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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2일 11시 53분 등록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박규태 옮김/ 문예출판사


1. 저자에 대하여

20세기 최고의 인류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베네딕트는 미 전시정보국의 요청으로 1945년 10월 <<일본인의 행동 패턴>> 이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이 책의 근간이 된다.

한 나라를 문화적으로 규정하는 책을 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베네딕트는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미국 내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면담만으로 이런 책을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책은 일본 문화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베네딕트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떠올리면서 일본에 관한 문헌을 읽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무엇이 이상한가? 그 이상한 그림을 이해하려면 내가 무엇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일까?”[21]

그녀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면서 문제에 접근하고 일본 문화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론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일본문화를 분석해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녀의 저술은 일본인의 계층적 위계질서, 하지(恥)와 명예 관념, 기리(義理), 닌죠(仁情), 온(恩) 개념 등을 명확하게 분석해 냈고, 차후 일본 문화 분석의 기본적인 준거가 되었다.

<< 출판사 저자 소개 >>
1887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했다. 1905년 루스는 어머니의 모교이자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인 바사대학에 입학, 졸업 후 몇 년간 캘리포니아의 한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영어를 가르친다. 그러나 1919년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 입학하여 새로이 인류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겨 프란츠 보아즈 교수의 지도 아래 본격적으로 인류학 공부에 전념한다. 1923년 3학기 만에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북아메리카 수호 신령의 개념〉으로 학위를 받은 그녀는, 보아즈 교수의 지도 아래 뛰어난 연구 업적을 거두며 미국 인류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성장해갔고, 마침내 컬럼비아대학의 교수로 근무하게 된다.

1934년 루스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작인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을 발표, 문화상대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강화해 나갔고, 1940년에는 《종족(Race:Science and Politics)》을 발표하여 국내에서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1943년 루스는 미국 전시정보국 해외정보부 문화연구기초분석 책임자로 부임한다. 그리고 1944년 해외전의분석과로부터 일본에 대한 연구를 위촉받는데,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말기로 접어들 무렵으로 일본과의 심리전을 위해 일본인의 행동 패턴을 연구할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던 때였다. 1946년 그녀는 《국화와 칼》을 출간했고, 이 책은 미국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일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8년 루스는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서문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이 일본의 패색이 짙을 때조차 왜 기꺼이 전투를 계속 수행했는지, 왜 포로가 되기보다 차라리 죽기를 자처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녀는 자신이 관찰한 그들의 모순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예컨대 일본인은 매우 예의 바르면서도 동시에 매우 무례하다. 그들은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떤 변혁에 있어서는 매우 유연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매우 복종적이지만 동시에 상부에서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은 매우 충성스럽지만 매우 반역적이기도 하다. 그들은 잘 훈련되어 있지만 종종 반항적이기도 하다. 그들은 칼로써 기꺼이 죽음을 택하지만 동시에 국화의 아름다움에 매우 민감하기도 하다.[11]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일본에서 현지 조사를 수행했던 몇몇 서구 과학자들은 베네딕트의 작품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느꼈다. <<국화와 칼>>은 일본인을 너무 완고하고 의무나 사회적 지위에 지나칠 정도로 얽매여 있고 너무 이데올로기에 봉헌적이고 세상에 대한 평판에 너무 신경 쓰는 존재로 묘사했기 때문이다.[11]


제1장 연구 과제 : 일본


나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떠올리면서 일본에 관한 문헌을 읽었다. “이 그림은 무엇이 이상한가? 그 이상한 그림을 이해하려면 내가 무엇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일까?”[21]


인류학자는 원시 부족이든 문명국이든 인간의 행동은 일상생활 속에서 학습되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떤 국민을 연구하든 지극히 인간적인 소소한 일상생활에 주목할 때라야 비로소 이와 같은 인류학적 전제가 지니는 중요한 의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리 기괴하게 보이는 행동이나 견해라 할지라도,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은 그의 경험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일본인의 기이한 행동에서 무언가 당혹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일본인의 생활 속 어딘가에 그런 기이한 행동 양식을 만들어낸 일반적인 조건이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25]


이 책은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적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가 안고 있는 결함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미국을 미국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 프랑스를 프랑스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 러시아를 러시아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관해 우리가 여전히 지독한 편견에 가득 찬 채 지극히 막연한 관념만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27, 28]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강인한 정신은 사후 천 년이나 지속될 수 있다”고 여긴다.[55]


일본 포로들에게 천황은 일본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천황이 없는 일본은 일본이 아니다.” “천황이 없는 일본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일본의 천황은 일본 국민의 상징이며 그 종교생활의 중심이다. 천황은 초종교적 대상이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에 패하더라도 천황에게는 패전의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 국민은 천황이 전쟁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일본이 전쟁에 패하면 그 책임은 천황이 아니라 내각과 군 지휘관들이 져야 한다.” “설령 일본이 지더라도 일본인은 열이면 열 모두 계속해서 천황을 숭배할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천황을 모든 비판을 넘어선 존재로 여긴다.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회의적인 조사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다.[62]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국화와 칼>>을 “학문적 서적이 아니다”라고 전면적으로 부정한 윤리학자 와츠지 데츠로의 비판은 그 대부분인 바로 이 제2장에 관한 것이다. 그는 제2장에서 베네딕트가 ‘일본인’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일부 군인’이라든가 ‘국수주의적 군인’ 혹은 ‘일본군 포로’ 등으로 한정되어야만 한다고 비판한다. 가령 일본군의 무항복주의, 계층제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 정신력으로 물질력을 이긴다는 발상, 팔굉일우八紘一宇 등은 모두 군부가 국내의 반대 세력을 제압하려고 이용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요컨대 베네딕트는 불과 근래 십몇 년간 강제된 것에 지나지 않는 군부 이데올로기를 일본인 일반의 이데올로기 혹은 과거의 긴 역사에 일관된 일본인의 이데올로기로 일반화하는 오류, 부분적 사실을 통해 전체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저자 각주>[74]


제3장 각자 알맞은 자리를 취하기


일본은 근래 눈에 띄게 서구화되었음에도 여전히 귀족주의적인 사회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거나 대면할 때 반드시 상호간 사회적 차이의 종류와 정도를 암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80]


일본인은 누구나 먼저 가정에서 계층적 위계질서의 관습을 익힌 다음 그것을 경제생활이나 정치생활 등의 더 넓은 영역에 적용한다. 해당 집단 내에서 실제적인 지배력을 가진 인물이든 아니든, 일본인은 자기보다 상위의 ‘알맞은 자리’에 있는 인물에게는 거기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도록 배운다.[88]


하지만 농민 폭동의 지도자는 분명 엄격한 계층적 위계질서의 법도를 어긴 것이다. 설령 판결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내려진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은 상전인 다이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법도를 어긴 것이다. 이 점은 도저히 간과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동기의 정당성은 법도를 어긴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농민들도 이 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체념하곤 했다. 이때 사형을 언도받은 농민 지도자는 그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하여 폭동 지도자들이 기름 가마에 던져지거나 교수형을 받거나 혹은 못 박혀 죽는 형장에는 민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결코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이 바로 법이자 질서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형당한 지도자를 위해 사당을 지어 순교자로서 숭배하기도 했으나, 처형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계층적 위계질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99]


일본에서 이와 같은 이중 통치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12세기 이래 이미 대원수 쇼군이 실권을 박탈당한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을 통치한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직능 분할이 극단적으로 행해짐으로써, 유명무실한 주권자인 천황에 의해 세습적인 수령에게 위탁된 실권이 다시금 그 수령의 세습적인 정치고문에 의해 행사되는 경우조차 있었다. 요컨대 일본에서의 기본적 권력 행사는 늘 이중 삼중의 위탁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도쿠가와 막부의 명맥이 끊어지기 직전인 최후의 시기까지도 페리 제독은 일본 권력구조의 배후에 천화잉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100]


일본인이 천황에 대해 품어왔던 관념은 태평양 여러 섬에서도 그와 유사한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정치에 관여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관여하지 않는 신성왕神聖王 관념이 그것이다. 태평양의 어떤 섬에서는 이런 신성왕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며, 또 어떤 섬에서는 그 권력을 타인에게 위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신성왕은 말 그대로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102]


일본인은 다른 어떤 나라의 국민보다 그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미리 정해진 세계, 각자의 사회적 지위가 고정된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이와 같은 세계에서 법과 질서가 무력으로 유지된 200여 년 동안 일본인들은 면밀히 기획된 계층적 위계질서를 안전이라든가 보증이라는 말과 동일시하도록 잘 길들여졌다.[102]


유럽의 봉건제도가 붕괴된 까닭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세력을 확장한 중산 계급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런 중산 계급이 서구 근대의 산업시대를 지배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강력한 중산 계급이 발생하지 않았다.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들은 공인된 방법으로 상류 계급 신분을 ‘샀고’, 그리하여 상인과 하층 사무라이가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다. 서양과 일본 모두에서 봉건제도가 최후의 몸부림을 치던 시기에 일본이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보다도 더 많은 계급 간 이동을 승인한 것은 기묘하고도 놀랄 만한 의외의 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점을 뒷받침해줄 가장 유력한 증거가 있다. 즉 일본에서는 귀족 계층과 유산 계층 사이에 계급투쟁이 발생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다.[105]


일본인들이 정밀한 행동 지도를 좋아하고 신뢰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지도는 각자가 규칙에 따르는 한 반드시 안전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지도는 한도를 넘어선 침해에 대한 항의권을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교묘히 조종해 자기 이익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나아가 그 지도는 상호 간 의무 이행을 요구했다. 19세기 전반에 도쿠가와 막부가 쇠약해졌을 때에도, 일본에서 이 지도를 없애버리자는 의견을 제시한 집단은 하나도 없었다.[106]


