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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4일 11시 50분 등록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2/ 정진홍 지음/ 21세기북스


1. 저자에 대하여

저자는 자신의 본업을 ‘콘텐츠 크리에이터’라고 한다. 콘텐츠를 만드는, 창조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세상에 없던, 아마도 그가 새로 만들었음 직한 직업명이다. 그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업으로 삼기 위해 대학교수를 그만두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대학은 제게 의무 방어전 같았습니다. 논문 내고, 강의하면서 65세까지 그냥 편하게 갑니다. 남들은 교수라는 직분이 부럽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내 안에 금광이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학교가 편하니까 그게 발굴이 되지 않더군요. 짐 콜린스의 『Good To Great』 라는 책을 봤습니다.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라는 챕터 이름을 보는 순간 그 책을 더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콘텐츠 크리에이팅에 목숨을 걸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자의 인생의 모토는 “안주는 안락사다.” 라고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날마다 차이를 내자.”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현실을 뛰어넘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자존에서 옵니다. 남 탓하고 남의 산,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인문정신이 자존을 발굴하고 키워줍니다. 그래야만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설득이 아닙니다. 커뮤니케이션은 공감이고, 커뮤니케이션은 자기 정체성의 확인입니다.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의 의의가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저자는 통찰의 힘을 얻기 위해서 인문학을 알아야한다고 강조한다. 인문정신은 우리에게 ‘통찰(洞察, insight, 꿰뚫어 봄)’ 과 ‘통찰(通察, overview, 두루 살펴 봄)’의 힘을 키워준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을 통해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가 인문학에 주목하는 이유다.

< 출판사 소개 >
직(職)이 아니라 업(業)에 목숨 건 사람. 그래서 교수나 논설위원이라는 직보다 콘텐츠 크리에이터라는 업을 중시하는 사람. 날마다 차이를 만들고 차이의 지속을 삶의 모토로 삼아 치밀한 글쓰기와 감동적인 강의로 독자와 청중들을 매료시키는 탁월한 스토리텔러. 삼성경제연구소의 SERICEO에서 <정진홍의 감성리더십> 코너를 최장기간 진행하며 변화와 혁신 그리고 창조의 ‘감성리더십’ 분야를 개척한 그는 최근에는 CEO를 위한 인문학 조찬특강 ‘메디치21’의 리딩멘토로 활약하며 ‘인문경영’의 새 장을 열었다.

문민정부 초기에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2년간 일했으며, KBS-TV , SBS-RADIO <정진홍의 SBS 전망대> 등 여러 방송국의 시사프로그램 사회자로도 활약했다.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와 동(同)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학으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8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매주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완벽에의 충동》《감성 바이러스를 퍼뜨려라》《아톰@비트》《커뮤니케이션 중심의제 시대》 등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인문학 정신은 첫째, 통찰의 힘을 길러 요란하고 소란스레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림 없이 분명하게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찰의 힘을 길러주는 인문학은 그 자체가 변화에 대처하는 삶의 고투에서 빚어낸 빛나는 결정체요 삶의 다이아몬드다. 둘째, 인문학 정신은 삶의 뿌리와도 같은 살아 있는 인문학을 통해 삶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근본적으로 다시 배우는 것이다. 인문학의 숨은 힘, 아니 진짜 힘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사람답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셋째, 인문학 정신은 인문학을 박제화된 관념의 집합이 아니라 삶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정신의 운동, 혼의 몸부림으로 만든다. 인문학이 결코 일시적인 유행이거나 흥행의 대상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8]


인문학은 삶의 학문이다. 그것은 나를 다시 세우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 살고자 하는 진한 몸부림 속에서 인문학이 박제화된 관념의 먼지를 털고 되살아나듯, 인문학 정신의 위대한 종은 삶의 그윽한 울림을 우리 삶 곳곳에 퍼뜨린다. 밝고 쾌적한 곳만이 아니라 어둡고 습한 곳까지 두루 퍼져나간다.[9]


1장 치세治世, 리더로 산다는 것의 의미


<<정관정요>>는 오랜 인생 경륜으로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 속의 활자로 평면화되어 있는 지식을 살아있는 입체적 지혜로 세워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야 생활 속에서 몸에 익힐 수 있다. 이 <<정관정요>>야말로 글줄로 읽지 말고 온몸으로 세워 읽어야 하는 책이다.[22]


1. 문제는 밖이 아니라 안이다.

모름지기 군주는 남을 탓해서는 안 된다. 몸이 곧은데 그림자가 기울고, 윗사람이 훌륭히 다스리려고 노력하는데 아랫사람이 혼란스런 경우는 없다. 늘상 자신을 상하게 하는 요소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욕심에 있다.[23]


어리석은 군주는 자기가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고 한다. 자기의 단점을 끌어안고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항상 자기에게 단점이 있음을 생각해 나날이 좋아지지만, 어리석은 군주는 자기 단점을 옹호해 영원히 어리석어진다.[24]


12.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라.[27]


2장 인생, 정상이 곧 위기인 전장


3장 자조自助, 변하지 않는 삶의 지혜


새무얼 스마일즈(Samuel Smiles, 1812 - 1904)의 <<자조론(Self-Help)>>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것은 오랫동안 수많은 인간의 체험을 통해 검증된 진리다. ‘자조(自助)’ 정신은 자기계발의 뿌리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면 한 국가의 국력이 된다. 타인의 도움은 자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돕는 것은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78]


새무얼 스마일즈는 이 책에서 역사, 정치, 예술, 과학, 문화 등 인류 활동 전반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동원했다. 그는 여기서 개인의 행복과 안위는 국가나 제도, 또는 출신 배경이 아니라 스스로를 도우려는 정신, 즉 인내, 끈기, 근면, 성실, 정직, 몰입과 같은 자조 정신에 달려 있음을 역설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조력자는 다름 아닌 ‘역경’이다. 이 역경은 국가에게든 개인에게든 정신을 가다듬게 하는 최고의 학교이자 교사다. 일용노동자 출신의 위대한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 직조공 출신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였던 리빙스턴, 재단사 출신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 앤드루 존슨만 봐도 잘 알 수 있다.[79]


