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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일 20시 16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일본 최고의 소설가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는 하루키는 특이하고 다양한 이력을 지닌 작가다. 1949년 일본 교토에서 출생한 그는 중학교 때는 러시아문학과 재즈에 빠져들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국문학에 열중했다. 1968년 와세다대학교에 입학, 문학부 연극과를 전공했다. 60년대 전공투 세대로 격렬한 학원분쟁을 직접 겪었다. 1971년 학생의 신분으로 결혼한 뒤 1974년에는 재즈 다방을 열어 장사를 시작한다. 대학을 7년간 다닌 그는 ‘미국영화에 있어서의 여행의 사상’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졸업을 했다. 재즈 다방을 하던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했으며 이 작품으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책에서도 밝혔지만 그는 깨달음을 얻듯이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야구장에서 야구경기를 보던 중 시원스럽게 날아가던 타구를 보던 순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가가 된 하루키는 데뷔작부터 시선을 모았고 지금은 각국에 작품이 번역되어 소개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소설뿐만 아니라 번역, 에세이, 평론, 여행기 등 다양한 집필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루키가 일본 문단에 커다란 획을 그은 것은 1987년에 발표한 작품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이다.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쓴 이 소설은 젊은 세대들의 상실과 재생을 애절하고 담담하게 그려 내어 일본에서 6백만부라는 판매 기록을 세웠다. 그의 작품 중 ‘양을 둘러싼 모험’은 노마문예신인상을 수상했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받았다. 1997년에는 동경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를 취재한 특이한 르포집을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든 작품을 일인칭 시점으로 쓰고 그 주인공은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어린시절 하루키의 영향을 받고 자란 ‘하루키 칠드런’ 작가들도 있어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루키 칠드런’들은 하루키의 원작소설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변형하거나 재창조한 리믹스 소설로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루키의 작품은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판되었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전집까지 발행되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내가 느끼고 있는 것, 생각하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그대로 꺼내 솔직하게 나 나름의 문장으로 써보자. 아무튼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겠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27]

나와 같은 나이에 접어든 사람이 새삼스럽게 어떤 것을 쓴다는 것이 다소 어리석은 일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사실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혼자 있는 것을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다. 매일 1시간이나 2시간,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혼자 달리고 있어도, 4시간이나 5시간을 혼자 책상에 앉아 묵묵히 글을 쓰고 있어도 별로 고통스럽다거나 지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은 젊었을 때부터 한결같이 내 안에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하기보다는 혼자서 말없이 책을 읽거나, 집중해서 음악을 듣는 쪽을 좋아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었다. [34]

나는 지금 50대 후반이다. 21세기라는 것이 실제로 다가와서, 내가 정말로 50대를 맞이하게 될 줄은 젊었을 때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언젠가 21세기가 오고,(아무런 일이 없다면) 그땐 내가 50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지만, 젊었을 때의 나에게 있어 50대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은, “사후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을 정도로 곤란한 일이었다. 믹 재거는 젊었을 때 “마흔다섯 살이 되어 <새티스팩션satisfaction>을 부르고 있을 정도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60세를 넘긴 현재도 <새티스팩션satisfaction>을 계속 부르고 있다. 그런 것을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웃지 못한다. 젊은 날의 믹 재거는 45세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젊은 날의 나에게도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에게 믹 재거를 비웃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비웃을 수 없다. 나는 다행히 젊고 유명한 록 싱어는 아니었다. 내가 그 당시 아무리 어리석은 말을 했다고 해도,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인용당할 리도 만무하다. 그건 그저 그뿐인 일이 아닐까?
그리고 현재, 나는 그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 속에 몸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우습기도 하다. 거기에 있는 나라는 인간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나 스스로도 잘 판단할 수 없지만, 그것은 각별히 문제 삼지 않아도 되는 일처럼 생각된다. 나에게 있어 ― 혹은 다른 누구에게 있어서도 아마 그렇겠지만 ―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인 것이다. 그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일이라면, 좀 더 분병하게 여러 가지 일을 따져볼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치부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지금 나로서는 자질구레한 판단 같은 것은 뒤로 미루고, 거기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우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하늘이나 구름이나 강을 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우스갯거리가 예외 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37]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직업적인 영역에 있어서나, 타인과 우열을 겨루고 승패를 다투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세계는 성립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39]

하나의 풍경 속에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느끼며, 타인과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나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40]

레이스의 기록을 단축시키지 못한다 해도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달리면서 문득 한다. 나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었고, 시간은 정해진 만큼의 몫을 받아간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인 것이다. 강이 먼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말하자면 자연 광경의 일부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별로 유쾌한 작업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결과로서 찾게 되는 것은, 그다지 기뻐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까지의 인생을 나 나름대로 ―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대충대충 즐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43]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특별히 경영의 재능이 있을 거라고는 나 역시도 생각하지 않는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길이 없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50]

소설을 쓰자고 생각을 하게 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낼 수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였다. [52]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조용히 춤추듯 내려왔는데,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53]

