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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5일 11시 18분 등록

1. 저자 소개

 

나는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그 시대는 지금의 젊은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유로 무해한 사람들이 질고를 많이 당하고 죄 없는 사람들이 감옥에 많이 갇히는 시대였다.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이데올로기는 정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의 밥이었다. 당시 감옥은 국가 권력의 합법적 폭력의 기구였다.

 

악명 높았던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1968 8월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했다. 가입한 적도 없는 통일혁명당의 지도간부라는 꼬리표를 달고 27살 젊은 신영복은 잡혀 들어갔다. 그는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모두 여섯 번이나 사형 언도를 받았고, 이후 정상 참작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20년 만에, 창창한 젊은이는 47세의 중년이 되어서야바깥 세상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에게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책으로만 대한 그이지만, 그에게는 국화꽃 같은 향기가 난다. 그의 감옥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이 얼핏 떠올랐다. 일전에 책에서 만난 스톡데일과 빅터 프랭클이다. 그러나 신영복 선생의 모습은 냉혹한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한편 최종 승리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스톡데일의 강건함보다는 어떤 조건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 사람은 살아남는다고 주장한 프랭클의 이미지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러나 그와도 다른 향기가 난다. 국화꽃 향기가 나기까지, 20년 세월 동안 그는 어떤 것들을 통과했을까그는 죽음마저도 관조한 사람이다.  

제가 사형받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정리를 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같이 들어간 선후배들과 함께 정리를 했었지요. '죽음이란 삶의 완성이다'라고 말이죠. 생각하면 아주 낭만적인 논리입니다. 유관순 누나가 독립만세 부르다가 감옥에서 죽는 것은 유관순 누나의 삶의 정체성이 아름답게 완성되는 것이다. 충무공의 전사도 마찬가지다.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서 피 끓는 젊은이가 포악한 군사정권에 항거하다가 죽는 것도 식민지 청년의 삶의 완성이다, 그런 생각을 거지요.”

 

그랬는데 그는 어느 날 접견을 마치고 돌아 가시는 노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순간 심한 충격을 받았다. ‘죽음은 삶의 아름다운 완성이라는 말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래 생각했다. ‘인간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개별적인 존재로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 끝에 그는 관계라는 말에 도달했다. 우리 개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억 속에 흩어져 머무는 존재들인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혼자 죽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역시 그 동안 받아온 서구 교육의 존재론적인 사고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 관계는 그의 학문의 꾸준한 화두가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오히려 더 치열한 삶의 현장을 보았다.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만나고자 했던 사회의 소외 계층, 소위 사회 맨 하층부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을 그는 그곳에서 만났다. 교도소는 사회의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안고 있는 곳이었다. 다양한 범죄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우리 사회의 모순구조를 더 첨예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사회의 가장 힘든 자리에서 그 사회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사회의 중압 속에서 저지른 범죄들을 보면서 개인적인 책임보다는 사회적인 책임이 훨씬 크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는 또 다른 범죄의 구성원들인 사상범들을 만났다. 그는 해방 전후의 분단현실을 온몸으로 담아내는 그들과 일상을 같이 했다. 그들은 한국 현대사의 생생한 증인들이었다. 그는 체험하듯 역사를 대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생환(生還)된 역사였다. 그들을 통해 그는 살아있는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의 생활을 인생의 대학시절이었다고 정의한다. 그건 고리끼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고리끼 작품 중에 <나의 대학시절>이란 작품이 있다. 고리끼는 대학은 커녕 학교 교육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노동자 합숙소 생활을 자기 인생의 대학 시절이라고 불렀다. 이에 도전을 받은 신영복 선생도 같은 맥락에서 감옥을 자신의 대학시절이라고 부른다. 그는 가장 귀중한 인생의 깨달음을 바로 그 대학에서 얻었다고 믿는다. 지금도 그는 같이 징역을 살았던 사람들을 '동창생'이라고 부른다.

 

그는 책의 내용을 단순히 전달하는 강단의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공회 신학대에 마련된 강단에서 인간의 문제, 특히 민족과 사회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강의>를 하고 싶었다. 창백한 철학이나 무색한 사회과학 논리가 아닌, 그런 논리들이 우리 역사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강의를 하고자 했다.


