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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3일 11시 20분 등록

 

금빛 기쁨의 기억: 강영희. 일빛

1. 저자에 대하여.

1960년생. 서울 출생. 대학원에서 전공을 두 개나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도 어지간히 호기심이 강한 성격일 것 같다고 추측해 본다. 지금의 나도, 국문학과 심리학을 하고 있으면서도 경영학, 철학을 끊임없이 기웃거리고 있다.

지난학기에 동양철학을 들었으며, 휴학을 하게 되면, 어찌될지 몰라 서양 철학과 인간 행동과 사회환경을 신청해 어제부터 듣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그녀의 동양사학, 영화학, 문화비평, 국문학, 등의 이력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2. 마음에 남는 구절
 
p. 17.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따금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겸재의 진경산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또 다른 교훈이기도 하다. - 유홍준 '화인열전1'

p. 18. 아주 자연스럽게 고유의 전통과 사대주의가 병존합니다. 그런 마당에 사대와 자주라는 대립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죠. 그러니까 사대주의의 문제를, 우리가 소국(小國)이 되어 사대했으니 분하고 슬프다는 식으로 한국사에 너무 집착해서 보면 그 전무가 보이지 않을 우려가 있습니다. - 이용희 '한국민족주의'

p.19.강서대묘 사신도의 솟구치는 생기,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정겨운 봉안, 고려 수월관음의 휘황한 신비, 겸재 진경산수의 칼칼한 금수강산 모두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에 대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승리가 아니라 그 같은 구별과 경계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를 받아안아 한국을 피워올림으로써 양자를 회통시킨 결과 도달한 창조였다.p.20. 요컨대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 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 김홍의 '백남준과 그의 예술' p. 23. 어쩌면 우리는 세계성의 부재를 토속성의 과장으로 얼버무리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p. 25. 만유는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나온 사물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라는 면에서 무에서 나온 것이다. - 박수근의 '대화'그림을 보고(마애불과 쇠라의 그림을 동시에 연상시킴)p. 25.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兩者擇一)의 문제가 아니라 회통(會通)이다.

p.26.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세계인과 한국인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개안이 필요하다.p. 27. 세계인 백남준의 예술이 한국인의 토속적인 자기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전통을 기억의 형태로 몸 속 가득히 저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전통이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기억 속의 심상'이다. 세계인이자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인 그가, 동시에 거뜬히 순한국인이자 전통적 인간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p. 28.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에서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략-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비극은 인간이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시간의 엔트로피 법칙 또는 불가역성은 덧없음이라는 인생의 쓰디쓴 진리를 탄생시킨 우주의 원죄다. 이 같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항거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뛰어넘는다. 기억의 다른 이름이 추억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p. 32. 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 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 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야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전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취향을 즐겁게 뛰놀도록 하는 ‘기억 속의 심상’이 ‘생의 지주’와도 같이 우리 안에 늘어서 있어야 한다. 취향의 뜨락인 ‘기억 속의 심상’의 상실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에서 창조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감옥이다.

p.38.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근대화가 의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서구화에 일본화를 겹쳐 놓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 개화, 과학, 합리, 이상과 동일시되기도 했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주체적으로 변용시키는 데 필요한 성찰의 여백은 실종된 반면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 급급한 조급함만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p.42.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이 같은 조급함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참극을 낳은 혁명의 열기고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일본인과 중국인 수백 수천만을 남태평양과 중국 대륙에 묻는가 하면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원폭 희생국으로 몰아간 제국주의적 팽창의 광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

p.43. 이같은 조급함의 한국적인 양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의 혁명이나 일본의 팽창처럼 현실에서 자신을 관철시키지 못함으로서 더한층 강렬하게 끓어오른, 관념적인 조급함이다. 비등점에 가깝도록 뜨거워진 관념적인 조급함의 열기야말로, ‘기차가 있는 풍경’의 안쪽에 자리잡은 지난 세기 한국인의 내면 풍경이다.

p.47. 따라서 기차가 있는 풍경 속 근대 한국인의 내면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조급함이다.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볼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p.48. 기억의 상실이란 만취하여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도 흡사하다. '필름이 끊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억상실에 빠진 사람들은 성찰을 토대로 한 자기 통제력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병이라고 불리는 사회심리적인 병폐의 원인이다.

p.49. 취향이란 무엇보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p.50.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삐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자신의 취향 위에 타인의 추향을 겹쳐놓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조적 모순이다. 문제는 타인의 취향과 자신의 취향을 양자택일의 제로섬 게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서구화로서의 근대화의 비극에 있다.

p.57.피카소에 의해 간택된 아프리카의 민예는 아프리카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카소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이 점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조선의 민예가 그것의 발견자인 일본인의 놀라운 직관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듯이 말이다.

p.59.한국인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자신의 예술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은 일본인의 미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p.60. 에드워드 사이드는 하위사회와 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내세워 그들의 미와 상상력을 교묘하게 착취하고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자기소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 같은 근대 속의 야만을 동양주의 또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불렀다.

p.66.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서는 먼저, "각자 알맞은 위치는 갖는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가 어떠한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은 국내 문제를 위계질서의 견지에서 바라보아 왔지만, 국제관계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아 왔다. -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p.78. 야나기가 한국 예술을 '사랑'한 것은 거기서 중국적인 작위를 따르는 도학(道學)의 삶 대신 일본적인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인욕(人慾)의 삶을 중시하는 국학의 이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조선의 도자기를 인정과 마음의 하소연을 간직한 '정의 기물'인 동시에 '무작위의 미'와 '무기교의 미'의 표본이라고 말했다.

