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조회 수 358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9년 1월 26일 11시 5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한국사신론: 이기백1924년 평북 정주군 갈산면에서 출생,

1941년 오산중 졸업.
1944년 일본 와세다大 문학부 사학과 중퇴.
1947년 서울大 사학과 졸업.
 1958∼63년 이화여대 사학과 조교수?부교수.
1963∼85년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교수
1966∼67년 미국 하바드大 옌칭연구소 연구교수.
1985∼95년 한림대 사학과 교수.
1995∼98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1999∼2000년 이화여대 석좌교수 역임.
2004년6월2일 별세.

저서: 「韓國史新論」,
민족과역사」,「新羅정치사회사연구」,
「韓國고대정치사회사연구」,「新羅사상사연구」, 「韓國古代史論」, 「高麗兵制史연구」 「高麗귀족사회의 形成」 등 主전공 분야의 저서를 포함하여 모두 19권이며 번역서 두 권.
수상경력: 학술원상, 인촌상, 용재 학술상을 수상. 국민훈장 모란장.

저자는 한국 사학계의 제1세대로서 일제 식민사관 극복에 앞장섰으며, 한국사 시민 강좌를 열며 한국사의 알리기 운동에 기여하셨으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증조부 이승훈과 민족운동에 관심이 많던 부친 이찬갑의 영향으로 역사학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1942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1944년에 중퇴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일제 치하에서 2개월 군대생활을 하다, 남하한 소련군에게 붙잡혀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생활도 겪었고, 1947년 학생들의 반대 운동으로 봄학기가 휴강이었으므로, 논문만 내고 졸업했다.
선생은 6.25전쟁후, 군 생활 중 육군사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1956년 제대 후 1958년 이화여대 사학과 조교수로 채용되었다. 1961년 재직 중 첫 개설서인 ‘국사신론’을 출판하였다.
1963년부터 1985년까지 서강대학교 교수로 역임하며 ‘서강학파’를 수립했다. 당시 학계의 통설에 따라 서술한 시대구분이 불만이었던 차에 미국 하버드대 와그너 교수의 영어번역 제안을 받았고, 1966년 초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의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1년 동안의 수정작업을 거쳐 1967년 ‘한국사신론’을 출판하게 된다.

선생의 회상에 의하면, “내 것다운 개설서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 개설서라면 시대구분에 있어 고대, 중세, 근대 3분법을 당연한 것같이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한국사를 세계사에 동참시키는 것으로 믿었거든요. 나도 처음에는 남에게 뒤질세라 ‘世界史의 기본법칙’이니 하는 책을 열심히 읽었고, 또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그러나 나는 끝내 어느 일정한 공식에 의존해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려는 데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는 다원적인 방식에 의해 얼마든지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역사적 현상이 하나의 굵은 끈으로 묶여 있는 일정한 시대를 일정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저는 특히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에 기준을 두고 한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 낡은 시대의 잔재들보다는 다음 시대의 새 요소들의 성장 과정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죠.”

“학자가 공부를 안 하면 죽은 거와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2001년 1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 인용-

선생은 1985년에 한림대 교수로 옮겨 1995년에 퇴직했으며, 이후 한림과학원 객원 교수와 이화여대 사학과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3. 마음에 남는 구절

<한글판 머리말>

한국사신론을 저술하면서 저자가 가장 뜻을 둔 바는 크게 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구체적 사실은 올바른 역사가 성립하는 토대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섣불리 남이 가부하기 힘든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들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예가 종종 있어 왔다. 저자는 이 같은 풍조에 대항해서 일종의 투쟁을 해왔고, 그 점을 한국사 신론에 반영시켰다. 둘째는 구체적 사실들의 시대적·사회적 연관관계를 찾아서 이를 체계화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서 살아있는 역사를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에 힘썼다.

학문의 이상은 진리를 찾아서 이를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데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 진리는 어떤 것들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값어치를 지닌다. 진리를 저버리면 학문은 곧 죽는 것이며, 죽은 학문은 민족을 위하여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서장>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p.3.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선적인 과업은 식민주의사관(埴民主儀史觀)을 청산하는 일이다. -중략- 그들은 한국이 대륙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 - 이것은 실은 고려 이후의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을 들어서 한국의 역사는 대륙이나 섬나라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움직여 온 역사였다고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한국의 독립성, 한국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한 것이다. -중략-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지리가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4. 그들은 또 한국민족이 선천적으로 혹은 숙명적으로 당파적(黨派的) 민족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민족적 단결을 파괴하여 독립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민족성이 역사의 산물인 것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중략- 그들은 또 한국의 문화는 독창성이 없는 모방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가 근본적을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고 성립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오는 잘못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순수하게 고유한 문화란 어느 민족에게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민족 문화는 인류문화의 보편성을 근거로 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하도록 창조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적 노력의 성과를 한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p.7.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며, 한국사는 곧 한국인의 역사이다. 이것은 다툴 수 없는 진리이다. -중략- 군주이건 영웅이건 간에 개인 중심의 역사관은 청산되어야 한다.  

