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이은미
  • 조회 수 267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12월 22일 14시 55분 등록

1.저자소개


강영희
姜英熙
문화평론가.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에는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1994)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1998)가 있다. 연극평론에서 시작해서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6년 전부터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한동안 무위도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비롯해서,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대만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문화평론가로서 세상의 모든 잡사(雜事)에 대한 잡문(雜文)을 써온 그녀는, 이 책을 쓰면서 세상의 모든 잡학(雜學)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의 주제는 물론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을 다룬 이 책은 그 첫걸음인 셈이다.

 

저자 강영희는 글로벌 멀티미디어 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미의식의 좌표는 어디쯤 와 있을까?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담론이 무성하지만, 한국문화의 정체성과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는 작업은 그간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된 채 방치되어 왔다. 이 책은 백남준, 야나기 무네요시, 정선, 김정희 등 다양한 지점과 담론들을 살피며, 한국인의 미의식의 원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 내 가슴에 들어온 글귀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16) 한국인에게는 자기를 굳건하게 다지려는 자화상과 자기를 바꾸려는 자화상이 공존하게 되었다.
 
(17)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따금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18) 사대와 자주를 대립시킨 다음, 사대는 나쁜 것이고 자주는 좋은 것이라고 보는 것은 국제정치학적 차원에서 현실적인 실리의 문제인 사대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상적인 명분의 문제로 오독하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겸재는 동북아시아의 문화권 전체를 시야 속에서 확보한 세계인인 동시에 진경산수의 아름다움을 시야의 중심에 놓은 한국인이었고, 겸재의 진경산수는
밖으로 향한 안테나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돌아본 결과 탄생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에 대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승리가 아니라 그같은 구별과 경계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를 받아 안아 한국을 피워올림으로써 양자를 회통시킨 결과 도달한 창조였다.
 
(24) 오늘의 창조와 관련된 예술가인 이상, 그의 마음 속에 세계인과 한국인의 두 얼굴이 공존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것들은 결코 제로섬 게임과 같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며, 분열적인 모순이 아니라 통합적인 모순이다. 창조의 빛이란 세계인 윤이상과 한국인 윤이상이, 세계인 이응노와 한국인 이응노가 부싯돌의 스파크와도 같이 절묘하게 부딪혀서 피워올리는 한 줄기 섬광이다.
 
(25-26)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이 창조적이기를 원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세계인과 한국인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개안(開眼)이 필요하다. 한국인과 세계인, 토속성과 세계성이 창조의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경계를 허물고 손잡는다면, 그것들은 서로 다른 둘이고 모순이되 상생적인 둘이며 창조적인 모순이 될 것이다.
 
(27) 전통은
기억 속의 심상이다.
 
(28) 백남준씨에게는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이르는 시대들이 타임캡슐이나 또는 냉동식품처럼 통조림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일이 많다.
 
(28) 시간의 엔트로피 법칙 또는 불가역성은 덧없음이라는 인생의 쓰디쓴 진리를 탄생시킨 우주의 원죄다. 이 같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항거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뛰어넘는다. 기억의 다른 이름이 추억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29) 기억으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을 되짚어 지난 순간을 되살려내도록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의식의 밑바닥에 저장된 심상들이 어떤 계기를 만나 호출당할 경우 기억의 형태로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심상에 의지하여 시간의 흐름에 떠밀리는 세월의 무상함에 대항하는 몸부림이야말로, 인간에게 정체성의 후광을 부여하며 주체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인문적인 가치의 본령이다. 역사가 그렇고 문학 역시 그러하며, 이것을 업으로 짊어진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가 아닌가. …… 작품의 핵심어인 기억이, 산업혁명에서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근대의 심장인 욕망과 이에 따른 죄의식을 오히려 빛나는 자의식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31) 한자로 쓰여지기도 하고 한글로 쓰여지기도 한 지명에 의해 불려온
기억 속의 심상은 근대라는 미혹과 몸을 섞기 전의 처녀성과도 같이 싱그러우면서도 수줍은 느낌으로 되살아난다.
 
(32) 반복하자면, 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 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 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야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전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취향을 즐겁게 뛰놀도록 하는 기억 속의 심상생의 지주와도 같이 우리 안에 늘어서 있어야 한다. 취향의 뜨락인 기억 속의 심상의 상실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에서 창조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감옥이다.
 
(34) 미륵반가상은
먼 저곳이 아닌 가까운 이곳에서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의식이 담긴 고유의 심상 가운데 하나다.
 
(37) 오늘의 「만남」은 어제의 「방문」과는 별개의 것이다. 오늘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제의 유물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시대착오적인 딜레땅띠즘(dilettantism)대신,
기억 속의 심상에 새로운 양식을 덧입히는 동시대적인 다이너미즘(dynamism)과 만난다. 바로 이 언저리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전통과 마주친다.
 
 
2. 기차가 있는 풍경
 
(38)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근대화가 의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서구화에 일본화를 겹쳐놓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 개화, 과학, 합리, 이성과 동일시되기도 했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주체적으로 변용시키는 데 필요한 성찰의 여백은 실종된 반면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 급급한 조급함만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40) 이 같은 변신은 성찰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신속하고 강박적일 뿐 아니라, 맹목적인 조급함을 동반한다.
 
(40-41) 전근대적 인간에서 근대적 인간으로의 변화는 개인에게는 천지개벽에 비유될 만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다음 그것의 결과가 등장인물의 의식과 행동에 의미있게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사건의 앞뒤를 통해 지속되는 치열한 갈등이 필수적이다.
 