p. 82.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인욕(人慾)의 삶에는 반드시 쓸쓸함의 정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엔카의 애상이나 벚꽃의 허무로 대표되는 일본적 감상주의의 본질이다.

p.90~91. 국학적인 자연주의에 토대를 둔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 예술에 덮어씌운 '무작위의 미'나 '비애의 미'와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만약 관련이 있다면 도리어 일본인의 미의식이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그들의 것은 그들에게로 되돌려줘야 한다. p.92.한국 예술의 선의 아름다움은 이것을 처음으로 언급한 야나기만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으로 느껴온 것이다.

p.93.벽에 그려진 네 신, 즉 현무와 주작과 청룡과 백호를 보라. 그것은 선 속에 있는 무늬라 해도 좋을 것이다. 가늘고 긴 곡선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선에 의해 표현된 무늬의 극단적인 실례일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의 미술>

p. 94.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
p. 97 ~98. 물매를 직선으로 하지 않고 곡선으로 하는 이유는 빗물을 빨리 배수하기 위한 이유이다. 직선으로 거리가 짧아서 더 빨리 배수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이클론 곡선으로 만들었을 때 가속도가 붙어서 더 빨리 배수된다는 것이다. - 김왕직 '한국건축용어' )

p.100. 그들의 미의식은 주제가 정지태에 있지 않고 힘찬 운동 계열에 있다는 것. 자웅이 합체 되고 음양이 하나 되어, 마치 태초에 내딛는 첫발자국과도 같이 고도로 응축된 힘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 이 같은 미의식의 특성은 비단 사신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옥의 지붕곡선이나 의복의 선, 도자기의 선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그것들은 근엄하게 팔장을 낀 듯한 정지태에서 벗어나, 살아 숨쉬며 꿈틀거리며 심지어는 슬쩍 말까지 걸어오는 듯한 움직임의 기미를 드러낸다.
p.101. 물론 '조선 역사의 운명은 슬픈 것이었다'는 명제가 야나기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는 조선사의 본질을 지정학적 숙명에 따른 사대주의로 규정한 일본 관학자들의 발명품인 식민사관의 뒤통수에 일본인 특유의 정서인 모노노아와레의 꼬리표를 달아놓았을 따름이다. p.103. '작은 것을 보살피고 큰 것을 섬기는' 자소사대(字小事大)의 준말인 사대는, 동북아 세계질서의 중심인 중국과 중국의 문화적 선진성을 인정한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자율적 질서의 메커니즘이었다.
p.106.~107. 흔히 격(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빈틈없이 맞추어야 하는 눈앞의 실선 같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의식되는 머릿속의 점선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기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인 반면, 한국의 격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한국의 격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를 어림하기 위한 가상의 척도 같은 것이다. 멋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 바꿔 말하면 격이 맞는 변격(變格), 변격이면서 격에 제대로 맞을 때 거기서 멋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초격미(超格美)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변격이합격(變格而合格)'이요 '격에 들어가서 다시 격에서 나오는 격'이라 할 수 있다. - 조지훈 '멋의 연구'
 p.108. 수식(瘦式) 득격(得格) : 식(式)을 최소화해야 격(格)을 최대화할 수 있다.부작기격(不作奇格) 염화취실(염華就實) : 화(華, 형식)를 거두어야만 실(實, 내용)로 나아갈 수 있다. - 추사 김정희
p. 110. 일본의 격이란 위계질서의 표현인 격식(格式)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첫째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인 한국의 격과는 달리 '넘나듦이 가능하지 않은 세부항목'을 말한다.
p.111. 사물은 상(象)과 형(形)이 하나로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양자는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어 하나가 평균 이상으로 빼어나면 다른 하나는 평균 이하에서 어릿거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목조 건축이 한 조형 미술로서 건축물 전체를 미적 대상으로 삼는 데 반해서 일본의 목조 건축은 건축 전체의 조형미는 거의 잃어버리고 단지 건축을 구성하는 부분적인 요소에만 치밀하고 복잡한 장식적 의장을 부가하여 건축을 부분적인 공예품의 집합체로 타락시키고 말았다. - 김정기 '한국의 건축과 미의식' 따라서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미를 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바라본 야나기는 거기에 불가사의한 신비(神秘)의 분위기를 덧씌워 부정형, 불균제, 뷸균등 같은 것으로 정리해낼 수밖에 없었다.
p.112. 중국과 조선의 도자기가 왜 이렇게나 아름다운가 하면 불규칙 속의 규칙, 미완성 속의 완성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많은 작품은 완서의 버릇에 치우치는 까닭에 종종 생기를 잃는다. 야나기 무네요시 - 도자기의 아름다움
p.114.이 원숙성은 원숙하여 도리어 아졸(雅拙)미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오(大悟)하고 보니 대오하기 전과 같더라는 소식이다. 늙으면 도리어 아이와 같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멋은 원숙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그 원숙에서 오는 능란함의 무난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원숙은 초규격의 바탕이지만 초규격이 곧 원숙은 아닌 것이다. 추사의 글씨가 이러한 문제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조지훈 -멋의 연구
p.118~119. .조선에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 야나기에서 고유섭으로 이어지는 민예론의 전제를 이루는 이 명제는 일본의 관제 사학자들이 주장한 식민사관의 핵심이다.그러므로 이것을 형상(形象)의 대립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형(形)과 기(氣)는 언제나 그 세력이 병행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소장(消長)하면서 외면을 형성한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 한동석 '우주변화의 원리' 그러니까 원경(遠景)에서는 아(雅)하되 근경(近景)에서는 졸(拙)한 한국 예술을 일본인의 근경의 시선으로만 본 까닭에 오직 근경의 졸함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p.124.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없이 깎아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여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p.127.아름다움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도리어 객쩍은 일이다.
p.128. 아름다움의 취향을 달리 말하면 미의식이 된다. 물론 서구인의 미의식을 통해서도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과 만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30.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어인 아 ㄹ.ㅁ다옴'의 본듯이 사호(社好)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취향이 아닌가? 한국인은 예로부터 아름다움의 뿌리가 취향에 있음을 강하게 의식해온 것이다.
 p.131. 우리는 논리 간명한 글을 선필 또는 미문이라 하고, 선량한 행위를 미덕 또는 진심이라 하며, 아름다운 예술을 진실 또는 순정이라 해서 진. 선. 미를 혼용하고 있다... 조지훈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p. 132.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形)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형과 상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물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이 사물의 형상이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익숙한 것은 어디까지나 형인 까닭에 무형의 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 상이란 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일 뿐 아니라 형을 통해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p.133. 象이라는 개념은 形과는 바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만일 형을 인간의 감각에 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상은 일반적인 인간, 즉 明을 잃은 인간이나 또는 자연법칙 을 관찰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식되기 어려운 무형을 말하는 것이다.
p.134. 음양오행사상은 크게 형이상의 측면과 형이하의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형이상의 측면이란 도가와 유가의 철학으로 전개된 우주의 생성론이며, 형이하의 측면이란 음양가(陰陽家)에 의해 발전된 만물의 변화론이다.
p. 139. ‘눈에 보이는’ 형 너머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이 때문에 흔히 멋이라고 불리는 한국인의 미의식은 형태미를 넘어서는 정신미의 성격을 지닌다.
p. 141. 원경의 미학과 근경의 미학의 차이는 이처럼 마애불을 닮은 박수근의 그림을 통해 쉽사리 짐작된다. 가까이서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만져지고, 멀리서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마음이 만져진다.
p.142. 박수근의 작품이든, 한반도의 어느 녘에서 마주치는 화강암 마애불이나 여타의 화강암 조각이든, 아니면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이든 간에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되, 그로부터 적어도 몇 걸음이나 몇 마장 떨어진 자리에서, 육체의 눈을 가늘게 뜬 대신 영혼의 눈을 크게 뜨고, 근경(近景)의 미학이 아닌 원경(遠景)의 미학으로 바라보라. 만약 그것이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칠기보다 부드럽고, 졸(拙)하기보다 아(雅)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있게 보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p.145.‘뜯어 보믄 잘 못 생겨서 잘 생긴 것도 있으라우’ 라는 도공의 말이 여기에 들어맞는다. ‘잘 못 생긴 것’은 형(形)이요 ‘잘 생긴 것’은 상(象)이다.