p.8. 사회세력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재인식은 한국사를 생명력이 넘치는 역사로 만들 것이다. -중략- 한국민족도 결국은 인류의 한 구성원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인류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또 차이점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민족의 역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의 인식은 다른 말로 한다면, 그 보편성과 특수성의 인식이 되겠다. 

p.9. 역사에 적용하는 법칙은 다원적인 것이지만, 그 여러 법칙들은 어느 민족에게나 다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다만 많은 법칙들이 어떤 민족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에, 그 결합하는 양상이 다른 민족의 경우와 같아질 수 없고, 그것이 곧 그 나라 역사의 특수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작용하는 보편적인 여러 법칙들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 깊을수록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는 말이다.

p.10. 이 책에서 시도된 시대구분의 기준은 사회적 지배세력(주도세력)에 놓여 있다. 즉,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 과정에 기준을 두고 한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해보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분야의 인간 활동을 그 시대의 주인공인 사회적 지배세력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도록 하였음은 물론이다. 나아가서 그렇게 설정된 시대들의 교체 과정을 전진적인 자세에서 파악하도록 노력하였다. 즉, 낡은 시대의 잔재들보다는 다음 시대의 새 요소들의 성장 과정을 중요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p.87. 신라는 당의 침략에 항거하고 정치적인 독립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곧 통일신라의 사회와 문화가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고, 나아가서 한국민족의 독자적인 역사 발전의 터전이 되었다. 물론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과거 3국의 활동 무대에 속하던 만주의 넓은 지역이 그 영역에서 벗어났고, 거기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渤海)를 건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는 실제로는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함에도 불구ㅠ하고 이 신라의 반도통일은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독립된 기반위에서 한국민족의 형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신라가 발해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며 대립하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신라의 영토와 주민 및 그들이 이루어 놓은 사회와 문화가 한국사의 주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신라의 반도통일은 커다란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해야 하겠다.
p.89. 삼국시대에 있어서의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중국과의 관계는 주로 항쟁의 역사였다. 물론, 외교적인 동맹이나 문화의 수입과 같은 접촉도 있기는 하였으나, 크게 보면 무력적인 항쟁이 주가 되어 왔다. 그러나 당의 침략적 야욕이 분쇄되어 그 세력이 후퇴하자, 신라와 발해는 모두 당과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과이 관계는 큰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p.110. 발해는 멸망과 함께 만주는 한국민족의 역사무대에서 떠나 버리고 말았다. 발해는 한국민족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만주를 지배한 최후의 국가였던 셈이다. 이 같은 데에 발해가 차지하는 민족사적 위치가 있는 것이다. 발해가 망한 뒤에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은 고려로 와서 고려에 의한 민족의 통일에 이바지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국사의 주류에서 큰 구실을 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발해가 신라와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는 신라를 한국사의 정통으로 생각하는 사관이 오랫동안 유지되게 된 것이다.  

p.118. 농민들은 신라의 융성기에 있어도 조세와 역역의 부담 때문에 유망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유민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 다니거나, 혹은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어서 질서를 교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호족의 보호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이 새로운 변화는 왕경(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옛 질서에 대한 타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세의 독촉은 말하자면 신라 귀족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농민들을 반란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p.122.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북진정책을 써서 청천강까지 국경을 넓히었고, 신라사회에 얽어매고 있던 골품제의 사슬을 풀어버렸다. 그러나 한편 또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의 탈을 쓰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왕실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경순왕 김부를 비롯한 신라 귀족들을 극진히 우대하였다.
p.151. 유교의 발전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낳게 하였다.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 올바른 길로 생각되었으며, 국왕이나 귀족들은 정치가로서의 도덕적인 수양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편찬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유교적 입장에서 편찬된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유교적인 합리주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를 내세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서로 병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양자에 겸통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것이 고려 말기나 조선시대 성리학자들과 다른 점이라고 하겠다.
p.160.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의 사회적 열세를 초래하였다. 무신들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에 놓여있었다. 마땅히 무신이 맡아야할 군사령관직도 문신이 맡는 임무가 되어 있었다. 유명한 강감찬은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출신이 무신인 것은 아니다. 윤관이 그렇고 김부식이 또한 그러했다. 결국, 무신은 천대받는 존재였고, 문신에게는 사역되는 존재였다.
p.168. 북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으로서 성장한 몽고의 가장 중요한 정복대상은 남쪽 농경민족이었다. 그것은 농경민족들이 지니는 풍부한 생산품이 그 구미를 돋우어 주었기 때문이다.

