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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4일 14시 09분 등록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 / 오 진 탁 지음


1. 저자에 대하여

2008년 현재 한림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생사학연구소 소장을 겸한다. 노장(老莊) 철학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일본 도쿄 고마자와 대학에서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노자, 장자를 비롯한 동양철학에 관심을 두고 오래 연구해 왔으나, 우리나라에서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학제적 접근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10여 년 전부터 이 분야에 몰두한다. 특히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는 ‘생사학Thanatology’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죽음 이해와 방식을 개선하고 성숙한 죽음 문화를 모색하는 연구.교육 활동에 전념한다.
1997년부터 한림대 학생을 대상으로 전공 및 교양강좌를 개설했고, 2005년부터는 최근 급증하는 자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자살예방교육 과목을 개설해 교육한다. 2008년에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시민인문강좌 〈웰다잉, 아름다운 마침표〉에서 60세 이상 노년층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 바 있다. 또한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소장으로서 사회 각 기관과 협력, 웰다잉과 자살예방 전문가 양성을 위해 〈웰다잉 체험교실〉 〈자살예방을 위한 워크숍〉 〈사이버강좌 웰다잉(자살예방) 전문과정〉 〈웰다잉 전문강사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 사회의 자살 예방을 위해 다각도로 애쓴 공로로 2008년 9월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웰다잉의 이론적.실천적 근거를 제시한 『마지막 선물』과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이 있으며, 역서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티베트의 지혜』 『감산의 노자풀이』 등이 있다. )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죽음을 체험했던 사람들 역시 죽음의 순간, 저마다의 삶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었으며 다음의 질문에 맞닥뜨렸다고 증언한다. ‘당신은 자신의 삶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 좋든 싫든 죽는 그 순간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따라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은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p8

죽음을 평온하게 맞이하고자 한다면 올바르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화로운 죽음을 희망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평화를 일구어야 합니다. p9

죽음준비란 자기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말이다. 또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해 두라는 의미이기도 한다. p10

제1장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안락사에 대한 논란
안락사(euthanasia)의 어원은 희랍어의 eu(잘, 아름답게, 행복하게, 편안하게)와 thanatos(죽음) 으로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 ‘행복하고 편안한 죽음’, ‘행복하고 품위 있는 죽음’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p21

현대 사회에는 죽어 가는 사람을 영적으로 보살피는 의식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 티베트에서는 누구나 불교의 차원 높은 진리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으며 자기 스승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피상적이든 심원한 방식이든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죽는 일은 없다고 한다. p25

죽음이라는 극단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순간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죽어 가는 이에게 임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p26

머지않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작별의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심장마사지 등의 응급조치를 취하기 위해 가족들은 병실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의료 관계자는 오직 육체적 연명만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의학을 ‘사람을 죽지 못하게 하는 기술’ 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환자의 죽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의료 관계자가 죽음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받았는지, 또 스스로 자기의 죽음이나,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방식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았는지 궁금하다.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도록 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또는 최후의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게 하는 편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p27

바람직한 방향
첫째, 죽음 준비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죽음준비교육을 활성화 한다.
둘째,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에 서명, 자기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을 미리 유서에 기록
셋째, 호스피스 제도를 활성화 p30

‘조용하게 혼란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것은 자신이 삶을 영위했던 방식’ 달라이 라마 이는 우리가 자신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영위하면 할수록,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덜 후회하게 된다는 뜻이다. p32

불교에서는 전생을 알고 싶으면 금생을 살펴보면 되고, 내생을 알고 싶으면 금생을 살펴보면 된다고 말한다. p33

생전유서(Living Will)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 p34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 p35

제2장 죽어 가는 사람의 여섯 가지 반응
임종하던 날도 그녀는 결코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안 돼!’하고 소리치다가 숨을 거뒀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두려움과 공포로 얼룩진 얼굴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녀는 그렇게 죽고 말았다. 죽음을 인정하기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전혀 마무리하지도 못했고 남아 있는 가족과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p47