p. 146.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할 것은 평균치를 넘어서는 우아함을 갖춘 상은 어느 정도 형의 졸함을 수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진기의 셔터를 누를 때 하나의 장면에 대해 정확하게 초점이 맞는 거리는 하나 뿐인 까닭에 원경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근경의 초점이 흐려지는 사실에도 비유된다. 이것은 도인의 격조를 지닌 선비의 글씨가 어린아이 같은 치졸한 맛을 풍기는 이치와도 같다. 상의 아름다움은 형의 어눌함을 수반하며, 높은 경지의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성격을 지닌 형상을 가리켜 아졸(雅拙)하거나 고졸(古拙)하다고 하는데, 한국문화는 이렇게 상의 세련함과 형의 어눌함이 아졸함이나 고졸함의 형상으로 넘쳐난다. 146. ‘상의 세련됨’을 머금은 ‘형의 어눌함’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문화를 마음으로 겪은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고졸이나 아졸, 무관심성이나 비균제성의 본질이다.그 만듦새는 극히 소박하여 전체적으로의 조화나 균제의 미를 찾았을지언정, 부분 부분 뜯어보면 차라리 거칠다 할만큼 잔손질이 가지 않은 것이 한층 우리의 주의를 끈다<김용준>. 그러나 볼수록 여운이 남는 아름다움이 있어서, 초라한 육신에 깃들인 품격있는 정신이 느껴지는 것.p.147. 그러나, 이 원숙성은 원숙하여 도리어 아졸미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오하고보니 대오하기 전과 같더라는 소식이다. 늙으면 도리어 아이와 같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멋은 원숙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그 원숙에서 오는 능란함의 무난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원숙은 초규격의 바탕이지만 초규격이 곧 원숙은 아닌 것이다.

p.151. 자연을 신이나 인간처럼 존중하는, 그렇다고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 천지인 상관적 사고관념을 보다 투철히 함으로써 자연의 이용에 있어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을 소외시키는 온갖 요소들을 점차적으로 줄여 나가는 자세를 견지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천지인을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 이해했던 풍수사상가들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최창조‘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p. 153. 상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한 점의 도자기나 한 구의 조각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생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의 배후에 상의 미의식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p.156. 멋이란 말의 어원이 맛에 있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되어 있다. 멋이란 말은 애초에는 맛이란 말뜻을 좀 다른 어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발음적인 왜형(歪形)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차츰 특이한 관념형태로 바뀌어 원의(原義)와는 별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p.157. 흥미로운 것은 발효음식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며, 발효맛은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 있는 맛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추구하는, 상의 미의식과 통한다. p.160. 한국음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밑반찬의 다양함은 김치나 젓갈, 장아찌 같은 발효음식에서 비롯된다. 예로부터 가난한 이들의 밥상은 ‘밥 한 사발에 간장 한 종지’로 묘사되었고, 요즘에도 반찬이 없을 때는 밥을 고추장에 비벼 먹거나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경우가 있다.