<<자조론>>은 기업가, 노동자, 기술자, 과학자, 발명가, 군인, 정치가, 예술가 등 가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개인적인 성공과 함께 인류 문명의 발전을 성취한 사람들의 삶을 다룬 ‘위대한 평민들의 위인전’ ‘만인을 위한 만인의 자기계발서’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대중적인 자기계발서의 효시이자 이 분야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영국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의 정신적 교과서로 자리잡았다.[82]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부흥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고(故) 상천 류달영 선생은 참고할 만한 변변한 문헌도 없고 원고지조차 구하기 힘든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대구에서... 부흥사를 써내려갔다.... 1953년에 출간된 류달영의 <<새 역사를 위하여>>는 전후 한국재건운동의 바이블이 되었다. 특히 그가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자조’는 이후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운동 정신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처럼 150년 전만 해도 우리와 아무 관계 없던 자조가 그룬트비와 우치무라 간조, 류달영 선생을 거쳐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83, 84]


150여 년 전 새무얼 스마일즈가 부르짖었던 자조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니 유효한 것을 넘어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돕고 일어서겠다는 각오를 외면하고 살아왔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힘보다는 타인의 힘에 의탁해 무임승차하고자 하는 유혹 속에 빠져 있다. 이런 유혹이 만연하면 그 사회는 활력을 잃고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게 된다.[84]


프리드리히 하이예크는 <<노예의 길>>에서 국민의 복지향상은 제도개선이나 사회개혁보다는 자조정신에 바탕한 자기계발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긴요한 사안은 ‘자조하는 국민’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학창 시절 책상 앞에 붙여놓았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단순한 경구가 아닌 삶의 구체적인 지표로 삼아야 할 때가 지금이다.[84]


한 나라의 국력은 그 나라의 제도가 아닌 국민의 인격에 좌우된다. 한 나라의 정부란 본질적으로 그 나라 국민 개개인의 수준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국민보다 앞서가는 정부는 국민의 수준에 맞게 끌어내려지고, 국민 수준에 못 미치는 정부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국민들의 수준에 걸맞게 성장한다. 이처럼 국민 개개인의 인격이 곧 국격(國格)이 되는 것이다.[85]


실제로 인격은 인생의 면류관이자 영광인 동시에 인간의 가장 고귀한 소유물이며 성과를 드높이는 재산이다. 인격은 재산보다 강하고, 명성을 탐하지 않아도 명예를 가져다주며, 언제 어디서든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참된 인격은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스스로 닦는 것이다.[85]


천재성은 감탄을 불러일으키지만 인격은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천재는 찬사의 대상이지만 인격자는 신봉의 대상이 된다.[87]


인격의 뿌리인 ‘의지’와 인격의 줄기인 ‘지혜’가 결합되지 않으면 인생도 막연해지고 무의미해진다. 결국 인격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고결한 재산이다. 따라서 최고의 인생을 위해서는 내면의 양심에 귀 기울이고 인격을 수양해야 한다.[87]


새무얼 스마일즈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내려진 진짜 저주는 일이 아니라 게으름이다.”라고. 일은 사람들에게 복종과 자제력, 상황에 대한 냉철한 주의력과 적응력, 인내심을 키워준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책은 인생을 담고 있는 보물상자다. 진정한 독서는 사람을 읽는 일과 같다. 그래서 책은 나이든 사람에게는 벗이며 젊은 사람에게는 자극제다. 그건 훌륭한 인물들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책의 인격적 가치 덕분이다.[87]


인격은 단순한 믿음, 혹은 덕목이 아니다. 구체적인 습관이며 구체적인 힘이다. 좋은 습관을 가지면 인격의 힘도 기를 수 있다. 자기 존중, 자조, 근면, 몰입, 성실 등은 믿음이 아닌 습관이며 덕목이 아닌 인격이다. 행복은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습관의 결과며, 성공 또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습관의 결과다.[89]


새무얼 스마일즈는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내라’는 식의 ‘궁색’이 아닌 적절하게 돈을 쓸 줄 아는 ‘검약’을 인격과 연관지었다. 이것은 그 뒤로 집필하게 될 <<검약론>>에 대한 예고였다.[90]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름없는 하향평준화가 아닌, 자조의 정신을 구현시켜 삶의 질서와 균형을 회복시키는 보다 근원적인 처방이 필요하다.[92]


검약은 돈은 있지만 절제할 줄 아는 것이며, 제때에 제대로 쓸 곳에 쓰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검약론>>은 구두쇠를 위한 책이 아니라, 어떻게 쓰는 것이 제대로 쓰는 것인가를 일러주는 책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삶의 질서를 다시 세우라고 촉구하는 책이다. 돈이 있어도 이를 함부로 쓰지 않고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쓸 줄 아는 사람은 그만의 기품이 흐른다. 또 돈이 넘치지만 아낄 줄 아는 자세는 또 하나의 ‘인격’이다. 스마일즈의 말처럼 인간의 품성 중 최고의 가치를 갖는 관대함, 자비심, 공정심, 정직, 준비성 등은 모두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반대로 최악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는 탐욕과 인색, 무절제, 방탕은 돈을 잘못 쓰는 데서 비롯된다.[92, 93]


검약은 분별의 딸이요, 절제의 자매이며, 자유의 어머니다. 상실했던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한 본능적인 자기 치유 활동이요, 실질적인 생활운동이다. 그러나 검약은 언뜻 거창해 보이는 의미와는 달리 그 실천은 매우 간단하다. 새무얼 스마일즈의 말처럼 ‘버는 것보다 적게’ 쓰면 된다. 국민연금이나 보험 같은 제도나 장치도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켜주는 데 한계가 있다. 검약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으며, 결국 검약 안에는 유비무환의 의미가 담겨 있다.[94]


미국 뉴올리언스에 있는 한 묘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자조, 인격, 검약, 의무의 노력은 우리의 존재 조건이다. 시간은 금이다. 1분도 헛되이 보내지 말고 그 값어치를 하도록 하라. 남이 내게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남에게 하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네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마라. 주목할 가지도 없는 사소한 일에 발목 잡히지 마라. 들어오지도 않은 것을 주겠다고 하지 말라. 쓰지 말고 만들어내라. 가장 훌륭한 명령이 네 삶의 행동을 지배하게 하라. 살면서 쓸모있는 일을 많이 하라. 소박하고 근검하며 명예롭게 살아라. 네가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하라.”[104]