'반응으로서의 우울‘의 단계에서는 말기환자가 할 말이 많고 의사나 간호사가 자신의 병에 적극 개입해주기를 바란다.’ 죽음 예감을 통해 느껴지는 예비적 우울‘의 단계에서는 말이 거의 필요 없다. 오히려 이심전심의 관계가 절실히 요구된다. 말없이 손을 잡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옆에 조용히 앉아있기만 해도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 p61

기술 문명의 발달로 현대 사회는 많은 것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죽음이라든가, 죽어 가는 과정 또는 죽음 이후 무엇이 일어나는지 실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p69

제3장 데 레 사 수녀의 니르말  흐 리 다 이 와 호스피스
‘사랑의 선교회’
1950년 10월 7일
3가지 서원,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
네 번째 서원은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한다는 결의이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집(니르말 흐 리 다 이)’ 은 사랑의 선교회가 벌인 최초의 봉사 활동 p77

데 레 사 수녀는 가톨릭 성직자였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취했다. 누구든 개종을 강요해서도 안 되며 종교를 입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고 단지 행동으로 실천하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니르말 흐 리 다 이 에서는 매일 아침 기도시간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었고 어떤 사람은 힌두교 경전을 읽었다. 그러나 함께 기도할 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니르말 흐 리 다 이 에서는 죽어 가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 거리에 살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과 배려 p79

로스 박사
무조건적인 사랑과 좀 더 밝은 태도로 그들을 대한다면 죽어 가는 사람이 한층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심지어 영적인 변화까지를 체험하게 된다고 밝혔다. 티베르의 소걀 린포체도 죽어 가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보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촉진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결심이 그것이다. p81

‘요셉의 집’
김 옥 순 p82

능행 스님 p84

미국 미시간대학 사회연구소의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는 (심리과학)이라는 잡지에서 ‘자신만 아끼고 남을 돕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보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두 배나 높다.’ p86

제 4장 낙태, 그 침묵의 절규
약 2만 건 이상의 낙태 . 미국보다 6배 이상 p91

영혼이 육체로 들어가는 시점이 언제인가라는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과학자 칼 세이건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 사고력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뇌파의 움직임을 인간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임신 6개월 p97

뇌파의 움직임을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칼 세이건 역시 편협한 과학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p98

제5장 자살은 사회적 살인이다.
프랑스의 장 아메리는 (자살하기: 자유 죽음 론 )(1976년)에서 허무주의적이고 자전적인 색채가 짙은 시각으로 자살 문제를 다루었다. p135

 

 

죽음, 그 마지막 성장 / 부위훈


1. 저자에 대하여

부위훈 (傅偉勳) - 1933년 10월 臺灣 新竹市에서 태어나 臺灣國立大學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일리노이대학에서 "현대 유럽의 윤리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일찍이 대만대학, 일리노이대학, 아이오와대학 철학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1971년 펜실바니아 주립 템플대학 종교학연구소에서 불교학, 동아시아 사상 박사과정 학생을 지도하였다. 임파선암으로 투병하다가 1996년 11월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西洋哲學史>, <從西方哲學到禪佛敎>, <批判的繼承與創造的發展>, <文化中國與中國文化>, <從創造的詮釋學到大乘佛學>, <中國哲學指導> 등이 있고, 그밖에도 수십 편의 中, 英, 日文 논문이 있다.