p.163.우선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허기에 따른 마구잡이식 뷔페에서 벗어나, ‘기억 속의 심상’과 알뜰하게 손잡은 입맛을 살리는 정갈한 밥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호사스런 취미와 구별되는 까다로운 취향이 옹골지게 자리잡아갈 때에만, 한국인의 미의식 역시 생기발랄하며 웅숭깊은 것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p. 165. 그렇다면 상극관계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극관계를 고스란히 껴안은 채 그것을 가능한 한 상생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p.166. 넓은 의미의 부패란, 미생물의 증식으로 식품성분이 분해되어 유해한 물질이 만들어짐으로써, 가식성(可食性)을 잃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동일한 미생물의 작용이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유익한 생산물로 변화한 현상을 발효(醱酵, fermentation)라 한다. ? 윤숙자, ‘한국의 저장 발효음식’
p.167. 발효를 ‘썩지 않으며, 처음 그대로 유지되지도 않은 은근한 곰삭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이것이다. 그러니까 발효의 원리란 자연의 이치에 따른 상극의 과정인 부패를 인간의 지혜에 따른 상생의 과정인 발효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p.168. 도선이 말하기를 “산천에 병이 들었거나 다쳤을 때, 그것이 모자란다면 사찰로써 보할 것이고, 지나치다면 불상으로서 억제할 것이고, 달아나는 형세라면 탑으로써 멈추게 할 것이고, 배역의 자세라면 짐대로써 되돌려야 하리니.

p. 169. 비보란 말은 도와서 보충한다는 뜻인데 흔히 풍수지리에서 국면을 이루기 위한, 그 중에서도 이른바 명당의 조건을 갖추기 위하여 마을 형태에서 부족한 점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보충한다는 것이다. 비보의 방법은 조림(造林), 조산(造山), 장승, 골맥이 등이 있는데…. ? 김덕현, ‘유교적 촌락경관의 이해’

p.171. 그렇다면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완전한 땅이란 ‘자연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을 거친 ‘인문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사람의 손길이란 비보(裨補)요,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상(象)의 아름다움이다.
p.175. 멋은 형상이나 가락이나 마음에 있어서 한 움직임에서 다음 움직임에로 이어 가고 넘어 가는 과정에 나타난다. 가동적인 정지태(靜止態), 멈추려는 움직임이 연속되는 가동적인 경향상태가 멋의 형태미의 본질이다. ? 조지훈, ‘멋의 연구’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예술은 왜 선의 예술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예술은 흐름과 율동, 곧 멋을 특색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동적인 미는 그 수법으로서 색을 요구하지 않고 선을 요구하게 된다. ? 조지훈, ‘멋의 연구’
p.178. 한국인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 가는 전 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것은 김치가 익어 시원하고 칼칼한 발효맛을 내기 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 비유된다. 맛이 들고 난 후의 곰삭아 익은 맛을 김치라고 하지, 맛이 들기 전의 설익은 맛을 김치맛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p.179. 한국적 한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할 때, 이는 한민족에게만 한이 있다거나, 한민족의 한이 유달리 넓고. 깊고. 짙다거나, 그러한 이유에서가 아니고, 그것을 초극해가는 삶의 양식 자체가 다른 민족의 그것과 다르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국 사람은 자기 몫의 한을 ‘삭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적어도 한을 ‘삭이면서’ 살아가는 것을 윤리적 덕목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국인은 한을 삭이면서 인간으로 성숙해가고, 그 한을 즐기면서 멋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 천이두 ‘한의 구조 연구’

p.180. 한에 대해 잘못된 담론이 형성된 이유. 첫째 한을 삭일 여유가 없었던 까닭에 해학과 신명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한의 늪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일제 강점기의 척박한 현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둘째 일본적인 정서인 모노노아와레와 신파의 퇴행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p.181.다만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상극적인 것의 늪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계하기 위해, 지난 세기의 한에 대한 담론을 역사 책의 한켠에 선명하게 기록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p. 185.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 ?한영우, ‘우리 옛 지도와 그 아름다움’
p.186. 여기서 우리는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서구적 근대를 향한 ‘시간과의 경쟁’에 빠져든 결과 공간 의식과 공간 취향을 상실해 버린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주위의 공간을 오로지 서구적 근대의 잣대인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에 의해서만 판단한 나머지 개인이 사는 집이나 집단이 사는 도시에 대해서도 오로지 평수나 땅값 같은 돈 가치만을 따지는 데 익숙해졌으며, 그 결과 자신의 공간취향이 발붙일 자리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공간 의식과 공간 취향이 인간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미의식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조차 없다. 흔히들 말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역시 그런 것이거니와, 무엇보다 공간 의식이란 인간의 정체성을 속절없이 떠도는 천상의 것으로부터 든든하게 뿌리내린 지상의 것으로 잡아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p.187. 삶터 관념에서는 그 땅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곳이라든가, 예술품이 만들어진 장소라는 식의 역사적 관련성이 있는 공간 개념을 떠올린다. 인간사의 우연과 의무와 추억과 정서가 만나는 곳이다 .삶터는 소속을 내포한다. 삶터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소속감을 규정하며 운명을 가늠한다. 삶터는 뿌리와 방향을 제공하는 삶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최창조<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p. 193. 땅을 인간적 의미를 주어, 이용과 소유의 대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삶터로 환원시키는 것이 풍수사상이다. ? 최창조, ‘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p. 196. 우리들에게 공간이란 시간과 함께 객관적 대상일 수밖에 없지만, 경관이란 공간이 주체인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와 재구성된 주관적 공간이라 볼 수 있다. ? 김덕현, ‘유교적 촌락경관의 이해’

