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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5일 10시 31분 등록


1. 저자소개 - <출판사 소개>

강영희 姜英熙
문화평론가.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에는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1994)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1998)가 있다. 연극평론에서 시작해서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6년 전부터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한동안 무위도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비롯해서,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대만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문화평론가로서 세상의 모든 잡사(雜事)에 대한 잡문(雜文)을 써온 그녀는, 이 책을 쓰면서 세상의 모든 잡학(雜學)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의 주제는 물론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을 다룬 이 책은 그 첫걸음인 셈이다.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지은이의 글

성찰 또는 취향을 가능하게 하는 여백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 성찰 또는 취향의 여백을 거느리지 않은 진리란, 도그마요 사기요 심지어는 삿대질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 6p

이 책은 바로 그런 날들을 준비하기 위해 쓰여졌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금빛 기쁨의 기억들을 다시 지펴내며 함께 깨어 있자고 말하고 싶다. 그 같은 깨어있음이 또 하나의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하단 말인가.  7p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01.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백남준보다 내가, 미국에 사는 한인들보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토속적인 자기’를 더 잘 보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세계성의 부재를 토속성의 과장으로 얼버무리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23p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兩者擇一)이 아니라 회통(會通)이다.  25p

토속적인 자기를 내던진 채 유행 사조만을 따르는 세계인의 망상은 물론이요, 유행 사조 또는 동시대적인 세계성을 향해 빗장을 걸어잠근채 토속적인 자기만을 다짐하는 한국인의 자폐 역시 우리의 선택이 될 수는 없다.  27p

전통은 ‘기억 속의 심상’이다.

세계인 백남준에게 한국인 백남준이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은 그의 몸 속에 자리잡은 기억이다,  28p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뛰어넘는다. 기억의 다른 이름이 추억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28p

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을 토대로 한 것이며, 새롭게 창조되는 오늘의 심상의 전생(前生)이다. 31p

한국인에게 있어 미륵신앙이란 무엇인가, 흥미로운 것은 미륵신앙이 현세적인 성격의 토속신앙과 만나면서, 지금 이곳의 현실에 이상세계를 이룩하고자 하는 미륵 불국토(佛國土) 사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34p

미륵반가상은 ‘먼 저곳’이 아닌 ‘가까운 이곳’에서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의식이 담긴 고유의 심상 가운데 하나다.  34p


02. 기차가 있는 풍경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이 같은 기억상실이 발생한 배경은 무엇일까. 갑자기 들이닥쳐 굴욕적인 관계를 강요한 제국의 군함이 던진 근대화라는 과제가 그것이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근대화가 의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서구화(西歐化)에 일본화(日本化)를 겹쳐 놓은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 개화, 과학, 합리, 이성과 동일시되기도 했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주체적으로 변용시키는 데 필요한 성찰의 여백은 실종된 반면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 급급한 조급함만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38p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42p

기차가 있는 풍경 속 근대 한국인의 내면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조급함이다. 존재의 속도를 앞지르는 기차의 속도에 따라 생겨난 조급함의 열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억의 되새김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근대 한국인의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사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되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47p

몰락하는 전근대인의 취향을 대변하는 소품이 된장찌개라면, 낡은 껍질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면모로 거듭나는 근대인의 취향을 대변하는 소품은 샌드위치다.  49p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01.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정작 한국인의 미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야나기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런 것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64p

02. 일본 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신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곳의 음식에 허락없이 손을 대었다가 돼지로 변하는 치히로의 부모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지 않고 상급의 위계질서에 천방지축 끼여드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벌을 받으며, 그곳의 위계질서를 지혜롭게 살펴서 적절한 일을 맡는 데 성공한 치히로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는 순종(順從)으로 인하여 은총을 받는다.  85p

03. 선의 미와 야나기의 환상

한옥의 지붕곡선이 현수곡선으로 만들어진 것은 장마철의 집중호우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빗물을 빨리 배수시키기 위한 과학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옥의 지붕곡선이 현수곡선으로 만들어지고 다시 그것이 저고리 깃이나 버선 같은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이루게  된 것은 이 같은 과학적 노력에 더하여 주변의 산세 특히 뒷산과의 조화를 고려한 미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가운데가 솟아올라가고 양끝이 처진 뒷산을 배경으로 집을 짓는 까닭에 지붕의 양끝이 쳐져보이지 않도록 양끝을 살짝 들어올린 결과 그 같은 자연곡선이 고안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가옥을 닮아가는 의복 역시 저고리깃이나 버선의 경우처럼 유사한 형상을 띠게 된 것이다.  98p