2. 내 마음에 들어가는 글귀

죽음, 그 마지막 성장/

1장 서론
현대인은 이전 시대 사람들에 비해 더욱 고독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고 있으며, 가장 가까운 가족들을 포함한 어떤 사람들도 불치병 환자를 대신하여 정신적 위안을 줄 수 없고 오직 본인 스스로가 죽음을 껴안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유명한 정신의학과 사망학의 전문가인 쿠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
「사망과 임종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많은 측면에서 두려움과 혐오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즉 더욱 고독하고 기계적이고 비인도적이라는 사실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고립되고 인간미가 없어지는 것은 불치병 환자들이 친근한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쫓겨나 급히 응급실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p42

'성장의 마지막 단계‘
‘성장의 마지막 단계’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해 나가는 존재’ p46

사망학
죽을 때까지 배워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삶의 마지막 관문인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도 배워야 하는 학문이다. 오스 여사의 ‘죽음의 단계가 성장의 마지막 단계’ p55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의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lvav llych)은 사망 문학의 백미 p57

사망학이 등한시하면 안 될 또 다른 연구 과제는 죽음에 대한 아동심리이다.
사망학은 반드시 아동심리학 . 발전심리학. 교육심리학 등과 발맞추어 ‘아동과 죽음’이라는 현상의 관계를 연구해야 하며, 특히 아동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임종 정신의학과 정신치료를 그 아이에게 응용해야 하는 가 라는 과제를 연구하고 검토해야 한다. p58

프랑크 박사의 명저 「의외에 대한 인간의 탐구」(Man's Search for Meaning)
일본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살다」(To Live)를 방영
스웨덴 버그만(Ingmar Bergman)감독이 중세 말기의 유럽에 만연하던 흑사병을 주제로
다룬 「제7 인장」(The Seventh Seal) p67

2장 죽음의 존엄
‘죽음의 품위’는 기본적으로 ‘죽음의 존엄’을 추구한다. p69

1990년 3월 13일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아동 정신의학 전문가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 박사가 미국의 메릴랜드 양로원에서 87세의 나이로 자살하였다. 평생을 남을 살리기 위해 애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죽음의 존엄’을 지킨 그의 자살은 심리학계와 문화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p72

안락사를 찬성하는 기본적인 근거 세 가지

첫째,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이 점에서 안락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불치병 환자의 자발적인 생명 단축은 자신의 기본적인 인권이며, 또한 타인을 해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률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의약 기술의 급속한 발달은 불치병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었지만, 환자 본인에게 고통이 되어 오히려 자신의 삶의 품위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안겨서 존엄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셋째, 불치병 환자 가운데 일부는 육체적 고통이 견딜 수 없이 심하여 가족들도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자가 안락사를 선택할 권리를 뺏는다면 너무 잔인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p79

안락사 반대의 기본적인 근거 네 가지
첫째, ‘인간 생명의 신성불가침’ 원리에 따라 인간의 생명은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것 으로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둘째, 안락사를 합법화시키는 것은 자살을 조장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다.
셋째. 안락사를 인준하게 되면 의사나 가족 및 기타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권리 남용으로 인해 수습할 수 없는 갖가지 폐단을 유발할 것이다. 경제적 곤란을 이유로 환자의 동의를 강요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넷째. 의사의 오진이 자주 발생하는 상황에서 만약 불치병으로 오진하여 안락사를 조장한다면 주동적인 살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불치병 환자를 안락사 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치료술이 약품이 출현한다면 나중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p80

로스 여사는 「사망과 임종에 대하여」
나는 그들을 나의 스승으로 삼아 생명의 마지막 단계와 관계되는 근심. 두려움. 그리고 희망을 배웠다. 나는 고통과 기대와 좌절을 우리와 함께 겪은 환자들의 이야기로 적었을 뿐이다. 나의 이 기록이 아무 희망이 없는 환자들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곁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도움을 주는데 조그만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행동 할 극소수의 사람들은 자신과 환자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리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심령의 능력과 생명 존재의 독특한 인성적 측면에 대해 배울 것이고, 더욱 심화시켜서 자신의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근심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고통과 기대의 좌절을 우리와 함께 겪은 환자들의 이야기로 적었을 뿐이다.‘라는 말은 지나친 겸손의 표현일 것이다. p85