감옥에서 그를 가장 괴롭힌 것 역시 실천의 문제였다. 책을 통해서 접한 수많은 지식들, 그리고 거기서 발전시킨 무수한 생각들은 현실을 만나지 못했다. 더우기 그는 감옥의 금지조항 때문에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겨우 허락된 것이 편지였다(세상에 첫 선을 보인 그의 책도 옥중서간 모음집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그는 잉크를 발라가면 마음을 정진하듯 한 자 한 자 엽서에 편지를 썼다. 아래 글은 <나무가 나무에게>란 책에 그가 쓴 글이다.

 

"편지에는 물론 사색적인 생각들을 많이 담았다. 내가 그러한 생각을 담기 시작한 것은 기록해두지 않으면 강물처럼 흘러갈 상념들이 아까워서였다. 그 상념들이 아까웠다기보다 그러한 상념을 길어 올린 그 세월을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유일하게 기록이 허용된 엽서에 적어서 집으로 보내두었다. 언젠가 그 글들을 다시 읽으면 잃어버린 세월을 생환(生還)할 수 있으리라는 가난한 소망을 그 글들에 담았다. 그러나 나의 편지글들은 감옥의 진상을 담고 있지 않다. 적나라한 진상을 에돌아가는 우회였다. 나는 지금도 어쩌다 그 글들을 읽을 때 행간에 묻힌 그 시절의 참담함에 놀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을 견디기 위한 나의 긴장 상태였다.”

 

한가지 아이러니! 그가 출소한 지도 이미 20년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몇 권의 주옥 같은 책을 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그 후속편인 <나무야 나무야>. <나무야 나무야>가 나온 지 2년 뒤인 1998, 그는 선생은 생애 첫 해외여행 길에 올랐다. 그가 여행길에 오른 날은 공교롭게도 그때로부터 28년 전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지던 바로 그 날이었다. 1심과 2심에서 이미 사형언도를 받은 그로서는 생과 사가 갈리는 날이었다. 한 날을 두고 28년 전과 후가 그렇게 뚜렷이 대비되었다. 새로운 세기를 맞는 길목에서 그가 띄운 해외엽서는 <더불어 숲>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2004, 이 책 <강의>가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이 책 <강의>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시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요. 물론 경전과 사전은 권수에서 제외되긴 합니다만, 집에서 보내주는 책은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 읽은 책을 반납해야 그 다음 책을 넣어주는 식이었어요. 멀리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책 수발을 받는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에 비해 동양고전은 한 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지요. <주역(周易)>은 물론이고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도 한 권이면 몇 달씩 읽을 수 있지요.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다는 교도소 규정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동양고전 몇 권을 한 권으로 제본해서 보내주도록 아버님께 부탁하여 받기도 했습니다. 나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옛 성현의 말씀에 대한 전문적인 조망이며 21세기 오늘의 우리 문명에 대한 심원한 통찰이란 점에서 역시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성현들 외에도, 그 어떤 위력에도 굴하지 않은 결연하고도 위엄있는 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은 실천을 요구한다

 

역시 대가답다. 20년 감옥에서 그가 이룩해낸 사상적 업적의 높이와 깊이가 잘 가늠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눈에 가장 들어온 것은 그가 고전을 읽는 목적이다. 그는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핵심은 그의 관점이다. 그의 관점은 그의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당면 과제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이 일관되게 고전 독법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다. 고전 원문 그 자체는 그에게 마중물의 의미를 넘지 않는다.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고전을 좀 더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강의>를 하는 게 아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철저히 반성과 실천의 모드로 그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고전 강독에 앞서 온고지신 정신(나는 그 정신을 오래된 미래의 정신’(24)이라고 부르고 싶다)은 필수지참 목록이다. 고전의 바다에 빠져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의 재료들을 맘껏 건져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고전 강독의 가장 큰 즐거움일 것이다. 그는 이미 바다에 빠져보았고, 그 진미를 그의 일관된 관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이 <강의>를 마련했다. 이 책에서 맛보는 고전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면 그것으로 이 책의 임무는 다한 것이라고 본다. 이 책 이후는 우리가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사도행전이 나온다. 영어로는 Acts이다. 사도들의 활약을 기록한 장이다. 애초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은 소외되고 겁이 많은 자들이었다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예수가 죽었을 때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예수와의 관계마저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죽은 이후에 예수의 뜻을 진정으로 깨닫고 아주 다른 사람들로 변모했다. 그들은 더 이상 어제의 그들이 아니었다. 예수가 생전에 못 이룬 일들을 감당해나가는 그들은 이제 굶주림도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다. 성경의 사도행전은 28장까지 쓰여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29(Act 29)은 예수의 뜻을 따르는 지구촌의 뭇 사도들에 의해 오늘도 쓰여지고 있다. 이 책을 내려놓는 내 마음 속에 사도행전의 그림이 떠올랐다. 저자의 희망은 이 책을 읽는 우리 모두의 어깨에 놓여 있다. 고전을 통해 우리가 오늘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영복 선생이 원하는 것이리라. 선생이 원하는 건 동양고전의 내용보다 동양고전에서 얻은 성찰적 관점인 것이다.