04. 일본의 기교와 한국의 격

격(격)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빈틈없이 맞추어야 하는 눈앞의 실선 같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의식되는 머리 속의 점선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기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인 반면, 한국의 격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한국의 격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를 어림하기 위한 가상의 척도 같은 것이다.  107p

조선의 둥근 달항아리는, 그의 말처럼 한국의 미가 타력에 기대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빙그레 곰삭은 웃음으로 전해준다. 그것은 철없는 천진함이 아니라 철없는 아이와도 같은 경지에 올라선 대가(大家)의 원숙함에 비유된다. 그것은 고도의 정신적인 수양을 비롯한 피나는 단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며, 다시 그 같은 경지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을 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경지이다.  113p

05. 근대적 자의식과 한국 예술의 민예성

06. 자연과 작위를 통합시킨 일본의 세(勢)

3부 한국인의 미의식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8p

01. 음양오행과 상(象)의 미의식

02. 아졸미(雅拙美)또는 고졸미(古拙美)

03. 발효맛과 생기의 마감

멋이란 말의 어원이 맛에 있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되어 있다. 156p

발효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효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맛을 낳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물질에너지에서 ‘얼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의 미감을 탄생시켰다.  162p

04.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05. 해학과 신명

한국인의 자화상은 흥부의 내면적 형상 뿐만 아니라 외면적 형상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전자가 대성 통곡하며 우는 눈물이자 한이라면, 후자는 배꼽을 잡으며 웃는 웃음이자 흥이다. 결국 한국인의 자화상은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본질이 관철된다.  173p

한국인은 눈물과 한, 웃음과 흥이 한데 버무려져, ‘생짜의 것’이 ‘곰삭은 것’으로 발효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한 위에 어느새 흥이 겹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표정을 대표하는 얼굴이 눈물의 세월을 안쪽에 숨긴 곰삭은 웃음을 떠올리는 까닭이다. 서글픔일랑 진즉에 통과하여 저만치 흥에 겨운 얼굴, 해학과 신명의 가락 위에 얹어놓은 자화상.  175p

한국인의 자화상을 묘사하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한과 울음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자화상에서는 울음만이 아니라 웃음도 묻어난다. 결국 한국인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 가는 전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178p

한에 대한 담론이 발생한 시점이 일제 강점기라는 사실로부터 주어진다.  179p

06. 고지도와 명당론

풍수사상은 모든 지리적 요소들에 매우 인간적인 실존성을 부여한다.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을 구체적인 삶과 관련된, 상호유기적 관계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인간적 의미가 없는 공간은 사실상 죽은 공간이다. 땅에 인간적 의미를 주어, 이용과 소유의 대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삶터로 환원시키는 것이 풍수사상이다. 모든 토지적 요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이것이 바로 땅 속의 생기, 즉 지기이다. 이때 땅은 그리고 자연은 존귀한 삶의 실체가 된다.(최창조, <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193p

07. 백의와 색동

한국인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경우의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의 바탕색인 소색이라는 것이다. 소색이란 무엇인가. 바탕 소자(素)에 색 색자(色), 옥양목이나 비단, 광목의 색처럼 재질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의 색감을 드러내는 자연의 바탕색이다. 206p

여백은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눈에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심오한 상태인 것이다.(박용숙, <한국미술의 해학정신>)  210p

오방색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 민족이 누려온 수많은 색 가운데 순수한 우리말로 된 명칭은 하양, 까망, 빨강, 노랑, 파랑의 다섯 가지 뿐인데, 이것이 바로 오방색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오방색이란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색에 관한 현실 자체이기도 하다.  211p

이제 우리는 어느새 친근한 벗인양 우리 곁에 자리잡고 있는 백의민족의 표상을 향해 ‘백의민족이여 안녕, 그동안 겪어내야했던 뼈아픈 이십 세기여 안녕, 이십 세기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이데올로기여 안녕, 역사의 갈피 속으로 영원히 안녕!’이라는 단호한 고별사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223p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01. 이데올로기에서 취향으로