로스여사의 5단계 모형
1.부인과 고립(denial and isolation) -> 2.분노(anger) -> 3.거래(bargain) -> 4. 우울(depression) -> 5. 수용(acceptance) p86

로스여사 ‘종교를 지닌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의 정신 상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듯하다.
환자들 가운데 내면적으로 깊은 신앙을 갖춘 참된 종교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p91

로스 여사의 이러한 관찰은 음미할 만한 것으로 종교와 임종 정신의학의 의의에 대한 성찰을 유발한다. p92

톨스토이
1884년 완성한 사망 문학 가운데 불후의 명작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좋은 사례이다. p95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
톨스토이의 그 명언은 두 가지 차원의 뜻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세속적 표준으로 인생의 높낮이와 좋고 나쁨을 평가하며 늘 취생몽사 속에서 살아갈 뿐,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생활이 내포하고 있는 가장 두려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 우리 생활의 매순간은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이고,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시기가 바로 가장 두려운 시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본래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다. p101

한 발 더 나아가 불치병에 걸리고 나서야 비로소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기 때문에 가장 두렵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만약 일상생활 속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본래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면,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자동적으로 개별 실존의 궁극적인 관심에 의거하여 고도의 영적 혹은 종교적 안식처를 찾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신념과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재 건립하게 되며,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것과 가장 두려운 것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릴 것이다. 톨스토이 자신이 찾은 안식처는 기독교 신앙이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했기 때문에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중국의 운문

문언선사 가 말한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다.’
마조선사의 명언인 ‘평상심   ??이 바로 도 습??’ 라는 말로 바꾸어도 톨스토이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지에서는 평범하고 단순하다고 말할 것도 없고 두렵다고 말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p102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가 1952년 제작한 영화 「살다」(To Live)는 사망 영화의 극치 p107

그들은 세상살이에 대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할 것, 화를 자초하지 말 것,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을 것, 소박한 생활을 영위할 것, 매일 자연과 접촉할 것, 산보나 화단 가꾸기 같은 일을 많이 할 것, 내일을 걱정하지 말 것, 편지를 쓰거나 선물을 보낼 것, 남의 일을 도와주면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즐거움과 고통을 나눌 것, 짬을 내어 인생과 세계에 대해 관찰할 것, 일생생활 속에서 유머를 찾을 것, 만물 속에서 우주의 생명을 관찰할 것, 동물들을 보살필 것 등의 유익한 충고를 하였다.

‘우리 모두를 결합하는 힘의정신’(the energy spirit that connects us all)
그러나 우리(us)라는 단어를 빼고 ‘일체 만물을 결합하는 힘의 정신’이라고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린 정의는 우리 인류에게만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All that is)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총제는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헬렌은 ‘왜 반드시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까? 저희는 거의 쓰지 않습니다.
‘일체 존재’(the All-Being)혹은 ‘위대한 전체’(the Great Entirety)라는 말을 사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희랍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신의 성질은 둥글고 순환하는 것이다. 모든 곳이 중심이며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p125

니어링 부부는 제도화된 종교적 관점에서 완전히 추월하였고 자신들이 믿는 것은 일체 존재와 그것들의 변화라는 우주의 실상이었으니, 일종의 범신론( ?v ?이나 도가의 무위자연( ???z)과 같은 고도의 정신적인 그 무엇을 인정하는 것이다.
니어링 부부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관해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히 스콧의 나이 90을 넘긴 이후부터는 더욱 심화되어 다량의 죽음을 다루는 책들을 함께 읽으며 사망학에 대한 지식을 함께 나눈다. 그들은 생명과 의식은 어떤 형식을 취하여 계속 존재한다고 믿었다. 죽음은 일종의 과정이지 생명의 끝이 아니라고 여겼다.
헬렌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죽어 가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우리는 죽음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스콧은 자신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이 세상과 이별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의식을 유지한 채 이별하려고 한다. 이것은 죽음의 자기 결정과 생사가 뒤바뀌는 역정의 합작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체험이 억압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자동적으로 간단하게 육신이 떨어져 나가는 기교를 배우고 실천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웠듯이 이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배우고 있다. 노자(   ?도 ’생명이 성장하도록 내버려 둔 뒤에 스스로 떨어지게 하여라‘ p126