여기서 베네딕트는 계층적 위계질서라는 일본의 종적 사회 구성 원리와 평등성이라는 미국의 횡적 사회 구성 원리를 대비하면서, 후자에 지고의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베네딕트는 제1장에서 시사한 문화인류학적 ‘차이의 논리’, 즉 모든 차이는 도덕적인 우열과는 무관하며 따라서 다름은 틀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방법론적 원칙을 스스로 부정해버린 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베네딕트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평등 원리로써 도덕적으로 열등한 계층적 위계질서와 맞서 싸우려는 미국인의 분노를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다만 양자를 비교하는 데 머물렀어야 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베네딕트는 제1장에서 내세운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을 이 책 전체에 걸쳐 일관성 있게 관철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요컨대 이 대목에서  잘 엿볼 수 있듯이 베네딕트는 종종 미국 문화가 일본 문화보다 뛰어나다는 자문화절대주의의 관점을 암암리에 내비치면서 <<국화와 칼>>을 기술한다는 혐의에서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듯싶다.<각주>[108, 109]


그러나 베네딕트는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 내린 비판적 결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토크빌은 이 책에서 미국적 민주주의에서의 자유는 바람직하지 못한 고립된 평등을 발생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귀족주의 시대를 거치지 않은 미국은 결국 돈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사람들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평등한 나라라고 결론 짓는다. 바꿔 말하면 미국식 민주주의는 평등의 원리에 입각해 있지만, 그런 평등의 원리를 지배하는 것은 결국 돈이라는 말이다. 베네딕트는 이처럼 미국적인 평등의 원리가 자본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각주>[109]


제4장 메이지 유신


반反 막부 세력이 승리를 거두어 1868년 왕정복고에 의해 천황과 쇼군의 ‘이중 통치’가 막을 내렸을 때,....[116]


갓 태어난 메이지 신정부의 이와 같은 괄목할 만한 개혁은 당시 일반 대중에게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보다 일반 대중이 가장 열광적으로 지지한 것은 1871-1873년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조선침략론이었다.[117]


정치 형태가 일본과 유사한 서구 제국의 사례와 비교해보건대, 양자 간의 참된 차이는 형식이 아니라 기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인은 과거의 체험을 통해 만들어낸 관습, 즉 그들의 윤리체계와 예절 속에 격식화되어 있는 오래된 복종 습관에 의존한다. ‘각하’들이 ‘알맞은 자리’에서 주어진 직분을 다하기만 하면 그의 특권은 국가에 의해 존중받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이는 일본에서 그것이 정책적으로 용인된다기보다는, 특권의 경계선을 넘는 것 자체가 괘씸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정의 최상층부에서는 ‘국민의 여론’따위는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정부는 단시 ‘국민의 지지’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국가가 그 권한의 영역을 지방 행정의 범위까지 침범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지배권을 황송하게 받아들인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를 하나의 필요악으로 느끼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일본의 눈으로 보면 국가는 더할 나위 없이 존귀한 지고선至高善과 마찬가지다.[125]


또한 국가는 국가대로 국민들이 소망하는 ‘알맞은 자리’를 인식하고자 세심하게 주의한다. 정당한 여론의 힘이 지배적인 영역에서는 심지어 국민을 위한 일의 경우라 할지라도 일본 정부는 마치 국민의 비위를 맞추듯이 그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중략) 일본인의 생활 양식은 각자에게 알맞은 권위를 할당하고 각각의 권위에 알맞은 영역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일본 문화에서는 ‘상급자’에게 서구 문화에서보다도 더 큰 존경을 부여한다. 그에 따라 ‘상급자’에게는 더 많은 행동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그만큼 더 ‘상급자’는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를 지켜야만 한다. “모든 것은 알맞은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일본의 좌우명이다.[125, 126]


이와 같은 일본 산업의 이원성은 일본인의 생활 양식에서 정치나 종교 분야에서의 이원성 못지않게 중요하다. 예컨대 일본의 정치가들은 다른 여러 분야에서의 계층적 위계제에 필적할 만한 상류층이 재계에도 필요하다는 방침을 정해놓고 있었다.(중략) 그리하여 재벌은 자신에게 이윤과 더불어 높은 지위를 보장해주는 일종의 지속적인 가부장적 온정주의 정책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다.[133]


정치, 종교, 군대, 산업에서도 각각의 영역별로 신중하게 계층적 위계질서가 세워져 있으며, 상급자든 하급자든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의 범위를 넘어서면 반드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알맞은 자리’가 유지되는 한, 일본인은 별 불만이나 저항 없이 살아간다. 그들은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평등이라든가 자유기업에 대한 신뢰가 미국인의 생활 양식의 특징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관념은 일본인의 인생관을 구성하는 중요한 특징이다.[135]


일본 국내에서는 계층적 위계질서가 일본 국민의 상상력에 꼭 들어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인의 상상력 자체가 계층적 위계질서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야심은 그와 같은 세계 내에서만 구체화될 수 있는 야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계층적 위계질서는 도저히 수출될 수 없는 치명적인 상품이었다. 외국의 다른 나라들은 일본의 이런저런 주장을 일반적이고 건방진 것으로, 아니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여겨 분개했기 때문이다.[135]


일본, 일본인, 일본 문화의 공시적, 구조적 특성을 규명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라고 밝히는 베네딕트의 주장과 관련해 종래 많은 평자들이 <<국화와 칼>>의 ‘비역사성’에 비판을 가했다. 대표적으로 러미스는, 베네딕트가 행한 작업은 주지의 사실들을 조합해 하나의 허구, 즉 ‘계급도 정치도 역사도 다 쏙 빼버린 나라로서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국화와 칼>>에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공업화를 다룬 장이 있지만, 일본 문화의 서술로 넘어가자마나 역사에 관한 장은 전혀 씌어지지 않은 것처럼 되어버린다. 최초의 네 장은 서론이며 주로 표준적인 역사서의 요약에 지나지 않는다. 베네딕트의 진짜 작업은 제5장 이후인데, 이 5장은 우선 ‘온’에 관한 논의부터 시작된다. 거기서는 경제도 정치도 권력도 계급도 역사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균질적이며 시간을 초월한 개념으로서의 ‘일본’이 주제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베네딕트는 가변적이고 동적인 측면을 무시한 채, 불변적이고 정적인 것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사실 <<국화와 칼>>의 일본사 서술은 메이지 유신에서 끝나며 그 후 일본이 군국주의화되는 다이쇼, 쇼와 시대의 역사가 경시되거나 무시되는데, 이 점에서도 <<국화와 칼>>의 비역사성이 지적될 수 있다.<각주>[139]


제5장 과거와 세켄에 빚진 채무자들


크건 작건 어떤 사람이 지고 있는 모든 채무를 일컫는 영어의 ‘오블리게이션’에 해당하는 일본말로 ‘온恩’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144]


일본인이 “나는 누구누구에게서 온을 입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누구누구에게 채무의 부담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채권자나 은혜 베푼 사람을 ‘온진恩人’이라고 부른다.[145]


어머니가 갓난아이 적에 그(어머니를 극진히 돌보는 아들)를 위해 해준 모든 일, 그가 소년이었을 때 어머니가 베풀어준 모든 희생, 성인이 된 후에도 그를 도와주었던 어머니의 모든 보살핌, 단지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어머니에게 지고 있는 모든 빚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그가 받은 모든 빚을 갚아야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온에는 애정이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빚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인은 애정이라든가 사랑이라는 것은 의무의 구속을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주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사람들은 천황에 대한 채무라 할 수 있는 이 황은을 무한한 감사로 받아들인다. 일본인은 조국과 자신의 인생과 신변의 크고 작은 일들이 잘될 때마다 항상 황은을 입고 있다고 느낀다.[146]


일본인은 부모가 자신을 키워준 것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을 잘 양육함으로써 자기 부모에 대한 온의 일부를 갚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식에 대한 의무는 ‘부모에 대한 온’에 포함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나아가 일본인들은 스승과 주인에게도 특별한 온을 느낀다.[148]


일본인들은 끊임없이 모순된 양가감정 사이에서 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의 구조로 공인되고 고정되어버린 관계에서는 흔히 이런 큰 채무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로지 전심전력을 다해 은혜를 갚도록 촉진하는 자극제로서 작용한다.[153]


아무리 복잡한 감정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온진’이 실제로 자기 자신인 한, 일본인은 안심하고 온을 입는다. 이를테면 그 온진이 ‘나’의 계층적 위계질서 속에 일정한 위치를 점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바람 부는 날에 모자를 집어준 사례처럼 나 자신도 아마 그렇게 했으리라 상상되는 경우라든가, 혹은 나를 숭배하는 사람일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만일 이런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 온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일본에서는 자신에게 지운 온의 부채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불쾌하게 느끼고 화를 내는 것이 미덕으로 치부된다.[155]


세켄世間이란 구미에는 없는 일본 특유의 생활 형태 혹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유대 관계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 society’와는 뉘앙스가 다르며, 사회보다 더 범위가 좁으면서도 일본인 전체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 인간관계의 틀에 가깝다. 회사, 관공서, 대학, 취미 활동 동아리, 동창회, 학회 등 모든 집단과 조직이 이런 세켄을 구성한다. 일본인은 이런 세켄 속에서 자기 자신보다도 세켄을 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그 세켄 속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겸손한 태도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무엇보다 강조된다. 그래서 일본인은 흔히 전체 의견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데는 소극적이 되기 쉽다. 또한 세켄을 사는 사람들은 세켄 바깥의 현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그들의 세켄 속에서 오늘을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 된다. 그 결과 일본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개체가 개성적인 개인으로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다. 부모들은 마음이 내키든 안 내키든 ‘세켄’의 관습에 맞추어 아이를 교육해야만 하며, 모든 인간관계가 이 세켄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아베는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세켄 속에 유폐되어 있던 개인을 해방시켜야 하며 ‘개인’이 ‘세켄’에서 자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61]


제6장 ‘만 분의 일’의 온가에시


일본에서 채무(온) 관념의 배후에 깔린 강제력은 미국에서 청구서나 저당이자 지불 의무의 배후에 있는 강제력만큼이나 강력하다는 말이다.[165]


<< 일본인의 의무 및 반대 의무 일람표 >>


1. 온 : 수동적으로 입는 의무. 어떤 사람이 ‘온을 받는다’거나 혹은 ‘온을 입는다’고 말한다. 즉 온이란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의 의무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온이 있다.