4장 호기심, 천재를 만드는 감각 근육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는 오늘날 이른바 ‘마인드 매핑’의 원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실제 마인드 매핑 개발자인 토니 부잔은 다 빈치의 노트를 보고 그의 메모 법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개발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메모를 할 때, 줄을 맞춰 쓰는 선형적 방식을 거부했다. 그것은 오늘날 보편화된 메모방식이지만 사실은 우리 두뇌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억제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입체적으로 메모했다. 다 빈치는 이러한 자신만의 독특한 노트 및 메모 습관을 통해 좌뇌와 우뇌를 동시적으로 활용하는 전뇌사고(全腦思考)를 전개할 수 있었다. 그는 노트와 메모를 통해 자신 안에 잠자고 있는 지적이고 정서적인 거인을 깨웠던 것이다.[113]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기록’이다. 채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라 해도 순간순간의 생각과 목소리, 느낌들을 고스란히 담아 놓으면, 그것이 결국 미래의 자산이 된다. 500년 전 기록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에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 담겨 있었듯이 말이다.[120]


“나태와 오만함에 몸을 맡겨버리는 천재들.... 그들은 저 면도날과 같은 번쩍임과 예리함을 잃어버린 채,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는 쇠붙이로만 살아가야 하리라.”

날을 세우지 않는 쇠붙이는 종이도 자르지 못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 안에 있는 쇠붙이를 갈고 또 갈아 스스로를 면도날처럼 만든 사람이었다. 천재는 따로 없다. 그처럼 쉼 없는 노력만이 천재를 만드는 것이다.[122, 123]


그는 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땅에 내려앉은 작은 새 한 마리의 무게로 지구는 움직인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태평양 한복판에서 태풍이 일어난다는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의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500년 전 인물 다 빈치는 일찌감치 알아차린 것이다.[126]


디지털 시대가 요구하는 사고는 코스모스적인 정태적 사고가 아닌 카오스적인 동태적 사고다. 이 역시 다 빈치한테 빚진 것들이다. 다 빈치는 고정관념에서 성큼 벗어나 언뜻 서로 연관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혼란 속에서 새로운 맥을 짚어내는 사고체계를 갖고 있었다. 이야말로 디지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시스템적 사고방식이다.[127]


우리의 생각은 절대 파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생각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나갈지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지금껏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생각의 가지들을 무의식적으로 잘라왔다면, 지금부터는 그것들을 쳐내지 말고 온전히 보존시키자. 그리고 과감히 거기에서 또 다른 가지를 뻗어보자. 이것이 바로 마인드 맵핑, 다 빈치적인 사고, 입체적인 사고이자 전뇌적인 사고다. 이제부터라도 자신만의 노트를 만들어 자신만의 호기심을 기록해보자. 진전한 감성 리더는 언제라도 자신의 생각을 쓰고 그리고 확장시킬 수 있는 자기만의 노트를 가져야 한다.[128, 129]


5장 생각, 익숙한 것과 결별하기


첫 번째 생각도구는 관찰(Observing)이다.

관찰은 창조의 바탕이다.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이고 생각 자체가 관찰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지식, 앎은 관찰을 통해서 나온다. 창조적 사고에서 관찰만큼 비중이 큰 것도 없다. 오감을 총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 모두 관찰이다. 창조적 사고에서 관찰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133]


중요한 것은 시좌(視座), 즉 보는 지점이다. 우리 모두 시좌를 달리해야 한다. 모든 관찰은 주관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것이다. 거기서 창조가 싹튼다.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창조의 싹은 죽어버린다. 창조의 세계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가 흔히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난 역사 속에서 승리한 승자의 시각일 뿐이다. 역사 또한 끊임없이 재평가되는 것이니, 어제의 정답은 오늘 다른 시각에 의해 바뀔 수 있으며, 그것은 내일 또 변할 수 있는 것이다.[135, 136]


예술은 세상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되어 재창조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137]


우리가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할 때 세상은 날마다 재창조된다. 그것이 바로 생각의 첫 번째 단계이자 도구다.[139]


두 번째 생각도구는 ‘형상화(Imaging)'다.

형상화는 말 그대로 머릿속에 그 사물을 상상해 그려내는 것이다. 이는 관찰된 느낌과 감각을 다시 불러내거나 어떤 심상으로 만들어 머릿속에 떠올리는 능력이다.[139]


< 형상화, 느낌을 머릿속에 그려내라 >

나의 글쓰기를 예로 든다면, 나는 무언가를 쓸 때 먼저 그리기부터 한다. 즉, 형상화의 단계를 거친다. 가령 칼럼을 쓰기 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관찰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형상화시키는 것이다. 칼럼 자체를 형상화시켜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낸다. 그리는 것은 총체적이고 직관적이고 포괄적인 작업이다. 공감 있는 글은 한 번에 느낌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느낌을 머릿속에 그려내는 형상화의 단계가 필수적이다.[141]


세 번째 생각도구는 추상화(Abstracting)다.

추상화는 단순하다. 추상화의 본질은 한 가지 특징만 잡아내는 것이다.[141]


추상화는 생각의 단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각의 힘이 있는 사람들은 단순화 과정을 거칠 때 생각의 힘을 더욱더 역동적으로 발산한다. 글쓰기의 본질은 종이위에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골라 내버리는 것이다. 과학자, 화가, 시인들은 모두 복잡한 체계에서 ‘단 하나의 변수’만 제외하고 모두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결국 추상화란 현실의 불필요한 부분을 도려내면서 중대하고 놀라운 본질, 핵심적 본령만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추상화의 본질이다. 그래서 추상화는 단순화와 통한다.[142, 143]


네 번째 생각도구는 패턴인식(Recognizing Patterns)이다.

패턴을 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첫걸음이다. 핵심적인 것은 반복된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패턴을 인식하는 것이다.[143]


비단 음악만이 아니다. 모든 분야에는 패턴이 있다. 역사에도 패턴이 있다. 역사를 상고하는 이유는 바로 그 패턴을 알기 위해서다. 그 패턴이 모여서 메타패턴(meta-pattern)을 만든다. 그리고 그 메타패턴이 패러다임이 된다. 하지만 메타패턴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143]


패턴을 발견하는 것은 어떤 반복적인 순서나 양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 보고, 듣고, 느끼는 일이다. 결국 패턴을 알아낸다는 것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는 것이다.[144]


다섯 번째 생각도구는 패턴형성(Forming Patterns)이다.[144]


결국 창조란 기존의 패턴을 파괴하고 새로운 패턴을 만드는 것이다.[147]


여섯 번째 생각도구는 유추(Analogizing)다.