p.170. 농촌이 황폐해지면 농민들의 생활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도(강화)의 정부는 농민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대책을 서둘기보다는 오히려 가혹한 수취로 그 생활을 더욱 곤란케 할 뿐이었다. 이러한 귀족들의 수취는 농민들의 정부에 대한 반항심을 조장시킬 뿐 아니라 몽고에 대한 항쟁 의욕을 꺾어 주었다.

p.178. 몇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려 국왕은 독립왕국의 군주로서의 지위를 끝내 유지하였다. 이것은 무인정권에 의한 대몽항쟁의 산물이었다.

p.180. 권문세족은 개인의 이익을 확대시킴으로써 국가의 제도를 통한 지배층 전체의 공동 이익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p.183. 원이 한족인 명의 흥기로 인하여 북방으로 쫓겨가는 원?명 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1351-1374)에 의하여 개혁이 어느 정도나마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차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 공민왕의 개혁이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억압이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는 까닭도 이 같은 사정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p.184. 무명의 승려인 신돈을 중히 쓴 것도 개혁정치의 실시가 권문세족과는 인연이 없는 인물을 등용해야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p.186. 전제개혁은 신흥사대부에 의한 경제적인 면에서의 구질서의 파괴요, 신질서의 수립이었다.

p.188. 고려 후기 유교의 특징은 성리학을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다. 성리학은 처음 <소학>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윤리를 중요시 하는 면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하는 철학적인 국면이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p.193. 고려에서는 초기부터 도서관 시설에 관심이 커서 허다한 서적을 수집하여 보관할 뿐만이 아니라, 이를 등사하여 두게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에는 수만 권의 진기한 서적이 비장되고 이를 송에서조차 구하여 가는 형편이었다.

p.217. 역사는 정치의 거울이라는 관념이 이에 대한 국가의 관심을 크게 하였다.

 p.227. 이리하여 정계에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대립이 조성되었고, 이것이 드디어는 사화(士禍)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국세력의 정치적 보복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p.233. 이와 같은 암담한 현상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농촌을 황폐케 한 위정자들의 책임이었다. 거의 무방비 상태인 전국이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왜병의 활동은 처음 2개월 동안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바다에서 왜의 해군 활동이 저지되고, 육지에서는 각지에서 의병(儀兵)이 봉기하여 왜병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우선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활동이 주목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년에 부임한 그는 해군이 필요함을 통감하고 함선을 건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략- 이러한 전비를 갖춘 이순신은 왜의 함대가 다가온다는 보고를 받고 곧 출동하여 각처에서 적선을 격파하였다. 옥포에서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어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등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의 해전은 가장 유명한 것으로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이순신의 활약은 해상권을 완전히 조선군의 수중에 있게 하였고, 그 결과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왜군의 작전을 분쇄되고 말았다. 또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순신의 공로에 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적의 보급로를 위협하여 왜 육군의 작전을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p.235. 한편, 육지에서는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정부의 모병에는 소극적이던 국민들이 스스로 향토의 방위를 위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대개 같은 지방에 사는 양반, 농민, 노비 등이 모여서 의병장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하였고, 병력이 늘어나자 그 작전 지역을 점점 확대시켜 갔다.

  p.237. 청 태종은 인조 14년(1636)에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하여 오게 되었다(병자호란). 이때 왕자와 비빈을 먼저 강화로 피난시켰으나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성에는 군량이 적은데다 기다리는 구원병도 도착하지를 않았다. 게다가 강화가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은 포로가 되었다. 이에 인조는 최명길 등 주화파의 주장을 쫓아서 항복을 결심하고 삼전도(송파)의 청 태종 진영에 나아가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p.239. 족보는 종으로는 혈통관계를 밝히고, 횡으로는 동족 관계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 족보가 이때에 널리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그것이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양반의 신분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또 동족 인사와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족보에 의해서 자기 동족중의 유명 인사를 알아두는 것을 필요로 했다. 즉, 족보를 외는 보학은 양반이 지녀야 할 하나의 필수적 지식이었던 것이다. 