선생은 <강의>를 마치는 마지막 11장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의 자세이다.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이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1. 서론
 
5.
고전강의라기 보다는 오늘날의 여러 당면과제를 고전을 통해 재구성해보는 강의였습니다.


6.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하고 생각합니다. 고전 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6.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17. (내가 동양 고전을 읽게 된) 더 현실적인 이유는 당시 교도소 규정이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있었지요다른 책에 비해 동양고전은 한 권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죠이렇듯 나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 무엇이든 완전히 나쁘거나 완전히 좋은 것은 없다. 아무리 나쁜 일을 당해도 그것을 뒤집어 교훈을 삼을 수 있고, 또 그것을 좋은 기회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책 저자가 교도소의 제약을 이용해 동양 고전을 독파한 것처럼. 

 

21. 5천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중국 고대 문헌은 전승과 해독에 있어 세계 유일의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21.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시한 문안도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무한 경쟁 체제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론 그리고 최대한이 사회 건설 담론이 개화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전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23.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입니다.

 

24.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입니다. 작은 거인이나 점보 새우와 같은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합니다…<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25. 고전원문은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마중물의 의미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27.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27. 과거의 사상과 현대의 사상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래는 오래된 과거라 했습니다. 이것은 이를 테면 사상의 시간적인 존재 형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은 시간적인 존재 형식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존재 형식도 갖습니다. 동양이라는 어휘 그 자체가 공간적 의미입니다. 서양에 대한 동양이란 뜻입니다.

28.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함빈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응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29.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5. 체면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관계를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체면은 사회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 체면은 겉치레요, 버려야 할 구시대의 잔재 같은 것이라고 배운 우리들에게 신영복 선생의 시점은 다른 잣대를 건네준다. 비단 이것 뿐이랴. 
 
36.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知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
? 수首의 회의문자 會意文字입니다. ?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 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

38.
우주宇宙라는 개념도 우宇와 주宙의 복합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는 물론 공간개념입니다. 상하사방이 있는 유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는 고금왕래의 의미입니다. 시간적 개념입니다. 무궁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
 
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1.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場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2.
동양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

43.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용中庸이 그것입니다.

 

45.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47.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52.
시의 정수는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 사실성과 진정성의 문제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소위 상품미학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CF가 보여주고 약속하는 이미지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광고 카피는 허구입니다.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이버 세계 역시 허상입니다. 가상공간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입니다.

56.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
 
56.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
 
58.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詩三百篇 一言以蔽之思無邪). ‘사무사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
 
62.
문학이란..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 ……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바로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64.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

64.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이지 않습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65.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67. <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발이 땅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에 담겨 있는 사무사思無邪의 정서가 절실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

69.
중국 문명은 몇천 년의 기록이 마치 며칠 전에 띄운 편지처럼 읽혀지고 있는 유일한 문명입니다.

 

72. 한마디로 무일無逸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5.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75.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77.
농촌 사회의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노인들의 지혜와 희생이 역사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 그렇습니다.

 

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81.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

82.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신목자 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

3.
주역의 관계론

 
87.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주역의 담겨있는 사상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88.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방자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
  
92.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
 
94.
주관적 판단 형식은 근본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철학적 사유에 기초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서구적 판단 형식과 주역의 판단 형식의 차이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관계론적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01.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 밖에 없습니다
.
 
104.
이를테면의 개념이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이를테면 개체 간의 관계론이지요. 그런 점에서 위가 개인적 관점이라면 응은 사회적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보다는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실위失位도 구咎요 불응不應도 구咎이다. 그러나 실위이더라도 응이면 무구無咎이다라고 합니다. 실위도 허물이고 불응도 허물이어서 좋을 것이 없지만 설령 어느 효가 득위를 못했더라도 응을 이루고 있다면 허물이 없다는 것이지요
.