(41) 근대 또는 문명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주먹을 불끈 쥐고 서둘러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재촉이라도 하듯이 칙칙폭폭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가 상징하는 것은 이것이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은 이 같은 풍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서을 변화시키는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모범답안을 암기하듯이, 하루 빨리 서둘러 서구의 문예사조를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대신 같은 분량만큼의 전통적인 그것을 버려야 했는데, 이것 역시 하루빨리 서둘러서 그렇게 했다.
 
(47) 존재의 속도를 앞지르는 기차의 속도에 따라 생겨난 조급함의 열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억의 되새김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근대 한국인의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근대 한국인이 집단적인 기억상실에 빠진 징후는 그들이 오랜 세월 손때 묻히고 눈도장 찍어온 낯익은 취향과 결별한 데서 찾아진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찰나인 동시에, 어제의 나에 대한 기억이 깃들이는 영겁이다. 따라서 기억상실에 빠진 자들의 취향이란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와도 같이 무의미하고 심지어는 추하기까지 하다.
 
(50) 취향이란 저마다의 몸 속에 자리잡은 나름의 척도인 까닭에, 낯익은 취향 속에 들어있는 타인의 척도를 향해 미소짓는 것은 결국 저다움에 대한 자기부정을 의미한다.
…… 여기서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형식의 후예인 우리 역시 자신의 취향을 혐오하고 타인의 취향을 선망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취향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라는 영혼이 깃드는 육체와 같은 것이며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통합되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이룩한다. 그렇다면 낯익은 취향을 청산하고 기억상실에 빠진 지난 세기 한국인의 내면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기억 속의 심상을 거느린 낯익은 취향을 회복하는 일이 오늘의 과제로 새롭게 떠오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51) 한국적인 것의 항목에 한국화한(Koreanized) 샌드위치라는 새로운 메뉴가 덧붙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의 취향과 타인의 취향이라는 모순을 창조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결실을 수확하는 만고불변의 공식이 아니겠는가.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1.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60) 에드워드 사이드는 하위사회와 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내세워 그들의 미와 상상력을 교묘하게 착취하고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자기소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 같은 근대 속의 야만을 동양주의 또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다.
 
(63) 멍청하고 순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흙 묻고 지푸라기 묻은 모습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의 산물로서, 제국 일본에 의해 조작된 식민지 조선의 왜곡된 자화상이다. 인격을 상실하고
사물적인 격을 지닌 존재에게 미의식 대신 무의식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바로 야나기의 조선 예술론의 핵심이다.
 
(73) 왕궁의 뜨락에 깔린 박석이 반듯반듯한 전돌이 아니라 삐뚤빼뚤한 화강암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만약 돌마저 반듯했더라면 정전의 격조는 한 차원 높은 멋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한 차원 낮은 형식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작은 돌들을 반듯하게 정렬시키고 가장자리에 금까지 그어놓은 중국 정원의 바닥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같은
다름의 틈새에서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토속적인 자기로서의 미의식이다.
 
 
2. 일본 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77) 관념적인 원리에 달라붙은 편집증적 태도야말로
카라고코로인 것이다. 반대로 노리나가는 감정이 지성이나 도덕성보다 심오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마토타마시이란 그렇게 세세한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지적, 도덕적 원리에 의해 부정되고 은폐되어 버리는 작은 감정(모노나와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야마토타마시이라고 말한다.
 
(85) 신이 마련한 길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순종을 통해 신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랄까. 순종과 은총의 함수관계 속에서 은총을 대가로 순종을 강요당하는 거세된 존재인 일본적 인간상이 그들의 마음에 달콤한 비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88)
은근한 아취가 있는 것은 좋고 억지로 아취 있게 만드는 것은 나쁘다라고 한 것은 과연 명언이다. 임제 선사는 겸손함에는 조작이 없다고 했지만 시부사에서는 조작(Artifice, Artificialness)을 떠난 고요함, 즉 자연스러움의 정취를 볼 수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 「시부사에 대하여」)
시부사의 아름다움이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것은 한마디로 함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 시부사의 말 뜻은 감즙의
떫은 맛에서 감색의 차분함으로, 다시 차분함의 내면적인 깊이로 확장된 것이다.
 
(90) 한국 예술에서 시부사를 창장하고자 한 일본인의 소망과는 달리, 일본의 시부사가 지닌
함축적인 차분함의 느낌과 조선 도자기의 소색(素色) 또는 비색(秘色)의 차분함 속에 담긴 풍요로운 단색조의, 생기 넘치는 깊은 맛 사이에는 일본인 야나기의 애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뛰어넘을 수 같은 낭떠러지가 가로놓여 있다.
 
(9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그들의 것은 그들에게로 되돌려줘야 한다.
 
 
3. 선의 미와 야나기의 환상
 
(93) 야나기에 따르면 누구든
저 호소하는 듯한 선을 대하는 자라면 그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정을 읽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며, 그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정을 읽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속에서 쓸쓸함의 아름다움동경하는 마음의 눈물을 보고 그것을 정의 기물로서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96) 산지보다는 평지가 많아 주변과의 조화를 고려할 필요가 적은 중국에서는, 가옥의 처마선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유아독존형의 자유곡선으로 되어 있다. 한옥과 중국집 처마선의 차이 속에는
모를 살짝 죽인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모를 한껏 도드라지게 한 중국적인 아름다움의 차이가 숨어 있다.
 