p.244. 탕평책에 추진에 힘입어 붕당간의 날카로운 대립 항쟁은 잠잠하여졌다. 그 반면에 양반사이에는 적당주의, 무사안일주의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런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보다는 개인의 이익만을 도모하려는 공리적인 경향이 일어나서 드디어는 세도정치로까지 치달아가게 되었다. 

p.248. 상당히 넓은 면적의 토지라도 이를 혼자서 경작하는 소위 광작이 크게 보급되었다. 대체로 광작하는 농민들은 부농이었으며, 이들은 이미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으로 팔기 위하여 생산하는 기업농이었다. 

p.249. 쟁기질의 개량이나 이앙법의 보급으로 인하여 농촌사회는 광작을 하는 부농과 토지를 떠나는 이농자의 양자로 분화하는 현상을 나타냈다고 하겠다. 

p.250. 양반과 상민의 관계는 비록 그 구분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재부에 토대를 두고 크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p.255. 실학의 탄생은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정권 담당자들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권 담당자의 일부에서도 현실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말한다면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측에서 그러한 노력이 더 많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들 중에서 실학자가 많이 나게 되었다. -중략- 실학자들의 연구방법은 실증적이었다. -중략- 그들이 관심을 가진 현실이 바로 조선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학문은 민족적 성격을 띤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조선의 학문은 새로운 비약을 하게 되었다.
p.256~257.경세치용의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는 정조?순조 때의 정약용이었다. 그는 순조 원년(1801) 신유사옥으로 인하여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당시 조선사회의 현실에 대하여 직접적인 분석과 비판을 가하는 많은 저서를 남기어 실학 최대의 학자로 불리고 있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중앙의 정치조직에 관한 의견을, <목민심서>에서는 지방행정에 대한 개혁을, <흠흠신서>에서는 형정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 3부작 이외에도 <탕론>, <전론> 등에서 그의 사회 개혁사상을 발표하였다. -중략-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의 실학은 농촌 문제의 해결을 지주층을 중심으로서가 아니라 토지의 경작자인 농민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p.259. 이 시대에 만주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가령 이종휘는 <동사>의 지에서 고구려에 대하여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방면의 대표적 저작은 아무래도 유득공이 정조 8년(1784)에 지은 <발해고>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한 것이고 북쪽에 발해가 있었으므로 이는 응당 남북국이라 불러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같이 한국사의 무대가 반도와 만주에 걸치는 것이었다는 생각은 실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며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가하는 의견도 종종 나타나 있다. 

p.261. 그 까닭은 소수 벌열(閥閱)의 집권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서학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성리학과는 반대로 서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고 하는 인간원죄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약한자를 억누르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골몰하는 벌열들이나 부농, 거상들로 말미암아 빚어진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이에 비판적인 재야학자들이 이 서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암담한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던 일부 경세치용의 실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데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서학이 유행한다는 것은 벌열 중심의 양반사회, 성리학지상주의의 사상적 질곡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p.264. 이들은 요컨대 실증적인 태도로 유교의 경전들에 접근하여 주자가 아닌 공자의 본뜻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공자의 본뜻을 실증적으로 찾아보자는 입장에서 경서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학자로는 정약용이 있었다. 

p268. 이 같은 속화의 유행은 양반의 유교주의에 대한 예술면에서의 항의였고 인간주의의 표방이었다.
p271. 비록 비교적 청백한 관리가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하더라도 도도한 시세를 거역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p.274. 그러나 노비안을 없앤 일은 역시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말하여 주는 것이다. 노(奴)와 주(主)의 분수를 엄격히 지켜 오던 과거의 신분체제는 무너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p.276. 민란(民亂)이 또 빈발하였다. 그 주체는 물론 농민이었다. 그러나 대개는 경제적으로 몰락한 잔반(殘斑)들에 의하여 지도되어 대규모적인 반란으로 학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p.278. 이러한 민란들은 대개가 포악한 관리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발생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그것은 나아가서 벌열정치 및 세도정치에 의하여 병든 양반사회 자체에 대한 반항으로 진전되어 갔던 것이다.

p.279. 몰락한 양반 출신의 학자인 최한기는 철종 11년(1860)에 완성된 그의 대표적 저술인 『인정』속에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는 인재를 옳게 등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사, 농, 공, 상의 구별없이 인재를 뽑아 교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역사는 앞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에서 장차 인류가 문명세계 속에서 생활할 수 있으리라는 밝은 전망을 가지고, 쇄국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열어 세계의 여러 나라와 호흡을 같이할 것을 주장하였다. 

