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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5일 17시 45분 등록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정유정 / 비룡소

I. 저자에 대하여 :

정유정

작가 정유정은 1966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첫 직업은 간호사다. 광주기독간호대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 2001년 봄, 간호사 일을 그만두었다. 이 시기를 전후 저자는 본격적으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시절 국문과 친구들의 소설 숙제를 대신해 줄 정도로 글쓰기에 대한 재주가 남달랐다. 그런 그녀가 간호사 일을 하게 된 것은 우연보다 필연이 아닐까. 직장을 다니면서 그녀는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홀로 무수히 쓰고 버리는 고독한 시절을 보냈다. 소설을 쓰는 동안 아이의 세계에 발을 딛고 어른의 창턱에 손을 뻗는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의 성장 모습과 스스로 지나온 십대의 기억 속에서, 그 또래 아이들의 에너지와 변덕스러움, 한순간의 영악함 같은 심리 상태가 생생하게 떠올랐으며 덕분에 유쾌하게 종횡무진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입심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2007년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이작품의 평을 소개한다.

모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역동적인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으로 팽팽한 전개 속에서, 인간의 일생이 소년 시절부터 이미 만만치 않은 도전과 더불어 훈련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김주연(문학평론가)

이야기 전개에 힘이 있다. 인물과 디테일이 살아 있다. 유쾌하고 따뜻하다. 자기라는 세계의 주인이 되어 가는 소년들의 모험에 박수를 보낸다. 은희경(소설가)

상상력의 긴박한 속도전이다. 작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숨을 돌릴 틈조차 없다. 끼가 넘치는 이야기꾼을 모처럼 만났다. 안도현(시인)

출간된 작품으로는 장편소설로 『열한 살 정은이』(2000년), 『이별보다 슬픈 약속』(2002년), 『마법의 시간』(2004년)이 있다.

II.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난 치맛자락을 잡아 주려고 손을 뻗었다가 소스라쳐서 거둬들였다. 가만 보면 나도 오지랖이 태평양만큼 넓은 놈이었다. 코가 석 자나 빠진 주제에 나를 개자식으로 취급하는 여자 애의 엉덩이를 돌보려 들다니. 그런다고 정아가 나를 매력적인 개자식으로 봐줄 리도 없는데. 75p

인간의 탈을 쓰고 이렇게 뻔뻔해도 되는 것일까?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참았다. 울어 봐야 놈을 재미나게 해 주는 것 말고는 얻을 게 없었다.

"인생 그따위로 살면 못써, 인마."

승주는 손등으로 내 가슴팍을 툭툭 갈기고 돌아섰다.

"앞으로 잘해라. 수틀리면 경찰서로 확 가 버릴 테니까."

승주가 멀어지자 힘이 잔뜩 들어갔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다리는 휘청했다. 이젠 내 쪽에서 승주를 쫓아다녀야 한단 말이지. 그것도 내 돈 쓰고 비위 맞추면서.

머릿속에서 '찰칵' 소리가 울렸다. 발목에 차승주라는 튼튼한 족쇄가 채워지는 소리. 나는 쓰레기통 뒤에 숨어 앉아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이 돌대가리, 밥통. 나가 죽어라....... 102p

힘과 체력은 비례한다. 루즈벨트에게 해당되는 사례였다. 녀석은 강을 무대로 힘과 체력이 완벽한 조화를 선보였다. 길은 직선으로 뻗어 있고 강변은 드넓으며 다리도 네 개나 달렸겠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강가를 내달리고, 모래밭을 파혜쳐 벌집을 만들고, 풀밭을 초토화시키고, 새 떼를 강변에서 깡그리 몰아냈다. 버스나 자동차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길로 뛰어올라와 짖어 댔다. 우리는 등 뒤에서 개소리가 나면 강비탈 나무 뒤로 숨었다. 혹시 승주네 기사가 쫓아왔나 싶어서였는데 번번이 속았다. 113p

"그래....... 너 규환이 알지? 너네 반이잖아."

"걔는 왜?"

"다쳤어. 네 아빠랑 루즈벨트 때문에. 너 도망칠 때 걔가 자전거로 방해했거든."

"정말이야? 많이 다쳤어?"

"입원했어. 네 아빠랑 루즈벨트가 한밤중까지 파출소에 있었던 건 그거 때문이야."