(96) 조지훈은
멋의 형태미는 직선보다는 항상 곡선에 있으나 과도하게 곡절된 형상에는 멋이 없다고 말하면서 저고리 깃이나 버선코의 선, 한옥의 지붕곡선을 예로 들었다.
 
(97) 평고대는 곡선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리 재료를 구해서 양쪽을 받치고 가운데 돌을 달아매 자연스럽게 처지도록 만든다. 결국 지구의 만유인력에 의해 처진 평고대의 곡선이 한옥의 지붕곡선이 되는 것이다.
 
(97-98) 물매를 직선으로 하지 않고 곡선으로 하는 이유는 빗물을 빨리 배수하기 위한 이유이다. 직선으로 거리가 짧아서 더 빨리 배수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이클론 곡선으로 만들었을 때 가속도가 붙어서 더 빨리 배수된다는 것이다. 또 빗물의 먕이 적은 용마루 부분에서는 빗물을 빨리 내려가게 하고 빗물이 많은 추녀부분에서는 조금 속도를 줄여 기와의 마모를 비슷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다고 본다.
 
(99-100) 즉 결론을 간단히 말하면 그들의 미의식은 주제가 정지태에 있지 않고 힘찬 운동 계열에 있는 것이다. (고유섭, 「고대인의 미의식」)
 
(100) 그들의 미의식은 주제가 정지태에 있찌 않고 힘찬 운동 계열에 있다는 것. 자웅이 합체 되고 음양이 하나 되어, 마치 태초에 내딛는 첫발자국과도 같이 고도로 응축된 힘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 이 같은 미의식의 특성은 비단 사신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옥의 지붕곡선이나 의복의 선, 도자기의 선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그것들은 근엄하게 팔장을 낀 듯한 정지태에서 벗어나, 살아숨쉬며 꿈틀거리며 심지어는 슬쩍 말까지 걸어오는 듯한 움직임의기미를 드러낸다.
 
(101) 조선 역사의 운명은 슬픈 것이었다. 그들은 억압에 억압을 받으며 3천 년의 세월을 보냇다.
나는 조선의 예술, 특히 그 요소로 볼 수 있는 선(line)의 아름다움은 실로 사랑에 굶주린 그들 마음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눈물로 넘쳐 흐르는 갖가지 호소가 이 선에 나타나 있다.
 
(102) 사대외교를 흔히 사대주의와 혼동하여 자주성이나 주체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사대외교는 어디까지나 민족보전을 위한 현실적 외교정책으로서 결코 자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4. 일본의 기교(技巧)와 한국의 격(格)
 
(104) 무기교의 미란 무엇인가. 한국 예술에는 도무지 기교라고 할만한 것이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최고의 미가 창조된다는 것이다.
 
(106) 흔히 격(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빈틈없이 맞추어야하는 눈앞의 실선 같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의식되는 머리 속의 점선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기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인 반면, 한국의 격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한국의 격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를 어림하기 위한 가상의 척도 같은 것이다.
 
(107) 다시 말하면, 멋은 먼저 형식상의 격식을 바탕으로 한다. 즉, 격에 맞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격식에 맞는다는 것만으로 멋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격식에는 빈틈없이 맞으면서도 멋이 없는 예술과 행위를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본다면, 멋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 바꿔 말하면 격이 맞는 변격(變格), 변격이면서 격에 제대로 맞을 때 거기서 멋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초격미(超格美)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변격이합격(變格而合格)이요 격에 들어가서 다시 격에서 나오는 격이라 할 수 잇다. (조지훈, 「멋의 연구」)
 
(108) 첫째 수식 득격이란 식(式)을 최소화해야 격(格)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 부작기격 염화취실이란 화(華, 형식)를 거두어야만 실(實, 내용)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격식만을 좇는 기이한 격식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8) 그것은 형(形)의 격, 육체의 격을 멀리하고 상(象)의 격, 정신의 격을 가까이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진선미를 종합한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09-110) 일본의 격이란 위계질서의 표현인 격식(格式)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첫째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인 한국의 격과는 달리 넘나듦이 가능하지 않은 세부항목을 말한다. 둘째 그것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 예(禮)가 아니라 그 시대의 풍속(風俗)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으로서 풍속의 덧없음을 특징으로 하는 물질적이며 가변적인 것이다.
 
(111) 사물은 상(象)과 형(形)이 하나로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양자는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어 하나가 평균 이상으로 빼어나면 다른 하나는 평균 이하에서 어릿거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13) 조선의 둥근 달항아리는, 그의 말처럼 한국의 미가 타력에 기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빙그레 곰삭은 웃음으로 전해준다. 그것은 철없는 아이의 천진함이 아니라 철없는 아이와도 같은 경지에 올라선 대가(대가)의 원숙함에 비유된다. 그것은 고도의 정신적인 수양을 비롯한 피나는 단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며, 다시 그 같은 경지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을 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경지이다.
 
(114) 이 원숙성은 원숙하여 도리어 아졸미(雅拙美)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오(大悟)하고 보니, 대오하기 전과 같더라는 소식이다. 늙으면 도리어 아이와 같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멋은 원숙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그 원숙에서 오는 능란함의 무난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원숙은 초규격의 바탕이지만 초규격이 곧 원숙은 아닌 것이다. 추사의 글씨가 이러한 문제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조지훈, 「멋의 연구」)
 
 
5. 근대적 자의식과 한국 예술의 민예성
 
(118) 그것은 한국 예술의 상(象)의 미의식을 일본인의 형(形)의 미의식으로 바라봄으로써 생겨난 발견이다.
 