p. 201. 한국인이 좋아하는 색은 무엇보다 ‘밝고 맑은’ 색. 즉 명도(明度)와 채도(彩度)가 아울러 높은 색이다. p.202. 한국적인 이미지의 색이란 하나하나의 색깔에 한국적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의 색깔이 지각공간에 어떻게 구성되느냐의 정도, 이른바 상대적 가치에 의해서 형성된다. 색동은 색동저고리와 같이 몇 가지의 색깔이 구성될 때에만 한국적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전통표준색명 및 색상’
p. 205. 이상을 통해 우리는 한국인의 색 취향을 결정한 색배열 또는 색구성의 원리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흰색을 여백으로 남겨둔 수묵채색화 같은 구성이며, 둘째 하양, 까망에 빨강, 노랑, 파랑이 한데 어우러진 오방색의 구성이다.

p.206. 한국인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경우의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의 바탕색인 소색이라는 것이다. 소색이란 무엇인가. 바탕 소자(素)에 색 색자(色), 옥양목이나 비단, 광목의 색처럼 재질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의 색감을 드러내는 자연의 바탕색이다.

p.207. 소색은 광선을 반사하여 번쩍거리는 백색이 아니고, 빛을 흡수하는 은은한 빛깔이다. 소색의 백색은 화학약품으로 처리되어 표백된 순백색이 아니라, 옅은 색상을 띤 백색이다.
p.210. 여백은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눈에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심오한 상태인 것이다. ? 박용숙, ‘한국미술의 해학정신’ )
p.219. 아무런 색도 지니지 않은 흰색 취향과 관련된 부정적인 자화상.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소멸 지향의 자의식. 제국주의자의 동정에 기대야만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식민지인의 정체성. 이상은 조선인 스스로는 아무런 창조적 에너지도 소유하지 못하며, 오직 일본인의 은총에 의지해야만 ‘기적과도 같은’ 창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 일본인 야나기의 한국 예술론의 본질이다.
p. 219. 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다면적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이 같은 일면성은 한 측면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측면들에서의 터무니없음을 피하기 어렵다.

p. 223. 조각보; 19세기, 모시로 만든 조각보. 색동보다도 고풍스럽고 몬드리안보다도 모던한 조각보의 색꾸러미가 잠들어 있던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부터 깨어나는 중이다.

p.224. 시간의 화살 위에 올라탄 인간이 잡담 제하고 일직선 저편의 목표에 몰두한 채 앞만 보고 질주한다면, 공간의 치마폭에 싸인 인간은 반성적인 성찰의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간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시간 좌표에 지나치게 강박된 반면, 공간 좌표에는 무감각해졌다. 자신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었음을 떠들썩하게 고백하는 무질서한 대형 간판들의 난립이 이 같은 현실을 웅변한다.

p.225. 마음의 색이 풍경의 색과 하나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기억 속의 심상이 현실의 풍경과 오버랩되는 일상을 꾸리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미의식의 행복한 주인공들이다.

p.226.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문화와 예술의 몫이 아니라 일상과 취향의 몫이 될 것이며, 일상과 취향의 혁명이 문화와 예술의 변화로 이어지는 한 판의 반전으로 전개될 것이다.p. 227. 이같은 일상과 취향의 혁명을 앞당길 견인차는 세련되고 전위적인 엘리트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촌스럽고 뒤처지는 남녀노소 장삼이사들의 일상적인 감수성이다.

p.231. 적어도 미학의 문제에 관한 한, 아름다움의 향기가 사회학적인 눈금 너머로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인문학적인 여백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반듯한 이데올로기보다는 갈짓자의 취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p.232. 취향은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인문적인 지혜의 산물이다. 취향은 인간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룩한 인문적인 가치의 토대이다. 따라서 그것은 ‘제멋대로의 것’이 되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출발점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으로 작용하던 취향도 반환점을 돌고나서부터는 시나브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지닌 성찰의 가능성이다.
 
p. 232~233. 여기서 나는 ‘사물을 의식함으로써 그 사물을 의식하는 자신을 의식하고 반성(retrospection)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정신 내용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다’는 인식론의 주제를 떠올린다. 이것이 이른바 자의식(self-consciousness)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것이다(버트란드 러셀, ‘철학의 문제들’). 따라서 한국인이 된장찌개를 좋아하고 색동옷을 즐겨 입으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식의 취향에 대한 담론들은, 사실상 된장찌개나 색동옷, 상의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이끌리는 한국인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p.234. 앞뒤가 따로 없는 ‘뫼비우스의 띠’나 안팎이 따로 없는 ‘클라인 씨의 병’에 비유될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사고를 모색해야 한다. 나는 이 같은 사고를 취향적 사고라고 부를 것을 새롭게 제안한다.
 