105.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 ……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德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지천태地天泰


109.
태괘는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합니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화합하여 서로 교통하는 괘입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은 물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연의 형상과는 역전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태화泰和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위로 향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는 이치입니다. 서로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110.
혁명은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태화의 근본임에 틀림없습니다.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잠재적인 역량을 해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혁명은 흔히 혼란과 파괴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여러분은 지천태라는 뒤집힌 형국, 즉 혁명의 의미가 어떻게 태화의 근본일 수 있을까 다소 납득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치르지 않은 사회가 두고두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 현장이기도 하지요
.
113. ‘
무평불피无平不陂 무왕불복无往不復은 어려움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한번 겪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마음을 곧게 가지고 최초의 뜻, 즉 믿음()을 회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천지비天地否


117.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괘를 비괘否卦라 이름 하고 그 뜻을막힌 것으로 풀이합니다. 비색否塞, 즉 소통되지 않고 막혀 있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천지폐색天地閉塞의 괘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고 땅의 기운은 내려가기 때문에 천지가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저 혼자 높고 땅은 하늘과 아무 상관없이 저 혼자 아래로 향한다는 것이지요.

119.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泰인 까닭, 그것이 비否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
.

120.
태괘는 선길후흉先吉後凶임에 비하여 비괘는 선흉후길先凶後吉이라 할 수 있습니다주역은 이처럼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궤를 불면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혀용하지 않습니다
.

산지박山地剝


122.
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象曰 君子得輿 民所載也 小人剝廬 終不可用也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소인은 거처를 앗긴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백성의 추대를 받게 되고, 소인은 거처를 앗기고 종내 쓰일 데가 없어진다
.

122.
상구의 양효는 관어貫魚의 꿰미 또는씨 과실혹은 최후의 이상으로 읽습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내가 좋아하는 글입니다. 붓글씨로 쓰기도 했습니다. 왕필 주에서는 이 석과불식을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독전불락獨全不落 고과지우석故果至于碩 이불견식而不見食”, 즉 떨어지지 않고 홀로 남아 씨 과실로 영글고 먹히지 않는다고 풀이합니다. ‘먹지 않는다보다는먹히지 않는다’(不見食),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이 괘의 상황은 흔히 늦가을에 가지 끝에 남아 있는 감()을 연상하게 합니다. 까마귀밥으로 남겨두는 크고 잘생긴 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비단 감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고 씨 과실로 남기지요
.

지뢰복 地雷復

 

123.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4. 박괘는 늦가을에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裸木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124.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허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립성, 정치적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화수미제火水未濟


125.
未濟亨 小狐?濟 濡其尾 无攸利
미제괘는 형통하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

127.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128.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
 
129.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

129.
내가 붓글씨로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130.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변화입니다
.

131.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132.
八十年前渠是我 / 八十年後我是渠

80
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
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 서산대사가 자신의 영정에 쓴 시

 
4. <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141.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142.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學而」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

144.“
전傳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不習)있지는 않은가
?
 
144.
어쨌든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時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
 
145.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

146.
그런 점에서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 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재편 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정치 혁명 또는 경제 혁명이나 제도 혁명 같은 단기적이고 선형적線型的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不可逆的 구조 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149.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

149.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

150.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

150.
君子不器  ―「爲政」


152.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모두 익혀야 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文史哲 시서화詩書畵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고전, 역사, 철학이라는 이성理性뿐만 아니라 시서화와 같은 감성感性에 이르기까지 두루 함양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156.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159. ‘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 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의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상품미학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주변부의 종속 문화가 갖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중심부로부터 문화가 이식되는 주변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미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

160.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160.
소위 독특獨特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identity)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他者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데리다J. Derrida의 표현에 의하면 관계 맺기와 차이 짓기, 즉 디페랑스differance(差延)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F. Saussure의 언어학이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차이란 두 실체 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형성하는 두 개의 독립 항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의 경우에는 이러한 독립 항목이 전제되지 않는 것이지요. 모든 것에 대한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차이가 본질이 되는 역설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동양적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대비의 방식은 이러한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우회하고 뛰어넘는 탁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2. ‘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

164. “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구성 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

168. 마음()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 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9.
운동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과의 접촉 국면을 확대하는 것, 그 과정을 민주적으로 이끌어가는 것 그리고 주민과의 정치 목적에 대한 합의를 모든 실천의 바탕으로 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로서의 덕이 사업 수행에 뛰어난 방법론으로서 검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
 
172.
정正은 정整이며 정整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

172.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顔淵」

번지가 인仁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이다.” 이어서 지知에 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知란 지인知人이다.”