스콧
‘만약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죽어가고 싶소,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물고 싶소, 의사가 나를 만지는 것을 원하지 않소, 집밖에서 죽을지언정 병원 천장 아래서 죽고 싶지는 않소, 곡기를 끊는 방식으로 죽고 싶소, 가능하다면 물도 마시지 않았으면 하오, 죽어가면서도 의식의 활동을 멈추고 싶지 않소, 그러니 진통제나 마취약 같은 것들을 사용하지 말기를 부탁하오, 죽음이 닥치게 되도록 빨리 죽고 싶소, 그러니 강심제나 심장흥분제 . 음식의 강제 주임. 산소 공급. 수혈 등의 응급처치를 하지 않기를 바라오

내침상 주위의 사람들이 안정과 존엄을 유지한 채 이해와 즐거운 마음으로 평안하게 죽음의 체험을 함께 나누기를 희망하오, 할 수 있는 한 삶에 최선을 다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희망을 간직한 채 이 세상을 떠나고 싶소, 죽음은 일종의 과정이자 깨어남입니다. 어쨌든 삶의 역정 중의 다른 단면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환영해야 합니다. 죽은 뒤에는 친구들이 평상시의 작업복을 입힌 채 나의 시신을 소박한 나무관에 넣기를 바라오, 관에 아무 장식도 하지 말기를 부탁하오, 그리고 메인주의 화장터에서 화장하기 바라오, 장례식 같은 것은 원하지 않소, 전도사나 목사 록은 기타 종교계 인사들이 집전하는 일은 더욱 반대하오, 화장이 끝난 뒤에 재는 헬렌이나 친구들의 손에 의해 우리 집 나무 아래에 뿌려지기를 희망 하오 , 나는 지금 맑은 정신으로 이상과 같이 요청합니다. 부디 나의 요청을 존중해 주십시오‘

100세 생일을 맞기 한 달 전에 스콧은 주위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제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 고 선포하고는 마실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손대지 않았다. 그는 계획적으로 자신의 아름다운 인생과 이별할 시간과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헬렌은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광폭하고 극단적인 자살 방식이 아니라 완만하고 온화하게 기력을 감소시키고 평온한 마음으로 스스로 이별하는 방식이다’ 라도 설명을 덧붙인다. p128

그녀는 죽은 뒤의 사랑을 믿었으며 죽음 뒤의 삶을 믿었다. 자신이 머지않아 맞이할 죽음이란 육체적 생명의 해방으로, 우주와 합하여 하나가 되어서는 다시는 고독한 존재가 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85세를 넘어선 헬렌
늘 죽음에 대해 성찰하며 ‘죽음이 없는 인생은 견딜 수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 여유를 준다. 하루의 끝이며 육체적 생명의 휴가이고 새로운 전환점이다. 일과가 끝나면 밤이 찾아와 수면의 축복을 내린다. 죽음은 아마도 더욱 큰 하루의 시작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p129

3장 세계 종교와 죽음의 극복

일단 종교나 철학의 탐구를 통해 궁극적인 진실을 찾게 되면, 바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세워지게 된다. 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독교에서는 영생 천국이고, 힌두교에서는 윤회로부터 해방을 통한 신과의 합일이며, 불교에서는 열반 해탈이다. 그리고 도가에서는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고, 유가에서는 천도의 실현과 자신의 안신입명이다. 궁극적인 목표의 기본적 근거나 소망은 거의 비슷한데, 그것은 바로 죽음의 정신적 극복이나 생사 문제의 철저한 해결이다.