나로서는 작품이 햇빛을 보게 될지 못 보게 될지 하는 것보다, 그걸 다 써낸 일 자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54]

전력을 다해서 매달리고, 그래도 잘 되지 않으면 단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중간하게 하다가 실패한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이다. [58]

여하튼 나중이 없으니까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부어 글을 썼다. 있지도 않은 힘까지 총동원했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58]

담배를 끊는 것은 이전 생활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61]

선두 주자가 될 필요는 없다.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고 그것으로 보통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부족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67]

팽이를 손에 쥐고 부지런히 암반을 깨고 구멍을 깊이 뚫지 않으면 창작의 수원에 도달할 수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몸을 혹사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일일이 새롭게 깊은 구멍을 파지 않으면 안 된다. [72]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다’라는 진리이다. [75]

체념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의 원칙이며, 그 효율의 좋고 나쁨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닌 것이다. [83]

사람은 누구든 영원히 이기기만 할 수 없다.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서 추월 차선만을 계속해서 달려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똑같은 실패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의 실패에서 뭔가를 배워서 다음 기회에 그 교훈을 살리고 싶다. 적어도 그러한 생활 방식을 계속하는 것이 능력적으로 허용되는 동안은 그렇게 하고 싶다. [88]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103]

소설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재능이다. 문학적 재능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소설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120]

재능 다음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질문 받는다면 주저 없이 집중력을 꼽는다. 자신이 지닌 한정된 양의 재능을 필요한 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 붓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힘을 유효하게 쓰면 재능의 부족이나 쏠림 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121]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일주일 동안 계속하니 피로에 지쳐버렸다고 해서는 긴 작품을 쓸 수 없다. 반년이나 1년이나 2년간 매일의 집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소설가에게는 ―  적어도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 요구된다. [121]

장편소설을 쓴다고 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는 육체노동이라고 나는 인식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는 두뇌노동이다. 그러나 한 권의 정리된 책을 완성하는 일은 오히려 육체노동에 가깝다. [123]

한편 재능이 별로 풍부하지 않다 ― 고 할까, 평범한 작가들은 젊었을 때부터 자기 스스로 어떻게든 근력을 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훈련에 의해서 집중력을 기르고 지속력을 증진시켜 간다. 그래서 그와 같은 자질을 (어느 정도까지) 재능의 ‘대용품’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견뎌 나가’는 사이에 자신 속에 감춰져 있던 진짜 재능과 만나기도 한다. [125]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126]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128]

얼굴이나 재능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어도 달리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이를 더해 가면 그런 안배가 자연스럽게 가능해지게 된다. 냉장고를 열어 거기에 남아 있는 것만 써서 적당한 (그리고 어느 정도는 맛있는) 요리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사과와 양파와 치즈와 매실 장아찌밖에 없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있는 것만으로 참는다. 뭔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되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다. [132]

그에 비하면 나는,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들은 아직 그런 아픔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지금부터 굳이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들의 유유히 흔들리는 자랑스러운 포니테일과 호리호리한 호전적인 다리를 쳐다보면서 나는 하릴없이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페이스를 지키면서 느긋하게 강변도로를 달린다.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그렇다.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당시의 내 다리는 지금 그녀들의 다리만큼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녀들은 어쨌든 천하의 하버드 대학의 반짝반짝 빛나는 새내기들이니까. [145]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적인 소설가가 된 이래 지금까지, 내가 몸소 적실하게 느껴온 것이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은 결코 대극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어떤 경유에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150]

나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것은 험준한 산의 암벽을 기어오르고, 길고 격렬한 격투 끝에 정상에 오르는 작업이다. 자신에게 이기든지, 아니면 지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같은 내적인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나는 언제나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언젠가 사람은 패배한다. 육체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쇠잔해간다. 빠르건 늦건 패퇴하고 소멸한다. 육체가 시들면 정신도 갈 곳을 잃고 만다. 그와 같은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을 ― 결국 내 활력이 독소에 패배해서 뒤처지고 마는 지점을 ―   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소설가로서 내가 목표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지금의 나에게는 ‘쇠퇴해 있을’ 겨를이 없다. 그러니만큼 “저런 자는 예술가가 아니다”라고 누가 말한다 해도 나는 계속 달린다. [152]

기록은 문제가 아니다. 지금에 와서는 노력을 해본들, 아마도 젊은 날과 똑같이 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별로 유쾌한 일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나에게 역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에도 역할이 있다. 그리고 시간은 나 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충실하게, 훨씬 정직하게 그 직무를 다하고 있다. 아무튼 시간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을 때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전진해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요절을 면한 사람에게는 그 특전으로서 확실하게 늙어간다고 하는 고마운 권리가 주어진다. 육체의 감퇴라고 하는 영예가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가게 될 것이다. [186]

그렇다, 마라톤 레이스는 즐기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즐겁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몇 만 명의 사람들이 42킬로미터를 달린단 말인가. [203]