174.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
 
175.
지知와 애愛는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
 
179.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爲政」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179.
글자의 구성도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

181.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고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따라서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
 
183.
공자가 이 구절에서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바로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특수한 경험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과 필연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온고溫故와 지신知新을 아울러야 하는 것이지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 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不患人之不知己患不知人也)이라 할 것입니다
.

184. “
머리는 하나지만 손은 손가락이 열 개나 되잖아요.”내가 반론을 폈지요.“머리는 하나지만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은데요?”그의 대답은 칼로 자르듯 명쾌했습니다
.
머리카락이요? 그건 아무 소용없어요. 모양이지요. 귀찮기만 하지요
.”
 
187. “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법이지요. 그나마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은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노력 때문입니다.

188.
공을 숨기고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189. 모든 타인은 그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190.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未可也/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如鄕人之善者好之其不善者惡之  ―「子路」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
“(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

192.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
 
194.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 ―「雍也」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196.
상품미학이란 상품의 표현형식입니다.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디자인된 형식미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상품미학은 광고카피처럼 문文, 즉 형식이 승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감성이 상품미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의상과 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적 상황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지요
.

197.
형식미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미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하게 되고 급기야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상품 사회의 문화적 상황입니다. 상품의 구매 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 등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광고 카피 역시 소비자가 상품이나 상품의 소비보다 먼저 만나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그 상품에 담겨 있는 사용가치에 대하여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소비 단계에서 그 허위가 드러납니다. 이 약속이 배반당하는 지점, 즉 그 형식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지점이 패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

198.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

199.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199-200.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이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

 

3. 내가 저자라면

 

 

고전은 내게 낯설다. 사부님이 고전을 자주 인용하셔서 고전의 현대적 해석이 갖는 힘에 겨우 주목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번 읽은 일연의 <삼국유사>와 사마천의 <사기>가 그나마 내게서 고전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거두어갔다. 이 책을 읽으니 이제 고전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부님이라는 좋은 안내자에게서 진정한 프로 안내자들을 소개받은 기분이다. 그들은 고전에 대한 나의 관심을 충분히 고취시켜 주었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고전이 이 친절한 프로 안내자들 덕에 나의 양식의 보고가 될 전망이다. 균형 잡힌 시각과 큰 눈으로 역사를 조망하는 그들의 역량은 독자의 식견을 보강하고 시각을 잡아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패권 경쟁이니 계급관계니 포섭기제니 초국적 금융자본이니 하는 래디컬한 마르크시스트적 용어들을 여전히 사용하고는 있지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저자의 따뜻한 역사관 때문이다.

 

여행을 할 때 여행에서 무엇을 얻는냐 하는 문제는 다분히 여행자 개인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여행지가 전혀 낯설고 사전 정보를 얻기 어려운 곳일 때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럴 경우 여행의 성패는 여행을 안내하는 자의 능력과 자질에 더 많이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영복 선생은 참으로 유일하고도 의미있는 안내자다. 그가 가르키는 손가락의 방향을 따라간 곳에서 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개인과 사회라는 이슈와 다시 대면했다. 그것은 오래 전 대학 시절에 가볍게 고민하고 내려놓았던 것이다.

 

역사에 보면 욕된 삶을 견뎌 끝내 뜻한 바를 이룬 인물들이 많다. 문왕은 갇힌 채주역을 풀었고, 공자는 횡액을 만나춘추를 지었고, 굴원은 쫓겨나서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이 실명하자국어가 새겨졌고, 손자는 다리가 잘린 뒤 병법을 정리했으며, 한비자는 감옥에 갇혀세난고분을 지었다. ‘시경 3백편의 시도 성현들이 억울함 속에서 지어냈다고 한다. 그들이 오욕을 참고 물러나 문장으로 비분을 풀어낸 것은 후세에 자신의 뜻과 존재를 나타내고자 함이었다. 사마천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신영복 선생에게는 비분을 풀어낼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읽고 또 읽었고 머리로 정리했고 그것을 다만 가슴에 썼다. 그가 가슴에 써내려 간 글들은 석방 이후 이토록 감개무량한 책들로 이 세상과 만났다.