p.235. 한마디로 말해서 한복바지는 뫼비우스 고리로 된 입체적인 것이고, 양복바지는 자연고리로 된 평면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체는 근육과 뼈대로 된 입체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우리의 몸에 적합한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한복바지는 우리의 인체(입체)에다 옷을 그대로 맞추어 놓은 것이라면, 양복바지는 2차원의 평면에다 3차원의 인체를 넣는 무리를 저지르고 있다. ? 김상일, ‘대(對)’

p.236. 합리성을 서구성과 동일시하게 된 출발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합리성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다.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과학과 수학을 매개로 한 형식합리에 한정하고, 전통과 역사 위에 쌓아 올린 실질합리를 원천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p.236~237 미신으로 밀려난 실질합리의 자리를 상식의 이름으로 차지한 외눈의 형식합리가 지난 세기 근대 한국인의 삶을 얼마나 척박하고 기형적인 것으로 만들었는지 돌아봐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취향으로서의 미의식의 자리, 성찰의 시선이 깃들이는 자리다. 근대적인 합리성을 맹목적인 서구성과 구별짓고 그 곳에 전통적인 실질합리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한, 미의식은 물론이요 성찰 역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p.245. 조선의 선비란 누구인가. 그들은 상생의 자연적 질서에 천지인의 일부로 합류하는 이상적인 풍류는 물론이요 상극의 인간적 질서 속을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헤쳐가는 현실적인 실존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같은 노력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존재의 에너지야말로 그들의 자화상에 해당하는 운룡의 주위에 해학적인 즐거움을 감돌게 한 원천이다. 상생의 자연 질서 앞에서 상극의 인간 질서를 해소시켜 버린 정태적인 무의식이 아니라, 상극의 인간 질서를 온몸으로 껴안으며 그것을 상생의 자연 질서로 승화시키고자 애쓴 역동적인 자의식. 이 같은 역동성이 즐거움이나 해학적이 생기로 표출된 것이다.

p.248. 그리하여 양자를 하나로 아우른 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으뜸 가는 방책으로 삼되 자신은 한사코 물외한인(物外閑人)의 자리에 머무르고자 하는 조선 선비의 취향이다.

p.251.그리하여 나는 피카소에 경탄하고 렘브란트의 자화상 앞에서 영혼을 무장해제 당하는, 이십일 세기의 세계인에 걸맞은 잡종적 취향 속에서도 나의 취향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서울 북촌의 기와집 풍경이었노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p. 252. 그때까지 나는 그곳의(프랑스) 자연과 거리라는 원관념은 빼놓은 채 이것과 그림 사이를 다리놓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신기루인 양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는 순간 마음의 눈을 떠보니, 그들이 탁월한 예술가인 까닭은 그곳의 낯익음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돌아보게 만든 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곳의 대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새롭게 응시할 수 있게 만든 그림들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p.253. 유럽 화폭의 원관념은 그곳의 자연과 거리의 풍광이며, 한국 화폭의 원관념은 이곳의 자연과 거리의 풍광이다.

p. 257.여래좌상. 17-8세기. 돌. 조선 문화의 어느 대목에서는 적조미와 명랑성이 뒤엉킨 장면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것은 조선 후기처럼 상생 지향이 만들어낸 탈속의 경지가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로 수렴되었을 경우다. 고유섭에 따르면 조선의 불상에 ‘어른같은 아이’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p.261.이 상상성, 구상성이 진실미를 못 얻을 때 일종의 허랑한 ‘멋’이란 것만이 나게 되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적 승화를 못 얻을 때 한편으로는 ‘군짓’이 잘 나오고 한편으론 ‘거들먹거들먹’하는 부화성이 나오게 된다. 고유섭,조선 미술문화의 몇낱 성격

따라서 우리는 상생 속의 상극, 정지태 속의 가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 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김진석, ‘초월에서 포월로’) 상극의 과정을 과거의 삶의 흔적으로만 남겨두는 정태적인 상생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의 삶의 에너지로 확보하는 역동적인 상생 쪽으로 우리의 취향을 자꾸만 밀어내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262.한국인은 때로는 상생적인 탈속 지향의 안정감에서 벗어나 상극적인 속세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불안정을 적극적으로 뒤집어 써볼 필요도 있다. 호생염극의 마음이 극에 달하면,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제자리만을 맴도는 것으로 끝나거나 아예 자폐적인 은둔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문화란 창조적인 것이며, 그 같은 창조의 빛은 세계성이라는 ‘큰 나’ 안에서 토속성이라는 ‘작은 나’들이 부싯돌과도 같이 부딪힐 때, 그 부딪힘의 섬광 속에서 피어난다.

p.274.김정희에게 있어 스물 네 살 ‘연경의 기억’이란 젊은 날 한 때의 추억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사상과 예술의 수준을 돌아보게 하는 국제적인 척도로 남아있었다. ‘토속적인 자기’를 지키는 것과 ‘남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창조적으로 회통시켰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었다.p.275. 추사는 올바른 법고를 통해서 개성적인 창신을 이룩하며 이를 불이의 묘경으로 통합했다고 할 수 있다.