* 고온皇恩 = 천황에게 받은 온.

* 오야노온親の恩 = 부모에게서 받은 온.

* 누시노온 主の恩 = 주군에게 받은 온.

* 시노온師の恩 = 스승에게 받은 온.

* 이 밖에 살아가면서 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받은 온.

==> 이때 어떤 사람에게 온을 준 자는 모두 그 사람의 ‘온진’이 된다.


2. 온의 반대 의무 : 누군가에게 온을 입은 자는 그 온진에게 ‘부채를 갚아야만’하는 반대 의무를 가지게 된다. 이는 적극적인 갚음(온가에시) 관점에서 본 의무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크게 두 종류가 있다.


(1) 기무義務 :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모두 갚을 수 없으며, 또한 시간적으로 한계가 없는 의무로서 다음 세 가지로 구분된다.

* 충 = 천황, 법률, 일본국에 대한 의무

* 효 = 부모 또는 조상에 대한 의무. 자손에 대한 의무까지도 암암리에 함축.

* 닌무任務 = 주어진 일에 대한 의무.


(2) 기리義理 : 자기가 받은 온과 같은 수량만큼만 갚으면 되고 또한 시간적으로도 제한된 부채를 가리키며, 다음 두 가지가 있다.

* 세켄에 대한 기리 : 주군에 대한 의무, 가까운 친척에 대한 의무, 타인에 대한 의무 및 타인에게서 받은 온(가령 타인에게서 돈이나 호의를 받았거나 또는 어떤 일에 도움이나 협조를 받았을 때 발생하는 온), 먼 친척(숙부나 숙모 혹은 조카)에 대한 의무(특별히 이들로부터 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공통의 조상에게서 함께 온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기인하는 의무) 등이 있다.

* 자기 이름에 대한 기리 : 이는 독일어의 ‘명예die Ehre’에 해당하는 일본식 개념으로서, 타인에게 모욕이나 비난을 받았을 때 그 오명을 ‘씻어내야만 하는’ 의무, 즉 보복이라든가 복수의 의무(이런 복수는 불법적인 공격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실패라든가 전문적인 일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의무, 일본인으로서의 예절을 다할 의무(가령 모든 예의범절을 지키고, 분수와 신분에 알맞은 생활을 해야만 하며,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따위의 의무) 등이 있다.[166, 167]


그러니까 좋은 며느리를 선택하는 데 결정권을 가진 것은 당사자인 아들이 아니라 그가 속한 가문인 셈이다.(중략) 어떤 경우든 착한 아들이라면 부모의 온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부모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결혼 후에도 그가 갚아야 할 보은의 의무는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아들이 가계 상속자일 경우에는 부모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중략) 그러다가 결국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는 어머니의 강요에 굴복하고 마는데, 이는 물론 효를 행하기 위해서다.[171, 172] ☞ 이제는 전부 사라진 문화 아닌가? 천황에 대한 생각도, 이 책에 나타난 전반적인 일본문화에 관한 내용 중 이미 옛 것이 되버린 문화가 많은 것 아닌가?


충성의 대상이 천황에게로 전이되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일본 역사의 모든 시기에 걸쳐 단 하나의 동일한 황실이 끊기지 않은 채 계속 황위를 계승해왔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은 유사 이래 36개의 왕조가 교체된 중국과는 달랐다. 일본은 지금까지 여러 역사적 변천을 거쳐왔지만, 그 어떤 변혁에서도 결코 사회 조직이 지리멸렬하게 파괴된 일이 없이 항상 변하지 않는 형태를 유지해온 나라였다.[178]


이처럼 천황은 여러 방법을 통해 국내의 정쟁이 조금도 미치지 않는 곳에 위치한 상징이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성조기에 대한 충성이 일체의 정당 정치를 초월한 영역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이, 일본의 천황은 ‘침범될 수 없는 존재’였다.[179]


천황이 입을 열자 전쟁은 끝났다. 물론 천황의 목소리가 방송되기 전에 완강한 반대자들이 황궁 주위에 비상선을 쳐서 종전 선언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 선언이 일단 방송으로 나간 후에는 모든 사람이 그것에 승복했다.(중략) 일본인은 이제 평화의 길을 따름으로써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기 위해서라면 죽창만으로도 적을 격퇴하고자 온몸을 바치겠노라고 했던 그들이었다.[182]


일본인은 비록 그것이 항복 명령이기는 했지만 명령을 내린 것은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패전에 임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충’이었다.[183]


이 장(6장)에서는 일본인이 생각하는 ‘온가에시repayment)’ (온을 갚는 것)의 의미와 유형 및 특히 일본인의 효와 충 관념에 대해 상세히 논급한다. 종래 한국판 <<국화와 칼>>에서는 이 ‘온가에시’를 ‘보은報恩’ 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일본인들의 ‘온을 갚는다’는 개념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보은’의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는 측면이 많으므로 이하에서는 ‘repayment' 혹은 ‘repaying’을 ‘보은’에 해당하는 일본어 그대로 ‘온가에시’라고 옮겼다.<각주>[184]


제7장 기리보다 쓰라린 것은 없다


일본인들은 법률상의 가족에 대한 의무를 매우 신경 써서 수행한다. 이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는 무서운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189]


만일 기리가 충과 충돌하면 사람들은 충에 어긋나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히 기리에 충실하고자 했다.[193]


제8장 오명 씻어내기


‘이름에 대한 기리’는 자신의 평판에 오점이 없도록 해야 할 의무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름에 대한 기리란 과거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특정한 온에 구애받지 않은 채 자신의 평판을 빛내는 여러 가지 행위를 뜻한다. 가령 거기에는 ‘분수에 맞는 자리’가 요구하는 이런저런 예절들을 잘 지키는 것, 고통 앞에서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이는 것, 전문 직업이나 전문적 기능에 있어 자신의 명성을 옹호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름에 대한 기리에는 비난이라든가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도 내포되어 있다.... 일본인은 자신의 명예가 훼손당하는 것을 그저 가볍게 얼굴을 찡그리는 정도로 끝내지 않는다.[206]


일본인은 복수 또한 하나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사람은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모욕도 강렬하게 느낀다. 은혜든 모욕이든 그것을 되갚아주는 것을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인은 서구인처럼 이 두 가지를 구별해서 모욕은 침해 행위고 은혜는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207]


이름에 대한 기리 및 그 기리에 수반되는 온갖 적의와 조심스러운 기다림은 결코 아시아 대륙만의 특유한 덕목은 아니다.... 예컨대 중국인들은 모욕이나 비난에 대해 일본인처럼 신경과민이 되는 사람은 ‘소인小人’, 즉 도덕적으로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중국에서는 그것이 일본에서처럼 고결한 이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 않다.[208, 209]


이름에 대한 기리 속에는 복수 외에도 조용하고 감추어진 많은 행동 양식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에게 흔히 요구되는 스토이시즘stoicism, 즉 절제와 자제도 이름에 대한 기리의 일부분을 이룬다. 예컨대 여자는 아이를 낳을 때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되며, 남자는 고통이나 위험에 직면할 때 초연해야만 한다..... 자제의 덕목은, 설령 완전하게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일본인이 지닌 자존심의 일부가 된다.[209]


나아가 이름에 대한 기리는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만일 이와 같은 기리의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스스로를 존중할 그의 권리는 박탈되고 만다.(중략) 우리는 각자 소득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당연시한다.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미국적 자존체계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계급이 아닌 소득에 따라 아이들 인형의 종류가 제한된다 해도 그것은 결코 우리의 도덕관념에 위배되지 않는다. 부자가 자기 아이에게 고급 인형을 사준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은 의심을 받지만, 알맞은 위치를 지키는 것은 훌륭하다고 칭송받는다.[211]


교사나 사업가가 각각 전문가로서의 이름에 대한 기리에 따라 행동하듯이, 그들은 학생으로서의 이름에 대한 기리에 자극받아 행동한다. 시합에 진 학생 팀은 그 실패의 ‘하지(恥)’(각주-여기서의 ‘하지’는 ‘치욕감’에 가깝다) 때문에 상당히 극단적인 행동 양식을 보였다. 예컨대 보트 선수는 노를 내동댕이치고 보트에 탄 채로 분해서 울어댔고, 야구시합에 진 팀 또한 한덩어리가 되어 엉엉 울었다. 미국에서라면 우리는 그런 행동을 좋지 않은 패자의 태도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에티켓으로는 패자는 의당 상대가 더 강한 팀이기 때문에 진 것이라고 승복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니까 패자는 승자와 악수를 나누는 것이 우리의 에티켓이다. 우리는 지는 것이 아무리 싫다 하더라도 패배했다고 엉엉 울거나 소리 지르는 사람을 경멸한다.[216]