 

그의 글에는 분노와 비분 강개가 보이지 않는다. 이미 모든 것은 녹고 삭아서 그만의 사상으로 정립되었다. 선생은 관계론이라는 칼을 들고 분별지()로 층층이 쌓인 우리의 머리 속을 천천히 헤쳐 놓는다. 이 글을 읽고 곳곳에서 큰 숨을 내쉬게 되는 것은 단순히 논리의 위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심장(heart)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이라고 한 그의 말의 진정성과, 사상의 존재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믿는 그의 고뇌가 이 책 안에는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책은 또 하나의 고전 해석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175)

 

나는 대학 때 소위 운동권이라는 데서 잠시 있었고, 난무하는 주장에 질려(아니 감당할 대담한 심장이 없어서)그 세계를 떠났다. 그 세계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군사 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은 적당한 시기에 운동권을 떠났거나, 현장으로 나갔다가 문민정부와 함께 그들이 혐오하던 정치판 한 가운데로 나아갔다. 현장이라고 믿은 공장지대에 나가 끝까지 고투하던 이들도 어느 순간 세상과 타협하고 자기 길을 갔다. 그도 저도 아닌 부류들은 한 물간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는 구태의연한 논객으로 남았다. 세파에 굴하지 않고 그 때의 치열한 정신을 지켜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심이 고개를 들 때 우리는 선생 같은 분을 만나 고개를 숙이게 된다. 자신의 한계와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비판적 성찰을 하나의 학문적 체계로 정립하려 애쓰는 그는 진정한 학자다. ‘행동하는 양심은 밖으로 뛰어다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좁은 책상에 앉아 있지만 절대로 사상에 갇히지 않고 유연하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먼 곳을 본 사람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바깥 세상에 있던 우리들이었다. 갇혀 있던 그는 오히려 더 멀리 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생각의 찌꺼기'인 책과 '우리가 살고 있는현실을 끊임없이 연결하라고 촉구한다. 체제가 내린 억울한 형벌에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자신 먼저 들여다 본 선생은 오늘도 큰 산처럼 의연하게 버텨서서 우리에게 품격있는 문장으로 권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476)

 

이 책에서 배우는 것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비판적 평가   

 

서구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의 근검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대학 다닐 때 문고판으로 읽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당시 내게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읽을 만한 안목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뒤늦게 다시 신영복 선생의 날카로운 관점으로 베버를 보니 반갑다. 선생이 지적하듯 베버는 자본 축적 과정이 근대사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신영복 선생은 비극이라는 강한 단어를 쓰시지만)을 미쳤는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낭비체제를 프로테스탄즘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베버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이론을 수정해야 했을 것이다. 동양 사상은 현세를 신의 소명과 직선적으로 연결시키는 단선적인 신학적 사유체계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본주의 태동의 저해요소로 본 동양의 형식주의와 체면 문화 역시 베버는 온당하게 그 의미를 사회적 맥락에서 읽지 못했다고 신영복 선생은 주장한다. 애석하게도 동양 사상의 저변에 대해 적절한 이해를 상실한 베버의 시각은 그간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의 원천으로 이용되어왔다.

 

우리의 영어교육

 

신영복 선생이 예로 들고 있는 우리 영어 학습의 실태, 나 역시 고소를 금치 못한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받은 영어 교과서에는 실제로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되는 예문들이 있었다. 이런 문장들은 실제 회화에서 거의 써먹을 일이 없다. 당시 우리가 배운 영어는 현장 영어가 아니었다. 영어를 너무도 좋아해 열심히 공부한 나는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원어민 교사의 컨버세이션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애석하게도 그녀의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연습하고 발음한 영어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영어였다. 신영복 선생은 할아버지께서 누님들의 영어 교과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 길게 탄식하셨다는 이야기를 책에 적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영어의 문제가 아니라, 영어를 제대로 모르고 잘못된 예문으로 가르친 우리 스승들의 문제이다. 물론 제대로 영어를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미국의 문화를 반영하는 예문이지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우리 교과서는 아닌 것이다. 서방과 동방의 정신세계의 차이는 언어에 명징하게 들어있다.

 

백범과 신영복, 가슴에 두 손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heart)이다. 백범은 백범 일지에 썼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로도 인류가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그리고 신영복 선생은 이 책에 이렇게 썼다.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이 인성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자 최후의 방법이다. 사상의 장을 문사철의 장으로부터 시서화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한다.’(510)

 

둘은 같은 것을 조금 다르게 이야기할 뿐이다. 우리는 가슴에 두 손을 얹은 채 이 세상을 느끼고 사랑해야 한다.