미학의 문제에 관한 한, 아름다움의 향기가 사회학적인 눈금 너머로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인문학적인 여백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반듯한 이데올로기보다는 갈짓자의 취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31p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231p

개성 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동양화의 여백이란 하릴없이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정신의 여백을 간직한 사람만이 시시때때로 튀어오르는 정신의 자투리들로 아름다운 성찰의 조각이불을 꾸며낼 수 있다.  232p

취향은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인문적인 지혜의 산물이다. 취향은 인간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룩한 인문적인 가치의 토대이다. 따라서 그것은 ‘제멋대로의 것’이 되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출발점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으로 작용하던 취향도 반환점을 돌고나서부터는 시나브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지닌 성찰의 가능성이다. 232p

다시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을 초점 없이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된장찌개를 좋아하는 것, 소색을 애호하고 색동옷을 즐겨 입는 것, 상생적인 조화로움에 따른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이 같은 취향에 관한 담론들은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232p

서양철학사의 주류를 관통해온 이원론적 사고. 피타고라스에서 싹을 틔워 데카르트에서 꽃을 피운 합리주의의 사고. 데카르트의 ‘나’와 칸트의 ‘이성’을 토대로 해서 주체와 타자의 이원론적 대립 위에 세워진 사고. 주체인 나를 위해 타자인 너를 노예로 만드는 제국주의를 정당화시킨 사고. 제국주의 국가에 짓밟힌 식민지 백성들로 하여금, 저들과 우리들을 최소한 동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저들이 이룩한 근대를 하루빨리 따라 잡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시달리게 만든 사고. 그러고 보면 서양인을 주체로 하고 동양인을 타자로 만드는 오리엔탈리즘이든, 자민족과 타민족을 구분하는 민족주의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갈라놓는 사회주의든 모두 이 같은 이원론적 사고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233p


02. 상생 지향과 탈속의 아름다움

한국인의 미의식을 취향적인 사고에 따른 성찰의 시선으로 바라볼 경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상생적인 조화로움에 따른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실적인 질서의 상극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질서인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랄까. 인간적인 질서인 상극 역시 자연적인 질서, 우주적인 질서인 상생의 품안을 벗어나지 않도록 했으며 그 결과 신명이나 해학처럼 상극을 상생으로 변용시키는 문화적인 실천이 한국문화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239p

 상생 지향이 만들어낸 탈속의 경지는 참으로 아름답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증류된 아름다움. 한치의 가감도 허용되지 않는 정밀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한국인이 이 같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일상에서 경험한 것은 불국토사상이나 미륵신앙, 풍수사상에서 드러나는 한국문화의 현세적 유토피아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미의 본질이 천상의 내용을 지상의 형식을 빌어 펼쳐보이는 것이라면, 이것은 한국인의 미의식이 어느 순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적이 있음을 말해준다.  240p

조선의 선비란 누구인가. 그들은 상생의 자연적 질서에 천지인의 일부로 합류하는 이상적인 풍류는 물론이요 상극의 인간적 질서 속을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헤쳐가는 현실적인 실존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245p

나는 피카소에 경탄하고 렘브란트의 자화상 앞에서 영혼을 무장해제 당하는, 이십일 세기의 세계인에 걸맞은 잡종(雜種)적 취향 속에서도 나의 취향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서울 북촌의 기와집 풍경이었노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251p

03.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

04.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

우리는 상생 속의 상극, 정지태 속의 가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 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김진석, <초월에서 포월로>)

은자의 소극성 또는 폐쇄성을 벗어 던지고 세계시민(세계시민)의 적극성 또는 개방성을 추구해야 한다. 자연의 질서인 상생 대신 인간의 질서인 상극을 전면에 내세우는 서구적 근대와, 인간의 질서인 상극을 자연의 질서인 상생 속으로 통합시키는 한국적인 저다움을 ‘창조적인 모순’으로 통합시켜야 한다.  261p

05.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

기쁨. 산다는 것의 기쁨. 육체의 기쁨.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것. 살아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 이것이 바로 상극적인 부조화를 상생적인 조화로 승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한국적인 감성의 본질이다.  268p