p.281. 신분이 높은 사람보다 낮은 사람, 유식한 사람보다 무식한 사람,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천주교의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주로 서울과 그 부근에 신자가 집중되어 있어서, 천주교가 농촌의 종교이기보다는 도시 중심의 종교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이 천주교에 이끌린 것은 우선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천주의 자녀라는 평등사상에 공명한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인이나 상민들이 천주의 자녀로서 양반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천주를 예배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중략- 그에 의하면 인심은 곧 천심이요,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곧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사상은 신분이나 계급으르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은 까닭이 주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p.293. 일본의 이러한 일방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조약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의는 컸다. 그것은 조선이 국제적인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첫 출발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점차 서양 여러 나라와의 통상이 시작되고 문호가 세계를 향하여 개방되게 되었던 것이다. -중략- 그러나, 신문명의 수입은 동시에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항은 개화와 자주의 양자를 어떻게 하면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커다란 역사적 시련을 한국민족에게 안겨 준 셈이었다. 

p.302. 김옥균의 수기인 ‘갑신일론’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결정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1.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을 제정하고, 사람으로써 관을 택하게 하고 관으로써 사람을 택하게 하지 말 것.
3. 전국의 지조(地租)의 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농간을 막고 백성의 괴로움을 펴게 하며 겸하여 국용을 유족하게 할 것.
4. 내시부(內侍府)를 혁파하고, 그 중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자는 등용할 것.

5. 간악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병듥 함이 가장 현저한 자는 벌하도록 할 것.

6. 각도의 환상(還上)은 영영 정지할 것.

7. 규장각을 혁파할 것.

8. 급히 순사를 두어 절도를 막을 것.

9.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혁파할 것.

-중략-

14. 정부 육조(六曹) 이외의 무릇 용관(冗官)에 속하는 것은 모두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작의(酌議)하여 품계(稟啓)케 할 것. 

p.305. 어쨌던 조선의 문제가 조선이 아닌 다른 여러 나라에 의해서 자기네의 이익만을 위하여 흥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청, 러, 영 여러 나라의 야욕 속에 둘러싸인 조선은 커다란 국제적인 위험 속에 묻힌 셈이었다.

  p.308. 전봉준의 지휘 아래 농민들은 고부군청을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곡식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분배하고, 그리고는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 그들은 농민에게 창의문(倡義文)을 산포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는데, 그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았다.

  민(民)은 국가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국가도 잔약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박으로 향제를 베풀어 오직 홀로 온전할 방책만 꾀하고 헛되이 국록과 관직을 탐하는 것이 어찌 이치에 닿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군토를 먹고 군의를 입고 있으니, 국가의 위망을 앉아서 볼 수는 없다. 팔로가 마음을 같이하고 억조가 묻고 의논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삶을 같이할 맹서로 삼는다.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라운 일에 속하나 결국 두려워하여 동요하지 말라. 각기 민업을 평안히 하고 태평한 세월을 함께 빌며 임금의 덕화를 모두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일까 한다.  

p.312. 그러나 근대적인 무기와 훈련을 받은 일본군을 당해낼 만큼 동학 농민군을 강하지가 못하였다. 이리하여 안으로는 양반 중심의 부정부패에 항거하고, 밖으로는 외국의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사운 동학농민군을 결국 양자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p.315. 갑오경장에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를 이루는 것은 사회적인 개혁이었다. 여기에는 우선 신분제도의 철폐가 포함되고 있다. 즉, 양반과 상민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을 불구하고 인재를 등용케 한다든가, 같은 양반에서도 문무존비의 제도를 없앤다든가, 공사노비의 법전을 혁파하고 인신의 매매를 금한다든가, 역정, 광대, 백정 등은 모두 면천케 한다든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일본의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평탄한 길을 닦아 놓은 구실도 하였다.  

p.317. 이리하여 일국의 황후가 외국인 자객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되었다. 열국의 비난을 두려워한 일본은 미우라를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의 판결을 내려 버리고 말았다.  