유추란 닮지 않은 사물이나 현상 사이에서 기능적인 유사성이나 일치하는 내적 관련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유추란 한 마디로 패턴과 패턴 사이의 끊어진 다리를 이어주는 것이다. 분명 그녀(헬렌 켈러)는 보고 들을 수는 없었지만 만져서 느낄 수 있었으며 냄새를 맡고 맛볼 수는 있었다.[147]


뉴턴이 발견한 중력의 법칙 또한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유추한 것이다. 사과를 땅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면 이 힘이 달까지 끌어당길 것이라고 유추했던 것이다. 우리는 유추적 사고를 통해 기존지식의 세계에서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이해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유추’는 새로운 발견과 창조의 동력이다.[148]


일곱 번째 생각도구는 몸으로 생각하기(Body Thinking)다.

생각은 먼저 감각과 근육, 힘줄과 피부를 타고 느낌으로 다가온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의 덩어리가 솟아오름을 느낀다.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은 “몸의 움직임이 생각이 된다”고 했다. 우리의 근육 실핏줄 마디마디에 그 어떤 생각의 돌기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148, 149]


여덟 번째 생각도구는 감정이입(Empathizing)이다.

내가 그 대상으로 들어가는 것, 그 문제 속으로 들어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 감정이입이다.... 결국 감정이입이란 ‘나’를 잊고 ‘그것’에 빠져들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149, 150]


역사가들은 타인의 눈으로 보기 위해 ‘시대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감정이입을 이해하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사냥에 성공하려면 사냥감처럼 생각하라고 한다.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내 안에서 그것이 자라나게 해야 한다.... 가장 완벽한 이해는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그 무엇이 될 때’ 가능하다.[150, 151]


아홉 번째 생각도구는 차원적 사고(Dimensional Thinking)다. 쉽게 말해 차원을 달리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다차원적 사고란 사물을 평면으로부터 끌어내어 3차원 이상의 세계로 옮길 수 있는 상상력이다.[151]


열 번째 생각도구는 ‘모형 만들기(Modeling)'다.

모형은 보는 사람이 그것을 즉각 인식할 수 있도록 실체를 축약하고 차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생각에 모형이 들어서게 되면 구체화의 힘이 배가된다. 모형이라는 것은 상상력에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려면 유용하면서도 다양한 모형을 만들어봐야 한다.... 도자기를 만들어보라. 흙으로 만져보고 빚어보고 유희해보라. 구상화를 시켜보는 과정에서 생각이 자라난다.[153]


열한 번째 생각도구는 놀이(Playing)다.

놀이는 기발한 창조적 생각을 자극하며 창조의 보금자리가 된다. 창조적인 통찰도 여기서 나온다. 페니실린의 발명도 실은 놀이의 산물이었다.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은 “나는 미생물을 가지고 논다. 놀이에 익숙해지고 나서 다시 그 놀이의 규칙을 깨뜨려보면 다른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플래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할 때 그는 미생물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우연히 놀이의 규칙을 깨고, 미생물을 실험실에서 엎질러보았는데, 거기서 우연히 발견한 게 페니실린이었다. 놀아야 발견하고, 놀아야 창조한다.[154]


열두 번째 생각도구는 변형(Transforming)이다.

변형은 생각의 정점이다. 누군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할 때 그 사고과정은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변형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생각의 버전 체인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변형적 사고다. 이런 변형적 사고가 서로 다른 분야를 연결시킨다. 이러한 생각의 버전 체인지를 가져오지 못하면 생각은 고인물이 되고 만다.[155]


마지막 열세 번째 생각도구는 통합(Synthesizing)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생각도구들의 완결이 통합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와중에 그렇게 다양한 단계를 하나하나 딛고 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을 통해, 기억, 지식, 상상, 느낌이 따로따로가 아닌 전체로,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몸을 통해 직관되고 이해된다. 그래야 종합지(綜合知, synosia) 혹은 통합적 이해(unified understanding), 즉 통섭이 가능해진다.[156]


< 생각을 다시 생각하라 >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적 요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조적 상상의 부엌으로 먼저 들어가야 한다. 그 안에서 어떤 생각, 상상 그리고 창조의 요리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블로 피카소는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릴지 예측하고 붓을 든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도 생각과 창조의 부엌에 들어갈 때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 기대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이성의 힘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상력과 직관이라고 하는 것에 더 빚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것은 예술 장르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Henry Poincare)는 뭔가를 증명할 때는 논리로 하지만 뭔가를 발견할 때는 직관으로 한다고 했다. 하워드 가드너는 자신의 책 <<창조하는 마음(Creating Minds)>>(국역본 :  열정과 기질)에서 아인슈타인을 논리수학적 사고의 전형으로 그렸다. 하지만 정작 아인슈타인은 수학에 취약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진척시키기 위해 자주 다른 수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인슈타이이 발견한 상대성원리는 논리수학적 접근 이전에 직관에서 시작된 것이다.

과학자는 공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최고의 과학자는 먼저 상상하고 직관한다....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다. 그래서 과학자는 예술과 느낌을 공부해야 한다. 창조적 사고와 발상들은 무엇보다도 느낌과 직관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정신적 요리를 해나가는 데 필수적 요체들이다.[158, 159]


결국 우리는 느끼는 것이다. 예술가는 묘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이고, 과학이란 직관적으로 느낀 것을 과학적 방법의 틀 속에 집어넣어 과학적 이론으로 번역해서 꺼내는 것이다. 조각이란 것도 결국은 느낌을 번역하는 것, 즉 할 말을 조각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결국 창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먼저 ‘느낀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공식 안에서’, 수학자들은 ‘수식 안에서’, 작가들은 ‘단어 안에서’, 음악가들은 ‘음표 안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가두지 말라. 창조적 사고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균형을 갖게 된 사고다. 결국 창조는 새로운 균형, 뉴 밸런스(new balance)다.

내 안의 창조적 본능을 발굴하고 일깨워라. 무엇인가를 ‘아는’ 지식의 단계를 지나서 새롭게 ‘느끼고’ 유익하게 ‘만드는’ 디자인의 단계로 나아가라. 그것이 창조적 생각이다.[159]


6장 문화, 운명을 결정하는 소프트파워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대학교 교수인 마리아노 그론도나(Mariano Grondona)는 <<경제적 발전의 문화적 조건>>에서 경제발전은 일종의 문화적 과정임을 강조하면서, 발전지향적인 조직과 발전저항적인 조직을 크게 구분해서 경제발전과 문화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정리했다.


