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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3일 06시 56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강영희

 

그녀의 직업은 문화 평론가이다. 세상의 잡사(雜事)에 대한 잡문(雜文)을 써 왔다는 그녀는 세상의 모든 잡학(雜學)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녀의 그녀의 꿈의 주제가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참 용감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연구가 많이 되어 있지 않아 쉽게 써질 것 같지 않는 우리 문화에 대한 평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마 없는 자료들을 모아다 놓고 곱씹고 따지고 깊이 성찰하며 어떤 논의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힘들게 자신의 논리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오늘 날, 많은 이들이 서구의 문화에 대해 논하고 그것들을 마치 오래 전부터 우리 것인 양 논하고 있을 때 우리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는 ? 어찌 보면 돈도 안 되고 인기도 못 얻을 것 같은 ? 작업에 몰입해서 진작 나왔어야 할책을 내어 놓는 그녀의 용기와 뚝심이 오래 가기를 바라면서, 그녀가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명저를 써 주었으며 하는 바램을 한 번 더 가져본다.

 

이력

서울대 동양사학과 학사

서울대 국문학과 석사

동국대 영화학과 석사

 

주요 저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994)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1998)  

 

II.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15 여기 두 갈래의 기이 있다.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길이다. 당신은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가. 금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인가,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인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인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인가. 이 같은 질문에는 단서가 하나 따라다닌다.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21 이 같은 나의 의심벽은 무엇보다 내가 자랑스러운한국인이나 민족주의라는 화두와 함께 이십대를 보낸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런 내가 어느날 낯선 침입자처럼 들이닥친 세계화라는 구호 너머 백남준의 입에서 튀어 나온 이런 말을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토속성과 세계성은 양자택일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토속적인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한국인인 나에게 주언진 길인 반면 남을 흉내내는 것은 세계인 백남준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22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

 

24창조의 빛이란 세계인 윤이상과 한국인 윤이상이, 세계인 이응노와 한국인 이응노가 부싯돌의 스파크와도 같이 절묘하게 부딪쳐서 피워올리는 한 줄기 섬광이다. 마애불과 쇠라의 그림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박수근의 그림도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 이것들은 세계인에 대한 한국인의 승리도 아니고 한국인데 대한 세계인의 승리도 아니며, 그 같은 제로섬 게임을 벗어나 양자를 회통시킨 결과 도달한 창조의 열매다.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화통이다.

 

25장사꾼이면 어떻고, 평범한 시민이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이 창조적이기를 원하는가에 달려있다.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세계인과 한국인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개안이 필요하다. 한국인과 세계인, 토속성과 세계성이 창조의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경계를 허물고 손잡는다면, 그것들은 서로 다른 둘이고 모순이되 상생적인 둘이며 창조적인 모순이 될 것이다.

 

27세계인 백남준이 전통적인 인간의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한국인으로 남아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이다. 세계인 백남준의 예술이 한국인의 토속적인 자기를 주자하는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전통을 기억의 형태로 몸 속에 가득히 저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전통이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기억 속의 심상이다.

 

29기억의 두레박으로 무의식의 우물에서 의식의 샘물을 길어올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지난 세기의 예술정신을 대표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32전통이란 결코 이러한 손에서 손으로의 손쉽게 넘어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피로써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치러 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얻으려 하는 사람이 고심참담 쇄신분골하여 죽음으로써 피로써 생명으로서 얻으려 하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요. 주고 싶다하여 간단히 중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2 살아 있는 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되살아 난 것이다. 장욱진이 진진묘에서 새롭게 되살아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이미지, 빌 비올라의 만남에서 새롭게 되살아난 폰토르모의 방문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37 하지만 오늘의 만남은 어제의 방문과는 별개의 것이다. 오늘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제의 유물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시대 착오적인 딜레땅띠즘 대신 기억속의 심상에 새로운 양식을 덧입히는 동시대적인 다이너미즘과 만난다. 바로 이 언저리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전통과 마주친다.

 

41 ‘기차가 있는 풍경이란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 속에서 근대화를 향해 강박적으로 내몰리는 조선사람의 조급함을 상징하는 기호다.

