적인 기반이 되는 가치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며, 주인공의 파멸은 이 계급전체를 위협하는 파멸의 상징이자 그 승화이다. 그리스 비극이나 16,7세기 영국, 스페인, 프랑스의 연극이나 모두 그러한 위기시대의 산물이며 그 나라들의 귀족계급의 비극적인 운명을 상징화한 것이다.  [131]

계몽주의는 근대 시민계급에 있어 기본적인 정치적 단련의 과정으로서, 이 과정이 없었다면 지난 2세기 동안의 유럽 정신사에서 했던 시민계급의 역할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독일의 불행은 이 나라가 제때에 이 과정을 거치지 못했고 그 후에 가서도 이때 놓쳐버린 과정을 다시 밟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계몽주의 운동이 유럽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을 즈음의 독일 지식인층은 아직도 이 운동에 함께 참가할 만큼 충분히 성숙해 있지 못하였고, 나중에 가서 이 운동의 한계와 편견을 뛰어넘기란 더욱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137]

중세 말기 이후 독일 시민계급을 여러 층으로 명확히 분화시켜왔던 사회발전이 16세기에는 정지상태에 이르고, 반동적 성격을 띤 새로운 사회적 재편성 과정이 진행되면서 우리가 17세기에 보게 되는 바와 같은 거의 미분화된 시민계급이 생겨난다. 광범한 계층의 시민계급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의 문화적 욕구를 포기하였고, 대부르즈와지층도 이제는 매우 위축되어 더 이상 문화의 주도적 담당자로 볼 수 없게 되었다. 높은 수준의 시민적 생활양식이나 예술과 문학에서의 시민 특유의 독자적 세계관도 이제는 거론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생겨난 것은 오히려 중세 초기의 원시적 상황을 연상케 하는 균등하게 낮은 수준의 검소한 문화였다. 16세기의 혁신적인 사건들, 특히 세계경제의 중심 이동과 영주 권력의 강화는 시민적이 후기 고딕과 르네상스의 성과를 파괴하였다. 시민적 생활기준에 근거를 두고 있던 문화와 독자적인 시민적 교양 및 독특한 시민적 예술이상은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43]

계몽주의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해명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질풍노도는 이와 반대로 세계를 근본적으로 불가해한 것, 신비스러운 것, 인간적 이성의 관점에서 보아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단순히 머리에서 짜낸 것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전개된 것도 아니다. 전자가 현실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확신의 결과였다면, 후자는 이 현실에서 길을 잃고 버려져 있다는 느낌의 표현이다. 어떠한 사회계층이든 또 어떤 세대든 자진해서 세계를 포기하지는 않는 법이다. 세상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흔히 아름다운 철학과 동화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그들이 당하는 강제를 자유와 정신과 내면성의 영역으로 들어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역사 속에서의 이념의 자기실현이라든가, 윤리적 인간의 지상명령이라든가, 창조적 예술가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법칙이라든가 또는 그밖에 이와 유사한 여러 이론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인간적 가치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예술적 천재라는 개념만큼 명확하고 포괄적으로 질풍노도의 세계상을 생겨나게 한 동기들을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155]

낭만주의자들이 이처럼 괴테를 지지했던 것은 그들 사이에 놓인 일체의 개인적 세계관적인 대립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질풍노도 이후의 전 독일 문화를 하나로 묶는 불가침의 깊은 이해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말해주는 가장 두드러진 징표이다. 예술은 이제 그들의 위대한 공동적 체험이 되었다. 또 예술은 가장 큰 정신적 즐거움의 대상이자 개인적 완성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그들의 잃어버린 천진성을 되찾고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소유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164]


3. 낭만주의

18세기는 모순에 가득 찬 세기이다. 이 세기에는 철학적 입장만이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에서 동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의욕 역시 두개의 서로 상반되는 사조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어, 어느 시기에는 엄격한 고전주의적 관점에 접근하는가 하면 또 다른 시기에는 매우 자유로운 회화적 관점에 접근하기도 했다. 또 이시대의 고전주의 역시 합리주의와 마찬가지로 좀처럼 정의하기 힘들고 사회학적으로 다의저기인 현상이어서, 때로는 궁정적ㆍ귀족적 계층이, 때로는 시민적 계층이 번갈아 주도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혁명적 시민계급의 대표적인 예술양식으로 발전하였다.  [175]