첫째, 발전지향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성이 존중되는 반면, 발전저항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없고 ‘국민과 대중’만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제발전이 촉진되지 않는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결국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혹은 자신을 평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과 같은 내적, 개인적 동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둘째, 발전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사회 지도층에게 전반적인 수준과 현저히 차이가 나는 도덕 수준을 강요하지 않는다. 반면 발전저항적인 사회에서는 사회 지도층에게 전반적인 수준과 현격한 차이가 있는 매우 높은 도덕적 의무를 부과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일수록 오히려 심각하고 은밀한 부패가 만연한다.


셋째, 발전지향적인 사회에서 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성취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반면, 발전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것, 즉 나눔의 대상으로만 인식된다. 때문에 발전지향적인 사회에서는 모두가 함께 성취를 위해 경쟁하지만, 발전저항적인 사회에서는 부는 분배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넷째, 발전지향적인 사회에서는 경쟁이 필수불가결한 핵심 요소다. 즉 경쟁 없이는 생존도 번영도 없다. 하지만 발전저항적인 사회에서는 경쟁을 부정적으로 보고, 대신 질투와 유토피아적 평등을 합리화한다. 경쟁을 통한 성취의 경제학이 아닌 경쟁을 외면한 질투의 경제학만 존재하는 셈이다.


다섯째, 발전지향적인 사회는 경쟁체제 속에서 창조적 파괴자, 개혁자, 이단자들을 양성하지만, 발전저항적인 사회에서는 경쟁을 외면한 평등주의 속에서 교리 추종자, 순응주의자들만 양산한다.


여섯째, 발전지향적인 사회가 집중하는 시간은 가까운 미래다. 발전지항적인 사회에서 미래는 통제 가능한, 사전 계획이 가능한 시간이자, 막연한 예측의 대상이 아닌 ‘내가 오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창조 대상으로서의 미래기 때문이다. 반면 발전저항적인 사회는 과거에 매달리거나 간혹 미래를 강조하더라도 아주 먼 미래, 혹은 종말론적 미래만 언급한다.[165, 167]


실제로 한국사람치고 ‘빨리빨리’가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이 없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에라 모르겠다, 일단 올인!’하는 성향도 있다. 한때는 ‘맹모삼천지교’와 ‘빨리빨리’, ‘에라 모르겠다, 일단 올인!’ 등은 부정적인 요소로 인식되었다. 맹모삼천지교의 경우, 지나친 교육열이나 부모의 대리만족이라는 차원에서 비판을 받았다.

한편에서는 ‘빨리빨리’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다고도 말한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올인!’은 굉장히 위험한 선택인 반면, 한편에서는 그 대책 없어 보이는 모험의 덕을 본 이들도 많다. 똑같은 올인 문화도 어느 시점, 어느 상황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일정한 사회 내에서 우세하게 발현하는 가치와 태도라는 것이 언제나 합당하고, 모조리 옳고, 절대적일 수는 없다.

문화는 살아 움직인다. 한 번 정해지고 나면 고정되는 박제가 아니다. 즉 환경에 따라 ‘빨리 빨리’가 플러스 요인이 될 수도 있고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우세종의 문화와 열세종의 문화는 따로 존재한다’는 발상은 거의 히틀러적 사고와 다름없다.[169. 170]


마리아노 그론도나는 이렇게 말했다. “학자들은 아시아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유교를 끌어댔다가 다시 아시아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 유교를 들먹거리고, 또 다시 아시아의 위기를 분석하면서 유교 타령을 한다.” 문화는 이처럼 어느 시대에서는 발전의 동력이었다가, 어느 시대에서는 침체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양면성을 지닌다.[172]


사회 발전과 변화의 한가운데에는 항상 문화력(문화력)이라 불리는 소프트 파워가 존재한다. 조지프 나이는 <<소프트 파워>>에서 “소프트 파워란 강제나 보상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능력을 말한다. 이런 파워는 한 나라의 문화와 그 나라가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 제반 정책 등의 ‘매력’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176]


상투적인 생각, 상식적인 이야기로 대중의 공감을 얻기가 힘든 것은, 거기에는 소프트 파워의 핵심인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 매력, 즉 마음을 끄는 힘이 있어야 살아 움직이는 문화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176]


문화는 핵심가치다. 그리고 그것은 4P라고 부르는 네 가지 가치로 설명할 수 있다. 바로 긍정(Positive), 실용주의(Pragmatism), 열정(Passion), 원칙(Principle)이다.


첫 번째 가치, 긍정

일본 재계의 신적 존재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항상 “가난 덕분에 평생을 근검절약해서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가난 ‘때문’이 아리나,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배우지 못한 덕분에 평생토록 배움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다.” “몸이 약한 덕분에 평생을 조심해 90세가 넘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처럼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라고 말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 그리고 조직이 결국은 보다 생산적인 문화, 살아있는 문화, 진정한 차이를 발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우세군의 문화를 만든다.[180]


두 번째 가치, 실용주의

남북전쟁 종전 후 미국은 새로운 국가 질서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계기로 ‘노예제’로 대변되던 구질서는 무너졌지만, 그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의 방향이 부재한 상황이었다. 그러던중 1872년, 메사추세스 주 케임브리지에서 네 사람이 비공식 토론 모임을 가졌다.... 그들의 모임은 ‘메타피지컬 클럽(Meta-Physical Club)'이라 불렀다. 바로 여기서 새로운 미국을 만든 위대한 철학, 즉 실용주의가 태동했다.