(119) 그렇지만 근경의 시선으로 전모를 포착할 수는 없었음에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원경의 아름다움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터,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운 불가사의로서 그것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복하자면 그는 정신의 격이 세련된 까닭에 형식의 기교는 서투른 것처럼 보이는 한국 예술을 형식의 기교를 앞세우는 일본인의 미의식으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세련됨은 지나쳐버린 채 서투름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6. 자연과 작위를 통합시킨 일본의 세(勢)
 
(123) 본디 이러한 일은 도덕적으로는 용납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부득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124)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없이 깍아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여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28) 서구인은 서구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황금비라는 취향을 만들어냈고, 한국인은 한국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다른 이름의 취향을 만들어냈다.
 
(128)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9) 신의 창조란 인간의 창조의 원형이다.
  
(131) 진
··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이다.
 
 
1. 음양오행과 상(象)의 미의식
 
(132)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形)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138) 그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닐까.
 
(138-139) 박수근은 한국인의 몸 속에
기억 속의 심상으로 저장된 화강암 마애불을 오늘의 살아 있는 전통으로 새롭게 창조해냈다. 박수근의 인물과 마애불의 부처님은 꿈속에서처럼 흐릿한 모습을 하고 있다. 희한한 것은 이들의 모습이 흐릿해지면 질수록 이들의 마음이 한층 또렷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41) 화강암이 한국인의 손에 유달리 익숙하게 다루어졌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것으로 손꼽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반복하자면 그것은 가까이서 보기에는 졸한 듯 하지만 멀리서 보면 아를 발하는 화강암의 질감이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2. 아졸미(雅拙美) 또는 고졸미(古拙美)
 
(145) 옛날에는 부잣집에서도 좀 삐딱허게 꾸어진 것도 그대로 사갔어라우. 뜯어보믄 잘 못 생겨서 잘 생긴 것도 있어라우. (박나섭 구술
·오현주 편집, 「나 죽으믄 이걸로 끄쳐 버리지」)
 
(146) 비로소 우리는 일그러진 달항아리와 휘어진 대들보를 통해,
형의 어눌함의 후광에 해당하는 상의 세련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상의 세련됨을 머금은 형의 어눌함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문화를 마음으로 겪은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고졸이나 아졸, 무관심성이나 비균제성의 본질이다. 그 만듦새는 극히 소박하여 전체적으로의 조화와 균제의 미를 찾았을지언정, 부분 부분 뜯어보면 차라리 거칠다 할만큼 잔손질이 가지 않은 것이 한층 우리의 주의를 끈다(김용준). 그러나 볼수록 여운이 남는 아름다움이 있어서, 초라한 육신에 깃들인 품격이 있는 정신이 느껴지는 것.
 
(149) 가옥을 가만히 응시해보면, 시초에는 가옥 앞면의 전체를 차지하는 창호의 화사한 무늬들이 무한대로 확대되다가 마지막에는 가옥 전반의 차분한 고즈넉함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잦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의 미의식과 고졸함은 이처럼 한국인의 일상 속에 별다를 것도 없는 낯익은 얼굴로 너울을 드리워왔다.
 
 
3. 발효맛과 생기의 미감
 
(153) 상(象)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잇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生氣)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155-156) 한국인이 이처럼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생활 속에서 물질적으로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해온 감각적인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발효맛이다. 본래 음식과 결부되어 있던 물질에너지인 맛은, 어느 순간 그로부터 떨어져나가 정신 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미감 또는 미의식을 파생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57) 흥미로운 것은 발효음식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며, 발효맛은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 있는 맛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추구하는, 상의 미의식과 통한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맛인 발효맛으로부터 한국인의 미의식의 물질적 측면인 미감이 유추된다.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맛인 발효맛을 연상시키는 미감이 그것이다.
 
(157) 항아리에서 꺼낸 김장김치의 맛이나, 멸치국물에 된장을 풀고 콩나물이나 무우를 넣거 끓인 된장국의 맛, 개인의 손맛과 집안의 내림맛, 지방색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발효음식의 맛, 이상으로부터 파생된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의 미감.
 
(159) 김치가 한국 음식을 대표한다는 것은 발효식이 한국 음식의 기저라는 말과 같다. 세계 어디에나 있는 발효음식을 한국의 독점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지나친 아전인수의 논리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발효음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요리의 시스템이나 코드로 사용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어령, 「김치맛과 한국문화」)
 
(161) 첫째는 한국의 풍토와 관련된 것인데, 기후가 온난하고 습윤하며 토양이 산성이어서 음식물이 부패하기 쉬운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1-162) 둘째로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 농경국가인 한국은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먹거리를 거둬들였는데, 양쪽에서 거둬들인 다양한 먹거리-육지의 채소와 바다의 소금 및 생선-를 잘 조화시켜 풍요로운 발효음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162) 발효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효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맛을 낳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물질에너지에서
열에너지로 승화됨으로 써,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의 미감을 탄생시켰다.
 