모든 노력은 정당하게 대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라는 것을 새삼 강조할 마음은 물론 아니지만, 만약 하늘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징표를 조금이라도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 그 정도의 친절함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224]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의 편린 같은 것이 보일까?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태평양 상공에 덩그러니 떠 있는 무심한 여름 구름이 보일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구름은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이 보일까? 아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 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 ― 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 ―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낡은 보스턴백처럼 그것을 둘러메고, 나는 긴 여정을 걸어온 것이다. 좋아서 짊어지고 온 것은 아니다. 내용에 비해 너무 무겁고, 겉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데군데 터진 곳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짊어지고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애착도 간다. 물론. [229]

가령 몇 살이 되어도 살아 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발가벗고 거울 앞에 아무리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 있는다 해도 인간의 속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다. [246]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오늘의 레이스를 내가 진심으로 즐겼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기록은 아니다. 자잘한 실패도 많이 겪었다. 그렇지만 나 나름대로 전력을 다했고, 그 노력의 보상 같은 것이 아직도 몸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점이 이전의 레이스보다 개선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 역시 중요한 점이다. 트라이애슬론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의 경기가 조합되어 있어서 각각의 연결점의 처리가 어려운 만큼 경험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경험에 따라 신체 능력의 차이를 극복해가는 것이 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경험에서 배워가는 것이 트라이애슬론이라는 경기의 기쁨이며 재미인 것이다.
만약 심신의 단련에 필요한 고통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일부러 트라이애슬론이나 풀 마라톤이라고 하는, 노력과 시간이 결리는 스포츠에 도전할 것인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잘 된다고 하는 가정이지만)다다를 수도 있다. [255]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256]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 ― 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 씩 하나 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그렇다, 아마도 이쪽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258]


● 내가 저자라면

글쓰기와 달리기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주제가 이 책을 이끌어가는 주제다. 아, 한 가지가 더 있다. 삶이라는 주제다. 글쓰기 달리기 그리고 삶, 그렇게 세 가지의 주제는 들쑥날쑥 또는 얽히고설키면서 책을 만들어간다. 부조화스러워 보이지만 세 가지 주제는 뜻밖에 썩 잘 어울린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의 가장 유명한 작가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글쓰기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그가 불쑥 들고 나온 것은 달리기였다. 달리기를 말하며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래서 제목도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작가인 그에게 달리기는 무엇일까. 달리기가 무엇이기에 그는 달리기라는 글감을 들고 나와 삶을 말하는 것일까. 재즈카페를 운영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던 그는 전업작가로 나선다. 전업작가가 된 그에게 남은 것은 하루 60개비의 담배와 늘어난 체중 그리고 점점 떨어지는 체력이었다. 긴 인생을 소설가로 살아가고자 했던 그가 체력을 지키면서 체중을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찾은 방법이 달리기였다. 소설쓰기는 육체노동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좋은 선택이었다. 이제 마라톤 풀코스를 25회나 완주한 하루키에게 달리기는 삶이자 철학이다. 그런 그가 달리기를 주제로 30년의 작가생활과 60년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귀가 기울여진다.

하루키는 아주 솔직하게 자신에 대해서, 글쓰기에 대해서,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며, 자신이 50이라는 나이를 맞이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인간적 고백을 한다. 그런가 하면 ‘나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었고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며 강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과 같다’는 관조의 시선을 보여준다. ‘사람은 누구든 영원히 이기기만 할 수 없다. 그러나 똑같은 실패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은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은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글쓰기에 있어서 그는 전력을 다해 매달린다. 그 이유는 두고두고 후회가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글쓰기에서 선두주자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쓰고 싶은 것을 쓰면서 그것으로 보통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소설을 쓰는 것은 험준한 산의 암벽을 기어오르는 것이고 길고 격렬한 격투 끝에 정상에 오르는 작업이다. 자신에게 이기든지 아니면 지든지 둘 중의 하나인 작업이다.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괭이를 쥐고 부지런히 암반을 깨고 구멍을 깊이 뚫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창작의 수원지에 도달할 수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몸을 혹사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일일이 새롭고 깊은 구명을 파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하루키가 말하는 글쓰기이다. 그러한 소설쓰기의 많은 것을 그는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웠다고 말한다.

하루키는 묘비명을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달리기에 대한 그의 애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각이며 문구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로 끝나는 마지막 쪽까지 책은 물 흐르듯 읽힌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글쓰기의 시작에서 글쓰기의 고통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아우르는 내용은 독자를 쉽게 몰입시킨다. 하루키의 독특한 글쓰기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진솔하고 담백한 목소리가 또한 그렇다. 글쓰기와 삶이라는 주제를 끌어가는 달리기라는 주제는 그러한 힘을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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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9.03.04 10:49:14 *.251.224.209
하루키의 문장과 '창님'의 -- 하하, 당최 '창씨'라고 해도 이상하고, '창님'도 그렇고^^ -
문장이 전혀 끊기지 않고 한 호흡으로 읽히네요.
하루키와 궁합이 잘 맞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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