"그런데 왜 풀어줬다니, 그 미친개를. 유치장에 가둬 버리지."

"루즈벨트 말이야?"

"아니, 개장수."

정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당황했다. 정아네 사정이야 봐 온 게 있는 만큼 짐작하는 바도 있었다. 그래도 정야의 대답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위였다.

"동네 뒤집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때마다 어떻게 가뒤? 너나 네 엄마가 눈치껏 잘해야지."

정아가 걸음을 멈췄다. 나도 어리둥절해서 따라 섰다.

'어떻게 잘 할가?"

정아가 뾰족한 턱을 쳐들었다. 박격포를 메고 적진으로 돌진하려는 포병 같은 표정이었다. 머릿속에서 빨간 불이 깜박였다. 빨리 수습해.

"아니, 난....... 어쨌든 식구들이 아빠 성격 제일 잘 알 거 아냐. 조금 조심하면 덜......."

"너, 어떤 인간을 미친개라고 하는 줄 알아?"

정아가 내 말을 가로챘다. 표정은 밀랍처럼 굳어졌고 날 쏘아 보는 눈동자에 파란 불길이 일었다. 비로소 낯선 정아가 사라지고 익히 보아 온 암코양이 정아로 돌아와 있었다.

"조심해서 덜 물면 미친개가 아냐. 그냥 개지. 제정신이 아니라서 얘기가 안 되는 건 미친개가 아니야. 제정신인데 얘기가 안 되는 게 미친개야. 물겠구나, 할 때 물면 미친개가 아냐. 예상도 못할 시점에서 기발한 방식으로 물어뜯는 게 미친개야. 한번 이빨 박으면 피맛을 보기 전엔 빼지 않는 게 미친개야.“

정아는 맘먹고 시작한 것 같았다. 따발총을 난사하듯 다다다다 쏘아붙였다.

“너, 그런 미친개를 아빠로 가져봤어? 이빨 자국, 담뱃불 자군, 허리띠 자국, 목 졸린 자국, 그런 거 때문에 학교 못 가 봤어? 살겠다고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내달리고 남의 집 담장 훌떡훌떡 넘어 본 적 있어? 머리채 잡혀 끌려 다니느라 가르마 옆이 텅 비어 봤어? 맞고 살다 반편이가 된 엄마 붙들고, 나를 낳은 엄마가 증오스럽다고 퍼부어 본 적 있느냔 말이야!”

아무려니, 했다. 정아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다 믿기지도 않았다. 걸핏하면 얻어맞고 도망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친아버지가 그 정도로 악랄할까 싶었다.

“아니지? 꿈에서도 안 당해 봤지? 내 말 믿기지도 않지? 그럼 그런 충고 하지마. 그건 귀하게 자란 부잣집 외아들이 날마다 그러고 사는 개장수 딸한테 할 말이 아냐. 세상에는 자기가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 있는 법이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게 혜택 받은 자의 예의야. 알아들어, 김준호?”

나는 선생님에게 야단맞는 국민학생처럼 두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한순간에 정아와 짝이었던 이 년 전 봄말로 돌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말해 줄게. 내게 맞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딱 하나뿐이야. 맞장 뜰 힘이 없어 맞아 줄 수밖에 없다는 거. 내가 남자였다면, 아니 덩치가 조금만 컸어도, 그 인간은 벌써 내 손에 죽었어.” 118-120

세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강도, 길도, 비탈도, 건너편 비탈도, 숲도. 지우개에 지워지는 연필 자국처럼 쓱쓱 사라졌다. 하얗게 빈 세상의 중심에 승주와 기차만 남았다. 기차는 검은 빛줄기가 되어 승주를 덮쳐 갔다. 승주는 기차를 마주 보며 마냥 서 있었다.