06.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회통적인 사고
흔히 두 개의 길이 있다고들 한다. 하나는 한국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의 질문은 애당초 잘못된 것이라고. 백남준과 겸재가 그랬으며 추사도 그랬듯이, 한국인이니 세계인이니 하는 구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신을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인으로 여겼으며, 이 같은 회통적인 사고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창조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회통적인 사고. 한국인과 세계인 사이에, 법고와 창신 사이에서 회통적인 사고를 모색한 사람들만이, 창조라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유월의 햇살 아래 붉은 악마로 서 있었던 우리 모두가 눈부시게 깨달았듯이,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279p

순일(純一)함이란 불모의 것이요 난장(亂場)만이 다산의 터전이라는 것. 전통의 고유색과 현대의 난장은 불이(不二)의 묘경(妙境)으로 회통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퇴행적인 저다움을 딛고서 도달해야 할 진정한 저다움인 동시에, 조선식의 순종적 예술실천을 추사식의 잡종적 예술실천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진정한 견인차인 것이다.  280p


참고문헌


3. 내가 저자라면

1) 한국인의 기억상실

저자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세심한 눈빛으로 되집어나가고 있다. 야나기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해 짝사랑을 하는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저자는 단호하게 야나기의 관점을 반박하고 있다. 야나기의 관점이 터무니없는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하고 있으며, 선민사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존재의 속도를 앞지르는 기차의 속도에 따라 생겨난 조급함의 열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억의 되새김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근대 한국인의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되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47p

저자는 한국인들이 과거의 정체성(Indentity) 혼란을 ‘기억상실’이라는 단어로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기억상실의 원인을 숨가쁘게 진행되었던 강요된 근대화에서 찾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서구화,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조급성’은 외부의 문화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충분히 성찰하지 못한 여백의 실종을 만들어 내었다. 빠르게 질주하는 기차의 풍경은 이러한 한국인의 자화상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한국인들은 전근대의 취향인 된장찌개와 근대의 취향인 샌드위치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게 된다.


2) 한국인의 정체성 - 길은 명확하다.

“한국인의 격(格)은 빈틈없이 맞추어야 하는 눈앞의 실선 같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의식되는 머리 속의 점선 같은 것이다.”

한국인의 정신은 정해진 틀과 규칙 속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 숨쉬면서 그것을 동시에 뛰어넘는 이율배반적인 모순덩어리이다. 우리네의 마당극은 슬픔을 단순히 슬픔으로 끝내지 않고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한(恨)을 한으로 삭히지 않고, 흥으로 승화시킨다. 상극을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닌,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체성은 해학과 신명으로 발현된다. 저자는 서구 근대철학의 전반으로 비판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세계관, 칸트의 주체철학, 타자의 오리엔탈리즘, 민족주의, 사회주의 전반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곧추 세우고 있다.

저자는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철학에 ‘답’(答)이 없음을 만천하에 선언하고 있다.
이 길은 한국인이 걸어가야 할 길, 저 길은 세계인의 길이라는 도식적인 질문을 거부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의 논리가 아닌, 이것과 저것이 모순 덩어리처럼 융합된 길을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 길을 회통적 사고라고 명명하고 있다.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兩者擇一)이 아니라 회통(會通)이다.  25p

길은 명확해 보인다. 상극 속의 상생, 가동성 속에 정지태, 거칠음 속에 매끈함, 한 속에 신명, 슬픔 속에 해학,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저자는 김진석을 인용하면서 ‘과거를 지워버리고 미래로 날아로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과거를 등에 지고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의 몸짓’을 안내하고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우리는 문득 금빛기쁨의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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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 [34] 금빛 기쁨의 기억 - 강영희 최코치 2008.12.22 2528
1780 [35] 금빛 기쁨의 기억 - 강영희 file 양재우 2008.12.22 3930
1779 [36] 금빛 기쁨의 기억-강영희 2008.12.21 2315
1778 [31]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아르놀트 하우저 구라현정 2008.12.16 2804
1777 [31] 컬처 코드, 클로테르 라파이유 [1] 현웅 2008.12.15 3110
1776 (30)컬처코드-클로테르 라파이유 이은미 2008.12.15 2287
1775 [32] 컬처코드 -클로테르 라파이유 2008.12.15 2145
1774 (31)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신영복 [2] 소은 2008.12.15 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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