 

41 근대 또는 문명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주먹을 불끈 쥐고 서둘러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재촉이라도 하듯이 칙칙폭폭 연기를 내 뿜으며 달리는 기차가 상징하는 것은 이것이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은 이 같은 풍경 속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모범답안을 암기하듯이,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문예사조를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대신 같은 분량만큼의 전통적인 그것을 버려야 했는데, 이것 역시 하루빨리 서둘러서 그렇게 했다.

 

42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개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45하지만 춘삼의 모습이 달리는 기차에 의해 집어삼켜졌들이. 조선 민중의 저항은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에 의해 묻혀버렸다. 그리하여 이십 세기의 조선은 기차가 있는 풍경이 뿜어내는 조급함의 열기로 끓어올랐다.

 

47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국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47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찰나인 동시에, 어제의 나에 대한 기억이 깃들이는 영겁니다. 따라서 기억상실에 빠진 자들의 취향이란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와도 같이 무의미하고 심지어는 추하기까지 하다.

 

49취향이란 무엇보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50 특수한 생활조건과 관련된 조건의 산물인 이 미적 성향은 동일한 조건의 산물인 모든 사람들은 함께 묶어주는 반면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시켜 준다. 그리고 핵심적인 측면에서 구분시켜 준다. 왜냐하면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있는 모든 것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50 하지만 취향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라는 영혼이 깃드는 육체와 같은 것이며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통합되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이룩한다. 그렇다면 낯익은 취향을 청산하고 기억상실에 빠진 지난 세기 한국인의 내면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기억 속의 심상을 거느린 낯익은 취향을 회복하는 일이 오늘의 과제로 새롭게 떠오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58 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게 됨으로써, 고유의 시선을 잃어버린 것이랄까, 바로 그 순간에 당신들 한국인에게는 미의식 대신 무의식이 훨씬 잘 어울린다는 야나기의 말이 들려왔다.

 

59하지만 한국인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자신의 예술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은 일본인의 미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60궁극적으로 허용되어야 할 유일한 동양, 또는 동양인, 또는 주체란 철학적으로 말하면 소외된 존재, 곧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이 아니고, 타인에 의해 제기되며, 이해되며, 정의되며 그리고 기능하는 존재이다.

 

61 한국인의 무의식과 함께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던 한국 예술은 혼자서는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는 평범한 밥공기였으며, 일본인의 미의식의 세계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천하 명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71한국 예술에는 자율적인 가치의 척도가 주어지지 않으며, 타율적인 척도로나마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된 미의식의 위계질서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같은 주장의 언저리에서 한국 예술에 대한 따뜻한 눈길 너머에 존재하는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치는 것은 필연적이다.

 

80 한국의 미를 비애의 미로 규정한 야나기의 주장은 한국사를 사대주의에 따른 비애의 연속으로 본 식민사관의 산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그가 한국 예쑬에서 발견한 비애의 미가 일본 국학의 정서적 핵심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를 비판하는 주장은 제기된 적이 없다. 야나기늰 이것을 쓸쓸한 정감이나 남모르는 정의 세계, 인정이나 마음의 하소연 등으로 표현했는데, 이렇게 해서 그는 모노노아와레라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와 거기서 우러나는 정서적 아우라를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한국 예술에 덮어 씌웠다.

 

90한국 예술에서 시부사를 창작하고자 한 일본인의 소망과는 달리, 일본의 시부사가 지닌 함축적인 차분함의 느낌과 조선 도자기의 소색 또는 비색의 차분함 속에 담긴 푱요로운 단색조의, 생기 넘치는 깊은 맛사이에는 일본인 냐아기의 애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뛰어넘을 수 같은 낭떠러지가 가로놓여 있다.