p. 276. 새로운 전통의 창조란 언제나 개인의 개성이 집단의 개성을 뛰어넘고 이것이 다시 집단의 새로운 개성으로 자리잡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p.277. 법고창신. 옛것(古)을 따름으로써 새것(新)을 창조하는 것. 이것은 ‘기억 속의 심상’을 ‘오늘의 심상’으로 탈바꿈시켜내는 것이다. 골동이 되어버린 옛것에 새것의 아우라를 뒤집어씌우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주체가 체험하는 당대성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주체로 하여금 당대성을 체험하게 하는 지렛대는 무엇일까. 추사가 ‘연경의 기억’을 통해 획득한 국제적 감각이 그것인데,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토속적인 감각 또는 조선성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성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의 우리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통해 만나는 국제적인 감각을 획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천연염색 조각보의 토속적인 아름다움에 새롭게 눈뜰 수 있으며, 현대 회화의 개성적인 예술혼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희룡 매화도의 진한 매혹과 김수철 화훼도의 간결한 세련에 새삼스럽게 빠져들 수 있다.
p.279. 한국인이니 세계인이니 하는 구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신을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인으로 여겼으며, 이 같은 회통적인 사고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창조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3. 내가 저자라면

지난여름에 ‘첫 책’을 기획하면서 그녀의 책,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 인터뷰집으로 스친 적이 있어 낯익은 저자였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인 금빛 기쁨의 기억이 더 좋았다.

♣ 아쉬운 점

문장이 대체로 길다. 읽으면서 잘라보며, 읽어야 했다. 다른 저자와 달리 국문학을 전공했기에 하고 싶은 말이다. 2004년도에 일 년 동안 매주 한 번씩 경복궁으로 문화재 공부를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해설이 있는 답사를 다녔다. 그리고 그해 보름이 넘도록 열 세 개의 사찰을 돌며, 취재를 했고, 일 년간 잡지에 길 따라 바람따라 이던가를 기고했다. 그런데 지금 내 머릿속은 텅 비어 있다.

이 책을 덮고 난 지금, 부제‘ 한국인의 미의식’ 에는 잘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발효 음식인지, 왜 흰옷인지, 미의식이 특정인의 것이 아닌. 문화는 서민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라는, 저자의 고찰. 다 공감이 된다. 그러나 하나도 새롭지 않다.
이 책을 펴낸 것이 2004년 도인 것을 감안해 읽더라도, 역시 그렇다.
이책에 사용된 잘 알려진 이미지들, 인용 구절들,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 이 책을 읽으면서 문화재를 공부하고 몽땅 그것을 다 잊어버린 것이 왜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당시 답사는 매달 한 번 뿐이고, 그마저도 답사를 위한 답사에 그쳤기에 입체적 기억공간 없이 그저 암기하거나 들여 놓았기 때문이다.
'완당평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가 성공을 거두었던 첫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그곳에 직접 가서 저자가 느꼈던 공간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고
실제로 많은 독자들이 그 책대로 답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그것이 없다.
너무 무거운 어휘들은 자꾸 읽는 것을 방해 하고, 독자로 하여금 저자의 교양의 눈높이를 따라 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진다.
책은 왜 내는가? 공감, 즉 소통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이다.

♣ 좋은 점

십 여 년 전 나는 간단없이 배낭을 꾸리고 홀로 길을 나섰다.
내가 숨 쉬고 있는 공간을 좀 멀리서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흘이 넘게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면서 저자가 보았던 것들을 나도 보았다. 그리고 저자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부러워졌다.
어떤 이는 비망록에 그날의 느낌을 적어 넣는 것에 그치고, 어떤 이는 자신이 본 것을 이렇게 책으로 엮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저자가 우리의 미의식으로 바라보는 것들은 우리가 알면서도 지나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관찰력을 높이 산다.
저자가 시종 주장하고 있는 기억이 없는 공간은 입체화 되지 않는다.
또한 문화라는 것이 젠틀 하거나 특정한 사람들의 것에서 전승되어 오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한 점에 박수를 보낸다. 곳곳에 날카롭게 현상을 파악한 문장들도 읽기에 좋았다.
오늘 당장 우리가 먹을 점심을 나누는 공간이 후대에는 곧 문화로 기록될 것이다.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신정부가 기획하고 있는 서울 시내의 수 십 층의 고층 아파트는 재고되어야 한다.

이 책을 그 일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제일 좋았던 구절을 끝으로 마친다.

p. 276. 새로운 전통의 창조란 언제나 개인의 개성이 집단의 개성을 뛰어넘고 이것이 다시 집단의 새로운 개성으로 자리잡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읽고 싶은 구절

 

그러니까 원경(遠景)에서는 아(雅)하되 근경(近景)에서는 졸(拙)한 한국 예술을 일본인의 근경의 시선으로만 본 까닭에 오직 근경의 졸함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p.124.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없이 깎아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여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p.128. 아름다움의 취향을 달리 말하면 미의식이 된다. 물론 서구인의 미의식을 통해서도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과 만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32.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形)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형과 상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물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이 사물의 형상이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익숙한 것은 어디까지나 형인 까닭에 무형의 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 상이란 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일 뿐 아니라 형을 통해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p.133. 象이라는 개념은 形과는 바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만일 형을 인간의 감각에 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상은 일반적인 인간, 즉 明을 잃은 인간이나 또는 자연법칙 을 관찰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식되기 어려운 무형을 말하는 것이다.