목표를 설정한 뒤에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의무를 스스로 짊어지고 완전히 자신을
헌신하려는 종교적 소망이 생겨나서 결국은 삶이나 죽음에 대한 태도나 생활 방식이 철저히 변하는데, 이것을 ‘새로운 삶의 전기’ ‘인생의 전환점’등으로 일컫는다. 바꾸어 말하면 궁극적인 의무감이나 헌신은 한사람의 인격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정신적 힘을 지닌다. 대승 불교에서 범부가 ‘위로는 보살이 되기를, 아래로는 중생 제도( 價?’를 서원하면 바로 보살이 된다. 유가에서는 소인이 군자가 되고,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따라 십자가를 등에 지고 박애와 선행을 행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공산주의가 일종의 종교로 오해받고 있다는 점이다. 공산주의는 나름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어서 철두철미한 공산주의자들은 그 목표의 실현을 자기 필생의 임무로 삼고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서 환골탈태하기도 한다.

문화대혁명 시절 모택동을 신봉하던 홍위병
??이 종교의 광신자와 무엇이 달랐던가? 그들은 모택동 사상의 실현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여 매일 인민을 위해 봉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종교가 아닌 까닭은 그 궁극적 목표와 임무가 순전히 세속적인 정치적. 사회적 개혁에만 머물러서 종교가 추구하는 출세간적의의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 및 정신적 해결과는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차원에서 다루면 안 된다. p141

참된 기독교인은 어떠한 세속적 표준으로도 삶과 죽음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스도로 인해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이 기독교 신도들의 세계관과 인생관, 궁극적 진실과 임무를 대변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갈라디아서」2장 20절) p153

기독교 교리 중 어떤 것은 재해석이나 수정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떤 것은 기독교의 존망과 연관되어 있어서 재해석이나 수정이 쉽지 않다. ‘예수 재림’을 예로 들면, 사망과 부활 이후 예수는 한 번도 이 땅에 내려온 적이 없어서 독실한 신자들을 초조하게 만들기도 하며, 심지어 그 교리에 회의를 품고 개종하는 신도들도 생기게 한다. 결국 천주교는 성령이 이미 교회에 강림했고, 성령의 보호를 받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에 예수 자신이 실제로 이 세상에 다시 강림할 필요는 없다고 예수 재림의 교리를 재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난처한 문제를 해결하여 천주교 계열의 신도들을 만족시켰지만, 개신교의 가장 보수적인 신학자들과 신도들은 여전히 예수가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리라 굳게 믿고 있다.

만약 예수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았다는 이야기가 초자연적인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전설이나 신화 혹은 개인의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강조한 신도의 재탄생과 영생 들 한갓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게 되고, 모든 기독교의 종교적 흡인력이나 감화력도 동시에 소실되어 곧바로 기독교의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도는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죽은 뒤에 부활하여 승천했다는 초자연적 사실들을 굳게 믿어야 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죽은 뒤에 부활하여 영생을 얻으리라 굳게 믿어야 한다. 이 점이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2,000여 년 동안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어 오늘날까지도 무수한 신도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까닭이다.

예수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며,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8장 35절)고 하였다. 이 역설적 말씀이 수많은 죄인, 피곤한 사람, 고난에 처한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했을 것이다. 또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세상 사람들을 받아들여 죽음에 대한 정신적 극복을 이루어 주었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 불치병 환자들이 사도 바울이 강조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았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 임종 때의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이점은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 앞에선 신자들의 시럼일 것이다. p155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기독교 교외가 납득하기 어려운 모순덩어리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 이래 지금까지 기독교는 한결같이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없는가? 기독교의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고, 따라서 다른 신을 믿어서는 안 되고 예수 또한 유일한 구세주라면, 눈앞에서 증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사실들을 부인하는 다른 종교의 진리는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기독교는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지나친 독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기독교의 시작과 끝 모두가 종교적 사실에 대한 믿음이 곧 진리라는 데 있지 종교적 참뜻의 성찰에 있지 않다면, 다원화되고 개방화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유익한 창조적 대화를 통해 다른 종교들과 대화하여 서로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p156