새로운 고전주의는 흔히 주장되어온 것처럼 결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미 중세 말 이래로 엄격한 구성적 예술관과 형식상으로 좀더 자유로운 예술관, 다시 말해 고전주의에 가까운 예술관과 이에 상반되는 예술관의 양극 사이에서 발전이 이루어져왔다. 근대예술사에서는 어떠한 전환도 그것이 곧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변화는 이 두 경향 중 어느 하나와 결부되게 마련이며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잡는 경우에도 다른 한쪽이 완전히 뿌리째 사라지지는 않는다. 신고전주의를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양식으로 설명하는 연구가들은 그 성립의 특이성을 다음과 같은 점, 즉 신고전주의로의 발전이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그러니까 선으로부터 회화적인 것으로, 회화적인 것에서 더욱더 회화적인 것으로 분화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분화과정이 ‘단절’되고 발전이 어느 의미에서는 ‘껑충 뒤로 후퇴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찾곤 한다.  [183]

1793년 살롱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아쌍프라스(Hassenfratz)는 이와 일맥상통하는 미학적 원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의 모든 재능은 그의 가슴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가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196]

프랑스혁명은 예술적으로 별로 큰 성과가 없었다거나, 혁명시대의 작품은 로코코 고전주의의 계승 내지 완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양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흔히 주장되어왔다. 그리고 혁명기간의 예술은 단지 내용과 이념에서만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그 형식과 양식적 수단에서의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도 강조되어왔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실제로 고전주의가 어느 정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혁명은 이러한 기존의 고전주의에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부여하였다. 혁명의 고전주의가 비독창적이고 비창조적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사물을 평준화해서 보게 마련인 후세 사람들의 시각 때문이고 당대의 사람들은 다비드의 고전주의와 그의 선행자들의 고전주의 사이의 양식적 차이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201]

프랑스 대혁명은 결코 프롤레타리아트나 하층 시민계급의 혁명이 아니라 금융업자와 실업가 즉 봉건귀족의 특권 때문에 그들의 경제적 신장이 저해되긴 했지만 생존에는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던 계급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노동자계층과 하층 시민계급의 도움에 힘입어 쟁취되었고 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르즈와지는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왕년의 투쟁동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둔 채 공동으로 거둔  투쟁의 열매를 혼자서 즐기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박탈당하고 억압받던 이들 사회계층들도 결과적으로는 혁명의 승리로부터 득을 보았는데, 그것은 아마 프랑스혁명이 수많은 폭동과 반란의 실패를 거치고 난 후 사회를 근본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변혁시켰던 최초의 혁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207]

낭만주의는 획기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획기적이라는 의식도 갖고 있었다. 낭만주의는 서양의 정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하나였고, 그 스스로 자기의 역사적 역할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고딕 이래 감수성의 발전이 이때처럼 강한 자극을 받고, 자신의 감정과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예술가의 권리가 이때처럼 철저히 강조된적은 일찍이 없었다.  [217] 

낭만주의의 시대의식, 즉 낭만주의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현재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없었다면 19세기의 모든 역사주의 및 이와 결부되어 일어난 정신사의 깊은 변혁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220]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의미와 낭만주의 이래의 역사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진보는, 역사발전의 원천이 형식원칙이나 이념, 실체나 본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발전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을 나타낸다는 통찰에 있다. 역사발전의 근원을 형식원칙이나 이념에 두는 이상주의적 역사관이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비역사적인 실체의 ‘변형’만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면, 유물론적 역사관은 모든 요인들이 항상 유동적이고 의미변천을 하며 정적인 것, 무시간적 보편성과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물질적ㆍ정신적인, 경제적 이념적인 일체의 요인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상호 의존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224]

정신적 자율성의 이념은 경제적 정치적 자유주의의 철학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사회주의가 새로운 구속의 이념을 만들어내고 역사적 유물론이 정신의 자율성을 다시 폐기할 때까지 계속 타당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니까 이러한 자율성은 낭만주의의 개인주의와 마찬가지로 18세기의 사회를 뒤흔들어놓았던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였던 것이다. 개인주의와 정신의 자율성이라는 이 두 이념은 원래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개인이 사회에 대해, 그리고 개인과 그의 행복 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방해요소에 대해 반대하도록 자극을 받게 된 것은 이 시기가 처음이었다.  [231]