p.323. 국왕이 외국 공사관에 가 있고 이권이 속속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상태에 대하여 국민의 비난이 집중되었다. 특히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 그러하였다. 이에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김과 함께 국호를 대한(大韓),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왕을 황제(皇帝)라 칭하여, 국내외에 독리 제국임을 선포하였다(광무 원년, 1897). 독립 제국으로서의 새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국민 여론의 승리였다고 할 수가 있다. 다만 그러한 외형의 체제와는 달리 실제에 있어서는 열가지 약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자기 나라의 수도에 있으면서도 외국인 일본이 무서워 황제가 행동의 자유를 잃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권은 계속해서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국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p.325~326. 이러한 독립협회의 활동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목표를 위하여 전개되었다. 첫째는 밖으로 부처의 침략에 대하여 자주독립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중략- 둘째로는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민권의 신장을 주장하였다. -중략- 셋째로는 국가의 자강(自强)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중략- 이러한 독립협회의 활동 방향은 한국 근대화의 기본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려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p.330. 그러나, 루스벨트는 러시아 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승인하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p.332. 이것이 광무 9년(1905) 11월에 체결된 한일협약(韓日協約)이란 것으로서, 보통 을사조약(乙巳條約)이라 부르고 있다. -중략- 을사조약의 내용은, 첫째로 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통리, 지휘한다는 것이요, 둘째로 금후 한국정부는 일본 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요, 셋째로 일본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한국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둔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여 버린다는 것이었다. 

p.333.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인에게 신임장을 주어서 회의에 참서가여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케 하였다. 그러나, 의장은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서 외교권을 상실하고 있으므로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p.336. 일본이 한국인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한국인을 다루기에 필요한 지식뿐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요컨대, 일본은 한국인의 정치적 발언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은 정치적 관심을 가진 모든 한국인을 불온분자나 폭도로 취급하였을 뿐이었다. -중략- 그런데 국왕과 대신들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러시아를 위시한 외국의 힘을 빌리려는 외세의존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침략자들의 야욕을 만족시켜 줄 뿐이었다. -중략- 국민과 힘을 뭉쳐서 반대하려는 생각은 하지를 못하였다. 고종이나 정부는 일본일의 위협보다도 국민의 비난을 오히려 더 두려워할 지경이었다.

p.337. 유학자들의 지휘 밑에서 의병을 구성한 주요 병력은 농민이었다.

p.348. 민족산업이 부진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무력을 수반한 일본의 정치적 침략을 배경으로 한국의 금융계를 일본인의 은행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351. ‘시일야방성대곡’은 일본의 사기적인 침략행위와 정부의 무능을 지탄한 뒤에, 다음과 같은 비분강개한 말로써 끝맺고 있다.

오호, 애통하도다. 우리 2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기 이래 4천 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았는가. 애통하도다, 동포여.

  p.355. 지식층의 정치운동이나 교육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기독교였는데 특히 신교가 그러하였다. -중략- 이들은 전도의 한 수간으로서 의료 등의 사회사업을 경영하여 사회적으로 이바지한 바도 컸거니와 사상적으로 자유주의를 고취하고 민족의식을 앙양하는 데도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p.361. 민족자결의 원칙은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민족에세 열광적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이제 세계는 바야흐로 ‘위력(威力)의 시대’가 끝나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온 것으로 믿게 하였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한국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민족운동을 일대 독립운동의 전개로 몰아갔던 것이다.

  p.362.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천명함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지니라.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과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가졌음을 선명한 이 독립선언서는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대한 보복적인 행위를 선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p.363. 민족 대표자들은 이 독립운동이 학생을 비롯한 온 국민의 운동이 되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p.368. 결국 일본이 표방한 소위 문화정치란 세계의 여론에 눌려서 시행된 기만적인 표면적 완화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식민정책의 근본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있은 것은 일본인의 국내적인 모순이거나 대외적인 침략과정에 따라 한국에 대한 요구가 변화됨으로 말미암은 정책의 전환뿐이었다. 

p.363. 민족 대표자들은 이 독립운동이 학생을 비롯한 온 국민의 운동이 되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p.370. 일본은 한국을 식량공급지 이외에 또 상품시장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1920년에 일본과 한국과의 관세제도가 철폐됨으로써 일본의 독점시장으로서의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p.371. 1920년에 총독부는 회사령을 철폐하였다. 이로 인하여 회사의 설립은 허가주의에서 신고주의로 변하였다. 이제 회사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허가를 받지 않아도 설립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의 민족자본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그것은 성장하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경기를 지나고 난 뒤 유리한 투자시장을 한국에서 발견한 때문이었다. 한국을 단순한 제품의 판매시장이 아니라, 투자 시장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절반밖에 안 되는 싼 것이었다. 