“이놈아, 뛰란 말이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고함이 기차의 굉음을 뚫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다음 순간, 승주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더니 다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기차는 승주가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나와 정아는 백치 상태에서 풀려났다. 모세를 찬양하며 강으로 내달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137-138

승부는 내가 승주 엉덩이에 깔리는 순간에 끝났다. 애당초 난 승주의 상대가 아니었다. 분노로 어찌해 보기엔 녀석의 덩치가 너무 컸다. 하다못해 잡아 뜯을 머리털조차 없지 않은가. 155

나는 줄곧 혼자였다. 세 인간과 검둥개는 한편을 먹었다. 승주는 허수아비의 밀짚모자를 훔쳐 쓰고 할아버지와 정아의 호위를 받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놈의 입은 한시도 쉬지 않고 내 속을 뒤집고 긁었다. 규환이와 친한 꼴을 못 봐서 질투하는 쪼다라느니, 건수만 생기면 자기 엄마 흉을 본다느니, 더럽게 옴에 걸려 와서 자기한테 옮겨 준 적이 있다느니, 잔머리 구 단, 내숭 십단, 삐치기 백 단짜리 좁쌀영감이라느니....... 157

“누가 죽였는데?”

승주가 물었다.

“그것이사 암도 모르제. 몹쓸 짓만 허던 천하의 잡놈인게로 어떤 원 맺힌 손에 죽었든가, 박앙수 돈에 눈독들이던 어떤 놈이 맘 묵고 일을 저질렀든가......., 그랬것지야. 야튼, 그러저러해서 팔도로 도망 댕기는 신세가 된 거여. 누명쓰고 가막소 가느니 차라리 거렁뱅이로 죽을란다 맘묵은 거제. 월향도로 들어간 거는 도망댕긴 지 삼 년 남짓 됐을 때여. 사람 하나 없는 알섬이제만 살 만 허것드란다. 그래, 가진 돈 다 털어서 가랑잎만 헌 전마선 한 척에 염소 두 마리 사서 움막 짓고 눌러앉었다지야. 그물 땡기고 염소 clams서 겨우 풀칠만 허고 사는디 살기는 살제만 그것이 어디 사는 것이것냐? 펄펄 나는 고래를 잡던 놈이 그물질로 잡고기나 잡고 살라니 갑갑허기가 말로는 못했제. 거그다 은제 가막소 갈지 모르는 판에 식솔이 생기것냐, 어쩌것냐. 사는 재미도 희망도 없는 놈이 고기 잡어 돈을 번들 또 어따 쓰것냐. 술이나 처 묵는 주정뱅이가 돼 부렀제.” 185

어머니는 사진작가를 만난 이후부터 아버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이제 아버지는 미운 사람도, 야속한 이도, 남편도, 뭣도 아니라고 했다. 잊었다고 했다. 나는 아니었다.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밉고 야속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어찌할 수 없게 그리웠다. 서늘한 바람이 코끝을 톡 쐈다. 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르며 루즈벨트에게 물었다.

“너도 꼭 만나야 할 개나, 미치도록 그리운 개가 있냐.”

루스벨트는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앞다리에 턱을 내리 놓고 으르렁했다. 나는 깍지를 껴서 뒷머리를 받치고 드러누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몸도 마음도 깊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샛노란 반달 속에서 아버지가 함박 웃었다. 준호야, 졸리면 자. 204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알몸이었고 이불이 배꼽까지 흘러내려와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탐스러운 젖가슴이 파르르 떨었다. 나도 옷을 벗어 던지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손을 뻗어 정아를 만졌다. 목덜미와 어깨, 젖가슴과 배를 지나 허벅지 안으로, 빙판을 미끄러지는 스케이트 날처럼 내 손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정아는 어느새 깨어 있었다. 놀라지도 피하지도 않고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서툴게 서두리지도 않았다. 부드럽게 키스하고 힘차게 돌진했다. 둔한 통증이 허벅지로부터 등줄기로 퍼져 나갔다. 빗줄기가 지붕을 때려 댔다. 천둥이 울었다. 창밖에는 수십 가닥의 번개가 뒤엉켜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우주에서 크리스마스트리가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번쩍, 번쩍.

눈을 떴다. 정아의 몸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모자이크처럼 갈라지다 먼지로 사라졌다. 나는 크리스마스트리의 강렬한 자장에 갇혀 한동안 현실로 들어오지 못했다. 왜 이리 추울까, 문을 열어놓고 잠들었던가. 비는 그쳤는가.

새벽 바람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되돌려 주었다. 그곳은 숙직실이 아니었다. 숙직실 앞 평상이었다. 담요를 덮고 있었으며 따뜻한 몸이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넌 누구냐. 눈을 절반만 뜨고 웅얼거렸다. 품에 안겨 있는 것도 눈을 절반만 뜨고 웅얼댔다. 으르렁.

가슴에 콜라 병뚜껑을 따는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일이지?