p.142. 박수근의 작품이든, 한반도의 어느 녘에서 마주치는 화강암 마애불이나 여타의 화강암 조각이든, 아니면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이든 간에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되, 그로부터 적어도 몇 걸음이나 몇 마장 떨어진 자리에서, 육체의 눈을 가늘게 뜬 대신 영혼의 눈을 크게 뜨고, 근경(近景)의 미학이 아닌 원경(遠景)의 미학으로 바라보라. 만약 그것이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칠기보다 부드럽고, 졸(拙)하기보다 아(雅)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있게 보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146. ‘상의 세련됨’을 머금은 ‘형의 어눌함’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문화를 마음으로 겪은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고졸이나 아졸, 무관심성이나 비균제성의 본질이다.그 만듦새는 극히 소박하여 전체적으로의 조화나 균제의 미를 찾았을지언정, 부분 부분 뜯어보면 차라리 거칠다 할만큼 잔손질이 가지 않은 것이 한층 우리의 주의를 끈다<김용준>. 그러나 볼수록 여운이 남는 아름다움이 있어서, 초라한 육신에 깃들인 품격있는 정신이 느껴지는 것.

p.147. 그러나, 이 원숙성은 원숙하여 도리어 아졸미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오하고보니 대오하기 전과 같더라는 소식이다. 늙으면 도리어 아이와 같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멋은 원숙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그 원숙에서 오는 능란함의 무난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원숙은 초규격의 바탕이지만 초규격이 곧 원숙은 아닌 것이다.

p.157. 흥미로운 것은 발효음식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며, 발효맛은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 있는 맛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추구하는, 상의 미의식과 통한다. p.160. 한국음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밑반찬의 다양함은 김치나 젓갈, 장아찌 같은 발효음식에서 비롯된다. 예로부터 가난한 이들의 밥상은 ‘밥 한 사발에 간장 한 종지’로 묘사되었고, 요즘에도 반찬이 없을 때는 밥을 고추장에 비벼 먹거나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경우가 있다.

p.163.우선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허기에 따른 마구잡이식 뷔페에서 벗어나, ‘기억 속의 심상’과 알뜰하게 손잡은 입맛을 살리는 정갈한 밥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호사스런 취미와 구별되는 까다로운 취향이 옹골지게 자리잡아갈 때에만, 한국인의 미의식 역시 생기발랄하며 웅숭깊은 것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p.187. 삶터 관념에서는 그 땅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곳이라든가, 예술품이 만들어진 장소라는 식의 역사적 관련성이 있는 공간 개념을 떠올린다. 인간사의 우연과 의무와 추억과 정서가 만나는 곳이다 .삶터는 소속을 내포한다. 삶터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소속감을 규정하며 운명을 가늠한다. 삶터는 뿌리와 방향을 제공하는 삶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최창조<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p.219. 아무런 색도 지니지 않은 흰색 취향과 관련된 부정적인 자화상.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소멸 지향의 자의식. 제국주의자의 동정에 기대야만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식민지인의 정체성. 이상은 조선인 스스로는 아무런 창조적 에너지도 소유하지 못하며, 오직 일본인의 은총에 의지해야만 ‘기적과도 같은’ 창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 일본인 야나기의 한국 예술론의 본질이다.

p.219. 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다면적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이 같은 일면성은 한 측면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측면들에서의 터무니없음을 피하기 어렵다.

p.231. 적어도 미학의 문제에 관한 한, 아름다움의 향기가 사회학적인 눈금 너머로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인문학적인 여백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반듯한 이데올로기보다는 갈짓자의 취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p.232. 취향은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인문적인 지혜의 산물이다. 취향은 인간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룩한 인문적인 가치의 토대이다. 따라서 그것은 ‘제멋대로의 것’이 되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출발점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으로 작용하던 취향도 반환점을 돌고나서부터는 시나브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지닌 성찰의 가능성이다.

p.235. 한마디로 말해서 한복바지는 뫼비우스 고리로 된 입체적인 것이고, 양복바지는 자연고리로 된 평면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체는 근육과 뼈대로 된 입체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우리의 몸에 적합한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한복바지는 우리의 인체(입체)에다 옷을 그대로 맞추어 놓은 것이라면, 양복바지는 2차원의 평면에다 3차원의 인체를 넣는 무리를 저지르고 있다. ? 김상일, ‘대(對)’

따라서 우리는 상생 속의 상극, 정지태 속의 가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 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김진석, ‘초월에서 포월로’) 상극의 과정을 과거의 삶의 흔적으로만 남겨두는 정태적인 상생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의 삶의 에너지로 확보하는 역동적인 상생 쪽으로 우리의 취향을 자꾸만 밀어내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262.한국인은 때로는 상생적인 탈속 지향의 안정감에서 벗어나 상극적인 속세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불안정을 적극적으로 뒤집어 써볼 필요도 있다. 호생염극의 마음이 극에 달하면,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제자리만을 맴도는 것으로 끝나거나 아예 자폐적인 은둔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p.276. 새로운 전통의 창조란 언제나 개인의 개성이 집단의 개성을 뛰어넘고 이것이 다시 집단의 새로운 개성으로 자리잡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p.277. 법고창신. 옛것(古)을 따름으로써 새것(新)을 창조하는 것. 이것은 ‘기억 속의 심상’을 ‘오늘의 심상’으로 탈바꿈시켜내는 것이다. 골동이 되어버린 옛것에 새것의 아우라를 뒤집어씌우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주체가 체험하는 당대성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주체로 하여금 당대성을 체험하게 하는 지렛대는 무엇일까. 추사가 ‘연경의 기억’을 통해 획득한 국제적 감각이 그것인데,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토속적인 감각 또는 조선성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성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의 우리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통해 만나는 국제적인 감각을 획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천연염색 조각보의 토속적인 아름다움에 새롭게 눈뜰 수 있으며, 현대 회화의 개성적인 예술혼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희룡 매화도의 진한 매혹과 김수철 화훼도의 간결한 세련에 새삼스럽게 빠져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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