p.372. 군수공업의 일방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화한 것이다.

  p.374. 요컨대, 일본은 한국민족이라는 의식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한국민족의 존재를 지구 위에서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p.382.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회주의와의 연결이었다. 마침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레닌은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서 1921년 상해에서 이동휘를 중심으로 고려공산당이 세워졌고, 레닌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의 원조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p.383. 일제 식민통치하에서의 한국 민족운동의 특이한 양상의 하나는 그것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독립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p.388.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교육방침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즉, 일본은 교육즉생활주의를 표방하고 일본어와 실업의 교육에 치중하였다. 이것은 군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적어도 일본어를 해득하고, 또 어느 정도의 기술을 가지는 노동자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략- 한국인이 근대적인 사상이나 학문을 발전시킨 것은 결국 사립학교나 유학을 통한 교육에 힘입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경성제국대학에 대항하여 민립대학을 세우려는 운동이 전개된 것은 이러한 민족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운동이었다고 하겠다. 

p.393. 해방의 날, / 서울 장안에 태극기가 물결쳤다. // 옥에 갇혔던 이들이 / 인력거로 츄럭으로 풀려나올 제 / 종로 인경은 목이 메어 울지를 못했다. // 아이들은 새해 입을 때때옷을 꺼내 입고 / 어른들은 아무나 보고 인사를 하였다. // 서울 장안을 뒤덮은 / 태극기 우리 기, / 소경들이 구경을 나왔다가 /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 윤석중, 해방의 날 

p.403. 외국원조 등에 의하여 산업이 동란 전보다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득을 본 것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특정기업체들이었다. 이들은 은행귀속주를 불하받아 금융기관마저 차지함으로써 그 토대를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p.405. 4월 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인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한국사상 최초의 혁명이었다.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학생이었다. 기성세대나 기성권위에 대하여 불신을 품고 있던 학생들이 4월혁명의 선두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4월혁명은 독재정치와 부정축재에 반항하는 국민의 힘이 학생들의 젊은 의기를 통하여 발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밝은 전망을 던져 주었다. -중략- 민주정치하에서 여러 계층의 갖가지 욕구가 일시에 분출하여 각종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국민 여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민주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혼란으로 규정하고, 이 혼란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일어난 것이 1961년 5월에 있은 5?16 군사 쿠데타였다. 

p.406. 그리고 아직도 그 속에는 민주화를 위한 싹이 나타나는 징조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북한에서 민주화의 서광이 비치게 되는 날이, 또한 통일의 서광이 비치는 날이 되기도 할 것이다.  

p.408. 통일신라기를 분기점으로 하고 지배세력은 흥미 있는 변화를 해왔다. 즉 점점 축소되어 가던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통일신라기 이후에는 반대로 점점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도록 이 확대되어 가는 추세는 그치지 않고 있다. 

p.409. 이 같은 지배세력의 변천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된 것인가. 거기에는 어떤 법칙성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이 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주목된다. 즉 대체로 말해서 처음에는 지배층을 형성한 여러 세력을 중에서 보다 유력한 세력이 독점적으로 권력을 향유하는 방향으로 좁혀 들어갔다. 그것이 통일신라기 이후에는 지배세력의 바로 밑 계층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곤 하여 점점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확대되어 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p.410. 집권자는 지배세력 안에서 선택된 지배세력의 대표자였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가 없는 관계에 있었다. 

p.411. 우선 이 문제에 있어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민중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기층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민중 없이는 사회 자체의 존립조차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민중은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지배세력은 민중에 의지하여 그 존립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민중은 지배세력에 참여하지를 못하여 왔다. 사회의 기층세력이면서도 주인의 구실을 못하였고, 다만 때로 불만의 표시를 나타낼 수가 있을 뿐이었다. 그 불만이 나타난 구체적 표현은, 소극적으로는 지배기구의 테두리 밖으로 유망하는 것이었고, 적극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의 반항은 종종 지배세력의 재편성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곤 하였다. 즉 반항을 통하여 민중 자신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역사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곤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민중은 한 발짝씩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였다. 이 시기에 우선 주모해야 할 사건은 동학(東學)운동이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 사회운동은 일시나마 집강소를 통한 정치 참여로까지 성장하였다. 다음으로는 독립협회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대체로 도시의 지식층과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한 민권운동이었고, 국회를 개설하여 그들의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민족국가의 건설운동이었다. 그리고 3.1운동은 위의 동학과 독립협회 두 계열의 합작운동이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가 민주주의의 원칙 아래 구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렇게 크게 성장한 민중은 항상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의 주동세력이 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해방과 더불어 민중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 대세는 4월 혁명에서 알 수 있듯이 더욱더 발전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의 건설로 이어질 것이 기대되고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지난해 연구소에서 지정 되었던 5, 6월에 걸친 역사서 리뷰와 함께 이 책은 한국사를 총 정리 한 것으로 읽혀졌다. 비록 삼국시대 기술 부분과 100% 동의 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이 책을 잘 정독 한다면, 현대의 우리국민이 꼭 알아야 할 역사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약소국의 한계성, 수난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기백 선생이 주창하고 있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저술한 이 책은 누구보다도 역사학자로서의 그 소명을 충실히 하고 있는 책이다. 때문에 그의 실증적인 학문연구방법이 해방 후 한국사학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음에도, 일부의 비판을 받아 왔다.