친구나 동료와의 경쟁을 통해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 미국의 규칙이라면, 이에 비해 온恩에 입각한 일본인의 윤리에서는 경쟁을 허용할 여지가 매우 적다. 각 계급이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세밀하게 규정한 일본의 계층적 위계질서가 직접적인 경쟁을 최소한도로 억제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가족제도 또한 직접적인 경쟁을 최소한도로 제한한다. 일본에서는 제도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미국처럼 경쟁 관계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부자간은 서로 배척하는 일은 있지만 경쟁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일본인은 미국인 가정에서 아버지와 자식이 자동차를 사용하려고 다투거나 혹은 경쟁적으로 어머니나 아내의 주의를 끌고자 노력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워한다.[217]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복수가 모욕이나 패배를 당했을 경우 ‘바람직한 대응’으로 높게 자리매김되어왔다. 서구 독자를 상대로 책을 쓰는 일본인은 종종 생생한 비유를 써서 복수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를 묘사한다. 예컨대 가장 박애심이 많았던 일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니토베 니아조는 1900년에 펴낸 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복수에는 무언가 우리의 정의감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있다. 우리의 복수 관념은 마치 수학적 능력처럼 엄밀한 것으로서, 방정식의 두 항 모두가 만족되지 않는 한 우리는 무언가 못 다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오카쿠라 요시사브로는 <<일본의 생활과 사상>>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복수를 일본 특유의 관습으로 서술한다. “일본인이 지닌 이른바 심리적 특성의 대부분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태도 및 그것과 상보적 관계에 있는 태도, 즉 불결한 것을 싫어하는 성향에 기인한다. 참으로 그렇게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실제로 우리는 가문의 명예라든가 국가적 긍지 등에 가해진 모욕에 대해, 그것을 변명 같은 것으로 완전히 씻어낼 수 없고 본래대로 깨끗해지거나 치유될 수 없는 오점 혹은 상처로 여기도록 길들여져왔다. 일본의 사적 혹은 공적인 생활에서 매우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는 여러 유형의 복수들은 그저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결벽증적 국민의 아침 목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223, 224]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혹은 배척에 쉽게 상처받는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많다.(중략)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만일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기만 한다면 자신의 오명을 씻어주며 사후 명예를 회복시켜줄 수 있다. 이에 반해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시하면서 그것을 절망에 대한 자포자기적인 굴복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자살을 존중하는 일본인에게 그것은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해지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경우에 따라 자살은 이름에 대한 기리에 있어 당연히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장 훌륭한 행동 방식으로 간주된다. 가령 설날에 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채무자, 어떤 불운한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자살하는 관리, 끝내 이루지 못할 사랑을 동반자살로 성취하려는 연인, 정부의 대對 중국전 지연 정책에 죽음으로써 항의하는 과격한 애국지사 등은 모두 시험에 낙제한 학생이나 포로 되기를 거부하는 병사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최후의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227, 229]


우리가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은, 이런 태도와 더불어 일본인들이 전승국에 대단한 친밀감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종전과 동시에 일본인들은 매우 호의적으로 패전에 의한 일체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따뜻한 인사와 웃음으로 맞아들였고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 그들은 침울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232]


사실 일본인들은 그때에 비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일본인다운 반응을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맹렬한 노력과 단순한 답보 상태인 무기력 사이를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인들은 패전국으로서의 명예를 옹호하는 데 모든 뜻을 모은다. 그리하여 연합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런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긴다. 그 필연적 귀결로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무엇이든 연합군이 하는 대로 내맡기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런 목적을 가장 안전하게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무엇을 해도 안 될 것이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십상이다. 이렇게 해서 무기력이 점점 더 확산되어갔다.[233]


1946년 봄 일본 신문들은 “세계의 눈이 우리를 주목하는데” 아직도 폭격으로 인한 수라장을 정리하지 못한 채 아무런 공익사업에도 착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얼마나 일본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인가를 끊임없이 논했다.... 일본인에게는 이처럼 명예심에 호소하는 비판이 가장 설득력을 가진다.[233]


일본인에게 영원불멸의 목표는 명예다. 이를 위해서는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필수다.[234]


유럽인들은 어떤 개인이나 국가가 싸우는 경우에 먼저 자신들이 내세운 주장이 영원히 옳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가슴속에 축적된 증오나 도덕적 격분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일본인들은 침략의 근거를 다른 데서 구한다. 그들은 언제나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기를 원한다. 이때 그들은 서양 대국이 존경을 받는 것은 무력 때문이라고 여겼고, 그런 대국에 필적하는 나라가 되기 위한 방침을 취했다.... 그런데 그들은 비상한 노력을 경주했는데도 실패했다. 이는 그들에게 결국 침략이란 명예를 위한 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본래 기리는 공격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상호 존중의 준수를 동시에 내포하는 개념이었는데, 이제 그들은 패전에 임해 전자에서 후자로, 즉 침략 행위에서 상호 존중 준수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거기에는 분명 자신에게 심리적 폭력을 가한다는 의식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의 목표는 여전히 명예를 획득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235, 236]


이와 같은 사츠마 사건과 조슈 사건에 관해 노먼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양이의 선봉이었던 이들 번이 보인 태도의 배후에 어떤 복잡한 동기가 숨어 있다 한들, 그들의 행동이 보여준 냉철한 현실주의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상황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는 이런 현실주의는 일본인이 중시하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밝은 면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컨대 기리에는 달月과 마찬가지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가령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인 배척 법안을 만들게 했고 해군군축조약을 크나큰 국가적 치욕으로 느끼게 하는가 하면 급기야 저 불행한 전쟁 계획으로 내몰았던 것은 기리의 어두운 면이었다. 한편 일본으로 하여금 1945년 패전에 따른 여러 결과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은 기리의 밝은 면이었다고 할 만하다. 여기서도 일본은 변함없이 일본 특유의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37]


일본인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존경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보답이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기리를 모르는 인간’은 오늘날 일본에서도 여전히 ‘비열한 놈’으로 간주된다. 그런 사람은 친구들에게 경멸받고 배제당하기 일쑤다.[238]


제9장 닌죠의 세계


실제로 일본인들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청교도적이지 않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쾌락 추구가 가치 있는 것으로 존중받는다. 하지만 쾌락은 그 적절한 자리에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중대한 영역을 침해하거나 침입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241]


일본인이 가장 즐기는 소박한 육체적 쾌락의 하나는 온욕이다. 일본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농부나 천한 하인이라도 부유한 귀족과 마찬가지로 매일 저녁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하나의 일과다.[242]


수면 또한 일본인이 탐닉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가장 완성된 기술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자세로든 너끈히 잘 잔다.[244]


먹는 것 또한 온욕이나 수면과 마찬가지로 큰 즐거움이다. 그것은 마음껏 누리는 향락적인 휴식인 동시에 자기 단련을 위해 부과되는 하나의 훈련이기도 하다.[245]


로맨틱한 연애도 일본인이 널리 애호하는 ‘닌죠人情’다.(중략)

우리는 성적 향락에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이지만, 일본인은 그런 영역을 별로 시끄럽게 따지지 않는다. 일본인은 여타의 ‘닌죠’와 마찬가지로 성性에 대해서도 그것이 인생에서 낮은 위치를 점하는 한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닌죠’ 자체에는 조금도 나쁜 점이 없다. 따라서 성적 향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까다롭게 말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247]


일본인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양자를 명확하게 구변한다. 일본에서 이 두 영역은 모두 다 공공연히 인정된다..... 양자는, 한 쪽이 주요한 인간적 의무의 세계에 속하는 데 반해, 다른 한쪽은 사소한 기분 전환의 세계에 속한다는 식으로 구별된다..... 그들은 모두 이 두 영역을 별개의 세계로 본다.[248]


동성애의 도락 또한 전통적인 ‘닌죠’의 일부분을 이룬다.[251]

또한 일본인은 자위의 쾌락도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중략) 요컨대 자위는 일본인들이 조금도 죄악이라고 느끼지 않는 향락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예의 바르고 질서 잡힌 생활 속에서 자위가 차지하는 지위를 낮게 할당함으로써 그것이 충분히 통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252]


술에 취하는 것도 일본에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닌죠’ 가운데 하나다.[252]


이상과 같은 일본인의 ‘닌죠’관은 몇 가지 중요한 결과를 수반한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개의 힘이 각각의 영역에서 패권을 획득하고자 끊임없이 싸운다고 생각하는 서구인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뒤엎는다. 일본인의 사고방식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되도록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도 죄가 되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에 대립하는 양대 세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본인은 이런 신조를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라는 결론까지 도달한다.[253]


사실 일본인은 악의 문제를 인생관의 문제로 받아들이기를 내내 거부해왔다. 그들은 인간에게 두 가지 영혼이 있다고 믿는데, 그것은 서로 싸우는 선의 충동과 악의 충동이 아니다. ‘온화한 영혼’과 ‘거친 영혼’이 그것으로, 모든 인간의 생애 및 모든 나라의 역사에는 때로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때로는 ‘거칠어야’ 할 경우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니까 ‘거친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고 ‘온화한 영혼’은 천국에 간다는 식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두 개의 영혼은 각각 상이한 자리에서 요청되는 영혼이며, 모두가 하나의 필연이자 선으로 간주된다.[254]


일본 근대의 불교가나 국가주의 지도자들도 이와 동일한 논조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했다. 그들은, 일본에서는 누구든 태어날 때부터 선하며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나쁜 반쪽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다만 마음의 창문을 깨끗하게 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알맞은 행위를 하기만 하면 된다. 설령 ‘더럽혀졌다’ 하더라도 그 더러움은 쉽게 씻길 수 있으며 그러면 인간의 본질인 선이 다시 빛나기 시작할 것이다.[255]


‘닌죠’는 비난해서는 안 될 축복이라고 일컬어진다. 일본에서는 사상가들도 농민들도 ‘닌죠’를 비난하지 않는다.(중략)

일본인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의무 수행을 인생 최고의 임무로 여긴다. 그들은 온恩을 갚는 일이 개인적 욕망이나 쾌락의 희생을 수반한다는 점을 충분히 안다. 그러니까 행복 추구를 인생의 중대한 목표로 삼는 사상은 일본인들에게 놀랄 만큼 부도덕한 가르침으로 이해된다. 행복한 사람이 그것에 탐닉할 수 있을 때에만 탐닉해 기분을 전환하면 되는 그런 것일 뿐이며, 그것을 과장해 국가나 가정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충이라든가 기리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처음부터 각오한다. 그런 고통은 인생을 곤란하게 만들지만,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견뎌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온갖 쾌락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필요하다면 모든 쾌락을 단념할 자세를 갖추었다. 이를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며, 바로 그런 강인함이야말로 일본인들이 가장 칭송하는 미덕이 된다.[256]


이상에서 베네딕크는 ‘닌죠’를 주로 ‘쾌락을 추구하는 감각적인 인간 본성 human feeling’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한다. 그런 닌죠관은 내용상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본인의 닌죠 관념에 내표된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하는 데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베네딕트는 ‘기리와 닌죠 복합체’를 말할 때의 ‘닌죠’라든가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말하는 ‘마음(고코로)으로서의 닌죠’ 등과 같은 중요한 측면을 간과했다.<각주>[264]


제10장 덕의 일레마


일본인의 인생관은 충, 효, 기리, 닌죠 등의 개념에 그대로 잘 나타나 있다.[265]