4장 현대 생사학 건립의 문제

삶의 의의에 대한 탐구와 낙관적 인생관이 먼저이고 실제적인 쾌락과 행복의 획득은 그 다음에 있다는 뜻이지, 실제적인 쾌락이나 행복한 삶을 영위한 뒤에 인생의 의의와 도리를 발견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 점에서 프랑클 박사가 제3 비엔나 학파의 입장에서 고전 심리분석학파에서 주장하는 성욕 만족 위주의 ‘쾌락에의 의지’ 및 개체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힘에의 의지’를 반박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분명해진다. p234

인생을 일종의 임무나 사명이라고 여기는 프랑클의 실존적 관점은 공자와 맹자 이래 ‘하늘이 부여한 선한 본성을 발현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사명’을 자신의 천명으로 여기는 유가의 천명관과 궤를 같이 한다. 프랑클은 실존적 의의 분석을 통해 인생에 염증을 느끼거나 자살을 꿈꾸는 정신병 환자들로 하여금 삶의 적극적인 의의를 발견하고 결단을 내리도록 권하는데, 이 또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죽는 것이 정명( ??이고, 질곡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정명이 아니다.’라는 맹자의 말과 유사하다. 인생을 일종의 임무나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쉽사리 삶에 싫증을 느끼거나 자살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클과 맹자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인생의 즐거움은 인생의 의의를 발견하기만 하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공자는 바로 ‘초라한 음식에 물 하 사발만 있더라도 팔베개를 베고 누우니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 의롭지 못한 부귀를 뜬구름과 같이 덧없이 여긴다’고 하였고, 또한 ‘ 그 사람의 됨됨이는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우면 모든 근심을 잊어버려서 늙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른다’고 하였다. p237

나아가 플랑클은 인생이 일종의 임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 깊이 들어가 제반 현실적인 의의를 초월하는 ‘궁극적 의의’ 위에서 자신의 임무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의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 생명 저 높은 곳에 초월적인 영성이나 종교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의 치료학 전문가는 어떤 특정 종교를 이용하여 궁극적인 의의의 구체적인 뜻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직 실존 분석을 통해 환자로 하여금 생명을 경시할 수 없는 까닭은 자신에게 궁극적인 의의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각인 시켜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 의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환자 자신의 실존적 종교 체험에 맡길 뿐이다. p240

심성 체인 중심의 현대 생사학의 입장에서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이 모두 ‘영원한 현재’(an eternal now)라는 사실과 삶과 죽음이 교차되고 있다는 사실, 즉 살아가는 매 순간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영원과 현재의 접점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한다. 이 점이 바로 대승 불교의 ‘생사가 곧 열반이고 번뇌가 곧 해탈이다’라는 도리와 운문선사의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라는 진리의 참뜻이다. 예수도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태복음」6장 34절)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p271

5장 결론 - 임파선암과의 투쟁을 통한 나의 생사 체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하였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죽음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므로 두려워할 (fear)필요가 없다. 두려움은 우리 자신의 오해에서 기인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심리적 진상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불안(Angst)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무엇 때문인가? 그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병상에서의 깊은 성찰의 결과, 하이데거의 실존 분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친구, 가족, 친구 등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표면적인 원인은 세속에 대한 갈애이고, 근복적인 원인은 우리 자신의 무명이라고 설명한다. 무명 때문에 자신에게 집착하게 되고, 나아가 세속에서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에 집착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실존적 분석과 불교의 연기설을 결합하여 바라본다면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원인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우리 현대인이 삶과 죽음에 대한 지혜를 배양하는 첫 걸음이 되리라 생각한다.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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