♣ 마치며

이 책을 읽으면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순이 삼촌’의 저자의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선생은 작고하던 해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정한 책임을 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책임을 성실하게 실행하여 자기가 태어날 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겸손한 태도로 사람과 사귀며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이란 원래 약한 존재이다. 마음속에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여 올바른 생활에 흔들림이 없기를 바란다. 비록 내 육신은 떠나더라도 마음을 여전히 살아서 함께 할 것이다. 내 무덤 앞의 작은 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넣었으면 좋겠다.’  

자유 지정서로 ‘역사란 무엇인가’와 ‘순이 삼촌’ ‘한국사 신론’ 을 선정해서 읽게 된 것은 연구원 과정 중에 내게 일어난,  미시적 세계에서 거시적 체계의 확장을 맞이하게 된 변화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써서 기록으로 남긴다는 작가라는 직업을 업으로 삼으며,  우리 역사 속에서 도저하게 흘러온 민초들의 삶을 외면한다면,  소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뒤늦게 찾아 온 것이다.

거대담론의 후일담 보다는 소소한 삶, 개인의 역사에 우선으로 가치를 두었던 일 년 전의 나를 뒤돌아본다면, 이 같은 변화는 큰 변화라 아니할 수 없다. 때문에 쓰는 작업이 두려워진 점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도 내가 지나 온 이 땅의 거대 담론을 배경으로 한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싶다.  대한민국에 거하며 오늘을 사는 쓰는 자의 책무로, 소명으로 생전에 감히 박경리 선생의 토지 같은 작품을 흉내라도 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책을 덮으며 하게 되었다.  연구원 과정 1년만에 내가 겪은 변화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싶다.

IP *.71.76.251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52 남자들은 모른다 효인 2010.02.01 3602
951 『전환 시대의 논리』를 읽고 [7] 이희석 2007.05.14 3603
950 [리뷰1] 신화와 인생_조지프캠벨 양경수 2011.04.03 3605
949 (22) 미래경영 - 피터 F. 드러커 [4] [1] 時田 김도윤 2007.09.11 3606
948 # 35. 미래의 물결 - 자크 아탈리 file 샐리올리브 2012.12.31 3606
947 쉼표 북 둘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file 재키 제동 2012.04.09 3607
946 [리뷰]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file 양경수 2011.06.13 3608
945 19.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부키 file 강훈 2011.09.06 3608
944 노년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2] 김나경 2008.03.24 3609
943 [31] <주역강의> - 인용문 수희향 2009.11.24 3613
942 김구 백범일지 에움길~ 2014.09.15 3614
941 [리뷰] <How to Live 갈림길에서 길을 묻다>_윌리엄 브리지스 file 양경수 2011.10.02 3615
940 (No.14) 하워드 가드너[열정과 기질]북스넷-9기 서은경 file 서은경 2013.07.15 3616
939 북리뷰 77: 프라하의 이방인 카프카 범해 좌경숙 2011.09.19 3617
938 칭기스칸,잠든 유럽을 깨우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2] 香仁 이은남 2007.07.01 3618
937 42. 갈매기의 꿈 – 리처드 바크 file [3] 미나 2012.02.13 3620
936 북리뷰 48 : 생각의 탄생 범해 좌경숙 2010.10.07 3621
935 북리뷰 42 : 내 삶에 변화가 찾아올 때 - 윌리엄 브리지스 범해 좌경숙 2010.02.03 3623
934 [리뷰] <사진철학의 풍경들> _ 진동선 양갱 2012.01.16 3623
933 [40]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2 - 정진홍 [2] 정산 2009.02.24 3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