 

97처마의 이러한 곡선은 단지 아름답게 하려는 이유만은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지분의 물매가 곡선인 데 있다. 곡선으로 만들어진 지분의 물매가 팔작지붕처럼 네 면에서 만나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양곡과 안허리곳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마의 양곡과 안허리곳은 곡선으로 만든 지분물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지붕 물래 곡선은 서양의 수학적 용어로는 사이클론 곡선이라고 한다. 물매를 직선으로 하지 않고 곡선으로 하는 이유는 빗물을 빨리 배수하기 위한 이유이다. 직선으로 거리가 짧아서 더 빨리 배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이클론 곡선으로 만들었을 때 가속도가 붙어서 더 빨리 배수된다는 것이다. 또 빗물의 양이 적은 용마루 부분에서는 빗물을 빨리 내려가게 하고 빗물이 많은 추녀부분에서는 조금 속도를 줄여 기와의 마모를 비슷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다고 본다.

 

98여기서 우리는 취향 또는 미의식은 결코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라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문적 지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옥의 지붕곳선이 현수곡선으로 만들어진 것은 장마철의 집중호우를 특지으로 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빗물을 빨리 배수시키기 위한 과학적인 노력이 산물이다.

 

99즉 결론을 간단히 말하면 그들의 미의식은 주제가 정지태에 있지 않고 힘찬 운동 계열에 있는 것이다.

 

111 따라서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미를 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바라본 야나기는 거기에 불가사의한 신비의 분위기를 덧씌워 부정형, 불균제, 불균등 같은 것으로 정리해낼  수밖에 없었다.

 

113그러나 조선의 둥근 달항아리는, 그의 말처럼 한국의 미가 타력에 기대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빙그레 곰삭은 웃음으로 전해준다. 그것은 철없는 아이의 천진함이 아니라 철없는 아이와도 같은 경지에 올라선 대가의 원숙함에 비유된다.

 

124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제국 일본의 근대적인 우월감을 배경으로 해서 조선 예술을 잡기적인 민예로 깎아내린 폄하의 태도는 물론이요, 조선 예술을 일본 국학의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실현한 예술적인 명물로 높여 올린 경애의 태도 모두 조선 예술의 참얼굴과는 무관한다.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없이 깍아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여올린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떄가 되었다.

 

127아름다움에는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봄이면 꽃피고 가을이며 잎지는 자연, 두 볼을 발그스레 물들이고 웃음짓는 어린아이, 고혹적인 여인의 자태 위에 신비스런 보살의 모습이 겹친 석굴암 관음보살입상, 마음을 황홀하게 들어놀리는 천상의 음악을 들려주는 봉덕사 신종의 비천상. 이쯤 되면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이 덧붙이는 것이 도리어 객쩍은 일이다.

 

127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화두를 짐지고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취향을 손에 쥐고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누구나 아름다움에 대한 저마다의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남의 취향이 아닌 나의 취향을 통해 그곳에 도달한다. 서구인의 서구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황금비라는 취향을 만들어냈고, 한국인은 한국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다른 이름의 취향을 만들어 냈다.

 

131,,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 관념이 바로 이다. 멋은 미의식일 뿐 아니라 전신미를 지향하는 생활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미의식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인의 가치관의 핵심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

 

132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134음양오행사상은 크게 형이상의 측면과 형이하이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형이상의 측면이란 도가와 유가으 철학으로 전개된 우주의 생성론이며, 형이하의 측면이란 음양가에 의해 발전된 만물의 변화론이다.

 

137나는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한다. 거기에는 식민지와 전쟁을 연이어 겪고 날 후 고단하고 지친 모습을 한 한국인의 자화상이 등장한다. 머리에 수건을 쓴 채 정담을 나누는 아낙들. 눈을 내리깐 채 아기를 업은깜장고무신 단발머리의 소녀. 인생살이의 고단함을 말없이 삼키는 중늙은 여인과 곁에 놓인 항아리. 아이를 업거나 다라이를 이고 벌거벗은 나무 아래 서성이는 여인들. 박수근의 그림을 보고 있으며 그림 속 사람의 마음이 그림 밖 사람의 마음으로 다가오는 듯이 느껴진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그들의 마음을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닐까.

 

138박수근의 인물은 마애불의 부처님을 닮았다. 무엇보다 박수근 화폭의 독특한 질감이 마애불 표면의 질감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화강암 마애불과 박수근 인물의 닮은 점을 꼽을라치면, 그것은 질감 너머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박수근이 도달한 어눌한 듯하면서도 격조 넘치는 성찰의 시선은, 우둘투둘 졸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아를 발하는 화강암 마애불의 상의 미의식과 놀랄 만큼 겹치기 때문이다.