자신의 시대를 갑자기 ‘완전한 죄악’의 시대로 보게 된 공화주의자 피히테의 전향은 당시 독일의 일반적 사정을 가장 전형적으로 말해주는 하나의 징후적 사건이었다. 초기에 낭만주의자가 열렬히 혁명을 낭만화 했었다면 나중에는 그 때문에 더욱 격렬하게 혁명을 거부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낭만주의와 왕정복고가 손을 잡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낭만주의 운동이 서유럽에서 정말 창조적 혁명적인 단계에 도달했을 때 독일에서는 이미 보수주의와 왕당파의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은 낭만주의자는 한사람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38]

낭만주의의 이러한 유파적 성격은, 고전주의적 예술이상이 한번도 순수하게 실현되어본 적이 없고 고전주의의 문화이념이 전체적으로는 낭만주의자들에게까지도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또 이미 고전주의의 세계상이 어느 정도 낭만적 성격을 띠고 있던 독일에서보다 프랑스에서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났다.  [246]

낭만주의자들의 자기만족과 허영심은 점점 심해져서 그들은 시인을 하나의 신으로 보던 종전의 유미주의와는 반대로 신을 하나의 시인으로 보는 데까지 나아간다. “신이란 세계 최초의 시인에 불과하다”라고 고띠에는 말하고 있다. 물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이론은 극히 복잡한 현상으로서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 태도를, 다른 한편으로는 정적주의적ㆍ보수주의적 태도를 보여주지만 그 기원에서는 부르조와적 가치척도에 대한 반항인 것이다.  [251]

18세기의 사람들은 시가 사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시적형상의 의미와 목적은 어떤 이념적 내용의 설명이요 해설이었다. 낭만주의 문학에서는 이와 반대로 시적 형상은 이념의 결과가 아니라 원천이다.  비유는 스스로가 생산적이 됨으로써 우리는 마치 언어가 자기 스스로 독립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시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짐짓 아무런 저항 없이 자신을 언어에 내맡김으로써 그들의 반합리주의적 예술관을 표현하고 있다.  [268]

“죽음이란 논증이 아니다”라고 어디에선가 헵벨은 말한 적이 있다. 아무튼 바이런은 그의 영웅적 죽음으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였다. 시인으로서의 혁명적인 신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결코 그에게 적합한 죽음은 아니었다. 바이런은 ‘마음의 평형을 상실한 상태’에서 자살한 셈이었고 입센의 여주인공 헤다 가블러가 그렇게 죽기를 원했던 것처럼 ‘머리에 포도잎을 꽂고’죽었던 것이다.  [274]

철저한 자연주의의 시대란 현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시대가 아니라 현실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자연주의의 고전적 세기는 바로 19세기인 것이다.  [279]

낭만주의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발전이 그 완성에 이른다. 즉 음악이 시민계급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만이 성이나 궁정의 연회장에서 시민계급으로 가득 찬 연주회장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실내악도 귀족적 살롱 대신에 시민 가정의 응접실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음악행사에서 점차 더 큰 몫을 차지하는 더욱 광범위한 사회계층은 이제 더 가볍고 덜 복잡한 음악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는 처음부터 더 짧고 재미있으며 또 더 변화가 많은 음악형식들의 형성을 촉진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진지한 음악과 오락음악의 분리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87]

19세기 말의 세기 전환기에도 예술의 진수는 여전히 ‘피, 관능, 죽음’, 즉 감각의 도취와 이성의 공중곡예였다. 낭만주의 정신에 대한 19세기의 투쟁은 결판이 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으며 새로운 세기에 와서야 어떤 결말에 이르렀던 것이다.  [289]