그들은 일단 ‘우리는 왜 전쟁을 했는가?’를 고민했다. 그 결과 그들은 신념이 극단화하면 전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깨닫고, 신념의 충돌을 중재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실용주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실용주의는 교육, 민주주의, 자유, 정의, 포용에 관한 미국인의 관점, 더 나아가 이들의 생활양식, 교육방식,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는 방식,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방식,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돌이켜보면 실용주의야 마로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핵심가치인 셈이다. 실용주의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자택일의 강요는 폭력이다. 신념의 극단화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사상의 생존은 그것의 불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응성에 있다. 관용과 차이의 여지를 허용하는 사회를 만들어라. 나의 진리와 다른 진리에 대해 열려 있으라.”[182]


7장 소통, 성공을 위한 공감 지능


인간관계는 또 다른 형태의 자본이다. 이를 제임스 콜만은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칭했다. 이 사회자본은 당장 환급되지는 않지만 차츰 축적되는 자본이다.[189]


입 ‘구(구)’ 3개가 모이면 ‘품(품)’자가 된다. 사람의 품격은 입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아무리 잘 차려입어도 말에 품격이 없으면 그 사람 자체도 품격이 없어 보인다. 품격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입을 열었을 때 단 한마디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향취가 풍겨야 한다. 자기만의 향취가 담긴 말을 사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화술이다.[203]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게 있다. 상대를 설득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설득(persuasion)이 아니라 공감(sympathy)에 있다. 실제로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지간해서는 설득당하지 않는다. 설득된 듯 보이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배-피지배의 관계일 대가 대부분이다. 공감은 마음과 마음의 파장이 만나 서로에게 조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감 없이는 감동도 없다.[204]


좋은 상사들은 대개 이런 특징을 갖고 있다. 그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격려해주며 의사소통에 능하다. 또한 용감하며 유머감각이 있고 공감능력을 지녔다. 그러면서도 책임감과 결단력이 있고 겸손하며 또한 권위를 공유하려 한다. 반면 나쁜 상사는 벽창호 형이 많고 의심을 잘한다. 숨기는 경향이 있고 위협하며 성질이 급하면서 자기중심적이다. 그와 동시에 우유부단하면서 남 탓을 잘하며 거만하다. 결국 좋은 상사와 나쁜 상사의 궁극적 차이는 이 마음의 시력에 달려있다.[207]


덕장 조지 마셜은 사람을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 원칙을 세웠다. ‘아랫사람을 명예롭게 하라. 한 번 맡긴 일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 정직한 실수에 관용을 베풀라.’[210]


덕승재(德勝才)라는 말이 있다.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일부러 지는 것도 사회 지능이다. 상대를 긴장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를 긴장시키는 일이며, 상대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관계에서의 승리를 위한 첩경임을 잊지 말자.[210]


8장 지식, 보이지 않는 미래의 부


미래를 본다는 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추측이나 예측이 아니다. 운명론적으로 이미 결정된 사안을 주술적으로 예단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를 본다는 것은 그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현재의 몸부림이다. 앨빈 토플러는 그것을 ‘미래의 인간화’라고 말했다. 다가오는 숙명적 이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력과 상상력을 총동원해 현재라는 시점에서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미래학은 ‘현실학’이다. 우리가 앨빈 토플러를 주목하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까닭도 실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제대로 돌파하기 위해서다.

미래는 도둑처럼 우리 앞에 온다. 미래는 단지 예측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오늘 만들어가는 창조의 대상이다. 미래는 결정된 숙명이 아니라 미완의 씨름터요 싸움터다. 결국 미래는 니금 이 순간순간에 빚어지고 있는 우리 영혼의 도자기와 다름없다. 그 미래의 흐름을 직시하고 미래를 단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새롭게 창조하자.[240]


9장 전략, 인생의 결을 바꾸는 지혜


삶 자체는 끊임없는 전투와 충돌의 연속이다. 인생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이고 인간관계의 본질은 갈등이며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이 되어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는다.[247]


유한한 존재인 인류의 특성상 역사적으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쟁의 방식은 삶의 방식이 되었고, 전쟁의 양식은 삶의 양식이자 문화가 되었다. 전쟁은 우리 삶에 다양한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인생의 성패는 그렇듯 불가피한 충돌상황에 얼마나 잘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247]


우리가 성공할 때는 전장의 칸날 바로 끝, 그 아슬아슬한 경지에서 간신히 성공하는 것이며, 우리가 죽을 때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손에 든 그 무기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이다. 성공이란 그렇듯 항상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오는 것이다. 그것은 칼날의 바로 끝부분에서 느끼는 위태로운 쾌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도리어 내 손에 쥐어진 칼자루에 맞는다는 역설적 사실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248]


마거릿 대처의 좌우명은 ‘반목을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대처는 적이 없다는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아직 적이 누구인지 분간해내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대처는 가장 강력한 총리가 됐다. 이렇게 말한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남들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존경 받는 대상이 되거나 차라리 두려움의 대상이 돼라.”[252]


적의 존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은 나에게 발전의 동기를 부여해주고 나의 신념에 집중하게 만든다. 오히려 적이 없으면 나태해져서 치열함도 발전도 없을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분명 라이벌이라는 존재가 있다. 문제는 그 존재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수용 자세에 있다. 그의 필요성을 계속 거부하면서 그가 사라져주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역으로 생각해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라이벌이 있기에 내가 한 번 더 조심하고 한 번 더 긴장하며 움직이게 된다. 적이 나를 발전시킨다.[254]


과거의 성공이 오늘도 내일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면 자만이다. 과거의 성공이야말로 오늘의싸움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다. 과거 승리의 방식을 반복함으로써 창의성을 소진하기 시작하면 결국 패배한다.

나폴레옹이 위대한 까닭은 한 가지다. 그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고 싸움을 혁신했다. 나폴레옹은 전통에 괘념치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싸운 전형적 인물이다.[255]


싸움의 기술, 그것의 상투성은 곧 무덤을 파는 일이다. 상투성이 상상력을 제압하면 결국 패배한다.... 싸움이 하나의 정형화된 틀로 굳어지면 반드시 당하게 된다. 야구에서도, 아무리 투수가 좋은 구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 타자는 그 구질을 연구해 져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위대한 투수가 되기 위해서는 수시로 구질을 변화시켜야 한다.[256]


우리는 알리에게 한 수 배워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스타일을 변화시킴으로써 과거의 전쟁들이 파놓은 함정을 피해야 한다. 적이 내가 누구인지를 가까스로 알게 될 즈음, 나는 새롭게 변화해야 한다. 그게 진정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길이다.[258]


역사적으로 최악의 재앙은 과거의 전쟁을 단순히 반복했을 때가 아니라 상대가 과거의 방식으로 전쟁을 반복할 것이라고 믿고 안일한 전략을 펼쳤을 때 일어났다.[258]


때로는 침묵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무서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내가 침묵함으로써 전체 조직이 긴장하는 방법을 몸에 익혀야 한다. 적들을 행동의 부재 속으로 유혹하고 유인하면, 적들은 당황해서 허점을 드러내고 만다. 이것이 무위(無爲)의 전법이다.[266]