 

139 또 비록 기교가 없이 소박하고 세부 표현이나 기술적인 완벽성이 어느 정도는 결여되어 있으나 이는 더 큰 의미릐 전체적인 통일감과 생동감을 위하여 희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리나 , 한국의 고대 조각과 미의식, 한국 미술이 미의식)

 

142박수근의 작품이든, 한반도의 어느 녘에서 마주치는 화강암 마애불이나 여타의 화강암 조각이든, 아니면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이든 간에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되, 그로부터 적어도 몇 걸음이나 몇 마장 떨어진 자리에서, 육체의 눈을 가늘께 끈 대신 영혼의 눈을 크게 뜨고, 근경의 미학이 아닌 원경의 미학으로 바라보라. 만약 그것이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칠기보다는 부드럽고, 졸하기보다 아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있게 보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의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144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인들은 달항아리가 일그러져다고 해서 깨뜨려 버리거나, 대들보감이 구부러졌다고 해서 고쳐서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살짝 일그러진 달항아리나 그럴싸하게 휘어진 대들보, 입술이 약간 휘어져 삐뚜름 능청거리는 사발이 오히려 멋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45만약 상이 만족스럽다면 설령 형이 약간 허물어지더라도 너그럽게 눈감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형이 약간 허물어 졌을 때 도리어 상이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53상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우너이다.

 

153 흥미로운 사실은 이같은 생긱의 미감이 기운생동이라는 동북아시아의 미학 원리와도 통한다는 것이다. 기운생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화가이자 화론가인 사혁이 동진의 고개지 이래 태동하기 시작한 원식적인 화론들을 집대성하여 내놓은 동북아 최초의 체계적인 화론인 육법의 첫째 항목으로, 서양 회화에 비해 일견 싱겁고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동양 회화에 정신적인 깊이를 더해주는 동북아 특유의 예술적인 화두다.

 

157이제 다시 발효맛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흥미로운 것은 발효 음식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며, 발효맛은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 있는 맛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긱의 느낌을 추구하는, 상의 미의식과 통한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맛인 발효맛으로부터 한국인의 미의식의 물질적 측면인 미감이 유추된다.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맛인 발표맛을 연상시키는 미감이 그것이다.

 

165 이를 수생목이라 합니다. …즉 목의 생명력은 수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의 생명력이 땅을 뚫고 나올 때 그 힘을 막아 잘 추슬러 주는 금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앞에서도 공부했듯이 금은 목을 억제하는 천적입니다. 가을에 열매를 만들면 줄기는 말라 버리지만, 오히려 봅에는 줄기가 뻗쳐 오를 때 금이 적당히 억제하여 목이 생명력이 흩어지지 않고 한 줄리고 힘차게 뻗어노르게 도와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상극을 나를 죽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련을 주어 나를 다음어 주는 고마운 힘입니다.

 

167 그러나 불에서 익히는 것은 폭력적 방법에 의해서 자연을 바꿔놓는 것이지만, 김치 같은 발효식의 익힘을 효모균을 이용한 상생의 방법에 의한 변용이다.

 

173 흥부의 형상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고 누려야 할 것을 누리는 대신. 어처구니없는 고통에 빠져 인욕의 세월을 보내느 모습니다. 따라서 대성통곡하며 우는 흥부의 모습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한국인의 자화상에 포함된 눈물이자 한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자화상은 흥부의 내면적 형상뿐만 아니라 외면적 형상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전자가 대성 통곡하며 우는 눈물이자 한이라면, 후자는 배꼽을 잡으며 웃는 웃음이자 흥이다. 결국 한국인의 자화상은 흥부의 내면적 형상 뿐만 아니라 외면적 형상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전자가 대성 통곡하며 우는 눈물이자 한이라면, 후자는 배꼽을 잡으며 웃는 웃음이자 흥이다. 결국 한국인의 자화상은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본질이 관철된다.