일본인은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서도 하나의 행동에서 다른 행동으로 쉬이 전환한다. 서구인은 이 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경험에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일본인의 생활에서는 모순(우리에게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이 그들의 인생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마치 우리의 인생관에 획일성이 뿌리내리고 있듯이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서구인이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일본인의 생활에서 엄격히 구별되는 여러 ‘세계’의 목록에 ‘악의 세계’가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이 악한 행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일본인은 다만 인생을 선의 힘과 악의 힘이 싸우는 무대로 보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인생을 한 편의 연극으로 본다. 거기서 일본인은 어떤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 혹은 어떤 하나의 행동 방침과 다른 행동 방침이 요구하는 것을 동시에 유심히 바라봄으로써 균형을 잡고자 애쓴다. 각각의 세계와 각각의 행동 방침은 그 자체로는 선이다. 그러니까 만일 모든 사람이 참다운 본능에 따르기만 한다면 모두가 선인이 될 것이라는 식이다.[267]


일본인은 자기들한테는 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윤리적 계율이 전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일본인의 이와 같은 견해에 의하면, 악의 행위는 굳이 추상적이고 우주적인 원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각자의 영혼은 본래 새 칼이 그렇듯이 덕의 빛을 발한다. 다만 갈고 닦지 않아 녹이 슬 수는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인들은 ‘자기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사람은 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격이 녹슬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설사 녹이 슨다 해도 그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번 갈고 닦기만 하면 본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268]


일본인은 주인공이 서로 양립되기 어려운 ‘세켄에 대한 기리’와 ‘이름에 대한 기리’ 사이에 끼여 마침내 유일한 해결책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따위의 ‘심각한 사건’ 이야기를 끊임없이 선호한다.[269]


서구인의 경우는 무엇보다 먼저 어떤 인습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장애를 극복해 행복을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강자란 개인적 행복을 제쳐놓은 채 주어진 기무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그들은 강인한 성격은 반항이 아니라 복종을 통해 증명된다고 생각한다.[278]


일본인이 ‘마코토’라는 말을 쓸 때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 및 ‘일본 정신’에 의해 지도상에 그려진 ‘길’을 따르는 열성에 있다. 개개의 문맥에서 ‘마코토’라는 말이 아무리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해도, 그것은 항상 일반적으로 ‘일본 정신’이라고 인정되는 어떤 측면에 대한 찬미 혹은 덕성의 지도 위에 세워진 공인된 이정표에 대한 찬미라고 해석하면 틀림 없다.[288]


이처럼 신중과 자중을 동일시하는 일본인의 행동 방식 속에는 타인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는 모든 암시에 방심하지 말고 마음을 써야 하며, 타인이 자기 행동을 비판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강하게 의식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은 “세켄에서 뭐라고 시끄럽게 구니까 자중해야 한다”라든가 “만일 세켄이라는 것이 없다면 자중하지 않아도 좋을 텐데”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는 자중이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표현이다. 물론 다른 많은 나라들의 통속적인 언어 관행과 마찬가지로 이런 말투도 사실을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293]


일본인은 죄의 중대성보다는 ‘하지恥’의 중대성에 더 무게를 둔다.[293]


하지의 문화에서는 설사 참회승에게 과오를 고백한다 해도 조금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는 나쁜 행위가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는 한’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고백은 도리어 스스로 고민을 자초하는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지의 문화에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신에 대해서조차 고백한다는 습관이 없다. 거기에는 복과 행운을 기원하는 의례는 있지만 속죄의례는 없다.

참다운 죄의 문화에서는 내면적인 죄의 자각에 의거해 선행을 행한다. 이에 비해 참다운 하지의 문화에서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해 선행을 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294]


일본인은 하지를 도덕의 원동력으로 삼는다.[295]


일본인의 생활에서는 여러 덕목 중 하지가 최고 지위를 차지한다. 이는 수치를 심각하게 느끼는 부족이나 국민이 모두 그러하듯이, 각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타인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신경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오로지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지 추측하면서 그 판단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 방침을 정한다. 일본인은 모두가 같은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지지할 때만 쾌활하고 편안하게 행동할 수가 있다. 그들은 그것이 일본의 ‘사명’을 수행하는 길이라고 느끼는 경우에는 게임에 열중할 수 있다. 그들이 가장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은 일본 특유의 행동 기준이 그대로 통용되지 않는 외국에 그들의 덕목을 적용하려고 시도했을 때였다. 가령 그들은 이른바 ‘대동아’의 사명이 ‘선의’에 입각한 것이라 믿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당시 중국인이나 필리핀인이 그들에게 보인 태도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느낀 분노는 거짓 없는 감정이었다.[296]


짧은 기간이나마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 그다지 딱딱하지 않고 번잡스럽지 않은 미국의 행동 규칙을 받아들인 일본인이라면, 전에 그들이 일본에서 보낸 그 답답한 생활을 다시 되풀이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런 일본인들은 종종 예전의 생활을 ‘잃어버린 낙원’이라든가 ‘질곡’이라든가 ‘감옥’이라든가 혹은 분재를 심은 ‘조그만 화분’에 빗대어 말하곤 한다.[298]


국내 연구에서는 인류학자 황달기 또한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행위 기준의 외재성과 내재성에 따른 하지와 죄의 구별은 서양의 종교적 윤리관에 근거한 것으로, 베네딕트가 세속적 윤리규범인 하지를 종교적 윤리규범인 죄와 동일선상에서 대칭적으로 비교한 방법상의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각주>[305]


이상에서 베네딕트가 생각한 ‘일본적 덕의 딜레마’의 주요 내용을 뽑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인의 덕의 체계는 절대적인 원리나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므로 일관성이 없다. (2) 일본인은 모순을 모순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3) 일본인을 상황 윤리에 지배받는 경향이 많다. (4) 일본에서는 개인적 행복보다 주어진 의무의 완수가 우선시된다. (5) 일본인은 미리 정해진 지도 위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동할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6) 타인의 평가에 지극히 예민한 ‘하지’가 일본인의 도덕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다. (7) 요컨대 일본인이 생각하는 덕은 일본인들끼리만 통용되는 특수주의적 덕이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전혀 통하지 않는다.<각주>[306]


제11장 자기훈련


어떤 문화에서의 자기 훈련 방식은 다른 문화권에서 온 관찰자에게는 항상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되기 십상이다. 훈련 방식 자체는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왜 저렇게 고생을 해야만 하는지, 왜 일부러 갈고리 같은 데 매달리거나 배꼽을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혹은 전혀 돈을 쓰지 않는 것인지, 왜 그런 고행을 하는지, 또 국외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충동은 전혀 제어하지 않는지 등등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이런 의문에서 비롯되기 마련인 오해의 가능성은 자기 훈련을 위한 특별한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나라에 속한 관찰자가 그런 방법을 매우 신뢰하고 중시하는 국민들 가운데 거할 경우 최고조에 달한다.[307]


훈련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태어난 그대로의 어린아이는 행복하지만 ‘인생을 맛보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정신적 훈련(자기 훈련, 자기 수양)을 쌓을 때 비로소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고 인생의 ‘맛을 음미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이는 통상 영어로 “이렇게 함으로써만 비로소 인생을 즐길 수 있다” 고 번역된다. 자기 훈련은 자제력의 원천인 배짱을 키워주며, 그것은 인생을 확장시켜준다.[312]


그들(훈련 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빌려 말하면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닦아 없애버리는 것이다. 비유컨대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서 예리한 칼로 만들어준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다.[313]


선가의 스승들이 가르쳐온 전통적인 훈련은 제자들에게 ‘깨닫는’ 방법의 교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훈련은 육체적인 경우도 있고 정신적인 경우도 있는데, 어느 경우에나 마지막에는 학습자의 내면적 의식에서 그 효력이 확인되어야 한다. 검술가의 선 수행은 이에 대한 좋은 예증이 된다. 물론 검객은 올바르게 칼 쓰는 법을 배우고 또 그것을 끊임없이 연습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게 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능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를 위해 우선, 처음에는 평평한 바닥 위에 서서 몸을 받쳐주는 겨우 몇 인치의 바닥 표면에 정신을 집중하도록 지시 받는다. 그는 아주 좁은 발판을 점점 높여 마침내 1미터 높이 기둥 위에 서 있어도 마치 뜰에 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태연히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때 비로소 그의 마음은 현기증을 느끼거나 추락의 공포를 품는다든지 해서 그를 배반하는 일이 없게 된다.[322]


미국인으로 하여금 선행을 행하도록 요구하는 강력한 강제력은 죄의식이다. 양심이 마비되어 이미 죄를 느낄 수 없는 인간은 반사회적인 인간이나 매한가지다. 하지만 일본인은 문제를 완전히 다른 식으로 해석한다. 그들의 철학에 따르면, 누구나 인간의 본마음은 선하다. 만일 이런 선한 충동이 직접 행동으로 구현될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쉽게 덕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숙달’의 수행을 쌓음으로써 ‘하지’(수치, 치욕)의 자기 감시를 배제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라야만 비로소 그의 ‘육관’이 모든 장애물에서 자유로워진다. 이는 자의식 및 모순 상극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을 뜻한다.[330]


제12장 어린아이는 배우다.