10장 권력, 먼저 나를 지배하라


권력을 쥔 사람은 자신이 믿을 만한 투사임을 입증해줄 적이 항시 필요한데, 이것은 기업경영에서도 마찬가지다. 다 잘돼가고 있어, 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기업은 반드시 망하게 되며, 위기감이 항존하고 팽팽한 긴장감에 놓여 있는 조직은 살아남는다.[284]


< 말을 삼가라 >

권력은 말로 얻는 것이 아니다. 말수가 적을수록 실제보다 더 커 보이고 더 힘있어 보인다. 루이 14세는 ‘침묵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도 젊었을 때는 길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웅변에 도취하기도 했지만 차츰 말수를 줄여나갔다. 그러자 그의 침묵과 과묵으로 인해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생각을 예측할 수 없었고, 그의 비위를 맞출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입 다물고 있는 루이에게 계속 무언가를 이야기해주어야 했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루이 14세가 그것을 요긴하게 사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침묵이 그의 권력의 기초였던 셈이다. 말이 적을수록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권력자들은 말을 적게 함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겁을 준다. 말을 적게 하면 후회할 만한 말, 또는 실수할 말을 하게 될 위험도 줄어든다.[286]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질투는 모든 뛰어난 존재들이 내야 하는 세금”이라고 말했다. 약점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질투를 낳고 질투는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완벽해도 좋은 것은 신과 죽은 자뿐이다.[314]


11장 징비懲毖, 역사를 바로 세우는 성찰의 힘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에 좌의정, 영의정, 사도 도체찰사(四道 都體察使)의 중책을 맡았던 류성룡은 전란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왜란 전란사를 저술하는데, 그것이 바로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란 무엇인가. 지나간 날들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뜻이다.

<<징비록>>은 400년 전의 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오늘도  살아 있는 역사로서 읽히는 우리 기록문학의 보물 같은 자산이다. 1592년(선조 25년) - 1598년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하고 당시 최고위층에 있으면서 전쟁의 실상을 겪은 저자가 후일에 있을지도 모를 더 큰 우환을 경계하고자 집필한 책, <<징비록>>은 현재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317, 318]


임진왜란 발발 전, 류성룡이 천거하여 종6품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은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다시 조정 안에서는 이순신의 갑작스런 승진을 사사로운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애 유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다. 결국 이순신을 천거해 조선을 구한 이가 바로 류성룡이다.[323]


그 무렵 집으로 찾아온 신립에게 류성룡이 물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튼 변이 일어날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그래 적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소?”

신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류성룡이 다시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이 무슨 어이없는 대답이란 말인가. 이 같은 안이한 생각이 결국 적을 불러들인 것이다.[324]


후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군을 쫓아 조령(鳥嶺, 새재)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총병(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애초에 신립은 조령을 방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일의 패전 소식을 접하자 그만 낙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신립은 탄금대 앞을 흐르는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곳은 좌우에 논이 있고 플도 우거져 말과 사람이 움직이기에도 어려웠다. 한마디로 패착이었다. 결국 왜적이 충주에 진입하자, 신립은 맞서 사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우리 군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버렸다.[328]


이런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에게 잡혀 있던 선조의 장자 임해군은 자신이 풀려나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한강 이남의 땅은 어디든지 왜국의 요구대로 떼어주겠다고까지 했다. 당시 세자 0순위였던 임해군이 자기 한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기는커녕 적장에게 나라 절반을 떼어줄 테니 목숨만 부지해달라고 구걸했던 것이다. 수치스럽고 절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333]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화(화)야말로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였으며, 군량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힘이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되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여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至父子夫婦相食)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류성룡은 이 현장을 기록했다.[339]


책은 때로 세월의 무게만큼 읽힌다. 이처럼 아픈 기록인 <<징비록>>은 세월의 간격을 두고 다시 또다시 읽혀야 한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우리의 뒷근심이 줄지 않고 되레 더 커졌다면, 제대로 ‘징비’하지 않은 탓이다. 뼈저린 반성과 질책 그리고 후대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담긴 서애의 유언과 같은 <<징비록>>이 읽을 때마다 더 무겁게 읽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비단 나라만이 아니다. 기업도 가정도 개인도 ‘징비’의 날선 긴장감으로 다시 다잡아야 한다. 휴전선 철책만이 아니라 나와 우리 삶의 최전선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나와 우리의 징비록’을 다시 써야 한다. 바로 지금 말이다.[340]



3. 내가 저자라면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1』을 읽고서 저자의 주장과 글쓰기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 책을 읽어보니 1권과 비슷한 구성을 갖고 있고, 내용 면에서 중복되는 부분도 일부 눈에 띄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책이며 저자란 생각이 강하다.

총 11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 데, 몇 챕터는  몇 권의 책에 대한 북리뷰 형식을 갖추고 있다. 3장 ‘자조自助, 변하지 않는 삶의 지혜’는 새무얼 스마일즈(1812 - 1904)가 집필한 <<자조론>>, <<인격론>., <<검약론>>, <<의무론>> 등 4권의 책에 대한 ‘리뷰’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5장 ‘생각, 익숙한 것과 결별하기’도 루트 번스타인 부부의 <<생각의 탄생>>에 대한 리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1장은 <<정관정요>>, 2장은 <<갈리아 여행기>>, 11장은 <<징비록>> 등에 대한 리뷰로 봐도 좋을 듯하다.

다시 말해 다른 책들의 내용을 빌어 저자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엮어 내는 저자의 기술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한 북리뷰와 차이가 있는 점은 챕터별로 10여권에 이르는 책들에서 다양한 인용을 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과 근면함이 바탕되지 못하면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책을 쓸 때 “묵히고 직면하고 낯설게 한다”고 말한다.

묵힌다는 것은 쓰여 질 소재와 내용을 묵혀 두어 그것이 세월의 힘을 견디는 가를 시험한다는 의미다. 세월이 지나서 봐도 여전히 의미가 있고 좋은 내용이면 그것은 써도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잘라버린다고 한다. 잘 숙성하고 발효된 완벽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저자의 의도와 부합된다.

직면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직면’을 말한다. 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치열하게 몸으로 고민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든 정면으로 부딪혀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돌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신을 직면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한다. 또 그것이 가장 자기다와질 수 있는 방법이며, 결국 자기다운 것이 최고의 매력이라고 주장한다.