 

176 가동적인 정지태. 박수근의 기름장수’, 김기창의 아악처럼, 움직이고 있으되 멈춰 있으며, 멈춰 있으되 움직이고 있는 것. 그런데 바로 그 멈춰 있음 때문에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은 웃고 있으되 울고 있으며, 그 울음 때문에 웃음 이상의 웃음을 머금게 하는 한국인의 미소와도 통한다. 이같은 멈춤의 그늘, 울음의 그늘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온몸으로 부딪혀온 상극적인 것의 살아있는 과거이며, 이같은 그늘을 슬며시 드리운 웃음 이상의 웃음,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온 마음으로 삭혀온 상생적인 것의 살아 있는 미래다.

 

178 이것은 김치가 익어 시원하고 칼칼한 발효맛을 내기 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 비유된다. 맛이 들고난 후의 곰삭아 익은 맛을 김치맛이라고 하지, 맛이 들기 전에 설익은 맛을 김치맛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처 승화되기 전의 한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 도는 신명이 한국적이 ㄴ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0 일제 강점기의 정서 역시 한국적인 정서의 일부분을 이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부분을 전체로 확대라고 과거의 상터를 미래의 청사진 위에 들이대는 어리석은 주장을 계속할 까닭은 없다. 다만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승화시키기 못한 채 상극적인 것의 늪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계하기 위해, 지난 세기의 한에 대한 담론을 역사책의 한켠에 선명하게 기록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186 여기서 우리는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서구적 근대를 향한 시간과의 경쟁에 빠져든 결과 공간 의식과 공간 취향을 상실해 버린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주위의 공간을 오로지 서구적 근대의 잣대인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에 의해서만 판단한 나머지 개인이 사는 집이나 집단이 사는 도시에 대해서도 오로지 편수나 땅값 같은 돈 가치만을 따지는 데 익숙해 졌으며, 그 결과 자신의 공간 취향의 발붙일 자리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199 이상르 통해 우리는 한국인의 공간 취향이 자연적인 동시에 인문적인 것이며, 인문적인 동시에 다시 자연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인은 일상에서든 기억에서든 문화예술에서든 이같은 공간 취향을 확인할 기회가 드물가. 산줄기는 개발에 의해 잘려나가거나 고층건물로 가려지고, 물줄기는 오염에 시달리거나 도로로 덮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200공간 취향이라는 말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당신의 마음 속에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과 무관한 동기에 따라 기억 속에 자리잡은 공간적 심상이 있다면, 그같은 공간적 심상으로부터 문화적인 인식과 실천에 대한 통찰을 제공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공간 취향이며 저다움의 미의식의 교두보라고 말이다. 옛집이라는 것. 고향이라는 것. 낯익은 등산로,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라 눈앞을 가로 막는 그때 그곳이나 미지의 어느 곳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201한국인이 좋아하는 색은 무엇보다 밝고 맑은. 즉 명도와 채도가 아울러 높은 색이다.

 

206 한국인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경우의 흰색은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션의 바탕색인 소색이라는 것이다. 소색이란 무엇인가. 바탕 소자()에 색 색자(), 옥양목이나 비단, 광목의 색처럼 재질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의 색감을 드러내는 자연의 바탕색이다. 이처럼 자연의 바탕색을 의미하는 소색은 당연히 옷감의 색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닥나무 껍질로 만들 흰색의 종이처럼, 염색 따위의 가공을 하지 않고 바탕색을 살려서 만드는 일상용품들 속에 살아숨쉰다. 소색은 자연스럽게 어느 문화에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특히 한국인의 일상에서 눈에 띄게 등장하는, 한국문화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다.

 

210무색인 동시에 무취를 의미하는 화이트 취향을 뒤집어쓰는 일은 그만두고, 격있고 깊이 있으며 생기 넘치는 내추럴 룩의 소색 취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하여 소색의 저고리에 곁들인 자줏빛 회장의 근사한 멋이나, 소색의 백자 위에 푸른색을 곁들인 청화, 붉은색을 곁들인 진사, 검정색을 곁들인 철화의 멋들어진 맛을 한번쯤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는지.

 

211우리 민족이 누려온 수많은 색 가운데 순수한 우리말로 된 명칭은 하양, 까망, 빨강, 노랑, 파랑 다섯 가지뿐인데, 이것이 바로 오방색이라는 것이다.