처음엔 여섯 살 이후 저지르지 않았던 실수를 했다고 여겼다. 그것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끈끈하고 불쾌한 속옷의 감촉이 정아를 상대로 생애 첫 몽정을 했노라, 선포하고 있었다. 207

“네가 규환이 대신 어딜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중요한 일인가 보다, 짐작하고. 승주가 혹이고 나는 혹 위에 붙은 혹이라는 것도 알아. 알면서도 결심이 서질 않았어. 엄마를 생각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막상 가야지 하면 그게 죽기보다 싫었거든. 그 소굴로 돌아가는 게 너무나 끔찍해서....... 그냥 너 따라서 가는 데 까지 가 보자는 생각만 들었어. 너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러면 나도 어떤 결정을 해야겠지만, 그때까지 철판 깔자 생각했어. 시간이 필요했어. 엄마한테서 떨어져 있을 시간. 냉정하게 내 인생만 계산해 볼 시간.” 266

정아는 승주의 입에 물린 수건을 빼서 피투성이가 된 주먹에 감아 주었다. 그러자 녀석이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눈을 떴다.

“나도 살아 보려고 애써어. 애썼다고!”

승주는 잿빛 하늘을 우러르며 절규했다.

“근데 저 사기꾼 땡중이 날마다 대침을 꽂는단 말이야. 탈장 고친다고 불알 밑에다 대침을 박는다니까. 그걸 어떻게 참아. 얼마나 무서운 줄 알기나 해? 염병할. 알 리가 있겠어. 엄마한테 어제 불알 같은 게 있어 봤어야 알지.”

루스벨트가 안쓰럽다는 듯 승주의 눈물을 혀로 핥아 줬다.

“엄마는 내가 고자 되면 좋겠어? 그래야 속이 씨워어언하겠어?”

승주는 루스벨트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를 들먹이며 섦게 흐느꼈다. 이번에는 루스벨트가 엄마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마, 엄마. 나도 남잔데 죽을 때 죽더라도 장가는 가 봐야 할 거 아냐!”

내 가슴에서는 울화가 끓고 목구멍에선 웃음이 샜다. 저 엄청난 비밀을 감추느라 그간 얼마나 괴로웠을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결단코 웃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은 흙탕물에 드러누워 장가는 가 보고 죽어야겠다고 절규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비슷한 물건을 다리 사이에 달고 있는 종족끼리의 의리 도한, 지켜 줘야 마땅했다. 285

할아버지는 좌현으로 키를 돌리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 거센 빗줄기가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코뼈를 사선으로 강타했다. 나는 그때의 광주를 상상해 보려고 했다. 잘되지 않았다.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군인이라니. 대체 왜.......

“일요일 아침에사 갸를 찾았다. 지가 입원했던 그 대학병원에 누워 있드라야. 등에 총을 맞았드란다. 어떤 남자가 업고 왔드란다. 어떻게 살려 볼라고 했제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방도가 없더란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비바람에 떨어져 나가 필터만 남은 담배를 아무 정신없이 빨아 대고 함빡 젖은 눈두덩을 마구 비볐다. 공연한 것을 물었다고 나는 후회했다. 328

“젊은이, 성내지 마시오. 내가 델꼬 왔소.”

할아버지가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았다.

“태풍 오는 줄이사 알제만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다 싶어 그랬소. 이놈 눈을 본 게 안 델다 주믄 헤엄쳐서라도 갈란다 헛것습디다. 내 이놈하고 길동무해서 사흘 밤낮을 걸어왔소만 어린 놈 하는 짓이 어찌나 용하고 짠한가, 속이 거시기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소, 별시런 꼴을 당험서도 여그를 올란다고 죽을 힘을 쓰더란 말이요. 그러니 너무 뭐라 하지 마시오. 기왕지사 와 분 것인디 어쩔 것이요.”

얼마간 침묵이 지난 후 형은 차갑게 젖은 손을 뻗어 내 귀를 슬쩍 잡아당겼다.

“꼴통아, 넌 어째 하는 짓마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검도 없이.”

나는 왁 하고 울어 버리고 싶었다. 사실은 내가 장한 거지? 속으론 내가 기특한 거지? 그렇지, 형? 하며 매달려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이 떨어지는 눈을 깜박이며 히죽 웃고 말았다. 338

“엄만 아빠를 잊었다더라. 용서하고 잊어버렸대.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 남자와 곧 태어난다는 그 남자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돼. 잊을 수도 없고 용서도 안 되고 포기도 안 돼. 밉고 야속하고. 그런데도 그리워서.......”