우리는 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의 작은 소망이 이 세상에서 최고 지상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어머니는 가끔 아이들에게서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어머니가 외출한 동안에 갓난아이는 집에서 혼자 있어야 한다. 이윽고 갓난아이는 다른 음식물보다 젖을 더 먹고 싶어 한다 하더라도 젖을 떼게 되고, 혹은 분유로 자란 아이라면 우유병을 빼앗겨버린다. 몸에 좋다는 일정한 음식이 정해지고 아이는 그것을 먹어야 한다. 정해진 대로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334]


일본의 육아법은 미국과는 완전히 다르다. 실로 일본인의 인생 곡선은 미국과 정반대다. 그것은 아랫부분이 얄팍한 커다란 유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는 최대의 자유와 제멋대로 구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다가 유아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뜻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최저선에 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기를 통해 몇십 년 동안 계속되는데, 그 후 곡선은 다시 점차 상승해 60세가 지나면 유아와 거의 마찬가지로 수치심이라든가 위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미국에서는 이 곡선이 정반대다. 즉 미국의 부모들은 갓난아이 때는 엄한 교육을 하지만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차츰 엄한 정도가 완화되고, 드디어 직업을 가지고 가족을 거느리며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나이가 되면 자시에게 거의 간섭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의 경우에는 장년기가 자유와 자발성의 정점이 된다. 나이가 들고 늙어서 기력이 쇠하거나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때가 되면 다시 구속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국인은 일본적 패턴에 따른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인생은 우리에게는 도무지 현실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335]


종래 서구인들이 묘사해온 일본인의 성격적 모순은 그들의 육아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즉 그 육아법으로 인해 일본인의 인생관에 있어 모든 측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이원성이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유아기에 누렸던 특권과 마음 편안했던 경험에 의해, 그 후 갖가지 훈련을 받은 뒤에도 언제나 ‘하지恥를 몰랐던’ 때의 편한 생활을 기억한다. 그들은 굳이 미래에 천국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천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란 본래 선하고 신들은 자애로우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비할 바 없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들의 유년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일본인에게 유아기의 경험은 모든 인간 속에 붓다가 될 가능성이 있다라든가 인간은 누구든 죽은 후에 가미神가 된다고 하는 극단적인 윤리 해석의 바탕이 된다. 이런 해석에 입각해 그들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주장하고 또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진다. 또한 유아기의 경험은 자신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어려운 일도 앞장서서 부딪쳐나가려는 태도의 기초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기 나라 정부에 대해서조차 반대 관점을 주장하면서 싸운다든지, 혹은 자살로써 자기 주장을 서슴없이 내세우는 태도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물론 거기에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때로 집단적인 과대망상증에 빠지게 할 위험성도 내포되어 있다.[368, 369]


전술한 바와 같이 자기 희생이라는 관념은 일본인이 때때로 공격해온 그리스도교적 개념의 하나로서, 정작 일본인들은 자신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도 일본인은 충이나 효 또는 기리의 부채를 갚으려고 ‘자진해서’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것들은 자기 희생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개죽음’이 된다.[372]


서구인을 놀라게 하는 일본 남성들의 모순된 행동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 받은 훈육의 불연속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거기에 ‘옻칠’을 한 다음에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그들이 작은 신이었던 시절, 마음대로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시절, 어떤 소망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깊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처럼 마음 깊은 곳에 이중성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이 된 다음 로맨틱한 연애에 빠지는가 하면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듯 가족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하게 된다. 쾌락에 빠져들고 안일을 탐하는가 하면, 의무를 다하려고 극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해치운다. 신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가정 교육이 그들을 때때로 겁 많은 국민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 그들은 저돌적으로 보일 만큼 용감하다. 그들은 계층적 위계질서에 근거해 복종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철저히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위로부터의 통제에 쉽게 따르지만은 않는다. 그들은 대단히 은근하면서도 오만불손한 태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들은 군대에서 광신적인 훈련에 따르면서도 결코 순종적이지만은 않다. 그들은 열렬한 보수주의자지만, 중국의 습관이나 서구 학문을 수용할 때 보였던 것처럼, 새로운 생활 양식을 쉽게 받아들인다.[373, 374]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배척당해서 비난받는 위험을 피하려고 그들은 모처럼 맛본 개인적인 즐거움도 포기해야만 한다. 인생 중대사 앞에서는 그런 충동을 억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를 어기는 사람은 스스로를 존중할 마음을 상실할 위험에 빠진다. 스스로를 존중(자중)하는 인간은 ‘선이내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느냐 아니면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냐를 기준 삼아 진로를 정한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지를 아는’ 신중하고도 훌륭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가정과 마을 및 나라에 명예를 가져다주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태도에서 비롯되는 긴장은 대단히 크며, 그것이 일본을 동양의 지도자이자 세계의 일대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강렬한 대망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개인으로서 보면 그 긴장은 대단히 무거운 부담이 된다. 그는 무슨 일에건 실패하지 않도록, 또한 많은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일련의 행위에 의해 누구에게서건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언제나 세심하게 주의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참고 참았던 울분이 폭발해 극도로 공격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런 공격적인 태도를 하는 경우는 미국인처럼 자신의 주의 주장이나 자유가 도전받을 때가 아니라, 모욕당했거나 비난받는다고 느꼈을 때다. 그럴 때 그들의 위태위태한 자아는 만일 가능하다면 그 당사자에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게 폭발한다.

일본인은 이와 같은 생활 양식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러왔다. 이를테면 그들은 미국인이 공기처럼 매우 당연시하는 단순한 자유를 스스로 거부해왔다. 하지만 이제 일본인은 패전 이후 민주화로 향하고 있다. 이에 즈음해 우리는 순진하고 천진난만하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일본인을 미치도록 기쁘게 하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376]


이 고리를 떼어낼 때 스기모토 부인은 행복하고도 순수한 흥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작은 화분 속에서 꽃잎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정성껏 재배하고 가지런히 가꾼 국화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대해 느낀 순수한 즐거움이었다.[378]


그들의 정신적 자유를 증대시킬 수 있는 과도기에 처해, 일본인은 몇몇 오래된 전통적 덕목에 의지해 평형성을 잃지 않은 채 무사히 거센 파도를 넘을 수 있으리라. 그런 덕목의 하나로 ‘몸에서 나온 녹’은 자신이 처리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자기 책임의 태도를 들 수 있다. 이 비유에서는 자기 몸과 칼을 동일시한다. 칼을 찬 사무라이에게는 칼이 녹슬지 않고 항상 반짝거리게 할 책임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각자 자기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나 지속성의 결여 혹은 실패 등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를 승인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에서 자기 책임은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에서보다도 훨씬 철저하게 해석된다. 이와 같은 일본적 의미에서 칼이란 공격의 상징이라기보다는 훌륭하게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이상적인 인간의 비유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시대에 이런 덕목은 가장 탁월하게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게다가 이 덕목은 일본 아이들의 육아법과 행동철학을 통해 일본 정신의 일부로서 일본인의 마음속에 심어졌다. 오늘날 일본은 서구적 의미에서의 ‘칼을 버리고 항복’했다. 그런데 일본적 의미에서 일본인은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마음속의 칼이 녹슬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할 줄 아는 장점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덕을 칼에 비유하는 그들의 어법에 따르면, 칼은 더욱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만한 상징이다.[378, 379]


여기서 말하는 ‘불연속성’은 유아기 때 방임주의의 문화적 학습과 성인이 된 후의 엄격한 사회적 제약 사이에 가로놓인 불연속성을 가리킨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이중 성격이 무엇보다도 자녀 교육 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다. 즉 저자는 일본인의 인생관의 이원성을 낳은 원인 혹은 일본인의 성격적 모순을 형성한 요인으로 ‘하지를 알지 못했던 유아기 방임주의, 즉 아이 때 특권적으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편안하게 지냈던 경험’을 든다. 다시 말해 일본인의 훈육대로라면 성장 과정에서 유아기 때와 성인 때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각주>[383]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독일인은 일본인처럼 자신을 세상과 조상에 대한 채무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본인처럼 무한한 부채를 갚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희생자가 되기도 싫어한다. 독일의 아버지들은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인간이 그러하듯이 강압적이어서, 독일적 표현을 빌리면 ‘존경을 강요한다.’ 즉 독일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면 불안해한다. 독일인의 생활 방식에서 청년기의 아들 세대는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반발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아들은 자신도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감격도 없는 생활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독일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활기찬 생활을 보내는 것은 청년 시절의 반항적인 질풍노도기Strum und Drang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문화에서는 그렇게 극심한 강권주의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서구인 관찰자가 느끼듯이, 일본의 아버지들은 서구인의 경험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배려와 사랑으로 자식들을 대한다. 일본의 아이들은 아버지와의 사이에 참된 우애 관계가 존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또한 아버지를 공공연히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아버지는 단 한 번 목청을 높이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자기 뜻대로 행동하게 할 수 있다. 요컨대 일본의 아버지는 결코 어린 아들에게 가차 없이 엄격한 훈련을 가하는 인물이 아니며, 또 일본인의 청년기는 결코 부모의 권위에 대한 반항기가 아니다. 오히려 청년기는 아이들이 일가의 책임을 무겁게 여겨 순종적인 대표자로서 세상의 비판 앞에 서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일본인 자신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훈련을 위해’ 혹은 ‘연습을 위해’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한다. 즉 일본에서 아버지는 현실의 인격을 떠난 계층제 및 올바른 처세술의 상징이다.[388]


현재 일본 각지에서 일어나는 파업들이 생산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한 채 계속 일을 하면서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경영자의 면목을 잃게 한다. 파업에 돌입한 어떤 미쓰이 계열 탄광 노동자들은 경영을 담당한 직원들을 모두 갱내에서 몰아낸 후, 하루 생산량을 250톤에서 620톤까지 높였다. 또한 파업 중에도 작업을 계속한 아시오 구리 광산의 노동자들도 생산을 증대시켜 자신들의 임금을 두 배로 올려놓았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즐겨 취하는 파업 형태이다.[398]


미국을 비롯해 어느 나라든 명령을 통해 자유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만들어내는 일은 할 수 없다. 어떠한 피지배국에서든 그런 방법은 지금까지 성공을 거둔 예가 없다. 어떤 외국인도 자기와 같은 습관이나 가정을 가지지 않은 국민에게 자기의 생각이나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또한 일본인에게 그들의 계층제에서 이미 정해진 ‘알맞은 자리’를 무시하고 그 대신 법률의 힘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401]


옮긴이의 말


<<국화와 칼>>이 일본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고전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들, 특히 일본인의 에토스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 (가령 일본인들의 계층적 위계질서 의식, 하지와 명예 관념, 기리, 닌죠, 온 개념 등)을 최초로 명확하게 분석해냄으로써 차후 일본 문화 분석에 있어 아주 기본적인 준거가 되었기 때문이다.[412]


기이하게도 이 책은 국내의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류학 전공자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가령 한 인류학자는 “국화는 일본의 황실을 상징한다. (중략)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예의 바르고 착하고 겸손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일본 사람들 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을 통해 일본 사람들의 이중적인 성격을 드러냈다”고 적고 있다.