(163) 하지만 돌아보건대 지난 세기의 한국인은 된장찌개에 구더기를 처넣은 에피소드가 상징하듯이, 발효맛에서 생기의 미감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취향과 결별하는 기억상실의 세월을 살았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발효맛의 취향과 화해사고 그것을 일상에서 되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허기에 따른 마구잡이식 뷔페에서 벗어나,
기억 속의 심상과 알뜰하게 손잡은 입맛은 살리는 정갈한 밥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호사스런 취미와 구별되는 까다로운 취향이 올골지게 자리잡아갈 때에만, 한국인의 미의식 역시 생기발랄하며 웅숭깊은 것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4.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164) 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서로 상 자(相)와 살릴 생 자(生)자가 합쳐져서 서로가 서로를 살린다는 뜻을 나타내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서로를 돕고 이해하며 서로 생각해 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어운형
·전창선,「오행은 뭘까?」)
 
(166) 넓은 의미의 부패란, 미생물의 증식으로 식품성분이 분해되어 유해한 물질이 만들어짐으로써, 가식성(可食性)을 잃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동일한 미생물의 작용이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유익한 생산물로 변화한 현상을 발효(醱酵, fermentation)라 한다.
 
(167) 발효를
썩지 않으며, 처음 그대로 유지되지도 않은 은근한 곰삭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이것이다. 그러니까 발효의 원리란 자연의 이치에 따른 상극의 과정인 부패를 인간의 지혜에 따른 상생의 과정인 발효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169) 바보의 원리란 상극의 원리가 관철되는 무정한 자연을 상생의 원리가 숨쉬는 유정한 자연으로 바꾸려는 인문적인 자의식의 소산이다. 인과율에만 따르는 자연적인 상극을 목적률을 지향하는 인문적인 상생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랄까.
 
(170) 사기와 싸워 이기는 대신, 상생적인 조화를 이룩하여 생기를 북돋움으로써 벽사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적 비보의 원리이자 한국적 미의식의 원리다.
 
(171) 그렇다면 완전한 아름다움(全美)을 지닌 완전한 땅이란
자연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을 거친 인문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사람의 손길이란 비보(裨補)요,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상(象)의 아름다움이다.
 
 
5. 해학과 신명
 
(172) 이제까지 우리는 발효의 원리와 비보의 원리를 통해, 상극관계를 상생관계로 변용시키는 한국인 미의식의 실천 원리를 살펴보았다. 이에 따라 생겨난 미적 범주가 바로 해학과 신명이다. 해학과 신명은 무엇보다 인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한국인의 자화상과 만날 수 있다.
 
(173) 전자가 대성통곡하며 우는 눈물이자 한이라면, 후자는 배꼽을 잡으며 웃는 웃음이자 흥이다. 결국 한국인의 자화상은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본질이 관철된다.
 
(174-175) 한국인은 눈물과 한, 웃음과 흥이 한데 버무려져,
생짜의 것곰삭은 것으로 발효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한 위에서 어느새 흥이 겹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표정을 대표하는 얼굴이 눈물의 세월을 안쪽에 숨긴 곰삭은 웃음을 떠올리는 까닭이다. 서글픔일랑 진즉에 통과하여 저만치 흥에 겨운 얼굴. 해학과 신명의 가락 위에 얹어놓은 자화상.
 
(175) 멋은 형상이나 가락이나 마음에 있어서 한 움직임에서 다음 움직임에로 이어 가고 넘어 가는 과정에 나타난다. 가동적인 정지태(靜止態), 멈추려는 움직임이 연속되는 가동적인 경향상태가 멋의 형태미의 본질이다. (조지훈,「멋의 연구」)
 
(176) 움직이고 있으되 멈춰 있으며, 멈춰 있으되 움직이고 잇는 것. 그런데 바로 그 멈춰있음 때문에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은 웃고 있으되 울고 있으며, 그 울음 때문에 웃음 이상의 웃음을 머금게 하는 한국인의 미소와도 통한다. 이 같은 멈춤의 그늘, 울음의 그늘은 한국인의 오랜 세월 온몸으로 부딪혀온
상극적인 것의 살아 있는 과거이며, 이 같은 그늘을 슬며시 드리운 웃음 이상의 웃음,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온 마음으로 삭혀온 상생적인 것의 살아 있는 미래다.
 
(177) 그렇다면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홧기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잇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의 자화상으로 하여금 눈물과 한을 넘어 웃음과 흥으로 휘몰아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와 관련해서 박래경은
살아 있는 유기적 생명체가 역시 생명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자연 속에서 노닐면서 자신의 생명유지와 생명확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갈등을 타넘은 결과 어떤 즐거움과 유희성이 동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177)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같은 생기의 느낌 또는
가동적인 정지태의 출렁거림이 해학과 신명이라는 인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를 넘어 사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로 확장될 경우, 그 자리에서 한국적인 선(線)의 아름다움이 창조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178) 한(恨)은 흥으로 발효된다.
 
(178) 결국 한국인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 가는 전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것은 김치가 익어 시원하고 칼칼한 발효맛을 내기 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 비유된다. 맛이 들고난 후의 곰삭아 익은 맛을 김치맛이라고 하지, 맛이 들기 전의 설익은 맛을 김치맛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179) 한국인은 한을 삭이면서 인간으로 성숙해가고, 그 한을 즐기면서 멋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6. 고지도와 명당론
 
(183) 그의 자화상의 강렬한
:썽이란, 그의 말그림이 그렇듯이 지성으로 길들이고자 했으나 끝내 길들여지지 않았고 선비의식으로 다듬고자 했으나 끝내 다듬어지지 않은 개성적인 자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185) 우리는 문화에 대한 인간의 시간적 인식이 역사라며, 공간적 인식은 지리와 지도라는 다음의 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85)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
 
(186) 사람은 위치와 장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람은 시간에 대한 사유보다 공간에 대한 사유를 더 절실해 한다.
 