 

219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다면적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이같은 일면성은 한 측면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측면들에서의 터무니없음을 피하기 어렵다.

 

222해결책은 분명해졌다. 이데올로기적 표상인 백의민족의 강박적인 이미지를 머리 속에서 거둬내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색동옷과 녹의홍상, 노랑 저고리에 분홍치마, 오방색의 화려한 배합인 단청, 자주색의 삼회장 저고리, 색동옷보다도 고풍스럽고 몬드리안보다도 모던한 조각보의 색꾸러미처럼, 아득한 기억의 지평선너머로 밀어냈던 색채적 심상을 기억 속에서 되살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 속에 해묵은 얼룩처럼 새겨진 백의민족의 환영, 그 흰옷의 그림자를 상대로 한 힘겨루기에서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224백색 계역이 유달리 부각되는 오방색의 아름다움, 생기 넘치는 여백의 아름다움 곁에서 한층 빛을 발하는 다채로운 원색의 조화로움. ‘밝고 맑은색을 선호하는 시원하고 칼칼한색 취향. 이것들 모두를 기억이 저편에 놓아둔 채, 우리는 버버리의 체크무의와 베네통의 원색에 둘러싸인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색에 대한 취향을 잃어버리고, 색의 부조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며, 색에 대한 몰개성을 턴연스럽게 무릅쓰는 색치의 일상에서 말이다.

 

224색에 대한 취향의 상실은 개인의 문제에서 집단의 문제로 확산되어, 마침내 일상을 둘러싼 풍경 전반을 공해에 가까운 새의 부조화로 뒤덮었다. 대도시와 중소도시, 고속도로 주변을 막론하고 전국토를 가득 매운, 인간이 만든 온갖 설치물에 의해 생겨난 색의 부조화가 그것이다.

 

227 이같은 일상과 취향의 혁명을 앞당길 견인차는 세련되고 전위적인 엘리트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촌스럽고 뒤처지는 남녀노소 장삼이사들의 일상적인 감수성이다. 비록 오늘은 가짜 버버리의 무늬와 유사 베네통의 색에 둘러싸인 색치의 일상에 갇혀 있을 지라도 일단 그 빗장이 열리기만 한다면, 그때 우리는 한판의 축제를 치르는 것과도 같이 한순간에 혁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31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단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적어도 미의 문제에 관한 한. 이데올로기적인 표상보다는 취향적인 심상이 사물의 본질에 입체적으로 다가서는 쿨한 프리즘이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끌이며 좋아하는 것이다. 물론 취향은 갈짓자의 것이어서, 옮고 그른 잣대가 있는 것도 아니며 변덕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취향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미학을 사회학의 틀 안에 가두는 것이다.

 

232한국인이 된장찌개를 좋아하고 색동옷을 즐겨 입으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식의 취향에 대한 담론들은, 사실상 된장찌개나 색동옷, 상의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이끌리는 한국인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취향에 대한 담론은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로서 작용한다.

 

236 그것은 무엇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사용된 근대서이라는 개념이. 명은 합리적이지만 실은 서구성으로 명실상부하지 못했던 데 원인이 있다. 합리석을 방패삼아 서구성을 밀어 붙인 것이랄까. ‘나를 살리려면 남을 참고한대신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데 몰두했으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느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52 그들이 탁월한 예술가인 까닭은 그곳의 낯익음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돌아 보게 만든 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곳의 대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새롭게 응시할 수 있게 만든 그림들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253 그리고 다시 얼마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겸재의 그림과 새롭게만났고, 순간 집안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였던 항아리가 귀중한 보물임을 알아차린 사람처런 기쁨과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내가 겸재의 그림과 정녕 행복하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얼마 뒤의 일이었는데, 그것은 몇 년 전부터 간간이 오르내리기 시작한 북한산 중턱에서였다. 멋들어지게 구부러진 소나무들 사이로 구비진 산길을 걷던 나는 문들 겸재의 그림이 눈앞에 오버랩되는 환상에 사로잡혔고, 그같은 환상에 기대어 펼쳐지는 명징한 시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258쓸쓸함과 즐거움이 함께 한다는 것. 이것은 자신들의 몫인 인간의 문화를 천지인 전체의 상생적인 조화를 이룩하기 위한 비보물로 간주한 한국인이, 어느 순간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인간적인 자의식 자체를 놓쳐 버렸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261따라서 우리는 상생 속의 상극, 정지태 속의 가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 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 오르는 초월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워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261자연의 징서인 상생 대신 인간의 질서인 상극을 전면에 내세우는 서구적 근대와, 인간의 질서인 상극을 자연의 질서인 상생 속으로 통합시키는 한국적인 저다움을 창조적인 모순으로 통합시켜야 한다.