눈자위에서 그렁대던 눈물이 기어이 넘쳐흘렀다. 정아가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기를 달래듯 볼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다.

“하느님은 참 괴상한 방식으로 공평해. 사랑이 있는 쪽에선 사람을 빼앗고 사람이 있는 쪽에서는 사랑을 배았아 가고.”

웃음기가 어린 어조였다. 그러나 마땅히 사랑해야 할 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그녀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정아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나는 그녀의 체온에서 깊은 위안을 느꼈다. 마음을 괴롭히던 스산한 슬픔도 차차 가라앉았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머니의 결혼과 규환의 부상과 느닷없이 시작된 여행, 이 도식의 어느 지점에 정아가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어쩌다 내게 마음을 열어 상처를 보여 주고, 품을 빌려 주고 위로와 연민을 보내 주는지. 그리고 원했다. 그녀에게도 내 체온이 위안이 돼 주기를. 358-359

우리의 여행은 거기서 끝났다. 이후 단짝이 되어 행복하게 지지고 볶았다, 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았다. 또한, 신은 - 정아의 말마따나 - 괴상한 방식으로 공평했다.

Y읍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다음에 보자는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375

할아버지, 우리 고래를 봤어요. 진짜 고래요. 얼마나 근사했는지 몰라요. 할아버지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다시는 할아버지와 만나지 못했다. 국립 은애 정신 병원을 탈출한 위험인물 박앙수를 체포했다는 뉴스도 듣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온전한 자유를 향해 탈출했을 거라 생각하려 애썼다. 376

준호야. 우리는 다시 못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날 기억해 줄래? 네 아빠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끔 나를 생각해 줄래? 그러면 나, 기죽지 않을 것 같아.

정아는 어디로 가는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나는 정아가 언니에게 갔으리라, 믿었다. 언니가 두 사람을 받아들였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믿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382

III. 내가 저자라면

내용 보기 -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준호와 규환이는 단짝 친구다. 규환이의 형은 모대학교 학생회장으로 시국사건에 연류되어 도피중이다. 규환이는 형이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는 자금을 전달할 계획은 준호와 이야기한다. 그러던 중 규환이가 사고를 당해 둘은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규환이는 병원 침대에 서 준호에게 자신의 형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설명한다.

규환이가 이야기 한 대로 양조장 트럭에 올라타지만 이 트럭에는 사연 가득한 승주, 정아, 할아버지 그리고 루스벨트라는 이름의 개가 함께 하게 된다. 준호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탈출한 사람들과 개다.

승주는 양조장 주인 아들로 절에서 탈출했다. 정아는 폭력적이고 술주정이 심한 아버지를 피해 집을 나왔다. 할아버지는 정신요양소에서 탈출한 살인 누명을 쓴 사람이다. 사람 세 명에 추가로 합승한 루스벨트는 정아를 감시하는 개였다.

양조장 트럭에 동승 한 준호, 정아, 승주, 할아버지, 루스벨트. 사람 네 명과 개 한 마리가 겪는 아주 특별한 모험기가 펼쳐진다.

준호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는 그런 상태다. 문학을 좋아하는 준호는 마음은 여리지만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철든 아이로 작가는 그리고 있다. 작가의 문체로 보아 남자이지만 여성스런 감수성이 풍부한 주인공이다. 아마도 작가의 감정 이입이 가장 두드러지게 이 인물에 투영된 것 같다. 같은 반이었지만 별로 친하지 않았던 승주와 서로 대립한다.

승주는 부잣집 외동아들로 경제적으로는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그러나 승주에게는 남에게 이야기 못할 고민이 있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승주 어머니의 판단에 절에 맞겨져 죽기보다도 싫은 경험을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 승주는 절을 탈출하게 된다.

절 옆에 정신병자로 판명된 사람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 있다. 그 곳은 할아버지가 탈출한 장소다. 할아버지 이름은 박앙수. 어렵사리 얻어 하늘이 내려준 자식이라고 생각한 딸을 80년 광주에서 잃었다. 군인이 쏜 총에 맞아 병원에서 과출혈로 죽어간 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을 살아온 할아버지다. 저자는 할아버지를 통해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을 서로 이해하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돕는 인생 선배 역할로 등장시켰다.