사실 이런 식의 안이한 이해가 한국 사회의 일반 교양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상식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베네딕트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베네딕크는 이 책에서 매우 용의주도하게 ‘국화’와 ‘칼’이라는 메타포의 의미 내용을 중층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전반부에서는 분명 국화가 ‘탐미적이고 섬세한 심미주의’를, 그리고 칼이 ‘군국주의적이고 공격적인 무력 숭배’를 나타내지만, 후반부에서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의 의미가 부여된다. 다시 말해 국화는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스스로 제약하는 작위적인 의지’를 칼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이상적인 인간’을 상징하는 메타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중층적인 의미 부여에서 우리는 승전국의 한 인류학자로서 가질 법한 우월의식을 스스로 견제하면서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서구적 편견과 선입관을 극복하고자 했던 베네딕크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히 요청되는 자세라고 생각된다. 우리 안에 농밀하게 스며 있는 일본 콤플렉스(우월감과 열등감의 미묘한 조합)야말로 항상 우리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최대의 걸림돌이 아니겠는가?[413, 414]



3. 내가 저자라면

문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기술한 책은 처음 읽은 것 같다.  이전에 문화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문화 분석 자체를 주제로 하는 책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일본 문화의 특성을 읽는 즐거움에 더해서,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하게 되는지, 문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 등 문화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들을 풀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이 이렇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문화란 것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살면서 문화의 힘을 느낄 때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점이라고 생각되는 현상을 들여다보거나, 이전의 문화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을 해석하려면 그 깊숙한 곳에 항상 문화라는 놈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이 거대한 문화란 놈이 언제 어떻게 우리 삶에, 생활 속에 들어와 앉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고 변화되어 가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배울만한 점

< 문화를 읽는 방법 >
저자는 “인간의 행동은 일상생활 속에서 학습되는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아무리 기괴하게 보이는 행동이나 견해라 할지라도,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은 그의 경험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활 속 어딘가에 그런 기이한 행동 양식을 만들어낸 일반적인 조건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반적 조건을 찾기 위해 일상생활을 사소한 세부 사항들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일본에 관한 문헌들을 많이 읽었다. 예를 들어, 일본 의회의 연설문을 읽으면서, 거기에 나열된 모순되는 관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 모순된 관념의 배후에 깔린 공통된 그 무엇을 발견하려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문헌들을 읽었다고 한다. 일본의 영화를 보거나, 일본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 방식을 취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일본 사람들은 당연히 받아들이거나,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일본인들의 반응에 주목했다.(문화 상대주의적 관점)

탁월한 여성 인류학자로 꼽히는 마가렛 미드와 베네딕트는 연구 방법론에서 서로 다른 특징을 보였다.
마가렛 미드는 심리학 테크닉을 이용하여, 개개의 케이스 스터디를 축적함으로써 해당 사회 구성원에게 공통적인 심리적 특징 혹은 성격을 추출하고자 했다. 그녀는 조사 방법으로 개인 인터뷰, 유아 행동 관찰, 사진 기록 등의 자료 수집에 집중했다. 요컨대 미드는 개인 심리 사례를 축적해 사회 심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상향적 방법론을 구사했다. 이에 반해 베네딕트는 문화생활 양식으로부터 문화 유형 pattern of culture 을 추출함으로써 주로 문화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자료의 측면에서는 집단 행동과 제도적 측면의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 집중했으며, 사회 심리로부터 개개인의 행동 양식을 유추하는 하향적 방법론을 구사했다.(방법론 측면)<각주, 37p> 

아쉬운 점

훌륭한 고전임에 틀림없지만, 몇 가지 점에서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순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을 일본문화의 특성이라고 해석하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평소에는 유순하지만 일단 공격을 받으면 분개한다. 충실한가 하면 불충실하기도 하다. 용감하지만 동시에 비겁하기도 하다. 보수적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안다."[15p] 등은 일본인들의 문화 특성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생각된다. 

60년 전에 씌여진 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시대착오적인 내용이 많이 눈에 띈다. 부모에 대한 효심(온)에 관한 내용으로, 좋은 며느리를 선택하는 결정권은 당사자인 아들이 아니라 그가 속한 가문에서 한다 든지, 어머니가 요구하면 하기 싫더라도 이혼을 해야 하는 아들 등은  현대 일본 문화에 맞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저자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고, 또 이해하기도 힘들 것으로 생각되는  동양적인 정신훈련, '무아' 체험 등을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 듯하다. 그리고 일본인들 중에서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개인적인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

구체적으로 씌여진 이 책의 주석은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를 제공해준다. 역자의 주석은 저자 베네딕트에 관한 다양한 관점의 저술들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 놓았다. 저자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책 한 권을 읽으면서 관련 서적 여러 권을 한꺼번에 보는 듯한 느낌을 줄만큼, 꼼꼼하게 정리된 주석은 이 책의 큰 장점으로 보인다.

『코리아니티』에서는 <남들만큼은 되어야 한다 >, <‘우리’ 속의 ‘나’>, <모순을 껴안는 힘>, <거친 생명력과 흥청거림>, <명분과 배움, 선비정신>등 5가지를 코리아니티 핵심 요소로 제시한바 있다. 베네딕트가 일본 문화의 특징으로 제시한 <계층적 위계질서>, <하지(恥)와 명예 관념>, <기리(義理)>, <닌죠(仁情)>, <온(恩) 개념> 5가지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난 시도 일 것 같다. 다음주 과제가 코리아니티에 관한 정리인데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정리를 해 보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나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떠올리면서 일본에 관한 문헌을 읽었다. “이 그림은 무엇이 이상한가? 그 이상한 그림을 이해하려면 내가 무엇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일까?”[21]

인류학자는 원시 부족이든 문명국이든 인간의 행동은 일상생활 속에서 학습되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떤 국민을 연구하든 지극히 인간적인 소소한 일상생활에 주목할 때라야 비로소 이와 같은 인류학적 전제가 지니는 중요한 의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리 기괴하게 보이는 행동이나 견해라 할지라도,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은 그의 경험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일본인의 기이한 행동에서 무언가 당혹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일본인의 생활 속 어딘가에 그런 기이한 행동 양식을 만들어낸 일반적인 조건이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25]

이 책은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적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가 안고 있는 결함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미국을 미국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 프랑스를 프랑스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 러시아를 러시아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관해 우리가 여전히 지독한 편견에 가득 찬 채 지극히 막연한 관념만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27, 28]


유럽의 봉건제도가 붕괴된 까닭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세력을 확장한 중산 계급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런 중산 계급이 서구 근대의 산업시대를 지배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강력한 중산 계급이 발생하지 않았다.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들은 공인된 방법으로 상류 계급 신분을 ‘샀고’, 그리하여 상인과 하층 사무라이가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다. 서양과 일본 모두에서 봉건제도가 최후의 몸부림을 치던 시기에 일본이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보다도 더 많은 계급 간 이동을 승인한 것은 기묘하고도 놀랄 만한 의외의 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점을 뒷받침해줄 가장 유력한 증거가 있다. 즉 일본에서는 귀족 계층과 유산 계층 사이에 계급투쟁이 발생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다.[105]


일본, 일본인, 일본 문화의 공시적, 구조적 특성을 규명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라고 밝히는 베네딕트의 주장과 관련해 종래 많은 평자들이 <<국화와 칼>>의 ‘비역사성’에 비판을 가했다. 대표적으로 러미스는, 베네딕트가 행한 작업은 주지의 사실들을 조합해 하나의 허구, 즉 ‘계급도 정치도 역사도 다 쏙 빼버린 나라로서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국화와 칼>>에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공업화를 다룬 장이 있지만, 일본 문화의 서술로 넘어가자마나 역사에 관한 장은 전혀 씌어지지 않은 것처럼 되어버린다. 최초의 네 장은 서론이며 주로 표준적인 역사서의 요약에 지나지 않는다. 베네딕트의 진짜 작업은 제5장 이후인데, 이 5장은 우선 ‘온’에 관한 논의부터 시작된다. 거기서는 경제도 정치도 권력도 계급도 역사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균질적이며 시간을 초월한 개념으로서의 ‘일본’이 주제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베네딕트는 가변적이고 동적인 측면을 무시한 채, 불변적이고 정적인 것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사실 <<국화와 칼>>의 일본사 서술은 메이지 유신에서 끝나며 그 후 일본이 군국주의화되는 다이쇼, 쇼와 시대의 역사가 경시되거나 무시되는데, 이 점에서도 <<국화와 칼>>의 비역사성이 지적될 수 있다.<각주>[139]


<< 일본인의 의무 및 반대 의무 일람표 >>


1. 온 : 수동적으로 입는 의무. 어떤 사람이 ‘온을 받는다’거나 혹은 ‘온을 입는다’고 말한다. 즉 온이란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의 의무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온이 있다.

* 고온皇恩 = 천황에게 받은 온.

* 오야노온親の恩 = 부모에게서 받은 온.

* 누시노온 主の恩 = 주군에게 받은 온.

* 시노온師の恩 = 스승에게 받은 온.

* 이 밖에 살아가면서 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받은 온.

==> 이때 어떤 사람에게 온을 준 자는 모두 그 사람의 ‘온진’이 된다.


2. 온의 반대 의무 : 누군가에게 온을 입은 자는 그 온진에게 ‘부채를 갚아야만’하는 반대 의무를 가지게 된다. 이는 적극적인 갚음(온가에시) 관점에서 본 의무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크게 두 종류가 있다.


(1) 기무義務 :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모두 갚을 수 없으며, 또한 시간적으로 한계가 없는 의무로서 다음 세 가지로 구분된다.

* 충 = 천황, 법률, 일본국에 대한 의무

* 효 = 부모 또는 조상에 대한 의무. 자손에 대한 의무까지도 암암리에 함축.