(186) 무엇보다 공간 의식이란 인간의 정체성을 속절없이 떠도는 천상의 것으로부터 든든하게 뿌리내린 지상의 것으로 잡아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87) 삶터는 소속을 태포한다. 삶터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소속감을 규정하며 운명을 가늠한다. 삶터는 뿌리와 방향을 제공하는 삶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최창조,「한국 풍수상의 이해를 위하여」)
 
(189) 그것은 땅을 인체와 마찬가지로 뼈대(산줄기) 와 핏줄(물줄기)을 갖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본 것이다. 그들은 땅에도 음양과 오행의 이치가 있어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바람직한 삶의 터전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지도를 그릴 때에도 땅이 살아 있다고 보아 생명체적 요소를 강조해서 그렸고, 산과 강은 뼈와 혈관으로 이해하여 맥을 강조해서 그렸다.
 
(190) 우리가 옛지도를 볼 때 땅에 대한 애정이 솟구치는 것은, 땅이 생명체로서 살아서 약동하여 그 기운이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다.
 
(191)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과의 경쟁에 쫓겨 성찰의 자세를 내던지 지난 세기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191) 하지만 철저한 비판의 시기를 갖지 못하고, 그것을 완결하지 못하고 이제 다시 계승을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비극이다.
 
(194) 결국 풍수사상이란 한국인의 의식 뒤편에서 후광처럼 빛을 발함으로써, 의식의 수면 위를 떠다니는 공간 심상들로 하여금 실용적인 기호의 성격을 넘어 예술적인 도상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도록 만드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6) 명당이란
상생적인 조화로움에 따른 유정함을 지닌 곳이나 속기가 없는 유토피아가 된다.
 
(196) 명당이란 본래부터 그곳에 존재한 자연적인 풍경 위에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식에 따라 생겨난 인문적인 풍경을 겹쳐놓은 것이다.
 
(199) 우리는 한국인의 공간 취향이 자연적인 동시에 인문적인 것이며, 인문적인 동시에 다시 자연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200) 당신의 마음 속에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과 무관한 동기에 따라 기억 속에 자리잡은 공간적 심상이 있다면, 그 같은 공간적 심상으로부터 문화적인 인식과 실천에 대한 통찰을 제공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공간 취향이며 저다움의 미의식의 교두보라고 말이다. 옛집이라는 것, 고향이라는 것, 낯익은 등산로,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라 눈앞을 가로막는
그때 그곳이나 미지의 어느 곳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7. 백의와 색동
 
(201)
밝고 맑은, 즉 명도와 채도가 아울러 높은 색이다.
 
(201-202) 명도와 채도가 아울러 높은
시원하고 칼칼한 색. 자연 염색된 조각보에서 볼 수 있는 투명한 담채(淡彩, 식물성 염료로 엷게 칠한 것)와도 같은 색.
 
(202) 한국인이 선호한 빨강은 중국의 빨강과 비교할 때명도가 높아 담백한 맛을 주고, 노랑 역시 자연에서 쉽게 접할 수 잇는 밝고 맑은 노랑색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빨강과 노랑을 대비시켜 이룩한 화려하고 미묘한 색채조화에서 한국인의 색 기호 경향을 볼 수 있다.
 
(202) 색이란 사실상 어떤 풍경과 관련된 시각 이미지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색배열 또는 색구성의 문제가 색상의 문제보다 중요할는지도 모른다.
 
(203)
길게 늘어트린 의상들은 흰색을 비롯하여 연두, 자주, 노랑, 파랑 빛을 띠며 서로 어우러져 유연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검은 색 모자가 중심을 잡아 주고 있다.
 
(204) 그들의 의복은 흰색, 푸른색, 붉은색으로 다양했고 초록빛 언덕과 함께 정말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치 여기저기 커다란 꽃바구니를 놓아둔 것 같았습니다.
 
(205) 그것은 첫째 흰색을 여백으로 남겨둔 수묵채색화 같은 구성이며, 둘째 하양, 까망에 빨강, 노랑, 파랑이 한데 어우러진 오방색의 구성이다.
 
(206)
청색이 중국의 색이라고 한다면 흰색은 한국의 색이다. 조선의 고유 의상에서는 생동감이 넘치는 백옥 같은 밝은 흰색부터 광목처럼 거칠고 투박한 흰색이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종류의 흰색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조선의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잇는 다양한 흰 옷 물결이 만들어 내는 조화는 마치 음색의 향연 그 자체인 것이다. …”
 
(206) 소색이란 무엇인가. 바탕 소자(素)에 색 색자(色), 옥양목이나 비단, 광목의 색처럼 재질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의 색감을 드러내는 자연의 바탕색이다.
 
(207) 한국인이 애호한 백색은 백자의 투명함에서 접할 수 잇는 백색이나 세모시 백색 도포에서 보이는 백색과 같이 격(格) 있고 깊이 있는 색이다.
 