 

268 중요한 것은 오윤이 죽기 전에 강한 생의 의욕, 기쁨을 본 것 같다는 것이에요. 기쁜, 산다는 것의 기쁨, 육체의 기쁨,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것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270흥미로운 것은 추사의 작품세계가 순한국적인 무엇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국제적인 안목과 감각을 지녔다는 것이다.

 

274추사는 토속적인 자기를 지키는 것과 남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창조적으로 회통시켰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었다.

 

277골동이 되어버린 옛것에 새것의 아우라를 뒤집어 씌우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주체가 페험하는 당대성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주체로 하여금 당대성을 체험하게 하는 지렛대는 무엇일까. 추사가 연경의 기억을 통해 획득한 국제적 감각이 그것인데,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토속적인 감각 또는 조선설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성이다.

 

III.  내가 저자라면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임에 대하여

 

[15]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길이다. 당신은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가. 금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인가,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인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인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인가. 이 같은 질문에는 단서가 하나 따라다닌다.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 머리에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세계인과 한국인이 과연 다른 길인가에 대해서이다. 나는 저자가 던지는 이 질문이 상당히 예리하고 근원적인 질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자로서 이 질문은 받은 나는 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도전을 받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가 내 문화적인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할 때, 매번 한국인임을 거부하고 세계인이라고 답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자신을 스스로 세계인이라고 지칭을 하던 내게 있어 그 세계인의 의미는 한국인의 반대 의미쯤이었다. 글쎄, 나는 왜 애써서 세계인을 강조하면서 내 안에 한국인의 정체성이 줄어 들었다고 말했을까? 한국인과 세계인이 왜 반대말쯤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왜 세계인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한국은 세계 안에 있는 하나의 국가이므로 내가 한국인이면 세계인인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수학적으로 계산이 나오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내 안에, 그리고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의 생각에 한국인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비논리적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 안의 아니, 내 안의 한국인은 세계인과 비교해 수준이 매우 낮은 혹은 세련되지 못하고 고리타분한 정도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대한 우리 자신들의 편견을 알려주는 책

 

나는 이 책이 부지불식 간에 우리 안에 있었던 한국인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편견을 알려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 자신들이야 말로 우리 자신들을 평가하는데 객관적인 자대를 들이대오지 못했던 것이다. 대신 우리는 외부자의 시각을 빌려 왔었다. 특히, ‘일본인 야나기의 시각에 대해 고찰해 보는 대목에서 나는 저자의 논리에 깊이 동의했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깊이 없고, 비전문적이며, 개인 감상주의적인 평가를 우리 스스로 너무도 쉽게 받아들여 내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내가 가장 놀란 면은 색에 대한 우리 민족의 취향이었다. 나는 항상 백의민족이라고 불리 우는 한국인들의 색채 감각을 매우 혐오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기후가 좋은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그 다양하고 화려한 색들을 다 제쳐 놓고 왜 하필 우리는 하얀색의 옷을 즐겨 입었을까. 도대체 그 많고 다양한 색들을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 하는가. 게다가 옷에 색을 화려하게 쓰는 사람들에게 특이한 인간들이라는 자대를 들이대는가. 이것들은 항상 나의 의문들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채도와 명도가 높은 색들을 좋아했다는 부분에서 나는 매우 놀랐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취향을 일어버리고 사는가? 알고 보면 우리는 한참이나 화려한 것들을 즐기고 사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 자신들이야 말로 가장 편견이 가득한 자대를 가지고 우리 스스로를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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