● 내가 저자라면

‘인간은 무엇인가, 사회는 무엇인가, 예술은 누가 낳는가, 이 궁금증을 이 저서만큼 명쾌히 풀어주는 책은 없을 것…’ ‘20세기 지성사의 빛나는 업적…’ ‘기념비적인 저서….’ 이 책에 쏟아지는 상찬(賞讚)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한 상찬은 인사치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이 가득 담겨있다. 책은 그러한 상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작이다.
책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문학과 예술, 사회와 역사의 흐름을 총 망라하고 있다. 책의 이름처럼 문학과 예술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하나의 책으로 읽어낸 진정 기념비적인 저서다. 방대한 자료와 통찰은 책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서양문명을 한눈에 읽어내면서도, 개괄서처럼 성기게 엮지 않고 어느 한곳도 구멍이 없을 만큼 촘촘히 짚어냈다는 것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장점이다. 책의 내용은 어느 곳, 어느 문장도 허투루 지나치지 힘들만큼 한 줄 한 줄이 함축적이다. 인류 역사의 모든 시기를 기술하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구성한 저자의 노고와 역량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책은 독자에게 그리 편안한 책이 아니다. 편안함은 고사하고 한편으로 많이 거북하기까지 하다. 먼저 외적인 것부터 꼽아보자. 책을 펼쳐들고 난감한 것은 읽기의 불편함이다. 서체는 깔끔하지만 글씨의 크기가 너무 작다. 책을 읽고자 하는 의욕을 순식간에 감퇴시킨다. 자간(글자와 글자사이의 공간)과 행간(줄과 줄 사이의 공간)의 문제도 있다. 자간과 행간이 좁아 보여서 책은 답답하고 무거워 보인다. 전체적으로 읽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편집이다.
다음으로는 문장의 구성이다. 원래의 문장이 그러한지 번역이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문장 자체가 어렵게 구성되어 있다. 이상한 것은 문장 속의 어휘는 어려운 것이 없음에도 문장은 전체적으로 읽기가 쉽지 않다. 어떤 문장은 서너 번을 읽어봐야 넘어가기도 하는데, 문장에 쓰인 어휘나 문장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휘나 문장이 어렵지 않음에도 매끄럽고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는 문장의 내용이 알맹이로 너무 가득 차 있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백 없이 저자가 꼭 필요한 말들로만 문장을 만든 후유증 아닌 후유증이다.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한 줄 한 줄을 그냥 넘기기 어려운 것도 이러한 문장 구성의 결과물로 보이는데, 이는 독자가 책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책의 흐름은 역사와 더불어 문화와 예술의 각 부분이 어떠한 성쇠과정을 거쳤는가를 물 흐르듯이 보여주고 있다. 독자가 책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물 흐르는 대로 몸을 띄우기만 하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책 전체의 구성은 그러하지만 안타깝게도 책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는 쉽지 않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일단 책의 구성이 브레이크를 걸고, 막상 읽기 시작하면 문장의 형태가 막아선다.
두 가지 문제는 상당히 높은 장벽이어서 과연 이 장벽을 넘어설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라는 선택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 정도면 독자가 책에 접근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리 내키지 않는다. ‘기념비 적인’ 저작이지만 정작 그 ‘기념비’가 어떠한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책에 대해 감탄할 만 하지만 대중은 통탄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훌륭한 저작을 앞에 둔 ‘일반 독자’의 심정이 그렇다. 

IP *.163.65.8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52 역사속의 영웅들 1 박노진 2005.04.13 3149
1351 프로페셔널의 조건(피터 드러커)-完 [1] 오병곤 2005.04.27 3150
1350 북No. 7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file 유재경 2011.05.16 3150
1349 [52] 캠벨의 <신의 가면 2- 동양신화> 인용문- 인도신화 수희향 2010.06.29 3151
1348 강의 3 박노진 2005.04.07 3153
1347 [22]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 짐콜린스 file [2] 최지환 2008.09.22 3153
1346 나의 생명 이야기.. [2] 김미영 2005.05.20 3154
» [35]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3-아르놀트 하우저 2008.12.14 3153
1344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세린 2012.06.04 3154
1343 생각의지도 (리처드 니스벳) // 2005. 04. 16 ~ 2005. 04. 27 [1] 강미영 2005.05.11 3155
1342 Dictionary of the Future-Faith Popcorn file [11] [1] 海瀞 오윤 2007.04.20 3155
1341 Book Review_04 [삼국유사/20050418] 이익상 2005.04.12 3156
1340 60.<WISHCRAFT:소원을 이루는 기술> 바버라 셔 박미옥 2011.10.04 3156
1339 강의_신영복_찰나리뷰#16 file 찰나 2014.07.28 3156
1338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書元 이승호 2009.11.08 3157
1337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file 학이시습 2012.06.05 3159
1336 [32]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file 양재우 2008.12.01 3161
1335 <명상록>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김철곤/ 민중출판사 이은주 2010.11.07 3161
1334 기억 꿈 사상. (두번읽기) file 학이시습 2012.10.08 3164
1333 생각의 지도 - 04/24 신재동 2005.04.14 3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