 

옛 것과 새로운 것, 온고지신의 정신

 

시간에 대한 그의 통찰이 유익해서 여기 정리해본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간다고 생각하는데는 두 가지의 잘못된 점이 있다. 시간을 객관적인 실재로 인식하는 것과, 시간이 미래로 흘러와서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먼저 시간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방식일 뿐이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강물과는 반대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서 흘러와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긴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단절된 채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차원에서 편의를 위해 재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다. 온고지신의 정신은 그런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보고 온고(온고)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온고보다는 지신에 무게를 두어 고를 딛고 신으로 나가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온은 보존의 의미뿐 아니라 단절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옛 것 속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도 함께 있다. 그러므로 온은 생환과 척결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 그 속에 있는 가능성은 찾아오고(생환), 가로막는 장애는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척결). 척결하지 않은 과거는 인생의 짐이 될 것이고, 과거에서 찾아내는 가능성은 내 인생의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시간의 문제에 덧붙여 선생의 말씀 하나를 여기 인용한다.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충분히 낡은 것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505)

나에게 세상을 맞추는 어리석은 사람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고 저는 믿습니다.’(187)

이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의 개념을 거꾸로 생각하여,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익을 추구했던 아니타 로딕이야말로 바로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한 어리석은(unreasonable) 사람이었다. 바디샵이 로레알에 인수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조지 버나드 쇼의 아래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그녀의 입장을 대신했다.

'The reasonable woman adapts herself to the world; the unreasonable one persists in trying to adapt the world to herself. Therefore all progress depends on the unreasonable women.'

 

 

이 책이 던져주는 과제

 

비교함으로써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신영복 선생은 말한다. 이유인즉슨 차이에 주목하다 보면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고 대부분 지엽적인 것을 비교하게 된다는 것이다. 차이에 주목하면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확대된다. 그의 말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비교적 시각은 결국 한 쪽을 부당하게 왜곡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이라는 것은 연구하는 자의 관점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어차피 대상의 비교는 불가피하다. 비교 방식의 위험을 이야기하는 신영복 선생 역시 서구와 동양 문명의 차이를 단선적으로 비교하는 자가 당착에 빠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점은 저자도 잘 알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면성을 띠지 않는 시각이나 관점은 있을 수 없다. 학문의 중립성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결국 중요한 건 비교의 목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점에서 이 책이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대상의 차이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독자성과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결국 그런 정체성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 책에서의 비교는 결국 고전 강독의 화두인 관계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저자는 일말의 타협 없이 자신의 목적을 향해 묵묵히 돌진한다. 그의 눈길은 주류 담론이 되어버린 서구 자본주의의 세계화 논리에 일방적으로 주도되어온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정체성에 닿아 있다.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입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실천적으로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33)’

 

그는 한 번도 실천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강의>를 전개하고 있다. 전개해가는 과정속에서 펼쳐지는 그의 사상의 지도는, 20년을 묵묵히 다져온 그 만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사색이 아로새겨진 것이어서 문장의 갈피마다 감탄을 가져다 준다.

 

사부님은 언젠가 연구원 수업에서 말씀하셨다.

 

동양 고전의 생각은 이미 우리 디엔에이에 들어와 있는 코드와 같은 것이다. 이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가려져 익숙하지 않은 것 뿐이다. 그것은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찾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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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8.12.19 14:15:29 *.67.52.186

문체가 굉장히 따뜻하시네요.

'경제적 공포'의 저자 비비안트 포레스테와 닮은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

우석훈 교수도 우연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 3명이 여성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비비안트 포레스테의 문체를 좋아합니다.

책을 읽어도 저자한테 영향을 받지 않는 좀 냉정한 면이 있는데...

책을 지으시면 많은 분들한테 영향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소은
2008.12.21 14:52:54 *.127.99.9
지현씨가 병경연 여러 글에 달아주는 댓글과, 지현씨가 가끔 올리는 글 저 역시 '유심히' 보고 있어요.
지현씨 글을 보면 지현씨는 속사람이 참으로 강건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사람이 비비안트 포레스테의 문체와 견주어 저의 글을 칭찬해주니 부끄럽지만 한편으로 고맙고,
용기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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