(208) 한국인의 색 취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의 색채적 심상의 바탕색에 해당하는 소색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다양한 질감을 지닌, 생기 넘치는 소색의 아름다움, 은은하고 투명하면서도 깊은 맛을 지닌, 미묘한 뉘앙스의 매력. 천연 그대로의 색을 간직한, 격있고 깊이 있는 아름다움. 이것은 태토(胎土)의 종류에 따라 눈빛 같은 설백이나 젖빛 같은 유백, 잿빛이 도는 회백을 띠는 백자의 색이나 지백이라 불리는 한지의 색, 모시나 삼베, 옥양목이나 광목 같은 옷감의 색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으로,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뉘앙스를 지닌 것이다.
 
(208)
단일색에서도 호리(豪釐-털끝)의 변화로 복잡한 색도를 느낄 수 있다
 
(210) 여백은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눈에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심오한 상태인 것이다.
 
(215) 그러나 흰옷은 언제나 상복이었다.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마음의 상징이었다. 아마 이 민족이 맛본 고통스럽고 의지할 곳 없는 역사적 경험이 이러한 의복을 입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쨌거나 색이 빈약하다는 것은 생활에서 즐거움을 잃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219) 아무런 색도 지니지 않은 흰색 취향과 관련된 부정적인 자화상,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소멸 지향의 자의식. 제국주의자의 종정에 기대야만 간신히 지탱할 수 잇는,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식민지인의 정체성. 이상은 조선인 스스로는 아무런 창조적 에너지도 소유하지 못하며, 오직 일본인의 은총에 의지해야만
기적과도 같은 창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 일본인 야나기의 한국 예술론의 본질이다.
 
(223) 이제 우리는 어느새 친근한 벗인양 우리 곁에 자리잡고 있는 백의민족의 표상을 향해
백의민족이여 안녕, 그동안 겪어내야 했던 뼈아픈 이십 세기여 안녕, 이십 세기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이데올로기여 안녕, 역사의 갈피 속으로 영원히 안녕!이라는 단호한 고별사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225) 이들 도시의 색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칠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물들어온 것이다. 이들의 색은 거기서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에 오랜 세월 거듭해서 쌓아올려진 색에 대한 취향이 투영된 것이다. 마음의 색이 풍경의 색과 하나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기억 속의 심상이 현실의 풍경과 오버랩되는 일상을 꾸리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미의식의 행복한 주인공들이다.
 
(225) 고유색의 부재란 한국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전반의 문제인데, 이 같은 문제의 배경에는 색 취향을 비롯하여 취향 전반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기억상실이 자리잡고 있다.
 
(227) 비록 오늘은 가짜 버버리의 무늬와 유사 베네통의 색에 둘러싸인 색치의 일상에 갇혀 있을지라도 일단 그 빗장이 열리기만 한다면, 그때 우리는 한판의 축제를 치르는 것과도 같이 한순간에 혁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1. 이데올로기에서 취향으로
 
(231) 적어도 미의 문제에 관한 한, 이데올로기적인 표상보다는 취향적인 심상이 사물의 본질에 입체적으로 다가서는 쿨한 프리즘이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끌리며 좋아하는 것이다. 물론 취향은 갈짓자의 것이어서, 옳고 그른 잣대가 있는 것도 아니며 변덕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231)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232) 개성 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동양화의 여백이란 하릴없이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정신의 여백을 간직한 사람만이 시시때때로 튀어오르는 정신의 자투리들로 아름다운 성찰의 조각이불을 꾸며낼 수 있다.
 
(232)
사물을 의식함으로써 그 사물을 의식하는 자신을 의식하고 반성(retrospection) 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정신 내용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233) 다른 한편으로는 취향이 지닌 다원적인 모호성을 못미더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난 세기 이래 우리 안에 그늘을 드리운 이데올로기적인 사고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사고란,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자유주의 같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너머에 존재하는 이원론적인 사고 일반을 가리킨다.
 
(235) 한복바지는 우리의 인체(입체)에다 옷을 그대로 맞추어 놓은 것이라면, 양복바지는 2차원의 평면에다 3차원의 인체를 넣는 무리를 저지르고 있다.
 
(236) 이 같은 반성은
시간과의 경쟁에 내몰려 성찰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근대 한국인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236)
나를 살리면서 남을 참고한 대힌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 데 몰두했으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 상생 지향과 탈속의 아름다움
 
(242-243) 우리는
날카롭기가 칼날 같고 속으로는 부드럽기 풋솜 같은 맛이 있는(이것은 본래 추사체에 대한 김용준의 평이다) 그의 눈빛을 통해, 천지인 가운데서 해소되기는커녕 도리어 한결 오롯이 빛나는 선비의 자의시고가 만난다.
 
(252) 그때까지 나는 그곳의 자연과 거리라는 원관념은 빼놓은 채 이것과 그림 사이를 다리놓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신기루인 양 찾아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의 눈을 떠보니, 그들이 탁월한 예술가인 까닭은 그곳의 낯익음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돌아보게 만든 데서 시작된 것이다.
 
 
3.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
 
(258) 쓸쓸함과 즐거움이 함께 한다는 것. 이것은 자신들의 몫인 인간의 문화를 천지인 전체의 상생적인 조화를 이룩하기 위한 비보물로 간주한 한국인이, 어느 순간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인간적인 자의식 자체를 놓쳐 버렸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4.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
 
(261) 따라서 우리는 상생 속의 상극, 정지태 속의 가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 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5.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
 
(268) 기쁨. 산다는 것의 기쁨. 육체의 기쁨.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것.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 이것이 바로 상극적인 부조화를 상생적인 조화로 승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한국적인 감성의 본질이다.
 