정아의 아버지는 매우 폭력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폭력남편에 의해 자신의 삶을 잃은 불행한 여인으로 잠시 그려지며 그 불행은 극복되지 못했다. 정아는 학교에서 매우 총명한 아이였다. 그렇지만 이런 가정환경 때문인지 그녀는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했고, 외톨이로 지냈다. 사나운 아이였다. 자신의 말하기 싫은 환경을 외부로 들어내기 싫었고, 남들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준호와의 대화에서 정아는 겪어보지 않고 다른 이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루스벨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풀어내기 어려운 문제들을 이입 시킨 매개체로 보여 진다. 삶에 환경이라는 것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사나운 개지만 루스벨트는 이들 무리 속에서 서서히 길들여 졌다.

시간 흐름에 따라 바뀌는 등장인물들도 다양하다. 트럭운전사, 역무원 직원, 형사, 규환이 형, 보건소장 등등........

준호의 목표는 규환이의 형을 만나는 것이었다. 준호에게 형은 존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형을 만난 규환이는 형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세상은 니가 생각하는 데로 그렇게 가지만은 않는 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린 주인공들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배려일까? 어쨌든 형에 대한 묘사는 준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내가 저자라면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감칠맛 나는 대화와 인물과 상황묘사가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비정상적인 삶에서 탈출하려는 여러 유형의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장소설이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지 적절하게 그리고 있다. 다양한 삶의 자라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는 점은 독자로 하여금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사회적인 사건에 대한 인식을 다루려하기 보다 등장인물의 내면에 있는 아픔을 끄집어 내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에 힘을 쏟은 점은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정답을 이야기 해주려 애쓰는 그런 책이 아니어서 좋다. 사람들 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들 답게 그린 작가의 솜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아쉽다기 보다 좀 의아스러운 점은 규환이 형에 대한 케릭터다. 준호와 규환이가 그토록 선망하고 존경해온 형의 모습을 너무 비중 없이 다룬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것이 작가가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 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하는 것과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것의 차이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정아가 준호에게 쏘아붙인 말이 생각나 다시 옮겨 본다.

"조심해서 덜 물면 미친개가 아냐. 그냥 개지. 제정신이 아니라서 얘기가 안 되는 건 미친개가 아니야. 제정신인데 얘기가 안 되는 게 미친개야. 물겠구나, 할 때 물면 미친개가 아냐. 예상도 못할 시점에서 기발한 방식으로 물어뜯는 게 미친개야. 한번 이빨 박으면 피맛을 보기 전엔 빼지 않는 게 미친개야.“

정아는 맘먹고 시작한 것 같았다. 따발총을 난사하듯 다다다다 쏘아붙였다.

“너, 그런 미친개를 아빠로 가져봤어? 이빨 자국, 담뱃불 자군, 허리띠 자국, 목 졸린 자국, 그런 거 때문에 학교 못 가 봤어? 살겠다고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내달리고 남의 집 담장 훌떡훌떡 넘어 본 적 있어? 머리채 잡혀 끌려 다니느라 가르마 옆이 텅 비어 봤어? 맞고 살다 반편이가 된 엄마 붙들고, 나를 낳은 엄마가 증오스럽다고 퍼부어 본 적 있느냔 말이야!”

아무려니, 했다. 정아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다 믿기지도 않았다. 걸핏하면 얻어맞고 도망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친아버지가 그 정도로 악랄할까 싶었다.

“아니지? 꿈에서도 안 당해 봤지? 내 말 믿기지도 않지? 그럼 그런 충고 하지마. 그건 귀하게 자란 부잣집 외아들이 날마다 그러고 사는 개장수 딸한테 할 말이 아냐. 세상에는 자기가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 있는 법이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게 혜택 받은 자의 예의야. 알아들어, 김준호?”

나는 선생님에게 야단맞는 국민학생처럼 두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한순간에 정아와 짝이었던 이 년 전 봄말로 돌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말해 줄게. 내게 맞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딱 하나뿐이야. 맞장 뜰 힘이 없어 맞아 줄 수밖에 없다는 거. 내가 남자였다면, 아니 덩치가 조금만 컸어도, 그 인간은 벌써 내 손에 죽었어.” 11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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