직면, 숙성과 더불어서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낯설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메디치21’ 강의를 30회 이상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내가 여러분을 더 이상 낯설게 하지 못하는 순간 이곳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대충 비슷한 내용으로 적당히 승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저자의 ‘업에 대한 자세’는 배울만 하다. 그리고 그의 책 내용 역시 그렇다. 그의 책이 주는 장점 중 하나는, 책을 읽고 나면 후속 도서로 읽고 싶은 책들이 우수수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자조론>>, <<검약론>>, <<징비록>>, <<갈리아 여행기>> 등이 그렇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인문학 정신은 첫째, 통찰의 힘을 길러 요란하고 소란스레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림 없이 분명하게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찰의 힘을 길러주는 인문학은 그 자체가 변화에 대처하는 삶의 고투에서 빚어낸 빛나는 결정체요 삶의 다이아몬드다. 둘째, 인문학 정신은 삶의 뿌리와도 같은 살아 있는 인문학을 통해 삶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근본적으로 다시 배우는 것이다. 인문학의 숨은 힘, 아니 진짜 힘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사람답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셋째, 인문학 정신은 인문학을 박제화된 관념의 집합이 아니라 삶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정신의 운동, 혼의 몸부림으로 만든다. 인문학이 결코 일시적인 유행이거나 흥행의 대상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8]

새무얼 스마일즈(Samuel Smiles, 1812 - 1904)의 <<자조론(Self-Help)>>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것은 오랫동안 수많은 인간의 체험을 통해 검증된 진리다. ‘자조(自助)’ 정신은 자기계발의 뿌리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면 한 국가의 국력이 된다. 타인의 도움은 자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돕는 것은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78]

150여 년 전 새무얼 스마일즈가 부르짖었던 자조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니 유효한 것을 넘어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돕고 일어서겠다는 각오를 외면하고 살아왔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힘보다는 타인의 힘에 의탁해 무임승차하고자 하는 유혹 속에 빠져 있다. 이런 유혹이 만연하면 그 사회는 활력을 잃고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게 된다.[84]

인격은 단순한 믿음, 혹은 덕목이 아니다. 구체적인 습관이며 구체적인 힘이다. 좋은 습관을 가지면 인격의 힘도 기를 수 있다. 자기 존중, 자조, 근면, 몰입, 성실 등은 믿음이 아닌 습관이며 덕목이 아닌 인격이다. 행복은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습관의 결과며, 성공 또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습관의 결과다.[89]

검약은 분별의 딸이요, 절제의 자매이며, 자유의 어머니다. 상실했던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한 본능적인 자기 치유 활동이요, 실질적인 생활운동이다. 그러나 검약은 언뜻 거창해 보이는 의미와는 달리 그 실천은 매우 간단하다. 새무얼 스마일즈의 말처럼 ‘버는 것보다 적게’ 쓰면 된다. 국민연금이나 보험 같은 제도나 장치도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켜주는 데 한계가 있다. 검약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으며, 결국 검약 안에는 유비무환의 의미가 담겨 있다.[94]

중요한 것은 시좌(視座), 즉 보는 지점이다. 우리 모두 시좌를 달리해야 한다. 모든 관찰은 주관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것이다. 거기서 창조가 싹튼다.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창조의 싹은 죽어버린다. 창조의 세계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가 흔히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난 역사 속에서 승리한 승자의 시각일 뿐이다. 역사 또한 끊임없이 재평가되는 것이니, 어제의 정답은 오늘 다른 시각에 의해 바뀔 수 있으며, 그것은 내일 또 변할 수 있는 것이다.[135, 136]

< 형상화, 느낌을 머릿속에 그려내라 >
나의 글쓰기를 예로 든다면, 나는 무언가를 쓸 때 먼저 그리기부터 한다. 즉, 형상화의 단계를 거친다. 가령 칼럼을 쓰기 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관찰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형상화시키는 것이다. 칼럼 자체를 형상화시켜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낸다. 그리는 것은 총체적이고 직관적이고 포괄적인 작업이다. 공감 있는 글은 한 번에 느낌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느낌을 머릿속에 그려내는 형상화의 단계가 필수적이다.[141]

< 생각을 다시 생각하라 >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적 요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조적 상상의 부엌으로 먼저 들어가야 한다. 그 안에서 어떤 생각, 상상 그리고 창조의 요리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셋째, 발전지향적인 사회에서 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성취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반면, 발전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것, 즉 나눔의 대상으로만 인식된다. 때문에 발전지향적인 사회에서는 모두가 함께 성취를 위해 경쟁하지만, 발전저항적인 사회에서는 부는 분배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상투적인 생각, 상식적인 이야기로 대중의 공감을 얻기가 힘든 것은, 거기에는 소프트 파워의 핵심인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 매력, 즉 마음을 끄는 힘이 있어야 살아 움직이는 문화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176]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게 있다. 상대를 설득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설득(persuasion)이 아니라 공감(sympathy)에 있다. 실제로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지간해서는 설득당하지 않는다. 설득된 듯 보이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배-피지배의 관계일 대가 대부분이다. 공감은 마음과 마음의 파장이 만나 서로에게 조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감 없이는 감동도 없다.[204]

우리가 성공할 때는 전장의 칸날 바로 끝, 그 아슬아슬한 경지에서 간신히 성공하는 것이며, 우리가 죽을 때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손에 든 그 무기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이다. 성공이란 그렇듯 항상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오는 것이다. 그것은 칼날의 바로 끝부분에서 느끼는 위태로운 쾌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도리어 내 손에 쥐어진 칼자루에 맞는다는 역설적 사실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248]

책은 때로 세월의 무게만큼 읽힌다. 이처럼 아픈 기록인 <<징비록>>은 세월의 간격을 두고 다시 또다시 읽혀야 한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우리의 뒷근심이 줄지 않고 되레 더 커졌다면, 제대로 ‘징비’하지 않은 탓이다. 뼈저린 반성과 질책 그리고 후대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담긴 서애의 유언과 같은 <<징비록>>이 읽을 때마다 더 무겁게 읽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비단 나라만이 아니다. 기업도 가정도 개인도 ‘징비’의 날선 긴장감으로 다시 다잡아야 한다. 휴전선 철책만이 아니라 나와 우리 삶의 최전선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나와 우리의 징비록’을 다시 써야 한다. 바로 지금 말이다.[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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