 
6.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271) 달리 말하면
남의 유행을 참고로 해서 토속적인 자기를 새롭게 하고자 한 것이랄까. 아니면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돌아본 것이랄까. 이것이 바로 김정희의 창작방법론으로 거론되는 법고창신의 올바른 해석이다.
 
(274) 국제적인 안목과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토속적인 안목과 감각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며,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양자는 창조의 주체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추사는
토속적인 자기를 지키는 것과 남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창조적으로 회통시켰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었다.
 
(276-277) 새로운 전통의 창조란 언제가 개인의 개성이 집단의 개성을 뛰어넘고 이것이 다시 집단의 새로운 개성으로 자리잡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78) 우리는 이 같은 공존을 혹은 옛것 쪽으로 되돌리거나 혹은 새것 쪽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그것들을 하나로 버무려내는 모순적인 공존을 통해 창조의 길로 나아가는 유연하고도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새것의 프리즘을 통과하여
지금 이 순간에 살아남은 옛것의 존재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279) 백남준과 겸재가 그랬으며 추사가 그랬듯이, 한국인이니 세계인이니 하는 구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신을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인으로 여겼으며, 이 같은 회통적인 사고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창조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회통적인 사고. 한국인과 세계인 사이에서, 법고와 창신 사이에서 회통적인 사고를 모색한 사람들만이, 창조라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280) 순일(純一)함이란 불모의 것이요 난장(亂場)만이 다산의 터전이라는 것. 전통의 고유색과 현대의 난장은 불이(不二)의 묘경(妙境)으로 회통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퇴행적인 저다움을 딛고서 도달해야 할 진정한 저다움인 동시에, 조선식의 순종적 예술실천을 추사식의 잡종적 예술실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진정한 견인차인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세계적인 예술인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남준을 시작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으로 끝을 맺는 이 책을 통해 저자 강영희는 한국인의 미의식을 찾고자 했다. 우리의 기억과 미의식의 근원을 찾아내고 동서양의 미의식을 찾아내어 한국인의 본질이란 화두를 풀어내고자 했다.

 

현대처럼 한국의 본질과 미의식이 세계화라는 이름아래 매몰된적이 있었던가?

과연 우리에게 우리만의 미의식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시대에 한국인의 미의식을 탐구하고자 한 저자의 시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구성별 내용을 살펴보면 제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에서 우리는 속도라는 조급함이라는 덫에 걸려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기억상실은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와도 감이 무의미하고 심지어 추하기 까지 한 상태이며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까지 흔들리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이야 말로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과 당부는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2부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을 논한다. 이 장에서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한국의 미의식을 재해석 하고자 한 저자가 야나기의 방식의 비교한 설명밖에 할 수 없었나 하는 아쉬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가 우리것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에서는 우리의 미의식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음양오행, 고졸미, 발효, 상생, 해학과 신명, 명당, 백의와 색동등 우리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핵심이라 할 것이며 읽는 독자들의 흥미를 배가시켜 준다. 화강암의 작품들이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것으로 손꼽힌다는 저자의 주장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일그러진 달항아리와 휘어진 대들보,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있는 맛의 김치,하회탈을 연상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이미지와 만났을때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마지막 제 4부는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이란 주제를 통해 저자는 내일의 한국인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저자가 주장하려 했던 우리의 지향점에 대한 갈팡질팡이라고 해야할까? 저자 스스로가 이곳에서 길을 잃은듯한 느낌을 준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한국의 미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짐은 물론이고 저자의 말대로 밖으로만 향해 있던 안테나를 내리고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미의식을 찾고 우리의 본질을 알아나가는 것 뿐만 아니라 에 대한 탐구를 중인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외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저 밑바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탐구, 나에 대한 성찰 그리고 성장을 위해 시작한 연구원도 어느덧 막바지이고 무엇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IP *.161.251.17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92 [34] 카르마경영 - 이나모리 가즈오 거암 2009.01.05 5839
1791 [37]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 2009.01.05 2721
1790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 우종영 file [1] 이은미 2009.01.05 15244
1789 [35]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 최코치 2009.01.05 2680
1788 [33]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현정 2009.01.05 2523
1787 [36]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 file 양재우 2009.01.04 2729
1786 [34]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2008.12.29 2922
1785 [33] 금빛 기쁨의 기억 2008.12.23 2438
1784 [32]금빛 기쁨의 기억 - 강영희 현정 2008.12.23 2729
» (31)금빛 기쁨의 기억 -강영희 이은미 2008.12.22 2671
1782 [33]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정산 2008.12.22 7263
1781 [34] 금빛 기쁨의 기억 - 강영희 최코치 2008.12.22 2530
1780 [35] 금빛 기쁨의 기억 - 강영희 file 양재우 2008.12.22 3947
1779 [36] 금빛 기쁨의 기억-강영희 2008.12.21 2316
1778 [31]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아르놀트 하우저 구라현정 2008.12.16 2806
1777 [31] 컬처 코드, 클로테르 라파이유 [1] 현웅 2008.12.15 3122
1776 (30)컬처코드-클로테르 라파이유 이은미 2008.12.15 2289
1775 [32] 컬처코드 -클로테르 라파이유 2008.12.15 2147
1774 (31)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신영복 [2] 소은 2008.12.15 2563
1773 [33] 금빛기쁨의 기억 - 강영희 거암 2008.12.15 2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