* 닌무任務 = 주어진 일에 대한 의무.


(2) 기리義理 : 자기가 받은 온과 같은 수량만큼만 갚으면 되고 또한 시간적으로도 제한된 부채를 가리키며, 다음 두 가지가 있다.

* 세켄에 대한 기리 : 주군에 대한 의무, 가까운 친척에 대한 의무, 타인에 대한 의무 및 타인에게서 받은 온(가령 타인에게서 돈이나 호의를 받았거나 또는 어떤 일에 도움이나 협조를 받았을 때 발생하는 온), 먼 친척(숙부나 숙모 혹은 조카)에 대한 의무(특별히 이들로부터 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공통의 조상에게서 함께 온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기인하는 의무) 등이 있다.

* 자기 이름에 대한 기리 : 이는 독일어의 ‘명예die Ehre’에 해당하는 일본식 개념으로서, 타인에게 모욕이나 비난을 받았을 때 그 오명을 ‘씻어내야만 하는’ 의무, 즉 보복이라든가 복수의 의무(이런 복수는 불법적인 공격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실패라든가 전문적인 일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의무, 일본인으로서의 예절을 다할 의무(가령 모든 예의범절을 지키고, 분수와 신분에 알맞은 생활을 해야만 하며,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따위의 의무) 등이 있다.[166, 167]


교사나 사업가가 각각 전문가로서의 이름에 대한 기리에 따라 행동하듯이, 그들은 학생으로서의 이름에 대한 기리에 자극받아 행동한다. 시합에 진 학생 팀은 그 실패의 ‘하지(恥)’(각주-여기서의 ‘하지’는 ‘치욕감’에 가깝다) 때문에 상당히 극단적인 행동 양식을 보였다. 예컨대 보트 선수는 노를 내동댕이치고 보트에 탄 채로 분해서 울어댔고, 야구시합에 진 팀 또한 한덩어리가 되어 엉엉 울었다. 미국에서라면 우리는 그런 행동을 좋지 않은 패자의 태도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에티켓으로는 패자는 의당 상대가 더 강한 팀이기 때문에 진 것이라고 승복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니까 패자는 승자와 악수를 나누는 것이 우리의 에티켓이다. 우리는 지는 것이 아무리 싫다 하더라도 패배했다고 엉엉 울거나 소리 지르는 사람을 경멸한다.[216]


일본인은 자기들한테는 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윤리적 계율이 전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일본인의 이와 같은 견해에 의하면, 악의 행위는 굳이 추상적이고 우주적인 원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각자의 영혼은 본래 새 칼이 그렇듯이 덕의 빛을 발한다. 다만 갈고 닦지 않아 녹이 슬 수는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인들은 ‘자기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사람은 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격이 녹슬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설사 녹이 슨다 해도 그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번 갈고 닦기만 하면 본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268]


하지의 문화에서는 설사 참회승에게 과오를 고백한다 해도 조금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는 나쁜 행위가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는 한’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고백은 도리어 스스로 고민을 자초하는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지의 문화에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신에 대해서조차 고백한다는 습관이 없다. 거기에는 복과 행운을 기원하는 의례는 있지만 속죄의례는 없다.

참다운 죄의 문화에서는 내면적인 죄의 자각에 의거해 선행을 행한다. 이에 비해 참다운 하지의 문화에서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해 선행을 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294]


짧은 기간이나마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 그다지 딱딱하지 않고 번잡스럽지 않은 미국의 행동 규칙을 받아들인 일본인이라면, 전에 그들이 일본에서 보낸 그 답답한 생활을 다시 되풀이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런 일본인들은 종종 예전의 생활을 ‘잃어버린 낙원’이라든가 ‘질곡’이라든가 ‘감옥’이라든가 혹은 분재를 심은 ‘조그만 화분’에 빗대어 말하곤 한다.[298]


이상에서 베네딕트가 생각한 ‘일본적 덕의 딜레마’의 주요 내용을 뽑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인의 덕의 체계는 절대적인 원리나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므로 일관성이 없다. (2) 일본인은 모순을 모순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3) 일본인을 상황 윤리에 지배받는 경향이 많다. (4) 일본에서는 개인적 행복보다 주어진 의무의 완수가 우선시된다. (5) 일본인은 미리 정해진 지도 위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동할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6) 타인의 평가에 지극히 예민한 ‘하지’가 일본인의 도덕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다. (7) 요컨대 일본인이 생각하는 덕은 일본인들끼리만 통용되는 특수주의적 덕이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전혀 통하지 않는다.<각주>[306]


일본의 육아법은 미국과는 완전히 다르다. 실로 일본인의 인생 곡선은 미국과 정반대다. 그것은 아랫부분이 얄팍한 커다란 유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는 최대의 자유와 제멋대로 구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다가 유아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뜻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최저선에 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기를 통해 몇십 년 동안 계속되는데, 그 후 곡선은 다시 점차 상승해 60세가 지나면 유아와 거의 마찬가지로 수치심이라든가 위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미국에서는 이 곡선이 정반대다. 즉 미국의 부모들은 갓난아이 때는 엄한 교육을 하지만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차츰 엄한 정도가 완화되고, 드디어 직업을 가지고 가족을 거느리며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나이가 되면 자시에게 거의 간섭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의 경우에는 장년기가 자유와 자발성의 정점이 된다. 나이가 들고 늙어서 기력이 쇠하거나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때가 되면 다시 구속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국인은 일본적 패턴에 따른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인생은 우리에게는 도무지 현실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335]


서구인을 놀라게 하는 일본 남성들의 모순된 행동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 받은 훈육의 불연속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거기에 ‘옻칠’을 한 다음에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그들이 작은 신이었던 시절, 마음대로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시절, 어떤 소망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깊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처럼 마음 깊은 곳에 이중성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이 된 다음 로맨틱한 연애에 빠지는가 하면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듯 가족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하게 된다. 쾌락에 빠져들고 안일을 탐하는가 하면, 의무를 다하려고 극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해치운다. 신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가정 교육이 그들을 때때로 겁 많은 국민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 그들은 저돌적으로 보일 만큼 용감하다. 그들은 계층적 위계질서에 근거해 복종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철저히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위로부터의 통제에 쉽게 따르지만은 않는다. 그들은 대단히 은근하면서도 오만불손한 태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들은 군대에서 광신적인 훈련에 따르면서도 결코 순종적이지만은 않다. 그들은 열렬한 보수주의자지만, 중국의 습관이나 서구 학문을 수용할 때 보였던 것처럼, 새로운 생활 양식을 쉽게 받아들인다.[373, 374]


이 고리를 떼어낼 때 스기모토 부인은 행복하고도 순수한 흥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작은 화분 속에서 꽃잎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정성껏 재배하고 가지런히 가꾼 국화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대해 느낀 순수한 즐거움이었다.[378]


그들의 정신적 자유를 증대시킬 수 있는 과도기에 처해, 일본인은 몇몇 오래된 전통적 덕목에 의지해 평형성을 잃지 않은 채 무사히 거센 파도를 넘을 수 있으리라. 그런 덕목의 하나로 ‘몸에서 나온 녹’은 자신이 처리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자기 책임의 태도를 들 수 있다. 이 비유에서는 자기 몸과 칼을 동일시한다. 칼을 찬 사무라이에게는 칼이 녹슬지 않고 항상 반짝거리게 할 책임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각자 자기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나 지속성의 결여 혹은 실패 등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를 승인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에서 자기 책임은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에서보다도 훨씬 철저하게 해석된다. 이와 같은 일본적 의미에서 칼이란 공격의 상징이라기보다는 훌륭하게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이상적인 인간의 비유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시대에 이런 덕목은 가장 탁월하게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게다가 이 덕목은 일본 아이들의 육아법과 행동철학을 통해 일본 정신의 일부로서 일본인의 마음속에 심어졌다. 오늘날 일본은 서구적 의미에서의 ‘칼을 버리고 항복’했다. 그런데 일본적 의미에서 일본인은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마음속의 칼이 녹슬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할 줄 아는 장점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덕을 칼에 비유하는 그들의 어법에 따르면, 칼은 더욱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만한 상징이다.[378, 379]


여기서 말하는 ‘불연속성’은 유아기 때 방임주의의 문화적 학습과 성인이 된 후의 엄격한 사회적 제약 사이에 가로놓인 불연속성을 가리킨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이중 성격이 무엇보다도 자녀 교육 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다. 즉 저자는 일본인의 인생관의 이원성을 낳은 원인 혹은 일본인의 성격적 모순을 형성한 요인으로 ‘하지를 알지 못했던 유아기 방임주의, 즉 아이 때 특권적으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편안하게 지냈던 경험’을 든다. 다시 말해 일본인의 훈육대로라면 성장 과정에서 유아기 때와 성인 때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각주>[383]


<<국화와 칼>>이 일본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고전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들, 특히 일본인의 에토스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 (가령 일본인들의 계층적 위계질서 의식, 하지와 명예 관념, 기리, 닌죠, 온 개념 등)을 최초로 명확하게 분석해냄으로써 차후 일본 문화 분석에 있어 아주 기본적인 준거가 되었기 때문이다.[412]


기이하게도 이 책은 국내의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류학 전공자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가령 한 인류학자는 “국화는 일본의 황실을 상징한다. (중략)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예의 바르고 착하고 겸손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일본 사람들 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을 통해 일본 사람들의 이중적인 성격을 드러냈다”고 적고 있다.

사실 이런 식의 안이한 이해가 한국 사회의 일반 교양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상식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베네딕트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베네딕크는 이 책에서 매우 용의주도하게 ‘국화’와 ‘칼’이라는 메타포의 의미 내용을 중층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전반부에서는 분명 국화가 ‘탐미적이고 섬세한 심미주의’를, 그리고 칼이 ‘군국주의적이고 공격적인 무력 숭배’를 나타내지만, 후반부에서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의 의미가 부여된다. 다시 말해 국화는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스스로 제약하는 작위적인 의지’를 칼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이상적인 인간’을 상징하는 메타포이기도 하다.[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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